이사야 39:1-6/신앙적 경솔함
신앙적 경솔함 2007년 8월 15일 본문 말씀: 이사야 39:1-6 (사 39:1)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 (사 39:2) 『히스기야가 사자들로 말미암아 기뻐하여 그들에게 보물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에 있는 것을 다 보여주었으니 히스기야가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은지라』 (사 39:3) 『이에 선지자 이사야가 히스기야 왕에게 나아와 묻되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였으며 어디서 왕에게 왔나이까 히스기야가 이르되 그들이 원방 곧 바벨론에서 내게 왔나이다 하니라』 (사 39:4) 『이사야가 이르되 그들이 왕의 궁전에서 무엇을 보았나이까 하니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들이 내 궁전에 있는 것을 다 보았나이다 내 창고에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아니한 보물이 하나도 없나이다 하니라』 (사 39:5)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왕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사 39:6) 『보라 날이 이르리니 네 집에서 있는 모든 소유와 네 조상들이 오늘까지 쌓아 둔 것이 모두 바벨론으로 옮긴 바 되고 남을 것이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람들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되는 하나님이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과 모든 것들이 다 나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기대 심리를 못버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중요한 것이 되고 진리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 것만이 진리로 둔갑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 점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은 외부에서 날아오는 모든 것이 자기에게 닿게 되면 마치 원래부터 내 것이 되어야 마땅한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것에서 ‘내 것’으로 주저없이 변환시키고 마는 겁니다. 바로 이런 특성이 인간의 죄성의 발로입니다. 죄라는 것은 자아가 죽지 않는 상태에서 튀어나오는 모든 것입니다. 내가 그 어떤 고상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일을 벌린다 할지라도 내가 죽지 않고 내가 부인되지 않고 일어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빙자한 죄악된 일입니다. 죄냐 아니냐 하는 것은 나를 부인하느냐 여부에 달린 것입니다. 교인이 소위 예수 믿고 난 뒤에 남들에게 하나님께 받은 놀라운 기적의 축복을 간증으로 하여 증거해도 그 양태가 자신이 부인인 상태가 아니라면 전에 자신이 그토록 부러워하고 갖고 싶어 환장한 세상 것을 그대로 과시하게 될 뿐입니다. 자아가 부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불신자와 만나는 히스기야와 그 히스기야를 만나는 이사야의 신앙 태도 차이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습니다. 우선 불신자를 접대하는 히스기야의 태도를 봅시다. 히스기야는 바벨론 제국의 사자를 귀하게 영접합니다. 특히 그 바벨론 제국의 사신이 무슨 연유로 자신을 친히 방문했는지를 알고 히스기야는 감격스러워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기적으로 죽을 병에서 구사일생으로 자신이 되살아나왔다는 소문이 그곳 바벨론까지 퍼졌다는 사실에 히스기야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는 멋진 자아가 놓여 있습니다. 자아가 곧 살아있는 기적체라고 자부하고 있는 겁니다. 보이지 않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이제는 보이는 구현체로서 자아를 선택했다는 점에 히스기야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어떤 힘을 느낍니다. 그 힘으로 큰 제국인 바벨론의 기세를 견제하려고 시도합니다. 쉽게 말해서 “날 무시하지 말라. 함부로 깔보지 말라, 우리 나라와 나를 시시하게 간주하지 말라”는 무언의 시위를 히스기야는 시도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기적 그 자체인 자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대변자로 손색이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 성도는 주의할게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우리 자신이 편으로 끌어당겨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우리 성도에게 필요한 것은 진솔한 하나님의 진리, 그것 뿐입니다. 그 진리를 얼마나 우리를 위하여 유용하게 이용해 먹을까를 고려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여기면 안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위해서만 일하시는 분임을 잊어서는 아니됩니다. 따라서 과연 우리가 성도라면 오로지 하나님의 예리한 진리 그 자체만으로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의 운명이나 팔자를 거기에다 결부시키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나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위한 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옛성품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불신자가 원하는 것과 평소에 자신이 갖고 싶어 환장한 것도 동일한 물품인 것으로 은연 중에 드러내고 만 것입니다. 히스기야를 바벨론 사신에게 보여준 것은 바벨론 사신이나 히스기야는 공통적으로 좋아 할만한 내용물들이었습니다. 진정 하스기야가 제대로 죽음을 통과했다면 죽음이 주는 의미를 알았어야 했습니다. 죽음의 의미란 인간 자아의 무의미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뭘 주셔도 곧장 그것을 자아의 것으로 전환시켜버립니다. 자아가 죽지 않는 한 그것들이 단지 자신의 것이라는 이유만으로 귀하게 여기는 버릇을 보여주게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진리를 말하기 위해 주신 것을 마치 자신의 자아가 당연히 유지되어야 하는 이유를 보여주는 것인 것처럼 왜곡되게 사용하고 그것을 확장하려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히스기야의 주장은 이러합니다. “나 하나님께 복받아서 죽을 목숨을 건졌고, 이 창고에 있는 모든 보물로 그런 은총의 차원에서 얻었던 것이라”고 바벨론 사자에게 자랑하고 있는 겁니다. 한국 교회에서 실시하는 영업 전략이 바로 이런 방식입니다. 너 나 할 것없이 탐내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주신다는 점을 부각하고 모토로 내세워 고객 확보에 나서는 겁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성도를 통해서 전하고 싶은 내용은, ‘삶과 죽음에 대해서 우리 인간이 신경쓸 문제가 아니다’라는 점입니다. 즉 ‘자아’를 내가 붙잡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성도는 외부 세계에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자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으로부터 귀한 보물을 획득하고 유지해야 해야 제대로 대접받는 자아상이라는 겁니다. 사실 이런 사고방식은 불신자인 바벨론 사신에게도 있고 그 누구에게도 다 들어있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로마서 12:2에 보면,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는 겁니다. 이 세대가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한다면 그것은 ‘마음의 변화’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관심사는 오로지 하나님의 진리 뿐입니다. 유다 나라 왕인 히스기야가 진정 마음의 변화를 받아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옛 세대 사람들이나 좋아할 보물들을 몽땅 그것에만 눈독이 들인 불신 제국에게로 옮겨가도 무방하다는 겁니다. 참으로 성도에게 중요한 것은 ‘생명과 죽음의 힘은 우리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는 점입니다. 이 진리로 다스림에 대해서 유다 나라는 즐거워해야 합니다. 이사야는 히스기야를 만나는 이 점을 분명히 합니다. 이처럼 선지자는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전달자, 그 자체로서 족한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을 담으려고 하지 말고 이미 하나님 진리로 우리가 이끌림을 받고 있음을 깨닫고 날마다 자기 위주의 삶을 포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