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7:14-20/히스기야의 기도
히스기야의 기도 2007년 7월 11월 본문 말씀: 이사야 37:14-20 (사 37:14) 『히스기야가 그 사자들의 손에서 글을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 놓고』 (사 37:15)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사 37:16)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사 37:17)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뜨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람을 보내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 (사 37:18) 『여호와여 앗수르 왕들이 과연 열국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였고』 (사 37:19)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나 이들은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뿐이요 나무와 돌이라 그러므로 멸망을 당하였나이다』 (사 37:20)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이 주 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하니라』 사람이 본격적으로 기도를 하는 경우는 참 드뭅니다. 본인에게 엄청난 위기가 몰려와서 달리 대안을 찾을 길 없을 때, 하나님께 살려달라는 식으로 기도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평소에 습관적으로 하는 기도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에 관해서’ 기도하는 것이 됩니다. 즉 하나님 앞에 자신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바를 늘어놓는 식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전혀 자기 생각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오로지 하나님이 살아계심만으로 너무 좋아서 다른 생각을 할 엄두를 내지 않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교도소에 갇혔다고 칩시다. 그리고 사회적인 위산과 체면을 사정없이 허물어지고 가정에 풍지박산이 된 지경이라고 칩시다. 그런데 교도소 철장 안에서 그는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온 몸으로 만끽하게 되면 그는 그 순간에 그의 처지를 한탄하거나 슬퍼할 겨를이 없습니다. 즉 자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극도의 행복 속에 쌓이게 됩니다. 이처럼 행복이란 아예 자기 생각이 날 필요조차 없을 때 발생합니다. 사람이 자기 생각을 하게 되면 자연 슬픔도 같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히스기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엄연히 살아계심부터 먼저 언급합니다. 사실은 이것으로 족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면 모든 것은 살아계신 그분의 문제이지 우리들이 고민할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해서 기도하게 되면 결국 도로 나의 문제로 와버립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이용해 먹자는 수작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루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법을 알려주십니다. ‘하나님에 관해서’가 아닙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기 능력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지간한 일은 본인선에서 처리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즉 자신이 할 수 있는데까지 자기 힘으로 하고, 그 다음의 난제만을 선별하여 하나님의 덕을 보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구원의 길이 아니라 본인이 이미 정해놓은 인생길에 하나님을 억지로 데려가려는 조치에 불과합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을 모르는가 하면, 지금 성도는 전쟁중이지 결코 누가누가 하나님을 많이들 이용해 먹느냐 경쟁 중에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즉 사단은 그 어떤 경우에서라도 복음을 증거되지 못하게 하면 성공인 것입니다. 복음이란 순전히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승리를 따내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력으로 승리를 하려고 시도하는 버릇을 멈추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런 자기 백성의 버릇을 그냥 두고 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사태를 계속 발생시키십니다. 즉 하나님은 성도가 매일같이 탈출해야만 하는 상황을 늘 만드시는 방식으로 구원하십니다. 성도가 빠져나와야 하는 영역이란, 하나님 계심 만으로 행복하지 못하고 자기로 인하여 자기가 행복해하는 그런 영역을 두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히스기야는 고민이 되어 산헤립 적군이 보내온 편지를 펼쳐놓고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야기시켰다는 것을 히스기야는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는 6-7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들은 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영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소문을 듣고 그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의 고국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대범한 예언입니다. 그만큼 이사야 선지자는 인간 위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예언 위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한맺힘을 풀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자신의 약속과 말씀과 예언대로만 일하십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꾸만 하나님을 이용할 생각만 합니다. 고생스럽게 보내는 자기 목숨보다 내세에 더 나은 축복된 생명을 얻고자 교회에 나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입니다. 즉 목숨보다 구원의 은혜가 더 소중한 것은 알아도 그 구원의 은혜보다 진리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진리가 자신의 구원보다 더 소중하다면, 계속해서 진리에 대해서 관심사를 보이는 것이 지당합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자꾸만 자기 식의 행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하심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자기 백성을 고난에 몰아넣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난이란 사업체가 망가진다든지 가정에 우환이 생기는 것이나 신체에 난치병이 드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구원을 방해하는 방해자가 나의 욕심인 것을 스스로 충분히 인식케 하는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사단과의 영적 전쟁에서 자기 백성을 통해서 오로지 하나님의 능력만을 증거케 하려고 하는데, 자기 백성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취지보다 자신이 평소에 한맺힘과 마음에 담아둔 소망을 달성하기 위하여 요령부려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조정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이런 행위들을 부질없게 만들고 무능력하게 만드는 고난들을 허락하시는 겁니다. 이것은 실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 안에 내포되어 있는 겁니다. 빌립보서 1:29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살아계심 그 자체로 계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냥 무심코 계시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자신의 약속과 예언과 말씀 만큼은 빈틈없이 수행하고 계시면서 계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도가 구원받는 것은 자신의 조심스러움의 결과로서 구원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이런 점까지 ‘하나님 이용하기’에 한 방편임을 깨닫는 것이 영적 전쟁에서의 백성의 도리입니다. 우리는 지금 개인적인 구원을 위해서 존재하는 자가 아닙니다. 영적 전쟁 중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임받고 있는 겁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사단을 이기고 우리 자신의 자기 위주 사고 방식에서 건져낼 분임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오직 하나님 계심과 일하심 만으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