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1:1-3/사람과 육체
사람과 육체 2007년 4월 18일 본문 말씀: 이사야 31:1-3 (사 31:1) 『도움을 구하러 애굽으로 내려가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은 말을 의뢰하며 병거의 많음과 마병의 심히 강함을 의지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앙모치 아니하며 여호와를 구하지 아니하거니와』 (사 31:2) 『여호와께서도 지혜로우신즉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 그 말을 변치 아니하시고 일어나사 악행하는 자의 집을 치시며 행악을 돕는 자를 치시리니』 (사 31:3) 『애굽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며 그 말들은 육체요 영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 손을 드시면 돕는 자도 넘어지며 도움을 받는 자도 엎드러져서 다 함께 멸망하리라』 성경을 대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리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읽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창세기부터 읽어내려가면서 뭔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취지가 머리 속에 정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감잡습니다. 물론 계속 진도를 더해가면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성경 읽기를 마칠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창세기 초반부터 꽉 막힌 하나님의 취지가 풀리지 않은채 건성으로 읽어내려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내용을 쭉 밀어붙이는 하나님의 강한 의도가 마음에 자리잡지 못하면 아무리 성경을 완독해도 마음이 편치 못합니다. 창세기 의도가 어김없이 오늘 본문 이사야의 의도와 일치됩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을 대표하는 아담이 등장합니다. 따라서 아담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님 앞에 있는 모든 인간들의 이야기가 되기에 자연스레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시면서 무슨 의도인지, 선악과를 동산 한가운데 보이는 곳에다 심어놓았다는 점, 그리고 그 선악과가 보기에 흉측하게 생겨 입맛이 싹 가시도록 달려 있지 않다는 점, 그리고 그 위험한 선악과에 접근에 있어 그 어떤 장애물을 설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에게 애굽에게 도움을 구하려 가지 말라고 당부하시면서 애굽 나라를 강성한 나라로 만들었다는 점과 동일한 배치입니다. 만약에 애굽 나라가 초라하고 볼 품없는 나라였다면 하나님께서 애굽 나라에 가라고해도 유다나라가 안 갈 것입니다. 애굽 나라의 입장은 아담에게 있어 꼭 선악과와 같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쉽게 현혹되고 발길을 옮길 수 밖에 없는 환경을 만들어놓고서는 그 상황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인간 속에 ‘말씀’이 담기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어느 학급에 선생님께서 학생들이 과연 자기를 사랑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무감독 시험을 실시합니다. “내가 없더라도 너희들은 남의 답안지를 보지 말라”라고 당부하고 퇴장합니다. 그리고 본인은 몰래 학생들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훔쳐 봤습니다. 감독 선생님이 없어지자 학생들이 커닝을 마구한다면 이것은 평소에 선생님의 말을 말 같지 않게 여긴다는 증거입니다. 반면에 선생님이 감독하지 않더라도 선생님이 당부한 말씀대로 순종한다면 그것은 학생들 마음속까지 선생님의 말씀이 담겼다는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에게는 인간으로서 모델이 있었습니다. 그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즉 예수님처럼 되지 아니한 자는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참된 인간이신 예수님에게도 역시 이 지상에서 살아가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움직이는 사람인지를 놓고서 시험을 받았습니다. 아담이 받았던 말씀보다 더 혹독한 환경이 주어졌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예수님을 무려 40일 동안이나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주리게 하셨습니다. 그래놓고서는 악마의 시험을 허용하사 굶주린 상태에서 이겨내기 힘든 유혹을 건지도록 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과 지시만 따랐습니다. 그야말로 말씀만이 담긴 인생을 사신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경우가 스데반 집사에게도 있었습니다. 자기 설교를 듣고서 분명 자신을 돌로 쳐죽일 것을 뻔함에도 불구하고 스데반 집사는 유대인들의 분노 앞에서도 해야 될 말을 다 전했습니다. 성령이 그와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는 살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지시에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성도란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지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성령의 인도와 지시에 준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베데스다 못가에서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을 받은 38년된 병자는, 오로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당시 사회법을 어기면서까지 자리를 들고 갔습니다. 그는 단지 이렇게 이야기할 뿐입니다. “나를 낫게 하신 그 분이 나의 자리를 들고 가라고 하셨다”는 겁니다. 즉 이 사람에게 있어 단순히 병이 나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 예수님의 지시에 따랐다는 점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처럼 주님의 지시에 따르기 위해서는 그 동안 우리 마음에 차지했던 세상적인 것이 배설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신체적 기능 가운데서 배설의 기쁨이 제일 큽니다. 즉 속에 텅텅 비는 즐거움은 곧 희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속을 텅텅 비게 하십니다. 그동안 우리는 거저 계속해0서 세상적으로 채우는데 급급했습니다. 평생을 살면서 과거의 자기 업적들을 한껏 쌓아놓고 그것을 통해서 자기 영광을 확인하는 것으로 행복을 얻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과 육체를 구분 짓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육체의 것으로 채우기 위해 육체적으로 강대국을 찾아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세상 것은 빠져야 합니다. 마치 호박죽을 끊이기 위해 호박의 속을 다 파내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뜻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말씀을 미처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실 때도 사람들은 자력으로 자신의 속에 텅텅 비어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가해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으로부터 뽑혀야 하는 세상적인 것을 도리어 인간들은 더욱 달라고 애걸복걸하다가 결국 하나님에 대해서 가해자로 변모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죄입니다. 사람이 자기 소유가 확립되면 그 때부터 복수에 나서게 되어 있습니다. 그 복수극이 바로 십자가 죽음입니다. 우리는 그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속의 것이 몽땅 비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 빈 곳에 주님의 생명이 흘러들어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적인 것으로만 채워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