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30:19-21/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
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 2007년 4월 4일 본문 말씀: 이사야 30:19-21 (사 30:19) 『시온에 거하며 예루살렘에 거하는 백성아 너는 다시 통곡하지 않을 것이라 그가 너의 부르짖는 소리를 인하여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 (사 30:20) 『주께서 너희에게 환난의 떡과 고생의 물을 주시나 네 스승은 다시 숨기지 아니하시리니 네 눈이 네 스승을 볼 것이며』 (사 30:21) 『너희가 우편으로 치우치든지 좌편으로 치우치든지 네 뒤에서 말소리가 네 귀에 들려 이르기를 이것이 정로니 너희는 이리로 행하라 할 것이며』 하나님의 자기 백성 사랑하기는 참으로 끈질깁니다. 자기 백성이 원래 노선에서 이탈하면 그냥 방치하시는 것이 아니라 기어이 다시 찾아와서 제 노선 속으로 편입되게 하십니다. 그 와중에서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시게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을 먹게 되는 사람은 차라리 복을 받은 자라고 봐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궤도에서 이탈한 것을 방치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은 자신이 정해놓은 원칙을 결코 바꾸실 의향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사람들의 요구 사항에 따라 일하시는 분이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이미 확정된 진리만을 고수하십니다. 그 진리가 바로 창세기 3:15입니다. 즉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는 서로 싸우게 되어 있고 거기서 여자의 후손이 승리하고 뱀의 후손이 패배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약속’이라는 표현으로 지속적으로 이스라엘 내부에 흐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벌리시는 모든 일의 핵심은 바로 이것 뿐입니다. 다른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한결같이 이 약속만 고수한다면, 이 약속에서 눈 돌려버리고 엉뚱한 것에 관심을 갖는 자들은 당연히 하나님이 원하는 노선에서 이탈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다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살면서 큰 통곡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실은 그들이 깔고 있는 그 ‘예루살렘’이라는 지역은 자신들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지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연관된 지역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내용도 모르는 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살면서 그 위에서 엉뚱한 곳에 마음을 두고 사니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그냥 두지 않으시고 눈에서 눈물이 흐르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전쟁에서 몰두하고 계시는데 그것도 모르고 인간들은 나름대로 눈에서 눈물나지 않을 만한 조치를 취한다고 활동해 오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이라는 은혜의 방석을 깔고 앉아서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란 오직 약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은혜받기는 좋아하면서 은혜가 창세기 3:15 약속의 연속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곡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본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을 마시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왜 좋은 말로 안 되는 겁니까? 그것은 선지자를 보내어 아무리 하나님의 본 취지를 말해봤자, 그들은 핑계대기를 “다 아는 이야기이네요”라고 말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사람은 참으로 ‘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이 동원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본 궤도로 되돌아오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본 궤도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과의 싸움을 말하는데 여기서 ‘뱀의 후손’이란 곧 악마를 뜻합니다. 즉 ‘벰의 후손’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스럽게 하나님의 원수인 뱀과 즐리고, 사귀고, 일을 함께 하기를 대단히 좋아합니다. 그것은 그만큼 악마의 유혹에 길들여져 있다고 봐야 합니다. 하나님하고는 안 친해도 악마하고는 대단히 친합니다. 그만큼 악마가 제공하는 것들에 익숙한채로 쭉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는 참으로 모든 인류들이 원하고 있는 바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악마로부터 경험한 바입니다. 이렇게 되는 예수님의 원수를 되레 하나님의 백성들은 친밀함을 드러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좋은 말로 아무리 하나님의 약속으로 되돌아오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이나 이해가 이미 악마적 선입견으로 무장된 채 내리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 하나님의 말씀의 참된 본 뜻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강제 조치를 취하십니다. 그것은 그동안 그토록 붙어지내면서 악마가 내민 유혹에 대해서 철저하게 실망과 낙심을 하는 경우를 맞이하게 합니다. 그것이 통곡이요. 환란의 떡이요 고생의 물입니다. 즉 악마가 차려놓은 푸짐한 세상적인 음식을 마다할 위인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악마로부터 철저하게 실망하는 경우를 맞이하게 되면 그 계기를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일과 자신의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었음을 통감하게 됩니다. ‘환란의 떡’이란 신명기 16:3에 보면, ‘고난의 떡’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처음으로 애굽 나라가 찢어지듯이 갈라서서 나올 때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전 백성들에게 ‘고난의 떡’을 먹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애굽 정신에 젖어살던 자들이 애굽 자체가 결별하는 마당에서, 인간들이 결심으로 곱게 헤어질 사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하나님께 매 맞기 전에 자신의 신앙적 결단으로 악마쪽에 있는 사람들이 이별한다고 해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은 이용 가치를 현저하게 떨어졌기에 취하는 태도일 뿐입니다. 만약 헤어진 인사들이 찾아와서 다시 도움을 준다고 하면 얼씨구나 하고 재결합할 공산이 큽니다. 참되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악마 쪽과 결별케 하면, 어떤 것을 경험케 하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경험케 합니다. 예수님은 유일하게 이 땅에서 악마의 적이었던 분입니다. 그 분이 이 땅에 사시면서 악마와 결별하는 경과 하나하나는 환란과 고생의 연속이었습니다. 곱게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외의 사람들, 즉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이나 평소에 예수님을 잘 대접했다고 소문난 마르다 마리아 자매까지 자신의 신앙에 위기가 찾아오는 거침없이 예수님을 원망했고 부인했습니다. 이것은 곧 그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악마의 세력과 결별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에베소서 1:7에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은혜’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과연 평소에 사람들이 이 은혜를 얼마나 생각합니까? 세상에 나가서 생계 활동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중심되는 활동 원리인 창세기 3:15는 다 잊어버리고 될 수 있는대로 이용할 가치가 있는 자들에게 굽신거리기에 여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서 1:7에 나오는 그 ‘은혜’를 생각할 틈이 없는 겁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이런 식으로 살도록 놔두실까요? 아닙니다. 여기서 ‘환란의 떡과 고생의 물’이 동원될 차례입니다. 성도로 하여금 자신이 의지했던 악마의 힘에 크게 낭패를 당하고 실망을 하고 낙담하는 경우를 만나게 하십니다. 즉 하나님이 본 궤도가 아닌 곳에서 하나님은 강제로 본 궤도 속으로 집어넣으시는 겁니다. 그 와중에서 성도는 잠간이나마 세상에 대해서 진절머리를 내게 되고 동시에 그 죄에서 피로서 구원해주신 하나님의 본래의 작업의 은혜를 감사하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좋아라 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께서 관심두는 일이 아님을 알게 해주시고, 하나님은 오직 복음만 생각함을 잊지 않게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