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9:17-21/은혜로운 보상
은혜로운 보상 2007년 3월 7일 본문 말씀: 이사야 29:17-21 (사 29:17) 『미구에 레바논이 기름진 밭으로 변하지 않겠으며 기름진 밭이 삼림으로 여김이 되지 않겠느냐』 (사 29:18) 『그 날에 귀머거리가 책의 말을 들을 것이며 어둡고 캄캄한 데서 소경의 눈이 볼 것이며』 (사 29:19) 『겸손한 자가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하겠고 사람 중 빈핍한 자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를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사 29:20) 『이는 강포한 자가 소멸되었으며 경만한 자가 그쳤으며 죄악의 기회를 엿보던 자가 다 끊어졌음이라』 (사 29:21) 『그들은 송사에 사람에게 죄를 입히며 성문에서 판단하는 자를 올무로 잡듯하며 헛된 일로 의인을 억울케 하느니라』 하나님의 일은 시작과 중간과 끝까지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성사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철저하게 인간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가치가 하나님의 일에 섞여 들어오는 것은 일체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신 적이 없습니다. 인간들은 주장합니다. 일단 자신이 할 도리는 최선을 다하여 하되, 그 미진한 분량만큼은 나머지를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으로 보완이 되어 하나님의 일이 성사된다고 말입니다. 인간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이유는, 어떻게든 자신의 가치가 긍정적으로 평가받기를 소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가치가 하늘로부터도 인정받을 때만, 인간들에 대한 격려와 독려를 마음껏 요구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인간들이 소위 ‘할 수 있다’를 피해가는 식으로 일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소경의 눈 뜨기와 귀머리거리의 듣기와 겸손한 자가 오로지 하나님으로만 즐거워하는 일입니다. 여기에 비해서 인간의 가능성과 힘에 의미를 두려는 자들은 결국 실적과 업적을 놓고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고 군림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자들을 두고 오늘 본문에서는, ‘교만한 자’ ‘죄악된 자’, ‘강포한 자들’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이들 교만한 자들이 도저히 실천해 내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일하심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이들의 죄악성을 들추어낼 수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진해서 자기를 소경된 자, 혹은 귀머거리, 혹은 낮은 지내야 하는 자가 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무슨 계획을 꾸미고 무슨 실행을 하던 결국 하나님의 일에 대해 훼방자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의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일체 인간의 능력이 침투해 들어오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일에 참여케 된 자는, 모든 일이 하나님 홀로 다 하셨다고 자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도록 처음부터 하나님은 그 사람 위에 작용하십니다. 이런 고백이 나오려면 자기 자신이 교만한 자요 강포한 자임을 자인케 하는 것과 병행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에 있어 어떤 식으로 우리의 교만이 튀어나오는 겁니까? 인간들은 미래를 소망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비록 과거에는 보잘 것 없지만 앞날에서는 더 나은 가치를 자신을 통해 내보이겠다고 장담합니다. 또한 그런 잘난 자신이 되는 것만이 인생을 추진력 있게 밀어붙이는 힘이 된다고 봅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미 어떻게 규정지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한 중대한 사건으로 인해 앞으로의 모든 인간의 질이 어떠함을 확정지어버렸습니다. 그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즉 과거에 단번에 생겨버린 그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인간이 이 땅에서 아무리 길게 인생을 산다할지라도 그것은 기껏 그 과거 사건의 의미를 길게 늘여서 알려주는 세월일 뿐입니다. 즉 인간들의 미래에 새로운 일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에 확정된 사실을 황혼녘에 가지게 되는 우리들의 긴 검은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진 그림자에 해당될 뿐입니다. 이로서 우리는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되레 과거로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미래에 우리에게 주어질 가장 생생한 일은 이미 과거에 생생하게 벌어진 그 사건 속으로 결합되는 현실일 뿐입니다. 그 사이에 우리는 우리의 욕망이 자아내는 환상과 허구로 뒤범벅이 꿈만 꾸고 있을 뿐입니다. 과연 허구적인 꿈 속에만 있고 싶습니까 아니면 생생한 현실을 원하십니까?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생생한 현실은 우리가 결국 죽는다는 겁니다. 한 줌의 재가 된다는 현실 뿐입니다. 누가 이 일을 벌리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우리 인간의 실체를 알려주시고 거기에 준해서 한 치의 선 이탈도 없으시면서 그 노선을 밟아나가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의 성취성에 대해서 이사야를 우리 앞에 설명하신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이사야 구절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친히 일방적으로 성취하실 일을 소개했습니다. 누가복음 4:17-19에 보면,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나를 보내사’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절대로 인간들이 못하는 일입니다.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구태어 예수님를 하나님께서 보내시기 않았습니다. 이로서 성령받은 자와 성령받지 못한 자가 확연히 구분됩니다. 특히 마태복음 11:3-5에 보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실감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생생하게 죽어야만 합니다. ‘죽었다’는 말은 스스로 자신을 깨울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날마다 자신이 정말 죽은 존재라는 것을 절감해야 참으로 부활의 세계가 죽음이 없는 영생의 세계가 참으로 생생한 현실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이것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람은 오로지 예수님의 일하심만으로만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무능력을 절감하면서 말입니다. 아무 것도 안한 상태에서 자신의 무능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하는 와중에서 자신의 무능력을 깨닫게 하는 것이 주님의 일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들을 어떻게 확정지어 보시는지를 분명히 인식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