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9:15-16/토기장이 비유
토기장이 비유 2007년 2월 28일 본문 말씀: 이사야 29:15-16 (사 29:15) 『화 있을진저 자기의 도모를 여호와께 깊이 숨기려하는 자여 그 일을 어두운데서 행하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보랴 누가 우리를 알랴 하니』 (사 29:16) 『너희의 패리함이 심하도다 토기장이를 어찌 진흙 같이 여기겠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어찌 자기를 지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나를 짓지 아니하였다 하겠으며 빚음을 받은 물건이 자기를 빚은 자에 대하여 이르기를 그가 총명이 없다 하겠느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항상 인간을 지워버리고 없애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이것은 인간을 미워하거나 싫어서가 아닙니다. 토기란 토기장이와 관계짓지 아니하면 엉터리 토기장이를 자꾸만 조작해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자신을 토기라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해서 토기장이를 구상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런 토기장이는 우상일 뿐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거나 없어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자기를 버리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건지고 자신을 포함시켜서 하나님을 언급하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되면 자기 노력에 의해서 수행하는 신앙생활이 되고 맙니다. 예를 들면, 열심히 신앙일기를 쓴다든지, 신앙의 경력을 낱낱이 기억하고 있는 성향을 보입니다. 하지만 기억이나 추억이란 마치 먹다 남은 음식 찌꺼기와 같아서 자꾸만 추억을 찾는다는 것을 음식 쓰레기를 뒤적이는 것과 같습니다. 참된 신앙은 우리 인간 쪽에서 다듬거나 만들어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에 의하면, 예수님의 부활하심이란 곧 예수님의 계획과 목적만이 가치있고, 우리 인간들의 계획이나 목적인 아무런 의무가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믿는 믿음도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어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아계신 예수님께서 뭔가를 계속해나가시는 것이 바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어주면 우리의 신앙이 헛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벌리시는 신앙이 아니면 그 신앙은 헛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부활하셨다고 그 다음 차례로 우리가 부활되십니다. 이것은 우리들이 신앙일기 쓰면서 우리 생각이 가미되어 얻어진 신앙 계획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계획 안에 이미 담겨져 있는 바입니다. 그러다보니 주님의 부활하심으로, 달리 말해서 예수님의 현존하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주님에 의해서 잊어버려야 될 처지에 놓여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은 예수님의 현존으로 인해 지워버림을 당하는 것을 대단히 싫어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들은 어떤 식으로 살고자합니까?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를 쪼개대며 삽니다. 옛날 이야기에, 두 마리 앵무새가 사이좋게 살다가 하나가 죽고 마니 하나가 맥이 빠졌습니다. 그래서 왕이 살아있는 앵무새 앞에다 거울을 갖다놓으니 그 앵무새는 잠시 자기 짝인 줄 알고 만족하다가 그만 그것이 자신이 거울에 되비친 모습인 줄 알고 미치듯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부리로 찍어대다가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인간이란 스스로 자기 모습을 만족을 못하고 자신이 자기를 학대하듯이 찍어대다가 결국 죽고 마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의 형편에 분노를 느끼다가 결국 자살하듯이 인생을 끝냅니다. 이것은 곧 인간이 그 어떠한 경우에도 자기를 잊지 못하게 하는 방식으로 인생에 계획을 짜고 목적을 구성하게 되는 겁니다. 사람들은 신을 찾아도 일단 자신이 만족할 만한 신을 구상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자신의 형상으로 신을 만드는 꼴이 됩니다. 자기가 생각해 놓은 자아상을 기초로 해서 신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주장하는 토기장이란 결국 스스로 토기라고 여기는 자기 토기됨에서 비롯된 토기장이에 불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인간들의 도모에 대해서 하나님은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도모와 계획은 자아를 잃어버리게 하는 요소가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사람과 영적의 사람과의 차이점은, 자기 자신의 신앙적 도모나 계획에서부터 신앙이 생기는 것이 아니면 결코 생겨날 수 없다고 고백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즉 자신이 뭘해도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는 법은 없고, 오직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우리에게 신앙을 허락하신다는 점을 인정하는 사람이 바로 영적인 사람입니다. 이로 인하여 가짜 토기장이로서의 하나님과 참된 토기장이로서의 하나님이 구분됩니다. 참된 토기장이로서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단지 하나님께서 여기 계시다는 것으로 인해 더 이상 그 어떤 염려나 걱정을 아예 할 필요조차 없음을 알게 됩니다. 즉 자신에게 무슨 심각한 일이나 중요한 사태라는 것이 아예 성립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가짜 토기장이로서 하나님을 만들어낸 자들은, 하나님이 하는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실력을 인정하는 양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참된 토기장이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무수한 기적과 말씀을 남겼지만 그 많은 자들이 자기를 포기하지 않은채 다른 메시야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참된 토기장이 되시는 분을 거역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단호하고 심판을 선언하고 나서십니다. 마태복음 11:20-22에 보면,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참으로 진짜 토기장이심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1:25-27에 나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이처럼 참된 토기장이는 철저하게 인간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고 그냥 자신의 계획과 목적에 준해서만 토기들을 만들어내십니다. 이것을 구원받지 못할 토기들은 알 리가 없는 겁니다. 그들은 토기장이께서 자신을 심판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본문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토기 만들기에 나섭니다. 이것은 새로운 토기장이로 다가서는 것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러다보니 참된 토기는 하나님으로부터 ‘난데없이 토기 되었음’을 고백하는 양상으로 드러납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그저 함께 계신 것으로 세상 모든 근심을 버린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함께 계심으로 아예 우리 자아를 잊게 만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