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08년2월15일강의 고후6장14절
안산08년2월15일강의 고후6장14절
이름 : 우리교회(IP:125.190.2.61)
080215 고후 6장 14절
우리교회(IP:125.♡.2.61)
08-02-16 13:38
박온정(IP:123.♡.141.125)
10-12-20 12:26
안산080215고후6장14절/이근호 목사
오늘은 고린도후서6장 14절부터 해봅시다. 14절부터 제가 읽어볼게요.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이래 돼있죠?
여기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 할 때는 사도바울도 그렇고 다른 사도도 마찬가지지만 뭐가 비복음인가를 겸하여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믿습니까?” “예, 믿어요.” 이런 게 없고 ‘이런 것은 하나님이 아니거든요, 우상이거든요.’ 라고 곁들여서 이야기합니다. 그걸 일반교회 목사들은 못하죠.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입니다. 어디, 한 맺힌 것 있습니까? 괴로운 거 있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접하십시오. 그것뿐이에요.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영접하시면 구원받습니다. 이런 것은 하나님이 아니며 이런 것은 거짓신이며 이런 것은 다른 복음이라는 말을 차마 못하죠. 차마. 하게 되면, “내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하나님하고 다르고 그 하나님이 우상이네? 아우, 그러면 난 이 교회 못나오겠다.”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우상이란 말인가? 내가 성경을 모른다고 이래 사람을 무시하나,” 하고 삐져서 나와 버린다든지. 자꾸 붙들어 매야되잖아요.
그런데 여기 보세요, 성경에서 편지하기를, 하나님과 우상이 같이 할 수 없다고 우상문제가 등장합니다. 갑자기 우상이라는 문제가 등장해서 하나님이 무엇을 거부한다? 우상을 거부하는 하나님이라는 거예요. 우상을 거부하는 하나님. 하나님 믿습니다. 하나님 좋아합니다. 엎어지고 자빠진다고 다 좋아하는 게 아니고, 우상적인 하나님을 믿느냐, 아니면 우상이 아닌 진짜 하나님을 믿느냐를 우리에게 태도를 묻는 거예요. 태도를.
이걸 보면 말씀 하나하나가, 말씀 하나가 최후의 심판 같아. 말씀 하나하나가 최후의 심판 같아요. 고린도후서6장16절 딱 떼어가지고 “너 우상 아나?” “우상이라는 말 첨 들어보는데요.” “저는 하나님만 섬기면 되는 줄 알았는데…우상도 알아야 됩니까?” 그렇게 나온다면 “그건 네 마음대로 생각한 거지, 말씀을 본 적이 없구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우상이 분명히 구분됩니다. 구약 성경 전체가 「우상을 섬기지 말라」가장 기본입니다. 그 말은 뭐냐면 이미 인간이 태어나기 전 밑바닥에 우상이 깔려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말씀이 오기 전까지는 말씀이 우리 곁에 그냥 오잖아요. 그런데 말씀의 업어치기 당하는 거예요. 우리를 뒤집어서 우리 신발 밑에 뭐가 깔렸는가를 위로 들춰내서 드러내게 하려는 거예요. 사람은 신발 신으면 안 보이잖아요. 상반신만 보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상반신이 서로 교통하고 서로 친하게 지냐면 되는데, 하나님께서 올 때는 우리의 상반신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고, 마치 프로레슬러가 바디슬램으로 번쩍 들어 거꾸로 매트에 내동댕이치잖아요. 그러듯이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서 쳐버린 겁니다. 그러면 뭐가 나오냐면, 우리 발에 뭐가 묻혀있으며 평소에 눈 올 때 장화 발에 묻히듯이 우리가 평소에 어떤 것을 묻히고 어떤 정신에 의해서 살았는가를 참된 하나님이 와야 이게 뒤집어집니다. 그냥 하나님으로는 이게 안 뒤집어져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이 양쪽 다를 모른다면 그 사람은 평소에 알고 있는 우상 적인 하나님을 고수하고 있는 셈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우리에게 말씀으로 다가옴으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그때 비로소, 혹시 내가 우상 적인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는가, 라고 자신을 돌아보는 그런 기회를 갖게 하는 겁니다. 참 하나님과 인간이 평소에 알고 있는 하나님은 이런 점에서 차이가 나는구나, 라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구약성경 전체에 대해서 무엇을 가지고 우상이냐 하는 것을 더 찾아야 됩니다. 구약에서 제일 중요한 대목인데 그동안 우리가 구약을 스토리 위주로 하다보면 젤 중요한 것을 놓치기 쉬워요. 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짧은 시간이지만, 뭐가 우상이냐, 거기에 대해서 해보겠습니다. 뭐가 우상이냐면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이 우상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뭐냐, 우상입니다!! 거기에 묻혀버립니다. 지금 제가 한 이야기가. 이스라엘 하나님인 여호와를 불렀잖아요. 여화와라고 부른 그 하나님은 우상이에요. 이번 시간에는 우상에 대해서 해봅시다.
구약을 보면서 사람들이, -제가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있으면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면 우리는 ‘하나님 믿습니다’ 하잖아요. 그런데 뭘 감춘다했어요? 우리가 딛고 있는 발전체가 무슨 세계? ‘우상의 세계’인데 이거는 감추고 우리상반신 갖고 입 있겠다, 코 있겠다, ‘찬양합니다’ ‘찬미합니다’ 이러면 믿는 걸로 알고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참 하나님 오시면 우리가 현재 발을 딛고 있고, 진흙에 빠진 이걸(발) 거꾸로 도륙시켜 버려요.
진짜 하나님은. ‘하나님 믿습니다’가 하나님이 아니라 이건 우상이고, 왜 우상이냐면 길에서 나온 이것이(발밑의 흙) 타고 올라와가지고 온 몸을 덮친 이것이 우상입니다. 에스겔에는 이걸 ‘정신’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에 유대인들이 여호와를 부를 때 그들은 ‘우상적인 여호와;’를 불렀습니다. 참 하나님을 그들은 몰랐어요. 왜 모르냐, 하나님이라는 용어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아도나이’ 라는 이 용어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이미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두 발을 딛고 있는 이 정신이 우상적인 정신이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줘도 우상적인 해석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놓인 거예요.
그들이 부른 ‘여호와’는 우상이잖아요. 우상. 그러면 그 다음 어려운 게 뭐냐면, ‘그러면 인간이 다 하나님 부르면 우상입니까?’ ‘우상입니다’ ‘그러면 진짜 하나님은 어디 있습니까,’
이사야 45장15절에 보면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라 했습니다. 숨어있다는 말은 잠잠히 있다는 말이 아니고 ‘숨어서 일을 하시는 하나님’ 이사야45장 한번 봅시다.『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숨어계시는데 어떻게 숨어계신다고요? ‘스스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시라’ 16절에 「우상을 만드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며…」라고 돼있죠?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줘도 유대인이고 이스라엘이고 그걸 뭘로 바꾸냐 하면, 숨어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고 손에 잡히는, 나타나는 하나님으로 이걸 전부 다 변환시킨다 이 말입니다. 그걸 뭐라했어요? ‘우상의 정신’이라 했어요. 하나님이 이사야를 주고 예레미야를 주고 무얼 줘도, 십계명을 줘도, 인간의 타고난 우상성이 있기 때문에 그 우상성이 진짜 하나님을 뭐로 해석한다? 전부 다 숨어계시는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게 아니고, “야, 우리 복 주려고 나타났구나,” 자기를 위하여 다 바꿔치기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에스겔에 보면 그게 뭐냐 하면, 정신상태가 첨부터 우상을 섬기는 게 아니고요, 첨부터 우상밖에 몰라요. 하나님 하면 우상, 우상 하면 하나님. 우상 같은 하나님 외에는 다른 하나님은 원하지도 않고, 다른 하나님을 믿을 줄도 모르고, 믿을 능력도 없고 믿을 자격도 없어요!! “그렇다면 목사님, 참 하나님은 어떻게 찾습니까? 비켜가지 말고 콕 찍어서 얘기해보세요.” “그러면 하나님을 어디 가서 찾는다는 말입니까, 당신 하는 말이 뭐냐고요”
그것은 뭐냐면, 우상의 우상성을 드러내는, 숨어있으면서 ‘진짜 우상은 이렇게 생겼다’는 걸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사건. 드러내는 사건들. 드러내는 사건들을 유발시킬 때 그 사건들을 누가 만들었겠습니까? 숨어계시는 하나님이 사건을 만들어요. 분명히 하나님 믿는데 일이 잘 안되고, 분명히 하나님 믿는데 일이 꼬이고, 무화과나무에 소출이 없고, 포도나무에 포도가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요! 없어요! 이거는 신명기 28장과 달라요. 신명기28장에는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데, 하박국3장에는 그게 아니고 외양간에 소가 없어요! 무화과나무 열매가 없습니다! 포도밭에 포도 없습니다! 그래도 나는 구원의 하나님을? 기뻐한다.
이게 말이 됩니까? 어떻게? 있어야 믿지! 아무것도 없는데! 구원했다는 증거가 있어야하는데 없는데!? 욥을 보세요. 아이들 한꺼번에 다 죽었잖아요. 그런 사건 속에서 살아요. 사건 속에서. 그런 사건을 일으켜야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안다고요! 내 장화발이 어디에 묻혀있다는 것을 그때야 알아요. 안 그러면 몰라요!! 정말 이게 중요한 건데…(아멘)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강의 처음에 뭐라 했습니까. ‘하나님 믿으세요’ ‘예수님 믿으세요’가 아니라 다른 복음, ‘십자가복음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이게 아니라! 이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를 얘기하는 거예요.
이것은 사도바울뿐만이 아니고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요한복음6장에서 오병이어에 몇 명 먹었습니까? 남자만 오천 명 먹였지요? 그게 참 재미있잖아요. 첨부터 「내 살과 내 피를 먹어라」 하시지 않고 오천 명을 배터지게 먹였거든요. 배터지게 먹었어요! 그들은 자신들이 원했던 하나님,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야를 만났다고. 이제는 다른 메시야를 필요 없고 이런 메시야가 전부다고 생각하고 줄창 따라왔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뭐라 했습니까? 나를 너희가 찾는 이유가 바로 발밑에 있는 것, 너희들 정신이에요. 「너희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누굴 찾았다? 예수님을 붙잡고 줄창 따라온 겁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시길,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생이 없다 」하니까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두 번 다시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았다. 다 가버리고. 이것은 바로, ‘내 아버지 하나님 믿으세요, 구원받습니다.’ 이러신 게 아니고 아까 레슬러가 바디슬림하듯이 밑에 있는 것을 거꾸로 내리치는 방식으로 우리의 실상, 우리의 욕망, 우리의 원하는 바가 얼마나 우상적인가를 드러냄을 당하신다면 여러분 참 하나님 만나시게 됩니다.(아멘) 그럴 경우에만 참 하나님 만난 거예요.
그래서 참 하나님의 뜻은 뭐냐면 잃어버린 자를 찾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뭐 되기 싫어해요? 잃어버린 자 되기 싫어하잖아요. 여러분들의 생활가운데서 상상할 것 아닙니까. 어떤 복지가가 20억 대준다든지 그건 기쁨이 되잖아요. 그런데 정작 기쁨은 뭐냐, 지갑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을 때. 평소에 신경 안 쓰다가 안경집 찾으면 못 찾다가 갑자기 어떻게 찾게 되었을 때, 안경집이 주는 기쁨을, 담겨있는 기쁨을 우리가 그동안 경험 못했다고요. 이걸 잃어버려야 경험해요. 안 잊어버리면 안경집 여기 있다는 자체가 그저 있다고 생각하지 ‘고맙다 안경집아,’(ㅋ) 이런 생각 안 든다고요.
예수님의 기쁨은 뭐냐 하면, 잃어버린 자기 백성 찾으러 왔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에버랜드나 그런 놀이동산 갔다가 애들 그렇게 많아도 엄마 눈에는 그딴거는 기쁨이 아니에요. 그 중에서 자기 애 찾을 때만 기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람 찾으러온 게 아니고 자기사람 찾아 왔다고요. 자기사람. 자기사람을 찾는데 그 방법이 뭐냐, ‘하나님 믿으세요,’가 아니라 ‘너는 지금 우상숭배에 푹 빠져있구나 이놈아’ 라고 이야기 했을 때 , 그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양이, ‘주여, 주께서 이런 이유 때문에 돌아가셔야 됐군요.’ 예수님의 죽음과 자기가 잃어버린바 된 자였다는 것을 연결 지어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 자기능력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한 자기백성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자기백성이기 때문에 그 말이 이해되지 안 그러면 이해 못해요. 여기 아이들 40명 가까이 되는데 걔들한테 복음 전하면 걔들 못 알아듣습니다. 걔들은 우상이거든요. 우상이 있다는 건 뭐가 있다했습니까? ‘정신’ 이미 타고난 정신이 있어요. 정신이 벌써, 장화 발에서, 무릎에서 온 몸, 머리까지 세상정신으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거기다 신을 믿으라하면 불꽃에 기름을 붓는 거예요. ‘아, 나의 욕망, 나의 요구를 들어주는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따위 우상 앞에서 관계 않고 숨어계시잖아요. 네가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숨어계시는 하나님. 숨어계시다가 진짜 자기백성한테는 거꾸로 뒤집는, 전복시켜버리는 사건을 일으켜서 ‘주여, 내가 잃어버렸던 놈이고 내가 살았던 것이 몽땅 우상숭배에 해당합니다,’ 라고 자기를 ‘개 같은 인간’이라고 파악할 수 있는, 그런 현상을 일으키면서 우리를 구원합니다.(개 같은 인간이 욕이 아니었군요.ㅋㅋ) 그때 주님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지갑 하나 잃어버리고 찾아도 기쁜데, 양 한 마리 찾는데 얼마나 기쁘겠어요. 그 만남의 대화가 일상적인 의사소통이 아닙니다! 복음 안에서 통할 때, 복음을 얘기하고 복음을 알아듣는 게 통하는 거예요. 그 복음으로 통할 때 다른 복음과 곁들여서 얘기함으로 말미암아 진짜 내 백성인지를 우리가 스스로 파악할 수 있게 하십니다. 십자가복음 말고 다른복음,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은 다른복음이다, 이건 마귀복음이다, 십자가 피로 구원받은 것을 같이 곁들여서 이야기해줘야 하는 거죠. 그러면 우상의 정체가 무엇인지 한번 봅시다.
출애굽기 32장. 사시다가 힘들고 어려운 일 있더라도 하나님이 미워서 그런 게 아니고 숨어계시는 하나님께서 일을 그렇게 하신다는 걸, 32장8절:『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여기 보면 자기 명한 길을 속히 떠나, 그 다음에 뭐라 돼있죠? ■자기를 위하여■ 자기를 위하여! 우상이예요. 우상. 우상의 특징이 뭐냐, 이 대목뿐만 아닙니다.
여러 부분 있는데, 호세아 13장2절에도 나오는데, 거기도 한번 찾아볼까요? 호세아13장2절:『이제도 그들은 더욱 범죄하여 그 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되 자기의 정교함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으며 그것은 다 은장색이 만든 것이거늘 그들은 그것에 대하여 말하기를 제사를 드리는 자는 송아지와 입을 맞출 것이라 하도다 』누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고?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 때■ 여기서는 우상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신’입니다. 인간이 신이라 하는 것은 ‘자기 확대’예요. 자기가 갖고 있는 그걸 키워서 신으로 보는 겁니다. 그래야 그 신과 자기가 굉장히 친하죠. 왜냐면 낯선 신 같으면 친하지 못하잖아요.
내가 익히 알고, 내가 수긍이 가는 하나님은 진짜 좋은 하나님이죠. 내가 이해 안 된 하나님은 나에게 안 좋은 하나님이잖아요. 항상 기준이 뭐냐 하면, ‘나는 신을 알고 있다’가 기준이 되고요 ‘나는 신을 알고 잇다’ 신의 조건 있잖아요. 신의 조건에 맞는 신을 상상하니까 그게 뭐가 된다? 그게 우상이 되고, 이 우상의 특징은 뭐냐, 항상 신을 만든 자는 누구예요? 내가 상상했기 때문에 ■나를 위하여 봉사할 의무를 지닌 신이에요.■
옆 사람 좋아라, 하는 신이 아니에요. ‘내가 교회 가고 옆 사람이 좋다,’ 이건 말도 안 되잖아요. ‘내가 교회가고 내가 좋다’ 그럴 때는 우리가 믿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바로 가짜, 우상이라니까요. 그게. ‘목사님, 그러면 우상 아닌 게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다 우상이라니까. 교회 다니고, 예수 믿고, 그거 다 우상이에요! ‘그러면 여호와가 우상이면 예수님도 우상이죠,’ ‘그럼 진짜 하나님 어디 있습니까? 진짜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뒤집어엎는 사건들이예요! 사건들이.
우리가 아는 하나님은 내가 다가가면 있고 내가 멀찍이 하면 떨어져있는 하나님이에요. 이 우상의 특징이 뭐냐, 내가 하기 나름이라니까요!! 내가 교회 가면 ‘너 왔나?’ 하면서 찬송 부르고 내가 바빠서 교회 못가면 하나님은 저만치 있는 거예요. 세상에 무슨 이런 하나님이… 그러니까 하나님은 교회 안에 갇혀 있는 거예요. 돈 내라고 예단 지어놓고 하나님을 거기 신주단지처럼 모셔놓은 거예요. 교회 불타면 하나님 불탄 줄 안다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은, -진짜 제가 하나님 얘기하면서 감격스러운 것은- 교회 갈 시간에 교회 안 가고 낮잠 자게 하는 하나님이 하나님이라니까!! 내가 찾아가는 하나님이 아니고, 내가 찾아가나 안 가나 이 모습 이대로, 낮잠이라는 사건을 유발하고 내가 목마르면 칵칵 하도록 사건을 일으키는 그 하나님이 하나님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품을 떠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기는 하나님을 생각한 게 아니고, 나는 내 생각만 하죠. 여긴 나의 영역이고 하나님은 어디 있냐면 교회에 있어요. 교회. 교회 떠나면 성경 볼 때만 있어요. 그걸 하나님 개체라는데 뭐냐면 하나님이 나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애는 바깥에 놀고 있고 엄마는 여기 계시잖아요. 애가 엄마 어디 갔냐고 찾는다고, 엄마와 내가 개별자기 때문에, 떨어져있기 때문에, 문 열고 찾아야 보인다고요.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그따위 식으로 한다니까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날 덮쳐서, 덮치니까 구원된 거지, ‘구원의 하나님 만나러 가세,’ 하는 것은 하나님도 스스로 숨어계시기 때문에 아무리 찾아 헤매도, 찾아 헤매다 찾았다 해도 그건 우상이 되는 겁니다. 우상.
내가 믿는 하나님은 가짜예요. 주께서 믿게 하셔서 믿는 하나님은 진짜입니다. 아무튼 내가 뭔가를 시작해서, 내가 벌려서, 나와 하나님 사이를 내가 다리를 놓고 도로를 닦고, 그래서 잘나가는 하나님은 백날 다가가 봐야 그거 전부 가짜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있는 것을 감싸주시고, 보쌈해주시고, 끝에 이런 말 있어요. 막 젖을 먹은 애가 만족해가지고 엄마 품에 푹 안겨있는 것처럼 저희들 하나님 품속에 안겨서 살아가나이다. 이게 얼마나 좋아요.
주님 어디계십니까? 찾는 게 아니고, 우리가 주님 품에 안겨서 살아갑니다. 안겨서 살아가기 때문에 젖먹이가 엄마 색깔이 녹색이다 빨강색이다, 그거 문제 안 되요. 지금 엄마 품에 안겼다는 게 좋잖아요. 지금 내가 생활비가 얼마 들고 아이 교육비가 얼마고 빚이 얼마고, 그런 것을 따지는 게 아니고 얼마가 됐든 땡전 한 푼 없어서 굶어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엄마 품속에 있는 그대로예요. 엄마 옷 색깔이 뭐냐 묻지도 않죠.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는데? 물을 필요도 없는 거예요. 그게.
마태복음 6장30절에 이런 말씀 있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가운데 「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오늘 입히시거든…」나오죠? 완전히 약 올리는 거죠. 본인이 들풀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이거는 완전히 약 올리는 거예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 같으면 아궁이에 안 들어가도록 해야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게 아니에요. 낼 아궁이에 던져질 걸 아십니다! 아시면서 오늘 우리를 착실하게 입히십니다. 낼 아궁이에 용감하게 들어가라고. 그리고는 아궁이에 들어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너를 만드신 원래 목적이라는 겁니다.
참새가 아버지 뜻이 아니면 떨어지지 아니하죠. 우리는 안 떨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죠. 웃기는 이야깁니다. 참새가 떨어지고 참새가 시장에 팔리는 것도 뜻인데, 팔릴 때까지 주께서 지켜주십니다. 결국 뭐냐 하면, -강의 쉽게 합시다- ㅋ 뭐냐, 우상과 하나님의 차이점이 뭡니까? 우상은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참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존재한다는 거예요. 얼마나 쉬워요! 말은 쉽다. 정말 말은 쉬워요. 우상은 하나님이 있고 없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뭘 가지고 확인한다? 내가 욕망하는 것, 내가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면 하나님이 계시고 안 들어주면 없는 거예요. 안 들어주면 ‘천상천하유아독존’ 나밖에 없는 거예요. 하나님도 필요 없어. 내가 모자라는 것, 미진한 것을 보충해줄 때 하나님은 하나님답다는 것이 내가 만든 우상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가 내일 아궁이 불속에 들어가더라도 처 들어가기 위해 내가 만드는 것을 네가 감사하느냐, 네가 감사하느냐는 겁니다. 이게 시편132편에,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그러면 인생책임을, 팔자책임을 누가 진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이 책임져줄게. 책임지고 내가 인도해줄게. 왜냐 하면, 책임졌는데 목적이 뭐냐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라는 말이죠.
‘하나님을 위해 살면 구원해줄게,’ 라는 뜻은 아니고 이미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구원된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고 구원해주신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 이게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그 외에는 죄송하지만, 아닙니다! 그 외는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들의 기쁨이라 하는 것은, 자기를 위하여 살 때 가장 기뻐해요. 이게 뭐냐, 우상적인 정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자기를 위해 살 때 가장 기쁩니다. 형제간 집에 있을 때 엄마가 맛있는 것 주면 엄마가 형 안주고 엄마가 자기만을 위하여 먹을 때 기분 대낄 아닙니까. 기분 좋죠? 어릴 때 그런 기억 없어요? 형은 맛있는 맛을 몰라, 나 혼자 다 먹을 때 얼마나 맛있는지 몰라요.
구정 때 제한된 숫자로 만든 땅콩강정 있잖아요. 그런데 몰래 할아버지가 나한테 줄 때 기쁨이란 건 말도 못하지, 나만을 위해 특재된 그게 바로 연장되면 그게 바로 무슨 신이라고요? 그게 바로 우상입니다. 그런데 진짜 참신을 알게 된 사람들이 뭐냐 하면, 더 이상 나를 위하여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하여 일 한다는 것이 눈물 날 정도로 감격스럽고 통곡보다 더 큰 통곡으로도 메꿀 수 없는 큰 기쁨이 찾아와요. 내가 하나님을 하고 있다는 것, 다른말로 하면 내가 더 이상 내 일을 않고 있다는 것이 큰 기쁨입니다. 정신병자 아닙니까? 내가 나를 위해서 일하지 않는다는 게 큰 기쁨이고, 하나님을 위해 사는 이 맛을 너희들은 모르지?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 이거는 날개달린 것 같아, 5층 10층에서 뛰어내리고 싶어. 뛰어내려도 안 아플 것 같아. 왜? 너무 기분이 좋아서. 기분이 업 되어가지고.
내가 거룩한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하다니 이거는 너무나 영광스러워서 천사도 흠모할만한 영광스런 일이잖아요. 그래서 숨어계시는 하나님이 얘기할 때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는 게 아니고 자기 소원만 우리한테 강요해요. “얘들아, 너희들 기쁘지? 너희들은 나를 위해 소유된 백성이다, 기쁘지?” 그러면 한 천 명 가운데서 하나님 미쳤나 하나님을 위해 기쁜 사람이 어딨어, 자기를 위한 게 기쁘지. 천 명 가운데 한 사람이 만약에, 저는 너무 감격스럽습니다. 저 같은 미천한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위해서 살다니, 하고 그 사람만 말씀에 합당한 규정된 백성에 해당되는 사람이에요.
양과 목자 말고 999명은 ‘저 둘이 뭐하지? 무슨 소리 하는지?’ 무슨 소린지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이해가. 내가 원하는 소원을 들어줘야 하나님이지, 하나님이 너무 이기주의다, 이런 소리 나온다 말이죠. 여기, 성경 한 번 찾아봅시다. 열왕기하 -오늘 성경 너무 많이 찾는데 귀찮지 않습니까? - 열왕기하 17장16절요, 제가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명령을 버리고 자기들을 위하여 두 송아지 형상을 부어 만들고 또 아세라 목상을 만들고 하늘의 일월성신을 경배하며 또 바알을 섬기고』무엇을 위하여 두 송아지를?
‘자기를 위하여’ 두 형상을 만들었지요?
지금 제가 이 대목을 왜 찾습니까? 목사님 제가 이 대목을 왜 찾습니까. 지금 유다나라가 여화를 믿는 나라 아닙니까? 보통 우리 그리 알고 있죠? 그런데 그 왕이 뭐했다고요? 유다나라가 여호와, 여호와 말은 하면서도 결국은 왕 본인부터 누구를 위해서? 자기를 위하여우상을 섬기고 거기다가 또 ‘여호와의 전’이라 하고 여호와 이름으로 우상을 섬기듯이 여호와를 섬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루살렘 유다나라 성전은 불타겠습니까? 안타겠습니까? 불 탈 수밖에 없죠 그게. 불 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제 고린도후서 오늘 본문 한 번 들어가 봅시다. 이렇게 해서 오늘 본문으로 돌아오네요. 고린도후서6:16절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이래 돼있죠? -여러분 오늘 강의 잘 들었는지 한 번 물어봅시다.- 하나님의 성전이 내 앞에 개체로, 사물로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들어가면 성전이고 나가면 성전 아니고, 이렇습니까? 그건 아니다 말이죠. 왜냐면 유다나라처럼 예루살렘에 성전을 지었다 할지라도 그 안에서 뭐가 일어납니까. ‘나를 위하여’가 계속 일어난다면 그건 소용없는 짓이에요.
그런데 교회에서 흔히 하는 말이 우리 몸이 하나님 성전이라 하죠?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아무리 우리 몸이 성전이라고 우겨도 그 안에서 뭐가 일어나면 안 되요? 계속 나를 위해서, 하나님 나를 위해서 성전을… 이래 나오면 그것도 우상이라니까요. 그것도. 한번 정리해봅시다. 우상은 뭐냐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참 하나님은 누굴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나를 구원한 것도 나 좋아라고 구원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 일 하려고 하나님을 위해서 날 찾아와서 예수 믿게 한 거예요.
그게 우상인데 그러면 아무리, (어떤 사람이 왔습니다, 오늘 고린도후서 말씀을 봤습니다, 16절에 보니까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하리요, 아, 나보고 하는 소리구나, 나는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의 성전 됐으니까, 내 몸이 성전이니까 담배도 피우지 말고 성전을 나쁜 연기로 채우지 말고자 이 몸이 성전이니까’) 그렇게 돼도 그게 우상이 되는 거예요. 우상. “목사님, 성경대로 했는데 왜 그게 우상입니까?” 사건, 또 사건.… 무슨 사건입니까? 너는 네 몸이 아니야! 너를 위한 몸이 아니라고! 하루 중 스물네 시간에서 2.5초라도 ‘너는 네 몸이 아니야’ 라는 그런 질책, 암시,-나중에 찾아보면 성경에 나오니까- 그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내 것이 내 것이 아니고, 내 팔자가 내 팔자가 아니고 운명이 내 운명이 아니고 내 인생이라는 게 아예, 없는데 「이미 십자가에 못박아죽었나니 네 안에 사는 것은 그리스도라 」했는데, 그리스도의 세포요 그리스도의 손가락인데 우리는 자꾸 내 것이라고 여긴다 말입니다. 내 것이라고. 몇 년 전부터 미국에서 메일이 자꾸 와요. 네 번째인가 주고받고 했는데 스무 살 먹은 학생인데 우울증이 걸렸는데, 부모님 이혼하고 엄마 혼자 살면서 나를 아버지처럼 닮지 말라고 자꾸 잔소리하고, 몸은 병자고 집안은 풍지 박산 나고 그랬어요. 그런 사정에서 내 글을 보고 왔어요.
그 아이가 자기 몸이 아프고 몸이 아파 우울증 걸렸는데, 주위엔 사랑해줄 사람은 없고 병은 나아야 되는데 어떻게 기도하면 병 나을 수 있습니까, 라고 요지는 어떤 식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고쳐주겠습니까, 하는 게 그 사람의 목적이에요. 그러고 보니까, 복음, 십자가, 언약 좋다는 거 다 들었는데 그걸 누굴 위해 집어넣어요? 나라는 성전에다가 남한테 내가 반듯한 나로 다시 태어났다, 봐라, 내가 믿음 좋잖아. 라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용도로서 온갖 좋은 영양제 한약재, 복음적인 영양제는 다 집어넣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말이 안돼서 이 말씀을 해줬어요. 시편136편「별을 지으신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별은 별 그 자체로서 그 사랑,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외부로 방출하고 있다 이 말입니다. 별이 먼지 안 끼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 소리 한 적 없거든요. 저 별보다 더 크게…이런 소리 안 했다니까요. 현재 있는 그 자체에 빛이 와서 빛이 오니까 지구상에서 보면 반짝반짝 비추잖아요. 「나는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라」소금이 생산되려고 빽쓰고 이런 거 없어요. 소금은 소금으로서 빛은 빛으로서 자기 자랑하고 있는 게 아니거든요.
나는 죽고 세상은 밝게 한다, 그 역할만 하면 된다 말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원해서 한 것 같으면 우상인데 자기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빛이기 때문에 빛이 될 수밖에 없고 예수님이 소금이기 때문에 나도 소금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운명적으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인자하심을 드러내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찾지는 않겠습니다만, 준비는 했지만 찾지는 않겠는데 여기 보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막대한 재물과 많은 제사 횟수를 늘려놨습니다. 요즘은 큐티다 금요철야에다 수요예배, 새벽기도, 구역예배까지 막대한 것들을 다 집어넣었는데 하나님이 뭐란 줄 압니까. 내가 언제 그런 예배 원하더냐? 그런 제사 원했더냐? 내가 원하는 것은 나의 사랑을 원한다. 나의 사랑을… 나의 사랑을 아느냐.
그런데 문제는 그들의 문제는, 이렇게, 이렇게 해야 사랑이야, 사랑을 따로 만들어가지고 사랑을 만들어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여! 내가 제사지낼 테니까 우리가 원하는 사랑 우리한테 주시면 그때 사랑해드리겠습니다. 이사야 61장에 보면 너희들이 하는 사랑은 돼지 목따기다. 돼지 목 비틀고 너희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제사를 드리지만 제발 그런 것 갖고 오지 마라,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다. ’너는 없고 네 삶이 엉망진창이든 간에 너 자체, 너는 엉망진창이지만 나는 엉망진창이 아니라는 사실을 네가 알아라,‘는 말이죠.
네가 보기에 너가 엉망진창이지만 그건 누구관점입니까. 무슨 관점? 우상의 관점입니다. 우상의 관점. 밑에서 차고 올라오니까. 우상의 관점에서 봤을 땐 내가 내 인생이 맘에 안 들어, 내가 내 인생 맘에 안 든다 든다는 평가가 우리한테 있습니까? 없잖아요! 왜? 심판은 누가 쥐고 있어요? 심판은 하나님이 쥐고 있는데, 심판은「 하나님과 성전과 우상과 같이할 수 없다」이미 그 자체가 심판이에요. 하나님 성전은 나와! 우상은 지옥 가라! 심판은 그렇게 하는데 우리가 심판합니까? 우리가 천당 갑니까? 우리가 지옥 갑니까? 아니에요.
주께서 편을 가르면 갈리는데 하나님 백성은 백성의 길로 가야되고, 우상은 우상의 길로 가야되는데 그 가는 길에 우리로 하여금 우리 것이 이미 하나님의 것이 되어버렸고, 어떤 것도 하나님을 위하여 좋다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보기 좋아서 있는 건데, 자꾸 본인이 본인의 삶에 대해서 불평하고 불만족스럽고 어떻게 개선할 여지가 없는가? 이러면 영광이 안 되는데 영광 돌릴 방법은 없는가? 방법 없심다!!
이스라엘은 전체가 성전 지으면 성전으로 우상숭배하고 왕을 주면 왕가지고 자기를 위해서 살아, 십계명 주면 십계명 지켰다고 자기를 위해 사는 자, 누굽니까? 젊은 부자 청년 아닙니까. 자기는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켰다고.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너 그것 버리고 날 따르라」미쳤나 내가 따라가게. 계속 자기를 위해 있으면서 결국 십계명을 지킨다고 누굴 위해 십계명 지킵니까. 자기 좋아라고 십계명 지킨 거예요. 누굴 위해서 교회 다니고? 자기 위해서 교회 다니고. 하나님 누구 좋아라고 믿냐면 나 좋아라고 믿는 거예요. 그건 숨어계신 하나님이 아니고 엉터리 발바닥에서 나온 아담의 본성에서 타고 올라온 그런 우상입니다. 우상의 특징은 반드시 ‘자기를 위하여!’
16절에 보면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개정』이게 목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돌아다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한 것에 대해서 너무 섭하게 생각하지 마라 합시다. 마치, 시어머니가 와서 돌아다니면 며느리는 싫잖아요. ‘빨리 촌에 가이소’(ㅋ) 사람은 타고난 우상성이 뭐냐 하면, 하나님은 주일날 11시에나 만나고 평소에는 우리 가게에 오지 마세요. 부담되니까 오지 마라 하는데 그거는 결국 누구를 위해서?
그런 정신가지고 교회 가서도, 교회에 앉아있어도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한, 내가 만든, 그런 하나님을 택한, 내가 원하는 애완견,(충격적-시치미 떼고 앉아있는 내면 다시보자-녹취자) 애완용 강아지 같은 그런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상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교회에서 해야만 하는 이유가 그래야만 진짜신자와 가짜신자가 드러나고, 그 이야기할 때만 드러나고, 이 얘기에 입 다물면 가짜신자가 안 드러납니다.
예를 한번 들어볼게요.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다 ’아멘‘ 하거든요. 하나님 복 주시는 하나님 하면 다 ’아멘‘한다고요. 누가 누군지 몰라요. 여러분 고난 가운데서 잘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하면 ’아멘‘한다고요. 욥 보세요. 고난 받고 이긴 자가 복 받습니다. ’아멘‘ 하죠. 누가 누군지 알지 못해요. 그러면서 다들 뭐라 합니까. 어려움이 와도 하나님이 주신 이 징계는 나 잘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이 징계를 주면 나 잘되게 하기 위한 줄 알고 열심히 감사헌금 하면서 더욱 더 충성해요.(먹사는 또 부채질을 더욱 더 열심히-녹취자) 교회가 원하는 거 아닙니까! 돈 빼먹고 시간 다 빼먹잖아요.
그런데 결국 그 사람들을 누구를 만들었어요? 결국 그 집단 자체를 우상의 집단을 만든 거예요. 혼자 지옥 가는 게 아니라 교회라는 이름으로 단체로!(ㅋ) 단체로 지옥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목사 입에서 뭐가 나왔기 때문에? 어떤 게 우상인지 말 안했어요. 뭘로 우상이라고 말 하냐면 ‘부처’나 이런 거. 그거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여호와도 우상인데, 예수도 우상 돼버렸는데. 그것까지 얘기를 해줘야죠. 결국 목사들이 복음을 모른 거예요. 복음을.
자, 십자가는 됐고, 십자가는 날 위해서 원죄만 해결하고 나머지는 내가 성화된다. 자꾸 십자가를 자기를 위해서 이용하려하니까 그건 복음이 아니죠. 복음이라 하는 것은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아있기 때문에 내 인생은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그게 복음이지 내가 없어지는 게 나의 기쁨이 되는 복음입니다. 기쁜 소식 아닙니까. 젤 기쁜 소식이 뭐냐면, 내 것이라는 것은 아예 없다는 것이 제일 기쁜 소식입니다.
여러분 삽을 가지고 자기 밑을 한번 파보세요. 내면의 밑을 파 봐요. 파 보면 나의 학력이 나올 겁니다. 나는 여기까지 되겠다. 나는 유치원 때... 그것도 파보라고요. 우리 아버지가 어떻다, 그것도 파보라고요. 파보면 놀랍게도 거기에는 ‘나’가 없어요. 그 구멍 속에서 아담의 죄가 마치 석유 터지듯이 솟구쳐!! 올라옵니다. 원래 나라는 게 없어요. 나는 없는데, -그림 하나 그려 봅시다, 이거는 너무 무서운 이야깁니다. 무서운 이야기도 한 달에 한 번씩은 해야 됩니다.-
분명히 나가 있는 것 같은데 밑바탕에 뭐가 없죠? 밑바탕에 뭐가 있어요? 구멍이 없어요. 구멍 대신 뭔가 밑바탕에 있어야 되잖습니까. 나의 학력이 얼마고, 아이큐가 얼마고, 우리 부모님은 누구시고, 난 대한민국 시민권 갖고 있고, 이걸 가지고 밑바닥에 있다고 하는 거예요. 하다가 미국에 이민을 가버립니다. ‘나’라 하는 것은 뚜껑 지가 만들고 ‘나는 이렇게 겸손해, 나는 대통령 이제 안 해’ 자기가 뚜껑 만들고 ‘이것 건들면 나는 못 참아’ ‘적어도 한 달 수입은 이 정도는 돼야 돼,’ 밑바닥을 지가 만들어놓고 이걸 뭐라 하냐면 이게 바로 ‘자아’가 되는 겁니다.
자아라는 게 원래 없는데. 없는데. 그때그때 자아를 만들어내요. 그런데 하나님은 계속 구멍을 파버려요. 파버리면 내 밑바닥에 뭐가 없어요. 그냥 공중에 붕 떠있는 거예요. 그런 거 있죠? 인형 있잖아요. 바비인형인가? 치마는 있는데 밑에는 철사만 있잖아요. 아이들은 철사만 있다고 실망하죠. 옆에 보면 화려한 드레스가 있다고요. 분명히 화려한 드레스는 있는데 ‘나’는 없어요!(식은땀 납니다.-녹취자) ‘우리교회 설교하는 사람 이근호’ 만나보면 이근호 없어요! 없다고요! 그러면 나도 없다고 생각해야 되요. 다만 그때그때 그리스도가 조립하는 조립품입니다. 그때그때 조립한 거예요.
오늘밤에 죽어버리면 오늘부터 흙입니다! 내가 죽는다고 해서 나 아까울 거 없어요. 그게 스데반집사 아닙니까. 스데반집사가 ‘주여 설교하는데 왜 죽이십니까,’ 안 그랬다고요. 이게 뭐냐면, 말씀이 일시적으로 나를 사용할 때만 내가 등장하고 말씀이 떠나라하면 말씀만 남고 나라는 것은 해체되면 그만이에요.「 모든 인간은 풀이요, 인간의 영광은 풀의 꽃 같으니 어느 것 다 없어져도 뭐만 남는다? 말씀만 남아요.」 이런 말씀이 체험돼야 되요.
내가 말씀 지키는 게 아니고 말씀이 나로 하여금 믿게 하셨고 말씀이 나에게 작용하는 겁니다. 내가 다가가는 게 아니고 말씀이 내게 다가온 거예요. 고린도후서 이 말씀이 내게 다가온 겁니다.(이 특별함, 은총-녹취자) 다시 말해서, 너는 성전 되려고 애써라,가 아니라「너는 성전이야」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어, 성전 맞네?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네,’ 이것은 믿음이라하지 내가 뭘 행했는데? ‘맞다, 이건 행해야 돼,’ ‘성전 되려고 애를 써야 돼’ ‘최선을 다해야 돼’ 어디 그런 게 있어요!? 그런 게 있으면 다 누구를 위해서? 사람인 나에게서 나온 것은 누구를 위해서? 나를 위해서.
나에게서 나온 것은 뭐냐면, 허구에서 나온 것은 허구만 나와요. 허구에서는 허구인 자아만 나와요. 허구의 자아는 내년되면 또 달라요. 한 달 뒤엔 또 달라요. 작년의 믿음이 다음해에 또 달라요. 이게 뭐냐, 나의 믿음은 내가 챙긴다. 말도 안 되는. 네 가운데 믿음이 어디 있는데? 한번 봅시다. 아브라함은, -잘 들어보세요- 아브라함은 약속이 자기를 만든다고 했어요. 야곱이 복 받았잖아요. 그런데 야곱은 오해했어요. 야곱이 있고, 복이 야곱에게 온다고 생각한 겁니다. 창세기 보면 그게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야곱이 생각하는 야곱 말고 다른 야곱을 생각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약속 속에 다른 야곱이 있어요. 다른 이스라엘이 있는데 야곱은 착각해가지고 하늘의 복이 나한테 주어진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비켜라, 너는 야곱이니까 비키고 내가 복 주려는 것은 야곱이 아니고 이스라엘인데 이스라엘이라 하는 야곱은 첨 들었어요. 금시초문이라. 하나님은 말씀을 이루는 것이지 내 소망을 이루는 것이 아닌데, 이스라엘이 야곱을 덮치니까 야곱은 죽어야 되고, 죽은 야곱의 특징이 뭐가 되요? 이스라엘이 덮쳐서 야곱의 이름이 뭐로 바뀌었습니까? 이스라엘로 바뀌었잖아요. 아브람이 죽고 그 뒤에 아브라함이 덮쳤는데 덮친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아브라함이에요. 그런데 밑에 있는 아브람은 행함으로 구원받았잖아요. 그런 인간은 죽어야 되요.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근호가 있지만 내가 예수 믿어서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이거는 죽고, 주께서 구원해준 내가 있는데 그 인간 특징은 뭐냐, 내가 행함으로 구원받지 않고 주의 말씀대로 응해서 나에게 왔다.
마리아가 임신했는데 뭣 때문에 임신했습니까? 지가 임신하고 기도한 적 없잖아요. 「말씀대로 하시옵소서」마리아가 어쨌다고요? 주의 말씀 ‘주’ 말씀대로 하시옵소서. 처녀가 애를 낳았는데 이거는 보통 자존심 구기는 일이 아닙니다. ‘주여, 말씀대로 하시옵소서’ 다른 사람 들으면 미친년이라고, 네가 남자 알아서 임신해놓고 … 스데반집사가 돌에 맞아 죽습니다. 피해라, 도망가라, 도망 안갑니다. 설교합니다. 계속 돌이 날라 옵니다. 스펀지 아니에요. 진짜 돌멩이예요. 결국 죽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스데반 수고했다, 이제 올라와야지’
우리보기엔 스데반집사가 손해 대개 봤어, 우리 같으면 어떱니까, 총회장 만들어야 돼. 총회장. 큰 교회 당회장 돼야 되요. 그런데 스데반집사는 ‘주여, 저들은 모릅니다’ 그게 뭐냐, 현재 우리 위에 먹구름처럼 하나님이 이미 여기에 와 있다는 사실을, 와서 말씀의 소나기를 내리고 있는 것을, 양들만 소나기 맞지 지옥 갈 놈들은 어깨위에 소나기 내리고 있는 것도 몰라요. 그래서 성도는 지금 오직, 교도소가도(여기도 소나기 오네) 말씀의 소나기를 느껴요! 어딜 가도. 미국가도. 이민가도. 쫄딱 망해도. 쫄딱 망해도 소나기는 내 머리위에 계속 있어요. 소나기 막을 필요 없다 말이죠. 계속해서 하나님 말씀대로, 말씀대로 이끌다 보면 결국 결론이 뭐냐, 이겁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감사하고, 기쁘고,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다른 말로 하면 ‘내가 구원받다니…’ ‘잃어버린 자인데 이제 찾은 이 되었다니…’ 세상에 이렇게 땡잡은 일이 또 있습니까? 생활에 바쁘다 보면 잊어버립니다. 생활에 바쁘다보면 또 나를 위해서 대적하는데, 이게 차오르는, 아담의 때부터 온 정신이 나를 위해서. 아침에 눈만 뜨면 나를 위해서 온 정신이 이겁니다. 그거…그런 예수님 그런 하나님 나를 위한 우상이고, 온 우상덩어리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사건. 그 사건을 느끼거든 여러분들은 참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햇빛과 공기주시고 목숨 심장 뛰게 하시고 어젯밤에도 잠 잘 자게 하시고, 정말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을 깨닫게 하시는 이 은혜를 모르고 다른 신을 생각하고, 나만 생각하면서 위에 내리시는 소나기 같은 말씀을, 능력을, 기쁨을 몰랐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나에게 내가 메이는, 마귀에 시험 드는 절망과 낙담 속에 있는 슬픔의 세월을 보낼 거싱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면서 내가 주의 일을 하다니, 하는 감격속에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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