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08년2월15일강의 에베소서 2장 1절, 6절
서울08년2월15일강의 에베소서 2장 1절,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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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215 에베소서 2장 1절, 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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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2-16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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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3-16 19:14
서울080215a엡2장1절
에베소서 제 5강 (이 근호목사, 2008년 02월 15일(a), 서울의존교회)
에베소서 2:1-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죽은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면 알아듣습니까, 못 알아듣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보고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 하면, “죽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보고 죽은자래요. 우리가 지금 살아 있는데 우리보고 죽은자래요. 하나님이 우리를 보는것과 우리가 우리를 보는 것과 달라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손가락이 움직이면 살아 있고, 머리카락이 잘 자라면 살아 있고, 운동회때 애들이 잘 뛰는 것 보면 살아 있고, 밥 잘 먹으면 살아 있고, 오늘같이 바람이 불어서 추울때 “아, 춥다”하면 살아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무리 손가락이 움직이고 머리카락이 자라나도 죽었다고 보는 거예요. 우리는 살았다고 우기고 하나님은 우리보고 죽었다고 우기고 누구 말이 맞아요?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가 맞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하나님이 맞겠지요? 우리가 우리 스스로 구분을 한다면 만일 어떤 사람이 남자라면, 남자와 여자, 혹은 어떤 사람이 가난하다면 가난한자, 부자, 또 어떤 이가 키가 좀 크다면, 키가 큰 사람과 작은 사람, 이렇게 구분을 많이 해요.
흑인, 백인, 한국인, 미국인, 이렇게 구분을 많이 하는데 하나님은 이런 구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흑인이 되었든 백인이 되었든, 남자가 되었든 여자가 되었든, 어린이가 되었든, 어른이 되었든, 이것은 우리가 구분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구분 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하는 사람과 순종하는 사람, 이렇게 둘로 나눕니다.
그래서 불순종하는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 그렇게 밖에는 보지 않습니다. 아무리 부자, 가난한자, 어른, 어린이 이렇게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세상을 보지 않습니다. 아무리 운동 잘하고, 뭘 잘해도 불순종 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 아무리 다른 사람이 볼 때 키도 작고, 못생겼고, 공부도 못하고, 가난하다고 할지라도 순종하는 사람 같으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살았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강의를 했는데, 누구 말이 맞습니까? 우리 사람의 말이 맞아요, 하나님의 말씀이 맞겠습니까?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 여자, 부자, 가난한자, 어린이, 어른, 이런 식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고, 불순종하는 사람과 순종하는 사람, 둘로 나누고, 불종하는 사람을 가지고 죽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사람은 보디빌딩을 해서 근육이 대단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뱃살 뺀다고 다이어트도 하고 뛰기도 하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참, 죽은놈 잘 뛴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보시는 관점이 우리하고 달라요. 그래서 우리는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텐데, 순종하는 것이 뭐냐 하면, 우리 관점을 버리고 하나님이 보는 관점으로 바뀌어지는 그것이 순종입니다. 우리가 보는 관점은 내 중심으로 봐서, 나는 키가 크니까 작은 사람, 나는 피부가 하얗게 보이니까 백인, 이렇게 분류하지만 그렇게 분류하는 그 사람도 죽은 영역에, 죽은 사람 마을에 산다는 겁니다.
이야기 하나 해 드리겠습니다. 차를 타고 깊은 산골에 가는데 길에 팻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 팻말에 “죽은 시인의 마을”이라고 씌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팻말이 풍상에 찌들다 보니 글자 몇개가 지워졌는데 “시인”, 그 부분이 지워졌어요. 그래서 팻말에는 “죽은 00의 마을”이라는 글자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나다가 그 팻말을 보면 “죽은 00의 마을”이 되겠지요. 그 팻말을 보면서 차를 몰고 가는데 그 마을에서 어린애가 툭 뛰어 나왔습니다. 그러면 그 어린애는 죽은 겁니까, 산 겁니까? 죽은 겁니다. 죽은 것이면서도 곧잘 뛰고 있는 거예요.
“아저씨! 우리 마을 왜 안온대요?”
“너, 죽었잖아.”
“죽기는 왜 죽어요?
“너희 마을은 통채로 다 죽은 사람이다”
“아저찌, 누가 그렇게 이야기 하던가요?”
“너의 마을에 붙어 있는 팻말을 보니까 너희 마을 이름이 ‘죽은 마을’이래.”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어떻게 된다고 했습니까? “그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멋도 모르고 따먹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저것은 따먹으면 죽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런 게 과연 그것을 따먹었습니다. 따먹고 난 뒤에 갑자기 아담이 “어어? 숨이 막힌다….”고 했습니까? 여자가 그것을 따먹고 난 뒤 “어어? 숨 막혀….”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고, 그것을 따먹고 난 뒤에 “와, 맛있어. 더 먹고 싶어. 여보! 당신도 먹어.”
선악과를 따먹고 정녕 죽으리라고 했는데, 사람들은 자기의 숨이 끊어지는 줄 알았는데 그것을 먹어도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그러면 아담과 하와는 죽은 겁니까, 산겁니까? 자기 보기에는 산 것 같지만 하나님보시기에는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무슨 마을에 사는 사람입니까? 죽은 사람들의 마을에 살고 있는 겁니다. “목사님! 그런 이야기는 성경에 나와 있는 이야기인줄은 알지만 제가 못 믿겠습니다!”라고 한다면, “그러니까 네가 불순종의 사람이다”라는 겁니다.
방금 제가 하는 이야기가 안 믿겨진다면 불순종에 속했기 때문에 방금 제가 한 성경이야기가 안 믿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죽은 사람의 마을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 기준에 의해서 ‘나’라는 기준에 의해서 세상을 다시 보는 겁니다. 나는 한국인이니까 저 사람은 중국인이다, 이렇게 나를 기준해서 한국사람, 중국 사람을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나 기준이 아니고 “네가 선악과 먹지 말라는 말씀을 어겼기 때문에, 너는 말씀을 어긴 사람, 그러니까 말씀하고는 상관없는 사람, 말씀에 의해서 저주 받아야 될 사람이다”라고 통채로 우리를 그렇게 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볼때는 ‘나’ 중심으로 보지만, 하나님이 볼 때는 말씀 중심으로 보지요. 그래서 한번 정리해 봅시다. 순종하는 사람은 “… 가 아니고 … 이다”입니다. 순종하는 사람은 나 중심이 아니고 누구 중심이다?” 말씀중심이다. 말씀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말씀이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겁니다. 에베소서 2장 1절, 이 말씀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지요. 다시 봅시다.
에베소서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우리를 뭘 로 보는가? 죄와 허물, 이것은 같은 말인데,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은 자로 보는 그 하나님의 관점에 제가 적극 동의합니다. 적극 고개 끄덕이면서 저도 거기에 한 표 던집니다. 저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이것을 두자로 뭐라고 합니까? “아멘”이라고 합니다. “진실로 그러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바로 그것이 저인줄을 인정합니다. “아멘!” 이게 바로 순종하는 타입입니다. 그리고 불순종은 뭐가 되겠습니까? 그 반대가 되겠지요. 불순종은 “… 가 아니고 … 이다?” 순종은 “내 중심이 아니고 말씀중심”인데 불순종은 말씀 중심이 아니고 … 중심입니까? “말씀중심이 아니고 ‘나’중심이다.” 오늘따라 성경이 더욱더 간단해지네요.
아담보고 “아담아! 네가 왜 선악과를 따먹었어?” 하면, 말씀이 중심이 아니고 내중심이라면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내가 먹고 싶어서 따먹었다. 왜? 아니꼽나?” 이렇게 나올 겁니다. “너는 가지 말라는 오락실에 왜 갔어?” 엄마가 이렇게 물으니까 “내가 가고 싶어서 갔다. 왜?” 이렇게 나옵니다. “너는 왜 공부 안하고 놀기만 해!” “내가 놀고 싶어서 놀았다. 왜?”
전에 앞자리에 앉아 있던 분이 계셨는데 맨 날 제가 시키니까 그랬는지 뒷자리로 가버렸어요. 왜 갔어요? “내가 가고 싶어 갔다. 왜?” “당신은 한국에 살지 않고 미국으로 이민 갑니까?” “내가 미국에 살고 싶어서 갔다. 왜?” 할 때, 그 사람은 한국에 있어도 불순종의 사라이고 미국에 가도 불순종의 사람이죠. 한국에서 가난하게 살아도 불순종이고, 미국에 가서 부자로 살아도 불순종이고, 한국에 있어도 죽은 사람이고 미국에 있어도 죽은 사람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모든 사람은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입니다. 이게 맞잖아요. 아멘 아닙니까? 세종대왕이 죽은 이유는 죄와 허물로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보시기에 죽은 거예요. 우리가 움직인다고 산 것이 압니다.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산다는 것은 두 가지 종류가 있지요. 하나는 내 중심으로 산다는 겁니다.
내 중심으로 산다는 것은, 나의 세포가 움직이고, 먹어서 배도 부르고, 잠도 잘 자고, 아픈 것도 없이 그럭저럭 살아갈 때, “아, 나는 살았다. 누가 나보고 죽었다고 하면 나는 싫어. 왜냐하면 내 심장이 펄펄 살아서 뛰고 있기에.” 의사들이 뭐합니까? 흉부외과 의사들이 심장수술할 때, 펄떡 펄떡 뛰는 심장을 수술하잖아요. 그 수술 왜 합니까? 죽이려고 합니까? 살리려고 합니까? 살리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 산다는 것은 인간중심이기 때문에 그것은 산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진짜 산다는 것은 생명나무를 먹어야 사는 거예요. 그런데 그 환자가 몸이 아파서 죽어도 죽은 것이고 그 아픈 심장이 나아서 살아도 죽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산다”와 우리가 “산다”와 사는게 다릅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남자만 오천명을 먹입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살아보려고 살아보려고, 예수님이 떡 준다고 하니까 우르르 몰려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 예수님, 가지 마시고 맨 날 우리와 함께 계셔서 아침, 점심, 저녁, 때마다 우리에게 떡을 떼어주세요. 우리는 떡이 있어야 삽니다”하고 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어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이 나를 따라오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예, 맞습니다. 우리는 떡이 있어야 삽니다”라고 하니까, 예수님께서 “네 머리(사고방식)이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바로 산게 아니고 그게 바로 죽은 것이다”라고 합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먹어야 진짜 산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 때 사람들이 어떻게 했겠어요? “이러므로 제자중에 많이 물러가고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요 6:66)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되시렵니까? 예수님께서는 떡을 줘놓고 “아이고, 예수님 고맙습니다”하고 따라다니니까, “너희들은 지금 나를 따르는 목적이 너희들이 원하는 대로 살아 보려고 애쓰는데 그것은 진정 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죽어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교회 오실때 살려고 와야 하는데, 교회 와서 행동하는 것 보면 죽은 나를 더욱 죽게 만드는 그런 태도, 그런 신앙, 그런 기도, 자꾸 그런 것을 해요.
봉사하면 하나님이 복주겠지. 헌금하게 되면 축복 주시겠지. 이게 죽은 놈을 더 죽이는 거예요. 죽은 사람 더 죽이는 사람입니다. 언젠가 제가 설교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는 이런 것만 전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 가짜 복음인가”를 항상 같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무엇이 다른 예수이고 참된 예수와 다른 예수가 어떻게 다른가, 참 성령과 다른 성령이 어떻게 다른가, 다른 복음과 이 복음이 어떻게 다른가? 항상 다른 예수 다른 성령은 이렇고 진짜 복음과 진짜 예수님은 이렇다, 항상 두 가지를 다 이야기했습니다. 왜 두가지를 다 이야기했을까요? 그것은 이미 우리가 죽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죽은 인간은 생각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생각과 같지 아니하고 죽은 인간의 죽은 관점을 끄집어내는 엉터리, 가짜가 섞여 있으니까 그 가짜를 골라내기 위해서, 진짜를 찾기 위해서 다른 복음도 이야기하고 십자가복음은 이렇다고, 구분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그냥 떡 주면서 믿으라고 하면 믿습니다, 하고 말은 잘할 거예요. 믿습니다, 한번 할 때마다 짜장면, 믿습니다, 깐풍기, 믿습니다, 짬뽕 막 나오니까 그 믿습니다를 왜 못했겠어요.
금요철야기도회때 보세요. 믿습니다, 커피한잔, 믿습니다 커피두잔, 믿습니다를 계속 하잖아요. 그게 무엇이 살았는지, 무엇이 죽었는지, 기껏 자기의 인생경험을 통해서 생각하려고 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저만치 가버리고 ‘나의 인생경험상 어떻게 하면 살더라. 이렇게 철야기도 하니까 살더라,’ 자꾸 사는 요령만 배우는데요. 백날 교회 다녀도 그 사람이 가는 길은 뻔합니다. 지옥 갑니다.
얼마나 불순종의 영을 받았으면 말씀 가까이 오는 것을 그렇게 싫어할까요? 어떤분의 아버지가 매우 화를 내면서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그분은 다른 교회를 다닙니다. 화를 내면서 하는 말이, “그 교회를 다니는 내 아들이 성묘를 가는데 ‘성묘가 의미 없습니다’라는 이런 소리를 해서야 되겠는가? 목사가 되었으면 교인들을 가르칠 때 ‘성묘를 잘 해야 그것이 효도가 됩니다’라고 가르쳐야지 그런 식으로 가르쳐서야 되겠습니까”라고 하는 겁니다.
그분이 한마디 더 붙이기를, “내가 자식에게 성묘를 하라고 하는 것이 뭐가 나쁜지 목사님이 가르쳐줘 보세요”라고 이야기를 해요. 나는 그 말을 곧이듣고는 진짜 가르쳐 달라는 말인줄 알았어요. 그래서 제가 “예, 그게 뭐가 문제냐면요…”하고 말을 떼자마자 제 말은 듣지도 않고 “같이 교회를 다니면 집안이 화평해야지…”하면서 자기말만 계속 하는 거예요.
“그게 그렇거든요…” 하면 또 내 이야기를 끊어버리고 자기 이야기를 계속 하고요. 제가 가만 들어보니 그분은 교회를 수십년 다녔는데 성경 이야기는 안하고, 교회를 다녀서 가정이 화목하고, 자식이 되어서 부모 말 잘 듣고, 아버지의 권위가 높아지고 가정의 질서가 세워져서 남들 보기에 “야, 예수 믿고 참 화목하다”는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하는 겁니다.
그분 말은 “목사님, 그게 나쁜 겁니까? 다른 소리 하지 말고 그게 나쁜 거냐, 좋다는 그것만 이야기해 주소”라는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 그게 나쁘다고 가르치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온 가족이 하나가 되어야지 하나는 이교회 하나는 저 교회 꼴좋다. 그리되면 남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다 큰 자식 다른 교회 나가는 것은 이해는 합니다만(나는 그만한 자비심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어쨌든 아버지의 권위를 생각해서 아버지의 말에 승복해야지 왜 반항하게 만듭니까? 앞으로 목사님은 교인들을 그렇게 가르치면 안 됩니다”라고 저한테 막 훈계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찬스를 보고 있다가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다 싶어서 그때 딱 이야기를 했어요. “스데반 집사님이 그렇게 생각했을까요? 예수님이 그렇게 살았습니까? 사도바울과 선지자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선지자 같으면 그 문제를 가지고 저한테 따지겠습니까?” 선지자와 사도바울과 예수님은 말씀대로 살아야 사는 겁니다. 말씀을 알 때, 그래서 내 모습이 이렇다는 것을 알 때, 사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뭐라고 하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 내 가정이다, 내 자식이다, 나는 아버지다, 저 묘터는 내 묘다, 전부 다 앞에 뭐가 들어갑니까? 나(I), 오직 나, 전부 다 나가 들어가요. 왜 나 중심이 되었는가 하면 선악과 따먹은 불순종이 그대로 내 속에 들어와서 그래요. 아담이 말씀이고 뭐고 간에 “내가 따먹을테니 하나님은 가만 계시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해서 내가 따먹겠다는데 왜 말이 많아”라고 하면서 따먹고 난 뒤에는 그 자자손손 나오는 성질은 “내가 좋다는데 하나님이 왜, 내가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네가 왜?"입니다.
불순종이라고 하는데, 순종할 대상이 있을 때 불순종이지,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나밖에 모르는 인간이 무슨 순종과 불순종이라는 말조차 성립이 됩니까? 순종해야 될 대상인 하나님을 인정해야, 불순종도 아는 것인데, 자기가 전부고 자기가 돗대이며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데 그게 무슨 불순종이겠습니까? 그저 최선을 다 할 뿐이죠.
에베소서 2장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죄와 허물로 죽었다.” 이렇게 하거든 제발 이의를 달지 말고, “예, 죽은 것이 맞습니다”라고 사고방식(관점)이 바뀌어져야 된다는 말입니다. 왜?말씀이 그러니까.
“말씀에 천국과 지옥이 있거든.”
“예, 인정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다시 오신단다.”
“예, 인정합니다.”
“구름타고 다시 오신다는데 바람 부니까 춥나? 추워도 다시 오시면 될 것 아니냐?”
“바람불고 추워도 다시 오신다니 기다리겠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이게 나중심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는 내복도 안 입었는데 왜 나를 이렇게 춥게 하십니까? 너무 독하십니다. 너무 지독하십니다. 나를 눈물나게 하시는 겁니다.”
“내가 구름타고 온다고 했잖아!”
“그것은 그것이고 지금 당장 내가 춥잖아요.” 또 다시 아담의 더러운 성질이 그대로 튀어 나옵니다.
에베소서 2:2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좆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이 대목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인간입장에서는 ‘살았다’는 그것이 뭐라고요? 죽은 것이다. 저 사람은 관속에 있는 시체, 나는 아직까지 펄펄 살아 있으니까 산 것, 그것은 엉터리입니다. 관속에 있는 자도 죽은 자고 살아 있다는 나도 죽은 자입니다.
이게 누구의 관점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볼 때 그렇게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보든지 관계없이. 저 사람은 장애자고 우리는 멀쩡하고, 장애자든 멀쩡하든간에 그렇게 구분하지 말고. 하나님은 장애자냐, 멀쩡하냐를 보고 구분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죽은자냐, 산자냐?” 그것밖에 몰라요.
에베소서 2:2의 말씀은, 사람이 불순종을 하고 싶어서 환장한 것이 아니고, 에베소서 2:2의 말씀에 의하면 불순종의 영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불순종의 영이 따로 있고 사람은 그 영에 예속되어 있고 그 영의 지배로부터 자기 맘대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입니까?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한다고 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네 위에 영이 있구나. 네 머리위에 먹구름이 끼어 있구나. 네 위에 늘 검은 그림자가 너를 지배해서 움직이는구나.”
주님께서는 “야, 너, 행동 똑바로 해. 돌아다니지 마!” 이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영이 있구나. 수상한 영이 있구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수상한 영이 무슨 영입니까? 불순종의 영, 세상의 공중권세를 잡은 악한 영이죠. 불순종의 영이 있다는 말은, 제가 아까 순종하는 그 사람이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순종이 자기 능력껏 순종이 안 됩니다.
자기가 하고 싶어서 불순종을 하는 것이 아니고, 사탄에 눌려서 불순종을 할 수 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종하는 사람은 자기가 잘나서 순종하겠습니까? 뭐가 있겠습니까? 사탄의 반대말이 뭐예요? 성령 아닙니까? “네가 순종해라”라고 한다고 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말씀을 따라 살아야지’라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면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불순종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불순종하는 영이 더 세게 활동하기 때문에 그 올무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불순종을 불순종하게 더욱 더 드러낼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불순종을 유야무야 덮지 말고 이런 것이 불순종이라는 것을 있는 대로 다 들추어내야 합니다. 불순종이 활개를 치도록 해 줘야 됩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 그래야 말씀에 동의하는(순종이란 동의거든요) 본인들이 내 힘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낼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논리가 참 어렵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불순종하는 사람을 보고 “여러분, 순종하세요”라고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사람이 지금 순종 안하고 싶어서 순종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맘도 자기 맘대로 안돼요. 왜냐하면 불순종의 영이 역사하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안돼요.
그러면 나는 왜 말씀이 동의합니까? 나는 그 사람보다 더 뛰어나서? 믿음이 더 좋아서? 아니라는 말이죠. 그러니까 그 사람이 불순종할 수밖에 없듯이 나도 불순종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철저히 철저히 가져가야 됩니다. 그렇게 분명히 해 줘야,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는 것을 그때만 압니다.
예를 들면 수학시간에, 2575×3656÷2542×7896=? 일초 만에 답변하세요. 안되잖아요. 일초 만에 답을 낼 수가 없지요. 그런데 아주 귀엽게 생긴 어린애가 손들고 하는 말이 “376554…!” 답을 맞춰버렸어요. “너 어떻게 그것을 맞추었느냐?” 하니까 “내가 안했어요.” 이렇게 된 겁니다. “왜 네가 한 게 아니냐?” “이 문제를 누가 푸는데요? 아무도 못 풀어요. 나도 못해요. 나도 못하는데 풀었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내 공로가 아니고 보이지 않는 성령이 계시다는 것을 그것을 통해서 증거 할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그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철저하게 불순종으로 계속 가야 됩니다. 동의를 안해 주시는 분위기인데요.
에베소서 2: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본질상 무슨 자녀라고 합니까? 진노의 자녀입니다. 진노의 자녀인데 그 앞에 뭐가 있습니까? 세 글자, 본질상. 본질상의 뜻이 뭡니까? 그 천성 안 고쳐진다는 말입니다. 본성이, 천성이 원래 타고난 것이 그렇다는 겁니다. 천성이라는 것은 자기 힘으로 못 바꿔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느냐 하면, 다른 사람들이 불순종 할 수밖에 없는 그것을 통해서, 저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불순종하는 것은 정상이고, 오히려 순종하는 것이 비정상으로 여겨야 됩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시간에 항상 불가능한 이야기만 합니다. 저는 이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저는 설교시간에 교인들이 도저히 지키지 못할 것만 골라서 이야기합니다. 뭐냐? “예수를 믿으세요.”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을 믿으세요.” 그 말입니다.
그래서 누가 “예, 믿습니다.” 그러면, 거짓말! 그 때 그 사람의 답변이 “맞습니다. 제 힘으로는 안 믿어지던데요.” 왠지 믿어진다면 그것은 기적입니다. 제가 거짓말! 하니까, “제가 얼마나 기도를 했는데요?! 제가 성경을 몇 독을 했는데 그것을 안 믿는다고 하는가요?!” 그러니까 거짓말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스스로 자기 본질을 바꿀 사람은 없어요. 자기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진노를 자기가 손 저어서 철거시킬 사람 없습니다. 아무도 없어요. 그 누구도 진노의 자식을 축복의 자식으로 자기 힘으로 바꾼 적이 없어요.
‘진노의 자식’의 뜻이 뭡니까? 그 아버지의 그 자식이라는 말입니다. 아버지가, 불순종의 영인 악한 사탄이라면 ‘너는 곧 사탄의 자식이 맞다’는 말이죠. 요한복음 8장에서 너희 아비는 마귀라고 하죠. 그러니까 너는 마귀자식이라는 말입니다. 아비는 마귀고 나는 마귀자식입니다. 어쩌란 말입니까? 그래 사는 거지 뭘 어쩝니까?
만약에 아버지가 술주정을 하기에 아들이 “아버지, 술 잡수시면 안돼요”하고 아버지에게 대드니까, 옆에 지나가던 사람이 “함부로 아버지에게 대드는 것을 보니까 술주정하는 그 아비에 그 자식이 맞구나”하면 끝나는 겁니다. 불순종의 자녀 같으면 뭘 해도, 예수 믿고 하나님을 믿어도 그것은 불순종을 하는 또 다른 우상을 숭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순종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해야 됩니다. 이 세상에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아비가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마귀의 힘에서 벗어나서 순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순종은 이것이 바로 순종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누가 오셨는가? 하늘에서 특별한 분이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의 주변 사람들은 한명도 남지 않고 전부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오직 끝까지 순종하신 분은 누구입니까? 역시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 옆에서 구원받아 낙원에 간 강도 같은 경우에 뭘 알았느냐 하면, 예수님만이 순종하신 분이고 나는 내 힘으로 구원될 수 없음을 예수님을 통해서 안거예요. 반대쪽 옆에 지옥 간 강도는 뭐라고 했냐 하면, “예수, 너나 나나 똑같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사람은 당신과 나는 다르다는 겁니다. 왜? 나는 불순종이고, 당신만이 아버지 앞에 순종해서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똑같은 인간인데 예수님을 유달리 다른 분으로 인식했습니다. 여기서 다르다는 말은, 예수님이 키가 크고 인물 좋다는 그런 외모가 다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아비가 마귀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죄 없는 분은 예수님뿐이고, 나는 예수님 앞에 비추어 볼때 죄가 있는 인간이 맞고, 하나님 앞에 지옥가도 할 말이 없습니다. 옳습니다. 나는 지옥가야 마땅합니다”라는 그것을 예수님을 통해서 인정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사람입니다. 방금했던 이 이야기가 마태복음 12장에 나옵니다.
마태복음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느니라.”
저는 이 대목을 설명하면서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는 완전히 가짜라고 말씀드립니다. 하늘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고, 하늘나라는 이미 왔고 이미 온 하늘나라에 못 들어가는 사람은 주님 재림하실 때의 천국도 못 들어갑니다. 한국교회 전체가 이미 온 하늘나라를 이야기하지 않고 죽어서 가는 천국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가짜 천국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천국은, 천국이 너희 속에 이미 임하지 않은 사람은 나중에 예수님이 재림해도 지옥 갈 사람입니다.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들이 생각하는 천국입니다. 천국이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택시 대절해서 쫒아 갈 겁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는 천국은 우리가 지어낸 상상의 세계입니다.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들이닥치는 거예요. 들이닥칠 때 어떻게 들이닥치는가 하면, “너는 이미 죄와 허물로 죽은 자야!”라고 하면서 들이닥칩니다. 갑자기 펄펄 살아 있고 움직이는 나보고 죽은 자래요. 이런 식으로 천국이 옵니다. 이런 식으로 천국이 오면 ‘아하, 그동안 내 주인은 마귀였구나“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알게 된 것이 바로 뭐가 임해서? 성령이 임하니까, 새로운 주인이 교체가 되니까 전주인은 가짜였고 진짜 주인은 주님이라는 것을, 전 주인이 나에게 대장질을 해서 늘 ‘나, 나, 나’ 나밖에 모르고, 내 아버지, 내 아들, 내 성묘, 내 집안 꼴이 어쩌니, 하면서 매일 나밖에 모르겠다는 식으로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평소에 나만 챙기면서 살았던 것은 그동안 마귀가 그렇게 유도했고 이제 새로운 영이 오고 나니까 나밖에 모르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보시기에 죽은자라는 것을, 말씀에 입각해서 말씀이 가지고 들어오는 그 영이 임할 때 “하늘나라는 이미 너희 속에 임했다”고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못 알아듣습니다. 못 알아들으니까 뒤에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의 예화를 들었습니다.
마태복음 12:28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 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집주인이 커피잔을 들고 ‘이것은 내것이다’하고 있는데 갑자기 도둑이 들어와서 집주인을 때려서 실신시키고 “야, 이 컵 예쁘네, 하면서 가져갈 때, 그 도둑이 예수님이 그 집주인이 악마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누구에게 속했다? 마귀에게 속했다. 에베소서 2장 같으면 원래 불순종의 영들에게 속했는데, 갑자기 도둑같이 와서 덮쳐서 우리를 빼앗아 갈 때, 그 훔쳐가는 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냐, “하늘나라가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늘나라가 임한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주님께서는 도적같이 임해서 나를 빼앗아 갑니다. 나는 주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라는 겁니다. 전에는 나밖에 몰랐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오셔서 훔쳐서 가져가는 거예요. 훔쳐 가니까 이 컵이 주님이 달릴 때 마다 달그락 달그락 하죠.
“아이고, 주님, 천천히 좀 가이소. 힘들어 죽겠다” 합니다.
“까불지 마! 그래도 너는 내 품에 있잖아.”
“주님, 아스팔트길로 가면 안 됩니까? 이 자갈길이 너무 험합니다.”
“까불지 마! 그래도 너는 내 품에 있다. 이미 너는 내 것이 되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인생 살다보면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있고, 부하게 사는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것이나 부한 것을 가지고 죽었나, 살았나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누구 품에 있느냐를 가지고 살았다 죽었다, 하는 것을 따집니다. 예수 품에 있으면 살고 예수 품이 아니고 그냥 마귀 품에 있으면 “너는 불순종 많이 해라. 너는 죽었다”고 그렇게 보는 겁니다.
제가 여러분을 좀 기분 나쁘게 했을지 모르겠는데, 부자 혹은 가난한자 라는 그런 구분이 내 욕망중심으로 분류하니까 그런 구분이 되는데 그것은 말씀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귀에게 속아서 그런 분류를 해 대는 겁니다. 여러분이 아침에 눈뜰 때 나오는 기도가 뭡니까? 물론 겉으로는 “오늘도 이 몸의 하루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나 그렇고 진짜 속으로 하는 기도가 뭡니까?
“주여, 돈만 있으면 만사가 형통되니 부자 되게 해 주옵소서. 많이도 바라지 않습니다. 75억정도만 주옵소서. 갑자기 우리 집터에서 석유가 올라오게 해서 집값이 올라가게 해 주옵소서.” 그게 속마음이고 진심이지만 차마 그것을 어떻게 겉으로 기도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주여, 오늘도 영광되게 하옵소서”라고 하면서 살짝 페인트칠을 해 놓는 겁니다.
우리에게 그런 현상이 일어날 때,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앞으로 살아가면서 철저하게 불순종이 뭐라는 것을 알아가는 평생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속에서 나오는 것이 하나 하나 다 불순종 밖에 안 나와요. 왜냐하면 이미 주님 품에 있기 때문에 주님이 마구 털어대니까 속에 있는 앙금들이 다 튀어 나오는 거예요.
우리가 주님 품에 있지 않으면 자꾸 자기를 긍정하려고 하고, 자기를 정당화 시키려고 합니다. ‘아니야, 나보다 더 나쁜 사람이 있는데 내가 뭐가 잘못이야. 나보다 악한 사람이 더 많은데, 사람까지 죽인 사람도 있는데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잖아’ 이렇게 자꾸 자기 잘난척 하고 자기변명하면서 살지만, 이미 주님품안에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계속 달그락 달그락 합니다.
“주님 좀 살살 가이소.”
“살살 가기는 뭘 살살 가.”
펄펄 뛰다 보니까 전에 있던 죄인 줄 몰랐던 것 까지 다 죄로 튀어 나오는 거예요.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여기 컵이 있는데 그 컵 안에 찌꺼기가 남아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도둑이잖아요. 그 강도가 이 컵을 훔쳐서 마구 뛰니까 여기 묻혀 있던 찌꺼기들이 마구 튀어나와서 내 눈에 다 띄는 겁니다. ‘어? 이런 나쁜 짓도 있었네.’
이렇게 띄게 될 때, 에베소서 2:3에 있는 대로 전에는 너희가 이런 죄들이 있었는데 그 뒤에 4-6에 보면, 그런 너희를 누가 구원했다? 주인이 바뀌는데 새로운 강도가 주인으로 왔죠. 예수님이 어떻게 했습니까? “살려줄게?”입니까? “살려줄게”가 아닙니다. 에베소서 2:6,7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에베소서 2:5,6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예수 안”이 천국입니다.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누구 안에 있으면 천국이라고요? 강도가 와서 컵을 가져가면 그것이, 예수 (품)안이 이미 천국입니다. 천국은 아들의 나라입니다. 예수 안이 천국이기에 그 천국에 있으면 누가 뭐래도 그 사람은 살았고 산 사람이 때문에 뭐가 튀어 나옵니까? 그 동안 몰랐던 허물들, “내 속에 이런 본질들이 들어 있었구나”라는 것이 내 눈앞에까지 튀어 오르는 겁니다.
이게 성경에서, 하나님의 관점에 ‘살았다’는 겁니다. 내가 날 붙들고 나의 관점에서 “이근호, 너는 살았어” 그게 아니라 “내가 주님 붙들고 살았어”라고 되는 거예요. 여기 주님이 계신데 “주님, 고맙습니다” 하고는 (주님을 놓고 다른데를 쳐다보면서) “나는 살았어!” 이게 아니라 주님을 붙들고 주님을 보면서 “나는 살았어!”입니다. 그 사람을 보고 하는 말이 “너는 못난이. 너는 죄 많은 인간!”이라고 하면 “그래, 나는 못났어. 나는 죄인 맞아!” 그것은 “나는 주님 붙들고 살았다”는 말이 아닙니까!
사도바울이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오신 의의라고, 예수님이 십자가지시고 부활하신 복음의 진수며 의의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누굴 붙들었어요? 예수님을 붙들었는데 스데반 집사님에게 뒤에서 뭐가 날아왔습니까? 돌맹이가 날아왔어요.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이 어떻게 되었어요? 남들 보기에는 피를 흘리고 남들 보기에는 죽었는데 스데반 집사님은 천국에 있었습니다. 천국 안에는 죽음이 없습니다. 천국에는 죽어도 그게 산사람이 됩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고 나는 죽은자의 하나님이 아니기에 내 안에 있는 사람은 몽땅 다 살았다! 누가 죽었다고 하는거야! 내가 살았다고 하는데!” 주님 안에 있는 자는 모든 자가 살았습니다. 왜? 죄와 허물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가 오게 되면 그 사람이 비록 돌에 맞아 죽어도 하나님보시기에 “너는 살았다!”가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너는 생명이 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영생입니다. 관점이 바뀌어 질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진짜 산 사람입니다. 그것을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에베소서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네요.
우리교회(IP:220.♡.176.141)
08-03-16 19:15
서울080215b엡2장6절
20080215-(b)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6강 이름 : 오용익 2008-03-07 09:59:15
에베소서 제 6강 (이 근호목사, 2008년 02월 15일(b), 서울의존교회)
시커멓게 소나기구름이 우리 머리위에 왔을 때, 그래서 빗방울이 마구 우리 머리 위에 후두둑, 떨어질 때 사람들은 어디를 쳐다보지요? 하늘을 쳐다보지요. 성도는 말씀의 소나기가 쏟아져 내려오는 하늘을 쳐다보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성도를 하늘에 앉혔다고 하니까, 그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남들 보기에는 “그런 소나기가 어디 오는데?” 하겠지만 사도바울이나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하늘에 앉히게 했다”는 겁니다. 하늘에 앉혔으니까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하늘의 소나기를 온몸에 다 부딪혀 맞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을 쳐다보지 않고 개인적으로 자기를 쳐다보는 사람들은 자꾸 누구를 보느냐 하면 내편, 내 사람, 나한테 이익이 되는 사람, 내 친구, 내 가족 자꾸 두리번두리번 살핍니다. 누구 나한테 도움 줄 사람이 없는가, 내가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는가, 내 동지일까 아니면 원수일까, 자꾸 이런 것을 생각하는데 이미 사도바울은 어디를 쳐다본다고 했습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셨는가, 그것을 쳐다보기 때문에 무엇을 기대하지 않습니까? 주위 사람들을 내가 이용하려고 애를 안 쓰지요.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실망했어. 저 사람이 아니면 내가 성공했을 텐데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실패했기 때문에 두고 보겠다. 내가 너를 반드시 복수하고야 말겠다.’ 이 사람 특징이 뭐냐 하면 자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봐요.
‘저 사람은 내가 십년동안 믿었는데 나를 배반하다니! 아, 내가 저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다니!’ 이런 식으로 자꾸 주위를 봐요. ‘저 사람은 10년 동안 나를 외면하더니 이제는 내편이 되었구나. 고맙구나!’ 맨 날 사람들만 쳐다보고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사도바울은 뭘 쳐다봅니까? ‘저 멀리서 소나기가 오는구나. 주의 말씀이 몰려오네. 이 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다 떨어지네, 빗방울 떨어지듯이 다 떨어지네. 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소나기 바라보고 살련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은 이미 하늘에 앉힌 사람이고 그 사람은 이런 모습으로 살아갑니다. 그 반대로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은 두리번두리번,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바로 어린애 같아서 맨 날 옆에 사람만 쳐다보는 겁니다. 이번에 숭례문 화재 일으킨 그 사람이 말씀에 순종했습니까? 그 사람 말씀과 관계없지요. 자신의 억울함을 사회가 안 알아주니까 복수하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까?
나이 든다고 사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옆만 쳐다보면 죽을 때까지 옆만 쳐다봅니다. 하늘을 쳐다볼 줄을 몰라요. 사람이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를 낚아 채서 빼가고 있는 거예요. 자기 품에 안아서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나를 낚아채는 주님이 안보이면 허전하니까 나만 보이니까 살기 위해서 이 사람 저 사람 이용하고, 사기치고, 복수하게 되는 겁니다. “제발 좀 날 알아줘. 안 알아줘? 그럼 불 질러 버린다.” 이렇게 됩니다.
맨 날 나만 쳐다봐 주고, 나를 위로해 주고, 나에게 도움을 주고 ‘나 너 없이는 못 살겠다’하고 붙드는데 귀찮다고 하면 복수하고. 아침 드라마 내용이 순 그겁니다. 아침 드라마에 “주께서 재림 하십니다” 이런 것이 나오든가요? 전부 다 복수요, 원한이요, 한 맺힘이요. 고부갈등, 가정불화, 가정풍지박산, 이혼문제, 자식이 말 안 듣는것, 도박, 도벽, 전부 다 뭐냐? 너무나 사람들에게 기대를 해서 그래요.
사람들을 의식해서 그래요. “누가 나를 위로해 주지? 여러분!” 가수 윤 복희가 이 노래를 불렀잖아요. “네가 뭔데 누가 너를 위로하나? 마귀 자식이고 진노의 자식 주제에.” 무슨 위로 받기를 바랍니다. 주님 없이는 살아도 사람 없이는 못살겠다는 겁니다. 아무리 그 사람 속에 말씀 백독해서 집어넣고, 철야하고, 언약, 십자가복음을 아무리 집어넣어도 이 보자기가 찢어져야 하는데, 그 보자기를 튼튼히 하는데서 성경공부 참석하니 … , 이 자아라는 보자기가 찢어져야 됩니다.
제가 주일 설교 때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아의 밑바닥을 보라고요. 자아의 밑바닥이 있습니까? 없어요. ‘나’라는 것은 밑바닥조차 없는 거예요. 없는데도 불구하고 밑바닥 만들고 뚜껑 만들어서 ‘여기서 여기까지는 자아다’ 하고 나서니까 ‘누가 나를 알아주지’라고 나서게 되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선악과 따먹은 것을 우리는 잊어버리지만 주께서는 잊지 않습니다. 끝까지 따라갑니다. “네가 선악과를 따먹었지? 선악과 따먹은 본성상 그 본질은 평생을 통해서 나올 거야. 너밖에 모르는 그 성질 계속 나올 거야.” 계속 나오잖아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선악과를 훼손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제가 부끄러워서 숨었습니다”하고 자기만 생각해요.
전부 다 자기 생각만 해요. 혼자 산다는 것이 버릇이 되어서 하나님, 하나님 해도 귀에 들어오지를 않아요. 하나님은 잠시 이용물로 생각할 뿐 남는 것은 결국 나 밖에 남지 않아요. 내가 눈물 흘릴 때 누가 눈물 닦아 줍니까? 내 손수건 밖에 더 있습니까? 내 손수건이 내 눈물을 닦아 주는 겁니다. 지옥 가는 나를 위로해 주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괜찮아’라고 누가 위로해요? 나밖에 더 있어요?
그게 바로 선악과 따먹은 그 성질, 그 값을 하는 겁니다. 아담이 어디 갑니까? 맨 우리가 제 2 제 3의 아담인데 어디 가겠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악과를 따먹어서 말씀이 자리할 수 없는 그 상태, 그 상태를 뭐라고 했습니까? 죄와 허물로 어떻게 되었다고요? 그것을 죽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죽어 있는 겁니다. 죽어 있다는 말은 생명이 나올 것이 없다는 겁니다. 생명이 안 나오니까 죽어 있는 것이고 영원히 못사니까 죽어 있는 거예요.
100년을 살아도 죽어 있는 겁니다. 아담의 계통이 900년 이상씩 살았아도 다 죽었어요.(창 5장) 이 문제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 문제는 인간차원에서 우리가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이미 악한 영의 지배를 받고 있는데 왜 자꾸 우리가 해결하려고 하느냐? 이미 그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 계시다. 예수님이 바로 그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어야 되고 의지해야 될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
에베소서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자비하심”이 나오는데 이것이 어디에 나오느냐, 4절에 보세요. 3절에 보면 “전에는 우리도 다 그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라고 되어 있고 그 다음에 4절에는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그 다음에 뭡니까, “사랑” 나오고, 그 다음에 “큰 사랑”이 나오죠.
긍휼이란 불쌍히 여김입니다. 그 불쌍히 여김이 어떠하다고요? 풍성하죠. 시골장터에서 밤이나 대추 담아 줄때에 딱 맞게 담아 줍니까, 아니면 풍성하게 담아줍니까? 풍성하게 넘치게 담아주죠. “어어, 그만 담으소. 왜 이렇게 많이 줍니까?” 풍성하죠. 넘치도록 주지요. 넘치도록 준다는 말이 뭡니까? 우리가 죄지은 것 분량 이상으로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죄지은 것이 요만큼이라면, 하나님의 긍휼은 이만큼 크게 넘치는 거예요.
옷 큰 것 입은 것 보고 뭐라고 합니까? “와 이리 풍덩하나?”라고 이야기하지요. 풍성하다는 말은, 새삼스럽게 내가 나를 걱정할 이유가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새삼스럽게 내 구원에 대해서 내가 차후에 근심하거나 고민하거나 염려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긍휼 받아 놓고서 죄지으면 어떻게 됩니까, 죄지으면 멸망하느냐?”고 이렇게 이야기들 하는데 죄지어놓고 긍휼을 입어도 그 긍휼이 어떤 긍휼이냐 하면, 차고도 넘치고 또 넘치는 풍성한 긍휼, 불쌍히 여김이기 때문에 우리가 죄지은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자비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사랑이 그냥 사랑이 아니고 어떤 사랑입니까? “큰 사랑” 아닙니까? 우리가 예상도 못할 정도로 큰 사랑이라는 겁니다. ‘이 정도까지 인줄 몰랐다’라고 할 정도로 큰 사랑을 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을 알 때마다 앞에 한자, 그게 무슨 자입니까? ‘크다’는 생각을 자꾸 갖게 만들어요. “와, 크네! 앗따, 넘치네! 아, 풍성하네! 아이고, 왠 큰 사랑이야!” 그냥 “사랑 받았습니다”라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랑을 떼어 버리고 “큰 것 받았습니다”라고 되어야 합니다. “풍성한 것 받았습니다”라고 되어야 한다고요.
그것도 모르고 어떤 분은 “야야, 어젯밤 꿈자리가 이상타. 조심하거래이.” 세상에, 어떤 행동을 조심하면 그때에야 구원이 되는 줄을 알고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꿈자리가 어지러운 정도가 아니라 360도가 돌아가도 큰 게 있는데!! 주시고 더 크게 주십니다. 넘치도록 풍성하게 주십니다. 왜 그렇게 주시느냐 하면, 네 구원이 네 행함이나 영적인 수준이나 종교적인 기도나 열성, 그런 문제를 떠나 있다는 겁니다.
네가 구원되는 것은 창세전에 예정된 대로 그대로 실시하다 보니까 구원되었지 새삼스럽게 조바심을 느끼고 초조해 하면서 ‘아, 죄지으면 안 되는데’ 하면서 조심스럽게 한다고 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여기도 그런 어린아이가 있는데 조심스럽게가 아니고 망나니처럼, 엎어지고 자빠지고 헌금함 뒤집어엎고 자기 맘대로 합니다. 그렇게 자기 맘대로 해도 의존교회 창문 밖으로 뛰쳐나가지는 않잖아요.
놀아도 이 안에서 논다고요. 저 아이는 백날 놀아도 이 안에서 놀잖아요. 이 안에는 뭐가 통합니까? 큰 게 통합니다. 주시되 크게 주십니다. 크게 주시는 것을 모르고 항상 ‘내가 회개 이만큼 하면 이만큼 주시고’ 자꾸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아직도 내 행함, 나를 못 잊어서 그럽니다. 여러분, 잊읍시다. 누구를 잊나? 나를 잊읍시다.
더 어렵게 이야기 해 볼까요? ‘나’라는 것은 없고요. ‘나’라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조립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조립해서 ‘나’가 생긴 겁니다. 이걸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습니다. 이 그림은 이 자리에서 최초로 그리는 겁니다. 여기 있는 이 세숫대야에 하나님의 믿음이라는 선물, 약속의 선물이 떨어지면, 그걸 기름방울이라고 해 봅시다.
기름방울은 물에 섞이지 않잖아요. 위에 둥둥 뜨지요. 뜬 것이 뭉쳐진 것이 바로 내 모습입니다. 뭉쳐진 것이 기분이 나쁘면, 따로 떨어져서 동쪽 편으로 가서 ‘나’, 동쪽 편으로 갔던 것이 서쪽 편으로 가서 ‘나’, 서쪽에 있는 것이 남쪽으로 가서 ‘나’, 이런 식으로 아프리카에 가서 ‘나’, 미국에 가서 ‘나’, 열두 살 때 ‘나’, 스물 살 때 ‘나’, 다 달라요.
열두 살 먹은 애 보고 “너 뭐 할래?” 그러면 뭐라고 답할까요? 저는 열두 살 때 중국집 해보는 것이 소원이었어요. 마음껏 자장면을 먹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중국집하는 사람이 그렇게 부러웠어요. 그 사람은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지 않고, 이것만(면 빼는 일) 하면 되잖아요. 얼마나 편합니까? 택시 운전사도 그렇게 부러웠어요. 왜? 이것만(핸들 잡는 일) 되잖아요.
“어디까지 모실까요?”
“화곡동이요.”
“알겠습니다. 화곡동, 모시겠습니다.”
얼마나 편해요. 국가와 민족 생각할 것 없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럴 때는 뭔가 안정되어 있는 직업이 굉장히 부러웠어요. 나중에 커서는 돈이 안 될때 남에게 비웃음 당한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중국집도 좋고 택시 기사도 좋은데, 돈이 안 되면 아무 이유도 없이 돈 없다는 이유 때문에 인간대접 못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여기에 복수심이 첨가되면 뭐가 나옵니까? ‘역시 나도 출세해서 돈 벌어야지.’
이것은 열두 살 때 자아가 아닙니다. 열두 살 때 자아는 평화로운 자아입니다. 왜? 어린 저에게는 그저 자장면 면발 끊어서 애들에게 먹여 주면서 “야, 나중에 엄마하고 자장면 먹으로 와라!” 하던 그렇게 푸근하고 인심 좋던 아저씨로만 보였습니다. 물론 실상은 모르죠. 밤이 되면 나이트클럽에 가서 춤추고 노는지 그런 것 까지는 알 수 없죠.
제가 어릴 때는 주위에 있는 어른들이 다 인정 많고 좋았어요. 그러나 나중에 커서 보니까 이미 열두 살 때의 그 자아가 아닙니다. 스무 살 때, 40살 때, 50살 때의 자아가 또 달라요. 아버지 나이가 40인데 17살 먹은 형과 15살 먹은 동생형제가 있을 때 아버지가 “얘들아, 너희들은 내가 마음껏 다 줄게”했던 그 자비로우신 아버지.
나중에 아버지는 70이 되고, 그 자식들이 40이 넘어서 자기 자식들을 거느리고 살아갈 때, “아버지, 지금 사업자금이 필요한데 융자 좀 그냥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뭐라고? 내가 너희들을 소송 걸어서 고소해 버리겠다”고 나오죠. 그 때 그렇게 자비롭던 아버지가 노망이 들었는지, 치매가 걸렸는지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일 년에 세 번(설날, 추석, 생일) 찾아오면 다가?” 세 번도 나중에 버거워서 두 번밖에 안 찾아오지만. 그런 식으로 철저히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되고 말지요. 이게 기름 덩이처럼 어떤 자아가 형성될지 ‘나’도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며느리도 모르고 시아버지도 모르고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자아에 대해서 꼭 알아야 된다는 말입니까, 몰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몰라도 됩니다. 그것을 알아서 어디에 써먹을 겁니까?
마귀는 자꾸 그 자아를 챙겨서 그 자아를 계속 유지하고 가져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믿음이라는 선물(그림에서 세숫대야에 담기는 기름)은, 나를 어떤 인간으로 만들지에 대해서 그 믿음주신 주님의 소관이지 내 소관이 아닙니다. 앞으로 내가 어디 가서, 아프리카든 미국이든 뉴질랜드든 어디 가서 어떤 인간이 되고 어떻게 살고, 무슨 사기를 칠지 무슨 사고를 당할지 그것은 주님이 아시지 나는 몰라요. 나도 나를 모르니까요.
다만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믿는 것은 이 성경 말씀을 믿는 거예요. 오직 선물로 온 믿음으로만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 그리고 내가 구원되는 것은 윗동네, 마귀와 예수님관계지, 내가 어떻게 최선을 다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이 성경말씀 복음대로 된다는 이것, 이 말씀의 소낙비는 우리가 어디를 가든, 미국가든 영국가든 아프리카를 가도 거기에도 여전히 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위를 보시고 말씀을 보셔야 되는 겁니다. 그걸 보지 않으면 ‘내가 누구를 의지해서 살꼬? 내가 누구를 기대서 살꼬? 내가 누구와 사귀는 재미로 살꼬? 나는 남편 없이는 못살겠다. 나는 남편 없이는 못 살겠다.’ “죽을 때 같이 죽자. 당신 없이 내가 우예 사노.” 처음 한 두 번은 듣기 좋지만 나중에는 부담됩니다. 보통 남자 나이 50이 넘으면 자꾸 아내를 붙드는데 이제는 여자 쪽에서 귀찮아합니다.
자꾸 위에서 내려오는 말씀을 생각 안하고, 지금 하늘의 지형도가 어떻게 짜여져 움직이는지는 생각 안하고, 맨 날 교회 와서 위로받으려고 하고 교회 와서 칭찬 받으려고 하니 칭찬받을 때는 천사지만 누가 욕하면 악마가 되어버린다는 이야기가 누가 쓴 글에 나오잖아요(십자가마을자유게시판 753번 이미아성도의 글, 성화는 없다).
제가 기절초풍할 글이라고 했습니다. 저한테는 그렇게 보였어요. 이 미아 성도님도 지금은 그렇게 좋은 글을 썼다가도 한 2년 뒤쯤에 혹시, “행해야 구원받는다!”고 하면 “돌았나?” 하겠지요. 그러니까 우리를 단속하자, 혹은 주의하자는 말이 아니고, 지금의 나를 ‘나’이게 한 주도권이 어쨌거나 ‘나’에게 있지 않다는 거예요. 믿음이 선물이라는 것이 뭐냐? 8절에 봅시다.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오늘날 목사님들이 꼭 해 주셔야 됩니다.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라는 말을 꼭 해야 됩니다. 물론 이 말을 하면 교회 안 나오고 튀어나갈 사람 한둘이 아닙니다. 많이 튀어나가 버립니다. 나가든 말든 간에 사도바울은 지금 영적으로 하늘나라차원에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목사님들도 하늘나라 차원에서 설명해 줘야 합니다.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반드시 앞에 뭐가 붙어야 돼요.
“목사님,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
“누구한테서 났는데요?”
“나한테서 나왔는데요. 내가 믿으니까 믿는 주체자가 ‘나’ 아닙니까? 내가 믿는 것이니까 나한테서 나왔지 누구한테서 나왔겠습니까? 저 사람이 믿어서 내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잖아요. 내가 믿으니까 내가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까?
“땡! 틀렸습니다. 주님에게서 난 믿음이 당신을 구원했습니다.”
“그럼 나는요?‘
“당신에게서는 믿음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애비가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주님 사랑하는 것 봤습니까? 결국은 주님이 뭔가 심어놓은 것이 있고 집어 넣는 것이 있어서 당신이 예수님덕분에 구원받았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이렇게 말했을 때 삐져서 안 나오는 사람은 자기가 가짜인 것을 들통냈고, “맞습니다 맞고요”하면 고개 끄덕이고 인정하는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가 그 사람 속에 있고 그 사람이 하늘나라 속에 있는 사람이 맞습니다. 왜? 그것이 성경대로 이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의 목적이 뭡니까?
에베소서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자랑하지 말고 누구 자랑하라고요?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지 모르지만 앞으로 오는 세대에, 우리 가운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일을 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도록 하기 위해서 난데없이 진노의 자식한테 그런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나서 소낙비 같은 말씀을 쳐다보면서 말씀에 의해서 내가 되었고 말씀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에베소서2:1-9의 에서 이야기한 그대로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의 강의를 들어본 느낌이 어떠냐고 묻는다면 이런 답변이 나와야지요. “사도바울 그 사람은 세상일은 모르고 그저 주님께서 하신 그 일밖에 모르네요”라는 평이 나와야 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이 그렇습니다.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가든지 간에 하늘에서 이 지상을 향하여 어떤 폭탄을 터뜨리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