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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7 대구강의 3 - 지옥의 하나님 17자유게시판출애굽기

07 대구강의 3 - 지옥의 하나님 17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07 대구강의 3 - 지옥의 하나님 17

07,04,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이방나라의 특징 - 자기 존재로 출발 !!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교재 63페이지 '이방나라가 된 이스라엘' 인데, 여기서 '이방나라' 라는 것은 상당히 불교적인데, 여기서 불교적이라는 것은 존재자체에 대해서 가치를 논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데, 즉 존재한다는 것은 일단 좋은 것으로 여겨야지, 나쁘게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있는 것 자체를 가지고서 시비를 걸지 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죄다, 선이다, 악이다" 라고, 그런 말을 하지 말고, 기존의 있는 것을 가지고서 한번 잘해보자는 것이다. 우리가 있게 해달라고 해서 우리가 이렇게 있는 것도 아니니, 그러니 있는 것을 가지고, 이런 우리의 존재를 가지고 시비를 걸지 말자고 하는 것이 바로 이방종교의 특징이고, 우상숭배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여호와 하나님은 이런 존재에 대해서 반드시 시비를 걸고 나오는데, 즉 존재를 존재케 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창조성과 관련지어서, "이것이 바로 죄로서 있는 것이다. 혹은 의로서 있는 것이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것은 너희들이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다. 하지만 존재를 존재케 하신 분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너희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야 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날아라 독수리 오형제 !!

이것을 소위 '독수리 날개' 라고 하는데, 이것이 출애굽기 19장 4절에 나오는데,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데리고 간다는 것이다. 즉 "너희들이 두 발로 걸어서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라는 것이다. 약속의 나라는 현재에 있는 자기 존재의 근원을 가지고 넣어주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이 존재의 근원에는 우리 인간들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맹세, 즉 그분의 언약이 보드처럼 '좌악' 깔려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독수리도 하나님께서 보내주셔야만 날개로 업든지 말든지 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출 19: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출 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 이방신들의 특징 - 렛 잇 비 !!

이렇게 성경말씀에 있는 여호와는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문제를 삼는 반면에, 이방신들은 "그냥 생긴 대로 살아라" 라는 것이다. 살아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디에도 다 계시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전도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고, 그러니 "신이 있다" 라고 이야기하는 경우에는 약속의 백성이라고 하기 곤란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너희들을 독수리 날개로 업어서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데리고 왔다. 그래서 너희들은 언약의 백성이다" 라고 했을 때에, 그 언약의 백성이 출애굽기 19장 이후에 나오는데, 이렇게 언약의 백성이 되려면 언약을 존재의 근거로 삼아야지, "내가 여기 있다" 라고 하는 자기 존재를 근거로 삼아버리면, 언약의 백성과 비언약의 백성이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언약이 어떻게 우리 속에 스며드는가?

그렇다면 "언약이 어떻게 우리 속에 스며드는가?" 라는 것인데, 이 언약이 어떻게 우리 속에 파고들고 개입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래야 구약해석에 드디어 여명이 비친다는 것이다. 구약전체를 해석할 때, "내가, 즉 '나' 라는 존재가 구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라고 하면, 100% '꽝' 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이 성경을 보고 있는 우리에게 찾아와서, 즉 우리가 오라고 해서 온 것이 아니라,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찾아와서 우리를 파고들어서 해체시키고 박살내고 분리하는지, 이런 쪽으로, 즉 "언약이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와서 발생시키는가?" 라는 방향으로 해석을 해야, 그렇게 해야 비로소 해석의 문이 열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스라엘을 이방나라화 되어야 하고, 그렇게 이방나라화 된 이스라엘을 통해서 언약이 어떻게 충돌을 일으키면서, 이제는 적들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상대로 적들을 오히려 이용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과거에는 이스라엘을 공격하기 위해서 주위에 적들을 포진시켰는데,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이 바로 이방나라가 되어버리니, 이스라엘 속에 있는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이스라엘 내부 속으로 들어와서, 내부로 퍼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언약이 우리 인간존재의 근본을 공격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옛날에는 나라와 나라의 대결이었는데, 이제는 이스라엘 나라 자체에서도 계속해서 파고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언약이 이렇게 파고드는데, 이것은 마치 정을 가지고 돌을 깨는 것과 같은 것인데, 도대체 이 언약 속에는 무엇이 들어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쫙 쫙 갈라지게 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은 모르지만, 그러나 성도들은 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인데, 이 본질이 앞당겨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이용해서 쐐기를 박듯이 박으니, 그들이 이해하는 메시야가 아니라, 창조의 비밀을 은닉한 체로 파고들 때에, 그들은 자기 자신들이 쪼개지면서 비로소 메시야의 맛을 보는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깨어지면서 말이다.

◈ 성도의 삶은 구약의 재탕 !!

그런 일들은 구약 때 일어났으니 신약 때는 괜찮다고 여길지 몰라도, 하지만 예수님을 믿고 난 뒤의 성도의 삶이란 구약의 재탕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뒤에 하나님의 언약이 우리를 계속해서 깨고서 들어가면, 그렇게 깨어진 상태를 통해서, 즉 자아가 그렇게 마구 마구 깨어지면서 "아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이미 살아계시는구나" 라고 하면서, 그렇게 항상 자기 상태가 파악되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성령님이 오게 되면 예수님이 걸어가신 코스대로 우리를 가도록 하셔서, 이쪽에는 예수님이 우리 때문에 그렇게 고생하신 것을, 저쪽에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물고기 아가리를 벌려서 동전을 끄집어내는, 그렇게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살았던 그 코스 코스대로 우리를 데리고 가셔서 그 발자국을 밟도록 하시는데, 그때마다 우리의 자아가, 즉 예수님을 소유화해서 구원받으려고 했던 그 자아가 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구약성경이 전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언약이 와서 우리들 자아의 존재기반을 깨트리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자기 존재에서 모든 것을 출발하려는 우상숭배자이기 때문에 말이다.

◈ '자아' 개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었을 때 !!

여기서 '자아'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가면, "자아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해달라면, 자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었을 때 그 개념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이 자아에 대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는 질문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시집도 가지 않은 아가씨가 "제가 며느리로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며느리라고 하는 것은 결혼을 함으로서 생기는 결과적인 문제이니 말이다. 하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 "어머님, 제가 며느리로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다.

◈ 중세 -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종속 !!

중세 때에는 '자아' 라는 것이 있을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자아는 어디에 종속이 되어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에 종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게 자아가 아니고 인간인데, 그래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라고 하는데,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나오는데, 인간이란 것은 하나의 '종(種)'으로서 전체에 포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동물 울타리에 있는 인간인데, 그리고 인간을 아담 안에 가두어 넣었던 하나님, 이것이 전부다 인데, 그러니 그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성립될 뿐이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울타리에서 도망친, 마치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인간과도 같으니, 중세시대에서는 그런 질문이 성립이 안 된다는 것이다.

◈ 근세 - 내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런데 근세에 와서 무엇이 끊어졌는고 하니, 즉 여자가 시집을 가기 전까지는 '며느리' 라는 개념이 없었는데, 시집을 가고 나서 며느리의 관계가 성립된 것처럼,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난 뒤에는,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이란 개념도 끊어지게 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까, 성경을 덮어버렸으니 이제 하나님이라는 개념자체가 의미가 없어졌으니,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란 것도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런 참으로 중요하고도 어려운데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하나님 앞에서만 의미가 있는 질문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는, "내가 무엇입니까?" 라는 것이, "내가 무엇이기에 인간이 이렇게 해야 합니까?" 라고, 그렇게 인간이 그만 목적어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자립해서 살아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내가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질문은 이미 '나를 위한' 질문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 데카르트의 고민 !!

데카르트가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고민이 되었던 것이, "'내가 누구인가?' 라고 질문하는 당신은 누구인가?" 라는 것인데, 그런 질문을 본인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이런 질문이 없었는데, '너와 나'를 이야기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의 형상에 가두어두었으니, 그러니 종(種)만 있었을 뿐이지, "내가 누구인가?" 라고 하면, 왜 건방지게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야단을 맞는다는 것이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내일 36페이지까지 수학문제를 풀어와" 라고 하는데, 어떤 아이가 손을 들어서 "저는요?" 라고 한다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냥 시키는 대로 숙제만 하면 되지 말이다. '선생님대학생'으로서 종이 구분되어서,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데, 학생인 주제에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는 것이다.

여기서 "저는요" 라는 것은, 즉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인데, "선생님이고 숙제이고 다 치우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겠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숙제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위해서도, 선생님을 위해서도 아니고,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겠다는 것이고 말이다.

◈ 쇼생크 탈출 !!

대안학교가 나오고, 학교보다 학원을 선호하고, 그리고 미국에 이민을 가는 이유가, 이런 것들이 전부 국가를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자기는 그러한 종(種)에 편입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나' 라는 것은 독자적으로 '나'를 끄집어내기 위해서, 그렇게 독자적으로 탈출하고 일탈하는데 익숙해진 것이지, 어디에 종속되고, 복속되고, 순응하는, 그런 것에 합류하는 것은 현대 21세기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 21세기에 성경을 본다는 것 자체가 위기 !!

이런 21세기에 우리가 성경을 본다는 것 자체가 큰 위기(?)인데, 과거 한국교회는 물론 이단이었지만 그래도 순진한 면이 있었는데, "여러분이 교회를 위해서 충성해야 합니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그런 설교가 50년(?) 전부터는 "여러분의 가정을 위해서 교회에 충성해야 합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이 자기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 장래의 성공을 위해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이미 인간의 자아를 위해서 봉사하는 마치 세파트와도 같은 하나님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 자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그래서 "자아가 무엇인가?" 라고 질문했을 때, '자아' 라는 것은, 이것은 마치 신이 신에게 "신이 누구인가?" 라고 묻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니 질문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질문을 바꾸어야 하는데, "나는 어떻게 형성이 되었는가?" 라고 말이다. "자아가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자아는 없습니다" 라고 하면 화를 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아는 있는 것이고, 자아가 왜 있는지는 묻지 말고, 무조건 있는 것이고 말이다.

그래서 "자아가 어떻게 형성이 되었습니까?" 라고 질문을 해야 하는데,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도덕' 이라는 것이다. 전에 강의하면서 인간의 도덕발달단계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콜 베르그(?) 말이다. 인간이 어릴 때부터 도덕이 어떻게 발달하고 진화하느냐는 것인데, 이것이 심리학에서 굉장히 중요한데, 처음 아이일 때는 인간에게 자아가 없는데, 자아가 없으면 도덕도 당연히 없고 말이다.

◈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

어제 오후예배 설교시간에 교인들이 상당히 어려워하는 반응을 보였는데, 그래서 집에 와서 왜 그러했는지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부분이지 싶은데, 하지만 이 말은 자칫 잘못하면 이것을 '성숙' 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깨부수는 것으로, 마치 어른을 저주하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다시 어린아이로 돌아가라는 듯이 들리니 말이다.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니, 마구 뛰어다니고 아무데서나 바지를 내리고 '쉬' 하는 것이, 그것이 마치 잘하는 짓이라고 오해를 받을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어린아이라고 하는 것은 자아가 없다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즉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어른이라면 당연히 자기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데, 자아가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교도소도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린아이의 경우에는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질 자아가 없다는 것이다. 즉 젖을 달라고 우는데, 왜 우느냐고 야단을 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전쟁통에 피난을 가는데 적군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아이의 입을 틀어막아서 아이가 그만 죽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왜 '여명의 눈동자' 라는 드라마에서 채시라가 그렇게 자기 아들을 죽였지 않는가? 그런 거 몰라요?

◈ 왜 도덕이 필요한가?

이런 '도덕발달진화단계'의 주장에 의하면, 아이가 점차 자아가 형성되면 그 자아와 더불어서 거기에 맞는 도덕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그 범위가 좁은데, 즉 처음에는 가정이란 질서 속에 있다가, 그 다음에는 학교라는 질서를 위해서 자아가 있게 되고 그 다음이 사회인데, 그런데 이 사회는 자기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전부가 다 자기와 같은 자아가 있는 곳이란 말이다. 그러니 이 사회에 맞도록 자아가 재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도덕' 이라고 하는데, 자기 혼자 있으면 발가벗고 있어도 되지만, 그러나 밖으로 나갈 때는 옷을 차려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도덕인데, 거기에 대해서 책임을 감당해야하고 말이다. 이것은 도덕이고, 그런데 이 도덕을 파보면 거기에 심리가 있는데, 이 심리에 무의식이 있다는 것이다. 이 무의식은 그야말로 욕망 덩어리인데, 이 무의식인 욕망 덩어리를 자제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사회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무의식 이전에 무엇이 있는고 하니, 이 '주체' 문제를 가지고, 즉 "자아가 과연 누구인가?" 라는 것을 따지다보니 의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도 있다는 말이 나왔는데, 그러면 "목사님, 이 무의식이 왜 20세기에 들어와서 있습니까? 그 이전에는 무의식이 없었어요?" 라고 질문할 수 있는데, 이것이 참으로 재미가 있는 것이, 물론 그 이전에도 무의식이 있었지만, 이 세상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구태여 무의식을 동원할 필요가 없이 의식으로만 다 해결이 되었다는 것이다.

◈ 의식 - 지(知), 정(正), 의(義) !!

그러면 의식은 무엇인가? 의식은 '지(知),정(正),의(義)' 인데, 지금 모든 조직신학도 그렇고, 철학도 다 이 '지정의'가 아니냐는 것이다. 물론 프로이드는 빼고 말이다. 이 지정의는 '진선미(眞善美)'를 추구하는데, 이것이 바로 헬라철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지정의'에서 '진선미'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예술을 하는 사람은 '미(美)'를 최고로 쳐주는데, 이 '미'가 종교의 경지에 들어오면, '지정의'로서' 진선미'를 이룬다는 것이다.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고'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 프로이드가 하는 말이, "에라, 꿈이나 속여라. 니 꿈을 봐라. 꿈에 어디 그런 것이 있나. 날개를 달고 절벽에서 마구 떨어지고, 온갖 방탕한 짓들은 혼자서 다하고, 그것이 과연 당신의 진짜 의식의 모습인가? 그게 무슨 지정의인가?" 라고 말이다.

물론 반쪽복음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람이 왜 반쪽만 가지고 사느냐는 것인데, 어느 병원에서 의사가 히스테리 환자를 치료를 해보니, 그에게 있어서 인간의 의식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고, 물 속에 들어가 보니 빙산의 본질과 같은 엄청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 동안 이 사회의 질서 때문에 억제되었던 무의식의 세계라는 것이다.

이러한 엄청난 무의식의 세계를 억지로 누르고 있으니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욕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폭발하는데, 그것이 바로 권력욕이고, 명예욕이고, 물질욕이고, 그런 강한 카리스마와 같은 에너지라는 것이다.

◈ 프로이드 - 인간의 정신도 에너지다 !!

여기서 프로이드는 힘주어 말하기를, "인간의 정신도 에너지다" 라고 했는데, 이것이 참으로 끝내주는 말인데, 모든 물질이 에너지인 것은 당연한데 정신마저도 에너지라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이 어떻게 에너지를 통제할 수 없고, 에너지가 인간을 도리어 통제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프로이드의 '인간론' 인데, 그래서 이러한 에너지가 제대로 통제가 안 되는 것이 정신병이고, 이 에너지를 꿈속에 넣을 것은 넣고 현실에 내놓을 것은 내놓고 해서 적재적소에 잘 사용하는 것이 온전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온전하다' 라는 말은, 그만큼 긴장되어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말이다. 즉 "정신 바짝 차려" 라는 것이다. 성경에 "깨어 있어라" 라는 것과 비슷한가?

그렇게 정신을 바짝 차린다고 하는 것은, 그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인데, 정신이 헤빌레(?) 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멀쩡한 남자들이 왜 개구리복만 입으면 노상방뇨에 휘파람은 또 왜 그렇게 불어대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정신이 해이해진 모습이 아닌가? (행복한 것이라구?)

고등학교 졸업식 때 왜 교복을 찢고 밀가루를 덮어쓰고 난리를 피우는가? 여학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치마길이가 10센티나 올라가고, 얼굴에 화장은 왜 그렇게 떡칠을 하는지, 자기 얼굴에 자기가 놀라고 말이다. 그것이 다 발산인데, 젊음의 발산 말이다. (그러면 늙음의 발산은 없는가? 김마담, 커피한잔!)

◈ 엄마에게 물어봐 !!

이렇게 무엇인가 발산한다는 것은 이미 사회적 자아가 형성되었다는 것인데, 그런데 아이들은 무엇을 발산할 필요조차도 없이 살아가는 자체가 있는데, 왜 그렇게 되는고 하니까, "엄마에게 물어봐"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자아를 물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주께서 알아서 인도하신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인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 라는 것은, "제발 주도권을 니가 쥐려고 하지 말라" 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즉 자아에게 주도권을 넘겨주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신약에 있는 이런 말씀을 설교하려고 하면, 타고난 자아밖에 모르는 성인이 된 인간들이 이스라엘을 통과하면서, 즉 구약성경을 보면서 자기 딴에는 말씀을 지킨다고 '쉐마, 쉐마' 라고 하면서 애써 지킨 것들이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다 깨어지고 박살날 대상이라는 것이다.

◈ 온전한 것은 깨어지기 싶다 !!

어제 오후예배시간에 윤덕희 집사님이 오랜만에 오셔서 추임새를 넣어주는데, 중요한 순간마다 '아멘' 이라고 하니까, 교인들은 또 맞다 싶어서 밑줄을 긋고 말이다. "온전한 것은 깨어지기 싶습니다" 라고 하는데, 벌써 '아멘' 한다는 것이다.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 뒤에 십 년을 잘 참았는데 맥주 한 잔에 그만 무너진다는 말이다.

제가 '온전한 것'을 예로 들면서 유리컵을 말했는데, 이 유리컵은 아름답지만 언제 깨어질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 온전한 것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마귀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그 깨어지는 것에다 율법을 주시는데, "하나님이 온전한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 라고 말이다.

이렇게 되면 모두가 그야말로 백발백중 다 깨어질 수밖에는 없는데, 이렇게 철저하게 깨어지는 것이 바로 구약성경인데, 그러니 이 구약성경을 당연히 오늘날 우리의 실존과 관련을 시켜서 해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의 이방나라화 !!

지금부터는 우리교재에 있는 데로 '이스라엘의 이방나라화'에 대해 살펴보겠는데, 첫째로 이스라엘이 어떻게 이방나라가 되었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렇게 해야 우리 자신을 안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렇게 이방화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이 달려들어서 어떻게 때려부수는지, 이러한 두 가지의 방향성을 가지고 살펴보자는 것이다.

교회에 새로 부임을 해서 목회를 해보면 처음에는 참으로 신이 나는데, 정석훈 목사님은 새벽기도의 설교도 아빠방에 막 올리고 말이다. 저도 처음에 대덕교회에 가서 다 경험해본 것이지만, 새로운 것은 약 6개월은 가는데, 처음에는 호응도 좋고 말이다. 장로님도 설교하시고 하는데, 처음에는 좋아하다가 6개월이 지나면 더 새로운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건 아는 건데, 이제 더 뭐 없어요? 이제 끝났구만" 라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목회자는 그만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데, 새로운 것을 계속 공급해주어야 권위가 서는데, 6개월 학원코스 밟듯이 다 끝내버린다는 것이다. 다른 설교를 하더라도 "아, 그건 다 아는 건데" 라고 나오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설교하기가 점점 더 힘드는데, 이미 수준은 높여놓았지 말이다. 그렇게 높여진 것을 또 높여주어야 만족하니 에너지가 곱절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 자체 방어시스템을 가동하라 !!

그런데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교인들이 "다 안다, 안다" 라는 그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고 하니, 이것이 어렵고도 재미있는데, 사람들은 자기 안으로 공격이 들어오면 자체 내에서 방어체제도 변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이 왔기에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서 10개면 10개를 모두 다 듣는데, "참, 복음입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하다가, 그 다음에는 10개 중에서 5개만 골라서 듣고, 그것은 자기 방어체제에서 5개는 창고에 집어넣어 버렸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10개 중에서 8개를 창고에다 집어넣어 버리고 말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아의 정당성과 자아의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서 방어체제의 수정작업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개떡같은 목사가 와서 호떡같은 소리를 하면, 그때는 방어체제가 작동하지 않는데, 목사가 자기보다 무식하니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가 모르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혹시 자기가 허물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껴서 방어본능을 자체적으로 발동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니 설교자는 이 방어체제까지도 마구 뚫어야하니 골치가 더욱 더 아프다는 것이다.

◈ 목회자의 역할 - 잠시 창고수색이 있겠습니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복음을 들으면서 이 복음을 창고에 집어넣을 때 그냥 넣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변형시켜서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는 그 창고를 공격해서 그 변형된 것을 다시 끄집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로 바로 이 점이 중요한데, "이것은 저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저 이단같은 놈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라고 해서, 창고에 그렇게 집어넣어 놓은 것을 다시 끄집어내어서, "이것이야말로 당신이 변형시키고 왜곡시켜서 집어넣어 놓은 당신의 모습입니다" 라고 하면서, 다시금 말씀과 결합시켜서 외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목회자의 역할이라는 말이다.

◈ 니들이 알기는 뭘 알어 !!

이런 작업이 참으로 고통스런 것이지만, 그러나 힘들다고 하지 않으면 교인들에게 핑계거리를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목사님, 그건 2개월 전에 한 것인데요. 그리고 십일조와 안식일은 5개월 전에 했고요" 라고 말이다. 그러니 목회자는 뭔가 새로운 것을 준비해야 하는데, 그것을 다른 어떤 것으로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 창고 깊숙이 넣어놓은 그 변형된 것을 찾아내어서, "이것이 당신이 다 안다고 하는 모습입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개혁을 이야기하고 비판하면서, 은근히 그런 말씀은 자기와는 상관없으니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라고 하는, 그런 인간의 위선적인 모습을, 마치 봄철에 논바닥을 뒤집듯이 마구 뒤집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일을 주께서 하시는데, 하나님은 새로운 것을 가지고 뒤집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자기들이 안다고 했던 것을 가지고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이런 점이 구속사나 언약사를 정리할 때 제일 어려운 점인데, 하면 할수록 구속사가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그러한 깊은 곳까지 들어가고 또 들어가서, 그리고 그 왜곡되고 변형된 것을 다 찾아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와 충돌이 되도록 말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 여러분,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 이 제사에는 사랑이 들어있기에 말입니다.
* 우리가 압니다.
* 하나님의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기에 제사를 지내고 가야 합니다.
* 다 압니다. 그래서 제사를 지냅니다.
* 그런데 사무엘은 "제사가 순종보다 낫습니다" 라고 합니다.
* ? ? ?

이것은 그야말로 뚱딴지같은 소리인데, 그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결코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제사가 순종보다 낫다" 라는 소리를 말이다. 다음도 이와 똑같은 이야기이고 말이다.

* 여러분, 교회에 나오면 술을 끊어야 합니다.
* 예, 알겠습니다.
* (복음을 아는 목사) 술을 끊지 않아도 구원을 받습니다.
* 야, 이제 술을 마셔도 되겠네.
* 그런 생각이 바로 비복음적입니다.
* ? ? ?

그러니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패를 모두 끄집어내어서 까발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방식으로 구약성경이 진행되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노선을 따라서 구약성경을 계속해서 깊이 깊이 파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재 63페이지를 보자.

** [이방나라가 된 이스라엘] - 한 예를 들면,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을 통해서 사무엘이 차기 제사장이 됨을 지목케 하신다. 그런데 사무엘은 흔히 알고 있는 제사장 기능에 몰두하기보다는 다른 기능에 매진한다.

◈ 엘리 제사장의 잘못이 무엇인가?

엘리 제사장의 잘못이 무엇인가? 물론 자기의 잘못도 있지만 홉니와 비느하스, 이 두 아들들의 나쁜 행동을 방관했다는 죄목인데, 성전에서 일하는 여자들과 놀아났고, 언약궤를 함부로 만지고 말이다. 그러니 이 아들들에게는 거룩이라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재벌 2세들의 망나니 같은 짓을 했다는 것이다. 나라의 법도 필요 없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인데, 그것이 곧 교만이고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관리해야 될 아버지가 하나님은 존중하지 않고 아들들을 더 귀히 여겼다는 죄목으로 가문자체가 그만 왕창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나를 존중해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그렇지 않으면 멸시하겠다" 라고 하는데, 물론 이것은 엘리 제사장에게 해당되는 사항이고 말이다.

(삼상 2:30)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하지만 실제로 엘리 제사장의 가문이 날아간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그의 창고에서 있던 것을 끄집어내었기 때문인데, 즉 하나님은 사람에게 포섭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고, 낮은 자를 높이고, 가난한 자를 부유하게 하시는 그런 분인데, 다시 말해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마음대로 라는 것이다.

◈ 엘리와 사무엘의 차이점 !!

엘리의 경우에, 그가 특정한 잘못을 했기에 치는 것이 아니라, "엘리야, 너는 왜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느냐?" 라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엘리 제사장은 율법을 어떤 차원에서 이해해야 하는고 하니, "율법을 우리가 지켜서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율법자체를 근거로 해서, 누구든지 버릴 자는 버리고 또 세울 자는 세우신다. 물론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박수를 치고 동의하고 감사해야한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엘리 제사장은 자기 아들들의 경우에도 자기 자식이라고 여기면 안 되고, 하나님께서 망하게 하는 자식이라면 자기도 하나님 편에 서서 자기 아들들을 책망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엘리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들이 "아버지, 섭섭합니다" 라고 하면 자기 체면은 뭐가 되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입장에서 주저주저하다가 기회를 놓쳐버리고 사무엘에게 당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 사무엘에게도 '요엘'과 '아비야' 라는 두 아들들이 있는데, 이들도 물론 엘리의 아들들과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엉터리이기는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렇다면 사무엘도 마땅히 당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엘리는 이렇게 자기 아들들 때문에 잘렸는데, 그런데 사무엘은 멀쩡하다는 것이다.

(삼상 8:1) 사무엘이 늙으매 그 아들들로 이스라엘 사사를 삼으니
(삼상 8:2)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삼상 8:3) 그 아들들이 그 아비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를 따라서 뇌물을 취하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이것은 바로 사무엘의 존재 자체가 없는 데서 나왔기 때문인데, 언약이 바로 이러한데, 즉 없는 데서 있게 하고 죽은 데서 살리는데, 바로 이러한 속성을 살리기 위해서 엘리와 사무엘이라는 상반된 인물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 '없는 놈'이 '있는 놈'을 추방 !!

다시 말해서, 엘리는 있는 데서 있는 가문으로 연결이 되었고, 반면에 사무엘은 가문이 끊겼는데, 즉 없는데 한나의 기도로 등장했다는 말이다. 그러니 없는 데서 생긴 인물이 있는 데서 있게 하는, 그런 이 세상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인물을 추방시켜버린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언약의 파도가 해변가로 밀려오고 또 밀려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목사가 되어서 자기가 이 교회의 당회장이라고 여기는 놈들은 당연히 잘려야 하고, "제가 무슨 교회가 있습니까? 그저 세워주실 때만 설교하지요" 라고 하면 한 차례만 또 허락되고 말이다.

그래서 제가 자아에 대해서 그렇게 이야기를 했는데, "자아는 없다" 라는 것이다. 단지 인간은 "나는 어떻게 살아야만 하는가?" 라는 것만이 있을 뿐인데, 그렇게 인간일 뿐인데, 그런데 자아가 자꾸만 "나는요, 나는요, 나는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너는 인간이고 죄인이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다른 사람은 그래도 자기는 달라야 한다는 것은, 자기 자아를 생각하기 때문인데, 언약이 이것을 밀려오는 파도처럼 계속해서 공격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병원에 입원해서 "하나님 아버지, 하필이면 제가 왜 이렇게 교통사고를 당해야 합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니가 뭔데 그런 소리를 하는가?" 라는 것이다. 교통사고를 당하든, 척수종양(?)에 걸리든 모두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는 것인데 말이다. 아직도 자아가 남아있으니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구약성경을 설교하게 되면, "진도 나갑시다. 그건 아는 건데요" 라는 소리가 나올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가만히 들어보니 이미 지나간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가 매일같이 경험하는 이야기들이라는 것이다. 교인들이 매일 매일 겪는 것이란 말이다.

하지만 지식은 축적이 되어도 솟아오르는 자아는 꺾을 수가 없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나는 성경을 이만큼 안다" 라고 하는 자아는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성경말씀은 다 아는 것도 아니라 매일같이 된 통으로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거울을 한번 보면 끝인가? 매일같이 본다는 것이다. 주름이 몇 개인지, 즉 자기의 온전함이 어디서 깨어졌는지 말이다.

◈ 늘 새로운 말씀과 늘 새로운 죄의 충돌 !!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설교자라면, 교인들에게 무엇을 설교해야하는고 하면, 말씀은 항상 새로운데, 그러니 그것을 항상 새로운 죄를 짓고 있는 자아와 정면승부를 걸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설교자의 당연한 임무이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63페이지를 보자.

** 그 와중에 등장한 사람이 사무엘인데,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왕을 세우는 것을 허락한다. 일단 백성들의 안목에서 볼 때는 효율적인 나라의 요건이 충족된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찬양 안에 담긴(삼상 2장) 전혀 새로운 양상의 모세언약의 성취성을 알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에, 이 모세언약이라고 하면 율법인데, 이 율법은 자기들이 잘 안다는 것이다. 십계명도 알고, 제사법의 경우에 제사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양은 어떻게 잡는지 말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사무엘은 뭐라고 하는가?

* 사무엘 : 여러분은 모세율법을 압니까? 모르지요?
* 백 성 : 아니요. 율법을 잘 압니다.
* 사무엘 : 정말로요?
* 백 성 : 예, 십계명, 제사법, 할례 등에 대해서도 빠싹(?) 합니다.
* 사무엘 : 아니요. 당신들은 모릅니다.
* 백 성 : 어허, 안다니까요. 율법을 그대로 다 지킨다니까요.
* 사무엘 : 그렇다면 모세율법에서 새로운 왕이 등장하는 것을 발견했어요?
* 백 성 : 아니, 어디 그런 것이.
* 사무엘 : 거봐, 모르잖아.

◈ 왕이여(?), 왕을 주소서 !!

모세의 율법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은연중에 "우리들은 세상적인 왕이 필요합니다" 라고 하는 것을, 사실 이것을 본인들도 몰랐고, 또한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왕 됨을 거부한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들이 어디에서 죄가 되는 줄도 몰랐고, 그러한 상태에서 성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성경을 들여다보면서 왕을 구했는데, 그러면서도 그것이 모순이 안 된다고 보았는데, 그런데 그게 아니라 사무엘은 모순이 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이 모세율법을 잘못 해석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본인들은 빠삭하게 잘 안다고 여겼고 말이다.

그러니 성경이 얼마나 어려운가? 자기 안에 괴물이 들어있는 것도 모르면서, 괴물이 들어있는 상태로 성경을 보니까 그 괴물을 옹호하는 쪽으로 성경해석이 나온다는 것이다. "훌륭한 왕이 와서 말씀대로 살아서 우리나라 복 받으세" 라고 말이다. 그러니 얼마나 성경을 엉터리로 해석을 했는가?

진짜 왕은 무엇인가? "너희들이 왕을 구하는 것이 곧 죄악이다" 라는 것을 지적하는 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사무엘상을 제대로 설교하려면 목사는 자기 목을 내놓고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충돌도 보통 충돌이 아니라는 말이다.

자기들에게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예수님의 지도자 됨을 부인하는 것인데, 그러니 차라리 "우리에겐 말씀을 전하는 머슴이 필요합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머슴이 필요한 것이지 주인공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63페이지를 보자.

** 즉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왕적통치에 나서심'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저 지상에서 자신들의 행위(왕 세움, 혹은 율법대로 제사 드림)에 의미를 두고 정진하려고 했다. 이런 불신앙을 그대로 담아낸 대표자가 바로 사울왕이다.

◈ 사무엘이 등장하자 모두가 적으로 !!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왕적통치'에 대해서 이방나라와 비교했지, 자기 자신들의 죄와 그리고 하나님과 비교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보냈는데, 그래서 사무엘이 등장하니까 사무엘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가 다 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모든 사람들이 다 사울 편에 서니 말이다.

이렇게 사무엘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사울을 더 좋아하고, 그리고 다윗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쫓는 사람들은 불과 500명 정도였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다윗이 골라앗을 이겼고, 그리고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러한 일들이 일어났느냐는 것이다.

◈ 다윗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밖에 !!

그 이유는 나중에 드러나는데, 알고 보니까 각 지파 별로 다윗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밖에 없고, 각 지파가 이 다윗을 이용해서 자기 지파의 지분을 늘이려고만 했다는 것이다. 자기 지파의 지분을 말이다. 사울왕의 아들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다윗왕의 아들들마저도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한 명의 영웅이 등장했으면, "우리는 영웅을 사랑합니다" 라고 하는 것은 모두가 빈말이고, "저 영웅 덕분에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권세를 어떻게 좀 더 확대시킬 수 있을까?" 라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 이스라엘 왜 둘로 쪼개졌는가?

그것이 이스라엘 내부의 정치사로 번져서, 결국은 나라가 어떻게 되는고 하니, 두 쪽으로 나누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위의 북쪽에는 10지파가 같이 뭉치고 밑에는 달랑 2지파가 남고 말이다. 그렇게 되니 '10:2'로서 게임이 안 된다는 것이다. 영토도 북쪽이 넓고 말이다.

아니, 처음에는 그렇게 "우리는 하나이다" 라고 하면서 손에 손잡고 나와서는 나라가 왜 둘로 쪼개졌는가? 그것은 바로 평소에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율법을 이용해서 하나님을 자기편으로 끌어당겨서 자기 나라를 확장시키려고, 그렇게 하나님을 이용했다는 것이다. 즉 이방나라의 속성이 그대로 유발되었다는 말이다.

어느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더라도 그런 패들이 보이는데, 교인들의 마음가짐이 말이다. 로또복권에 보면 '인생역전' 이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그것을 노려서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다. 대박을 터트리려고 말이다. 물론 우리교회에는 그런 대박을 터트리려고 하다가 대박이 아닌 대박살이 난 사람들이 할 수 없이 밀려서 오지만 말이다.

그러니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이러한 것들이 참으로 분통이 터지는 일인데, 복음을 모르는 교회들은 날마다 번창하고, 복음을 좀 아는 교회들은 하루가 다르게 쫄딱 다 망해버리고 말이다. 그리고 조금 있다 싶으면 다른 교회로 다 가버리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64페이지를 보자.

** 사울왕은 반드시 해야할 일이 있었다. 그냥 사라지면 안 되었다. 즉 백성들의 불신앙이 단순히 개인적인 선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세력으로 존재함을 포괄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게 사울왕은 백성들의 대변자로서 자기가 감당해야 할 역할이 분명히 있었는데, 물론 그렇게 좋은 역할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것이 바로 여호수아 마지막인 24장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여호수아가 무엇이라고 신신당부를 하는가?

(수 24:1)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이스라엘 장로 들과 그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부르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보인지라

* 여호수아 : 너희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
* 백 성 들 : 아닙니다. 지키겠습니다.
* 여호수아 : 나는 지키지만 너희들은 지키지 못해.
* 백 성 들 : 아닙니다.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신명기 마지막도 그러한데, 모세가 뭐라고 하는가?

* 모 세 : 너희들은 저주받은 백성이다.
* 백성들 : 아닙니다.
* 모 세 : 저주받은 백성이 맞다니까.
* 백성들 : 아니라니깐요.
* 모 세 : 진짜 저주를 받았다니까.
* 백성들 : 진짜 아니라니깐요.

사사기 마지막도 그러한데, "하나님이여, 베냐민 지파를 칠까요, 말까요?" 라고 말이다. 물론 그렇게 하다가 자기들이 더 당하고 말이다. 우리는 말씀에 순종할 수 없는데, 그냥 순응할 뿐이지 말이다. "너, 자꾸만 까불래?" 라고 하면 "예, 알겠습니다" 라고 순응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순응은 어떤 변화가 아니라, 더 얻어맞는 것이 아파서 그냥 찌그리고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니 주께서 매일같이 인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천국에 결코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64페이지를 보자.

** 쉽게 말해서, "하나님 말씀에 청종하겠나이다" 라고 고백하는 백성들은 실은 철저히 하나님의 원수였다는 사실을 들추어내는 역할이 사무엘과 다윗왕이 등장해야하는 이유이다. 사무엘은 사울왕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삼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삼상 15:23)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 언제 사울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는가?

여기서 사울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다고 사무엘이 지적하고 있는데, 그러면 과연 사울왕이 언제 말씀을 버렸는가? 아무리 구약성경을 찾아봐도 그런 적이 없는데, 참으로 이상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무엘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사울왕이 자기 말을 듣지 않은 것을 가지고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설교자가 강단에서 복음을 전하는데, 그러면 듣는 교인들은 지금 자기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설교자가 듣는 교인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했을 때, 그들은 반드시 반발하게 되어있는데, 그래서 설교자가 "당신들은 왜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까?" 라고 하면, 교인들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니, 우리들은 순종을 잘하고 있는데, 오히려 당신이 순종하지 않았지?" 라고 말이다.

바로 이러한 싸움이 벌어지는데, 그래서 사무엘이 다윗을 왕으로 삼을 때 공개적으로 했는가? 아니면 몰래 했는가? 자기 가족만 알도록 몰래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하고 나서는 사무엘이 36계를 놓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대세는 이미 하나님 편이 아니라 인간 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구나" 라는 것이다.

◈ 아하, 여기가 '이리 우리' 구나 !!

목회자는 설교하면서 이것을 통감해야 하는데, 그러니 이미 그들이 양이 아닌 이리인줄 알고 가야지, "야, 이리다" 라고 해서 삐져서 돌아오면 안 된다는 것이다. 또 억지로 이리를 양으로 만들려고 무리수를 두지도 말고 말이다. 이리가 이리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를 보냈고, 설교도 그렇게 알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리들 무리 중에서 양들이 간혹 있다면 그것은 기적이라는 것이다. "월급이 얼마이고, 사택은 어떻고, 교육비는 어떻고" 라는 것을 따지지 말고, 그 중에서 복음을 듣고 '아멘' 하는 양들이 있다면, 너무나 고맙게 여기고, 거기에서 그냥 뒤집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성도가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고마운 일이니 말이다. 그런데 한결같이 다 거부한다면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을 해야하는데, 그래도 있겠다면 할 수 없고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64페이지를 보자.

** 사울왕의 불순종은 계속된다. 그의 행위들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의 일반적인 정서와 뜻을 같이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은 사울왕의 불순종이 계속되는 정도가 아니라 갈수록 불순종의 정도가 심해지는데, 이것은 바로 사울왕이 갈수록 반발을 심하게 하는 차원이 아니라, 사울왕의 자아가 두 개로 분열이 된다는 것이다. 사울왕은 "내가 왜 그렇게 착한 다윗을 공격한단 말인가? 아니냐" 라고 하면서 점점 더 분열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또 공격하고 말이다.

◈ 부여의 금와왕과 사울왕 !!

이러한 분열에 대해서 얼마 전에 끝난 드라마가 정말 제대로 보여주었는데, '주몽'에서 금와왕의 모습인데, 주몽과 친 엄마인 유화부인에게 말이다. 금와왕이 자기 권위에 도전한다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사랑하던 유화부인을 칼로 죽이는데, 그렇게 하고 나서 얼마나 후회를 하는지 말이다. "내가 미쳤지"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런 모습이 바로 사울왕인데, 사울왕이 다윗에게 똑같이 행세한다는 것이다. 이런 분열로 인한 갈등이 심하다는 것은, 자기가 저지른 잘못 그 이상으로 미안한 마음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보다 더욱 미안해하는데, 물론 남들이 보기에 오히려 이런 사울왕의 모습이 착해보일 수도 있는데, 그러나 그러면서도 다윗에게 더욱더 악하게 대하고 말이다.

가롯유다의 경우에도, 그가 예수님을 팔아먹고 나서 무엇을 했는가? 자살하는데, 얼마나 양심적이냐는 것이다. 마귀가 역사하니까 미안한 것은 미안한 것이고, 그러면서 동시에 아주 격렬하게 덤벼드는데, 사울왕의 경우도 악신이 지배해버리면, "내 마음 나도 몰라" 라고 된다는 것이다.

◈ 목사님, 귀신과 마귀의 차이점은 뭔가요?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하는데, "목사님, 귀신하고 마귀하고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라고 말이다. 악마라는 것은 우두머리이고 귀신은 그 쫄다구인데, 귀신이 들리게 되면 그 사람은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있고,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들처럼 아주 찐득히(?) 귀신이 들려서 침착하게 지정의를 추구하면서 복음을 반대하는 마귀새끼들도 있고 말이다.

세상 신에게 지배받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악마가 "저 놈은 좀 심하게 흔들어야 되겠다" 라고 싶으면, 그래서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낼 때에 병을 고친다는 것도 있지만, 진짜 제대로 고치는 수준은 어느 정도인고 하니, 일곱 귀신이 나오고 난 뒤에는 다시 들어오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다.

병이 낫는 것은 잠시 귀신이 나가있는 상태인데, 그렇게 되면 병은 낫겠지만 그러나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귀신이 나가서 병이 나으면 사실은 위험한데, 자기 위주로 "야, 나는 이제 성도구나" 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물론 그것은 착각이란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망해도 당연합니다. 저를 떠나소서" 라고 해야 주의 영이 임한 사람이지, "야, 주의 은혜로 병이 나았다" 라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다는 말이다. 그건 자기가 안수해서 한번 병이 나았다고 해서, 병 문안을 가서 또 안수하려는 어느 집사와 똑같다는 것이다.

◈ 내 마음 나도 몰라 !!

하여튼 철저하게 "내 마음 나도 몰라" 인데, 그런데 이런 미친 짓거리를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이다. 우리교회에도 제법 왔다갔다했는데, 다른 교회에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복음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복음을 핍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울왕도 어떤 때에는 귀신에게 욕을 했는데, "니하고 안 논다" 라는 식으로 말이다. 복음을 좋아하면서도 그렇게 복음에 반발이 심하다는 것이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을 여러분이 앞으로 설교를 해보면 많이 느낄 것인데, 설교 중에 달려들어서 반발하고 말이다. 저는 생각만큼 많이 당하지는 않았지만, 장로가 그렇게 한 경우도 있고 일반 교인이 그런 경우도 있었는데, 설교 시간에 손을 들고 질문을 하는 바람에 예배분위기가 엉망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때는 "지금은 설교 중간이니 다 듣고 질문을 하세요" 라고 무마를 시킨다는 것이다.

◈ 목사님, '아말렉'이 뭐예요?

십자가 마을 게시판에 올랐던 질문과 답변이 A4 1800페이지 정도 되는데, 처음 300페이지는 만들어서 대장간에 보냈는데, 아마 '성도의 삶에 대한 질문과 답변1' 이라고 책이 나오지 싶은데, 지금 300부터 600페이지에 이르는 2권을 작업하고 있는데, 이300은 '300' 이란 영화에서 따왔고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수많은 질문 중에서 아멜렉에 관한 것이 없다는 말이다.

구약성경에서 다른 민족은 그냥 "에이, 저리가" 라는 수준인데, 그런데 유독 아말렉 민족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울왕을 누가 죽이는가? 사울왕이 자살을 시도해서 아직도 숨이 붙어있는데, 그때 아말렉 소년이 와서 마무리를 했다는 것이다. (자살설과 소년이 죽인 설이 두 개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광야에 나왔을 때 처음으로 이들을 공격한 것도 이 아멜렉 민족인데, 이 아말렉은 소극적이 아니라 아주 적극적이고 악의적으로 이스라엘 자체를 붕괴시키기 위해서 대항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아말렉을 끝까지 갉는데(?), 지금 사무엘과 사울왕의 계속되는 갈등 속에서도 이 아말렉과의 전쟁이 중요하게 등장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교재 64페이지를 보자.

** 하나님에 의하여 아말렉 전쟁에서 승리해 놓고서는 기름지고 좋은 소와 양을 취하고 아말렉의 왕 아각은 죽이지 않고 자신들의 소유물로 삼아버린다. 그러나 이런 일로 인해서 사울왕은 완전히 하나님의 언약과는 상관없는 독자적인 자신의 나라로서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사무엘은 친히 아말렉 왕 아각을 처단해버리는데, 이로서 사울왕 자체를 처단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사울왕은 여기서 물러서지 않고 기어이 다윗을 괴롭힌다.

사울왕이 살려준 그 놈을 왕이 보는 앞에서 죽어버렸다는 것은, 아각 왕의 목이 날아갈 때 사울왕의 목도 함께 날아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다윗' 이라는 존재의 의미는, 하나님의 원수인 악신이 무엇을 가지고 이 세상의 인간나라를 통치해왔는지, 그것을 들추어내고 까발히는데 사울만한 인물이 없고, 다윗만한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 사울왕 - 기름부음 받음을 자기 소유화 !!

사울왕의 치명적인 잘못은 기름부음 받은 것을 자기가 소유화한 것인데, 그런데 다윗은 그와 반대로 그 기름부음을 받음이 자기를 인도해서 데리고 다닌다는 것이다. 다윗은 자기의 왕 됨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기름부음 받음의 취지 때문에 그런 것이지, 자기가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기 때문에 계속해서 왕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왕을 함부로 죽이지 않았는데, 기름부음을 받았기에 말이다. 그런데 다윗은 그러면서도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떡인 진설병을 자기가 먹는다는 것이다. 자기가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제사장만이 입는 에봇을 가져가는데, 역시 자기가 기름부음을 받았다고 말이다.

◈ 다윗의 가문에서 한 후손이 !!

이렇게 왕 제도가 있으면서 기름부음이, 제사장에 있어서 기름부음이 최종위치라면, 그 위치가 높여졌는데 '제사장 위의 왕' 이라는 것이다. 즉 기름부음을 받은 왕의 왕인데, 그것이 바로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찬양 가운데 나오는데, 그 한나의 찬양은 그 기름부음이 유지되면서, 즉 제사장 형태로 있다가 왕의 형태로 바뀌는데, 그런데 이 왕은 '세습제' 라는 것이다. 앞선 왕은 망해버려도 그 다음으로 계속해서 세습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윗이 왕이 아니라 다윗의 가문에서 왕이 있다는 말인데, 여기에서 희미하게나마 나타나는 것이 '다윗의 후손' 인데, 그 유명한 다윗의 자손 말이다. 그래서 신약에서 "다윗의 자손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한 자손이 조상들을 다 구원하는 방정식이 희미하게나마 개떡같은 사울왕을 통해서, 엘리 제사장의 만행을 통해서 서서히 그 흔적과 윤곽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제는 서서히 보이는 왕으로서 좀 더 가차이(?) 구체화되면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시편에 보면 "문들은 들려라. 영광의 왕이 나가신다" 라고 하는데, 그 당시에 성문은 밑에서 위로 들리는 형식인데, 그렇게 되면 앞으로 오실 메시야는 어떤 육신의 왕이 등장할 것이고, 그 왕이 해야될 일은 지금 다윗처럼 모든 적들을 칼로 박살을 내어서 모든 나라들을 다 정복하고, 그 정복한 왕으로서 개선장군처럼 오게 되면 성문도 열리면서 왕이 취했던 그 전리품에 자기들이 합류하면서 영원한 제사장 나라가 된다고, 그렇게 유대인들은 믿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포로로 잡히던 그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 믿음 하나로 굳건하게 견디면서, 오직 그 영광의 왕이 오기를, 그렇게 해서 성문이 들리고, 모든 민족들이 그 왕에게 무릎을 꿇고, 그 왕이 영원한 제사를 드림으로서 에덴동산보다 더 놀라운 나라를 만든다는 것이다. 그 나라의 전경이 바로 이사야에 나오는데, 어린아이가 사자굴에서 놀고 모든 황무지가 골프장(?)으로 다 변하는, 그야말로 멋들어진 유토피아가 왕과 더불어서 온 나라에 펼쳐진다는 것이다.

(사 11:8)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사 11:9)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사 11:10)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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