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08. 1. 25) 빌레몬서 제 1강
광주강의(08. 1. 25) 빌레몬서 제 1강
이름 : 서경수(IP:116.37.101.23)
광주 강의(2008. 1. 25) 33-1
빌레몬서(351페이지) 오늘 다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1-3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은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렇게 되어 있지요.
시작이 안부를 묻는 식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참 엄청나게 위대한 대상이 되잖아요. 태초부터 계셨고 천지를 다 만드신 분이 얼마나 세밀하고 구체적인지, 빌레몬과 압비아와 아킵보 그런, 우리 인간들이 생각해도 그냥 무시해도 될 만한 이웃집 아저씨 아주머니한테 누구를 동원시키는가 하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과 예수님을 다 연결시키기 위해서 매치를 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기어이 자기 백성을 드러내고 분명히 자기 백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편지를 보낸다는 겁니다. 보통 사도바울이 편지한다고 하면, ‘바울이 쓴 편지나 내가 쓴 편지나 뭐가 다른가?’ 생각하는데, 바울이 편지를 쓰지만 하나님과 그리스도까지 동원시키는 것으로 봐서, “당신이나 나나 우리가 보통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는 그런 것이 있어요.
이 본문을 보면서, 교회 오래 다닌 사람 같으면 그저 ‘안부 인사를 하는구나.’ 생각하지만, 만약 예수님을 처음 알았던 사람 같으면 이 구절만 봐도 눈물 날 일이지요. 마태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것 설명하기 이전에 사도행전을 보겠습니다. 13장 47-48절에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가를 이제 아시겠지요? 하나님의 영생은 너무나 귀하기에 아무에게나 주는 것이 아니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자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뭐냐? 십자가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태초에 있었던 계획이 십자가 안에 삽입이 되어 있습니다. 태초의 계획이니까 태초에는 우리가 없었습니다. 태초에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밖에 없잖아요.
그 태초에 있던 계획이 십자가를 가지고 구체화되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 외에 다른 계시가 있을 수 없지요. 모든 태초의 계획이 십자가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가지고 ‘십자가 피만 있으면 구원 받는다’ 이것만 생각하지 마시고, 그 십자가 안에 태초에 예정하신 계획이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 에게만 이 피가 믿어진다는 겁니다.
혹시 피가 믿어지시기든 ‘나는 피 믿었다.’고 하지 마시고, 태초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에베소서 1장 4절에, 창세전부터 구원 받기로 작정한 그 계획의 일환으로 피가 우리에게 나타났고, 우리는 그 피를 받아드리게 되었고, 그 받아드린 것을 기점으로 그 안으로 파고들어가 보니까 ‘태초에 예정된 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게 되었구나’ 하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몰랐던 하나님이 태초에 세운 계획이 21 세기에 우리와 만나는 거지요. 뭘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만나는 겁니다. 사도행전 13장 48절을 다시 보면,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나라는 것을 믿는다면 그 사람은 뭘 믿느냐 하면, ‘영생 받았다.’ 이렇게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작정이 들어오겠지요. 내가 훌륭해서, 자질이 뛰어나서 내가 예수 믿어 영생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영생 주시기로 작정하신 계획이 내 안에 침투해서 믿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영생 주시기로 작정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잖아요. 그러니까 빌레몬서 1장 안부에 뭐가 나옵니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데, 진짜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는 거예요. 이것은 상투적인 인사치레가 아니란 말이지요.
다시 해 봅시다.
빌레몬서 1장 1-3절에서 나오는 문안인사는 우리의 운명이 우리의 존재 기반에서 온 것이 아니란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므로 이 인사를 들을 때마다 감격케 하는 거죠. 그 감격의 근거가 뭐라고 했습니까? 사도행전 13장에 나오는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는데, 누가 영생 주시기로 작정했습니까? 하나님이 작정한 그 계획이 계속 일관성 있게 밀어붙이다 보니까 나에게도 예수님의 피를 믿고 영생을 얻게 되는 그런 결과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일관성이 있는지 사도행전 18장 9-10절을 보겠습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아무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다’는 말은 누가 하셨습니까? 밤에 주께서 환상가운데 사도바울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지요. 그러니까 그 도시에 내 백성이 있고 없고를 누가 먼저 압니까? 주님이 알지요. 그리고 자기 백성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주고, 그 다음에 사도바울을 보내잖아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자기 목회 성공에 대해서 염려할 위치에 있지 않지요. 왜냐하면 이 성중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 외에 더 모아서도 안 되지요. 원래 이 도성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10명이라면 그 10명만 모아야지 12명 모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5명 되었다고 해서 철수하면 안 되겠지요. 10명이 되어야 하니까.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사람이 도중에 사도바울이 부실하다든지 본인이 끈기가 없어서 영생이 취소되는 법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런 법은 없는 거예요. 한번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기어이 영생이 오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오게 되어 있는 그 결과가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속에는 뭐가 있어야 됩니까? 영생 주시기로 작심한 하나님의 마음이 변하지 않아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죠. 이것을 빌레몬서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다’(3절)는 것이지요.
영생 주시기로 작정한 그 능력이 너로 하여금 이렇게 하나님과 연결되도록 한 것입니다. 어느 골목 어떤 집에 있는 할머니. 이웃 사람도 이름도 모르고 존재도 모르는 그러한 미미한 존재인데 어느 날 빌레몬서 성경을 읽다 보니까, 그 할머니를 사람들은 안 알아줘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 할머니와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빌레몬서 1장 3절의 문안인사가 얼마나 심오합니까? 심오하고 초 시간적이고, 초 공간적이죠. 시간과 공간, 물질 이런 것을 초월해서 (이것을 영적이라고 하는데) 하기에 이 하나님의 일은 방해할 사람도 없고, 방해받을 일도 아니고, 그 놀라운 은혜의 가속도 앞에 누가 그것을 차단시키겠습니까? 아무도 그럴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말씀을 보고 감격할 수밖에 없죠. 저 사람이 날 안 알아주고, 이 사람도 날 몰라주는데 하나님과 예수님은 날 알아주시는 구나. 언제부터? 태초부터. 그래서 아까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마태복음 16장 26절을 잠시 보겠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
여기에서 서로 비교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온 천하’가 나오고, 또 다른 것은 ‘구원 받는 목숨’이 나오지요. 온 천하보다 뭐가 더 귀하다? 구원 받을 목숨이 더 귀하다는 말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이 실제로 우리에게 오려면 온 천하가 우리 주변에서 무너지는 경험을 해야 이 말씀이 경험 되겠지요.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이 마태복음 16장 26절 말씀이 나에게 체험이 되려면, 내가 온 천하의 일부를 가지고 있잖아요. 아이들도 온 천하 중 일부이고, 집도 그렇고, 직장, 교회, 내 건강도 천하의 일부인데, 이런 것이 없어지고 무너지고 깨질 때 ‘역시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돈과 명예와 권력과 이 세상. 까짓것 깨지려면 깨져라! 나는 구원 받은 목숨이 더 좋다.’ 라고 체험이 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제가 그 다음 무슨 말이 나올까 겁이 나서 대답을 못하시는 것 같은데 ---
하나님께서 이 말씀하나 우리한테 체험 시키려고 온 천하가 불바다 되는 일을 준비해 놓았습니다. 예수님 재림하시면 두 사람이 맷돌을 갈다가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그냥 남지요.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하다가 결국은 인자가 도적같이 오면서 세상은 불바다가 되잖아요.
롯의 처가 뒤돌아 봤잖아요. 아쉬워서, 미련이 남아서 뒤돌아 봤는데 소금 기둥이 되었지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일을 험하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이 말씀이 그냥 농담이 아니고 진짜로 네가 얻을 영생은 네가 지금 그렇게 갖고 싶어 하는 온 천하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이 뭉개지고 무너지는 일들을 당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방금 언급한 마태복음 16장 말씀을 제가 하나의 논리로서 한 번 정리해 봤어요. 뭐냐 하면, 인간의 존재의 밑바탕이 있지요. 바닥이 있는데, 이 ‘나’라는 인간은 이것저것 끌어 모아서 바구니 안에 담을 때 이것이 ‘나’가 됩니다. 나는 키가 얼마다. 몸무게가 얼마며, 나는 어떤 색깔을 좋아하고, 직장은 어디를 다니고, 학교는 어디까지 나왔으며, 내 아버지는 누구며, 친구들은 어떤 사람이며, 우리 집에는 뭐가 있고, 나는 모자를 좋아해서 늘 모자를 쓰고 -- 이런 것들을 모을 때 ‘아하, 나는 이정도 인간이다.’ 이렇게 됩니다.
늘 모자를 쓰는데 누가 내 모자를 빼앗아간다면 모자 없는 나는 왠지 ‘나’ 답지 않게 되지요. 현대 철학자가 밝혀낸 것인데, ‘나’라는 것은 안을 들여다보면 조각조각 이질적인 것들(이것을 속성이라고 하는데)이 융합되어서 모인 것이 ‘나’라는 것입니다.
제과점의 빵 중에 멍게같이 생긴 빵이 있어요. 감자를 모아놓았는지 고구마를 모아놓았는지 밥알을 뭉쳐놓았는지 주먹밥 같이 생긴 그런 것이 있어요. 이것을 훅 불면 깨지겠지요. 예를 들어, ‘나는 어떤 기업체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내 안의 속성은 기업체 사장이 속성이잖아요. 그런데 기업체를 누구한테 빼앗겼어요. 그러면 나머지 반 토막가지고 나를 또 세워야겠지요. 그리고 그 사람 속에 뭐가 있는가 하면 기억이 있는데, ‘나는 한 때 잘나갔던 기업체 사장이었다.’를 하나의 속성으로 해서 모읍니다.
이것이 존재의 바닥을 이룹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의하면 이런 바닥을 성도에게는 균열이 일어나게 해요. 균열이 일어나면서 쪼개지면서 이 밑바닥에서 뭐가 올라오느냐 하면 ‘나 외에 다른 길이 없느니라.’ 이게 나와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이것이 나와요.
그러면 그동안은 무엇이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나’라고 하는 이 자아. ‘나는 이러이러한 것이 나다.’ 라는 것이 꽉 눌러 있었어요. 우리는 24시간 ‘나’를 생각해요. 그런데 예수님은 뭘 생각하는가 하면 길을 생각해요. 길은 쪼개서 통과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고, 나는 뭐든지 끌어 모아서 응집하는 기능이 있지요. 나쁜 것은 버리고 좋은 것은 더 모아서 더 좋은 나로 만들지요.
그런데 이런 나를 관통해서 해산시켜 버려요. 해산시키고 그 가운데 길을 내버려요. ‘까불지 말고 나 따라 와. 나는 길이야.’ 이것이 ‘과정적이다.’ 라는 말도 되고, ‘흐름이다.’ 라는 말도 되고, 우리는 응집되면 이것은 영원히 가지고 갈 고정된 것으로 안정감을 느끼려고 하는데, 주님께서는 흐름을 이야기해요. ‘나 따라 인도함을 받아. 어떤 몰골을 하든지 묻지 않을 게. 네가 살인강도가 되던 창기가 되던 깡패가 되던 묻지 않을 게. 그냥 나만 따라 와.’ 하는 것이 어디 나오는가 하면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길과 인간 아닙니까.
길이냐 인간이냐? 멈춤이냐 떠나는 도정이냐? 멈추면 끌어 모아야 돼요. 더 실력을 쌓아야 되고, 유학도 갖다 와야 되고. 멈추면 자꾸 끌어 모아야 돼요. 떠나는 사람 같으면 나를 깨더라도 나를 천국 쪽으로 잡아당기는 길의 힘이 나에게 더 소중하다고 느낍니다. 이게 예수님 말씀입니다.
자, 그렇다면 ‘나’라는 존재 밑에 콘크리트가 있는데, 나를 굳히는, 나를 금신상으로 만들고 나를 존대하는 ---
민주주의와 느부갓네살의 공통점이 뭐냐? 다니엘에서는 느부갓네살 왕 자기만을 신으로 보잖아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인간이 다 신입니다.
우리 집근처 어떤 종교단체에서 온 것이 있어요. “인간이 곧 하나님이다.” 큰 글씨로 써서 자기 종교 전파한다고. 하나님이 따로 없고 인간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인간을 자극합니까. 높여줍니까.
느부갓네살은 누가 하나님이에요? 자기만 하나님이다. 라고 하다가 짐승처럼 7년 동안 소처럼 풀을 먹고 살았단 말이지요. 이것이 민주주의와 제국주의의 차이점인데 그쪽은 한 명이고 이쪽은 모든 만민이 다 절대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서로 절대자 되려고 하니까 싸우잖아요.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 누가 이야기했지요? 홉스가 이야기했지요. 존 로크도 비슷한 이야기했지만 홉스가 먼저 이야기했어요. ‘이 세상은 투쟁해서 승리하는 자는 살아남고, 눌리는 자는 도태된다.’ 이 이야기가 빌레몬서에도 나와요.
그래서 빌레몬서가 좀 어렵습니다. 미리 이야기한다면, 사람이 가난한 자 부자가 나눠진 것이 아니고 사실은 모든 사람이 다 가난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넉넉하면 안 초조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다 초조하니까 자꾸 성급하게 되고, 더 끌어 모아야 되고, 더 벌어야 되고. 왜? 가난하니까. 항상 불안하니까. 보험 들었는데 또 다른 보험 들고.
부자란 이름의 가난뱅이들입니다. 아무도 넉넉한 사람이 없어요. 20대 아가씨. 장래가 불안해요. 가난해요. 항상 초조하고 불안해요. 내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젊은이들이 다 그렇습니다. 여자고 남자고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앞으로 3년 후의 내 모습이 어떨지? 항상 쫓겨요. 쫓기면 그만큼 여유가 없어. 여유가 없으니 가난한 사람 아닙니까. 부자들은 안 그런 줄 압니까? 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은 많이 벌었는데 세무조사 나올까 불안하고 --
가난의 의미가 이것 말고 좀 더 나오는데, 가난의 의미가 상당히 어려워요. 출애굽기 노예와 연관시키고 무지하게 어려워요. 그 어려운 것도 조금 아는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나’라는 것은 없습니다. 임시방편적인 것입니다. 끌어 모아서 그것을 ‘나’라고 합니다. 모은 것이 없어지면 또 다른 나를 만듭니다. 기업체 사장하다가 망하면 처음에는 아쉬워하다가 새로운 것을 시작해서 또 다른 ‘나’를 만듭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것은 대충 주변에 있는 것을 적응하는데, 그 적응하는 매듭을 짓는 마지막 테두리에 있는 끈을 ‘나’라고 보면 됩니다. 쉽지요?
그냥 모이면, 무조건 끌어당기면 일단 오늘의 ‘나’에요. 그런데, 이것이 존재의 기반인데, 밑에서 뭐가 올라온다고 했습니까? ‘나’는 덩치가 있는데, 그 덩치를 길이 관통을 해서 나는 분해되고, 균열이 생기는데, 이 갈라지는 길을 예수님이 마태복음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그러면 십자가란 것이 뭐냐? 십자가에는 두 가지의 힘이 있어요. 하나는 저주의 힘이 있고, 저주의 힘이 우선이고, 그 다음에 사랑, 다른 말로하면 용서의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실 때 예쁜 선녀복 입고 사람을 유인하듯이 “나는 하늘나라에서 왔단다. 내가 입은 옷 예쁘지? 날 따라오면 천국에 간단다.” 이런 식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피 흘리며 망가지는 모습입니다. 예수님 스스로 자멸하는 모습으로 오십니다. 저주의 모습이란 말이지요.
그런데 왜 예수님이 이런 저주의 모습을 보여주는가 하면, 이 저주는 누구 때문에 받은 저주입니까?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의 우리 모습이란 말이지요. 우리 모습인데, 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 역할을 하기 때문에 ‘죄 있는 인간은 이렇게 된통 당한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저주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번 가야산 수련회에서 한 내용 기억나십니까?
그렇다면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할 때의 그 십자가는 무슨 힘입니까? 저주의 힘이에요. 결국 인간은 무슨 힘으로 구원 받습니까? 저주의 힘으로 구원 받는 거예요.
사람들이 구원 받을 때 사랑의 힘을 붙잡지 말고, “맞습니다. 나는 저주 받아야 할 놈입니다.” 하고 저주의 힘을 받아야 돼요. 저주의 힘을 받아야 그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다. 십자가는 저주의 힘이에요. 나는 이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사람들은 십자가를 이야기하면서도 ‘사랑의 하나님’만을 말해요. ‘위로의 하나님’을 말하고. 사람들은 사랑받고 위로받기 원하는데, 이들의 요구에서 기독교가 생기고, 개혁주의가 생겨요.
인간들은 지금 뭘 하고 있습니까? 끌어 모으고 있지요. 끌어 모으는데 뭣까지 끌어 모으려고 합니까? “하나님이 저를 사랑해 주세요.”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사랑 받기 위해 사랑까지 끌어 모아서, 이 땅에서는 지금까지 끌어 모은 것으로 살고, 죽어서는 주님 주신 사랑까지 덧붙여서 천국 가는 것을 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봐야 이 안에는 누가 있습니까? 자아가 형성되는 겁니다. 길이 아니고.
‘나는 나보다 길이 더 좋아요.’ 이런 소리를 못해요. ‘나는 아직도 내가 좋고 이런 나를 더 잘되게 하기 위해서 길이 필요하다.’ 이렇게 되지 ‘나는 부서져도 길만 있으면 됩니다. 유일한 그 길만 있으면 나는 아무 탈 없습니다.’ 이런 소리를 할 수가 없어요.
저주의 힘이 밑에서 균열을 일으킵니다. 그럴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십자가가 무슨 힘이라고 했습니까? 저주의 힘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아하, 저렇게 당하는 것이 내 모습이구나.’ 이 저주의 힘.
그러면 이 자아에 뭐가 임합니까? 저주가 임하죠. 저주가 임하면 그 첫 번째 현상이 뭐냐? 당황스러움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복음 전하는 교회 왔다가 사람들이 가버리는 이유가, 핑계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 고 하지만 속으로는 당황스러워 해요.
사랑받기 위해서 왔는데, 사랑이 아니고 십자가 이야기를 하니까 ‘나’의 가치를 못 찾잖아요. 나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그 모임에 왜 갑니까. 그래서 더 이상 안 가지요. 내가 얻는 것이 있어야 가지. 얻기는커녕 오히려 저주 받아야 할 인간이라고 하니까 당황스럽지요.
두 번째는 격분이 일어나지요. 분노가 일어납니다. 이게 바로 스데반 집사를 죽였던 사람들인데, 그들이 격분을 했지요. 그럴 때 우리는 스데반 집사를 이해할 생각하지 말고 누구를 이해해야 되는가? 스데반에게 돌을 던지는 그 바리새인의 마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우리도 돌을 던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가 질문합니다. 왜 스데반 집사에게 돌을 던졌습니까? 그 사람들이 그렇게 성질 나쁜 사람들이 아닌데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은 사람들이 그렇게 악한 사람들이 아닌데 왜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점잖은 사람들을 왜 격분하게 만들었어요. 그동안 굳혔던 자아가 쓸모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 자아가 무엇을 추구하는가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자아는 자기 노동의 가치를 지양(추구)합니다. 자아가 되려면 남이 갖고 있는 것이 탐이 나야 되고, 탐나는 이웃만 골라서 타인으로 간주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남자가 장가를 가는데 선을 100번 봤습니다. 100번 선봤다는 것은 여자를 100명 세웠다는 말 아닙니까. 100명 세웠는데 이상하게 한 사람에게 필이 꽂히는 거예요. 그것은 누가 선별합니까? 자기가 선별하잖아요. 그것은 그 사람에게 자기가 원하는 바가 있다는 거예요. 나머지 99명은 그 사람의 이웃이 아니죠.
이웃을 누가 정합니까? 본인이 정하는 거예요. 어떤 식으로 정합니까? 내가 아쉽고, 내가 원하는 것이 들어 있는 속성, 내가 갖고 싶은 속성을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것 같으면 그 사람을 내 남편감으로 혹은 아내감으로 삼는 거예요.
오 목사님은 구자근 사모님의 무슨 속성 때문에 뽑았는지 모르겠는데, 키 큰 것?
사르트르가 이런 이야기했어요. 사람이 누구를 사랑한다는 말은 그 사람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내가 내 마음을, 어떤 마음인지를 상대방이 알아주기를 원해서, 그림을 그립시다. 어려운데, 나는 여기 있고 상대방은 여기 있습니다. 나는 사랑한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입니다. 왜 거짓말인가 하면, 나는 어떤 상대를 볼 때 그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상대를 선별해서 뽑지요. 여러 사람이 있지만 너는 저리가, 너도 저리가. 이런 식으로 자기가 원하는 사람을 뽑는데, 이 사람이 마음에 든다는 것은 내가 갖고 싶은 속성을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상대방에게 당신은 나와 일치해야 돼. 일치하려면 내가 마음을 줬는데 상대방이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가 어떻게 압니까? 모르죠. 내 속 터지는 이 심정을, 부모가 자식에서 말하잖아요. ‘야, 나는 너 보면 속 터진다.’ 백날 부모가 속 터져도 자식들은 아무 일 없어요. 왜? 자식은 부모가 아니고 부모는 자식이 아니니까. 어떻게 상대방을 압니까? 모르잖아요. 일치가 안 되잖아요.
일치가 안 될 때 그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 언어가 동원됩니다. ‘나는 널 사랑한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너 내 마음 안 알아주면 죽어.’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상대방 입장에서는 ‘내가 왜 당신 마음 알아줘야 되나’ 이 말이죠. 그러면 이쪽에서 하는 말이 “내가 너를 골랐거든. 내가 골랐으니까 넌 나하고 일치해야 돼.”
사람이 누구를 사귈 때는 상대방의 기분을 사귀는 것이 아니고, 너는 내 마음에 무조건 들어야 되고 너는 무조건 내 기분 마쳐 줘야 된다는, 니체는 이것을 ‘권력 의지’라고 했는데, 강한 힘의 의지를 가지고 상대방을 내게 종속시키려는 목적으로 상대를 선별해서 그를 친구로, 애인으로 사귀지요. 이것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입니다. 일방적이죠.
이것을 어렵게 말하면, 나의 자유에 상대방이 무조건 무릎을 꿇을 때까지 나는 상대방에게 희생과 봉사를 다하는 겁니다. 말이 좀 이상하지요. 희생과 봉사를 한다는 것이 누구를 위해서? 자기를 포기하고 상대방 좋으라고 하는 것이 희생과 봉사인줄 알지만 결국은 희생한 나에게 종속시키기 위한 일종의 투자를 한 거예요.
정성도 투자고 희생도 투자고 전부 투자를 하는 거예요. 특히 부모들이 자식에게 투자를 해서 부모 알아주기를 원해도 결국 자기 사랑하는 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난 후에는 친정에 와서 심지어는 화장실에 있는 화장지까지 다 들고 가요.
이처럼 서로가 알력처럼 자아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중재를 해야 돼요. 이것을 제 3의 매개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일반 사회조직, 교회. “우리 적당하게 하자.” ‘내가 너에게 일방적으로 강요한 것처럼 너도 나한테 일방적으로 한 것이 있으니까 이제 서로 적당하게 하자.’ 하는 식의 가정이라는 조직이고, 사회라는 조직입니다.
그런데 가정도 없고, 교회도 안 다니고, 조직 사회에 속해 있지 않는 사람들은 제 마음대로 살지요. 성질나면 지하철에 휘발유 뿌리고 불 질러서 사람들 다 죽여도 자기는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쉽게 말해서 가정교육이 덜 됐다고 합니다. 제 3의 매개체가 없기 때문에 ‘왜 세상은 날 안 알아주는가?’ 그 사람(대구 지하철 방화사건 주인공)이 진짜 휘발유 뿌린 이유가 그런 거예요. ‘왜 세상은 나의 고달픈 인생에 무관심한가?’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네가 뭔데 우리가 알아줘야 되는데?’ 하고 나오지요. 그러면 그 사람은 ‘내 마음 나도 몰라.’
사르트르가 이것까지 파악했는데 그가 결국 뭘 몰랐어요? 왜 내 마음이 일방적으로 내 위주인지, 이런 마음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몰랐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사르트르는 뭘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고 난 후에 인간은 자신이 신이 된다는 사실이 성경에 나오는데.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2:2) 불순종의 아들이니까 이것은 자기밖에 모른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돛대고 자기가 최고입니다. 이런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들이 자기 욕망대로 가도록 만든 것이 누구인가? 세상 신, 악마입니다.
마귀가, 뱀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뭐라고? ‘네가 돛대다. 네가 하나님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원인도 모르고 이유도 몰랐어요.
자기밖에 모르는 여기에 (저주가)왔으니까 당황스럽지요. 그리고 자기를 이루기 위해서 자기 노동의 가치를 계속 찾아 온 겁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부터 호주로 뉴질랜드로 자녀를 영어 연수 보내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 노동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아이들도 부모의 지시에 따라 외국으로 연수를 가는 이유는 ‘언젠가는 날 알아주겠지.’
시장 난전에서 채소 파는 할머니도 이 말 알아듣습니다. 사르트르 이야기는 못 알아듣는데, 이 말은 다 알아듣습니다. ‘언젠가는 날 알아주겠지.’ 엄마가 이렇게 추운데 난전에서 고생하는데 이놈의 자식은 오늘도 술 처먹고 늦고 들어오네. 하지만 언젠가는 날 알아주겠지. 이것을 간단히 말하면 ‘자기 노동의 가치’죠.
그런데 이렇게 노력했는데 어느 날 십자가가 다가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어떤 모습인가를 보여줍니다. 저주받은 모습이지요. 그리고 지금까지 나는 ‘언젠가는 날 알아주겠지’ 하는 희망을 품고, 예쁜 나, 귀한 나, 남에게 뒤지지 않는 나, 이런 내가 언젠가는 이 꿈을 이룰 날이 있겠지 하고 손꼽아 기다리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십자가가 저주의 힘으로 다가올 때 격분하게 되지요.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세상이 너를 미워하거든 너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네 입에서 예수님이 나왔다는 것 때문에 널 미워하는 것이다.’ 너희들의 모습은 십자가에 죽어야 할 이런 모습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그 예수가 미워서 예수를 전하는 너희도 미워할 것이다. 이로서 너희는 예수님과 한 식구인 것이 드러날 것이다.
저주의 힘, 그 저주의 힘이 올 때 우리는 격분하고 되고 분노하게 되고 우리는 돌아서게 됩니다. 교회고 복음이고 나발이고 기독교고 신이고 뭐고 나는 자연스러운 것을 원한다. 자연스러운 것이 뭘까요? 자기 가치를 알아주는 곳으로 이웃을 선별해 가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어떤 이야기가 나옵니까?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나오죠. 여러분 이 이야기 다 아시지요? 어떤 사람이 길에서 강도를 만나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첫째는 제사장이 보고 그냥 지나가고 두 번째는 레위인도 그냥 지나가고 세 번째는 사마리아인이 와서 그 사람을 치료하고 했다는 이야기지요.
사람들이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가 하면 선한 사마리아인에게 초점을 맞추는데, 그렇게 해석하면 안 되고,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돼요? 첫째 둘째 사람들의 입장을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됩니다. 왜? 사실은 그들이 오늘날 우리의 본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갑니까? 자기 노동의 가치를 들어줄 만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순간적인 선별 작업에서 그 사람은 제외됩니다. 자기 가치를 높여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떨어트리고 자기의 수고를 헛것으로 만들 수 있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외면해 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출애굽 시킬 때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너희는 애굽의 노예였다.’ 오늘 빌레몬서에 노예가 나오는데, 주인의 돈을 훔친 모양이에요. 그래서 바울이 ‘빌레몬아 돈 훔친 것은 내가 갚아줄 게.’ 이런 이야기가 나와요. 돈 훔치고 도망간 노예 수배를 했는데, ‘빌레몬아 잊어라. 그 돈 내가 계산할 게. 못 배운 노예((오네시모)가 그런 짓을 했는데 지금은 주의 종이 되어 날 도우는 동역자가 되었으니까 과거는 잊어버리고 오네시모 나에게 다오.’ 이것이 빌레몬서에 나오는 표면적 이야기입니다.
출애굽기에 노예가 나오잖아요. 옛날 시대 노예는 ‘유사 동물’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유사 인간’이 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노예는 사람이 아니고 동물인데, 인간과 비슷하게 생긴 동물로 봤어요. 그래서 소가 밭을 간다고 돈을 지불하지 않는 것처럼 노예는 부리면 그만입니다.
헤겔은 말하기를 노예의 특징이 뭔가? 노예의 이름으로 소유재산이 없다는 것입니다. 노예는 아무것도 자기 소유가 없어요.
자아는 모든 속성을 내 소유로 만들 때 자아가 생기지요. 그러나 노예는 자기 것이 없어요. 그래서 노예는 사람이 아닌 거예요. 노예에게는 자아란 것이 허용이 안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노예들(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나님 백성으로 만들었잖아요. 이것을 아브라함은 ‘없는데서 있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다.’
사람이 뭔가 있으면 사랑을 받으려 해요. ‘현재 하나님 이만큼 가졌습니다. 가진 것 사랑해 주세요.’ 이렇게 나온다고. 뭔가를 가지게 되면 그 가진 것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더 사랑해 달라고 요구하지만, 만약 가진 것에 공격하면 저주로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나타나는 이유가 뭡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들은 죽은 자요, 없는 자인데(다른 말로 하면 노예인데), 인간들이 악마의 영을 받아 ‘이미 나는 이만큼 가졌고, 그래서 나는 인간이며 하나님 보기에도 나는 당당하게 큰소리 칠 수 있는 그런 존재다.’ 이것을 좀 인정해 달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노예가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자유 의지를 이야기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개혁주의 신학을 말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합니까? “에라, 이 저주 받을 놈!”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10분간 쉽시다.
(2008. 2. 12. 13:27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