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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71207b 울산강의-창세기 29장자유게시판창세기

20071207b 울산강의-창세기 29장

이름 : 한윤범(IP:59.6.189.173)

20071207b 울산강의-창세기 29장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에는 아까 첫 번째 시간도 상당히 어려웠는데 두 번째 시간은 좀 더 어렵습니다. 어떤 점에서 어려우냐 하면, 첫 번째 시간에 어렵던 것은 ‘소유성’이죠. 인간은 자기가 뭔가 가지는 것을 통해서 자기를 확인하는 버릇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절대로 죽은 인간한테 안 빼앗깁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것은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것은 누구 것이라고요? 하나님의 것은 절대로 하나님 것 되지, 하나님 것이 도중에 내 것이 되는 도저히 그런 수는 없어요.

고린도전서 6장에 보면, “너는 값 주고 산 내 것이 되었으니” 이래 되었지, 어느 성경에 하나님이 사람 소유된 거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반대로 이야기하죠. 내가 백날 까불어도 너는 내 것이야. 그걸 우리가 그냥 글자로 보면 믿을 것 같지만 실제로 행동하는 것 보면, 그게 불신앙으로 계속 난 내 것이 있어야 돼. 내 것이라 하는 것은 재산뿐만 아니고, 내 지혜와 내 자식과 내 교회 또는 무슨 직분 다 포함됩니다. 내 건강 다 포함되는데.

자, 그러면 첫 번째 시간에 소유성을 갖고 있는 야곱이 뭐로 바꿨습니까? 어떻게 바뀌는지 봅시다. 호세아 12장 2절. 1267페이지, 구약성경. 누가 한번 읽어 볼까요? “여호와께서 유다와 쟁변하시고 야곱의 소행대로 벌주시며 그 소위대로 보응하시리라” 3절, “야곱의 태에서 그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장년에 하나님과 힘을 겨루되” 예, 됐어요.

야곱이 벌 받았지요. 소행대로 뭘 받았습니까? 벌 받았는데 그 소행이 뭐냐?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어요. 어릴 때 뭡니까? 형의 발꿈치를 잡았던 그 소행, 커서는 하나님과 겨루었던 그 소행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야곱의 소행대로 벌주시고, 그 소행대로 보응하지요. 이걸 제가 첫째 시간에 이걸 뭐냐? 바꿔치기.

야곱은 어디까지나 자기 것이 있어야 돼요. 그 점에 있어서는 우리하고 똑같습니다. 야곱은 이 야곱이라는 개성에 걸맞고, 야곱이라는 아담의 속성에 합당하도록 계속 야곱적인 그 모습을 발현을 해야 돼요. 앞으로 우리가 쭉 29장부터 보게 되면, 야곱이 달리 야곱이겠습니까? 계속 뺏고 훔치고, 사기 당하고 사기 치고, 지기 싫어하고 이기기 좋아하고 그 본색을 그대로 가져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도로써 평생 살아가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게 뭐냐? 아담의 속성을 평생토록 우리는 마음껏 원 없이 발휘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뭐냐? 내 소유 중심이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내 중심이죠. 저게 내 것이 되면 나는 웃고, 저것이 내 것을 빼앗아 가면 나는 울고. 그래서 웃고 우는 인생 아닙니까? 인생 한 방 아닙니까? 한 방에 웃고, 한 방에 울잖아요. 잘 되면 그 턱 넘으면 완전히 형편 피고, 그 밑에 깔짝깔짝 못 넘으면 계속 그 모양 그대로 가는 거고.

인생은 한방입니다. 야곱이 한방 얻어맞았어요. 한방 얻어맞고 난 뒤에 내 인생은 하나님의 계시대로 움직이는 인생이지, 내가 원하는 대로 절대로 안 가는 인생,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는 인생인 것을 감사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안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세요.

하여튼 야곱이 좋다하는 것은 다 뺏어버려요. 야곱이 누굴 제일 좋아했습니까? 요셉을 제일 좋아했지요. 요셉을 만나기 전에 야곱에게 요셉은 이미 죽은 자식이었습니다. 다른 형제들은 다 알지요. 가라로 거짓말로 죽었다는 걸 알지만 혼자 몰랐어요. 누가 몰랐습니까? 아버지 야곱 혼자 몰랐어요. 요셉, 아이고 불쌍한 놈, 짐승한테 물려죽다니. 계속 죽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합니까? 철저하게 야곱의 더러운 속성이 나와 줘야 하나님의 복이라는 것이 인간과 상관없이 그냥 하나님께서 복 주십니다. 라는 사실을 더욱더 깨닫게 하기 위해서. 소행보고 벌을 하시지만 그 자체가 복이 되는 겁니다.

지난 주일날 아침에 제가 그런 설교했잖아요. 저주의 힘으로 구원받아야 된다고. 십자가에 나온 저주의 힘이 우리를 구원하는 거예요. 사랑의 힘이 아니고. 그 저주의 힘이 곧 우리를 살려내고 있다는 증거의 사랑의 힘이에요.

야곱으로 하여금 이제 야곱의 자기 행세대로 다 지 마음대로 멋대로 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야곱은 모든 것을 자기 쪽으로 끌어 모으는 그런 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제일 먼저 봅시다. 창세기 29장에 보면 그냥 스토리니까 넘어갑시다. 야곱이 왔을 때 라반을 만나지요. 삼촌 만나고 뒤에 16절에 보면 라반이 두 딸이 있었지요. “형의 이름은 레아요 아우 이름은 라헬이라 레아는 안력이 부족하고라헬은 곱고 아리따우니” 그러니까 언니는 못 생기고 아우는 예뻤다 아닙니까? 그러니까 야곱은 누굴 연애했습니까? 이왕이면 예쁜 아내를 얻고 싶지 못 생긴 아내를 얻겠다하는 것은 정신병자 아니면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리고 재미난 것은 잘 생기고 못 생기고 비슷하게 생기면 되는데 잘 생기고 못 생기고를 한 집에 같이 있다는 걸 통해서 야곱의 속성이 또 거기서 나는 못 생긴 것보다도 잘 생긴 걸 원하고 있다는 잠재되어 있는 자기의 기본적인 아담의 속성을 그대로 또 다보여줍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것을 따먹은 그 성질 어디로 갑니까? 그러니까 이것이 계속 주변에 발휘가 되지요.

그러니까 그 점을 또 누가 노리느냐? 그 점을 삼촌 라반이 노려서 뭐라고 합니까? 우리 이 땅의 풍습에 보면 언니가 동생보다 나중 가는 법이 없다. 동생이 언니보다 먼저 시집가는 법이 없다. 그러니까 데려가려면 둘 다 데려가든지 안 그러면 하나도 데려가지 말든지 해라. 해서 무려 14년간 7년에다가 더하기 7년을 더 봉사해서 그래서 14년간 맞아요? 21년간인지 14년간인지 내가

여기 18절에 야곱이 라헬을 연애함으로 내가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위해서 7년을 봉사했잖아요. 7년 마치고 난 뒤에 뭐라 합니까? 언니가 먼저 가는 법이라 해서 또 7년을 거기에 할 때 25절에 보니까 야곱이 뭐라고 합니까? 어찌하여 외삼촌이 나를 속인다고 돼있지요.

그러니까 라반이 형보다 아우를 주는 것이 우리 지방의 풍습이 아니다. 언니를 덤으로 끼워주는 거예요. 이런 풍습은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 집에 딸 둘이 있을 때 단번에 두 명 다 가잖아요. 딸 있는 집안에서는 해결책이 아주 속 시원하니. 딸 넷 있으면 넷 한꺼번에 다가는 거예요.

그래서 야곱이 그대로 하여 칠일 채우매 칠년 동안 내게 봉사할지라 해서 아낼 얻었습니다. 자, 물어봅시다. 이럴 경우에 야곱의 생각에는 뭐가 들었겠어요? 야곱은 지금 하나님의 복은 받아놨지요. 나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이 오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결국 뭐냐 하면, 자기가 복의 근원 값을 하려면 계속해서 채우고 계속 채우는 이 과정이 자체를 뭐로 보느냐?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본 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그냥 가만있고 계속해서 내 것이라고 들어오면 축복이라고 본 겁니다. 이거 오해였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그 축복을 채우지도 못하고 마지막 애 낳다가 죽죠. 사랑하는 아내, 미운 아내 말고, 언니 말고. 사랑하는 동생 라헬은 결국은 조기에 하나님의 축복 구조에서 지워버립니다. 없습니다. 레아만 덜렁 남은 거죠. 그러니까 야곱이 생각하는 축복이란 개념,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소원대로 다 들어줘요. 다 들어주고 한방에 다 부셔버립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창고에 곡물이 가득하니까 하는 말이 아, 이제는 주식값도 많이 오르고 창고에 곡물도 많이 있으니까 내 영혼아, 평생 먹고 산다. 할 때 하나님께서 뭐라 합니까? 내가 오늘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저게 누구 것이 되겠느냐? 이게 누가복음 12장에 나오잖아요. 그 말씀이 글자는 성경에는 있는데 이게 실제로 우리가 체험되게 하십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축복이에요.

축복은 뭐냐? 성경책 문자로 된 말씀이 이게 활개 쳐서 나의 실생활로 스며들 때 이게 축복입니다. 무섭지요. 아주 무서운 축복이에요. 그걸 저는 위험한 축복이라 하는데, 아주 위험한 축복이에요. 그럴 때 그 영혼 데려가면 낭패도 얼마나 큰 낭패겠습니까? 그러니 성경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이거대로 우리는 구원받은 입장에서 보니까 우리에게 다 주어집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 뜻대로 멋대로 하도록 다~ 들어주십니다. 그러면 그 하는 도중에서 우리의 가진 성질, 나밖에 모르는 나의 소유성은 유감없이 다 발휘되지요. 다 발휘되면서 속이기도 하고 그 와중에서 속기도 하고. 속으면 사적인 복수심이 또 발생되고. 복수심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저 인간 죽여 달라고 기도하기도 하고.

지금 형 에서에 대한 감정이 아직도 살아있어요. 태어나면서 형의 발꿈치를 잡았다는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는 악한 소행인데 야곱은 그걸 악하다고 보지 않고 그냥 내 성질대로 했을 뿐입니다. 라고 나오지요. 근데 아까 호세아 봤지요. 호세아 보니까 이것이 죄지요. 잘못된 소행대로 벌 받을 짓을 했지요. 그런데 야곱은 전혀 그걸 생각하지 않아요. 원래 성격이 그래요. 이렇게 합니다. 성격이 원래 남한테 안 지겠다는 게 내 성격인데 그거 너무 탓하지 마세요. 라고 나오는 것이 야곱입니다. 그래, 니 성격대로 해보자.

근데 나중에 창세기 33장 들어가면 누가 누구한테 절합니까? 야곱이 에서한테 절합니다. 이거는 발꿈치를 잡을 때 그 성격 어디 갔습니까? 놀랍지 않습니까? 누가 절하라 했습니까? 그것도 그냥 절하는 게 아닙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내 주여 절을 받으시옵소서’ 자기가 옛날 싸웠던 형보고 자기 주래요. 내 주여, 하고 절하고 각양 선물을 다 줬어요.

야곱이 뭘 알았습니까? 내 인생은 내 소유의 인생이 아니고, 하나님의 소유의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속성이 그 순간에 바깥으로 튀어나온 거예요. 우리 주님은 이렇습니다. 라는 그게 튀어나온 거예요. 여러분들도 가끔은 튀어나와요. 가끔은 튀어나올 때 아, 이건 내 성질하고 영 안 맞다. 그럴 때가 있을 겁니다. 복 받은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가끔은 성경대로 튀어나올 때가 있을 거예요.

언제 되는 줄 알아요? 자기가 깨졌을 때. 다시 말해서 내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를 짧은 순간에 느낄 때 그 순간 다른 옆에 사람들은 나로부터 온유와 화평의 혜택을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내 죄인인 것을 알 때 옆에 사람은 상당히 기분 좋은 순간이에요. 저 인간이 인간 됐네. 지 밖에 모르는 인간이 와 자꾸 그러나. 돈만 알더니 갑자기 헌금을 하고 미쳤나.

죄인입니다. 이 돈 내 것 아닙니다. 저는 이 돈 밖에 모르는 인간이라는 걸 헌금할 때 다른 사람이 혜택입어요. 그렇게 하는 그게 하나님이 다루는 사람은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그걸 또 흉내 내면 그것 했다고 나한테 소유성이 돼요. 소용없습니다. 그냥 내 성질대로 멋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야곱은 여기서 어렵습니다. 야곱이 두 아내와 해서 아이를 죽을 때까지 몇 명 낳습니까? 열두 명 낳지요. 이 열두 명의 자녀가 바로 누구의 속성을 쏙 빼닮았느냐 하면, 야곱의 속성을 빼다 닮았어요. 그리고 뿐만 아니고 열두 명의 자식을 생산하는데 보탬이 되었던 두 자매, 레아와 라헬은 둘이 싸우는 꼬락서니 하고는 둘이 싸우는 것은 누구하고 싸우느냐 하면, 자기 형 에서와 야곱이 싸우는 걸 꼭 그대로 재탕해서 여기에 두 자매의 새끼에 열두 명의 자식을 낳습니다.

그러니 야곱이나 에서나 라헬이나 레아나 열두 명 자식이나 전부다 하나같이 발꿈치를 잡아서 자기 밖에 모르는 그런 아주 원초적 인간의 죄성을 그대로 듬뿍 품고 사는 그런 인간들 열두 명이 야곱의 몸에서 태어나게 됩니다. 야곱의 죄의 확산이죠. 그런데 로마서 5장에 보면 뭡니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죄는 퍼져야 돼요. 미안합니다. 놀라게 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위해서 우리의 압축된 속성은 밀가루부대에 칼 들이대면 밀가루가 쏟아지는 것처럼 팽팽한 밀가루부대에 손대면 밀가루 쏟아지듯이 질질질. 살아가면서 사십대, 오십대, 육십대 질질질 흘러내리면서 죄를 퍼뜨려야 돼요. 같이 살면서 부부간에 싸우고, 자식간에 싸우고 퍼뜨려야 돼요. 쭉 퍼뜨려야 돼요. 교회 와서 줄줄줄 쏟아내고, 교회 문 열고 와서 줄줄줄 쏟아내고, 밥 먹고 집에 갈 때까지 쏟아내고, 차타고 가면서 이 새끼, 욕하고 운전하면서 욕하고. 하여튼 가는 곳마다 우리의 죄를 퍽퍽 다 퍼뜨려야 돼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세워져 있는 야곱을 평면으로 완전히 벽지를 만들어서 쫙 130년 인생 동안 땅바닥에 퍼뜨리게 하는 이 계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시대로 이뤄지게 되는 겁니다. 수직적으로 서 있는 인간을 수평적으로 쫙 깔아서 기다랗게 쭉쭉 늘여서 확대시켜서 지상에 130년 나그네 인생 동안 어느 한 순간 죄 안 짓는 순간이 없도록 지면에 바짝 붙여서 깔아놓는 것, 이게 우리의 가는 길이고, 야곱의 가는 길입니다.

자, 그러면 이 야곱이 평소에 소행이 얼마나 나쁜지를 이 두 마누라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가를 같이 한번 봅시다. 29절에 보면, 문제의 핵심은 야곱에게 있습니다. “라반이 그 여종 빌하를 그 딸 라헬에게 주어 시녀가 되게 하매 야곱이 또한 라헬에게로 들어갔고 그가 레아보다 라헬을 더 사랑하고 다시 칠년을 라반에게 봉사하였더라” 그러니까 총 21년을 봉사를 했어요.

“여호와께서 레아에게 총이 없음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무자하였더라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르우벤이라 하여” ‘보라 아들이라’ 이렇게 했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레아가 아들을 낳았을 때 누가 이렇게 자식을 배태케 했습니까?

지금 야곱이 누굴 더 사랑해요? 라헬을 더 사랑하는데 그것을 미리 알고 하나님께서 누구한테 먼저 아들을 낳게 합니까? 안 사랑하는 덜 사랑하는 레아에게 아들을 낳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분명히 라헬은 남편이 자기를 더 사랑하는데 어, 남편이 사랑하지 않는 언니한테 아들을 낳으니까 여기서 라헬은 다시 죄가 더 자극 받게 돼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다룰 때는 아무리 점잖게 하면서 나는 성화된다, 거룩케 한다 해도 하나님이 우릴 가만 두질 않습니다. 성질 건드리기 해서 성질대로 기어이 하게 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나는 점잖게 살아간다. 이제는 하나님 말씀대로 살란다 해도 하나님이 가만 두질 않고, 점잖은 것 좋아하네. 네 속에 이런 거 들어있다. 이 뱀이 들어있다. 하는 걸 들추어내는 방식으로 우리 인생의 살아가는 사건, 사건들이 성질나는 사건들만 쫙쫙 우후죽순처럼 여기 대나무 많대. 울산에. 대나무처럼 쑥쑥 하루도 성질 안 내고 지나가는 날이 없도록 만들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노는 것을 보고 꼭 인간들 성질나게 만드는 반대방향으로 하나님께서 축복이란 이름으로 일을 벌이시는 겁니다.

그래서 르우벤 해서 아들이라. 그리고 하는 말이 32절에 뭡니까? “이제는 내 남편이 나를 사랑할 것이라” 자, 지금 남자는 하나에 여자는 둘입니다. 남자가 하나고 여자가 둘인데 여자1, 여자2인데 문제는 사랑이라 하는 게 사랑이 골고루 반반 주든지 안 그러면 온전한 사랑을 여기도 주고, 저기도 주면 되는데 이 사랑이란 특징이 뭐냐? 반드시 배타적이 있어요. 배타성을 갖고 있어요. 한쪽을 사랑하면 야곱이 둘 다 사랑한다 해도 사랑을 받는 여자 입장에서는 한쪽을 사랑하면 자연적으로 나를 미워하는구나. 라고 해석해 버려요.

남자는 몰라요. 여자의 마음을. 양쪽 다 사랑해도 절대로 여자는 그 말 안 믿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배타적으로 나만을 사랑해야 사랑하는 것이지, 여기도 헤헤헤, 저기도 헤헤헤 이런 사랑을 사랑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왜 그런데? 몰라요. 난 여자 안 되서 몰라요. 여자는 원래 그래요. 사랑이라는 것은 다 먹는 거지, 반반 나눠주는 그런 사랑 없어요. 몽땅 나한테 와야 돼요.

한쪽을 사랑하면 한쪽을 반드시 미워한다. 어디 나옵니까? 마태복음 6장에 나오지요. 예수님 산상설교에 나오지요. 사람은 두 주인을 못 섬기게 돼있어요. 한쪽을 사랑하게 되면 한쪽에서 반드시 미워하게 되는 거예요. 특히 호세아 같은 경우에 하나님은 자기를 남편으로 등장시키면서 너희들이 저쪽에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나를 미워함이라. 이렇게 하지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한쪽을 미워한다는 뜻에서 한쪽만을 몰아주기로 다 사랑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야곱을 할 때 여자 둘은 야곱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야곱의 사랑을 자기한테 가져오기를 원하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이삭의 복이 에서냐 아니면 야곱이라 할 때 야곱은 뭘 원했습니까? 난 형한테 얻어먹지. 이런 마음을 가진 게 아니고, 몽땅 아버지가 갖고 있는 축복을 몽땅 나에게 다 가져오기를 원하죠. 그 대신 형은 완전히 빈껍데기로 그러니까 저주받은 자로 될 때 자기는 승리자가 되는 겁니다.

사람의 심리가 양보 하는 것은 수시로 양보하는 것 같지만 양보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런 양보는 약간 찝찝해요. 몽땅 차지해야 사람은 비로소 승리했다는 맛이 나지, 뭐 약간 미진한 게 남아있고 인간성이 좋아서 좀 준다. 그런 것은 없어요. 끝까지 가게 되면 마지막에는 몽땅 차지해야 됩니다. 그게 인간적이 되니까 그 인간적인 발상을 야곱이 그런 속성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고, 바로 여자 둘이 야곱의 행세를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 나오는 자식들 열두 명은 결국 뭘 이야기하는 겁니까? 야곱의 사랑을 혼자만이 독차지하겠다는 그러한 탐욕의 증거물들이 야곱의 열두 자식으로 나옵니다. 치열한 싸움이죠. 원래 성경 전체가 전쟁이에요. 치열한 전쟁을 합니다. 그 전쟁은 누굴 위한 전쟁입니까? 내 소유성을 위해서. 내가 복 받은 사람, 복 받은 여자, 또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한 여자 이런 것. 나만을 챙기는 그런 것.

그러니까 야곱을 통해서 우리는 나라는 것을 똑바로 보세요. 나는 나밖에 몰라요.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뭐라 해도 지옥에 가더라도 나는 나를 불쌍히 여길 거예요. 그 정도로 우리는 궁극적으로 마지막으로 나를 보호할 사람은 나밖에 없어요. 그게 인간의 죄성입니다. 그 죄에서 평생 우리는 벗어날 수 없어요.

하나님이 나를 울려도 내 눈의 내 눈물은 내 손수건으로 닦아 줄 용의가 돼있어요. 그 정도로 우리는 철저하게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버릴지언정 나는 나를 버리지 않습니다. 그걸 야곱의 두 여자가 다 보여줘요. 하나님의 뜻 이런 것은 전부다 내 것 나의 것 되기 위해서 그 다음에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이지, 실제는 하나님한테 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신약에 오면 하나님께서 사랑을 묻습니다. 너는 날 사랑하느냐? 그런데 우리는 항상 뭐냐 하면, 소유가지고 하나님과 의사소통하죠. 하나님이 이만큼 해주시면 이만큼 챙겨드리겠습니다. 자꾸 소유가지고 노는데 하나님은 소유를 묻는 게 아니고, 니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항상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근데 우리는 죄밖에 몰라요. 사랑을 몰라요. 오직 나만 사랑하기 때문에 나 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독하게 궁극적으로 내가 전부기 때문에 사랑은 내 것을 떼어줄 수 없어요. 내 것은 몽땅 다 차지해야 이게 사랑다운 거예요. 그게 이 두 여자가 보여주는 거예요. 남편 사랑을 몽땅 내가 다 차지해야 돼요. 동생한테 나눠줄 것 없어요. 서로 합의해서 반반 갈라주고 그런 거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성이라 하는 것은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을 이 야곱을 우리에게 지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럼 야곱의 열두 자식은 그러다보니까 하나씩 둘씩 태어나는 거예요. 사실은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태를 열어서 자식 낳게 하지만.

그래서 여기에 한 참에 레아가 자식을 몇 명을 낳습니까? 33절에 보면 시므온 낳지요. 시므온 뜻이 뭐예요? ‘들으심’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주었다. 완전히 일방적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 전반전 4:0이에요. 첫 번째, 르우벤 낳았죠. 시므온이 낳았죠. 세 번째 “내가 아들을 낳았으니 내 남편이 이제부터 나와 연합하리로다” 나와 합궁할 것이다. 이름이 합궁이란 이름이 뭡니까? ‘레위’ 네 번째 아들이 뭡니까? 35절에 이름을 유다. 4:0 됐으면 게임 끝난 것 아닌가?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전반전 4:0인데 뭐. 게임 끝난 것 아니에요. 완전히.

라헬이, 30장 봅시다. 30장 1절에 “라헬이 자기가 야곱에게 아들을 낳지 못함을 보고 그 형을 투기하여 야곱에게 이르되 나로 자식을 낳게 하라” 하는 거예요. 그럴 때 야곱이 라헬에게 뭐라고 합니까? “그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이것은 우리가 보세요. 하나님의 뜻하고 따로 놀고 있고 지상에서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전부다 자기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서로 만나고, 서로 달래고 협박하고, 서로 떼쓰고 그렇게 합니다. 짜증내고, 상대방을 윽박지르고, 투정부리고.

보통 남편들이 퇴근해서 집에 가면 여자들 투정부리면 정말 어떤 땐 죽이고 싶어. 딱 싫지요. 피곤 죽겠는데 투정부리면. 남편은 선진조국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데 당신은 추구하는 사상과 철학이 뭐냐 이 말이죠. 오랜만에 일찍 들어와서 축구 보려 하는데 연속극 본다고. 돈 벌어오는 남편에게 배려하는 게 뭐가 있노? 없잖아요. 나도 얼마나 힘든지 아나? 콩나물 다듬는다고 얼마나 힘든지 아나? 그럼 너, 콩나물 다듬어 볼래. 직장생활 해볼래.

하나님의 뜻이고 예배당 하고 교회고 뭐고 간에 사람 일상적인 만남은 나만 사랑해 달라는 자기중심주의 외에는 없습니다. 모든 대화가. 나만 예뻐해 주고, 내 원대로 돼야 되고, 모든 것이 내 욕구대로 다 돼야 되고, 내가 원하는 대로 제자리에 다 있어야 되고, 그걸 가지고 안 되면 짜증내고 분통 터지고.

가만있다가 욕 얻어먹으니까 야곱이 화나서 와 나보고 하노? 산부인과 원장도 아니고 나보고 하는데, 이런 식으로 하나님 탓으로 돌리면서 당신이 짜증 낼 걸 내야지. 내가 되도 않은 일을 왜 하느냐? 라고 이렇게 짜증을 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사랑이라 하는 것은, 사르트르가 그런 이야기했죠. 사람이 누굴 사랑한다는 말은 내가 당신을 갖고 싶다는, 이게 만약 어떤 여자라면 내가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것은 내 마음을 내 자유를 네가 좀 알아 줘. 하는 말이 뭐냐? 나는 너를 사랑해. 나는 너를 갖고 싶다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그 마음을 좀 알아주면 좋겠는데 너는 너고, 나는 나고 안 알아주잖아요. 안 알아주니까 거기서 뭐냐? 언어가 동원돼요. 나는 당신을 사랑해. 백날해도 내가 사랑한다는 마음을 그 사람이 사랑의 말을 내가 사랑한 만큼 이해하겠습니까, 모르겠어요? 모르겠지요.

그러니까 언어라 하는 것은 뭐냐? 뭔가 일치되지 않은 걸 핑계 삼아 계속 남발하는 게 언어에요. 사랑해, 사랑해. 이 말은 뭐냐 하면, 진짜 내 마음 안 알아주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교인들이 믿습니다, 믿습니다. 말은 뭐냐? ‘전혀 안 믿습니다’란 뜻이에요. 얼마나 안 믿어지면 믿습니다, 믿습니다. 말로 다 때웁니까?

세상이라 하는 것은 타인은 나를 모르고, 나는 타인을 몰라요. 왜? 서로가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그 관계를 둘 다 묵사발내고 둘 다 서로 머리 꽈당, 헤딩시켜서 둘 다 폭삭 주저앉게 하시는 복, 그 복은 하나님의 계시에서 나오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더 죄 되게 하기 위해서 욕심쟁이 둘이 꽝 박치기하는 그게 바로 결혼생활입니다. 맨 날 붙어서 맨 날 터지게 만드네.

그래서 아하, 백날 결혼 칠십년 살아도 나는 나고, 니는 니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거죠. 내가 너 사랑했잖아. 하는 것도 다 그때는 빈 말이었고. 그 빈 말인지 니도 알제? 나도 빈 말인지 알고 사랑했잖아. 둘 다 사랑한다는 둘 다 빈 말이에요. 둘 다 비슷하면서도 둘 다 안 맞아. 둘 다 아무도 일치되지 않는 걸 계속해서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갈수록 부부 사이에 사랑한다는 말은 안 하고 그냥 다른 말 하죠. 밥 줘. 이런 식으로 노골적으로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걸 이렇게 하죠. 어쨌든 간에 라헬은 이젠 남자는 뒷전이고, 남자는 하나의 기계가 됩니다. 무슨 기계? 아기 낳는 기계 그리고 여자와 합궁하는 그런 기계. 일종의 변강쇠로 변하고 있어요. 야곱은 이제 점점 껍데기가 되고, 점점 더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여자 둘에 야곱은 완전히 치입니다. 기력은 기력대로 다 뺏기고. 열두 명 낳으려고 해 보세요. 보통 기력인가. 모든 기력은 다 소진되면서.

그러니까 야곱이 못됐지만 야곱보다 더 못된 사람이 누구냐? 레아가 아니라 라헬입니다. 심지어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서 자기 여종까지 자기 시녀부터 줘버리죠. 그 짓을 누가 먼저 하느냐? 라헬이 먼저 하죠.

그 짓을 봅시다. 30장 3절에 “라헬이 가로되 나의 여종 빌하에게로 들어가 그가 아들을 낳아 내 무릎에 두리니 그러면 나도 그를 인하여 자식을 얻겠노라 하고 그 시녀 빌하를 남편에게 첩으로 주매 야곱이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빌하가 잉태하여 야곱에게 아들은 낳은지라” 하나님이 내 억울함을 풀었다 해서 이름이 단. 단이라 하였으며 그 이름 뜻은 억울함을 풀었다.

보세요. 제일 먼저 ‘보라 아들이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기도 응답했다.’ 그 다음에 이제 ‘합궁할 수 있겠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 다음에 ‘억울함을 풀었다.’ 전부다 아들 이름이 뭡니까? 아들 이름이 아들의 장래를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남편을 생각하는 것도 아니고, 전부다 여자들이 자기 한풀이, 한풀이에 해당되는 이름들을 다 갖다 붙여놓은 거예요. 이거는 뭐냐? 인간의 속성을 완전히 까발리는 거죠. 완전히 인화지에다 사진 찍을 때마다 인간의 속성이 다 튀어나오는 거예요. 야곱의 속성이.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이 하는 것도 아니고 뭐냐? 남편의 사랑을 독점해서 라이벌 되는 저 여자보다 남편의 사랑이 나에게만 쏠리게 하는 그런 목적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여자 둘을 갖다 붙여놨죠. 사람이 혼자 살면 착한 줄 알지만 옆에 같은 사람 붙으면 싸운다니까.

제가 우리교회 전에 설교할 때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여기도 예를 들었습니다만 시어머니를 봉양하는 치매 걸린 시어머니를 오년 간 보양해서 칭찬이 그 교회에서 자자한 며느리가 있었는데 새로 온 교인 하나 들어왔는데 시어머니 삼십년 봉양하고 밑반찬 천 가지 만들 때 얼마나 그 여자 밉겠습니까? 니가 오기 전까진 완전히 나만 혼자 됐는데, 니 오고 난 뒤에 완전히 난 가버렸죠. 그러니까 완전히 그 사랑을 빼앗겼잖아요.

그런데 그 여자 다음에 또 다른 며느리 왔는데 거기는 시어머니 신장 떼어준 여자 왔다면, 앞에 건 완전히 물갈이해버렸지. 완전히 맛이 갔지. 당연히. 자꾸 붙여줘요. 성질나게 하는데 우린 성질나게 한다니까요. 우리가 나밖에 모른다는 사실을 세월 가면 갈수록 점점 더 깨닫게 돼요. 내 말대로 다 듣는 자식이 딱 결혼문제에 있어서는 엄마 말 속 섞이고 엉뚱한 여자하고 결혼할 때 세상에 불교 보살하고 결혼할 줄은 우에 압니까? 세상에 복음을 아는 교회에서 여자가 예수 믿는 여자도 아니고 보살하고 무당집 딸하고 결혼할 때 기가 찰 것 아닙니까?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우린 고민이지만 하나님한테는 고민 아니에요. 보살이랑 하든 뭐 하든 니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 약속에 의해서 구원받지, 니 아들 잘 키워서 구원받는 거 아니잖아요. 이런 소리해서 너무 또 교회를 개판치게 만든다. 죄 짓기 유도한다. 이런 소리 많이 들어요. 그런데 죄를 안 진다고 숨어 있는 것보다 노골적으로 까발리는 게 낫습니다. 사실은.

첫 번째 르우벤, 보라 아들이구나. 두 번째가 시므온, 하나님이 나를 들었다. 세 번째 마음 놓고 남편과 연합하겠다고 해서 레위. 네 번째가 드디어 하나님 고맙습니다, 유다. 찬양합니다. 다섯 번째가 단. 아이고, 억울함을 풀었다. 여섯 번째가 뭐냐 하면, “라헬의 시녀 빌하가 다시 잉태하여 둘째 아들을 야곱에게 낳으매” 납달리, 이것은 뭐냐? 내가, 형이죠. 내가 언니와 경쟁해서 이겼다 해서 납달리. 도대체 애 이름을 참. 자기 엄마 성질을 다 보여 준다니까. 이겼다.

그러니까 하나같이 복 받을 조건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나같이 인간 속성 그냥 드러나는 것이지, 다시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없고 뭐 밖에 없다? 아담의 속성만 들어있다는 것이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이 속성에 예수님의 속성이 덮쳐서 예수님의 속성이 우리를 이겨서 우리가 구원받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담의 속성을 끌어 모아서 그걸 임시적으로 뭐라고? ‘나’라고 임시적으로 자꾸 나라고 주장하는데, 그 나는 죽은 나입니다. 그 나는 나라고 백날 해봐야 소용없는 나입니다.

9절에 보면, 레아가 생산이 멈춤을 보고 그 시녀 시바를 통해서 언니가 좋다. 누구는 시녀 없나? 해서 자기 밑에 있는 시녀를 야곱에게 주니까 첩을 삼게 했더니만 시녀가 아들을 낳았거든요. 아들 이름을 ‘갓’이라 해요. ‘복 되다’ 야, 나는 왜 이리 복 많은 여자고. 미치겠다. 갓이 복되다는 게 아니고, 갓을 낳은 내가 이 엄마가 복되다 이 말입니다. 관심사가 라이벌 밖에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레아의 시녀 실바가 둘째 아들을 낳았으니 ‘기쁘다’해서 이름이 ‘아셀’이라 했습니다.

그 다음에 게임은 몇 대 몇이냐 하면, 6:2 됐지요. 4:0인데 두 골 차 따라 붙으니까 두 골 더 넣어버렸어요. 6:2가 되었어요. 게임은 끝났다고 생각하고. 르우벤이 들에서 14절에 보면, 엄마한테 드렸더니만 라헬이 언니한테 가서 합환채 나한테 줘. 이래서 주고, 레아가 가로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게 작은 일이냐 그런데 아들 합환채를 빼앗고자 할 때 라헬이 그러면 형이 아들 합환채 대신이 오늘밤에 내 남편과 동침해라. 그렇게 해서 동침해서 다섯 번째 아들을 낳았지요. 이름이 뭡니까? ‘잇사갈’ ‘내가 값을 주고 얻었다’ 해서 잇사갈.

그러니까 잇사갈이란 아들이 생기는 그 사건이란 말은, 열두 아들 생기는 사건 하나하나가 여자들이 자기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서 얼마나 서로 싸우느냐를 흔적을 보여주는 죄악된 사건들이죠. 레아가 다시 잉태하여 여섯 번째 아들을 낳은지라. ‘더하셨다’해서 이름을 ‘스블론’ 그럼 몇 대 몇이에요? 8:2가 됐어요. 게임은 끝나버렸어요. 덤으로 ‘디나’라는 딸 하나 줘버리고.

마지막에 라헬이 하나님이 들으시고 태를 연지라. 하나님께서 내 부끄러움을 씻어주려고 했다 해서 이름을 ‘요셉’이라 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지금 아들이 전부 열한 명이죠. 그러니까 8:3입니다. 8은 언니고, 3은 라헬인데

숫자로 봐서는 누가 주인공 행사합니까? 야곱의 본처 행세에서 숫자로 봐서는 언니가 주인공인데. 숫자로 봐서는 8:3이니까 언니, 레아가 본처하지요. 근데 사랑으로 봐서는 누굴 사랑합니까? 그래도 라헬을 사랑하니까 라헬이 있는데, 진짜 하나님의 구원받은 가족 되게 하는 것은 바로 요셉이라는 이 사람이 죽고 난 뒤에 살아서 애굽에 내려가서 총무대신 될 때 그 때 이 모두를 사랑하는 사람은 요셉을 죽고, 요셉을 살려서 요셉을 구원하고 요셉을 통해서 이 사람들을 구원하신 누가 사랑받았다는 겁니까? 누가? 하나님만이 이 가족 전체를 살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가족 전체는 서로의 능력으로 서로 속이고 속고 빼앗고 하는데서 자기 것을 자기가 지키고 살았다고 하지만 정작 거기에 대해서 살게 된 것은 요셉을 꿈을 주시고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석케 하시는 누굽니까? 바로 야곱의 하나님의 이 가족 전체를 살렸던 사랑 받을만한 유일한 사랑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그러면 이것 때문에 싸우고 서로 뜯고 하면서 뭐가 됩니까? 전부다 죄가 되는 겁니다. 야곱부터 해서 레아, 요셉 전부다 죄가 되고, 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덮치니까 야곱이 사랑한 요셉을 통해서 이 가족 전체가 구사일생, 그들이 다 애굽의 혜택을 받고 살게 되었으니 결국은 진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살아야 그게 사는 거지, 내 힘으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것은 그거는 사는 것도 아니고, 죄만 자꾸 자꾸 더 짓는 그런 소행에 불과한거다 이 말이죠. 죄 짓고, 죄 짓고 맨 그것밖에 하지 않는 거예요.

창세기에서 이렇게 열두 아들을 낳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것은 아무리 인간들이 발버둥쳐서 자기의 욕구에서 스스로 힘으로 벗어나지 못하니까 그저 하나님 인도하는 데로 살아가면서 밀가루 줄줄 흘리듯이 설탕가루 줄줄 흘리듯이 자기 죄를 길바닥에 줄줄 흘려가면서 평생을 살아가시라 이 말입니다. 죄의 인생을 살아가고, 그 다음에 구원하는 것은 창세전에 이미 구원받았고.

그러니까 우리의 쏟아내는 것은 아담의 속성을 쏟아내고, 나라는 껍데기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속성이 우리를 구원해내고. 그래서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이미 간직된 바 있지요. 우리가 걱정할 게 없지요.

사람이 이렇게 복음에 대해서 기뻐하다가도 언제 다시 자기에게 돌아가느냐 하면, 자기가 죄를 지었을 때 또 가슴을 치면서 내가 죄를 짓다니.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이 뭐 캅니까? 니, 원래 그렇잖아요. 니 그럼 죄 안 지을 줄 알았더냐. 아이고, 자존심 세기는. 아니고, 그때 그 짓만 안했으면. 뭐, 그 짓 안 했으면 딴 짓 할 건데.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야. 죄인을 부르러 왔어. 또 잊어버렸구나.

우리는 점잖은 체 하면서도 무슨 교회에서 말 한 번 잘못하면 삐져서 교회 안 나옵니다. 저는 이래 생각해요. 우리교회 교인들이 다 한 번씩 삐져봤으면 좋겠어요. 목사님이 전부다 한 사람 앞에 하나씩 심한 말해서 다 삐지게 해서 그래도 나온 사람 누군고? 시험을 해 봤으면 좋겠어. 평소에 말하기를 나는 복음 듣고 오지, 사람보고 안 온다. 아이고, 웃기지 마세요. 안 건드렸으니까 계속 나오지 건드려보세요. 삐져서 한 달 동안 교회 안 나와요. 다른 교회 가버려요.

아이고, 사람은 자기를 너무 귀하게 보지 마세요. 자기를 후한 점수 주지 마세요. 내가 그 교회 아니면 교회 없나. 이런 삐진 소리 한번 들어야 돼. 아마 새순교회도 그래서 나간 사람 반 될 걸요. 새순교회 다니는 어떤 사람이 사랑이 없다 하는 소리 들었는데. 우리교회 하고 하는 소리 같은데. 새순교회도 그런 소리 듣데요.

우리가 교회 나올 때 복음 들으려 나온다 하지만 사실은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서 나오는 게 다분히 들어있어요. 사랑을 받고 싶어 하기 때문에 뭔가 돌발적인 사태가 일어날 때 교회에서 큰 소리 나고 막 싫어하고 말도 안 하고. 말 안 하고 삐져 있는 것 더 무섭다 하데요. 여자들이 무서운 게 뭡니까? 말 많이 해서 무서운 게 아니고, 말 안 해서 무섭다니까. 무서워서 그래 내가 잘못했다고 풀잖아요. 그처럼 서로 못난 죄인끼리 만나서 나만 알아줘. 하는 식으로 우리가 평생 갑니다.

이건 여담인데 어떤 아들이 엄마를 효도한답시고 커다란 트럭에 실어서 십이 년 동안인가 십 년 동안인가 같이 모신다는 거예요. 내가 그랬어요. 아이고, 헛짓하고 있다. 월급 받아서 요양병원에 가면 더 편해요. 그런데 지는 효도한답시고 하는데 그거는 엄마 사랑이고, 자기가 엄마를 있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그 트럭에 엄마는 덜컹덜컹 열두 시간을 가는 거예요. 매일같이. 아이고, 노인네를 그렇게 고생시켜서.

그래 인간은 자기밖에 몰라. 지가 사랑하면 남도 좋은 줄 알아. 지가 좋으면 남도 다 좋은 줄 알고 있어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좋은 것, 그 사람 좋은 것 따로 있다고.

바로 이렇게 하나님께서 자기 딴에 뭐라고 하든지 간에 이 열두 아들은 야곱의 소유물이 되었습니다. 가족이 많으니까 여기서 뭐가 많습니까? 이제는 입에 들어가는 거 많지요. 그러니까 드디어 야곱이 수작을 벌여서 그러니까 열세 식구지요. 자식 열한 명, 둘이. 열세 식구를 먹여 살릴 소떼, 양떼를 자기 소유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이제는 드디어 머리에 통박을 굴립니다.

여기서부터 라반과의 독립이 선언됩니다. 할 때 그 정신이 뭐냐? 나는 뭐다? 나는 복 받은 자다. 이 사고. 아직도 소유성, 내 중심의 복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는 것. 그게 어쩌면 우리의 모습을 우에 잘 보여주는지. 다음엔 야곱이 어떤 죄를 보여줄지 그건 다음 시간에 해봅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쓸데없이 우리 자존심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만 하나님 보시기에 참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어디까지나 우리 중심의 이기주의적 발상인 줄 압니다. 죄를 깨닫게 될 때 당연하게 여기고 그것마저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신 주님이 용서를 아는 그런 기회로 삼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안에 아담의 속성밖에 없고 주님의 용서의 속성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주님의 것인 것을 늘 깨달으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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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16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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