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71207a 울산강의-창세기 28장자유게시판창세기

20071207a 울산강의-창세기 28장

이름 : 한윤범(IP:59.6.189.173)

20071207a 울산강의-창세기 28장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창세기 28장 10절에 제가 한번 읽어볼게요. “야곱이 브엘세바에서 떠나 하란으로 향하여 가더니 한 곳으로 이러는 해가 진지라 거기서 유숙하려고 그곳의 한 돌을 취하여 베개하고 거기 누워 자더니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너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이래 돼있지요.

오늘 이것 하기 전에 창세기 27장 29절을 다시 한번 봅시다. 한 장만 이렇게 그 전으로 돌리시면 나옵니다. 27장 29절에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그래 돼있지요.

이 대목이 상당히 난해합니다. 어렵습니다. 성경의 전체가 다 어려운데 그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를 제가 그림으로 설명하겠습니다. 사람은 자기 몸을 갖고 있잖아요. 사람은 몸을 갖고 있다보니까 하나님하고 자기 몸하고 이렇게 상대하리라고 그렇게 사람들이 짐작을 해요. 하나님이 나에게, 하나님이 나에게, 하나님이 너에게, 하나님이 너에게, 나를 축복하는 자는 축복을 받고, 나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는다.

항상 중심이 ‘나’라는 몸이 중심이고, 하나님이 나에게 몸을 가진 나에게 일을 하신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해석하고 그렇게 이해하리라 생각하는데 그게 바로 성경해석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게 오해가 돼요.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나를 가지고 복 주시는 것은 맞는데, 여기 ‘나’라 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나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축복에서 에서에게 저주를 했는데 그 야곱과 그 에서가 야곱이 생각하는 야곱이 아니요, 에서가 생각하는 에서가 아닌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게 상당히 어려워요.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나라는 것은 항상 딱 정립돼있어요. 나는 이렇다, 나는 이렇다 정립돼있는데, 하나님이 따로 생각해놓은 나는 내가 생각한 나하고 일치되지 않아요. 같질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생각한 나로 변해가야 돼요. 이 변해가는 힘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게 계시라는 거예요.

나는 완료돼있는데 완료돼있는 나에게 하나님 나는 빈 그릇입니다. 하나님 나, 여기 있습니다. 복, 저한테 주세요. 라고 나는 현재 빈 그릇이고, 복은 나한테 막 쏟아지는 걸로 우리가 이렇게 생각한다 말이에요. 그때 나는 이미 확정된 ‘나’라. 이거는 변할 필요도 없고, 변할 이유도 없고 그냥 현재 있는 나, 그 나에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나는 완전히 땡 잡은 거고, 저주주시면 완전히 멸망 가는 거고. 그렇게 생각하시는데 그게 아니다 이 말이죠.

그게 방금 한 말이, 이 설명이 어렵지만 이 설명을 말로 표현하면 더 어렵습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은 말씀 중심이지, 내 중심은 아니다 이 말이죠. 이걸 제가 간간히 설교시간에 썼는데 우리교회 교인들이 그 취지에 대해서 잘 몰라요. 하나님은 말씀중심이지 내 중심이 아니다. 그 말 맞네. 거기서 하나님은 말씀중심이고 내 중심은 아니다 할 때 그래, 하나님은 하나님 뜻대로 하시고 나는 받기만 하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때 나가 나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우리가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생각하는 나는 이게 미확정된 거예요. 나도 미처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우리는 나한테 복 준다하면 여기 있습니다. 복, 복. 난 저주, 저주 안 받을래요. 자꾸 자기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말씀중심인데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따로 있고 하나님은 말씀중심이니까 넘겨달라는 거예요. 이것은 여전히 나라는 따로 챙기고 있고 나라는 것인 따로 있다고 자꾸 우기기 때문에 이런 오해가 있습니다.

각설하고 이렇게 뜸들이지 말고 똑바로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축복을 하는데 그 야곱이 지금의 야곱은 아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야곱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지금 자기 위주로 자기 좋은 데로 나라는 이 야곱을 위해서 하나님이 일하는 줄 안다니까. 하나님은 야곱을 따로 만드는데 야곱은 현재 있는 야곱이 그 야곱인줄 알고 있다니까. 이제 약간 감이 오십니까?

아니, 하나님께서 왜 야곱에게 복주시면서 야곱을 왜 무시하십니까? 무시할 수밖에 없는 게 하나님은 말씀중심이지 현재 야곱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이 말이죠. 하나님은 말씀중심이지 여기 이근호 중심이 아니에요. 그런데 나는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 저, 예수 믿습니다. 저 천국 보내주세요. 자꾸 누굴 집어넣느냐 하면, 모든 말씀에 누굴 집어넣느냐? 나를 집어넣어서 야, 나는 땡 잡았다. 오늘도 은혜 받았다. 자꾸 내 중심으로 거기를 빠지질 못하고 자꾸 들어가는 거예요. 나를 거기다 집어넣어요.

이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야곱을 축복할 때는 없는 야곱을 만들어서 축복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나, 야곱이 있잖아. 자꾸 있다는 거예요. 딴 야곱 하지 말고 현재 있는 야곱에게 그냥 가만있을 테니까 복이나 달라는 거예요.

정답을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없는 야곱을 만들어가는 능력이 있어요. 하나님의 축복 같으면 축복 안에 뭐가 들어있는가 하면, 축복 받을 야곱이 들어있습니다. 이 야곱하고 현재 까불락 대는 이 야곱하고 이걸 바꿔치기가 돼야 돼요. 나중에 바꿔치기 되는 게 뭡니까? 이름이 바꿔치지요. 야곱이 뭐로 바꿉니까? ‘이스라엘’로 바뀌지요. 하나님의 생각은 따로 갖고 있는데 이 야곱은 자꾸 자기중심으로 오핼 하고 있단 말이죠.

예. 하나님 나에게 축복. 아이고, 기분 째진다. 오늘 기분 좋다. 하나님이 나한테 축복해준대. 너 아니야. 여기서 야곱, 나 말고 누가 있습니까? 형은 야곱이 아니고, 내가 야곱이잖아요. 글쎄, 내가 야곱이라고 하는 니가 그 야곱이 아니라니까.

왜 이런 오해를. 교인들이 교회 한번씩 올 때마다 챙겨요. 뭘 챙기느냐 하면, 내가 교회 다녀서 얼마나 이득을 봤느냐? 내가 교회 다녀서 뭔가 내가 생각한 나라는 것은 이거는 깨질 솔직히 저주받을 난데, 이 저주받을 나를 생각 안 하고 나는 오늘 교회 와서 지금까지 교회 다녀서 얼마나 많은 축복을 챙기느냐? 축복을 챙기는 주인공으로 자꾸 자길 생각해요.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우리 몸은 우리 몸이 아닙니다. 우린 새 이름을 받아요.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습니다. 우리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지요. 그 그리스도의 몸에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나중에 성전이야기 나옵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28장에 꿈 이야기할 때 꿈에 사다리 이야기할 때 성전이야기 나오는데.

벌써 덥네. 벌써 열냈네.

그 성전이야기 나오는데. 제발 하나님입장에서 좀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품은 뜻이 있어요. 그 뜻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생각한 없던 사람을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사람을 만들고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람 속에 하나님의 거기에 들어가 계시는 것, 이게 하나님의 포붑니다. 하나님의 스케줄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무슨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새로 만들어놓은 인간을 생각하는데 우리는 뭐냐 하면, 기존에 이미 있는 나, 이미 생겨먹은 나, 내 속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라는 겁니다.

여러분 같으면 여러분 속에 들어가겠습니까? 더러워서 못 들어가요. 생각해보세요. 목사님 같으면 목사님 속에 들어가 계시겠습니까? 아마 튀어나올 거예요. 온 음란과 방탕과 욕심이 숨이 막혀서 뛰어나와요. 차라리 화장실에 들어가는 게 낫지 내 속에는 내가 못 들어가요. 더러워서 못 있습니다. 그 더러워서 못 있는데 하나님 보고 들어오라고? 이거 참 중요한 이야기 아닙니까.

하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올 때는. 야곱을 해야 돼요. 야곱은 지금 뭐 위주냐 하면, 자기 몸 위주지요. 이 몸을 축복해달라고 하는데, 내가 다시 돌아올 때 나중에 나옵니다.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저를 지켜주시고, 이곳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십일조 드리겠나이다. 사다리 보고 난 뒤에 가서 해요.

야곱은 몸 중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냐 하면, ‘속성’ 중심이에요. 몸과 속성의 차이를 알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무슨 속성이 있느냐? 야곱은 이러이러 해야 된다는 속성이 들어있습니다. 그 속성이 침범해야 속성이 덮쳐져야 이 야곱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의 복 받을 야곱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시, 말씀, 약속 속에 계시 하면 너무 거창하니까 약속이라 합시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 속에는 나는 이러이러한 야곱에게만 축복,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이 오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가 오는 속성은, 하나님의 약속 속성 안에 들어있지 현재 야곱한테는 없습니다. 이게 없는 거예요. 이근호 저주한다고 저주 안 받아요. 이근호 축복한다고 복 안 받습니다. 나는 죽은 몸이고 죽어야 될 몸이에요.

그런데 성경에 보니 갈라디아서 5장에 보면, 누구든지 너를 미워하면 저주받는데 했는데, 이것은 우리를 건드리면 저주 받는 게 아니고,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복음의 속성을 모독하면 그 인간은 저주받습니다.

나는 안 중요해요. 나는 안 중요하고 죄 많은 나를 구원하신 속성이 중요하다니까. 근데 사람은, 우리 오다가 목사님하고 차에서 그런 이야기 들었어요. 사람은 자꾸 이게 소유성, 뭔가 내 것 만들려는 성질이 얼마나 지독해서 복음이 주도권을 줘야 될 텐데 속성이 나의 주도권을 줘야 될 텐데 심지어 예수님의 속성마저 내 것으로 전환해서 ‘내 것이다’ 해서 나, 이근호 건드리면 저주받는다. 아니 이따위 식으로 나오더란 말이죠. 지가 뭔데?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것은, 이거는 너무나 명확한 진리지만 다시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것은 누구 것이냐 하면 하나님의 것입니다. 아, 이거 말 돼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인데 제 말 맞지요. 근데 누가 빼앗아 갑니까? 하나님의 것을 누가 빼어가요? 하나님께 받았다는 우리가 하나님의 것을 누구 것으로 전환시킨다? 건방지게도 내 것으로 전환시켜 놓고 하는 말이 날 건드리면 벌 받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런 오길 부리는 거예요.

오늘 첫째 시간 이거 하나 밑줄 쫙 치고 배우세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야, 이거 말 쉽다. 쉬운데 무지무지하게 어려운 말이에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 빠져요? 누구 것이 빠집니까? 내 것이라는 빠져야 돼요. 내 것이라는 것은 수채 구멍에 빠져야 됩니다. 아, 인간들이 안 빠지네. 빠져야 되는데 빠지질 않아요.

목사가 복음을 전했다. 한 십 년 전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인들이 목사 나가라고 했다. 나가야지요. 그런데 우에 됩니까? 나는 복음을 전한 목사다. 갑자기 이상해 져버려요. 복음을 전한 목사가 뭐했다고 그래. 복음을 전하는 거지. 복음이 네 게 아니잖아. 왜 자꾸 복음을 전한 속성을 내가 복음을 전한 그 속성은 누구 것입니까? 하나님 것이니까 누굽니까? 하나님 것이잖아요. 그럴 경우에만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은 속성상 내 몸이 된 소유성을 자꾸 띠니까 내 몸은 내 몸을 위하여 뭘 챙기면 좋겠느냐? 옳지. 하나님의 속성, 예수님의 구원의 속성을 내 것으로 만들면 나에게 이익이 올 것이라는 계산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잘 나가다가 하나님의 것은 결국 뭐로? 하나님의 것이라고 끝나야 될 텐데 나의 것이라고 끝나버리죠. 그러면 나만 그렇습니까?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사람은 안 그렇습니까? 그러면 교회에서 뭔가 분란이 일어나죠. 니만 잘났나? 나도 잘났다. 이래 되는 거예요.

참, 이게 성경을 이렇게 그냥 글자 있다고 막 보는 게 아닙니다. 성경을 볼 때에 하나님의 생각이 얼마나 우리 사람의 생각과는 너무나 엉뚱하고 차이가 져요. 다른 생각하고 있어요. 복을 받았다는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의 난데없는 속성이 나는 내 몸이 내 것이라고 우기는 여기에 내 허락도 안 받고 거기에 침투해서 내 것이라고 여기는 걸 박살내는 현상이 일어날 때 복 받은 사람입니다.

완전히 이제 두 번 다시 내 것이라고 할 용서를 안 해요. 내 것이라고 우기면 박살내버리고, 내 것이라고 우기면 박살내버리고. 가만 두지 않고 내 것을 산산 조각내는 그런 현상이 일어날 때 그 사람이 바로 성도요, 복 받은 사람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스데반 집사 아닙니까? 세상에 피 질질 흘리면서 피바다가 되서 죽었을 때 그런데 거기서 자기 것이 어디 있어요? 자기 게 없잖아요. 그런데 스데반 집사로 하여금 그렇게 말하도록 하는 것은 누구다? 스데반 집사가 아니고 누구다? 스데반 집사 속에 있는 하나님의 속성, 그걸 사도행전에 성령의 충만이라 합니다. 너무나 상투적으로 많이 들었기 때문에 이제는 말하기가 무서워.

성령의 충만이 사실은, 하나님의 속성이 스데반을 다스려서 스데반이 성전이니까 스데반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하도록 했을 때에 스데반은 그 이야기 하고 난 뒤에 자기 몸은 산산조각 죽어버리고, 진짜 예수님은 스데반 집사님을 영접하려고 일어서 있습니다. 그게 영의 세계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얼마 전에 그 설교하면서 구닥다리 외투, 낡은 외투 하나 벗을 때 얼마나 스데반 집사가 속이 시원했겠는가? 우리 몸은 고린도후서에 보면 외투거든요. 하나의 걸치고 있는 냄새나는 외투인데 그걸 훌떡 벗어버리고 하늘나라에서 새로운 외투로 갈아입기 위해서 사도바울은 내가 차라리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 그런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이야기가 흉내 낸다고 될 게 아니고, 정말로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이런 식으로 다루는 일들이 일어나요. 정말로 하나님께서 내 것이라고 여기면 그걸 흔들어버리고, 내 것이라고 여기면 흔들어버려서 네 것을 남아 있지 않아. 네 것은 아예 없어. 넌 이미 죽은 놈인데 네게 어딨어? 네 목숨도 내 것인데. 하는 그런 느낌이 팍팍 늘 다가와야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성경 말씀이 이해가 됩니다. 그 괴리죠.

야곱도 물론 여러 가지 실수와 앞으로 야곱의 실수가 나오는데, 야곱이 아무리 실수하고 아브라함이 실수해도 감사한 것은 야곱의 하나님은 실수 하는 법이 없고, 이삭의 하나님은 실수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 분만 실수 안 하게 되면 일은 잘되게 돼있어요. 우리가 실수하는 것, 그거 너무 개의치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난 수요일 날 그런 설교했습니다. 하나님한테는 고민이 없는데 왜 사람한테 고민이 많아요. 이게 웃기는 이야기 아닙니까. 하나님은 아무 고민이 없는 왜 우리 사람들은 고민이 많아요? 뭔가 안 맞잖아요. 뭔가 원인을 규명해야 될 것 아닙니까? 하나님한테는 모든 것이 ‘예스’가 되고, 모든 것이 패스가 되고, 아무 일 없이 모든 것이 잘 되고 있는데 ‘하나님 믿습니다’하는 그 인간들은 탄식을 하고 낙담을 엎어지고 울고불고 왜 나한테 이런 힘든 일을. 뭐가 힘든데?

그게 다 어디서 나온다? 그게 바로 뭐 때문에 그렇습니까? 소유성에서. 내 것이라는 것이 있을 때만 그걸 나라고 간주하는 이 버릇, 내 것이 없으면 ‘나’가 없다는 것, 이게 문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내 것을 끌어 모아서 나가 아니라 너는 이미 하나님의 약속 속에 네가 들어있다. 약속에 의한 나가 따로 있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계시고, 현재 내 것을 끌어 모아야 내 것이라는 건 우리의 세속적인 삶이고, 우리가 타고난 아담의 속성이고 품성이고 그렇습니다.

이거는 흙에 속한 속성이고, 이쪽에 약속의 땅의 속성은 뭡니까? 하늘에서 난 속성이죠. 그래 감사하게도 흙에서 난 속성에 뭐가 덮치죠? 하늘에 속한 속성이 덮치니까 우리 속에서 하늘 쪽이냐, 땅 쪽이냐, 땅 쪽이야, 하늘 쪽이냐 그 갈등이 계속 벌어지는 그 일속에 지금 야곱이 놓여있습니다.

오늘 읽었던 본문을 다시 한번 봅시다. 거기에 보면 어떤 사람은 이래 생각해요. 아이고, 야곱은 좋겠네. 왜 좋은데? 꿈에 사닥다리가 나타났으니까 좋겠네. 또 사닥다리에 천사들이 왔다갔다하는 거 좋겠네. 또 뭐가 좋겠느냐 하면, 거기서 하나님 음성을 들으니 좋겠네. 또 음성의 내용이 구체적이라서 좋겠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너를 이렇게 데려가겠다. 하니 좋겠네. 이렇게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우리가 더 좋아요. 야곱보다 우리가 더 좋다고요.

야곱은, 야곱아. 네가 어디 가든지 이 땅에 다시 데려오리라. 이래 하잖아요. 그러니까 야곱한테 하나님의 일거리가 많잖아요. 근데 우리가 더 좋아요. 왜냐하면 예수 믿으면 구원받으니까. 얼마나 좋아요. 뭐, 울산 사니, 대구 사니 그런 거 안 따지고 야곱은 데리고 다녀야 됩니다. 왜? 아직도 야곱은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아직도 야곱은 내 것이 있어야 내 것이라는 것. 여러분 나중에 얍복 강에서 다 빼앗깁니다. 다 털리고 뺏기지만, 하나님은 도둑놈이라. 다 뺏어갑니다.

뺏기기 전에 내 것이 있어야 나라는 것과 야곱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세기 27장에서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내리고, 하나님이 약속한 그 약속 안에 이미 네가 들어있다는 겁니다. 아, 이거 이해 잘 안 되시는데. 골로새서 3장에 보면 이렇습니다. 골로새서 3장 1절, 3절에 보면, 너의 이미 땅에서 죽었고, 그 다음에 중요해요. 너의 생명은 하늘에 간직, 하늘에 간수된바 되죠. 하늘나라의 은행금고에 제일 안전한 금고에 넣어 놨다 이 말 아닙니까. 안전빵으로 아주 잘 들어있다 이 말 아닙니까.

그러니까 지상의 나는 뭐예요? 헛방이죠. 분해되어야 될 흙덩어리에 불과한 거죠. 흙덩어리인데 자꾸 무슨 생각하느냐 하면, 흙덩어리든 뭐든 나는 거기 있는 게 아니고, 여기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야, 점점 요상한 데로 간다. 신비주의로.

우리의 생명은 어디 있다 했습니까? 하늘에 있잖아요. 그럼 하늘에 있는 생명을 권총으로 쏘는 죽습니까, 안 죽습니까? 안 죽지요. 칼로 찔러도 안 죽지요. 그런데 집에 가서 강도 만나면 칼 들고 돈 내라 하면 돈 주잖아요. 우리의 생명은 어디 있는데? 하늘에. 하늘에 있는 생명을 강도가 칼로 찌른다 해서 달라질 건 없다 이 말이죠.

상당히 천박한 예지만 단출하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우리가 그만큼 그건 비현실적으로 간주하는 버릇이 있더란 말이죠. 하나님의 현실을. 덥다하니까 이게 뜨뜻하네. 이건 좀 꺼주세요. 뭐가 뜨거운 게 슥 올라오네.

지금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성경을 믿느냐 이 말입니다. 성경 압니다. 아는 것 말고 성경을 믿습니까? 안다니까. 아는 거 말고 믿습니까? 그럼 무슨 성경?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습니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그럼 이쪽 생명은? 이미 하나님 보시기에 우린 죽은 목숨으로 본다고요. 성경에서 ‘죽었다’는 말은 우리 속에서 죄가 나온다 이 말입니다. 성경에서 죄가 나오면 무조건 죽은 거예요. 아담이 선악과 따 먹고 이미 아담은 죽은 목숨입니다.

그 아담의 이름이 뭐예요? 네가 흙이니 뭐로 돌아가라? 흙으로 돌아가라. 죽은 목숨이니 죽어진다 이 말이거든요. 죽어야 흙 되잖아요. 죽은 목숨이 죽으러 가는데 자연스럽지요. 뭐가 고민입니까? 고민거리 아니잖아요. 아, 죽을 목숨이 죽는구나. 당연한 거지요. 보험 몇 개 들어도 소용없어요. 죽을 목숨이 죽는 거예요.

그런데 생명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의 약속에 있다 이 말입니다. 성경 간단하지요.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의 약속에 실려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고 있다고. 우리가 내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이거는 헛방이고, 성경 끝났네. 문제는 이걸 안 믿는다는 거예요. 문제는 이게 성경에 있더라도 영~ 믿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만큼 하나님의 약속을 시답지 않게 여기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놀라운 점은 아브라함이 믿을 수 없는 가운데 그 사실을 믿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자식, 이삭 낳을 때 낳을 만한 증거를 깔아놓고 낳았습니까? 전혀 없어요. 다만 뭐만 있습니까? 달랑 말씀만 있는데 달랑 약속만 던져놓았는데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달랑 믿었어요. 그게 바로 아브라함은 행한 것도 없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이에요.

그걸 히브리서 6장에서 뭐라고 합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맹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다 이래 돼있어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무지무지하게 쉬운데 인간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에요.

루터가 구원받으려고 계단에 피 흘리며 오르락내리락했지만 나중에 십자가 알고부터는 그게 말짱 헛짓이다. 죽을 몸이 진짜 지랄한 거예요. 죽을 흙이 아주 지랄한다고 사는 것도 아니고, 맨 죽어가면서 지랄한 게 계단 올라간 거예요. 지금 교회들마다 다 그 짓하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한국교회마다 다 그 짓해요.

목사 세금 내나, 안 내나. 내나, 안 내나 죽을 몸이 죽을 놈한테 그게 뭐가 그래 그게 약속입니까? 어디 성경에 목사 세금 내라 하는 게 나옵니까? 성경에 나온 것은 니 목숨은 이미 생명은 하늘나라의 금고에 있다. 그걸 믿어라. 그거에요. 그리고 그것만 있는 게 아니고, 니는 무슨 짓을 해도 죽은 몸이다. 하나님의 능력, 약속대로 살았다.

어떤 사람은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그럼 약속을 어떻게 내가 붙듭니까하는데 약속 안에는 약속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약속 안에 능력이 나와요. 그 약속의 능력은 제가 아까 했잖아요. 우리가 게으름뱅이고, 우리가 개판 쳐도 한쪽 약속만 개판 안 치면 우린 구원받습니다.

우리는 24시간 동안 하나님 생각하는 건 몇 초 되지도 않아요. 그래도 괜찮아요. 오늘 너무 풀어준다. 괜찮아요. 저분이 성실하시거든. 내가 부지런함을 믿으면 안 됩니다. 진짜 믿는 자는 하나님의 성실하신대로 약속 성취하심을 믿는 거예요. 그 성실하심을 믿는 그것조차도 그분의 작업한 결과로 우리한테 주어지는 겁니다. 아직까지 야곱은 그 정도 몰라요. 야곱은 그 정도 수준이 안 됩니다.

야곱은 내 것이 있다는 걸 챙겨야 비로소 내가 되고, 내가 되어야 하나님의 약속대로 나에게 복이 온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받을 대상 내가, 내 가치가 유지돼줘야 말씀도 사랑도 온다는 거예요. 세상에 그런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이미 그 안에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내용물 안에 우리가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지 다 들어있습니다.

새순교회에 그런 교인들 오면 좋겠습니다만 어떤 교인이 지난 주 오고 난 뒤에 시계도 마음에 안 들고, 히터도 마음에 안 들고, 냉장고 다 마음에 안 드네. 그래서 다음 주에 와서 내가 전부다 갈아치워 버릴 란다. 해서 다음 주일날 와서 화물차에 그득 티비, 냉장고 하여튼 다 가져왔다 이 말이죠. 가져온 그것도 모르고 냉장고 수리하면 안 되느냐? 저 히터 더 쓸 건데.

그게 아니고, 몽땅 다 갈아치우는 그것까지 그 원재료부터 해서 모든 과정까지 이미 우리가 신경 안 써도 그쪽에서 다 준비 돼있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중심이라니까요. 우리하고 협의하는 중심이 아니고. 야, 니하고 이야기 좀 하자. 아, 구원받았는데. 이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다 한 차 실어 와서 우리에게 필요한 속성이 무엇이며, 믿음, 소망, 사랑이 언제쯤 필요한지 알아서 한 차 실어서 우리에게 퍼부어주는 겁니다.

그 퍼부어주는 속에 히브리서 10장도 들어있고, 마태복음 5장도 들어있고, 누가복음 2장도 들어있고, 요한복음 1장도 들어있고, 여기 창세기도 들어있고 다 들어있는 거예요. 그래서 우린 이 성경 볼 때에 이거 믿고 구원받아야지. 이래 하는 것이 아니고, 이것도 방금 화물차에서 내린 하나님이 이대로 이루어진다는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적은 하나의 집문서로써 보는 거예요.

아, 이렇게 하시겠네. 어, 이렇게 되네. 나도 이렇게 되겠네. 아, 야곱을 이렇게 다루시는 걸 보면, 나도 이렇게 다루시겠네. 하나님이 나한테 어떤 식으로 하느냐? 라고 말씀중심으로 보셔야 되지, 내가 이 말씀 믿고 얼마나 더 악착같이 실천에 옮기느냐? 내 중심으로 생각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새순교회 교인들은 그런 교인들은 없겠지만 내 중심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께서 나에게 기대 안 하고 일하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기대 안 하는데 왜 내가 나한테 기대합니까? 건방지잖아요.

그렇게 해서 창세기 28장 다시 한번 봅시다. 이제 이해되실 거예요.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시면서 하는 말이 13절 봅시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니 너희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뭔 뜻입니까? 아브라함 내가 그렇게 인간 만들었고, 이삭을 내가 그렇게 행했다 이 말이죠.

“이제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서 동서남북에 편만할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을 인하여 복을 얻으리라”라고 일방적으로 야곱의 속성을 담았습니다. 그러면 이 약속은 문제 나갑니다. 이 약속은 야곱에게 이루어집니까, 예수님에게 이루어집니까? 예수님에게 이루어집니다. 어허, 야곱은 죽을 인간이라니까. 야곱의 속성이 중요하지 야곱의 몸뚱아리는 안 중요해요. 야곱의 하나님이십니다. 야곱의 하나님은 아니고, 야곱의 하나님이거든요. 말장난 또 나온다.

야곱을 가지고 누구하고 대비시키느냐? 장차 오실 예수님과 대비시켜서 야곱은 야곱을 포기하고, 야곱 대신 야곱의 약속을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그런 하나님이기 때문에 야곱의 하나님이 되는 거예요. 야곱은 예수님 믿고 구원받아야 되는 하나님으로 오시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야곱이 예뻐서 구원하는 게 아니고, 야곱 안에 뭐가 들어있기 때문에? 야곱 안에서는 장차오실 메시아의 모형이 들어있기 때문에.

야곱이 중요하지 않아요. 야곱에게 장차오실 메시아 모형을 미리 던져놨기 때문에 그 모형과 실체를 대비하는 도구로써 누가 동원된다? 야곱이 동원되고, 이삭이 동원되고, 아브라함이 동원되고, 오늘날 우리가 동원된 겁니다. 그리고 기어이 야곱이 구원받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속성 때문에 그렇죠. 하나님의 자기 약속을 자기가 이루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속성입니다. 나가 아니에요. 나, 너가 아닙니다. 사람이 나, 너를 따져버리면 절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지체나 한 몸이 될 수 없어요. 그건 개별자로 남아요. 사람이 성도가 모여서 교회되는 게 아닙니다. 교회가 먼저 있고, 불쑥불쑥 삐져나온 게 성도에요.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보쌈 할 때 처자가 없어서 남자들이 보쌈을 하잖아요. ‘처자’란 말 참 오랜만에 들었어요. 나훈아한테. 나훈아가 그 두 처자, 김선아하고 김혜수, 두 처자를 그렇게 망가뜨리지 말라 했지요. 보통 아가씨, 처녀 이렇게 하는데 처자라 했는데 오랜만에 경상도 말 들었는데.

보쌈 할 때 보자기 쌓잖아요. 보쌈 하면 여기 들어있는 아가씨가 가만있습니까? 어이 합니까? 발길질 팍팍 차지요. 그러면 여기서 뭐가 나갑니까? 뭐가 튀어나오지요. 툭툭 튀어나오지요. 천이 입혀진 채로. 이게 뭐냐? 이게 지체에요. 이 전체는 뭡니까? 몸이죠. 이게 뭐냐? 속성이라 속성. 어떤 사람은 봉사하는 것, 어떤 사람은 설교하는 것, 어떤 사람은 섬김으로, 어떤 사람은 병 고치는 것, 어떤 사람은 기도로, 은사대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거예요.

같은 덩어리에서 속성이 튀어나오기 때문에 눈이 발더러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돼요, 안 돼요? 안 되지요. 이걸 뭐라 보느냐? 이걸 멍게라 하는데. 멍게가 못 생겼기 때문에 멍게 못 생겼으면 니는 멍게 아니가? 다 같은 멍게거든요. 다 같은 멍게가 툭 튀어나온들 자기가 안 튀어나왔다고 자랑하지 마라. 다 같은 멍게에 속해져 있기 때문에.

이걸 개혁신학에서는 표현을 못합니다. 개혁신학에선 이걸 표현 못해서 성도가 모여서 뭐하라? 성도가 모여서 몸이다. 백날 모여 보세요. 몸 되는가. 거기는 법이 동원되고, 질서가 동원되고, 체제가 동원되고, 위기에서 생기는데. 그래서 칼빈은 목사는 다른 사람보다 높다했잖아요. 이런 관념이 속성 개념이 아니고, 개체 개념. 너, 나 따로니까 열심히 사랑하자는 거예요. 백날 사랑해 보세요. 이게 남남이지.

평생을 살아온 부부 사이도 말 한번 잘못하면 남남인데. ‘남’에서 점 하나 빼버리면 ‘님’ 안 됩니까? 남이라는 글자에~ 곧장 님에서 점찍으면 남 되잖아요. 처음에 연애할 땐 좋다, 어쩠다 하지요. 결혼해서 살아보세요. 모든 게 짜증 덩어리고 그렇지요. 그렇지만 예의상 상대방을 배려하고 하지만.

여러분, 상대방을 배려한다는 것이 상대방을 사랑하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덕스러움을 남이 좀 알아주기를 바라는 자기 확장에 불과해요. 어이, 이래도 니하고 살아주니 나한테 고맙다고 해라. 그게 무슨 사랑입니까? 그건 또 하나의 자기 덕스러움의 확대지요. 확산이죠. 덕스러움에 의한 상대방의 예속이요, 지밴데.

사람이 하나의 개별자를 아무리 갖다 붙여서 강제로 살아도 그게 한 몸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 성경의 그리스도 몸을 해석하면 안 돼요. 백날 해보세요. 해석되는가? 안 되지요. 찬송가 백날 붙들고, 사랑하는 형제끼리~ 찬송가 4절 끝나기 전에 싸운다고. 니 목소리가 왜 그런데?

그리스도의 것은 이미 죽은 흙끼리 모여서 생명이 안 됩니다. 이미 하나의 생명 안에 들어있어야 하나의 생명에 속성화 되어서 우리 자체가 불쑥불쑥 불거져 나오는 속성으로 존재해야 우리는 한 몸 안 되려 해도 이미 뭐다? 한 몸일 수밖에 없는 것을 교회 와서 확인케 확인하는 거죠.

여기 비타씨에 비타민 C 들어있는지 내가 확인할 필요 뭐 있습니까? 먹어보니까 맛있데? 비타민 C 들어있는지 알지 뭐. 이걸 해서 전부다 확인할 필요 없잖아요. 마찬가지로 성도끼리 모여서 이렇게 같은 멍게, 멍게끼리 통하는 게 있어요. 통하는 게 뭐냐 하면, 신약성경 우리는 예수님 공로로 산다. 그런 이야기는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면 형제고, 하나님의 공로도 내 행해야 나는 산다. 행하지 아니하면 니 못살고 지옥 가고 행한 나는 산다. 이렇게 개별자로 나서버리면 의사소통이 안 됩니다.

여러분, 성화론의 문제가 뭐냐 하면, 성화론의 문제가 이 거룩적인 삶을 개인용이다 말이죠. 이게 문제 아닙니까? 개인이 갖고 있을 거룩한 삶을 본인이 따로 갖고 있다는 게 문제 아닙니까? 성화론이 그게 문제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거룩해도 내 거룩 가지고 상대방을 옆에 사람을 구원할 수가 없어요.

내가 챙긴 내 업적은 그게 나로 하여금 나를 구원케 한다는 것이 성화론자의 주장입니다. 내가 기도해서 좀 거룩해졌잖아요. 거룩한 품성이 됐잖아요. 그걸 저 사람의 것이 될 수 없다 이 말입니다. 그리고 더 문제점이 지금 내가 성화되었는데 만약에 5년 뒤에 내가 치매 걸려서 엉뚱한 짓하면 다 까먹지요. 벌어놓은 것 다 까먹는다고. 보험 들어도 소용없어요. 큰 문제 아닙니까.

이게 뭐냐? 그것은 바로 인간은 왜 그런 성화론이 먹히느냐 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죄 속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내가 뭔가 내 것 있어야 나는 안심하겠다는 이 근본적인 불신앙. 내 것, 보따리 내가 풀어서 내 것이라고 여길만한 것이 내가 된다는 이 불신앙. 이 불신앙이 성화론을 만든 거예요.

주님께서 단번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고 하지 않고, 보세요. 여기 이 멍게 같은 몸에 머리가 누구라고요? 이 머리가 예수님 아닙니까. 그러면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교회를 뭐라 했어요?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거죠. 요한계시록에선 그것을 어린양의 성전이라 하는데.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멍게 안에 다 퍼지잖아요. 멍게 안에 다 퍼지니까 여기 서쪽에 있는 불쑥 튀어나온 거나 남쪽에 있는 불쑥 튀어나온 거나 전부다 한결같이 공통점이 뭐냐 하면, 전부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용서받아서 우리가 영생 얻는다. 같은 공통점을 이야기한다 말이죠.

그런데 그림이 이리 안 되고 멍게처럼 한 통속이 아니고, 하나하나 떨어져서 우리 서로 사랑하자 해보면, 하나하나 떨어진 이 사이에 여기에 각자각자 서로 다른 거룩이 따로 존재해요. A라는 사람의 거룩은 50점, B라는 40점, C라는 30점, 이래서 어떻게 한 몸입니까? 이게 얼마나 성화론이 엉터리에요. 나눠줄 수도 없어요. 지가 성과 얻은 거지.

십자가 진 강도가 죽은 그 날 구원받았는데 사실은 그 강도는 이미 죽은 인간이지요. 근데 이미 죽은 상태를 주님께서 살려줬지요. 살려줬을 때 그 강도가 믿은 것은 예수그리스도와 자기와 같은 공간, 같은 영역에 있다고 생각을 한 겁니다. 같은 영역을 바로 오늘 본문에서는 그걸 가지고 아브라함의 계시 또는 이삭의 계시 또는 야곱의 계시라 할 수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제 이 말 이해하는데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했지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 해서 예를 든 게 뭡니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라 했잖아요. 어, 아브라함, 이삭, 야곱 다 죽었잖아요? 이상하잖아요. 예수님 예를 든 게 참 이상하죠. 나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라 해놓고 예를 든 인물들이 전부다 뭡니까? 우리 보기에는 왕년에 살다가 다 돌아가신 분을 든다고요.

쉽게 예를 들면, 나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고, 산 자의 하나님이다. 나는 강감찬의 하나님이고, 을지문덕의 하나님이고, 나는 김일성의 하나님이다. 다 죽은 사람 아닙니까?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분명히 죽었지만 하나님의 약속 안에 들어있는 사람은 뭐가 됩니까? 산 사람이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사람은 뭐냐? 비록 죽어도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 보시기에 산 사람이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게 바로 예수를 통해서 너희에게 알려줄 수 있는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이에요. 죽음이 약속이 아니고. 살려주는 약속이에요. 모든 인간은 죽었으니까 오직 살아있는 약속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살려주는 약속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 그 약속을 믿는 자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같은 한 통속, 같은 공동영역, 공간에 속해져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우리의 생명이 하늘에 있는 이상은 여러분, 고민하지 마세요. 장가가야 된다고 그렇게 고민 안 되죠. 장가가야 된다고 고민하고 이런 것 있습니까? 아무 생각이 없네.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는 이 말씀이 세상에 사람을 살려놓고 하는 말씀 같으면 우리가 얼마든지 이해하지요. 사람이 죽여 놓고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오빠를 죽여 놓고 하는 말이 주께서 던지는 말씀이 너무 매정하지 않습니까?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그걸 사람을 죽여 놓고 한다고.

왜 그렇게 하십니까? 그게 복이기 때문에 그래요. 강의시간에 들어서 복이 아니라 실제로, 실제로 죽여 놓고 날 믿지? 이렇게 하는 그 실습에 나서게 하시는 그 실습이 매일같이 2008년도도 예외 없이 우리에게 어김없이 다가설 겁니다.

매일같이 우리로 하여금 절망케 하고, 낙담케 하고 또 이런 일이, 사람 미치겠다. 하나님이 죽이자는 말인지, 나를 괴롭히니 왜 이렇게 하십니까? 라는 당황스러움이 찾아오게 돼요. 당황스러움이 찾아온 그때도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당황스러움을 보고 상당히 니 와카노? 니, 집에 무슨 일 있나? 네 생명은 하늘에 있는데 집에 쥐새끼 다니나, 약 놔라. 그렇습니다.

자, 조금만 더 하고 쉽시다. 창세기 28장에 하나님이 사다리로 천사를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은 천사에게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일방적으로 이렇게 하십니다. 그런데 야곱은 그 밑에서 오해를 하고 있는 거예요. 오해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28장 그 끝에 나옵니다. 오해이면서도 중요한 이야기를 해요.

22절에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여기 21절에 보면,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라고 했어요.

자, 야곱의 하나님의 성전은 장소적 개념이에요 아니면 약속 개념입니까? 장소 개념이에요. 내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되면 이것을 반드시 돌 가지고 주춧돌, 머릿돌 해서 여기다 하나님의 성전을 짓겠다는 거예요.

자, 여기서 하나님의 성전이 뭐냐? ‘벧엘’이라 했는데 하나님의 집이라는데 하나님의 성전이죠. 성전 개념의 특징은 뭐냐 하면, 출구에요. 출입구, 비상구. 하늘과 땅을 연결시키는 툭 트인 그런 출입구 역할을 하는 거예요. 이걸 예수님 같으면 “나는 길이요” 이 말이죠.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생명의 문이요” 내 문으로 들어갔다면 꼴을 얻고 생명을 얻고 그 말 아닙니까?

문이란 말은 이 장소에만 유일하게 하나님과 땅이 내통하는 생명이 주어지는 그러한 장소입니다. 라고 자기가 그렇게 지리적으로 공간적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거는 오해였습니다. 이 지리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야곱 본인이 하나님의 전 되는 것도 이것도 없습니다.

없고 아까 이야기한 하나님의 약속대로 야곱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고, 야곱에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받는 그런 야곱 만들기가 실시되는 사건이 떨어지는 현장이 곧 뭐냐? 하나님의 성전이 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하나님께서 성도 안에 들어오신다는 말은 어떤 사건이 계속 일어나야 돼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의 아담의 죄보다 더 우세하고, 우리 아담의 죄를 늘 씻어주고, 거기서 아담의 죄가 계속 뛰쳐나오고, 살아가면서 우리의 숨겨진 죄가 계속 나오고, 나올 때마다 그것을 계속 예수님의 피로 씻어주고 있다는 것을 믿어지게 하는 그런 현장, 그런 사건, 새 언약의 사건이 일어날 때 그 사람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전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10분간 쉽시다.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16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547 자유게시판 07대구강의08-성화론1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8-03-08
546 자유게시판 20080215-(b)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6강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08-03-07
545 자유게시판 광주강의(08. 2. 22) 1강 녹취록 디모데전서 최고관리자 08-03-06
544 자유게시판 07대구강의07-다윗왕중심의전쟁2 열왕기상 최고관리자 08-03-05
543 자유게시판 07대구강의06-"차라투스트라는이렇게말했다"(니체)를읽고 [신학] 최고관리자 08-03-03
542 자유게시판 07대구강의05-다윗왕중심의전쟁1 창세기 최고관리자 08-02-25
541 자유게시판 20080215-(a)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5강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08-02-22
540 자유게시판 07대구강의04-"주름"(들뢰즈)을읽고 [신학] 최고관리자 08-02-19
539 자유게시판 광주강의(08. 1. 25) 빌레몬서 제 2강 빌레몬서 최고관리자 08-02-19
538 자유게시판 07 대구강의 3 - 지옥의 하나님 17 출애굽기 최고관리자 08-02-15
537 자유게시판 성화는 없다. - 최고관리자 08-02-13
536 자유게시판 20070713-(2) 서울강의녹취 : 갈라디아서 제 24강 갈라디아서 최고관리자 08-02-13
535 자유게시판 광주강의(08. 1. 25) 빌레몬서 제 1강 빌레몬서 최고관리자 08-02-12
534 자유게시판 20071207b 울산강의-창세기 29장 창세기 최고관리자 08-02-11
열람 ➜ 자유게시판 20071207a 울산강의-창세기 28장 창세기 최고관리자 08-02-11
532 자유게시판 07대구강의02-"천개의고원"(들뢰즈,가타리)을읽고 미가 최고관리자 08-02-10
531 자유게시판 07 대구강의 1 - 지옥의 하나님 16 [신학] 최고관리자 08-02-06
530 자유게시판 20070713-(1) 서울강의녹취 : 갈라디아서 제 23강 갈라디아서 최고관리자 08-02-05
529 자유게시판 20070608-(2) 서울강의녹취 : 갈라디아서 제 22강 갈라디아서 최고관리자 08-02-02
528 자유게시판 06 대구강의 14 - 지옥의 하나님 15 레위기 최고관리자 08-01-30
527 자유게시판 06 대구강의 13 - [물질과 기억] [신학] 최고관리자 08-01-26
526 자유게시판 20080111-(b)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4강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08-01-23
525 자유게시판 광주강의(07. 12. 21) 32-2 로마서 최고관리자 08-01-22
524 자유게시판 아주 ㅡ속이 시원한 글이라 퍼가지고 왔습니다. [신학] 최고관리자 08-01-22
523 자유게시판 안녕하세요...자료 하나 부탁드릴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8-01-22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