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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7대구강의02-"천개의고원"(들뢰즈,가타리)을읽고자유게시판미가

07대구강의02-'천개의고원'(들뢰즈,가타리)을읽고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07 대구강의 2 - [천개의 고원] 질 들뢰즈, 펠리스 가타리 공저, 김재인 역, 새물결(서울:2001)

07,03,05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천 개의 고원에 계신 도사님들께 경례 - 십자가 !!

오늘 강의할 '천개의 고원'에 대해서는 양해를 구할 마음이 별로 없는데, 그 내용이 너무나 함축되고 어렵기 때문에 말이다. 그냥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밀고 나가야 하는데, 이 책 자체가 두껍고, 아마 번역한 사람도 애를 먹었지 싶은데, 그리고 이진경씨의 풀이한 책이 '노마디즘' 이라고 있는데, 이것도 역시 두 권으로 된 어려운 책으로 안내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렇게 책을 어렵게 쓰는가? 봉사하는 차원에서 좀 쉽게 쓰지 말이다. 과거가 아닌 지금 돌아가는 이 세상의 전체적인 것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이것이 고원에 관한 것인데, 개마고원이라고 할 때 그 고원 말이다. 이 고원의 특징은 산인데 위에 올라가면 편평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산이란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산밑에 있으니 말이다. 산밑에 있는 사람이 산 위에 있는 사람에게 자기의 이해수준을 들어달라고 요구를 하니까, 그야말로 곤란하다는 것이다. 산 위에 올라가야 비로소 알 수 있는데 말이다.

이렇게 산 위에 올라가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A 라는 지점, B 라는 지점, C 라는 지점, D 라는 지점, 등등, 이렇게 산 위에 있는 고원의 그 어떠한 지점들이라도, 이런 것들은 산밑에서 보면 모두가 이미 높은 수준의 개념들이라는 것이다. 즉 위에서는 편평하지만 아래에서 보면 높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A, B, C, D 라는 개념들이 축적이 되려면 그만큼 지식과 역사들이 누적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B를 이야기하더라도, 이것이 산밑에서 말하는 B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산 위의 B는 그 위로 올라갈 때의 모든 것들이 다 축적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축이 되어있으니, 그것을 설명하려면 어려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나 홀로 고원에서 !!

그러면 우리는 지금 과연 산밑에 사는가? 그것이 아니고, 우리도 역시 산 위에 산다는 것이다. 그러면 같이 산 위에 있으면 서로 이해되는 이야기를 해야 되지 않는가? 하지만 21세기에서의 산 위의 삶이 어떤 삶인고 하니,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전문적인 의사라는 직업을 가지려고 하면 다른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21세기에서 몽땅 다 안다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몽땅 다 쓸모 없다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의사이면서 철학까지 한다면 사실 의사직을 그만 두어야 하는데, 자기 전문분야에서도 경쟁적으로 발달하고 난리인데, 그 시간에 다른 짓을 했으니 그만큼 낙후된 의사라는 것이다. (이런 양반이 곧 돌팔이!)

새로운 의료기계가 들어오면 익혀야 하는데, 새로운 의료기술이 얼마나 쏟아지는데 말이다. 계속해서 논문을 쓰고 세미나에 참석해서 새로운 정보를 입수하고 거기에 맞추어 환자를 관리해야 하고 말이다. 물론 마구 노는 의사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런 의사가 교회에 착실히 다닌다고 하면, 의사직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복음에 관심이 있어서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친목단체로 여겨서 나오지만 말이다.

◈ 폐쇄적인 천 개의 고원에서 !!

사실 복음이나 철학에 관심이 있고 이 전체를 다 안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 시대는 A, B, C, D 라는 각 지점에서 전문분야가 다 있는데, 그런데 그 전문분야는 그야말로 폐쇄적이고 벽으로 둘러 쌓여있다는 것이다. 즉 자기의 전문분야는 터치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금 들뢰즈는 바로 그것을 이야기하는데, 그래서 고원이 한 두 개 정도가 아니라 천 개라는 것인데, 이 '천' 이라는 숫자는 말 그대로 천 개라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무한대'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손으로 셀 수가 없는 개념 말이다. 옛날에는 이것을 무한대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천'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동안 왕노릇한다는 것은 사람이 손을 댈 수 없는 무한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 들뢰즈의 과정철학 - 고원의 움직임을 쫓아 !!

여기 천 개의 고원이라는 것은 지금은 1000개라도 내일이 되면 1200개가 되고 그 다음에는 1500개가 되고 말이다. 그런데 이 1500개 하나 하나가 다 폐쇄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있는 폐쇄적이 아니라 뭔가 움직임이 있더라는 것이다. 그 움직임을 쫓기 위해서 들뢰즈는 철학을 전개하는데, 그것을 두고 '과정철학'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철학에서는 '생성'과 '발생'의 의미가 다른데, 사실 이런 것도 어려운 것인데, 이 생성이라는 것은 현재 구조가 있는 가운데, 그 짜여진 구조 내에서 새로운 것이 창조될 때는 생성이라고 이야기하고, 발생이라는 것은 아무런 구조물도 없는데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 그것을 두고서 발생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그냥 생성과 발생을 앞의 다같이 '생성'의 의미로서 사용하고, 뒤에 것을 '창조' 라고 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현재시대에서는 이러한 창조를 인정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창조를 인정해버리면 과거가 무시되어버리니까 말이다. 즉 우발성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인데, 물론 단지 앞에서 말한 생성의 범위 안에서는 인정해주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빵이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라 밀가루가 있어야 나오듯이 말이다. 아이들이 장난 삼아서 밀가루를 반죽해서 오븐에 넣었더니만, 어른들이 만든 것과는 다른 이상한 형태의 빵이 나왔다면, 그것을 우발적이고 우연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어디까지나 밀가루가 있어서 나오는 것이지, 즉 무에서 유를 인정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들뢰즈 - 천 개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설명 !!

아무튼 들뢰즈는 이런 과정철학, 즉 베르그송의 생성철학에서 과정철학을 동원해서 천 개가 아니라, 계속해서 늘어나는 그것을, 하나 하나를 일일이 다 설명해준다는 것이다. 그렇게 베르그송의 과정철학과 스피노자의 철학을 언급하면서 무엇을 배격하는고 하니까, 형이상학적인 존재철학을 배격하는데, 이것을 연역적이라고 하는데, 즉 이미 있는 것에서부터 쏙쏙 빼먹는 짓은 하지 말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이미 있는 것에서 나오면 권위를 가지고 하나의 폭력을 행사하기에 말이다. 이것은 권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현재 21세기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진리를 사랑하는 철학이라고 하면, 왜 병원은 병원대로, 학교는 학교대로, 감옥은 감옥대로, 전부가 다 자기밖에 모르느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들뢰즈가 이런 철학을 이야기할 때 남의 이야기인줄 알았는데, 그런데 노무현 정권에 들어와서는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시위를 한다는 것이다. 시위가 무엇인가? "나는 이런 직업을 가졌다" 라는 것을 알리는 것인데, 시위를 하지 않았으면 그런 직업이 있는 줄 몰랐을 텐데 말이다.

베트남에 파병을 갔던 사람들이 시위를 하지 않았으면 고엽제가 얼마나 나쁜지 사람들이 어떻게 알았겠느냐는 것이다. 실미도나 화물연대의 경우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하지만 화물연대가 실미도 문제를 걱정하는가?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 의사들이 파업을 할 때도 동조하지도 않고 말이다. 다들 자기밖에는 모른다는 것이다.

들뢰즈가 50년 전에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사람들은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옳고 그름이 확실한데 말이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지금에 와서 보니 제각기 다 자기 나름대로 옳다는 것이다. 즉 전체를 하나로 해서 모두가 다 옳다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이것을 '장 보드리야르'는 말하기를, "실상은 애초부터 없었고, 실상이라고 우기는 허상들의 무리가 곧 이 세상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허상들의 무리들만 있는데, 이 허상이 무슨 역할을 하는고 하니까, 계속해서 실상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실상은 없는데, 즉 중심이 없다는 말이다.

◈ 코드화로부터 탈주 !!

이렇게 폐쇄적인 그 안에서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데, 즉 천 개에서 나중에 1200개가 될 때, 200개가 늘어나는데, 분명히 천 개는 각자 각자가 폐쇄적으로 되어서 '꼼짝마' 이었는데, 이것을 '코드화' 라고 하는데, 즉 하나의 코드(법)로 꽉 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쥐는데 슬립(?)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왜 생기는고 하니, 여기서 탈출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 책에서는 '탈주' 라고 하는데, 즉 "더러워서 못해먹겠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지금 '대한예수교장로회' 라는 교단이 도대체 몇 개나 되는가? 무려 200개가 넘는데, 모두가 탈출해서 그렇게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현상들을 제대로 설명해줄 때, 그것이 진리답지 않느냐는 것이다. "나는 옳다" 라는 것이 진리가 아니고 말이다. 들뢰즈가 그렇게 주장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1000개가 1200개가 되고, 또 1500개가 되는데, 여기에 히틀러 같은 영웅이 나타나면 또 하나가 되고 말이다. 그리고 이 하나가 또 깨어져서 10개가 되고 말이다. 이런 것들이 경쟁적으로 마구 일어나는데, 서로 경쟁적으로 말이다.

◈ 고원들이 무엇을 중심으로 생기는가?

여기서 들뢰즈의 뛰어난 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렇게 고원이 생길 때마다 도대체 무엇을 중심으로 생기느냐는 것이다. 하나 하나의 고원들이 말이다. 여기서 하나가 빠진 것은 천 개의 고원이 이렇게 위에 있다면, 그들은 각자 무엇을 가지고 있는고 하니, 각자의 고유한 누적되고 축적된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 개의 고원을 한꺼번에 싹쓸이 할 수 없는데, 밑둥치부터 차근차근히 살펴야 하는데, 그러니 전체가 뭉개지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송도를 위하여 !!

예를 들면, '하얀거탑' 이라는 드라마가 중요한 이야기를 많이 내뱉는데, 거기서 명인대학교부속병원에 있는 외과과장이 인천에 있는 송도신도시의 커다란 병원에 스카웃 되려고 하는데, 그런데 이 명인대학교부속병원은 유구한 전통을 자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외국기업이 투자해서 짓는 송도신도시의 커다란 병원에는 유구한 전통이 없다는 것이다. 신설병원이니 말이다.

그런데 유구한 전통을 만들려고 하면 유구한 전통의 병원 의사를 스카웃해서 전통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단순한 자리이동이 아니라 전체뿌리를 옮기려고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단순히 그 의사기술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의 배경에 있는 그 사회에서 알아주는 역사적 권위와 전통까지 돈으로 계산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명대학교 총장들은 주로 정치인들이 많다는 것이다. 왜 그런 낙하산 인사를 하는가? 아니, 대한석유공사사장이 석유에 대해서 무엇을 알겠는가? 회사도 이름도 영어로 못쓰는데 말이다. 그런데 왜 낙하산으로 내려오는가? 그런데 막상 사장이 되어서 일을 하려고 하면, 상대하는 외국 기업들이 "당신은 국가가 보증해주는 인물인가?" 라는 것을 묻더라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어느 정도 기술과 실력이 필요하지만, 그러나 어느 정도 정점에 도달하니까, 정치적인 타협과 그런 배경이 과거의 어떤 하나의 권위가 되어서 일을 성사시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삼성과 같은 곳에서는 유명한 판사나 검사들을 스카웃하는 이유가, 뭔가 일을 진행시키려고 하면 그 사람에게 묻어있는 과거의 전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자양강장에는 역시 박카스 !!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복음을 전한다고 교인들이 모이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어느 교단인지를 묻는다는 것이다. 역시 역사와 전통인데, 동아제약의 박카스가 어제오늘의 박카스가 아니라는 것이다. 학교의 경우도 얼마나 역사와 전통을 중요시하는지, 그래서 신설학교가 그런 전통을 세우기 위해서 더 빡시게(?) 공부를 시키고 말이다.

이렇게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고 탈출을 시도하는데, 즉 송도의 외국계 병원이 명인대학교부속병원의 장준혁 과장을 스카웃하려고 하는데, 과연 이들이 무엇을 목적으로 삼아서 옮기느냐고 할 때, 그것을 들뢰즈는 '의미'로 본다는 것이다. 들뢰즈의 그 유명한 '의미' 말이다.

◈ 들뢰즈가 말하는 '의미'에 대해서 !!

지금부터 어려워지기 시작하는데, 이 '의미'를 제대로 몰라도 제 마음대로 강의를 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들뢰즈의 의미인데, 이런 의미가 빠져버리면 철학은 과학에게 고개를 숙여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철학자는 진리를 탐구하기 때문에 과학이 진리라고 하면 얼마든지 고개를 숙일 수 있는데, 진리가 더 중요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물질에는, 즉 과학기술에는 고개를 숙일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이 다 과학기술로서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까도 말했지만 과학자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과학으로 설명할 수가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현미경을 보고 실험실습을 한다고 모두를 아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그것이 바로 의미라는 것으로, 사람들은 이런 의미가 없이는 못산다는 것이다. 어디 안중근이 돈 때문에 목숨을 매놓고 총을 쏘았는가? 그것이 바로 '의미' 때문인데,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자기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 '천개의 고원'을 향하여 출발 !!

이 '천개의 고원' 이라는 책을 읽어본 사람들 중에서 태반 이상이 어려워하고 깜깜해하는 대목이 무엇인고 하니, 제가 그 부분을 교재에 설명을 해놓았는데, 교재 2페이지를 보자.

** 하지만 신은 바닷가재요 심판관이다. 날카로운 집게를 가지고 쪼개고 쪼개고 붙이고 또 붙인다. 이 쪼갬과 붙임을 한꺼번에 표현한 용어로서 '분절(分節)'이라고 한다. 이 분절은 이중분절로 진행이 된다. 이것은 신의 심판 능력이다.

여기에 '분절(分節)' 이라는 용어가 나오는데, 이 분절은 본래 의미는 쪼개는 것만 있지만, 여기서는 쪼개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접붙이는 것도 포함한다는 것이다. 분위기가 로마서 12장과 비슷한데, 거기에도 접붙인다는 말이 나오니 말이다. 누가 그렇게 쪼개고 붙이고 하는고 하니, 신이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서 들뢰즈가 신이라고 하는 것은, 신을 믿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전체적인 자연의 대변화를 두고 신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분절은 뭐고, 이중분절은 또 무엇인가?

그런데 이 분절이 '이중분절'로 진행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람들이 제일 이해하기 힘들어하는데, 이 이중분절의 개념을 모르면 이 '천개의 고원' 이라는 책을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백 독을 해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 이중분절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것이 먼저 제대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고원은 그 밑에 역사적 전통들이 다 깔려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의미' 라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분절이 하나 될 때마다 의미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분절이 되게 하는 추진력이 무엇인가? 즉 왜 분절이 되어야 하는고 하니, 의미가 달라서 그렇다는 말이다.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교단이 쪼개지고 교회가 서로 나눠지듯이 말이다. 쪼개질 때 그냥 쪼개지는 것이 아니라 다 명분이 있기 마련인데, "나는 이렇기 때문에 나간다" 라는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 아버지요?
* 왜 불러.
* 저는 이제 독립을 하려고 합니다.
* 무엇 때문에?
* 계속해서 아버지 옆에서 쭉쭉 빨아먹고만 살 수는 없습니다.
* 그래도 그냥 그대로 있지.
* 아닙니다. 저는 저 나름대로 의미를 정립하고 싶습니다.
* 의미??

◈ 옐름슬레우의 '언리학'에 대해서 !!

이렇게 '의미' 라는 것은 분절이 있음으로서 되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중분절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루이 옐름슬레우(Hjelmslev)의 '언리학(言理學)'이라는 것에 보면, 즉 언어의 이치를 다룬 학문이라는 것인데, 여기에 보면 '표현과 내용' 이라는 이중분절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들뢰즈의 이중분절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옐름슬레우의 언리학에서 말하는 표현과 내용이 어떤 식으로 되어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과 내용의 이중분절이란 것이 무엇인가? 이 세상에서 모든 의미라는 것은 언어를 가지고 표현하는데, 이렇게 언어를 가지고 표현할 때, 즉 언어로 의미를 표현하니, 이 의미가 무엇이냐고 할 때는 언어를 통해 해답을 얻어야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밀가루를 가지고 빵을 만드는데, 그러니 빵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밀가루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빵' 이라고 한다고 해서 빵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의미라는 것도 언어에 담겨야 하는데, 그것을 언어로 표현이 된다고 한다는 것이다. 즉 의미가 빵이고 언어가 밀가루라는 것이다.

◈ 의미는 분절이고, 갈라짐이고, 변별성이다 !!

그러니 의미라는 것은 분절, 즉 갈라짐이고, 이것이 변별성인데, 그 예로 많이 드는 것인데, 파란불과 빨간불의 경우에, 각자 하나만 가지고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서로 만나야 파란불은 건너가도 된다는 것이고, 빨간불은 건너가지 말라고 하는 의미가 생긴다는 말이다.

이 의미는 마치 조가비와 같은데, 왜 조가비가 판이 두 개이지 않는가? 이 두 개인 짝 안에 진주가 담기든지 조갯살이 담기든지 하는데, 이렇게 두 개의 짝이 있어야만, 즉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틈 사이에서 의미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분절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거기서 의미를 솎아내는 신(?)의 방법인데, 이것은 소쉬르가 주장한 것으로, 즉 변별성에서 의미가 나온다는 것이다.

◈ 아무튼 골치 아픈 이중분절 !!

그런데 옐름슬레우는 주장하기를, 이것이 단순히 그냥 분절이 아니고, 그렇게 되면 간단한데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이중분절'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더 골치 아프게 되는데, 그러니 이 이중분절을 말하기에 앞서서 먼저 첫 번째 분절(?)을 이야기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두 번째 분절을 이야기하고 말이다.

첫 번째 분절은, 모든 언어는 표현과 내용으로 분해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 '내용' 이란 용어가 어렵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자면 '취지' 라는 것인데, "너희들에게는 그렇게 들릴지 몰라도 원래 내가 말하는 취지는 이것이야" 라고 하는, 그 취지 말이다. 그리고 '표현' 이라는 것은 그 취지를 담는 형태인데, 즉 소리이고 글자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의미' 라고 하면, 'ㅇ,ㅡ,l,ㅁ,l'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그것이 바로 '표현'이고, 그런데 이런 '의미'가 '뜻' 이라는 의미(?)를 가질 때는, 아무리 이 '의미' 라는 글자는 현미경을 가지고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런 '뜻' 이라는 의미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기서 '의미'와 '백성'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백성은 왕이 있는 국가의 국민을 백성이라고 하고, 의미는 언어의 뜻을 말하는데, 이렇게 분리가 되니 그 뜻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아하, 의미는 백성이 아니고, 백성은 의미가 아니구나" 라고 말이다. 이렇게 짜갈아지는(?) 것을 분절이라고 하는데, 그럴 때에 의미가 나온다는 것이다.

◈ 당신 나라의 의미가 몇 명인가? - 예 ??

예를 들어서, 누군가가 "당신 나라의 의미가 몇 명인가?" 라고 하면, "저, 용어를 잘못 사용했는데요. 그렇게 하시면 안 되고, '당신 나라의 백성이 몇 명인가?' 라고 해야되는데, 분절을 하지 않았군요?"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의미가 다른 개념을 사용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분절을 하지 않으면 언어를 가지고 의사소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소리로도 표현이 될 수 있는데, 그리고 그림도 가능하고 말이다. 이것을 두고 물질적인 모든 요소라고 하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원숭이가 바닥을 쾅쾅 두드리는 것은 화가 났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기분이 좋을 때는 헥헥 거리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기분이 좋을 때도 쾅쾅 두드리면, 그것은 의미가 분절되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다.

◈ 표현과 내용이 전부가 아니기에 !!

소쉬르도 이런 주장을 했는데, 아무튼 여기까지는 사람들이 납득을 하는데, 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무엇이 어려운고 하니, 이런 두 가지를 합쳤다고 해서 의미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분절이 하나 더 있기 때문인데, 즉 '이중분절' 이라는 것이다.

◈ 옐름슬레우가 말하는 이중분절 !!

여기서 들뢰즈가 인용한 이중분절의 창시자(?)인 옐름슬레우의 주장을 좀 더 살펴보면, 옐름슬레우가 다음과 같은 예를 들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덴마크어가 있고, 독일어가 있고, 프랑스가 있고, 그리고 한국어가 이렇게 있다고 한다면, 그런데 이 덴마크에서 'trae' 라는 단어가 있는데, 그리고 'skov' 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가를 물으면, 그것은 표현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이 무슨 뜻인가를 물으면 그것은 취지에 해당하는 것인데, "나는 이런 취지로 이런 표현을 했다" 라고 말이다. 그 취지는 내용이고 말이다. 그런데 이 취지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이중분절이 일어나야 하는데, 즉 한번 더 갈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 trae, skov - 나무, 목재, 산림 !!

그 대표적인 것이 위에 말한 덴마크어의 'trae'와 'skov' 인데, 이것을 한국어로 표현하면, '나무', '목재', '산림' 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한국어는 이렇게 3가지인데, 독일어나 스페인어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그런데 왜 덴마크어는 2가지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왜 2가지가 3가지로 되었는가? 그것은 그 자체 내에서 의미가 유동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 '나무'의 경우에도 유동적으로 변한다는 것인데, 즉 의미의 흐름인데, 과정적으로 의미가 계속해서 흘러간다는 것이다. 존재가 아니라 말이다. 그것까지 포착할 때에 의미론이 성립한다는 것이다. 위의 경우에 2개에서 3개가 되었는데, 물론 그 의미들이 비슷하지만, 하지만 취지는 감이 온다는 것이다. 딱딱하지만 조금은 부드러울 수도 있고, 이렇게 구체적으로 그 쓰임새에 따라서 분열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trae'는 나무와 '목재에 다 사용할 수 있고, 'skov'는 목재와 산림에 다 쓰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데마크에서는 이 두 가지 단어로 충분한데, 한국어에서는 3가지 단어를 모두 다 쓰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절되는 취지(내용)가 어떤 의미를 전달해놓고는 또 갈라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까, 이것이 제일 어려운 부분인데, 표현과 내용에 있어서, 표현은 다시 형식과 실체로 갈라지고, 내용도 내용형식과 내용실체로 이렇게 두 번 갈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끝'인데, 더 이상의 분절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표현도 형식과 실체로, 그리고 내용도 형식과 실체로 나누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이 형식과 실체로 갈라지는 것은, 2개에서 3개가 되었다는 것이다. 'trae'와 'skov'가 '나무', '목재', '산림'으로 말이다. 나무와 목재가 서로 같은 것 같기도 하지만 아니고 말이다. 이렇게 형식도 갈라지고 실체도 갈라진다는 말이다.

독일어로 'Gott'가 무엇인고 하니까 'God' 인데, 그런데 같은 표현으로 'Godt'가 있는데, 이것은 'Well' 이라는 뜻으로, 이렇게 같은 표현이고 음성인데 각각 다른 의미와 다른 취지로서 분절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형식은 같지만, 내용은 그 하나는 '신' 이고 다른 하나는 '잘' 이라는 뜻으로 분절되었다는 것이다. 나무의 경우도 내용상 분절된 것이고 말이다.

◈ 밤에 밥을 먹고, 눈에 눈이 들어가서 !!

그리고 형식도 분절이 되는데, 그것은 코미디 프로에 보면 많이 이용되는데, "아, 눈에 눈이 들어가서 어쩌고" 라고 하는데, 둘 다 같은 '눈'이지만 취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눈물이 흐르는 눈이 있고, 하늘에서 내리는 눈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밤에 밥을 먹었더니만 어쩌고" 라고 하고 말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층이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 들뢰즈 - 이중분절로 이 세상을 설명하다 !!

사실 지금까지 한 것은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닌데, (앞으로 들뢰즈에 들어가면 본격적으로 나오는데) 이 옐름슬레우는 이중분절을 기호학과 언어학에만 사용했는데, 들뢰즈는 이 이중분절을 어디에 사용하는고 하니, 이 세상의 모든 자연현상에 다 집어넣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포의 분열인데, "사람은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약 60조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세포는 무엇인가? 세포를 조사해보면 미토콘트리아와 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러면 미토콘트리아는 무엇인가?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나가버리면, 분자와 분자의 결합인데, 분자는 원자들의 결합이고 말이다.

물은 'H2O'로 되어있는데, 그러면 수소와 산소와 물이 서로 관계가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수소 따로, 산소 따로, 물 따로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둘이 결합을 했을 때 '물' 이라는 의미가 생겼다는 것이다. 이것은 의미의 층이 다르기 때문인데, 의미의 층이 이렇게 원자층에서 분자층으로 올라갈 때, 이것을 두고 분절이라고 보는데, 이 분절이 그냥 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분절도 있지만, 의미의 분절도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중분절이라는 말이다.

◈ 욕망의 층이 다르다 !!

그래서 들뢰즈은 이중분절로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다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러한 이중분절을 할 때 의미가 나오는, 물론 원자수준이 아닌 분자수준의 말이다. 이것을 두고서 들뢰즈는 말하기를, "욕망의 층이 다르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욕망의 층이 다르니, 당연히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천 목사님이 다리 밑에서 차를 세차하다가 저에게 들켰는데, 그래서 제가 "다리 밑에서 세차를 하면 물이 더러워지니 하지 마세요" 라고 했다면, 천 목사님은 "아니, 제가 제 손으로 제 차를 세차하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무엇이 다른고 하니, 의미의 층이 다르다는 말이다. 바로 여기에 무엇이 개입되는고 하니, '코드'가 개입된다는 것이다. 이 코드가 다른 말로는 법이고 말이다.

그때 경찰이 와서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당신은 불법으로 다리 밑에서 세차를 했기 때문에 벌금 50만원에 처합니다" 라고 하면, "아니, 내 차를 내가 세차하는데 무슨 소리요" 라고 하면, 그 경찰은 "그것은 판사에게 따지시기 바랍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에이시, 세차도 마음대로 못하나?

그러면 그 사람은 어디에 묶이는고 하니, 흐르는 강물에 세차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누구 욕망인고 하니, 자기 욕망인데, 그것은 60조의 세포로 이루어진 자기 몸에서 나온 것인데, 하지만 현미경으로 몸을 관찰한다고 해서 그 욕망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철학이 과학에게 밀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문학이 과학에게 기가 죽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무엇이 다른가? 서로 층이 다르다는 것이다. 아무리 현미경이나 MRI를 가지고 몸을 모두 살펴도 세차를 하고 싶다는 것을 발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가? 과학자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면 모르면 그것이 무슨 진리이냐는 것이다. 그러니 진리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철학자들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그것도 모르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자들은 의미의 층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물론 철학자들이 60조의 세포의 움직임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저 꽃을 본다" 라고 할 때, 눈이 있어야 보지 없으면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 꽃이 아름답다" 라고 했을 때에, 그 의미는 무엇하고 비교해야 하는가? 가을에 떨어지는 쓸쓸한 낙엽이나 겨울의 앙상한 나뭇가지와 비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의미라고 하는 것은 변별성, 즉 어떤 것과 비교하면서 생긴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분절이 된다는 것이다. 봄에도 아름답고, 여름에도 아름답고, 가을에도 아름답고, 겨울에도 아름답고, 그렇다면 그것이 무슨 아름다움이냐는 것이다.

그러니 반드시 의미의 층을 이야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각 층마다 그 층에 해당되는 욕망이 있는데, 그 층에서 다른 층으로 올라갈 때만 분절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3중분절이고 4중분절이 아니냐고 할지 몰라도,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존의 있는 같은 층에서 다른 층하고만 비교하니 말이다. 그러니 항상 이중분절이라는 것이다.

지금 이것이 제일 어려운 부분인데, 사실 모두가 다 어렵지만 말이다. 저기 제일 아래층인 원자라는 층에서부터 자기 차를 세차하고 싶다는 층까지 모두가 다 나오는데, 즉 "이제 당신은 벌금 50만원에 처합니다" 라는 층까지 말이다.

◈ 탈(脫)코드와 재(再)코드 !!

이렇게 밑에는 과학분야이고 위에는 정치분야이고 법의 분야인데, 즉 '코드' 라는 것인데, 이 코드가 바로 법이라는 것이다. 강제집행 말이다. 거기서 도망치는 것을 '탈(脫)코드' 라고 하고 말이다. 그렇게 탈코드가 되어서 자기들끼리 '재(再)코드'를 만들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히피족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무엇을 만드는가? 법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반(反)문화를 외치는 놈들끼리 모여서 문화를 만들고 말이다. 가출을 해서는 조폭을 만들고 말이다. 인간들은 이렇게 모이면 법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렇게 밑에서 올라가는데 왜 이중분절인고 하니, 십중분절이 아니라 말이다. 이 '분절' 이라는 것은 있는 의미에서 있는 의미를 끄집어내는 것인데, 다른 층에서 무엇을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고, 동일한 아래층에서 있는 의미를 근거로 해서 다른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 나무가 있다면, "엄마, 나무와 목재가 어떻게 다르지?" 라고 하면 질문이 되는데, "엄마, 나무와 옷이 어떻게 다르지?" 라고 하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는 정도 비슷해야 새로운 의미가 생기는데 말이다.

아이가 "엄마, 나무와 목재가 어떻게 다르지?" 라고 했을 때, 엄마가 대답하기를, "애야, 목재는 나무인데" 라고 한다면, 엄마는 분절을 줄이기 위해서 목재에서 나무로 옮겼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서 '사전' 이라고 하는데, 이 사전은 독자들이 어려워하는 부분을 쉬운 쪽으로 의미를 줄여준다는 것이다.

◈ 이근호 목사의 주례사가 궁금하다 !!

여러분이 복음을 설명할 때, 물론 저도 그렇지만, 어떤 분이 "이근호 목사님은 어떻게 주례사를 하는지 궁금합니다" 라고 했는데, 불신들이 다들 앉아있는데 십자가만을 이야기해서 되겠느냐는 것이다. 이미 의미의 층이 다르니 말이다. 그럴 때는 어떻게 접근해야 하겠는가?

그들의 의미가 갈라지는 대목까지 계속 내려와야 하는데, 이쪽 의미와 저쪽 의미로 말이다. 즉 소유가 아니고, 사랑이고 희생이라는 대목까지 말이다. 그러니 여기서 우리는 소유와 희생의 차이점을 말하면 된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아니고, 그들의 아는 의미로 말이다. 왜냐하면, 이중분절이 되니까 말이다. 쉽게 말해서, 서로 층이 다르다는 말이다.

◈ 욕망을 자제하면, 왜곡된 의미가 코드화될 뿐 !!

그런데 각 층마다 무엇이 있는가? 욕망이 있는데, 그런데 이 욕망은 들뢰즈에 의하면 자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중요한 점인데, 욕망을 자제해버리면 그 욕망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왜곡된 의미가 코드화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욕망을 자제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가면 전라도로 가는 기차와 경상도로 가는 기차가 대전에서 갈라지는데, 그때 경상도 가는 기차가 전라도로 가는 기차를 폭파시키는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냥 선로만 바꾸어주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각자 자기 길로 가면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욕망이 폭파대상이 안 되는 이유가, 욕망자체가 또 다른 욕망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원초적 욕망은 자아 이전의 욕망 !!

여러분이 이해가 안 되도 할 수 없는데, 여기서 들뢰즈는 어디까지 생각하는고 하니까, 보통 자아가 욕망을 다스린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층이 높은 곳에서는, 즉 도덕적 층에서는 가능한 일이 될지는 모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미 원초적 욕망은 자아 이전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즉 이 욕망에서 자아가 나왔다는 말이다. 마치 라캉처럼, 욕망의 또 다른 모습이 '자아' 라는 것이다.

그러니 들뢰즈에게 있어서 욕망을 자제한다는 것은, 그것은 마치 자기 주인을 바꾼다고 하는 것과도 같으니 결코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마치 계집아이가 엄마에게 졸라대기를, "엄마, 나를 남자로 태어나게 해줘" 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 들뢰즈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이것이 들뢰즈에게 말이 안 되는 것이,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분절인데, 모체의 욕망에 의해서 분절된 욕망이 자기 자신인데, 그런데 그러한 모체를 부정하면 자기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신을 믿는데, 신은 모든 욕망을 배태하는 곳이기에 말이다. 즉 모든 욕망을 다 모으면 그것이 곧 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욕망을 부정하는 것이고,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되니까,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교인들이 하나님을 부정하지 않듯이 말이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들뢰즈도 예수님과 복음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말이다. 이렇게 욕망은 막을 수도 없고 참을 수도 없다는 말이다.

◈ 들뢰즈가 바라보는 베이컨의 그림 !!

그것을 들뢰즈가 자신의 '감각의 논리' 라는 책에서 프란시스 베이컨의 그림을 설명했는데, 그 책도 참 어려운 책인데, 자기가 욕망을 계속 발휘할 때, 그 욕망을 발휘하는 것을 '기계' 라고 하는데, 물론 이것은 공장의 기계라는 의미가 아니고, 욕망을 계속해서 생산한다는 의미에서 기계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각자의 기계인데, 그 기계에서 욕망이 생산되는데, 그냥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분절되어서 생산되기 때문에, 즉 욕망이 생산될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낳는다는 것이다.

◈ 인간은 욕망을 생산하는 기계 !!

이것은 시간과는 관계가 없는 묵시적인데, 조금 전에 말한 과정철학이라는 것이다. 낳고, 낳고, 낳고,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계속해서 낳는가? 그것은 욕망에게 물어보라는 것이다. 이 욕망이 원래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욕망은 왜 그렇게 하는가? 신이 원래 그런 분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붙이고, 떼고, 붙이고, 떼고, 그렇게 계속하면서 분절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trae'와 'skov', 이 두 가지밖에 없는데, 그런데 세 개가 나왔다는 것이다. '아리꼬리하다' 라는 말도 그러한데,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이냐는 것이다. 형용사가 계속 분절되었다는 것이다. '시큼달콤하다' 라는 것도 계속 분절된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이 '시큼달콤하다' 라는 것의 원재료(?)는 '시큼하다' 라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그래서 3중분절, 4중분절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항상 '의미' 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의미를 근거로 해서, 그것을 인정하고 난 뒤에 거기에서 나온 분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나 이중분절이라는 것이다. 일단 기존의 의미를 인정하고 분절이 되니 말이다. (즉 같은 층에서 다른 층으로 간다는 말이다. 또 같은 층에서 다른 층으로 가고 말이다.)

◈ 한국교회 - 존재론에 근거한 예수믿기 !!

현재 한국교회의 신학이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라고 하는 존재론에 근거해서, 거기서 분절을 일으켜서 추가적으로 "예수를 믿자" 라고 나오니, 이것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들뢰즈와 똑같은 믿음(?)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일단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하나님을 먼저 믿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을 부정하면 예수님도 부정되니 말이다.

이것은 사도바울이 바로 사도가 되기 이전에 가졌던 사고방식인데, 즉 메시야는 오는데, 이 메시야는 어느 계통인고 하니까,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만 온다는 것이다. 세상에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가,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하다가 예수님에게 완전히 박살이 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도바울이 그 이전에 알고 있었던 신은 신이 아니라 우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진짜 하나님은 계속해서 감추어진 하나님이었고, 그것은 비밀이었는데, 그런데 그 비밀이 밖으로 나올 때는 어리석음으로 나왔지, 즉 의사소통이 가능한 의미로 나온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것이 의미라고 하면, 인간들끼리 의사소통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 들뢰즈의 철학과 복음과의 차이점 !!

들뢰즈의 철학에 있어서, 그의 철학이 복음과 어떤 차이점이 있는고 하니, 들뢰즈의 철학은 욕망이라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사회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등의 이런 정치체제의 공통점이 무엇인고 하니, 모두가 같은 숫자를 사용하고 있고 같은 과학적 사고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도 물리학을 하고 컴퓨터를 열심히 다룬다는 것이다. 그러니 핵폭탄도 저렇게 만든 것이고 말이다. 북한도 결코 아인쉬타인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그 어떤 정치체제라도 과학기술 자체를 거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나 알튀세르는 말하기를, 모든 기존의 정치체제는 허구이고, 이제는 과학기술의 재생산화를 위한 기술이 밑바탕이 되고, 거기서 정치가 발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이나 예멘에서도 자본주의에서 사용하는 숫자(?)를 다 가르쳐주고, 아줌마들도 다 사용한다는 것이다.

◈ 인간은 욕망을 통해 의사소통이 가능 !!

들뢰즈에 의하면, 그 어떤 인간이든지 간에 인간은 분열된 것인데, 인간은 욕망을 생산하는 기계라는 것이다. 즉 욕망이 자기를 생산하기 위해서 인간을 기계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목사님, 욕망이 언제 인간을 만들었습니까?" 라고 하면, '언제' 라는 말이 아니라, 계속 그 층을 넘어가면 결국은 욕망에서 분절과 분절이 되어서, 지금 이렇게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진화론적 입장에서 본다면 말이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있어서 의미는 서로 소통이 가능하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욕망이니 말이다.

◈ 그러나 십자가는 의사소통 불능 !!

하지만 십자가는 의사소통이 안 되는데, 그래서 사도바울은 모든 것을 한 글자로 표현하자면 '육(肉)'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 육은 육으로 끝나는데, 육으로 난 사람은 영으로 난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데, 그들이 알아보았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말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십자가를 앞장세움으로 말미암아서 육적인 어리석음을 어리석음이라고 폭로를 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지혜는 오직 십자가의 능력이고, 그것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전라도로 가는 기차와 경상도로 가는 기차를 때려부수는 것이 아니라, 노선을 바꾸어서 단절을 일으키게 한다는 것이다. 들뢰즈의 주장에 따르자면, 의미의 분절이 일어나도록 말이다. 서로 노는 층이 다르다는 것이다. 영적인 세계와 육적인 세계는 층이 다르다는 말이다.

◈ 한국교회 - 욕망에 호소해서 십자가를 왜곡 !!

그런데 문제는, 지금 한국교회는 서로 층이 다른 것을 인간의 욕망에 호소해서, 다른 층들을 혼합시키려고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이 바로 문화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니 지금 한국교회의 문화활동은 복음만을 쏙 빼버리면 다 된다는 것이다. 즉 교회에서 복음을 빼면 교회는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십자가의 복음을 이야기해도, '신' 이라고 하는 인간의 공통욕망에 호소해서, 그렇게 해서 나온 하나의 분절된 것이 예수라고 한다면, 그렇게 주장하면 물론 목회성공은 가능하겠지만, 그러나 진짜 복음을 이야기해버리면 성공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물건너갔다는 것이다.

◈ 역사란, 욕망의 이중분절사(史) !!

아무튼 인간은 욕망에서 나온 것이 인간이기에 인간들끼리는 의사소통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사소통이 된다고 하는 것은 들뢰즈에게 어떤 희망을 주는고 하니, 인간이 앞으로 아무리 역사가 발전한다고 해도 욕망이란 말로서 전부가 다 설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 역사가 어떻게 갈라질 것인가 하는 것은, 지나온 역사를 통해서 욕망이 어떤 식으로 이중분절을 겪어왔는지, 그것을 조사해보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 구조가 교재에 나오는데, 교재 1페이지를 보자.

** 소리의 흐름이든, 빛의 흐름이든 그것은 그 자체로 이 세상의 본질이다. 바로 이러한 상태로 이 지구는 끊임없이 이러한 신의 심판을 벗어버리고 달아나려고 한다.(p86) 그것이 탈지층화이고 탈코드화이고 탈영토화이다.

그러니 인간들의 욕망은 끊임없이 '탈지층화' 하고, '탈코드화' 하고, '탈영토화'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탈코드화에서 탈영토화한다는 것은 고원의 개수가 1000개에서 1200개가 되고 1500개가 되는 것인데, 영토라는 것은 자기들끼리의 세계라는 것이다.

◈ 노마디즘에 대해서 !!

그렇다면 이렇게 인간이 욕망을 통해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하는 긍정적인 입장에서, 과거의 유목생활을 하든 그런 디오니소스적인 시대에서, 어떻게 전제정치의 시대로 넘어오게 되었는지, 즉 어떻게 영토화되었고, 그것을 거부한 사람들이 어떻게 탈영토화시켰는지, 그것이 나오는 것을 바로 '유목주의' 라고 한다는 것이다. '노마디즘' 말이다. 즉 끊임없이 떠도는 것인데, 바로 이러한 유목주의의 모델로 삼은 것이 구약성경이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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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마디즘 [nomadism] -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끊임없이 자기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철학적 개념. 노마드(nomad)는 '유목민', '유랑자'를 뜻하는 용어로,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Gilles Deleuze)가 그의 저서 《차이와 반복》(1968)에서 노마드의 세계를 '시각이 돌아다니는 세계'로 묘사하면서 현대 철학의 개념으로 자리잡은 용어이다. 노마디즘은 이러한 노마드의 의미를 살려 철학자 이진경이 들뢰즈의 저서 《천(千)의 고원》(1980)을 강의하면서 남긴 글을 정리하고 보충해서 2002년 출간한 책의 제목으로, 우리말로는 '유목주의'로 번역된다. 기존의 가치와 삶의 방식을 부정하고 불모지를 옮겨 다니며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내는 일체의 방식을 의미하며, 철학적 개념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문화·심리 현상을 설명하는 말로도 쓰인다. 노마드란 공간적인 이동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불모지를 새로운 생성의 땅으로 바꿔 가는 것, 곧 한 자리에 앉아서도 특정한 가치와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을 바꾸어 가는 창조적인 행위를 뜻한다. 철학적으로는 철학·문학·정신분석·신화학·수학·경제학 등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새로운 삶을 탐구하는 사유의 여행을 의미한다.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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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칸트와 노마디즘 !!

그렇다면 이런 유목민을 낳게 하는, 즉 탈영토화를 하도록 하는 욕망을 코드화시켰던 그런 작업들을 아울러서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거기에 대표적인 사람이 칸트인데, 칸트는 무엇을 이야기했는고 하니, 신의 나라를 이야기했는데, 이 신의 나라는 도덕적 나라인데, 여기서 "신의 나라 백성이 될까, 말까" 라는 것이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너는 우리 교회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나쁜 짓을 했다" 라는 것이 말이 안 되듯이 말이다. 인간이라면 '너의 교회, 나의 교회' 라는 구획과는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태어나면서부터 모두 다 신을 향한 도덕적인 품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 속에 무엇을 더 집어넣고 말고 할 필요가 없이 말이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그런 도덕적인 증거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반성'의 기능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는 이성이 있어서 이 이성은 자체적으로 판단하고 비판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스스로 말이다. 남의 판단보다 항상 우선되는 것이 자기 판단인데, 그것을 '양심' 이라 하고 말이다. 인간에게 이런 양심이 있다는 것은, 신의 음성이 처음 태어날 때부터 박혀있다는 것이다. 바로 칸트에 의하면 말이다,

◈ 칸트의 양심은, 전제정치가 될 수 있는 코드화 !!

칸트의 이런 주장이 바로 들뢰즈의 입장에서 보면 전제정치가 될 수 있는 코드화라는 말이다. 이것은 바로 인간의 이성보다도 더 깊숙이 박혀있는 분자차원의 욕망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왜 원자상태는 안 되는고 하니, 원자는 혼돈자체로 보는데 거기서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구체화되는 것이 곧 분자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물' 이라는 구체적인 물질이 되려면 분자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소나 산소가 아니라 말이다. 그러니 원자에서 분자로의 분절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그냥 분절이 아니라 이중분절이 일어나서, 물은 물인데 이것은 사람 몸 속의 림프액(?)으로 빠지고, 저것은 사람이 마실 수 있는 식염수로 빠지고, 또 지하수로 빠지고 말이다.

이렇게 계속해서 분절이 일어나는데, 그런 분절에서 또 분절이 일어나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물에서 드디어 생물이 생기고, 그 생물에서 분절되어서 원숭이가 생기고, 거기서 분절이 되어서 마침내 인간이 생기고 말이다. 거기서 또 분절이 생겨서 인간은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또 빠져나가고 말이다.

◈ 칸트 - 들뢰즈 형님, 한 수 !!

칸트 이야기를 좀더 해보면, 칸트에 있어서 진리라는 것은, 인간이 이미 이성으로 지층화된 것인데, 즉 "이성이 반성할 줄 아는 놈들은 다 모여라" 라고 해서 지층화된 것인데, 그런데 들뢰즈가 볼 때에 정박아의 경우에, 아무리 반성을 하고 싶어도 반성이 안 되는데, 지능이 낮아서 말이다. 이때는 누가 보호하는고 하니, 말이 보호이지 사실상의 지배이지만 말이다.

이미 반성하는 방면에 도사들이 있는데, 판사나 목사들이 말이다. "당신은 당신의 잘못을 잘 압니까? 당신은 그 점에 대해서 반성하고 있습니까?" 라고 반성을 위해서 묻는다는 것이다. "예, 제가 도둑질을 했습니다" 라고 하면, "당신이 도둑질을 한 것은 이미 알고 있는데, 그 점에 대해서 반성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라고 말이다. "예, 반성합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입니다. 탕탕"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반항하면, "당신은 그냥 3년, 탕탕"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 계속해서 법의 코드에 묶이는 인간 !!

이렇게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물론 사람이라면 순간적으로 실수나 나쁜 짓을 할 수도 있는데, 즉 들뢰즈가 말한 욕망인데, 인간에게 있는 60조의 세포가 에너지가 모자라서 배가 고파서 남의 물건을 훔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마치 장발쟝처럼 말이다. 들뢰즈도 이런 것을 다 감안하는데, 오줌이 너무 급하게 되면 화장실이 없어서 노상방뇨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걸리면 5만원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아까 세차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쩔 수가 없지만, 그러나 판사의 입장에서는 물론 인간은 그럴 수 있지만, 사회질서가 유지되려면 그런 망나니 같은 행동은 당연히 반성이 되어야 하는데, 즉 노상방뇨를 했더라도 반성을 한다면, 그 형량이 참작이 될 때, 그 사람은 계속해서 법의 코드에 묶이게 된다는 것이다.

◈ 벌금을 내는 것도 욕망 !!

매일같이 과속해서 벌금이 늘어서 자기 차 값보다 더 과태료가 많은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그래도 그 벌금을 내어야 하는데, 자기가 과속하는 것은 욕망이지만, 그러나 욕망은 욕망이고 벌금은 또 내어야 하는데, "당신의 욕망은 욕망이고 과속을 했으니 벌금을 내세요" 라고 하면, "예, 내지요. 벌금을 내는 것은 우리의 욕망이니 내지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실 맞는 말인데, 벌금을 내는 것도 높은 차원의 지층의 욕망이니 말이다. 욕망이 분절되었기에 말이다.

그리고 이민을 가는 경우도, 이 이민이라고 하는 것이, "이쪽 코드는 싫고, 그러나 저쪽 코드는 좋다" 라는 것인데, 그래서 자기는 코드가 맞는 곳으로 가서 살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탈영토화인데, 쉽게 말하면 그냥 도망치는 것이고 말이다.

◈ 탈영토화와 역사의 정체성 !!

이렇게 개인적인 의미의 탈영토화는 도망치는 것이지만, 역사에서는 그것이 아니라, 역사의 정체성, 즉 "정치를 이렇게 하겠다" 라고 하는 것이 모두 다 탈영토화로 바뀌고 만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중세의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넘어올 때, 완전히 나라전체가 주체사상으로 변해서 완전히 탈영토화가 되는 동시에 재(再)영토화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제는 왕이 다스리고 영주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의 약속에 의해서 스스로 동의하는 의미에서 복종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미 분절된 것인데, 즉 의미가 나온다는 것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듯이, 그렇게 법 자체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을 과학적으로 따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아니, 자기가 오줌을 누고 싶으면 누는 것이지 어떻게 참느냐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따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노상방뇨는 방뇨하고 벌금은 벌금대로 내겠다는 것이다.

벌금은 내지 않고 오줌만 내겠다는 것은, 그렇게 한 개만 하려는 것은 자기 코드에서는 가능하지만, 그러나 자기가 속해있는 전체적인 코드 속에는 용납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은 오줌을 누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줌은 누지만 그것이 이쪽 세계에서는 나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서 "그러면 당신은 나쁜 짓을 안 했나?" 라는 것이 있는데, 하지만 그것이 말이 되지 않는 것이, 물론 누구나 다 나쁜 짓을 할 수는 있는데,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좀 봐달라고 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이 잡혀왔을 때,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 라고 했을 때, 사실 이것은 예수님이 자기에게 하신 말씀이지 우리에게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에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우리가 바리새인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라고 하는 것은, 그 여인을 용서하실 분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신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들에게 한 말씀으로 착각하고서 돌로 안 치면 된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이 죄를 지으면 돌로 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우리 자신도 돌로 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의 티를 보는 인간이 바로 나로 구나" 라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자기에게 끌어당겨서, 자기는 자기 눈의 들보도 알고 남의 눈의 티도 안다는 식으로 나오니, 참으로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이다.

◈ 과학이 증명할 수 없는 '의미' !!

들뢰즈에게 있어서 욕망이 진리인데, 이것을 누가 증명했는고 하니까, 과학이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과학이 원자와 분자를 통해서 다 증명했기 때문에 예수 이야기나 더 이상 다른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은 세포로 구성이 되어있으니 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세포가 움직이고 활동하면서 무슨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과학이 증명할 수 없는 '의미'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미가 생기는데, 그러나 과학은 의미가 빠진 상태에서 말이다. 과학은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 선과 악은 과학에서 분절된 다른 층에서, 즉 법의 층에서 옳고 그름이 판정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옳고 그름이 센가? 아니면 욕망이 센가? 물론 욕망이 더 센데, 옳고 그름은 그냥 꾹 참는 것이고 말이다. 그것을 참지 못할 때가 꿈인데 이 꿈에서는 그야말로 온갖 짓을 다해도 괜찮다는 말이다.

자기가 꿈에 여자 10명과 놀았다면, 이렇게 꿈을 꾼 것은 괜찮았는데, 그것을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꿈을 꾼 사람들은 힘든다는 것이다. 꿈 내용을 말하고 싶은데, 꾹 참아야 하니 말이다. 말을 해버리면 그 사회의 법에 걸리고 말이다.

◈ 욕망은 반드시 풀어주어야 !!

그러니 결국 욕망은 어디로 분출되는고 하니, 길거리에 있는 두더지 게임을 통해서 두더지를 마구 때리면서 푸는데, 욕망은 이렇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쪽이 막히면 다른 한 쪽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회에서 먹고 마시는 것 말고, 그것은 세포 에너지 위주이고, 하지만 '즐긴다' 라고 하는 것은, 욕망이 가로막혀 있으니 그것을 분풀이하듯이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욕망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인간을 다스리니, 그것을 제대로 풀지 못하면 그만 자살로서 끝낸다는 것이다.

서울에 한 밤에 차를 타고 다니면 폭주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그런데 그런 끓어오르는 욕망을 청소년들을 오토바이로 푸는데, 그것을 경찰들이 마구 단속을 해버리면 다른 곳으로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더 강력한 코드로 분절이 되어야 하고 말이다.

그래서 법은 계속 분절이 되어서, 왜 판사와 검사가 되기 힘드는고 하니, 그런 분절된 법들을 모두 다 알아야 하니 말이다. 기본법 말고, 그 기본법에서 분절되고 또 분절된 법들을 모두 다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판검사가 힘들고 어려우니 '영감님' 이라고 하면서 대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시대는 이제 거의 끝났지만 말이다.

◈ 들뢰즈님, 그러면 앞으로 미래는요?

이렇게 되면, 이 '천개의 고원' 이라는 책을 본 사람들은 이 들뢰즈에게 묻고 싶은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들뢰즈님, 그렇다면 이 사회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입니까?" 라는 것이 대표적인 질문이 되지 싶은데, 왜냐하면 진리라고 하는 것은 새롭게 이중분절을 하는 목표까지도 제시를 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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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9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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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