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20080111-(b)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4강자유게시판에베소서

20080111-(b)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4강

이름 : 오용익(IP:211.194.56.75)

에베소서 제 4강 (이 근호목사, 2008년 01월 11일(b), 서울의존교회)

‘나는 예수 믿고 살겠다’는 이것은 신앙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예수 믿고 살겠다’는 것은, 아까 한 목사님이 연기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나를 끌고 가듯이 구원해야 되는데 그것이 아니고, 내가 한 목사님을 졸졸 따라다니는 식으로 “예수님! 저를 구원해주세요. 저는 천국 가서 살고 싶어요”라고 하면서 백날 따라다녀도 그것은 구원도 안 되고 지옥 갑니다. 소용없습니다.

“그러지 마시고 집에 가 계십시오. 그러면 제가 알아서 구원하겠습니다.”

“싫습니다. 그러면 저는 언제 구원받는데요?”

이런 사람은 뭘 모르는 사람인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쫓겨난 죄인인 것을 인정하지를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에덴동산에서 쫒아낸 이상은 우리가 다시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그대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인정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진짜 예수님의 종소리가 들려왔을 때는,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나’를 살려주는 종소리가 아니라, 나를 없애버리는 나라, 내 생각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는 그런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에베소서 1:18

“너희의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기 보면 “너희의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 “소망”이 나옵니다. 이 소망은 내가 생각해 낸 소망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미리 준비해 놓은 소망이 우리에게 덮치게 되는 겁니다. 내가 생각한 소망은 내가 구원받는 것인데, 그런 것과 관계없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끌고 가는 그 세계에 들어가면, 더 이상 ‘나’라는 것을 더 이상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나’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계에 우리가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그게 새로운 소망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끌려가는데 끌려가면서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했습니까? 우리는 ‘나’만 생각한다는 것을 들추어내면서 끌고 가는 겁니다. 왜 자꾸 ‘나’만 생각한다는 것을 들추어내느냐 하면, 그래야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지, 내 쪽에서 소망을 가진다고 해서, 믿음 가진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리게 되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되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졸졸 따라다녔다는 것 때문에 구원되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 있는 이 주스가 예수님의 피라면,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받는데, 나는 ‘피가 어디 있지?’하고 찾아다니는 것으로 구원되는 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피, 하나님의 약속된 피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 하면, 구원될 자를 찾아와서 잡아당기는 그런 힘도 있어요.

예수님의 피에서 강력한 힘이 나옵니다. 이것을 가지고 ‘구원은 십자가의 능력이다’라고 하는데, 십자가의 능력에서 강력한 힘이 나오게 되면, 우리가 가만있어도 그 힘으로 구원받는데, 우리는 평소에 가만있지를 못하고,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까’하고 자꾸 설치는 겁니다. 설치니까 예수 믿는 내가, 도리어 예수님의 피를 이해 못하는 그러한 현상이 일어날 수가 있다는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꾸 “너 자신이 행한 것을 잊어버려라”고 자꾸 이야기 합니다.

자, 교회가 무엇인가? 이제부터 ‘교회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겠습니다. ‘교회가 무엇인가’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습니다. (그림설명) 저는 이 그리스도를 종(鐘)이라고 했습니다. 종에서 소리가 나오는데 이것이 성령이고, 여기 있는 이 종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소리가 땡, 하고 핏 소리가 울리면 그 핏 소리가 찾아갑니다. 종이 그리스도 몸이고 종소리가 성령이라면, 종에서 소리가 나와서 가는데, 이 성령은, (예수님의 피 안에 무슨 약속이 있느냐 하면) 반드시 창세전부터 예수님이 선택한 사람만 찾아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이 어떤 사람을 찾아갔어요. 찾아가면 그 사람은 성령에 의해서 다시 어디로 끌려오느냐? 여기 이 종(그리스도)으로 끌려오지요. 끌려오면서 이 사람은 뭘 느끼나 하면, 내가 구원받고자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계속해서 그것을 반복해서 확인당하면서 계속 끌려오는 거예요. 끌려가면서 “싫어! 싫어!” 막 하는 거예요. 내가 모르는 세계에 내가 왜 가느냐고 하는 겁니다.

그렇게 끌려가는데, (사실은 그 사람자체가 이미 그리스도의 몸이지만) 그렇게 끌려가는 그 자체가 예수님의 몸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가 보여주는 그 소망의 세계, 부활의 세계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 세계를 향하여 끌려 당겨지는 그런 사람을 말합니다.

그렇게 당겨지는 사람들이 교회인데, 이 사람을 못가도록 막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세상의 정치와 능력과 주권자, 이런 것들이 아무리 우리를 붙들려고 해도 예수의 부활의 능력은 그것보다 더 세기 때문에 능히 그것을 이기고 우리를 붙잡아서 끌고 가는 겁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정치를 좋아하고, 얼마나 내가 세상을 좋아하는지가 새록새록 자꾸 드러나는 겁니다.

에베소서 1:21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주께서 안주시는 구나. 내가 원하는 것을 안주시는 구나. 내가 소망하는 것을 주께서 주시지 않는구나.’ 그런 식으로 자꾸 나를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만 좋아지도록 끌고 가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교회라는 것은 그 안에, 세상의 어떤 권세나, 마귀나, 어떤 세력도 능히 이길 수 있는 그러한 집합체가 바로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 교회의 능력은 예수님의 핏 소리,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피만 바라볼 수 있는 그러한 단체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교회인데, 예수님의 능력으로 교회가 되었기에 몸이 떨어져 있어도 영은 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 바라보는 사람한테는 어느 교회든, 의존교회든 우리교회든 상관없이 그 전체가 하나의 그리스도 몸이 되어 있습니다.

문제입니다. 다음 중에서 그리스도 몸이 아닌 것은 무엇일까요?

1번) 나는 예수님의 종이다.

2번) 나는 목사다.

3번) 나는 집사다.

4번) 나는 그리스도 몸이다.

위중에서 그리스도 몸이 아닌 것은 몇 번 일까요? 정답은 네 개 다 그리스도 몸이 아닙니다. 앞에 무엇이 붙어 있기 때문에? ‘나’가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에덴동산에 쫓겨난 존재입니다. 쫓겨나도 마땅한데 왜 자꾸 쫓겨난 그 인간을 왜 그렇게 미련을 가지고 애착을 가지느냐 말입니다. 주님께서 쫒아냈을 때 쫒아냈으면 쫓겨나는 것이고 주님께서 새롭게 그리스도의 피로 모으면 그리스도 몸이 더 중요하지 내 몸이 안중요하거든요.

그리스도 몸이라는 말은, ‘쫓겨난 네 몸보다 부활의 내 몸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 몸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참된 목사냐 하면, ‘예수님의 몸만이 교회입니다’라고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종이 되지, ‘나는 목사다’하는 사람은 참된 목사가 아닙니다. 왜 그러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입니다.

‘나는 목사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쪽에서는 ‘나는 집사다’ 이렇게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여기에 이 그리스도 몸에 원래 ‘나’가 누구밖에 없습니까? 이것인 ‘나의 몸’이라고 붙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님밖에 없는데 거기에 ‘나는 목사다, 나는 집사다’라는 ‘나’가 거기에 왜 들어가느냐 이 말이죠. 그리스도 몸의 지체라고 하지요. 제 이름은 이 근호인데요. 제 손가락이 ‘나는 이 근*이다.’(이 근*은 제 동생이거든요) 이것은 웃기잖아요!

지금 여기 이 근호라는 몸이 있으면 그 몸의 모든 것은 지체(사지)입니다. 문어가 다리가 몇 개 입니까? 문어 다리가 여덟 개 아닙니까? 이 전체가 문어 몸인데, 이 문어 다리 하나하나가 “나는 목사인데 너는 집사야? 한번 붙어 볼까?” 이렇게 서로 싸운다면 전체 ‘나’가 따로 있고, 작은 ‘나’가 따로 있는 셈이 됩니다. 여기 작은 ‘나’(i)는 전체 ‘나’(I)한테는 없어져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나’라 하는 것은 지옥가도 마땅한 인간이었거든요. 지옥가도 마땅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간인데, 그 나의 이름을 없애고 주의 이름으로 구원하는 겁니다. 이에 어려워서 제가 이런 예를 드는 것인데 예를 들어서 더 어려워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자꾸 ‘나’를 생각하지 말고 잊어버리세요. 주님의 몸으로서만 있으면 그것을 된 겁니다. 주님께서 나를 잡아당기시는데 어떤 정치적 세력이나 마귀가 온다 해도 그것을 이겨 내는 힘으로 자꾸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는 겁니다.

잡아당긴다는 것을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실감해야 합니다. “나는 ‘나’만 사랑한다”에서 그것이 부서지고, “‘나’는 존재가치도 없다. ‘나’는 존재가치도 없다”는 쪽으로 끌려갈 때, 그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 몸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 그런 결과가 나옵니다. 그리스도 몸 앞에서는 “대체 어느 놈이야 내가 ‘나’인데 누가 ‘나’라고 해! 군기가 빠졌구먼!” 이런 고함소리가 들려올 때, 그게 이미 그리스도몸 안에서 사는 사람이라 이말 입니다.

“주님! 저, 이번에 수능 또 떨어졌어요. 아파트 꼭대기에서 뛰어내릴까요?”

“누구야? 누가 내 몸 안에서 또 따로 ‘나’를 챙기겠다는 인간이 누구야? 누가 시험 못 쳤대? 누가 시험 못 쳤다고 뭐라 해? 너는 죽어도 부활되는데 누가 내안에서 시험” 못 쳤다고 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에베소서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당겨주는 겁니다. 팍팍 당겨주는 겁니다. 당길 때 그냥 당기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뭐로 간주합니까? 아무리 내가 ‘나는 목사다, 나는 00이다’라고 해도 죽은 자로 간주해서, “어디서 죽은 놈이 자기를 생각한다고…빨리 와!” 하면서 죽은 자로 간주해서 자기 안에서 산자로 만드는 것, 그것이 예수의 피의 약속가운데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에베소서입니다.

이 말은, “네가 뭘 해도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다”는 말이죠. “네가 어떤 나쁜짓을 하고 어떤 착한 짓을 해도 그것은 구원받는 것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를 하든, 전도를 하든, 봉사를 하든, 설교를 하든지 뭘 해도 구원받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요. 왜냐하면 나의 구원은 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나’라고 따로 계신 그 ‘나’께서 ‘나’를 죽은 자로 간주하는 데서부터 시작되거든요.

“주여! 기도를 받아주실 줄 믿습니다.”

“에잇, 죽어라.”

“누구야! 날 때리는 게?”

“죽었으니까 때리지.”

“제가 왜 죽었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잖아.”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면 할 말 없는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채 다시 못 돌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뒤통수를 때리든지 말든지, “왜 때리십니까?”라고 할 말도 없습니다. 이미 죽은 자로 간주해놓고, 죽은 자로 간주하되 죽은 자들 가운데서 끄집어 내어넣고, “이제부터는 너는 ‘너’가 아니고, 네가 곧 ‘나’다” 하는 식으로, 자기 몸(사지)을 심어 놓는 겁니다.

그렇게 심어 놓으니까 마귀가 따라오면서, “쟤는요, 세 살 때 바지에 오줌 싸고요. 17세에는 담배피우다가 학교에서 정학당하고요. 24세에 사람 칼로 찔러서 교도소에 가고요.” 송사합니다. 백날 그래도,

“어이, 마귀!”

“예!”

“쟤는 원래 죽었거든? 됐거든? 그만 해라! 네가 이야기 안 해도 나는 원래 쟤를 죽은 자로 간주하기에 네가 그렇게 송사하고 고소해도 ‘누가 정죄 하리요.”(롬 8:34) 저를 위해서 피를 흘린 것이 ‘나’인데, 피 흘리지도 않은 네가 왜 건방지게, 피 흘린 내가 건드리지 않겠다는데 네가 왜 말이 많아?”

그렇게 해서 주님께서는 자기 몸을 구성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려운 말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생성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점점 만들어져 가는 거예요. 부활만 있다면 그리도의 몸은 언제든지 만들어집니다. 죽은 자도 살리는 그 능력만 있다면,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이미 죽은 자로서 하는 짓이기 때문에, 우리를 따지지 않습니다.

나이도 따지지 않고 오케이, 병도 묻지 않고 오케이, 무엇도 묻지 않고 무조건 오케이, 아무것도 묻지 않고 오케이입니다. 세상에 이런 기쁜 소식이 어디 있습니까?

“주여! 헌금 좀 할까요?”

“헌금은 누가 하는데?”

“제가 하잖아요.”

“또 네가 거기서 왜 튀어 나오나?”

“제가 헌금할 돈 도박하다가 날렸거든요.”

“날리든 말든, 네가 헌금 할 돈 가지고 계 돈 붓다가 날리든 말든, 그것하고 구원받는 것 하고 무슨 상관이냐? 그것은 네가 한 짓이잖아. 네가!”

에덴동산에 쫓겨났다는 것은 그것보다 더 한 짓이라도 하는 그것이 바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거예요. 아예 묻지를 않습니다. 묻지를 않는 것을 왜 자꾸 우리 자신에게 묻습니까? 그런 두려움이 무엇 때문에 생긴다? 나에게 무엇이 있기 때문에? ‘나’가 있는 거예요. 이것을 어렵게 하면, 이것을 ‘대자존재’(對自存在)라고 하거든요. 내 안에 ‘나’가 있어요.

내 안에 ‘나’가 있어서 내가 잘하는지 못하는지 이것을 감시하는 ‘나’가 따로 있어요. 이것을 대자존재라는 어려운 말로 하는데(이것은 몰라도 되고요), 내 안에 ‘나’가 있어서 현재 나의 미흡한 것, 모자라는 것을 채워주는 ‘나’를 상상합니다. 이게 바로 비전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에디슨 같은 발명가가 될 거야.’ 이 ‘발명가가 될 거야’라고 하는 ‘나’, 그리고 발명가가 되고 싶은 현재의 ‘나’, ‘발명가 안 되면 안 돼. 그러니까 공부해야 돼!’라고 날마다 부추기는 ‘나’, 이 두개의 ‘나’가 있다는 말이죠.

이렇게 둘 다 있다는 말은 뭡니까? 이 둘 다 에덴동산에서 천번 만번 쫓겨나도 마땅한 둘다 같은 인간(죽은 놈)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교인들은 어떻게 합니까? 교인들은 성경말씀을 보고 난 뒤에 ‘아! 저걸 지켜야 구원 받는구나’합니다. 그러니까 못 지키고 있는 ‘나’가 있고, 그것을 잘 지키는 ‘나’를 만들어서 “얘야, 기도할 때, 5초가 뭔고? 적어도 30분은 해야지.(공중기도는 줄여서 한 3분만 하고) 그리고 헌금할 때는 빳빳한 돈으로 해야 되고, 전도는 일 년에 한명씩 해야 신자답지. 교회청소 하면 같이 하고, 설거지도 같이 하고. 그것을 지켜야 하늘나라에서 복을 받지”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 둘이 서로가 쌍둥이인데요. 이 둘 다를 누가 만들어 냈습니까? A라는 ‘나’(상상하는 나)는 ‘B’라는 나가 만들어 낸 겁니다. 철학에서는 아 둘을 ‘자기’와 ‘자아’로 구분하는데 이런 어려운 말은 다 알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되면, 예를 들어서 “예수 믿으라”고 하게 되면 ‘나’가 있다가,

“어이, 지옥 가는 ‘나’!”

“왜?”

“예수 믿어!”

예수 믿는 ‘나’를 만들어 냅니다. 예수 믿는 ‘나’를 만들어서 예수를 안 믿었던 ‘나’를 대신해서 예수 믿는 ‘나’가 하나님 앞에 나서서 ‘나’를 천국에 넣어주는 발상을 하게 됩니다. 그게 엉터리입니다. 새벽기도회 때는 그것을 믿었는데, 아침 9시에는 그게 안 믿어집니다. 애들 등교하는데 신경 쓴다고 정신이 다 팔립니다. 낮 12시에는 또 믿어집니다. 오후 2시에 또 안 믿어집니다. 왔다 갔다 하다가 남편과 대판 싸우게 되면 예수고 뭐가 와장창, 안 믿어지는 거예요. 안 믿어지는 그 순간에 만약 주님이 재림하시면 지옥 갑니까?

여러분은 어때요? 지금 혹시 이렇게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꾸 ‘나’말고 또 다른 ‘나’를 상상해서, 내가 ‘나’를 꾸짖고 벌세웁니다. ‘똑바로 하란 말이야, 똑바로. 목사님의 설교를 안 들었어? 신앙생활 제대로 하란 말이야’라고 자기가 자기한테 마구 꾸짖어요. 여러분! 내가 나한테 꾸짖지 마세요. 우리는 꾸짖을 권리도 없고, 자격도 없습니다.

왜냐? ‘나’라는 것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고서 처음 생긴 거예요. 선악과 따먹을 때 처음 생긴 거예요. ‘나’라는 것을 생각하는 자체가 죄가 되는 거예요. 이것이 참 어려운 말입니다. 어린이들이 이것을 알아야 될 텐데요. 선악과를 따먹을 때 비로소 ‘나’라는 것이 처음 생겼어요. 처음 생겨서 ‘나’를 아니까, ‘나’를 어떻게 관리해서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려보내려고 하니까 얼마나 힘이 듭니까? 힘은 힘대로 들어도 이게 되지를 않습니다.

에베소서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여기 보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것이 언제 죽은 겁니까? 선악과 따먹을 때 이미 모든 사람은 다 죽었어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 아담의 자식들은 전부다 죽은 거예요. 안 죽었다고 하지 마세요. 안 죽었다고 하면 안 됩니다. 이미 다 죽은 겁니다.

죽은 인간이 자기 나름대로 한번 살아보려고 여호와를 찾고, 예수를 찾고, 부활을 찾고, 에베소서를 공부하고, 별짓을 다해요. 다 소용없습니다. 죽은자인 ‘나’를 살리는 것은, 예수님의 피가 나를 구원하지, 에베소서를 공부한다고 해서 그것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닙니다. 상당히 희망적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상당히 절망적이죠. 내가 해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니까 참 절망적인데, 반대로 안 해도 될 일을 되게 하시니까 무척 희망적이죠. 희망 쪽입니까, 절망 쪽입니까? 어느 쪽입니까?

바라기는 희망 쪽이기를 바랍니다. 내가 안 해도 될 일이 이미 되어버린 것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가지고 '아담 안에서는 죄로 인하여 이미 죽었지만, 예수 안에서는 이미 살았도다’ 그 말입니다. “목사님! 저는 아담 때문에 예수 믿고 무슨 짓을 해도 끝내 구원 못 받게 되었으니 책임지세요!” 제가 하는 말이, “당신은 왜 아담 안에 있는 것만 생각하느냐?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창세전부터 구원받았는데, 자꾸 아담 안에 있는 것, 해도 안 되는 것만 왜 자꾸 생각하느냐 그 말이죠. 에베소서 1:4에 있는 말씀,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이 말을 제가 설명하기 위해서 거의 1시간 30분 동안 나름대로 쉽다고 여겨지는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에게 무슨 선행을 감행해도 그게 다 소용없다는 이야기를 제가 하고 있는 겁니다. 소용없어도 우리는 뭔가 아담의 속성을 받아서 자꾸 부지런을 떨어요. 무슨 부지런 입니까?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 지금보다 더 훌륭하고, 예의바르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기도하는대로 응답받고, 하는 것마다 복을 받고, 자꾸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원하는 거예요.

자, 교회 나왔다. 기도도 못했는데 기도하고 난 뒤에 아이의 성적이 쑥쑥 올라간다. 전도도 못했는데 전도하고 난 뒤에 갑자기 월수입이 200만원이 더 늘어난다. 늘어날 수 있습니다.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맞습니다. 맞고요. 맞는데, 그 은혜는 내가 기도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고, 내가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면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께서 복 주신다는 것을 알라는 말이죠.

내가 기도해서 수입이 늘어난 것이 아니고, 이미 나는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는 증거로서 그러한 혜택이 주어진 겁니다. 200만원 더 들어왔는데, 갑자기 집에 불이 나서 400만원이 나갔다고 할 때, 400만원 나간 것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 예수 안에 있는 부활이 돈 400만원보다 더 귀한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불이 나서 400만원을 태우는 겁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구원받고, 그냥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무슨 짓을 해도 지옥 가는 거예요. 참 정리가 잘 되었습니다.

1번과 2번의 차이를 이야기하겠습니다. “당신은 누구를 의지합니까?”라고 질문할 때, 1번) “나는 나를 의지 합니다.(다른 말로 나는 나를 믿습니다)” 2번) “나는 예수 믿는 ‘나’를 의지합니다.” 1번과 2번의 차이가 납니까, 안 납니까? 차이가 안 납니다. 1번과 2번의 차이가 안 납니다. 똑같은 거예요. 1번은 지옥가고 2번은 천당 가는 줄 압니까? 아닙니다. 둘 다 지옥 갑니다. 둘 다 자기 자신을 믿는 겁니다.

오늘 강의한 것이, ‘나’라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겁니다. 우리는 ‘나’가 있기 전에 이미 아담 안에 있었고, 그리고 나를 생각하기 전에 이미 창세전부터 ‘예수님 안에’ 있었습니다. 창세전부터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나’를 생각하든, 안하든 관계없이 끌려가듯이 구원받고, 예수 안에서 선택받지 않은 사람은 백날 자기 생각만 하다가, ‘예수 믿습니다’ 하다가 그냥 지옥 가는 거예요.

“예수 믿었는데 왜 지옥 보내십니까?”

“누가 믿었는데? 너는 예수 믿는 ‘너’를 믿었잖아”

결국 예수 믿는 것은 핑계고, 나의 믿음을 믿는 것 밖에는 안 되잖아요. 결국 그것은 가짜지요. 왜 자꾸 ‘너’ 생각이 전부냐는 말이죠. 물론 예수 믿는 사람들도 ‘나’생각 합니다. 하지만 항상 떠오르는 생각이 뭐냐? 에베소서 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이미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고”, 허물과 죄로 죽은 놈이 ‘나’를 생각하는 그것도 이미 죽은 놈이라고 인정하자는 겁니다.

‘예수 믿습니다’해도 맨 죽은 놈이고, ‘예수 안 믿습니다’해도 맨 죽은 놈이고, 하여튼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어떻게 행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부터 예수 안에서 우리를 선택했다는 겁니다. 그게 이상스럽게 믿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이 행하신 그 종소리가 땡! 땡! 울려서 “어? 들린다! 들린다! 이게 무슨 소리고? ‘창세전에…’ 어? 들려! 들려! ‘예수 안에서…’ ‘너를 선택했다’ 아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지금 저 혼자 발광하는 것 같은데, 성경을 보고 감사와 기쁨이 나와야 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고 ‘내가 이렇게 바르게 살아야지’ 하면 그것은 두려움입니다. ‘나’만 생각하면 뭐가 생긴다고 했어요? 성경보고 뭐가 생겨요? 두려움이 생기면 안 됩니다. 성경보고 두려움이 생긴다는 말은, 성경보고 자기만 생각한다는 뜻이에요. 종소리가 안 들린 거예요. 자기가 종입니다.

여러분! 제발 에베소서 2;1을 믿읍시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제발 믿어 주세요. 죄와 허물로 죽었습니다. 노인들 몇 년 더 살다가 죽습니다. 옆에 있는 식구들이 울잖아요. 울기는 왜 웁니까? 처음 날 때부터 죄와 허물로 죽은 사람이 자기의 본색을 드러 낸 것뿐입니다. 아직도 덜 드러냈습니다. 둘째 사망인 지옥에 가봐야 제대로 드러냅니다. 첫째 사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옥 가는 것(둘째사망)이 더 무섭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물어 봅시다. 창세전부터 진짜로 내가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에베소서 2:1에 있는 대로 “너희는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것에 대해서 인정하면 됩니다. ‘천사같이 산 나를 왜 죽이고, 내가 왜 죄인이야?’라고 하면서 근본적인 죄에 대해서 모르면, 예수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근본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죄인이다. 내가 근본적으로 에덴동산에 쫓겨났기 때문에, 쫓겨난 그 동네에서 백날 춤추고 탈출을 시도해도 그 동네가 그 동네이기 때문에, 쫓겨난 동네이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그것을 인정하자 이 말이죠. 인정하는데 그 다음에 종소리입니다.

에베소서 2:4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이겁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가 발악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외부에서 뭔가 와야 되고 덮쳐야 됩니다. 이런 것은 말로 해서는 안 되고, 양푼이나 양동이에 피를 담아다가 확, 뿌려야 돼요.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누가 했습니까? 모세가! 모세가 양푼에 피를 담아서 뿌렸습니다. “이래도 못 믿겠나?” 그런 뜻입니다.

출애굽기 24:6-8

“모세가 피를 취하여 반은 여러 양푼에 담고 반은 단에 뿌리고 언약서를 가져 백성에게 낭독하여 들리매 그들이 가로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제가 한국교회에 외치고 싶은 것은, ‘피만 있어도 오케이, 피로서 끝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피만 있어도 충분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래서 올해 책을 하나 쓰려고 하는데 제목을 이미 정했습니다. 제목은 『피』입니다. 그래서 서점에 가서 “『피』주세요.” 그러면 됩니다.

‘피’만 있어도 되는데 사람은 ‘나’가 있잖아요. “목사님, 저는 어떤 행동을 해야 구원받습니까?” 꼭 앞에 무엇을 내세웁니까? 내가 어떤 행동을 ‘나’에게 가미할 때, 가미된 그것이 나를 살린다고 보는 겁니다. 여러분, 이미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주제에, 다시는 돌아올 수 없도록 이미 가로막혀진 주제이기에 내가 어떤 행동을 해도 우리는 안 됩니다.

그냥 외부에서 우리에게 양동이로 덮쳐진 피,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이게 제 이야기가 같습니까?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장의 말씀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능력으로 너희가 구원을 얻었으니 이것은 사람의 지혜가 아니고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의 지혜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어리석다고 보지만 구원얻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다’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8-2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 금요일 눈 내리는 밤에 다른 것 다 잊어도 이것 하나 잊지 마세요. 한 글자 입니다. 뭡니까? ‘피.’ 이것을 분석하면 예수님께서 홀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주님, 혼자서 구시렁거리면서 뭐하십니까?”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대신 죽으심’입니다. 피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우리보고 뭘 하라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다 대신 감당하는 거예요.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께서 우리대신 버림을 받으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을 얻은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주님께서 열심히 예수님의 피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옆에서 우리가 “주여! 주여! 우리가 뭘 할까요? 전도? 헌금? 주일성수? 뭘 할까요?” 이렇게 촐랑대고 까분다는 것은 피를 모독하고 있는 거예요. “당신의 피보다 내 종교적인 행함이 더 세다” 이거 아닙니까?

부흥된 교회, 수천 명 모인 교회보다, ‘피’가 더 중요합니다. 애가 대학에 수석 합격하는 것보다도 뭐가 더 중요합니까? ‘피’가 더 중요해요. 수석합격이 나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 애가 수석합격 했다고 해서 그 수석합격 한 그것이 그 애를 죄인에서 의인되게 하지를 못합니다. 그것을 에베소서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성경의 이야기를 안 들으려고 눌러버립니다. 성경만 애를 먹지요. “이게 어디서 말을 하려고해. 말하지 마!”하면서 눌러 버립니다. 성경을 안보기 위해서 갖은 애를 다 씁니다. 그러나 그러한 권세와 힘조차도 능히 부활의 능력은 그것을 제칩니다. “어디서 앙탈이야? 내가 데려간다면 가는 거야.”

그래서 아까 한 목사님과 제가 연기한 것처럼, 한 목사님(성령)은 피쪽으로 나(성도)를 데려가려고 하는데, 나는 뭐가 있습니까? 내 안에서 내가 제일 중요합니다. 끌려가면서도 우리는 뭘 바라봅니까? ‘나는 예뻐야 되는데, 나는 훌륭해야 되는데, 나는 대범한 인간이어야 하는데…’ 하면서 이런 것으로 자기를 으스대는 거예요. 그러니까 맨 날 생활은 뭡니까? 끌려가면서도 방향은 무슨 쪽으로? 세상 쪽으로. 그 순간을 사진으로 찰칵, 찍으면 그게 성도의 모습입니다.

고분고분 따라가는 성도는 없습니다. 전부 다 아담의 속성이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이끌어 주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세상에서 내가 진리라고 보는 겁니다. 잘되어 보려고, 대단한 존재인 것을 남에게 과시해 보려고 합니다. 그것을 ‘상호인정’이라고 합니다.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교회에서 착하고, 사회에 나가서 착하고, 사업에서 성공하는 것은 다 뭐하기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그럽니다.

인정받기 위해서 사는데 제일 싫어하는 것이 뭐냐? 실패하는 것을 제일 두려워합니다. 인생실패, 사랑실패, 사업실패, 돈에 실패, 결혼실패, 목회실패, 성적실패, 쌍꺼풀 수술에 실패 등등, 실패를 두려워하고 싫어합니다. 실패를 왜 싫어하느냐 하면, 나는 ‘나’임을 인정받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그때 뭐라고 합니까? “(놀고 있네) ‘죄와 허물로 죽은’인간이 별 짓 못 하겠나”라고 합니다.

자, 그렇다면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이기에 그것을 죽었다고 할 수 있는가?

에베소서 2:2,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좆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게 무슨 이야기입니까? 구원받는 사람도 너나 할 것 없이 똑같은 인간인데, 그 이유가 뭐냐? 우리 속에서 뭐가 올라온다는 말입니까? 욕심이 올라옵니다. 욕심은 이 세상에서 내가 인정받고 싶은 욕심입니다. 공부 잘해서 인정, 사업성공해서 인정, 목회 잘해서 인정, 뭔가 인정받고 싶은 거예요. 그게 뭐냐? ‘불순종의 자식들’의 모습이고 ‘악한 영’이 그렇게 우리를 만드는 거예요.

문제 나갑니다. 악마가 셉니까, 우리를 이끄시는 주님이 셉니까? 주님이 더 세지요. 그러니까 악마를 물리쳐라 할 것도 없어요. 우리 속에 악마의 욕심이 오더라도 우리가 본래 그런 인간입니다. “마귀야! 뜯어 먹어라. 나는 본래 그런 인간이다.” 그것도 모르고 부적을 붙이고, 그런 것과 똑같은 짓인지도 모르고 “예수 이름으로 물러가라”합니다.

다시 이야기 합니다. ‘나’를 생각하면 무엇이 생긴다? 두려움이 생긴다. ‘피’를 생각하면 뭐가 생긴다? 기쁨이 생긴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된다? 그냥 성질대로 살아야 됩니다. 왜 그 자체가 은혜니까. 성질대로 살게 해서 예수님께서 누구 때문에 죽었는가를 몸소 깨닫게 되는 거예요. ‘나’때문에 죽은 겁니다. 나는 ‘나’의 책임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거든요.

나는 ‘나’가 제일 좋아요. 우리 자식, 우리 남편, 우리 아내 다 핑계입니다. 예수님, 하나님, 다 핑계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찬송가에도 있잖아요. 우리는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를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주 예수 자리에 ‘나’를 집어넣어야 됩니다. 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나는 제일 귀합니다.

그런데 구원받는 것은 뭡니까? 이런 나를 ‘피’로 구원합니다.

에베소서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으니.”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다. 제가 강의하면서 ‘왜 피냐’ 하는 것을 아직 이야기 안했습니다. 어찌되었든 여러분이 아셔야 할 것은 ‘피’입니다.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지, 내가 인간성 뜯어 고쳐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나에게 행동을 가미해도 다 쓸데없는 세월보내기요, 시간 때우기였습니다.

교회가 뭐라고 했습니까? 모여서 봉사하면 그것이 교회입니까? ‘피’에 의해서 이끌림 받는 사람이 교회입니다. 교회라는 것은 엉뚱한 인간들도 많이 오지요. 성질 더러운 인간! 하지만 그 사람이 만약에 피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같은 문어발입니다. 왜냐하면 너는 잘났고, 나는 못났냐는 ‘너’ ‘나’가 무시당하는 세계가 바로 교회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뭐가 없다고요? ‘너’ ‘나’가 없습니다. ‘너’ ‘나’가 없는 ‘우리’만 있습니다.

‘너’ ‘나’가 모여서 ‘우리’가 되는 것이 아니고, ‘너’ ‘나’를 묻지도 않고 그냥 예수 그리스도 하나로 ‘우리’가 되는 그런 세계가 교회가 되는 겁니다. 교회는 기둥이 없어야 됩니다. 기둥 하나 있으면 그것이 방해가 됩니다. 기둥 없어도 하나가 됩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의 피가 뭐냐? 예수님께서 말을 좋게 해서, “하나님!” “왜” “창세전부터 택한 사람들이 의존교회에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로 하면 “알았어. 내가 구원해 줄게”라고 얼마든지 말로 답변할 수 있는데, 왜 예수님은 말로 하지 않으시고 구태여 피로 이야기를 하느냐? 피 속에 하나님의 진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피 입니다. 요한계시록에도 나오지요.

피라는 것은 ‘갈 때까지 한번 가보겠다’는 겁니다. ‘죄 값에 대해서는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진노가 담겨 있습니다. 피를 본다는 것은 ‘내가 그렇게 진노 받아야 마땅한 인간입니다’라는 것을, 그 피를 보고 새삼 확인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제가 “주님, 저 어때요?” 그럴 때 면상에 뭐가 털썩 오는 거예요. “이게 뭐 꼬?” 하니까 “아나, 먹어라. 진노의 피다”하는 겁니다. “저 괜찮은 인간이죠?”하고 있는데 앞에 뭐가 흥건히 있습니다. 예수의 흘린 피 입니다.

나는 그동안 ‘나’를 잘 키워 왔다고 생각했는데, 내 앞에 있는 것은 예수님의 흘리신 피가 흥건히 있더라는 말이죠. ‘나는 진노 받아야 마땅한 저주받은 죄인’인 것을 알려주는 것은 이 피 외에는 없어요. 노아 홍수가 난 뒤에 그들이 살았던 것은, 누가 그 저주를 대신 할 피를 흘렸기 때문에, 그 피를 보고 하나님께서는 ‘다시는 이 세상을 물로서 심판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에서 여러 가지 설교를 듣지만 ‘피’를 이야기하는 설교가 복음입니다. “열심히 합시다. 하자! 하자! 하자!” 이런 설교 말고, “피! 모든 인간은 저주 받아야 되지만, 이 피, 대신 진노 받으신 그 은혜로 인하여 이제는 구원을 받았다”는 겁니다. 에베소서 2:4에서 그것을 뭐라고 합니까? ‘긍휼’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2:4,5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심입니다. ‘하나님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인 너희를 불쌍히 여겨서 큰 사랑으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리스도께서 그냥 하늘에서 낚싯대로 건진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이 땅에 직접 오셔서 저주받은 사람과 함께 저주를 받으시고, 같이 저주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함께 자기 어깨에 메시고 데리고 함께 일으켰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혼자 부활되신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대신 용서했던 그 사람도 예수님 부활될 때 같이 부활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겁니다. 그래서 ‘함께’ 살았는데, 그 다음에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이것을 알게 하려면, 양동이에 돼지 피든 뭐든 피를 잔뜩 담아서, 의존교회 천장이며 벽이며 전부 다 튀기도록 여러분의 머리위에 일괄적으로 다 부어버리는 겁니다. 다 부어버리면 여러분의 얼굴에 무엇이 묻어 있습니까? 피가 묻어 있겠지요? “어이, 김 집사님, 요즘 장사 잘 됩니까?” 하고 보니까 얼굴에 뭐가 묻어 있습니까? 피가 묻어 있습니다. 장사 잘되어도 형제이고, 못되어도 형제입니다.

피가 묻어 있으니까, 대학시험 떨어져도 형제이고, 안 떨어져도 형제가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보고? 개인의 자질이나 능력이 어떠냐 하는 것을 묻지 않고, 뭐만 보고 교회다? 저주에서 벗어나게 한 그 긍휼의 피만 바라보면 그게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교회에서 ‘나는 목사다’하고 나서면 그것은 이단이죠. ‘나도 피만 믿습니다’라고 나와야죠. ‘나도 피만 바라보고 이 강단에 섰습니다’라고 나와야죠. ‘나는 목사다’ 이렇게 나오면 ‘너는 뭔데?’ 이렇게 나오죠.

‘너’가 있으면 뭐가 됩니까? 또 ‘나’가 되어 버립니다. 너는 ‘너’ 되면서 나는 ‘나’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너가 ‘너’로 탁 튀어 나오면 나도 ‘나’로 탁 튀어 나오지요. 그런데 교회는 ‘너’ ‘나’를 없애려면 그것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피’가 있으면 ‘너’도 필요 없고 ‘나’도 필요 없고 전부 다 ‘피’안에서 묶이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스피노자는 공통통념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공통통념. 이 말은 여러 사람이 함께 있어도 여러 사람이 같이 느끼는 개념이 있다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보면 ‘예수님 오실 때까지 예수님의 죽으심을 날마다 기념하면서 성만찬을 했다’고 하죠. 그러니까 교회가 열 명이면 열 명 모두 다 공통통념이 뭡니까? 오직 그 얼굴에 피가 발렸다는 그것이 공통통념으로서 하나로 묶어주는 겁니다.

‘피로 인하여 이미 우리는 창세전부터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이다’하는 것을, 그 피를 믿는 것 때문에 서로 통념이 되고, 소통이 되는 것입니다.

“당신도 피 믿나? 나도 피 믿는다.”

“당신은 어떻게 피를 믿었지?”

“내가 피를 믿겠나? 나는 피 안 믿는다. 그런데 주님의 종소리(성령이 오심)가 들려오니까 내가 믿게 되었다.”

“그게 어디 나오는데?”

“에베소서 1장에 나오더라.”

우리는 이 성경을 보면서, 예수님의 피(복음)를 전파하고, 복음 때문에 살았다는 것을 함께 고백하는 그러한 무리들이 진정한 교회입니다. 교회 숫자 적다고 지옥 보내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숫자 많다고 천국 보내는 하나님도 아니십니다. 교회 다니면서 이 교회에서 ‘나’가 인정받고자 애쓴다면 그 사람은 크게 교회를 오해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인정받지 말자’가 아니라, 인정받을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 교회입니다.

‘날 알아줘’ 할 필요도 없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혼해도 교회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이혼 했다고 누군가 수군거려도, ‘내가 이혼 했냐, 안 했냐’를 보고 오는 것이 아니고, 뭘 보고? 이혼해도 구원받는다는 그 피, (이야기가 좀 이상하게 들립니다만, 이혼하라는 분위기처럼 되어서 좀 이상합니다만), 이혼할지라도 상관없이 구원되는 그 피, 결혼을 세 번씩이나 해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피만 보고 천당 보내주는 그 피!

너무 쉬워서 거짓말 같지요. 못 믿겠지요. 그 정도로 우리는 이미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존재입니다. 믿을 것은 뭐밖에 없습니까? 종교? 기독교 이런 것을 믿지 마시고 예수님이 흘리신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이것이 바로 피로 값 준 그 교회가 (바라기는) 이 교회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자꾸 우리 생각합니다. 내가 얼마나 성실 하냐, 내가 얼마나 훌륭한가, 남들이 나보고 뭐라고 수군거리느냐, 맨 날 하루 24시간 생각하는 것이 ‘나’, 내 남편, 내 아내, 내 자식 그리고 내 사업, 내 목회, 내 교회, ‘나’가 항상 들어가는 이 부질없는 짓들을 평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질없는 짓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런 짓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피’로 말미암아 용서를 해주셨으니 이제부터 피만 바라보고 살 수 있는 저희들 삼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599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6,192 우리교회 [일반] 개혁이라는 이름의 독-정낙원 목사님의 글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08-01-31
6,191 묻고답하기 개혁이라는 뱀의 독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08-01-31
6,190 우리교회 사 45: 23-25 (하나님의 맹세) 이사야 최고관리자 08-01-30
6,189 자유게시판 06 대구강의 14 - 지옥의 하나님 15 레위기 최고관리자 08-01-30
6,188 묻고답하기 이상규 집사님 테이프 주문은 이렇게 - 최고관리자 08-01-28
6,187 우리교회 [주보] 2월 3일 주보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8-01-28
6,186 우리교회 삿 6: 7-10 (구원의 정신) 사사기 최고관리자 08-01-27
6,185 우리교회 아가서 2007 강해 파일정리 아가 최고관리자 08-01-27
6,184 우리교회 아가서 2007 강해 파일정리 아가 최고관리자 08-01-27
6,183 설교 요한계시록22장 8- 9절 제목 : 사도와 천사와 성도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8-01-27
6,182 우리교회 계 22: 8- 9 (사도와 천사와 성도)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8-01-27
6,181 강의 광주 08년 1월 25일 강의 빌레몬서 빌레몬서 최고관리자 08-01-26
6,180 자유게시판 06 대구강의 13 - [물질과 기억] [신학] 최고관리자 08-01-26
6,179 묻고답하기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 - 최고관리자 08-01-24
6,178 우리교회 사 45:20-25 (다른 신은 없다) 이사야 최고관리자 08-01-23
6,177 우리교회 이사야 중간 정리 2 (91-123강) 이사야 최고관리자 08-01-23
6,176 우리교회 이사야 중간 정리 1 (1-90강) 이사야 최고관리자 08-01-23
열람 ➜ 자유게시판 20080111-(b)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4강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08-01-23
6,174 자유게시판 광주강의(07. 12. 21) 32-2 로마서 최고관리자 08-01-22
6,173 자유게시판 아주 ㅡ속이 시원한 글이라 퍼가지고 왔습니다. [신학] 최고관리자 08-01-22
6,172 자유게시판 안녕하세요...자료 하나 부탁드릴려고 합니다.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8-01-22
6,171 자유게시판 06 대구강의 12 - 지옥의 하나님 14 로마서 최고관리자 08-01-21
6,170 자유게시판 20080111-(a)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3강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08-01-21
6,169 묻고답하기 두 날개의 정체? 마태복음 최고관리자 08-01-21
6,168 자유게시판 2008년 십자가마을 겨울 수련회 총정리 (시편: 나와 저희) 시편 최고관리자 08-01-20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