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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광주강의(07. 12. 21) 32-2자유게시판로마서

광주강의(07. 12. 21) 32-2

이름 : 서경수(IP:116.37.101.23)

광주 강의(07. 12. 21) 32-2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종교라 할지라도(하나님 믿는 것, 예수 믿는 것 그것도) 아무리 바깥에 성경이란 게 있어도 일단 그것이 나에게 오면 뭐가 된다고 했습니까? 재해석이 되어서 나의 언어체계 속에서만 움직이죠. 바깥에 성경이나, 경전이나, 부처의 말이나 어떤 좋은 말이 있다 할지라도 나에게 오면 나의 언어체계가 있고, 나의 언어체계는 나의 욕망의 지배를 받습니다. 왜냐하면 내 주체니까.

주체가 욕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욕망이 그때그때 주체를 만들어 내요. 이 주체가 늘 바뀌어요. 나도 몰라. 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라요. 다만 내 욕망이 주체를 만들고, 나의 주체를 만들기 위한 욕망은 그냥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고 타인을 만날 때, 내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내가 어떤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 경험에 준해서 다시 내가 어떤 몰골로, 일시적이지만, 한시적인 주체로 활동할지는 모르지요.

얌전한 사람도 군대에 가 보세요. 개판됩니다. 남자는 군대 갔다 와야 인간 된다고 하는데 이 말은 틀렸어요. 군대 가서 인간 되는 것이 아니고 군대에 있을 때만 인간이죠. 군에서 나오면 마찬가지입니다. 군에 있을 때는 겸손하지만 제대하고 나면 마찬가지에요.

주체는 뭐가 지배한다? 타인의 욕망이 지배를 하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뜻, 예수님의 뜻이라고 해도 일단 나에게 들어오면 예수님의 뜻, 하나님의 뜻이 나를 장악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원하고 내가 즐길 수 있는 그런 쪽으로 그 말씀을 유용하겠지요. 엉터리로. 나쁜 짓 해놓고도 “이것은 주의 말씀대로 했다.” 이렇게 자꾸 변명하겠지요.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이야기하니까, 목사들이 그렇잖아요. 목사들이 신앙생활 안 하고, 말씀에 관심이 없고, 목사들의 관심이 뭐냐 하면 자기 교회 소유하는 것이 목사의 관심이잖아요. 교회가 커는 것이 자기 상상계가 커지니까. 하나의 가게로 보니까. 그러니까 무슨 짓을 해도 사람 끌어 모으면 되지요. “3년 만에 부흥됐다. 하박국에 나오잖아. 교회 부흥시켰잖아. 그러니까 나는 주의 종이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고 가게도 마찬가지고 뭐든지 자기가 기쁘고 즐기는 쪽으로 되면 그것이 자기 안에 진리체계가 돼요.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는 관계없어. 성경이 무슨 소리를 했든 일단 성경이 나한테 들어오면 나를 위한, 남을 위한 것이 아니고, 교회를 위하고 목사를 위한 것도 아니고, 예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내가 되는 거예요. 한국교회가 다 이렇잖아요.

왜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가 하면, 전부 자기를 위해서. 자기 욕망, 자기 즐거움, 자기 향유를 위해서. 그럼 왜 즐기는가? 아까도 말했지만 그 답은 없어요. 내가 즐겁다는데 답변이 있을 수가 없어요. “나는 그걸 왜 원하지? 참 바보야!” 그러면서 하고 있는 거예요. 도박처럼.

도박을 왜 합니까? 이유가 없어요. 강원 랜드에 가면 엉망진창이랍니다. 전당포에 들락거리고. 다 망하고 해도 또 가요. 왜 가느냐? 모르지요. 그냥 내가 원하니까 가는 거예요.

여기서 ‘자아’가 ‘자기’와 달라요. ‘자아’라는 것은 경험에 의해서 재수정 된 것을 ‘자아’라고 하고, 그런 ‘자아’를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주체를 가지고 ‘자기’라로 하는 겁니다. 철학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요. 자아와 자기가 달라요.

그래서 자아는 늘 다르고, 늘 다르면서도 “저것은 나 맞아.” ‘나 맞아’ 라고 하는 그 ‘나’ 이것을 즉자존재라고 하는데, 이것을 자기라고 이야기해요. 이것은 어려운 거니까 이정도 하고, 인간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밖에 모르는 그런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간이 어떻게 구원 되는가 하는 것을 한번 살펴봅시다. 참 골치 아프지요. 이건 성경을 줘도 전부 자기 욕망을 위해 해석하니까 이건 어떻게 해도 인간 안 되겠지요? 14절에 보면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 이겁니다. 이게 구원입니다. 이게 구원이에요.

이게 구원이고, 복음이고 기쁜 소식인데, 기쁜 소식과 기쁜 소식 아닌 것의 차이점이 뭔가 하면, 내 구원 문제를 내가 해결하는 것은 기쁜 소식이 아니에요. 이건 자기 발광이에요. 자기 욕망이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일체 인간의 실천력을 아예 보지도 않으시고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기를 주심” 여기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 8장에도 나옵니다.

주심으로 어떤 결과가 있는가? 로마서 8장을 봅시다. 3절에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그 다음 33절 다 같이 읽어봅시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이 내용이 이렇습니다. 일단 우리를 빼세요. 우리를 여기 집어넣으면 해석이 안 돼요. 우리를 집어넣으면 누구를 위한 해석이 돼요? 나라는 주체를 위한 해석이 되는데 이것은 엉터리 해석입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있는 자리에 자기 아들을 내어주었어요. 우리 자리에 누가 덮칩니까? 아들이 덮치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자리에 아들을 덮쳐놓고, 그 다음에 “누가 송사하리요” 이것은 악마지요. 악마가 우리를 욕합니다. “저 인간은 주체밖에 모르고 타인의 욕망에 의해서 만날 자기가 원하는 것, 자기가 상상하고 상상계 깨지니까 상징계로 가고, 그러면서도 또 새로운 것 원하는 것이 있으면 거기에 미쳐서 또 쥐고 --. 만날 하는 것이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구원 받느냐? 어떻게 천국을 가는가. 말도 안 된다.” 라고 마귀가 송사(고소, 정죄)할 때에,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아들이 어느 자리에 있어요? 우리 자리에 있는 거예요.

아들이 우리 자리에 있으니까 마귀가 누구보고 고소합니까? 우리의 과오와 실수, 문제점을 고소할 때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이 악마에게 뭐라고 합니까? “아들과 함께 있는 자를 누가 송사 하겠느냐?”

그러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우리를 덮침으로 말미암아, 죄인 된 우리가 있으므로 말미암아 아들 예수님의 공로, 그러니까 대신 죽으심, 대신 사랑하심의 효과가 온 우주에 발칵 뒤집듯이 드러나지요.

진짜 이 이야기는 우리 내부를 발칵 뒤집을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평생을 두고 우리 자신밖에 몰라요. 뭐든지 내 편한 것만 좋아하고 내 짜증나는 것은 싫어해요.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이 발칵 뒤집어 져야 돼요. 예수님이 친히 우리의 변호자가 되셨다는 거예요.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를 변호하면 안 돼요. 이렇게 해서는 마귀를 못 이깁니다. 우리 광주 사람들도 집회를 여기서 하지 말고 공동묘지, 귀신 나오는데, 폐가 그런 곳에서 한번 해야 돼요. 그것도 밤중에. 거기서 해도, 귀신이 나와도 거기에 개의치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가 내 믿음을 유지해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니까요. ‘나는 된다. 이길 수 있다. 귀신도 이길 수 있다.’ 하고 자기 최면 걸어서 구원 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내가 나를 방어하면 안 돼요. 내가 나를 방어하는 것은 기껏 상상계 밖에 안 돼요. 우리가 방어할 필요조차도 없이 예수님이 우리 자리에 덮쳐서, 이젠 우리하고 악마의 싸움이 아니라 예수님과 악마의 싸움으로 구조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죄 많은 우리는 예수님의 공로를 높이는데 부속품으로 박힌 거예요. 이걸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예수 안에 함몰되고 나니까 나머지 문제는 우리가 처리할 문제가 아니고 주님과 악마간의 문제이지 ‘우리는 빼 주세요.’ 하고 빠지는 거예요. 대신 죽으심의 효과가 이렇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하신 일의 반응과 응답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친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내어주신 것은 우리보고 내어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우리자리까지 내어준 거예요.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우리 죄인의 동네에 까지 오셔서, 화평교회 교인들을 공격하는 악마의 자리에 예수님이 여기에 합석하셔서 ‘이 사람보고 왜 따지냐? 내보고 이야기하지’ 라고 예수님이 나서서 우리자리를 예수님자리로 바꾸어서 예수님이 변호하시고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누가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누가 너를 정죄하리요. 이들을 위해 죽으신 분이 예수님인데” 라고 나선단 말입니다.

정리해 보면, 우리는 우리의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데, 우리의 버릇은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상상계, 나의 이미지, ‘나는 저렇게 되어야 해.’ 라는 이미지를 굳게 지키기 위해서 변명에 나섭니다. “너 왜 5등해야 되는데 10등 했어?” 라고 하면 “엄마, 10등 하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왜 자꾸 5등 하라고 해.” 하면서 변명을 하지요. ‘10등이 나의 이미지야, 10등이 내게 딱 맞아. 더 이상 요구하면 무리다.’ 라고 변명하는데,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자꾸 변명하고 지키고 하는 것을 자기 의라고 하잖아요. ‘하나님, 이렇게 한 것도 최선을 다 한 것입니다. 더 이상은 못합니다.’ 라고 변명하는데, 전혀 그것과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우리자리에 쳐들어왔다 이 말이지요.

이렇게 쳐들어오니까 이것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만 남아있지 우리가 이 안에서 어떻게 처신하는가 하는 것은 묻지도 않는 거예요. 아예 우리 죄인에 대해서 평생에 묻지를 않는 겁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묻지를 않아요. 영적인 세계는 예수님과 악마의 관계입니다. 그리고 여기 있는 사람들이 구원 받은 것은 아들 덕분에 구원받지 자기가 최선을 다하는 노력으로 구원 받은 것이 아니란 말이지요.

최선의 노력이 필요치 않아요. 열심히 한다는 것도 필요치 않아요. 다만 내가 지금 대신 죽으심이 있다는 사실이 믿어진다는 것, 이 본문 말씀이. 디도서 2장 14절을 봅시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라고 할 때, 갑자기 관심사가 “나는 최선을 다 해야 해, 나는 성도로서 열심히 살아야 해, 나는 의롭게 살아야 해.” 나, 나, 나의 관심에서 갑자기 관심사가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그분에게 돌아가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우리가 윤리를 말하는데, 윤리가 뭔가 하면 이것이 법이거든요. 이 법은 현재 자기의 상상계를 확정시키는 이미지입니다. 상상계에서 새로운 법이 오게 되면 이것이 상징계로 바뀌거든요. 현재 있는 상징계를 상상계로 바꾸기 위해서 법을 동원해서 “나는 법을 지켰기 때문에 신자 맞다.”고 확정짓는데 동원되는 것이 법, 양심, 윤리 이런 것입니다.

‘내가 이 선을 넘으면 나는 인간이 아니고 개다. 나는 아직 이 선을 안 넘었기에 나는 인간이다.’ 그렇게 나옵니다. ‘나는 하루에 성경 3장 읽는데 만약 2장만 읽으면 나는 지옥가도 좋다. 하지만 3장 읽는다면 천당 가는 것이 맞다.’ 이렇게 한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의 상징계를 상상계로 확정짓기 위한 자기가 스스로 만든 법입니다. 이게 누구냐? 바리새인들입니다.

복음은 ‘내가 무슨 법을 지키느냐?’가 아니라 ‘누가 내 대신 다 처리했다.’는 것이 인정 될 때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나는 평생 동안 그분의 공로를 증거하는 하나의 부속품으로서 활용되는 거예요.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면 이 법이 동원돼요. 어려움에 처했다는 말은 상상계에서 내 이미지하고 위태로울 때, 만약 내가 과장이다. 과장인데 회사에서 과장 대우 못 받고 쫓겨날 판입니다. 그럴 때는 이 과장을 지키기 위해서 더욱 기도하고 성경 읽고 하면서 ‘하나님, 이 과장자리는 지켜야 됩니다.’ 하고 나설 때, 이럴 필요가 없다니까. 그것 하라고 구원 된 것이 아니거든요. 이것은 자기의 상상계를 지탱하는 수단밖에 안 됩니다.

이런 법은 꼭 기독교 신자가 아니라도 보통사람이 다 가지고 있습니다. 가게에 첫 손님이 물건 안사고 가면 “에이 재수 없어.” 하면서 소금 뿌리고. 소금 뿌리면 액운이 안 오고, 안 뿌리면 오늘 재수 더럽고. 이것은 자기가 만든 법이에요. 이건 뭐냐? 자기가 가진 이지미를 어떻게 해서든 지켜보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 평소에 이것이 얼마나 성경과 동떨어진, 아무 상관도 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 우습지요. 여기에서 대신 죽으심이 어떤 의미인지 그것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수요일에 잠깐 이야기 했는데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캄캄한 새벽 2시 15분에 온 마을이 잠자고 있어요. 약 50호 되는 시골 마을에. 여기에 갑자기 복면을 한 무자비한 사무라이들이 덮쳐서 잠자는 사람들을 이유도 없이 다 죽였어요. 이때 등장한 것이 뭐냐? 무자비함이죠.

사람을 죽일 때 이유가 있어야 하는데, 이유도 없이 다 죽였어요. 어린 아이고, 젊은이고, 노인이고 간에 칼로 다 죽일 때 무자비한 것이지요. 이 무자비함이 곧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이게 어디에서 터졌습니까? 출애굽 할 때. 아무 이유도 없이 그냥 죽여요.

그리고 이사야에 보면 하나님이 쓰시는 앗수르 군대의 특징이 바로 무자비함입니다. 사무라이들이에요. 이유도 없이 죽여 버려요. 죽을 때 이유라도 알고 죽으면 덜 억울한데 이유도 모르는 채 참혹하게 죽임을 당할 때, 어떤 근거도 없이 다 죽어야 되는 거예요.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이에요. 하나님이 시켜서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런 무자비함에서 오직 희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 이것만 희망이 될 뿐입니다.

제가 서울 의존교회에서 강의할 때 이렇게 했습니다. 자비를 베푸는데, 하나님이 오셔서 “내가 용서한다. 자비를 베풀게.” 이러면 될 터인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몸에 어린양의 피를 발라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어서 우리를 용서하는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린양의 피의 효과가 이 무자비함에서도 건짐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린양의 피를 바른 것입니다. 이게 대신 죽으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구원 될까’를 누가 압니까? 우리는 모르는데 누가 알아요? 하나님만이 아시고, 하나님이 아시는 방법대로만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것이 뭐냐? 피로만 죽음의 무자비함이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문설주에 발린 피를 보고 이 사무라이들이 그냥 넘어간 거예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직업이 무엇이며, 재산이 얼마이고, 평소에 얼마나 착하게 살았는가는 일체 보지 않고 문설주의 피 때문에 그냥 넘어간 거예요. 이게 진리고, 이게 현실입니다.

이 진리와 현실은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오직 허락된 사람에게만 주어집니다. 허락되지 않은 사람은 자기 주체에만 관심 있어요. 허락된 사람에게만 자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어린양의 피에 대해서 관심을 두며 살게 되어 있어요. 이게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 기쁜 소식입니다. 여기에 대신 죽으심이 들어있어요.

하나님이 우리를 불법에서 구속하시려고 대신 죽었다는 말은, 우리가 실천하겠다는 것과는 일체 관계가 없습니다. 인간의 실천이란 자기 언어체계에서 자기 상상계를 붙들기 위한 수단으로 ‘내가 이것 실천하면 복 주겠지. 이것 안 하면 벌 받겠지.’ 자기가 만든 법에 스스로 속아 넘어가서 자기를 지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아요. 이런 실천은 소용없습니다. 이 실천은 오직 하나님의 실천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실천하시고, 그 나타난 결과가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실천했기 때문에 “어, 이게 나는 믿어지네.” 여기 보면,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딛2:14) 이미 깨끗하게 했다는 거예요. “선한 일”은 진리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증거하는 선한 일, 이 일 말고 다른 선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을 위해 “친 백성”삼았습니다.

15절에 보면,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하늘의 사람인데 감히 보통 인간에게 업신여김을 받을 필요 없지요.

그 다음 3장 봅시다.

4-5절에 보면,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이거 누가 실천했습니까? 이 말씀 실천 누가 했어요? 우리 몫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실 몫입니다. 그러면 우리 몫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아니, 교회마다 뭘 하라고 하는데” 다 엉터리입니다.

이번 겨울수련회에 시편을 할 텐데, 시편에 나오는 모든 말씀은 실천이 아니고 응답이에요. 시편에 나오는 모든 말씀들은 응답이지 실천이 아니에요. 시편에 나오는 모든 시들은 ‘이렇게 하면 복 준다.’가 아니고, 지금 하나님께서 자기 친 백성을 그런 식으로 다루어 왔다는 것에 대해서 응답을 드러내는 그 내용이 바로 시편입니다.

이것이 뭐냐? 보이지 않은 영역에서 원인을 제공해서 보이는 영역의 인간들에게 응답을 하는 거예요. 제가 아까 했잖아요. “간지러워, 간지러워” 이게 뭡니까? 옆방에 신혼부부가 왔는데, 이런 소리가 들린다는 것은 뭡니까? 실천하라는 말입니까? 아니지요. 신혼이란 뜻 아닙니까.

신혼 방에는 ‘간지러워’ 하는 소리가 들이고, 저쪽 방에서는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난다. 이게 뭡니까? 저쪽의 응답이죠. 살기 싫다는. 이쪽은 너무 재미있다는 응답이고. 그러니까 이쪽은 ‘주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 받았습니다.’ 라는 찬양이라면, 저쪽은 ‘주고 하나님이고 없고 내 방식대로 살아간다.’ 그런 반응이죠.

자, 그러면 여기에서 중요한 것을 해 봅시다. 5절에 “우리가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왜 우리 의로운 행위로 의인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창세기를 보겠습니다. 15장 6절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할 때, 아브람이 가지고 있는 의는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면 ‘하나님이 뭐, 뭐 하시겠다.’ 아브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쪽에서 어떤 일을 ‘내가 할게’ 라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의가 쏟아져 나와서 아브람에게 도착하니까 아브람에게 나타난 응답, 반응이 뭐라고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믿습니다.” 라는 것이 믿음이 아니죠. 하나님이 일을 벌였는데 그 일의 여파로 아브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니까 그 흔들린 마음을 믿음이라 합니다. 신약에서는 이 믿음을 선물이라고 합니다. 선물은 원래 나에게 없는 거예요. 그런데 ‘딩동’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까 택배로 선물이 왔어요. 그러니까 선물이 오기 전에는 나에게 일체 없는 거예요.

진짜 선물 받은 사람은 “나는 하나님을 안 믿을 사람이다.” 라는 것을 이야기해 줘야 그게 선물 받은 사람이에요. “나는 때려 죽여도 나를 믿을 사람이지 하나님 믿을 사람이 아니야. 나는 결코 예수 믿을 사람이 아니야” 라고 강력하게 주장해야 돼요.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나의 상상계만 믿는 거예요. ‘나는 뭘 좋아하지, 나는 뭘 즐기지?’ 만날 이것만 생각해요. ‘왜 즐기느냐?’고 물으면 내가 왜 즐기는지 이유도 없이 그냥 즐거워요. 무조건 즐거워요. 즐거운 쪽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어요. 그것이 나의 기쁨이고 기쁨이 오는 쪽으로만 일 해요. 그것뿐이지 누가 누구에게 선물 받고 이런 것은 안중에도 없는 거예요. 자기의 실천력으로 자기의 것을 사수하고 지키는 것 외에는 없다 이 말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선물이 주어졌는데 이 선물은 아브라함 좋으라고 선물을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맡겨놓은 거예요. 전화를 해서 “아브라함아!” “아이고, 하나님이십니까?” “내일이면 아마 택배로 선물이 갈 거야. 잘 보관해 놔.” “알겠습니다.”

하나님의 프로젝트에 아브라함이 말려든 거예요. 그 결과 아브라함에게 믿음이 생겨버렸어요. 이런 하나님의 프로젝트에 안 말려든 사람은 믿음이 없고, 하나님 하신 일에 말려든 사람은 믿음이 발생해서, 하나님의 의를 보관하는 보관 창고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내 의가 아니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담겨 있는 보관 창고인데, 그것이 하나님의 대신 죽으심이 담겨 있는 것 아닙니까. 피가 이 안에 있지요.

그러면 움직일 때마다 출렁이는 거예요. 무엇이 출렁이는가 보니까 예수의 피가 출렁이니까 “야, 너 똑바로 걸어라.” “가만 있어봐라. 내 속에 예수님 피가 있어서 그렇다.” 예수님의 피가 있어서 자기를 의롭게 만들어 버렸어요. 무슨 짓을 해도, 교도소 열 번 갔다 와도 의로운 거예요. 이 세상에서 무슨 짓을 해도 의로운 거예요. 이거 말도 안 되지요?

내 행동 따라서 의로운 것이 아니고, 디도서 3장 보세요. 나의 의로운 행위로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지요.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나의 의로운 행동으로 구원하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돼요.

하나님의 뜻은 내 의로움으로 복주고 하지 않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왜 자꾸 우리 뜻을 고집을 하느냔 말이지요. 우리는 스스로 법을 만들어서 이 법을 지키면 의인되고, 못 지키면 죄인 된다고 하면서 매일같이 법을 수정하면서 법을 만듭니다. 소위 ‘징크스’라는 것이 그런 것이지요. 아침에 시험 치러 가면서 전봇대를 치면서 가요. 그러다나 전봇대 하나를 그냥 지나쳤어. 그러면 되돌아가서 다시 치고 옵니다. 이 전봇대를 다 쳐야 재수가 좋은 거예요.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라는 영화 있지요. 주인공이 보도블록을 걸어갈 때 그냥 걸어가면 되는데 꼭 금(줄) 있는 곳을 피해서 걸어가지요. 평소에 공부할 때 푸른 색 볼펜으로 하다가 그게 없어서 빨간 색 볼펜을 사용하면 오늘 재수 없다든지 이런 식으로 스스로 법을 만들어요.

스스로 법을 만드니까 그 법이 있는 곳에 저주가 있지요. 법이 있으니까 ‘그 법을 뛰어넘어라. 지켜라.’ 하고 약을 살살 올리는 자가 있는데 누구입니까? “누가 너를 고소하리요” 고소하는 자가 있지요. 고소하고 정죄하고 “그 봐, 네가 한 것 실패했잖아. 그렇게 해서 어떻게 천당을 가. 다 치워버려” 라고 놀리지요.

그러면 거기에서 “아니야. 그것은 못했지만 이것을 할 수 있어.” 라고 법을 또 만들이지요. 그러면 마귀가 또 따라오는 거예요. 이게 뭐냐? 이게 상징계입니다. 상징계는 뭐로 되어있어요? 법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그런데 법을 못 지키니까 그 스트레스가 뭐로 나타난다? 꿈에 법으로 나타나요. 이 꿈의 법은 나의 처벌입니다. 처벌받는 내용입니다.

꿈의 내용은, 자기가 만든 법을 자기 스스로 위반했을 때 나오는 그 참혹한, 차마 견디기 힘든 모든 징벌을 꿈에서 다 그것을 대신 받는 겁니다. 그리고 자기가 못 받을 상을 꿈에서 다 받지요. 날개 달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때로는 절벽에서 떨어지고 그러다 놀라서 잠에서 깨고.

이게 뭐냐? 인간은 매일같이 자기가 자신에게 벌을 내리고 정죄를 하지요. 그런데 예수 안에서는 뭐가 없다고 했습니까?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 왜? 대신 죽으신 분이 있기 때문에. 무자비한 죽음의 사자도, 하나님의 천사도 어린양의 피만 있으면 넘어갔는데 본인이 본인을 용서를 안 해요.

어린양의 피로 넘어가면 될 텐데, 자기를 의롭게 꾸미기 위한 작전에 들어갑니다. 법의 기준을 더 향상시킨다든지 엄격하게 적용시킬 법을 새롭게 만든다든지 그래서 자기를 우수하고 품격 있는 상품으로 포장을 하는 거예요. 우수한 제품을 만드는 거예요. ‘나는 시집 갈 때까지 처녀성을 지켰다. 나는 결혼하기 전에 술 한 잔 안 먹었다.’ 이런 것.

마태복음에 보면 ‘마음속으로 음란을 품은 것도 죄다.’ 라고 하니까, 그것까지 도전을 하는 거예요. “나는 마음속으로도 음란을 품지 않았다.” 이건 거짓말이거든요.

소설이나 문학 이 모든 것은 꿈을 대신하는 이야기입니다. 현실적으로 이룰 수 없는 픽션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문학이고 예술입니다. 그 꿈속에서 허용되지 않는 것을 허용함으로 말미암아, 카타르시스, 법이라는 선이 있으면 그 법 밑으로 내려가도 처벌받지 않는 그런 공간을 따로 만드는 거예요. 내가 정해놓은 법을 내가 스스로 위반해도 전혀 처벌받지 않을 때 오는 그러한 즐거움, 그런 카타르시스가 바로 문학이 주는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일종의 실천에 해당됩니다. 대신 죽으심이 아니라 어찌했든 간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스스로 죄인이라는 것을 탈피해서 나도 의인이라는 것을 체험하고 싶은 거예요.

자, 그러면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의인 되었다고요? 하나님의 하신 일이 누구한테 침범해서? 아브라함에게 침범하니까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반응이 믿음이었지요. 그러면 아브라함의 남은 인생은 어떤 인생입니까? 믿음의 인생이 되겠지요.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아브라함의 남은 인생은 누구 것이란 말입니까? 더 이상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하나님이 다루시는 남은 인생인데, 그 남은 인생이 믿음의 인생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목사님, 오늘 아침에는 믿어졌는데 오후에는 안 믿어집니다.” 이런 말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것. “오늘 아침에는 믿어졌는데 오후에는 안 믿어집니다. 그러니까 오늘 오후에 죽으면 나는 지옥 갑니까?” 라는 물음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는 것. 믿음은 내가 관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믿음이라는 것은 주님께서 평생을 이미 접수했다는 증거가, 전체 덩어리가 믿음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내가 믿었다가 안 믿었다가 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내가 지킬 수 있는 법을 만든 거예요.

사람이 법을 만들 때는 반드시 자기가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법을 만들어요. 실천에 옮기지 못할 경우에는 수정에 들어갑니다. 급 수정에 들어가요. “나는 하루에 2시간 기도한다.”라고 정했는데 해 보니까 안 되거든요. “하나님 미안합니다. 30분으로 줄이겠습니다.” 그런데 30분도 안 되거든요. “미안합니다. 5분 하겠습니다.” 그런데 5분도 안 되거든요. “이틀 만에 한 번씩 하겠습니다.” 계속 급 수정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것은 종교뿐만 아니고 종교 없는 사람도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어서 그 규칙을 통해서 상징계를 유지하고 그 상징계가 굳어지면 동일시하는 상상계가 되므로서 그 상상계가 일시적인 ‘나’를 대변해 주는 것입니다. ‘나가 누구냐?’ “나는 이렇다.” 라고 대변해 줍니다.

그런데 새로운 타인의 욕망이 오게 되면 새로운 향유를 위해서 그것이 깨어지지요. 타인의 욕망에 지금을 탈피해서 타인의 욕망에 동일시되려고 애를 쓰잖아요. 현재까지 동일시 한 것은 ‘예이 치워라. 구닥다리다.’ 하고 가는 겁니다.

제가 어떤 미국 영화를 보니까, 여고생인데 얼마나 착실한지, 넓은 목장에서 말을 키우는데, 어머니 없이 아버지 혼자 계시는데, 두 딸이 너무너무 아버지 말씀에 잘 순종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그 마을에 TV가 들어왔어요. 그 두 딸 어떻게 되었을까요? 가출합니다. 왜? TV를 보니까 탤런트가 나와요. 그것을 보면서 자신은 도회지에 가서 탤런트를 할 사람이지 시골에서 말똥이나 치울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 TV는 거리를 뛰어넘어, 지리적인 모든 장애를 뛰어넘어 단지 TV만 설치한 것뿐인데 도시가 뚝 떼어져서 시골 안방까지 도시가 쳐들어왔어요. TV만 켜면 새로운 화장품, 새로운 옷, 새로운 전자제품, 휴대폰 이런 것이 막 튀어나와요. 그래서 TV가 있는 곳에는 모든 것이 균등화 되어버려요. 도시든 농촌이든 모든 것이 동일해 져. 획일화 된 것이지요. 이게 상상계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그 도시라는 타인의 욕망이 들어오고 난 뒤부터 그 착하디착한 두 딸은 도시 속에 살고 싶어서 아버지와 시골집을 떠나 도시로 가지요.

그래서 그들이 도시에 적응을 했겠습니까, 못 했겠습니까? 적응 잘 합니다. 다시 농촌으로 오겠어요, 안 오겠어요? 두 번 다시 안 옵니다. 왜냐하면 도시의 특징은 변화거든요. 변화라는 것은 내 현재 밑에 뭘 만든다? 계속해서 미래를 만들고, 이 미래를 만드는 것을 Boys be ambitious!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

이 꿈 하나하나를 이루려면 농촌은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도시가 보장해 줍니다. 그런데 도시는 어디에 있느냐? 사실은 도시는 없어요. 라캉은 이것을 뭐라고 하는가 하면 모든 것이 환상이란 겁니다. 도시라는 게 없어요. 도시는 없고 도시를 찾아다니는 개개인의 주체들만 있는 거예요. 라이트클럽, 술집 등에는 도시는 없고 다만 도시가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 사람들만 있는 거예요.

젊은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야 물 좋다.” 라고 하고, 나이 든 사람들은 물 흐린다고 오지마라고 하지요. 각자 꿈꾸는 사람들만 있어요. 그래서 그들끼리 의사소통이 되고 그들의 대화 속에는 꿈의 미래를 이야기하고, 미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과거에 대한 부정이죠. 과거를 부정해서 자기를 미래의 타인의 욕망에 일치시키려는 사람들 끼리 모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타인의 욕망의 환상은 그 밑바닥에 뭐가 놓여 있느냐? 예수님의 피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돈이 있어야 되고, 이 돈을 벌기 위해서는 상징계에 철저하게 굴복해야 거기에서 한푼 두푼 돈이 모입니다. 이것은 굴복한 대가에요. 자기를 굴복한 대가로 돈이 오지요. 이것에 실패한 사람은 도박을 해야 되고 그야말로 탈선의 길로 가지요.

사람은 자기가 갖고 있는 욕망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그런 인간을 위해서 주께서 다 아시고 “가만 있거라. 네 의로운 행위 나는 기대 안 한다.” 인간은 예초부터 구원될 자격도 없습니다. 삭게오와 예수님이 만날 때 사전에 알았던 사람 같아요. “오, 너.” “오, 주님” 서로 만나서 좋다고 야단이야. 옛날부터 알았던 사람 같아. 얼마나 반가운지.

삭게오는 주님이 어린양의 피고, 주님은 자기가 택하신 자고. 그 둘 사이에 어떤 장벽이 없어요. 그러니 삭게오가 그까짓 돈 ‘네 배로 갚겠습니다.’ 하고 나오지요. 이 얼마나 자연스러운 현상입니까.

바로 이렇게 될 때, 3장 2절에 보면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그러니까 세상적인 것 가지고 왈가왈부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런 것으로 따지고 할 필요 없다는 거지요.

성도의 인생은 자기가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책임지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인생을 질 높은 사람으로 만들려고 그렇게 아등바등 애쓸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살든 내 삶에 대해서 묻지를 않으니까. 왜냐하면 나는 내가 주님을 소유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소유했기 때문에.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 산다 할지라도 그 책임에 대해서 내게 묻지를 않습니다.

행함에 대해서 책임을 묻는 것은 행위 책에 의해 심판 받지만, 우리는 생명책의 명단 때문에 구원 받았기에 자기 행위에 대해서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3장 1절에 보면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네 세계와 내 세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3절에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악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피차 미워’하니까, 피차가 주체 아닙니까. 오직 자기 주체밖에 생각하지 않아요. 그랬는데 주님의 자비하심이 등장해서 무자비를 이겼어요. 하나님의 공의(무자비함)를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자비로 바꾸어서 ‘우리의 행위로 의롭다 하지 않고, 이제는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5절.

오늘 이것 따 끝냅시다. 6절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의롭다 하신 것이 뭐냐 하면, 의롭다 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그러니까 선물이죠. 원래 없었던 것인데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의롭다 하심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제는 소망, 하나님의 남은 스케줄만 우리에게 있을 뿐입니다.

피곤하시니까 조금만 더 하고 마치겠습니다.

9절 봅시다.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게 뭡니까? 한 자로 하면 ‘법’이죠. 법으로 따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것은 예수님 때문에 구원 받았는데, 우리가 무슨 ‘실수를 했네, 안 했네. 너는 실천을 했네, 안 했네.’ 이런 법으로 따지지 말자는 것입니다.

법 지켜서 구원 받은 게 아니잖아요.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 때문에 구원 받았으면 법가지고 따지는 일은 없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7시 30분에 공부 시작하는데, 9시에 왔다. 따지지 말자 이 말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몇 명이 왔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몇 명 보내주셨는가? 그런 쪽으로 생각합니다. 본인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못 올 자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하나하나가 다 하나님의 허락으로 왔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그 사람들 닦달할 필요 없다고 봅니다. 다만 이렇게 모인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현재 우리 밑에 미래가 있고, 그 현재 밑에는 과거가 차곡차곡 쌓여 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현상학적 시간론인데, 이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시간을 이렇게 한 직선으로 쭉 그어놓고서, A를 과거로, B를 현재로 C를 미래의 어느 한 지점으로 표시해 놓읍시다. 그렇다면 그 A라는 과거 위에는 B를 내다보면 기대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B1가 됩니다. 그리고 -B1위에는 먼 기대인 C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C2라고 합시다.

이제 B에게 와 봅시다. B를 뭐라고 그랬죠? 현재라고 했지요. 현재의 밑바닥에는 무엇이 깔려 있느냐 하면 과연 A에 대한 기억이 깔려 있습니다. 그것을 A1라고 합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게 나옵니다. B밑에 있는 과거 A는 결코 전에 있던 과거 그 A가 아니라는 겁니다. 도리어 현재 B가 새로 조작해낸 A가 됩니다. 그리고 현재 B위에는 현재 B가 기대하는 바 C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 B위의 C를 -C1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C로 가게 되면 C는 미래라고 했지요? 그 C밑에는 A2와 B1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C 위에는 -D1이 있겠지요. 이것이 현상학에서 의식의 흐름을 가지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미래는 전에 미래가 있었고 이 미래가 나중에 등장합니다.

세상에서 장사하고, 공직에도 있고 하다보면 이런 공부할 시간이 언제 있겠습니까? 저는 이런 것까지도 하나님의 의로우신 모임으로 생각하고 싶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자기 욕망만 생각하기 때문에, 그 욕망마저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자비로움이거든요. 하나님의 사랑 아닙니까.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센 사랑이 뭐냐?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그 사랑으로 우리가 현재 모였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요. 이것이 믿어지고 그렇게 믿고 싶어요.

그렇게 사랑으로 모였으면 주님 이야기해야지 네가 잘났나, 내가 잘랐나? 이런 것을 따질 필요는 없다 이 말입니다. 이것은 다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그러면 헛되지 않은 것은 뭡니까?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 아닙니까. 그것만이 헛되지 않은 현실이고 나머지는 다 헛된 거예요.

우리 구 사모님 글에 보면, 학생들 이야기 많이 적어놓으셨는데, 헛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도 헛되지 않게 마무리가 돼요. 고생했습니다. 글 쓸 때는 헛되게 시작해서 나중에는 ‘이것도 헛된 것이다.’ 라고. 학생들을 준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보고 모든 것을 선물로 보는 거예요.

저는 누구를 비판하고 욕할 때 항상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늘 아침에 전화가 왔는데 환경단체에서 전화가 왔어요. 내가 한바탕 했는데, “대구 우리교회지요? 환경단체에서 공문 보내려고 하는데 주소가 어떻게 됩니까?” 제가 “환경 단체하고 기독교하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라고 했어요. “왜 관계없습니까? 당신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군요.” 하고 갑자기 화를 내는 거예요. 그래서 대번에 욕이 튀어나왔어요.

저는 항상 누구를 욕할 때 뭘 생각하느냐 하면 ‘내가 비를 맞고 있을 때 우산을 씌워줄 수 있는 사람이고, 내가 차 몰고 가다가 빵구 낫을 때 저 사람이 도와줄 사람이다. 내가 아쉬울 때 도와줄 사람이다.’ 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마음껏 비판합니다. 그것이 사랑이거든요. ‘나는 네 없이도 산다.’ 이것이 아니라, 당신은 내게 욕을 먹고 싸우지만 그대로 당신이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당신이 나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 김 집사님이 계시는 학교의 교직원들과 교목도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히 욕 얻어먹어야 되지만 그분들 없으면 월급 어디서 나옵니까? 이단, 삼단 욕해도 그 사람들이 있는 이유가 뭡니까? 다 하나님께서 날 도와주라고 계시는 사람들이에요. 아주 고마운 사람들이에요. 욕도 얻어먹고 아주 고마운 사람들이라고. 그래야 그게 미움이 아니에요. 그게 원수도 사랑하는 것이 되지요.

미움이 아니고, 당신이 지금 잘못 된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당신 없으면 아쉬울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이지요. 그러니까 항상 그 사람만 보지 말고, 누가 잘났나가 아니라, 하나님이 왜 당신과 내가 있게 했는가 하는 그 점에 대해서 이야기하잔 말이지요. 왜 저는 여기 있고 여러분은 왜 여기 왔습니까? 그 점에 대해서 이야기하잔 말이지요. 누가 잘났나가 아니라.

10절에 보면,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한두 번 훈계하고 멀리하라고 했다고 두 번까지만 하란 말이냐, 세 번까지냐? 하는데, 여호와 증인 세 번 왔는데 이제는 쫓아낼까요? 하는데, 그 여호와 증인도 나중에 버스 놓치면 자기 차 태워줄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제가 봉화에 살 때, 수돗물이 안 나올 때 뒷집에 있는 안식교 교인이 물을 주셨어요.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이단은 이단이고 물 준 것은 물 준 것이니까 고맙고.

“이단에 속한 자들”은 딴 게 아니고,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이 아니라, 인간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단입니다. 멀리해야 돼요. 멀리한다고 해서 사귀지 말고 그런 것이 아니라, 다 도와줄 사람하고 붙어 있는 것이니까 고마운 줄 알고 붙어 있 돼 그 사람에 대해서는 기대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11절에 “이런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져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이 말이 오늘 강의의 하이라이트입니다. 주님이 대신 용서한 사랑이 없으니 자연적으로 결국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정죄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예수님이 대신 안 살아준 인생을 사니, 자기가 사는 인생을 사니 마귀로부터 정죄당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우리 성도는 누가 대신 받아줍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 인생을 대신 살아주니까 우리는 정죄함이 없는데, 의인 되었는데,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 인생 자기가 살다 보니까 모든 게 법에 다 걸리고, 무자비하게 다 걸리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단입니다.

13절에 “저희로 궁핍함이 없게 하고,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이 말은, 우리 다 같이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서 힘쓰는 자가 되자. 그런 뜻입니다.

15절에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다만 하나님의 선물이 여러분을 지배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그 피 흘림이 지금 이 순간 죽어도 천국에 올라가게 한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알게 된 것이 우리 공로가 아니고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 결과인줄 압니다. 우리 자신을 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 하시는가 거기에 동의할 수 있는 저희들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8. 1. 22. 11:18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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