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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6 대구강의 12 - 지옥의 하나님 14자유게시판로마서

06 대구강의 12 - 지옥의 하나님 14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06 대구강의 12 - 지옥의 하나님 14

06,10,02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이스라엘이 벌이는 전쟁에 대해서 !!

우리가 성경말씀을 대하면서 참을 수 없는 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약해지는 것이 강한 것이다" 라는 역설을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그 근거가 어디에 있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자기가 이 땅에 온 곳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박살나기 위해서 왔다고 하는 것이다.

(마 20:28) 인자가 온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연약함과 저주와 사랑 !!

예수님은 이렇게 저주를 받기 위해서 오셨는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동네가 바로 저주의 동네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와 함께 저주를 받는다는 말이다. 사실 이 대목이 우리 인간으로서는 제일 이해하기 힘든 부분인데, 왜냐하면, 인간은 나름대로의 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런 신은 어떤 신 개념인고 하니, 강한 신이고 무소불능의 전능한 신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진짜 하나님은 우리를 아예 저주의 대상으로 보는데, 그런데 이렇게 저주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 자체가 사랑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저주를 받는지 뭘 받든지 그냥 내버려두면 되는데, 그런데 우리를 보고 저주받을 대상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다가오고 찾아오신다는 것 자체가 우리를 건지려고 뭔가 시작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들의 고집도 만만치 않아서, 우리는 언제나 강한 신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를 부자로 만들든지 해서, 아무튼 자기 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줄 신을 말이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시건(?) 없는 소리는 전혀 들을 필요가 없지만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서, 이런 저주받는 동네에 참여함과 동시에 예수님마저도 아버지로부터 저주의 대상이 되고, 그래서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서 죽어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이것을 아느냐?" 라고 했을 때, 제자들이 이것을 알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 당시 나름대로 구약의 전문가들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도 알 리가 없고 말이다.

지금 우리가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벌리는 전쟁을 시작하면서, 이 구약에 나오는 전쟁을 천번만번을 이야기해도, 예수님께서 저주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취지에서, 그렇게 예수님이 여기에 동참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아무리 구약을 봐도 그것이 제대로 해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예수님은 빼빼로를 좋아하신다 ??

로마서 6장에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죄와 더불어 우리와 함께 함으로서, 즉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들어오심으로서, 이렇게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은 예수님의 죽음을 알고,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도 안다는 것이다.

로마서 6장이 참으로 어려운데, 다시 설명을 하면, 예수님께서 저주의 동네에 참여함으로 말미암아서, 여기에 본드로 붙여진 사람들에게는 어떤 혜택이 있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 저주의 동네를 탈출할 때 그 붙은 사람도 함께 한다는 것이다. 즉 부활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빼빼로를 보면 그 바싹 바른 밀가루 막대기에 초코렛이 묻혀 있는데, 그것이 처음에는 밀가루 막대기만 있었는데, 그것이 일단 초코렛이 담긴 통에 들어가서 나올 때는 초코렛이 함께 묻혀서 나오듯이, 그렇게 구원이 된다는 것이다.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이런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할 때,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왜 거부하는고 하니, 자기들은 당연히 구원받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 가운데서 예수님이 쑤셔 가지고 일부만, 초코렛이 발리듯이 그렇게 발린 사람만을 구원해버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평소에 자기들이 생각했던, 즉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이다. 우리는 사랑을 받은 사람이다" 라는 인식의 바탕이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 - 연약함과 주의 이름 !!

그런데 그렇게 쑤시고 들어오는 과정에 대해서, 즉 그렇게 작대기를 가지고 쑤시는 것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강한 신이 아니라 약한 신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약하다면 쭈그리고 앉아서 자기는 약하다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약하면서도 뭐라고 하는고 하니, 그것을 '주의 이름'과 결부시킨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말이다.

지금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벌리는 전쟁에 있어서 주의 이름이 중요하기 때문에, 신약에서 주의 이름을 먼저 정리하고 있는데, 그렇게 엄청 약한데 그러면서도 자기는 메시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약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이것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봐도 그렇고, 요즘 우리들이 봐도 말이다.

그것이 정말 주의 이름이라면, 큰 능력을 발휘해서 몽땅 다 구원을 하든지, 몽땅 다 뒤집어서 새롭게 천국을 만들든지 말이다. "그때 에덴동산에서 쫓아낸 것은 미안하다. 그동안에 마음 고생이 심했지. 내가 다시 낙원을 회복할게. 그러니 같이 살자"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다시 새롭게 시작을 하면 서로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런 우리들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게, 왜 그렇게 엄청나게 약한 신의 모습으로 오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약하게 오니까 강한 신을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러운 사태라는 것이다.

◈ 인간은 왜 강한 신을 기대하는가?

그리고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사람들이 강한 신을 기대한 것은, 이 세상을 포기할 마음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이 오셔서 이 세상을 고칠 것은 고치고 해서 다듬어주시면, 그동안 우리가 만들어놓은 문명도 있고 하니, 아주 우수한 도시문명과 과학문명도 있고 하니, 거기에 민주주의와 윤리와 도덕을 가미하면, 이 세상도 제법 살만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들이 원하는 강한 신은 어떤 신인고 하니, 인간이 하는 것을 고쳐주고 도와주는 강한 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이 우리들뿐만 아니라,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인간인지라 당연히 그들에게도 있었다는 것이다.

◈ 누가 종교적이고, 누가 신앙적인가?

어떤 분이 말하기를, "유대인들은 종교적이지만, 예수님의 생명을 받은 자들은 종교적이 아닌 신앙적이다" 라고 했는데, 그래서 제가 그 내용이 들어있는 책을 보면서 무엇을 기대했는고 하니, 예수님을 핍박했던 유대인들이 그렇게 종교적이라고 하면, 그러면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우리 이방인들은 왜 종교적이 아닌지, 그것이 왜 날아가 버렸는지, 그러한 논리를 기대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나 우리나 모두가 다 아담의 자손들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모두가 아담의 속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데 누구는 종교적인 속성이 발휘되고 누구에게는 그것이 발휘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 증거가 있으면 굉장히 찾고 싶었는데, 그런 증거가 있으면 그 사람의 논리가 맞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실 그런 증거가 없고, 그냥 일방적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종교적이 아닌가? 유대인들만 종교적이고 말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오게 되면, 오히려 그와 반대로 우리가 얼마나 종교적인지가 모두 다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적나라한 종교성이 말이다.

◈ 십자가 마을 사이트와 복음 !!

(구) 십자가 마을 사이트에서 손무성 목사님의 글이나 박윤진씨의 토론하는 것을 보고, 제에게 전화가 제법 많이 오는데, 왜 손무성 목사님은 사이트 이름은 십자가 마을이라고 하면서, 십자가는 다 날아가 버리고 인간의 행함을 주장하느냐는 것이다.

왜 그런 느낌을 주는고 하니, 손 목사님은 십자가의 복음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기정사실로 하고, 그것에서 미흡하다고 싶은 것을 보충하는 의미에서 글을 남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글을 읽는 사람들은 그것이 아니라, 손 목사님은 십자가의 복음을 포기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손 목사님이 말하는 것은, 십자가 복음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말씀이 다 회개용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은 주장하기를, 십자가 복음은 반드시 회개를 요구하는데, 왜 손 목사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느냐는 것인데, 그러나 사실 손 목사님은 그것은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회개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상대방은 손 목사님은 회개 말고 뭔가 다른 방식을 이야기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신윤식 목사님은 설교를 통해서, 그 회개하는 것을 '상한 심령' 이라고 제대로 지적했다는 것이다. 사실 손 목사님의 최근 글을 보면 상한심령이라는 말이 없는데, 사실 그런 말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의 영이 회개의 영이라는 것에 동의해야 하니까 말이다. 신 목사님은 오히려 설교하기를, 하나님은 죄를 짓지 않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짓게 한다고 했는데, 상한심령이 되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여기에 대해서 손 목사님이나 이상봉 목사님은 전혀 동의를 하지 않을 텐데, 김달원 목사님은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은 우리하고 상대하지 않고 예수님과 상대하기 때문에 우리가 무슨 짓을 하든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이다. 완전히 인간을 배제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아니, 인간인 주제에 자기가 잘못을 하든지 말든지 그것에 왜 신경을 쓰느냐는 것이다.

◈ 그냥 진열할 뿐 그 이상은 NO !!

이렇게 모두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여러 가지 다양한 주장들이 나오는데, 여기에 대해서 누가 누구에게 표를 몰아주듯이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창조자가 아니기에 말이다. 그래서 그냥 그렇게 열거해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쇼윈도우에 진열을 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복음을 안다고 하는 불신자들(?)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진열하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거북스러워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대단히 수상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말씀의 머슴들에 불과한데 말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렇게 나열하고 소개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손무성 목사님의 주장이 무엇인고 하니, 사실 그분의 글이 너무나 길어서 사람들이 잘 읽지 않는데, 그래도 저는 읽을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십자가의 영을 회개의 영으로 국한시키면 복음의 풍성함이 쪼그라드는데, "제가 죄를 지었는데, 어떻게 할까요?" 라는, 그렇게 너무 자기 행위문제에 좁게 제한이 된다는 것이다.

손 목사님의 주장을 요약해보면,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주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서 하시는 것인데, 그런데 이것을 단순히 "회개할 것인가, 말 것인가?" 라는 것에 국한시키지 말자는 것이다. 그런데 손 목사님은 여기서 뭔가 빠진 것이 있는데, 사실 이것이 빠졌기 때문에 공격을 받는데, 우리가 주의 이름을 높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그런데 어떻게 주의 이름을 높이는고 하니, '상한 심령'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손 목사님의 글에 집어넣어도 전혀 문제가 없는데, 그런데 손 목사님은 이것을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하고 다툴 일도 없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 상한심령을 거부하니, 마치 회개의 영을 거부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 왜 상한심령이 나오지 않는가?

이렇게 상한심령이 들어가야 자기 이름이 부인되는데, 즉 "저는 죽는 것이 당연합니다" 라고 할 때, 그 죽음을 통해서 그 사람 속에 생명이 살아서 역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손 목사님은 왜 상한심령을 넣지 않는가? 그 원인이 무엇인가? 이것을 물으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할 것인데, 그렇게 당연하다면 넣으면 되는데 말이다.

그 이유가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것인데, 이장우 목사님 설교를 들어보면, 기존 교단이고 교인들의 수준도 있고 하니 설교를 비교적 쉽게 하는데, 제가 이 목사님 설교를 좋아하는 이유가, 항상 "저는 아닙니다" 라는 것이 설교전체를 통해서 느껴진다는 것이다. 즉 "목사인 저도 이 말씀을 결코 지키지 못합니다" 라는 것이 말이다. 그것은 바로 "목사인 제가 여러분을 가르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저에게 배울 생각은 아예 마세요" 라는 것인데, 이것이 목사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쉽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내가 당신을 가르치는 목사인데, 왜 나의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는가?" 라는 것이 목사에게는 앙금처럼 남아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은 신학적으로 복음을 이야기하기는 하는데, 그런데 그 밑바탕에 "제가 이 정도 아니까, 그러니 앞으로 계속 저에게 잘 배우고 복종하면 됩니다" 라는 것이 깔려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을 느끼면서 설교를 듣게 되면 굉장히 역겨움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가 과거에 재건파 목사님들과 함께 성경공부를 할 때, 그분들하고 함께 공부하고 나서, 그 다음에 이런 것이 좀 나오는데, 물론 서로 이렇게 모여서 가르치면서 배우고 하는 것은 좋은데, 그런데 문제는 그분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이제 제가 이런 새로운 것을 아니까, 여러분은 저에게 배우세요" 라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주께서 하시는 목회에 목사가 가장 걸림돌이 되는 순간이 언제인고 하니, 바로 "당신들, 나에게 한 수 배워라" 라고 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제 생각은 이런 것입니다" 라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본인이 상한심령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가르치고 그 반대급부를 얻겠다는 말이다. 그러니 목사 본인이 상한심령이 아니라면 설교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상한심령이 어디서 생기는고 하니까, 나는 항상 강한 목사, 능력 있는 목사, 설교 잘하는 목사가 되기를 원하는 자기의 본심과, 이 저주받은 세계에 그야말로 나약하고 별 볼일 없는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앞에서 항상 자기를 내세울 때에, 그때에 비로소 자기 속에 있는 강한 목사라는 것이 얼마나 저질스럽고 역겨운 본심인가가 드러날 때, 그것이 바로 상한심령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야말로 별 볼일 없는 연약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냥 십자가에서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것을 얼마나 말렸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베드로를 보고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이 베드로 마음속에는 강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정의이고 선이라는 것이다.

◈ 철학에서, 약한 것이 힘이다 ??

저는 철학을 공부하면서 이런 것을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모르는데, "강한 것이 곧 정의이고 힘이다" 라는 것을 말이다. 아니, 철학에서 "약한 것이 힘이다" 라고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항상 강해야 한다고, 그래서 "아는 것이 힘이다" 라는 것부터 시작을 한다는 것이다.

근대에서 주체사상이 무엇인가? 독자적인 힘을 기르는데 매진한다는 것이다. 과학의 힘으로, 기술의 힘으로 말이다. 이제는 신분을 뛰어넘고, 교회의 권위와 왕의 카리스마를 뛰어넘어서 말이다. 거기서 해방되어서 스스로의 자체적인 힘을 갖자는 것이다.

◈ 스피노자님, 상한심령과 연약함은?

스피노자는 그 힘이 신에게서 직접 온다고 말했는데, 각각의 개별자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에 하나님의 종이 되자고 했지만,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거기서 상한심령이 빠져있고, 연약함의 십자가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스피노자는 존재론적인 신인데, 그런 힘 되는 십자가는 처음부터 가짜 십자가이고, "당신은 나약한 길로 갈 용의가 있는가?" 라는 것을 요청하는 것이 바로 진짜 십자가라는 것이다.

제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 손 목사님의 경우에 상한심령을 집어넣어서, 즉 "저도 그 말씀을 지키지 못합니다" 라는 것을 포함시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이는데 말이다. 그렇지 않으니까, "목사로서의 권위를 무시하지 마세요. 저도 여러분을 가르칠 자격이 있습니다" 라는 뉘앙스를 풍긴다는 것이다.

지난번에 광주에서 토론한 것도 그런 것인데, 항상 우리가 목사로서 뭔가 자꾸 강한 것을 추구하지 않는지, 즉 "나도 십자가의 복음을 아니까 힘이 있잖아" 라는 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는 십자가는 강한 십자가가 아니라, 만지면 부서져버리는 아무 것도 없는, 그야말로 연약한 십자가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교재에 들어가기 전에 두 번째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첫째로 공부한 것은 그야말로 나약하고 저주받은 상한심령의 십자가라는 것이고, 즉 예수님은 이 땅에 너무나도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포착하는가?

두 번째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어떻게 이 땅의 역사 속에서 포착해내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저것은 아니고" 라는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 틀을 이 세상에서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 만들어내지 못하는데, 그런데 이것을 그렇게 만들지 못한다고 하면 안 되고, 하나님의 일이 이 땅에 왔을 때 이쪽에 시스템이 있는데, 그래서 우리는 그 시스템으로 붙잡으려고 하는데, "아, 저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순간에 곧장 손과 발을 빼버린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일은 오토매틱이 없다 !!

그래서 이스라엘의 전쟁에 있어서 사울 같은 경우에는, 사울왕이 전쟁에 나갈 때마다 제사를 드리고 나가는데, 그런데 사무엘이 와서 뭐라고 하는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즉 "이것은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일이 된다" 라고 붙잡을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제가 굳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목사의 입장에서 볼 때 교인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목사님,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딱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데, 어떤 것을 하면 주의 일이고, 어떤 것은 주의 일이 아닌지, 그것을 구별하는 기준을 말씀해주세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마음속으로 말이다.

그렇게 되면, 목사도 아주 깔끔하게 그것을 정리정돈해서 교인들에게 제시하고 싶은, 그러한 유혹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문제가 되는 것이,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니 마치 허구와 같은 것인데, 이런 허구와 같은 십자가가 하나의 약속이 되어서, 사실은 약속자체가 허구인데, 즉 약속은 사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튼 그러한 약속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그것이 복음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는 것이다.

◈ 손에 잡히는 증거를 원하는 민중들 !!

그런데 사람들은 손에 잡히지 않는 십자가가, 그래도 우리 손에 있을 때는 약간 덩어리진, 즉 구체화, 혹은 실체화되는 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마치 도토리묵이 처음에는 액체로 허느적 거리다가 나중에 굳어져서 어떤 구체적인 물체가 되듯이 말이다.

그와 같이 허물허물한 십자가가 우리 속에 있을 때는, 군데군데 덩어리가 되어서 구체화되는 증거를 사람들은 갖기를 원하는데, 목회자는 과연 성경을 가지고 무슨 이야기를, "그것은 이것입니다" 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목회자는 항상 그런 유혹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자기가 인식이 될만한 그런 덩어리를 갖고 싶다는 것 자체가, 구약의 이스라엘 전쟁에서는 그것이 곧 불신앙의 증거라는 것이다. 자기는 믿지 않는다는 말인데, 그러니 본인이 '믿습니다' 라는 것은 하나의 오기이고 신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즉 '믿습니다' 라고 하는 내용이 없다는 말이다.

주님이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내놓는 증거물하고, 자기가 '믿습니다' 라고 하면서 내어놓는 증거물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가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불안해서 내놓는 일시적인 자기 신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이스라엘이 벌리는 전쟁을 통해서, 이 두 가지 점에 대해서, 즉 십자가는 연약한 모습으로 전쟁을 벌린다는 것이다. 강함으로 저쪽 강한 자를 이기지 않는데, 즉 그 방식이 강자가 되어서 강자를 이기는 것이 아니라, 약자가 되어서 강자를 이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기는 방식에 있어서 어떤 수단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이스라엘 전쟁의 특징 - ① 강자가 강자를 이기지 않는다 !! ② 수단자체가 없다 !!

다시 말해서, 이렇게 하나님이 전쟁을 수행하시는 방법이 두 가지인데, 첫째가 강자가 되어서 강자를 이기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둘째는 그 어떤 수단이 없다는 것, 이 두 가지가 바로 이스라엘이 벌리는 전쟁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 예수님은 자기 인격으로 생명을 !!

그러면 신약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할 때 어떻게 하시는가? 수단 자체가 없는데 말이다. 예수님은 그냥 '인격' 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요한복음에서는 '생명' 이라고 하는데, 인격적으로 감화 감동되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키 작은 삭개오의 경우에도 특별한 수단이 없었는데, 그냥 나무에서 보고서 자기 집에 모시겠다고 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너희 집에 이르렀다" 라고 하시고 말이다. 이것이 곧 인격적인 강화인데, 이것을 보이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십자가에 대한 오해인데, 십자가는 그야말로 비참한 모습으로 사라지는 사건이기에 말이다.

(눅 19:9)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 로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보이지도 않는데 인격적으로 감화되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만 생각하면 눈물이 나고 말이다. 새벽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막다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오는데, 아주 위험스럽고 댄저러스한 일을 했다는 것이다. 잡히면 죽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요한일서에서는 '사랑'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슨 수단이 필요하고, 믿는다고 하는 구체적인 증거가 왜 필요하냐는 것이다. 그것을 목사는 교인들에게 호소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사랑이 있으면, 이 십자가의 사랑이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그러니 구태여 따로 간증거리를 만들고 소유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라고 말이다.

◈ 이스라엘 전쟁에 대해서 !!

이러한 두 가지 점을 염두에 두고서, 이제 '이스라엘 전쟁'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전쟁을 한번 벌려보자는 것이다. 교재 50페이지를 보자.

** [이스라엘이 벌이는 전쟁] - 이스라엘은 이상한 나라이다.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이다.

이것이 어디에 나오는고 하니, 시편 135편인가 있지 싶은데, 있지요? 계시(?)가 이렇게 가끔 이렇게 맞을 때도 있는데, 4절을 보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시 135:4)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야곱 곧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로 택하셨음이로다

이렇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소유라고 하면 그때부터는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이 되고, 반대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라고 나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전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전쟁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하면 패배를 당하고 말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전쟁에 있어서 승리와 패배가 간단한데, 자기들이 하나님께 소속되어있다면 승리이고, 반대로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소속되어있다고 여기면 패배라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 철도공사 신우회의 황당함 !!

알다시피 제가 철도공사 신우회에 가서 설교를 하는데, 얼마나 난처한지 모른다는 것이다. "신이시여, 우리 철도공사를 도우소서" 라고 설교시작 20분전부터 통성기도하는 판에, 철도공사가 운영이 잘되게 해달라고 말이다. 사고가 나지 않게 해주시고, 믿지 않는 관리자들에게도 지혜를 주셔서 운영을 잘하게 해주시고, 그리고 승객들이 안심하고 타고 다니게 해주시고 말이다. 그리고 설교를 마치고 나서도 기도하기를, 집회장소가 바뀌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지금 장소를 동대구역 2층에서 임대해서 사용하는데, 계속 사용하기가 어려운지, 그러면 화장실에서 모이면 되는데 말이다.

하나님의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진 나라는 어떠한고 하니까, 이스라엘은 패배해도 하나님은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의미를 알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소유된 나라이기에 말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위하여 필요에 따라서 있어야 될 나라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요구는 무엇인가? 그것을 두 글자로 '약속'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약속에는 축복과 저주가 같이 !!

이것을 들어도 자꾸만 잊어버리곤 하는데, 하나님의 약속에는 두 가지인데, 하나님의 약속에는 축복의 약속도 있지만 저주의 약속도 있다는 것이다. 즉 약속에는 축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저주도 있는데, 그것을 왜 놓치느냐는 말이다.

신명기 27장에 보면, 두 개의 산이 있는데 '그리심산'과 '에발산' 이라는 것이다. 한쪽은 축복을, 다른 쪽은 저주를 선포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이 두 개가 합쳐져서 한 세트가 되어서 약속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약속 속에는 축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주도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도가 죄를 지어서 하나님이 징계를 하면, 그것도 성도는 당연히 감사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성도를 하나님의 소유로 삼았기 때문에 징계가 오는데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나타나실 때, 그것을 힘들게 사용하든지 즐겁게 사용하든지,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 소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왜 감사할 줄 모르느냐는 것이다.

개척교회를 하는 목사님들이 교인이 없고 돈이 없어서 굉장히 짜증을 내고 힘들어하시는데, 여기에 우리 모임의 목사님들을 보면 참으로 마음에 찡하게 뭐가 와 닿는데, 물론 본인들은 목회가 아니라 논다고 여기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용하는데, 아무리 개척교회이든 아니든 말이다.

◈ 자기 소유로 여길 때가 힘듦의 출발 !!

그런데 그것을 자기 소유로 여겨서 자기가 한다고 여길 때, 그것이 바로 힘듦의 출발이라는 말이다. 우리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소유라고 시편 150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도 열심히 잘할 테니까, 하나님도 좀 잘해주세요" 라고 하는 것은, 물론 그것이 우리 인간들의 한계인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상한심령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구약의 이스라엘의 역사 가운데 이런 오해가 역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오해가 말이다.

◈ 인간의 죄를 모두 드러내기 위해서 !!

우리 인간이 에덴동산에 쫓겨난 뒤에 왜 곧바로 메시야가 오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이 알고 있는 죄가 순전히 자기 중심의 죄이기 때문에, 이러한 자기 중심의 죄 자체가 바로 죄임을 제대로 드러내기 위함인데, 이렇게 자기 중심에서 어떤 죄들이 계속해서 터져 나오는지를 이어보기 위해서 구약이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약전체를 보게 되면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신에게 다가갈 수 있는 여러 가지 수단들이 종류별로 나와있다는 것이다. 제사도 나오고 윤리도 나오고 십계명도 나오고, 특별히 성전이 있어서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드리면 구원을 받고 말이다. 얼마나 편리하냐는 것이다. 또 태어난 지 8일만에 장자가 할례를 받으면 그 집안이 다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하니, 얼마나 추상적이고 허물허물한(?) 이야기냐는 것이다. 그리고 성전도 자기 자신이 성전이라고 하니, 구약에 있던 그런 모든 편리한 것들이 다 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전을 통해서 신에게 나아가고, 할례를 통해 신에게 나아가겠다고 하는 것이 모두 '죄' 라고 하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주께서 제사도 주시고 할례도 주셨다는 것이다. 율법은 우리 입을 틀어막기 위해서 주셨는데,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율법 외에 한 '의' 이고 말이다.

◈ 상한심령, 율법 외에 한 의, 그리고 나의 방종함 !!

제가 참 안타까운 것은, 손 목사님이 율법 외에 한 '의'만 집어넣어도 그런 오해를 받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렇지 않는가? 그런 논쟁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율법 외에 한 '의'이니 말이다. 율법은 회개용이고, 구원은 율법 외에 한 '의'로 받는다고 하면 도대체 무슨 문제가 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은 회개용만이 아니라고 하니, 듣는 사람이 환장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손 목사님이 왜 그런 이야기를 못하는고 하니, 율법 외에 한 '의' 때문에 인간들이 방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율법을 가지고 회개용뿐만이 아니라 조지는(?) 쪽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 만들기'로 나가자는 것인데, 그러나 도대체 누가 인간을 만드는가? "저도 인간이 아닙니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자기가 마치 인간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뉘앙스를 주니까, 상대방이 화를 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본인이 그렇게 안 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 짐을 또 남에게 전가하려고 하니, 본인이 말씀대로 뻔히 살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인간이 방종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방종을 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방종하면 안 됩니다" 라고 하려면, 자기도 방종하지 않는다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 세상에 방종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 저런 오해들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지 싶은데, 그 중에서 이 3가지의 오해 때문에, 즉 상한심령, 율법 외에 한 의, 그리고 자기의 방종함을 말이다. 이 3가지만 자기 글 속에 집어넣었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데 말이다. 아닌가?

이제 교재 50페이지를 보자.

** 이스라엘은 이상한 나라이다.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를 애초부터 구상을 했다. 이미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세우면서 타국가와 비교하기를 원하셨다. 그래서 다른 국가에 없는 것이 이스라엘에는 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고, 그 이름과 더불어 하나님의 전쟁이 이루어진다.

(출 20: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 누가 제단을 쌓게 하고, 누가 화목제를 드리라고 했는가?

여기서 일반 교인들이 오해를 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제단을 쌓게 하신 분도, 화목제를 드리게 하신 분이 분명히 주님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제단을 쌓은 것도 자기들이고, 화목제를 드리는 그 제물들은 자기들의 재산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꾸만 자기가 행동의 주체가 되는 것으로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자꾸 손 목사님 이야기를 해서 좀 그런데, 손 목사님은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행위의 주체는 성령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해봐야 죄인이라고 말이다. 분명히 그렇게 지적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이렇게 성령의 주체가 된다고 했으면, 성령이 우리를 회개하도록 해서 일을 하신다고 하면 되는데, 그것이 또 빠지고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자꾸 이렇게 빠뜨리는가? (별들에게 물어봐?)

◈ 이 제사가 그 제사인가? 이 화목제가 그 화목제인가?

이렇게 제단을 쌓는 것도, 화목제를 드리는 것도 전부 하나님께서 시켜서 하는 것인데,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지시로 그렇게 화목제를 드렸다고 해서, 그 다음에도 똑같이 자기가 드린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다음에도 하나님의 지시가 또 내려와야 하지 말이다. 이해가 됩니까?

이렇게 제사를 드리는 방법을 알았으니, 그 다음에 또 그렇게 제사를 드리면 되느냐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처음에 강의를 하면서 두 가지를 이야기했는데, 십자가라는 것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고, 그것은 구체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김 기사, 운전해 !!

요즘 코미디에 보면 이런 프로가 있는데, '사모님, 사모님' 이라고 말이다. 그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는데, 그 운전기사는 사모님이 어디로 가는지 다 알지만, 그러나 미리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운전을 못해서가 아니라, 사모님의 지시가 없기에 운전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모님이 "운전해, 어서" 라고 하면 운전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즉 그 운전기사는 오직 사모님의 지시만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런 예가 주기도문이 나오는데,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라고 말이다. 물론 주님이 주실 줄 알지만, 그러나 주셔야 한다는 것도 알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화목제가 화목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화목제를 드리라고 하는 것이 참된 화목제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즉 제단이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단을 쌓으라는 하나님의 지시가 중요하고, 역시 화목제 자체가 아니라, 화목제를 드리라고 하는 지시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 약속은 이스라엘의 패배를 통해서 !!

이것이 제대로 안 되니까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실패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승리하고 말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이렇게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패배함으로서, 하나님의 저주의 약속은 더 부각이 됨으로 하나님은 여전히 승리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가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명기 5장 24절과 25절을 보자.

(신 5:24) 말하되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영광과 위엄을 우리에게 보이시매 불 가운데서 나오는 음성을 우리가 들었고 하나님이 사람과 말씀하시되 그 사람이 생존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보았나이다
(신 5:25) 이제 우리가 죽을 까닭이 무엇이니이까 이 큰 불이 우리를 삼킬 것이요 우리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다시 들으면 죽을 것이라

◈ 하나님은 왜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나?

이것은 형상의 문제인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좀 쉬운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서 자기의 소유된 백성들을 거느리시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한 것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싸워야 될 적의 나라가 신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하나님과 적들의 차이점을 보다 더 확실하게 부각시키기고, 자기 백성들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여가서 '형상' 이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이 만들면 신이다" 라는 의미인데, 원래 이 형상이라는 것은 이사야에 보면 나오는데, 그렇게 뚝딱뚝딱하면서 나무로 만들고 쇠로 만드는데, 꼭 목각이나 동상이 있어서 신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나온 신과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인간과의 차이점을 한번 보라는 것이다.

◈ 이스라엘아, 인간이 만든 신을 공격하라 !!

다시 말해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생긴 인간들이, 인간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신을 공격하는 입장에 놓여있는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만든 신에 대한 공격이 그들의 임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공격' 이라는 의미는, "그 신은 신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인데, 이렇게 신이 엉터리이니까, 인간도 엉터리이고 말이다. 그러니 이런 신을 공격함으로서, 그것이 곧 인간을 공격하는 것이 되고, 바로 그런 방식으로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이다.

◈ '신을 믿으세요' 라는 의미는?

그러니 "신을 믿으세요" 라고 하는 것은 전혀 복음이 아닌데, 그것은 오히려 복음이 없는 사람을 복음이 있는 것처럼 오해시킬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왜 사도바울이 자기는 바리새인 중에서 바리새인이고 여호와를 그렇게 신봉하면서도 왜 십자가만을 주장하는고 하니, 신을 인정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에 이미 포함되어있는 것이란 말이다.

로마서 1장을 보면, 분명히 모든 사람들은 신은 안다고 되어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지혜라면 몰라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에는, 즉 계시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비밀로서 감추어진 십자가라는 말이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그런데 왜 신학자들은 신의 존재를 이야기하는가? 십자가를 생각하지 않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을 포섭하기 위해서, 즉 기독교를 종교화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종교는 참된 이스라엘에 의해서 공격당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데, 그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공격대상이라는 것이다.

◈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죽어도 안 돼 !!

구약성경 전체를 보면 읽어보면 그 느낌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은 도저히 용납을 하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살인이나 간통 등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이다. 근본적으로 용서가 안 되는 것이 바로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란 말이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말이다.

이것을 신약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하는데, 이렇게 참된 신은 예수님이지 하나님이 아닌데, 그것은 성령을 받아야 알지 어떻게 알겠냐는 것이다. 그러니 오직 십자가뿐이지, 인간이 만든 신은 노리개 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고전 16:22)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주께서 임하시느니라

◈ 철학자가 과연 무신론자가 될 수 있는가?

철학자들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는데, 철학자들 가운데 신을 부정하는 자는 없다는 것이다. 물론 '러셀' 이라는 자가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도 따지고 보면 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데, 무신론자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도저히 맞지를 않다는데, 즉 '메타논리' 라고 있는데, 이 메타 위에 또 메타가 있고, 또 그 위에 메타가 있고 말이다. 그 논리의 구성상 도저히 신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니체가 '신은 죽었다' 라고 했는데, 과연?

다만 니체처럼 기독교를 부정하는 경우는 있는데, "신은 죽었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것을 두고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니체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죽은 것이 정말 맞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은 하나님이 아니라면 진짜 하나님이 아니니 말이다. 가만히 듣고 보니까 그 말이 일리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니체가 들으면 다시 벌떡 일어나겠지만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정말로 니체가 말한 것처럼 그렇게 죽은 하나님이 아니면 참된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하나님은 인간의 손에 맞아서 죽은 하나님이, 그분이 바로 진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 외의 하나님은 모두 다 가짜이고 말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연약함인데, 물론 니체는 강함을 주장했지만 말이다.

계속해서 교재 51페이지를 보자.

** 모세가 하나님의 형상을 직접 보았지만,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었다.

(민 12: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겠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 아니하느냐

◈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

이렇게 모세가 죽지 않고 살아난 것은 하나님의 맹세 때문에, 즉 약속 때문에 그러한데, 이 하나님의 맹세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계속해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그 안에 들어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약속을 신약에까지 끌어당기기 위해서, 그들은 실패를 해도 실패를 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많은 왕들 중에서, 특히 요아스왕 때에 신앙을 부흥시켜서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여호와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하수에로왕 때인 에스더의 경우에도,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고 모르드개를 붙여서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사건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약속에는 실패라는 것이 없는데, 예수님 안에서 모든 것이 '예'가 되고 '아니오' 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다.

◈ 추락하는 중력을 온 몸으로 느껴야 !!

이것을 제대로 알려면, 이제 오후설교시간에 말했지만, '추락을 당하는 중력'을 온 몸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낙하산 없이 밑으로 마구 떨어지는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꾸만 높이 있으려고 하니 말이다. 자기의 위신과 체면이 그냥 아래로 '쏴악' 라고 떨어지는 그 기쁨, 그것을 돈으로 살 수도 없고, 그야말로 말로 다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말이, 우리교회 교인들을 옥상으로 데리고 가서 뒤에서 마구 밀고 싶다고 말이다. 그 떨어지는 기분, 물론 병원비는 좀 나오겠지만 말이다. 얼마나 즐거운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은 떨어지지 않아서 불행하다는 것이다. 일단 떨어지기만 하면 무슨 짓을 해도 괜찮은데 말이다. 이것도 방종인가?

◈ 주여, 이제야 떨어지게 하십니까?

아무튼 한번 떨어져보라는 것이다. "저는 주의 종이 아니라, 개떡입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떨어지면 세상에 무서울 것도 없고, 부러울 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초짜(?)들은 떨어질 때 뭐라고 기도하는고 하니, "주여, 더 이상 떨어지지 말게 하옵소서" 라고 말이다. 그러나 고참들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주여, 이제야 떨어지게 하십니까? 이왕 떨어진 것, 더 떨어지게 하옵소서" 라고, 그 기도내용이 바뀐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모두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자기 속에서 말씀하시는 이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것이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는 그야말로 이미 땅에 떨어지고 없으니 말이다. 이런 과정들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을, 그것을 바로 이스라엘의 전쟁이란 수단을 통해서 내부적으로 마구 마구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서 교재 12페이지를 보자.

** 이처럼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이스라엘이 주의 이름으로 앞장 세워져 다른 민족과 싸우게 된다. 약속의 땅이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중심에 놓고 그 이름의 능력으로만 유지가 가능한 땅을 의미한다.

여기 교재 52페이지에 나오는 것은 지난 시간에 한 것인데, 그리고 이 신명기 12장은 저도 그렇지만, 구약을 좀 공부하고 전공했다 싶은 사람들은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데, 물론 교인들은 별로 그렇지 않지만 말이다.

(신 12:5)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신 12:11)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 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

여기에 보면,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이 왜 중요한고 하니까,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될 수밖에 없는 목표지점이 어디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주의 이름이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구약의 신학자들은 엄청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이다.

구약 신학자들은 뭐라고 하는고 하니, 아브라함 언약을 이야기하면서, 아브라함 언약 자체를 구현하는데 있어서 내부적으로 내용을 나우어서, 원, 투, 쓰리로, 이렇게 3가지로 본질을 파악하려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논리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결부시켜야 하는데,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오는 '인격'과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내부적으로 이렇게 3가지로 나눠서 인격과 결부시키려고 하면 논리적으로 맞지를 않고, 중간에 다 절단되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왕과 땅과 자손, 이렇게 나라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혹은 국가와 땅과 자손이라고 말해도 되고 말이다. 이것이 예수님에게까지 가려고 하면 도중에 다 와해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국가와 왕도 날아가 버리고, 땅도 그렇고, 자손들도 혼혈아가 되고 말이다. 그러니 순수 혈통은 없다는 것이다.

◈ 안식년도, 십일조도 단 한번도 지킨 적이 없다 !!

그리고 땅도 나중에 규칙에 맞지 않는데, 안식을 할 때 70년을 지킨다고 하니까, 어떤 목사님이 말하기를, 왜 70년인고 하니, 70년을 7번해서, 490년 동안 한번도 안식년을 지키지 않아서 이것을 한꺼번에 다 지키게 하려고 70년을 쉬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맞는가? 세상이 무슨 이런 논리가 다 있느냐는 것이다. 주님이 어디 수학 선생님인가?

마지막이 되면 이런 계산자체가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 안식년은 단 한번도 지킨 적이 없는데, 십일조도, 희년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이것이 성경의 기본인데, 그들은 지킨다고 했지만, 주님은 한번도 지킨 적이 없도록 했다는 말이다. (이것은 드리는 사람들이 결정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 받는 분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목이 아프도록 외쳐도 사람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는데, 그들이 아침저녁으로 상번제를 아무리 드려도 하나님이 받아야 의미가 있지, 받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마음에 원할 때 받는데, 요아스 왕이 유월절을 드리는 경우나, 솔로몬 왕이 일천번제를 드릴 때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께서 원해서 받는 것이지, 그 다음 번의 일천번제는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이 행한다고 해서 받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렇게 기계적으로 반복한다고 해서 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이다. 이런 것이 나오니까 미리 이야기했는데, 제 아무리 똑같이 한다고 해도, 그렇게 한다고 인간의 마음이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배에 참석을 해도 지난주일 때 마음하고 지금의 마음하고 다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는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근본적으로 성경을 대하는 태도가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철학에서는 "존재가 무엇인가?" 라는 것을 항상 다루는데, 그것을 할 때 구체적으로 나오는데, 존재가 무엇인지 알려고 존재의 본성을 분해해서, 그렇게 거꾸로 소급해서 존재를 규명하려고 하는데,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가는 논리와 오는 논리가 서로 맞지를 않다는 것이다. 여기에 본성이 있고, 본질이 있고, 형상이 있다고 해도, 그런 것을 아무리 규명해도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이렇게 돌맹이가 있다면, 아무리 "둥글다, 차갑다, 딱딱하다" 라고, 이것을 백 날을 해도 그것이 곧 돌맹이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다' 라고 해도, 그것이 돌맹이만 그런 것이 아니니, 즉 다른 것들이 마구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 스피노자 - 돌맹이 속에는 신성이 있어서 !!

그래서 스피노자가 오죽 답답했으면, "그 돌맹이 속에는 신성이 있어서, '야야, 앞으로 이것은 돌맹이라고 해라'" 라고 해서 돌맹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범신론적이지만, 아무리 분해를 해도 그것에서 돌맹이라는 것이 나오지 않으니 말이다. 스피노자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 돌맹이에 신성이 들어 있어서 그것이 우리에게 가르쳐준다고 했겠느냐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무엇인가?" 라고 해도, 아무리 연구하고 분해해도 해답이 없다는 것이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는 것을 아무리 설명해도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선문답을 할 때 많이 애용하고 말이다.

그 선문답(禪問答)을 한번 시작해보면,

* 당신, 누구야?
* 예, 이근호입니다.
* 이근호가 정말 당신인가?
* 예, 그렇습니다.
* 그렇다면 이름을 바꾸면 당신은 이근호가 아닌가?
*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 예, 목사입니다.
* 그러면 목사를 안 하고 장사하면 이근호가 아닌가?
* 모르겠습니다.
* 모른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지금 당신이 있잖아?
* 모른다고 누가 '야, 이근호' 라고 부르면 돌아보지 않는가?
* 당신, 정말이지 정체가 뭐야?
* ? ? ?

그들은 이렇게 말꼬리를 잡는데 도사인데, 물론 일부러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 라고 해서, 문자로서는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불교에서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 라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데, 그렇게 한다고 천당에 가는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마음이 바뀌어야지 말이다. 부처의 마음이든, 아니면 예수의 마음이든 말이다.

◈ 불교는 결국 마음의 문제로 !!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이렇게 마음이 바뀌면, 그 마음은 남의 마음의 아니라 자기의 마음인데, 그렇게 되면 자아가 형성되는데, 즉 자기가 자기를 이야기하는 것밖에 되지 않으니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무아론(無我論)으로 나가는데, 즉 "나도 없고 마음도 없다" 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은 김용옥 교수가 주장한 '기(氣)' 밖에 없는데, 이 기(氣)는 모이면 '온(?)'이 되고, 흩어지면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이다.

그러나 성경말씀은 무엇을 이야기하는고 하니까, 하나님 약속에 의해서 모든 것이 다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창조물 속에 기운이 있는데, 즉 성령이 역사하고, 그렇게 성령이 역사는 것 중에 하나가 하나님께서 약속을 남겼고, 그러한 약속 가운데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저주받는 심판의 역사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말씀 외에는 우리가 믿을 만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인간의 마음이 들어올 자리가 어디 있는가?)

◈ 전부가 '주의 이름'으로 !!

앞서 말한 이런 것이 어디서 나오는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목적으로 삼는 것은, 즉 아브라함 언약에서 목적으로 삼는 것은 '인격' 인데, 즉 주의 '이름'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도 역시 주의 이름인데, '땅' 이라고 하는 것도 주의 이름을 위한 땅이고 말이다. '씨' 라는 것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후손도 말이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라는 그분의 기능이 전부가 다 주의 이름으로, 그 이름이 그 안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 모든 것이 '언약'대로 !!

하나님은 이러한 전쟁을 시작하자는 것인데, 그러니 이 주의 이름을 빼놓고는 모두가 다 우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우상을 쳐부수는 전쟁에 나서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전쟁의 내막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언약대로', 그렇게 이루어지고 말이다.

여기서 교재 52페이지를 보자.

** 이렇게 이스라엘에서 여호와 이름, 혹은 '주(主)' 개념은 약속한 바를 오직 주님 자신이 벌이시는 거룩한 전쟁을 통해서 성취해내시는 분으로 드러난다.

계속해서 출애굽기 15장의 말씀을 보자.

(출 15:3)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출 15:6)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출 15:13)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 왜 하필이면 오른손인가?

여기에 보면 6절에 '주의 오른손'이 나오는데, 왜 하필 오른쪽인가? 왼손은 왜 안 되는가? 예수님의 승천하신 자리도 주의 오른 편이고 말이다. 유대인들은 오른쪽은 축복의 자리라고 보고, 왼쪽을 저주의 자리라고 보는데, 즉 오른 쪽은 정상적인 창조행위이고, 왼쪽은 하나님 앞에서 뭔가 미흡함이 있는 버림받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왼손잡이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왼손잡이는 부끄러워하는데, 그의 부모가 낮에 만들었다고 말이다. ㅋㅋ)

그런데 이것이 과연 옳은 해석인가? 사실 이 오른손이라는 표현 자체가 좀 그런데, 오른, 즉 옳다는 의미로 들리니 말이다. 야곱도 어긋맞게 축복했는데, 아무튼 이것을 설명하는 방법은 신약에서 구약을 바라보는 방법밖에 없는데, 신약에 보면 하나님의 오른 편에 인자되신 분이 원래 자기 자리로 복귀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왼편에 누가 있는가? 그것은 좋은 쪽과 나쁜 쪽으로 구분하니, 아니고 말이다.

(행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구약에서 '주의 오른손' 이라는 것은, 장차 오실 주의 오른 편을 미리 앞당겨서, 그것에 대한 모형이라는 일반적인 답변 이외는 달리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즉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다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오른손은 모형이고 그 실체는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오른손으로 원수를 부순다고 하는 것은, 오른손에 무슨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직접 원수를 다루신다는 것이다. 그 원수는 주의 이름 말고 다른 이름에 해당되는, 즉 이스라엘 말고 다른 모든 민족들이 다 해당되고 말이다.

이제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교재 53페이지를 보자.

** 구약에서 '주' 라는 개념은 단순히 성도와의 협력자 정도가 아니다. 홀로 전쟁을 열심히, 기필코 처리해내시는 분이시다.

(사 37:32)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 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여기에 보면 남은 자가 시온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이렇게 시온을 누가 점령하느냐에 따라서, 즉 거기에서 구원자가 그곳을 점령했다는 증거로서 남은 자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남은 자는 이미 승리한 자에 예속된 자로서, 즉 남은 자도 이미 승리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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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