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111-(a)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3강
20080111-(a)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3강
이름 : 오용익(IP:59.3.147.55)
에베소서 제 3강 (이 근호목사, 2008년 01월 11일(a), 서울의존교회)
에베소서를 하면서 구약전체를 모르면 에베소서의 뜻을 모르게 됩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바울은 ‘전부터, 옛날부터 하나님께서 일을 어떻게 하셨는지 지금에 와서 다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옛날에는 어떻게 일이 되어 가는지를 몰랐었는데,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드디어 그 정답을 이야기 해 주셨습니다.’ 그것을 제가 쓰겠습니다. 에베소서 1:9에 나오는데 크게 쓰겠습니다. “비밀”
에베소서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비밀”이라는 말은 ‘안 가르쳐줘’ 그런 뜻입니다. 칠판에 씁니다. “너희들은 모르는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한테 묻지도 않고, 하나님께서 혼자서 일을 다 해 버렸습니다. 사람은 모르니까 하나님만 아시니까요. 에베소서는 ‘하나님께서 혼자 일을 다 하셨습니다’라는 것입니다. 혹시 일을 안 하고 남겨둔 것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혼자 일을 다 하셨기 때문에 남아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만약에 제가 일을 안 하고 여기 이렇게(강단 밑에) 숨어있는 다면 여러분에게는 아무 소리가 안 들리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숨어 있다가 나타나서 마이크를 대로 말한다면 제 목소리가 저 뒤까지 다 들리지요? 그러면 여기서 말을 누가 혼자 다 합니까? 제가 혼자 다 했지요? 제가 혼자 하는 말소리가 저 뒤, 끝까지 전파 되었잖아요. 저 끝에 앉아계신 분은 지금 누구의 소리만 듣고 있습니까? 제 소리만 듣고 있지요.
이게 비밀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세상사람 이야기는 시시한 거예요. 그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우리 다 아는 이야기이고 그런 것은 관심 없습니다. 뭐만 관심 있는가?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이야기를 다 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혼자만 이야기를 다 했다는 것이 끝까지 퍼지고 퍼지고, 퍼져 나갔습니다. 여기서 혼자서 종소리를 땡, 하고 치면 그 종소리가 모두에게 들려오는 겁니다.
그 소리가 들려올 때 “내가 종을 울렸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하나님! 종소리를 제가 냈습니다”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하나님! 저 멋진 목사님께서, 혹은 장로님이 종소리를 냈습니다”하는 것은 다 거짓말입니다. 댕그렁! 하고 소리를 내는 것은 누구 혼자 다 했습니까? 예수님 혼자 다 했어요. 10절에서는 이것을 가지고 “통일”이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 예수님이 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몸부림이 온 우주에 퍼졌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소리를 외치니까 그 온 세상이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리시니까 온세상의 구원될 사람은 그 피로 말미암아 구원되었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우리가 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정답은 ‘없습니다’가 정답입니다. 우리가 할 것은 없는 겁니다.
같은 교인인데 대학시험에서 어떤 교인의 학생은 합격이 되었습니다. 어떤 학생은 합격되지 못했습니다. 자, 합격되지 못한 사람이 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합격되지 못했건, 합격되었건 할 것이 없어요. 그런데 합격되지 못한 사람은 또다시 공부해서 재수해서 다음에 또 시험 치려고 합니다. 그것은 자기 성질입니다. 가만있으면 심심하잖아요. 그러니까 자꾸 뭘 하는 겁니다.
그런데 다음에 또 떨어졌어요. 그래도 그 사람은 구원받는데 있어서는 지장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학을 두 번 떨어지든 세 번 떨어지든, 대학은 떨어졌지만 천국에 합격되는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천국의 합격은 누구 때문에 들어가는 거지요? 자기 수능 성적이 좋아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누구 때문에 들어가는 겁니까? 예수님 때문에 들어가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땡, 하고 종을 친 그 효력이, 그 사람이 대학시험을 잘 치든 못 치든, 대학에 붙든 안 붙든 상관없이 예수님 덕분에 그 사람은 예수님 안에서 통일되게 되어 있어요. 에베소서가 어려워서 그림으로 그리면서 쉽게 하겠습니다. 여기 종을 그립니다. 이 종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땡, 하고 울리면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야, 예수님 소리다” 하고 구원받는 거예요. 자기가 한 것이 있어요, 없어요? 가만있어도 들려오는데 어떻게 해요.
가만있는데 땡, “너 대신 내가 피를 흘리고 너는 죄 용서를 받았단다. 나 때문에 너는 천국에 가게 되었어”라는 소리가 들려 왔다는 말이죠. 제가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내가 할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왜 그렇습니까? 종은 저쪽에서 땡, 하고 울렸기 때문에, 그 종소리가 나에게 도착했기 때문에 내가 할 것은 일체 없지요.
다시 말합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은 내가 노력한 것이 아니고 뭔가 종소리가 들려왔는데 그 종소리가 무슨 종소리다? 하나님의 감추어진 비밀인데,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다 씻었기 때문에 너는 천국 간다”는 그 종소리가 우리 귀에 들려와서 그것을 들었던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종소리가 바다물속에 있다고 칩시다. 바다물속에서 종이 땡, 하고 울렸어요.
바다가 여기 있고, 육지에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종소리는 바다 밑에 깊숙한 곳에서 땡, 하고 종소리가 울렸어요. 그러면 종소리가 가만있습니까, 퍼집니까? 퍼지게 되겠지요? 종은 물밑에 있고 물위에 올라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여기 물위에 있는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은 “얘! 저 바다 밑에서 무슨 종소리가 들린다. 종소리를 들어보니 ‘장차 오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다 씻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앞당겨서 구원을 받는다”고 들려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쪽 사람은 “몰라! 나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무슨 소리가 들렸지? 아무 소리도 안 들렸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 시대가 구약(옛날)이라면, 그때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가지고 지키면서도,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의 종소리가 계속 들려 왔다는 말이죠. 그런데 이 종이 바다 밑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해처럼 불쑥 바다 위로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드디어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옛날 바다 밑에 있을 때는 이것이 비밀이었는데, 이것이 바다위로 쑥 올라오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쑥 올라오시면서 하는 말이, “나는 창세전부터 계속해서 종소리를 울리고 왔었다”라고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너희들이 이 땅에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의 구원의 종소리를 계속해서 울려 왔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여기 있는 산이 있고, 바다가 있고, 여기 있는 이 모든 것들은 처음부터 종의 진짜 본 모습이 예수님인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세상의 이런 것들이 배치가 되어 있다. 이 전 세계를 처음부터 옛날 전부터 만들어 놓았던 당사자가 바로 나다”라고 불쑥 올라옵니다.
불쑥 올라오게 되면 전에부터 종소리를 들었던 이 사람들은, ‘아하! 내가 구원받은 것이 어디서 종소리가 들리나, 했더니만 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창세전에 다 하셨기 때문에 내가 내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용서를 받아서 구원되었구나’라고 새삼스럽게 예수님을 반기게 됩니다. “예수님! 당신은 창세전부터 계셔서 우리를 만드신 분이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꾸준하게 일해 왔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비밀의 주인공이십니다”라고 반기게 되겠지요.
제가 방금 이야기 한 내용이 에베소서 1:1-9까지의 내용입니다.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것은 뭐가 있습니까? 역시 우리가 할 것은 없습니다. 여기 있는 한목사님이 저의 옷을 잡아당길 때, 묻지요.
“이 근호 목사, 당신이 할 것이 뭐가 있어요?”
“없지요.”
“그러면 당신은 지금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지금 끌려가고 있습니다.”
끌려가면서 내가 따로 할 것은 없지요. 끌어당기는 그것을 에베소서 1장에서 그것을 무슨 능력이라고 하느냐 하면, 그것을 “부활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사람을 잡아당기는 능력입니다. 저는 오늘 의존교회 강의에서여러분이 잘 들어보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잡아당긴다는 그 이야기를 에베소서 1장을 통해서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을 잡아당깁니다. 실감하십니까? 여러분들을 그냥 두지 않고 잡아 당겨요. 실감나게 하기 위해서 한목사님이 수고좀 해주세요. “어어? 어어?” 이렇게 잡아당김을 당할 때 이것을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제가 지금 이 쓸데없는 것 같이 들릴수 있는 소리를 왜 하느냐 하면, 신앙생활을 내가 하는 그런 신앙은 애초에 성경에 없다는 말입니다.
“목사님! 천당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를 제가 믿습니다.”
이런 것이 성경에 없습니다. ‘제가 열심히 믿고자 합니다.’ 이런 것은 없습니다. 이런 법으로 구원받지를 않습니다. 쉽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이것이 간단하고 쉬운 내용은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한 것이 은혜롭다고 해서 너무 쉽게 보면 안돼요. 어느 정도로 어려우냐 하면,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도저히 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한 이야기만 에베소서 1장에 다 깔려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강의가 저에게는 버겁습니다. 여러분이 경험해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하는 이야기만 고스란히 다 담겨 있어요. 이것을 어떻게 한꺼번에 할까, 그 아이디어를 짜낸 것이 바로 한 윤범 목사님이 와서 수고케 한 것입니다. 신앙이란 뭐라고요? 끌려가는 겁니다. 처음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 ‘종이 어디 있지?’ 하고 내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나는 가만있어도 저쪽에서 종소리가 땡, 하고 치면 그 종소리가 나에게 와서 “종을 친자가 누구야”하고 그쪽을 보듯이 보고, “내가 종인데”하고 예수님이 나온다는 말이죠.
그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종인데”하고, 나를 강제로 붙잡아서 잡아당기면, 우리는 “곱게 가겠습니다”라는 법은 없고, 우리는 자꾸 다른 쪽으로 가고 싶어 하면서도 “어어? 어어?” 하면서 끌려가기는, 종소리가 들렸던 그쪽으로 당겨가는 겁니다. 그게 바로 에베소서 1장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잡아당기면 우리는 그냥 끌려가는 겁니다. 우리보다 예수님이 힘이 더 셉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죽었다가 다시 깨어날 수 없지만,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했기 때문에, 부활의 힘은 우리보다 힘이 셉니다. 예수님은 죽었던 우리를 부활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마리아,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죽었다고 사람들이 다 울었습니다.
얼마 전에 이천에서 난 화재로 사람들이 한 40명 이상이 죽었지요? 지금쯤 한 두명 사흘만에 부활해서 다시 돌아다녀야 하는데 그런 일은 없지요? 사람은 죽음한테 이깁니까, 집니까? 사람은 죽음에게 못 이깁니다. 유일하게 죽음을 이기신 분이 계십니다. 누구십니까? 예수님입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의 종소리입니다. 부활의 종소리에요.
부활의 종소리를 듣고 우리가 알아서 깨어나는 것이 아니고, 부활의 종이 위력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와서 잠자고 있는 우리가 깨어납니다. 그것이 에베소서 5장에 나옵니다.
에베소서 5: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잠자는 자여 그만 졸고 일어나라.” 그것이 아니고, “잠자는 자여” 어디서 일어나라는 말입니까? 어디서 일어나라?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서? 그것이 아닙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이것이 종소리입니다. 땡! “잠자는자여 죽은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성경은 굉장히 신기해요. 우선, 죽은데서 일어나는 것은 우리가 애쓴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가만있어도 종소리가 들리면 그 종소리가 가만있는 우리를 부활의 세계로 깨어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다음에, 깨어나면 우리를 끌고 부활의 세계로 데려갑니다. 그 다음에가 중요한데 먼저 정리하겠습니다.
첫 번째, 부활의 종소리가 들린다.
두 번째, 우리를 끌고 가신다.
세 번째,(여기가 중요한데) 우리는 안 가려고 한다.
이 세 번째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끌고 가려고 해도 우리는 안 가려고 해요. 그러니까 “예! 가겠습니다.” 이런 사람은 없고, “어어! 왜 자꾸 당기지? 어어?” 이렇게 강제로 우리를 당겨갑니다. 강제로 끌고 가는 이유가 이번 강의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자진해서 예수님 계신 곳으로 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 우리는 ‘나’를 좋게 하는 예수를 따로 믿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린이들은 이점에 대해서 이해하기가 참 힘든데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여기에 어린이가 매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엄마가 새 매직을 주기 위해서 ‘헌 매직을 버리고 따라 오라’고 할 때, 우리는 여기에(헌 매직) 정이 들었어요. “엄마! 나는 이것이 더 좋으니까 엄마가 주겠다는 그 새것은 싫어”하고 자기가 갖고 있는 이것을 계속 쥐려고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 매직을 바로 ‘나’라고 봅니다. ‘나’는 ‘나’를 잃어버리기 싫어해요.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게 누구인지 압니까? 나한테는 ‘나’가 제일 좋아요.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할 때, 정답은 “아빠, 엄마를 좋아하는 ‘나’가 제일 좋아.” 이것이 정답입니다.” 우리는 죄인인데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서 대신 죽었습니다. ‘우리는 나쁜 사람인데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신 죽었습니다’ 할 때 우리는 나쁜 사람이지만, 나쁘다 해도, 나는 그 나쁜 ‘나’가 싫지가 않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이 뭐냐? 하나님이 ‘나’를 나쁘다고 해도, ‘나’를 저주라고 해도, 그래도 ‘나’는 ‘나’가 좋아요. 이 세상에 ‘나’보다 더 좋은 것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그 좋은 ‘나’를 구원해주시는 예수님이 좋아.” 이렇게 됩니다. 이것은 마귀가 심어준 가짜 예수입니다.
쉽지가 않습니다.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1. 어디선가 뭐가 울린다? 종소리. 그 종소리는 내가 듣고 싶지 않더라도 내 귀에 들린다.
2. 그 종소리가 난 곳에서 종이(어떤 분이) 올라와서 나를 끌고 자기 세계로 간다.
3. 우리는 끌려가면서도 안 갈려고 한다.
4. 그 이유는, 내가 나에게 정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좋아!’
그래서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원하는가? 나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고, 나한테 와서 나를 좋게 해서 데려가는 그런 하나님, 그런 예수, 그런 성령, 그런 삼위일체, 그런 교회, 그런 목사, 그런 사람을 우리는 제일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는 ‘나’보다 ‘나’를 더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나’외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날 사랑해도, 내가 날 사랑하는 만큼 그 정도로는 날 사랑하지 않아요. 그 이유가 뭔지 압니까? 예를 들어 제가 돈이 한 50억만 있었으면 좋겠다고 합시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50억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50억을 턱, 주십니까? 보세요. 진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채워줄 사람은 누구입니까? ‘나’ 아닙니까? 고 3학생들은 서울대학 가고 싶어요. 그래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서울대학에 들어가고 싶습니다.” 수능 400점 만점에 120점이 나왔어요. 서울대학에 못 들어가지요. 보세요. 나보다 더 ‘나’를 아끼는 사람은 없어요. 내가 가장 ‘나’를 아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말 하나님이 날 사랑한다면 하나님이 내 소원을 들어줄 때 나도 그 다음에 당신을 사랑할게. 그제 사 당신이 날 사랑하는 것을 비로소 알고 나도 당신을 사랑할게’라고 나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이 만약에 100명이 나오면 그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아니고 누구의 교회입니까? ‘나’ ‘나’들이 모인 ‘우리’교회가 되지요. 전부다 ‘나’밖에 모르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지요. 거기에는 주님에게 안 끌려가는 사람들만 다 모여 있지요. 거기에는 주님은 싫고 ‘나’를 더 좋아하는 사람들만 다 모여 있지요.
애한테 물어 보는 겁니다. “얘야! 너는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엄마 있을 때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있을 때는 “아빠가 좋아.” 둘 다 있을 때는 “둘 다 좋아” 이렇게 하거든요.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 엄마가 애를 때려 보세요. 대번에 뭐라고 합니까? “엄마, 미워”라고 하지요. 그러면 결국 그 애는 누구를 좋아한다는 말입니까? 엄마 아빠를 좋아하는 ‘나’를 좋아해 달라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이제 어른들의 이야기로 해 봅시다.
“하나님이 좋아, 부처가 좋아?”
“하나님이 더 좋아.”
이것은 “부처보다 하나님을 더 좋아하는 그 ‘나’를 하나님은 더 좋아해 달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전부다 엉터리라는 겁니다. 교회고, 예수고, 천국이고, 이것은 다 가상이고 허구고, 엉터리입니다. 자기가 다 지어낸 것인데 심심하니까 거기에 예수를 가져다가 붙인 겁니다. 예수를 파스 붙이듯이 철썩 붙이는 겁니다. 그것이 붙어 있으면 천당 갈 줄 알고.
에베소서는 바로 ‘그것이 몽땅 가짜입니다’ 하는 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습니다. 다 가짜입니다. 정말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했다는 종소리(내가 너를 구원했단다)가 우리 귀에 쟁쟁 울려온다면, 그 순간 그 사람은 누구 생각이 없어야 합니까? ‘나는 내가 좋아’라는 이것이 없어야 됩니다. ‘내가 너를 구원 했단다’가 들려올 때 ‘어? 나는 생각도 안했는데? 그럼 내가 지금껏 애쓰면서 교회 다니고, 수고한 모든 것은 아무 소용없네?’ 아무 소용없지요.
내가 힘들게 교회오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봉사하고, 청소하고 이런 것은 아무 소용없어요. 이것 가지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것은 혹시나 이런 것을 열심히 하면 나의 가치가 높아져서, 하나님께서 ‘너, 착하다. 다른 사람은 지옥 보내고 너는 천당 보내주마’고 하나님께서 후한 점수를 매겨 줄까봐서, 자기가 꾸민 거지요.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 홀로 일해서 구원받기 때문에, 예수님의 종소리가 도착해서 구원받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하는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겁니다.
첫 번째, 종소리가 우리를 구원하지요?
두 번째, 끌고 가지요?
끌고 갈 때에, 자꾸 뭐라고 하시면서 끌고 가느냐 하면, “너는 종소리를 믿나, 너를 믿는가? 예수를 사랑하는가, 너를 사랑하는가?” 그것을 물어 가면서 끌고 가는 겁니다. ‘백날 해도 나는 내가 더 좋아. 나는 내가 더 좋아.’ 우리는 늘 그러면서도 끌려가는 거예요. 지금 하는 이야기는 내가 믿는 예수는 내가 조작하고 지어낸 가짜 예수라는 이야기를 지금 하는 겁니다. 가짜 예수의 특징은 내 소원대로 다 들어주는 예수입니다. 가짜 예수하고 ‘나’ 사이에는 다투는 법이 없습니다.
“예수님! 이거 해주세요.”
“그래! 해줄게”
“예수님, 이것도 해주세요.”
“오냐, 해 줄게.”
“제가 열심히 기도했는데 응답해 주실거죠?”
“오냐, 해줄게.”
가짜예수는 우리하고 다툼이 없지만, 진짜 예수는
“주님! 이렇게 기도했는데 해주세요”
“내가 미쳤나? 너의 기도대로 하게? 나는 네가 무슨 짓을 해도 일체 탓하거나 나무라지 않고, ‘잘했다’ 하는 것도 없이, 나는 내가 한 십자가의 능력으로만 너를 끌고 간다. 그러니 이제는 잊어버려라. 뭘? ‘내가 나쁜 일을 했고, 좋은 일을 했고’라는 그런 것을 제발 잊어 버려라. 잊어 버려라. 잊어버려라.”
이천공장화재사건으로 자식이 죽었다고 노모가 우는 장면이 나왔어요. 그때 예수님 앞에서 “예수님! 제 자식이 죽었습니다”할 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잊어버려라!” “예수님 제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제 자식을 이렇게 죽게 합니까?” “뭐가 잘못된 것이 아니고 아예 잊어버려라.” 또 어떤 사람은 사법시험에 합격해서 “예수님, 드디어 판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잊어버려라!” 어떤 목사님이 “교회가 막 부흥됩니다. 지난주에 10명이나 또 늘었습니다.” 주님께서 뭐라고 하겠습니까? “잊어버려라!”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왼손이 하는 것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입니다. 보세요. 우리가 그렇게 쉽게 봤던 이 성경이 얼마나 불가능한 것을 요구합니까? 우리가 이룰 수 없는 것을 요구합니다. “잊어버려라!” 그런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겁니다. 왜 잊어도 괜찮은 겁니까? 성경에 의하면 누가 끌고 갑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끌고 가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잊어 버려도 상관없이 구원이 되는 겁니다.
끌고 가시는 분이 자꾸 ‘잊으라’고 하면서 끌고 가기 때문에, 끌고 가는 것이 있는 이상은, 끌려가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신경 뚝, 끊어도 상관없습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그래서 사랑에는 뭐가 없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요일 4:18) 사람이 언제 두려움이 생기냐 하면, ‘나’를 생각할 때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걸 실험해 봅시다. 여기 폐가(廢家)가 있습니다. 아주 무서운 곳입니다. 옛날에 처녀 귀신이 열두 명 나왔던 곳이고, 장가못가고 억울하게 죽은 총각귀신들이 스물 댓씩 나오는 폐가가 있는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여기에 의존교회 어린이들이 있습니다. 으스스하죠. 그런데 여기서 땡, 하고 종소리가 들려요. “너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내가 이미 모든 것을 용서했다.” 이것이 들려옵니다. 이것이 몇 번이었습니까? 1번이었죠.
지금 무서운 공동묘지에 있더라도, 그 소리만 들려오면 ‘어머나, 구원받았다’ 하잖아요. 그 순간 우리가 지금 어느 곳에 와 있는지 잊어버리게 된다는 말이죠. 그런데 종소리가 안 들리는 사람 같으면, ‘여기 어디야? 공동묘지 아냐!’ 결국 종소리가 안 들릴 때는 누구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까? ‘나’를 생각하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법칙을 생각해 봅시다. ‘나’를 생각하면 무조건 두렵고, ‘나’를 잊어버리면 무조건 두려움도 없어지고. ‘나’를 생각하면 두려움이 찾아오고, ‘나’를 잊어버리면 두려움이 날아 버립니다.
유치원에 애를 보냈습니다. 유치원에 애를 보낼 때, 그 유치원에 보낸 애를 생각하면 두려움이 옵니다. ‘그 애가 지나가는데 갑자기 차가 받아 버리면 내 아이는 어떻게 하지?’ 걱정이 되지요. 그런데 유치원에 애를 보내놓고 그런 걱정을 하고 있을 때, 뭔가 땡, 하고 종소리가 들리면서 “잊어버려라. 내가 그렇게 걱정하고 있는 너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소리가 들릴 때, 그 순간 애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를 잊어버리죠.
잊어버리고 ‘주여! 이렇게 구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있는데, “엄마, 나 유치원 갔다가 왔어”하고 와버렸어요. 그러면 그 애가 유치원 갔다 올 때까지 누가 보호했습니까? 주님이 보호를 한 거예요. 이것을 가지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 겁니다. 그것을 에베소서에서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대로, 은혜의 절차대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용어가 다 너무 어려워서 하나하나 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하나하나 따져 가면 너무 어려워서 뒤죽박죽되기에 지금 쉽게 가는 겁니다. ‘은혜의 경륜’이란 ‘은혜의 절차’거든요. 하나님의 은혜만 나오는 것, 그것을 제가 종소리라고 했지요. 종소리가 오기까지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때로는 우리 애를 유치원에 보내기도 하고, 때로는 대학시험에 떨어지게도 하고, 때로는 사법시험에 붙게도 하면서, 사건 사건들을 일으키면서 “네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만약에 집안에 돈이 백억이 들어왔다면 그 순간에는 기쁘지만 그 다음부터는 불안합니다. ‘이 백억을 어느 인간이 훔쳐갈까’하는 걱정이 됩니다. ‘나’만 생각하면 없는 두려움도 방문하고 종소리만 들리면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예수님의 십자가용서하심, 그 사랑만 오게 되면 사라지니까, 주님께서 두려움도 주고, 또 사라지게도 하는 것은 우리가 끌려가면서) 제발 너 생각을 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은혜의 과정들이고 절차들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그러면 목사님! 십자가 종소리만 듣고 밥도 먹지 말라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밥을 먹게 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밥 먹는 순간에 종소리를 잊어버립니다. 밥을 먹으면서, 십자가! 김치 먹고, 십자가! 이렇게 먹는 사람 못 봤습니다. 정말 그런 사람이 있다면 약간 돌은 사람입니다. “꽁치, 고등어, 내가 먹을 것을 형이 다 먹었어!”라고 이야기하죠.
꽁치, 고등어를 동생이 먹으려고 하는 순간, 벌써 두려워요. 왜냐하면 벌써 형이 있다는 말이죠. 형이 힘이 세기 때문에 더 빠른 속도로 고등어를 집어 간단 말입니다. 고등어를 먹을때 두려움이 생기는 겁니다. 왜? 내가 그것을 먹어야 되니까. ‘나’를 생각하니까 두려움이 온다는 말이죠. ‘(내가) 저것을 먹어야 되는데….’ ‘혹시 내가 먹으면 형이 때릴지도 모르는데 … .’
그렇게 벌벌 떨고 있는데, 종소리가 땡!, 하고 울리는 거예요. “너는 고등어를 못 먹어도 구원받았다.” 종소리를 그렇게 듣고 난 뒤에, 고등어를 형에게 빼앗겼습니다. 그 빼앗긴 것을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은혜의 절차(경륜)입니다. 이렇게 쉽게 해도 되는지 의심이 되는데, 이렇게 너무 가볍게 해도 되는 문제인지 약간 의심이 생깁니다만, 이것은 어릴 때나 어른이 되어서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종소리는 늘 들리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한번 정리하고 넘어갑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들을 일으키는데, 그 일들을 통해서 “나는 역시 ‘나’가 최고야!”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일들만 자꾸 일으킵니다. ‘예수고 하나님이고 나는 지금 돈이 좋아!’ 그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거예요. 애라도 하나 낳아 보세요. ‘예수고 뭐고, 나는 나의 애가 천재에다가 1등하면 제일 좋아’ 라는 것이 계속 오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이 건물을 하나 지었다고 하면, ‘예수고 하나님이고 간에 나는 이 건물이 든든하게 세워져 있고, 여기서 먹고 살 집세나 잘 나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합니다. 주식투자를 한다든지 복권을 산다든지 하면 그 복권이나 주식에 누가 따라 가냐 하면, ‘나’가 따라갑니다. ‘내복권이 당첨되고 내주식이 오르게 한다면 그것은 좋고, 누구든지 내 복권을 떨어뜨린다든지 내 주식 값이 떨어지게 한다면 누가 되었든지 나는 싫다. 왜? 나는 중요하니까.’ 그러한 은혜의 일들을 평생 동안 반복해서 일어나게 합니다.
저는 길을 걷는데 성질 급하게 걷다 보니까, 바짓단이 바지직, 하면서 실밥이 풀어지면서 찢어졌어요. 그래서 바짓단이 내려가서 질질 끌리는 겁니다. 그 때 저는 ‘주여! 왜 제게 두려움을 주십니까?’ 그런데 만약에 종소리가 들렸다면, “바짓단이 찢어져도, 실밥이 풀어져도 천당 가는데는 아무 지장 없는 그런 방법으로 나는 너를 잡아당기고 있는데, 너는 잡아 당겨가는 것 같지만, ‘내 바짓단’, ‘내 바짓단’ 이렇고 있다”는 말이죠. 예수님보다도 하늘나라 보다도 뭐가 더 중요해요. ‘지금 내 바짓단이 떨어졌는데 저것을 언제 기워달라고 이야기를 할까’를 먼저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방금 이야기한 이것을 가지고 뭐라고 하는가? 모든 만사가 예수 안에서 뭐 되게 한다?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엡 1:10). 세상의 모든, ‘바짓단 터지고, 애가 유치원에 다녀오고, 누가 더 빠른 속도로 고등어를 집어 먹느냐’, 이런 모든 일이 그 안에서 전부다 누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땡! 누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 ‘종소리가 이미 창세전부터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사도바울이 기쁜 소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20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시장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에 치여서 1미터 붕, 떴다가 떨어졌어요. 떨어질 때 대번에 무슨 생각이 납니까? 누가 제일 중요하다고 했습니까? ‘나’가 제일 중요하지요. 그런데 차가 와서 나를 들이 받았지요. 그 차가 ‘나’를 들이받도록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했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누구를 공격했어요. 나를 공격했어요. 섭섭하지요? 기분 나쁘지요.
그런데 지나가던 이 근호 목사님이 와서, “집사님! 차에 부닥친 것이 아니라 은혜가 와서 집사님을 받았습니다”라고 이야기할 때, 그 말을 이해하겠어요, 이해 못하겠어요? 이해 못하죠. 차가 와서 받아서 지금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는데 이게 무슨 은혜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우리밖에 모르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죽여 버리는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를 죽여 버려야, 우리는 죽으면 끝이고 절망이잖아요, 그런데 절망이라고 여기는 그 죽음 속에서도 주께서는 그 다음 은혜가 준비되어 있는데 그 은혜는 뭡니까? “죽은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는” 그 능력이 바로 우리 딸이 바짓단을 깁게 하는 은혜가 되는 겁니다. 똑같은 성질의 은혜거든요. 내가 목마를 석류차를 마시게 한 것도 은혜 맞지요?
이것도 은혜가 맞지만, 마시가다 내가 즉사했을 때, 죽어버린 나를 다시 살려내는 그 은혜도, 전에 석류차를 마실 때의 그 은혜 안에 들어 있었다? 안 들어있었다? 들어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전에 석류차를 마시고 있었을 때는 뭐라고 여겼습니까?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목마를 때 이것을 주시니 감사합니다’하고 우리는 자기 목마른 것 해소된 것을 좋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것보다 천배 만 배 좋은 것이 뭐냐? 이것 먹다가 즉사해도 즉사한 우리를 죽은데서 부활로 살려 낼 수 있는(능력) 겁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 하면, “목사님! 살려준다는 말만 하고 진짜로 안 살려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나는 예수를 못 믿지. 종소리만 들릴 뿐이고 그 종소리가 나를 다시 일으키는, 곧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고 성경에 약속되어 있지만 안 깨워주면 어떻게 하나?” 합니다. 그게 바로 17절입니다.
에베소서 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이것이 종소리인데, 하나님의 성령이 오게 되면 도저히 믿지 못할 것까지 믿어지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납니다. 죽은 나도 예수님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것처럼 죽은 나도 다시 사는 것이 왠지 믿어지는 겁니다. 믿어질 때 그것은 무엇이 왔기에 믿어졌습니까? 성령께서 약속대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지 못할것 까지 믿어지는 은혜를 받는 겁니다.
그러면 그 성령은 어디서 오는가? 이것은 외워두세요. 예수님께서 피를 흘릴 때 피로 구원받습니다. 피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하면, ‘성령도 줄게’가 포함된 채 피를 흘렸습니다. 예수님의 피, 피흘림 속에는 ‘내가 왜 피를 흘렸는지의 그 의미까지 알려주는 성령도 줄게’가 포함되어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엡 1:17) “약속의 성령”을 줘서 다가가는 겁니다. 이것이 땡, 하는 종소리입니다.
이 첫째 시간을 끝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보고 ‘하라’하는 것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신신당부 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보고 무엇을 하라는 것이 아니고, ‘네가 그것을 믿나’라고 묻습니다. ‘하라’고 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르지요? ‘네가 이것을 믿나? 종소리가 분명하게 들리는데 그 십자가는 너하고 관련이 있다. 십자가 피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다? 그 십자가 피안에는 죽은 너를 다시 살리는 은혜가 들어 있다는 것을, 그 능력이 있다는 것을 네가 믿나?’라고 묻는 거예요. 이것이 에베소서 1장의 흐름입니다. 다음시간에는 ‘교회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