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2:19-23 / 하나님의 구원방식
하나님의 구원방식 2007년 12월 16일 본문 말씀: 사사기 2:19-23 (삿 2:19) 『그 사사가 죽은 후에는 그들이 돌이켜 그 열조보다 더욱 패괴하여 다른 신들을 좇아 섬겨 그들에게 절하고 그 행위와 패역한 길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삿 2:2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여 이르시되 이 백성이 내가 그 열조와 세운 언약을 어기고 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은즉』 (삿 2:21) 『나도 여호수아가 죽을 때에 남겨둔 열국을 다시는 그들의 앞에서 하나도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삿 2:22) 『이는 이스라엘이 그 열조의 지킨 것 같이 나 여호와의 도를 지켜 행하나 아니하나 그들로 시험하려 함이라 하시니라』 (삿 2:23) 『그 열국을 머물러두사 속히 쫓아내지 아니하시며 여호수아의 손에 붙이지 아니하셨음이 이를 인함이었더라』 하나님의 사람 다루심은 이러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관심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에게도 관심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즐기는 것에만 관심 둘 뿐입니다. 성경 말씀에 관심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마치 성경 말씀에 자신이 대단한 관심이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이 지켜 내므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이것은 여전히 자신의 본색을 몰라서 그러합니다. 성경 말씀에, ‘인간은 순종치 아니한다’라고 나와 있으면 당연히 인간은 순종치 아니하는 겁니다. 그런데 마치 순종치 아니함을 넘어서 자기만큼은 순종하리라고 주장하곤 합니다.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사람이 일부러 죄 짓는 것도 나쁘지만 자신의 힘으로 바르게 살아가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더욱 더 나쁜 생각입니다. 그 사람은 성경 전체를 못보고 있는 자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전체를 다루는 원리가 나옵니다. 그것은 그 어떤 인간은 하나님에게 순종치 못하다는 겁니다. 만약에 인간이 참으로 하나님에게 관심을 갖고 순종한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원리를 하나님께서 사용할 필요조차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하여튼 하나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한다는 배경 안에서 오늘 본문과 같은 원리는 작동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생각해보면, 먼저 지독스럽게도 하나님의 말씀에 애를 먹이는 못된 자들이라는 선입견이 들 것입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우리의 선배들입니다. 예수님의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천국에 함께 살고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들이 무슨 수로 천국에 갔을까요?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작동하는 원리가 개입되었기에 나온 결과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나쁜 선입견이 있더라도 이스라엘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 속에 신앙인도 있고 구원받은 자들도 넉넉하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구원받은 원리대로 오늘날 우리도 구원받는다면 그들에게 작용하는 하나님의 개입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는 것은 천성적으로 하나님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세상적인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껍데기는 잔뜩 종교적 폼을 잡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다 위장술입니다. 이 위장술은 원래 자신이 원하는 세상 것을 빠른 시간 내에 자기 것으로 삼고자 해서 연기를 피우는 과정에 들어있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처럼 하나님을 버릴 때, 하나님은 그냥 방치 하실까요? 제가 처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사람들은 성경 말씀에 관심이 없어도 하나님은 관심이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합니다. 말씀에 관심 있는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에 적힌 내용대로 하나님의 자기 사랑을 펼치시는데 그 사랑의 대상이 바로 성도라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나오시는 그 시간에 인간은 뭘 합니까? 인간들은 그저 순종치 아니한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청춘 남녀가 연애를 합니다. 주말마다 모처에서 만납니다. 서로 맹세를 진하게 합니다. 그러다보니 이 두 사람의 삶의 목적은 성경 말씀이 아니라 보고 싶은 사람은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그 순간이 됩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재미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을 보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애인을 만나고 즐기는 보람으로 사는 겁니다. 자 이토록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없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께서 그냥 방치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여기에 오늘 본문에 입각한 원리가 작동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청년이 믿던 그 여인이 변신케 합니다. 여자쪽에서 먼저 “우리 그만 만나자. 나 식상했다. 만나는 것도 별 재미없어서 나는 너 보다 더 나은 다른 남자 만나고 있거든”하고 나옵니다. 이럴 때, 그 남자 청년은 억장이 무너집니다. 그동안 그 여자에게 쏟아부은 자금도 시간과 정성과 애간장 태움이 다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결코 이 청년은 예수님의 재림 때문에 그 여자와 만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그 여자만 만나는 즐거움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이고 십자가 복음이고 전혀 무관심하게 일관했습니다. 그것이 또한 그 청년의 본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쪽에서 그 청년을 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청년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기쁨의 원천이라고 간주했던 그 여인으로부터 날카롭게 박대받았습니다. 세상이 다 꺼져버릴 듯한 느낌을 받았을 것입니다. 결별 통보는 곧장 하나님에 대한 항의로 이어집니다. 물론 구원되어야 될 청년이라는 조건 하에서 말입니다. “하나님, 왜 저를 비참하게 만드십니까? 나는 그동안 저 여인과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서 행여 저주나 악운이 끼지 않기 위해서 틈만 나면 성경보고, 틈만 나면 기도하고, 그동안 교회 제반사에 출석률도 뛰어났고 헌신적으로 목사님의 말씀에 순종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무슨 억한 심정으로 저는 만인으로부터 개망신 당하게 합니까?”라고 하나님에게 항의합니다. 바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기도에 이런 기도보다 더 위대한 기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죄성이 낱낱이 드러나는 순간을 묶어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즉 결코 내 공로로 구원될 수 없는 이유를 유감없이 확인되어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한낱 여인으로부터 배신당할 때, 그리고 그토록 믿는 자로부터 실망스러움을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참된 기도를 하게 됩니다. 이 기도의 모습은 마치 예수님이 눈 앞에 있다면 예수님 멱살이라도 잡고 흔들 기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성도로 하여금 딜레마, 즉 곤경에 빠트리는 방식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를 이런 식으로 구원하실까요? 그것은 우리 마음 속에 하늘의 것이 아니라 세상 것으로 가득차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즉 간식만 입에 달고 다니면서 밥과 김치를 싫어하는 아이와 같습니다. 엄마는 그 아이를 그냥 방치 하지 않고 따라다니면서 숟가락으로 밥 한 술 퍼서 그 위에 김치 얹어 억지로 먹입니다. 그래야 그 아이가 생명을 부지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안에 오직 하늘의 것만 담기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성도로 하여금 왜 자기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대신 죽어야만 했던가를 알게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 속에 얼마나 주님의 사랑을 싫어하는 것이 들어있는지 스스로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사기-2007/10강-삿2장19-23(하나님의구원방식)-jdg071216.mp3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사기-2007/10강-삿2장19-23(하나님의구원방식)-jdg071216.wmv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사사기-2007/10강-삿2장19-23(하나님의구원방식)-jdg071216.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