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 8:8-14 / 빨리 달리라
아가 8:8-14 / 빨리 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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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달리라
2007년 10월 7일 본문 말씀: 아가 8:8-14
(아 8:8)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아 8:9) 『그가 성벽일진대 우리는 은 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진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아 8:10)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아 8:11)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두고 그들로 각기 그 실과를 인하여서 은 일천을 바치게 하였구나』
(아 8:12) 『솔로몬 너는 일천을 얻겠고 실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아 8:13) 『너 동산에 거한 자야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
(아 8:14)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
사랑이라고 하면 보통 관념적이고 추상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의외로 사랑이란 과격합니다. 그리고 파격적입니다. 막무가내입니다. 거친 호흡과도 같은 것입니다. 동물적 본성이 유감없이 튀어나오는 것이 사랑입니다. 즉 사랑이란 예의바름과 상관없습니다. 온순하고 공손한 것만 사랑이라고 보아서는 아니됩니다.
온순, 공손은 사랑이고 그렇지 않는 감정의 표현은 악한 것이라는 분류법은 적절치 않습니다. 만약에 이런 식으로 분류하게 되면 의도적으로 사랑이 없으면서도 예의상 온순과 공손의 모습을 띠고서는 사랑으로 행했다고 우길 것이 뻔합니다. 사랑은 솔직 담백합니다. 꾸미지도 않고 꾸밀 필요도 느끼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느낌 그대로 다가서는데 그것이 사랑으로 보일 때만 정말 사랑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의 일상적인 행동 하나하나에 다 끼어들어있고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즉 사랑이라고 이름지어 모셔놓은 행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하는 모든 행위 안에 사랑의 능력이 차등없이 담겨있습니다. 이처럼 사랑으로 산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유방이라는 용어는 평소에 예의상 감추어 싶은 신체 부위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노골적으로 그 대목을 수치스럽게 보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원초적 본능을 표현하는 용어를 동원해야만이 사랑이라는 감정이 우리 인간에게 ‘본래의 감정’임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사랑’은 감추어야 비로소 사랑다운 것인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였습니다. 사랑이란 감정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저지할 수 없는 감정이요 평소에 늘 모든 행위 밑에 자리잡고 있는 감정입니다. 예를 들면, 제약 회사의 원구원으로서 신약 계발에 몰두하는 사람에게는 비정함과 냉정함 밖에 없겠다 싶지만 실은 그토록 연구에 몰두하는 것은 다 자기를 지독스럽게 사랑하기 때문이요 동시에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행위인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이 밑받침 되어있지 않는 행위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원래 원했던 사랑이 무엇인가하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사람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떤 평가를 내리느냐에 달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점을 말해줍니다.
8절에 보면, 술람미 여인의 오빠들이 자기 누이동생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랑이란 세상적인 관점에서 사랑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여동생은 가슴이 절벽이니 어느 남자가 가슴없는 저런 여자를 사랑하겠느냐 하는 식으로 나옵니다. 이런 선입견이 오빠들의 잘못입니다.
사랑이란, 세상적으로 사랑받지 못할 조건을 능가하는 능력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풍만한 육체와 균형잡힌 몸매를 가진 여인을 사랑할 것이라고 여기지만 이런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욕정에 불과합니다. 사랑이란 파괴시키기 위한 용도로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아껴두기 위해 다가서는 겁니다. 손대지 않고 두고두고 고이 모셔두는 겁니다. 젖가슴이 풍만하지 못한다는 조건으로 미워한다면, 그 사람은 상대방을 아끼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견해를 아껴서 상대방의 견해를 파괴시키는 사람입니다.
오빠들은 겉으로는 누이동생이 시집 못갈까봐 걱정되어서 한 소리합니다. 가슴에 뽕이라고 넣어야 되지 않으냐 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지금 자신들의 누이 동생이 누구로부터 일방적으로 구애를 받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발언을 늘어놓는 겁니다. 지금 누이동생을 사랑하는 사람은 왕입니다. 즉 그 시대 국가의 진리를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이며 진정한 진리가 무엇인가를 최종 선포하는 위치에 있는 자가 왕입니다. 그 왕이 진정한 사랑을 가지고 그들의 누이동생을 사랑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빠들은 누이동생의 체형을 뜯어고칠 생각하지 말고 자신들의 생각을 뜯어고쳐야 합니다. 누이동생은 말합니다. “내 가슴은 절벽맞다. 하지만 이 절벽이기에 그이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입니다.
남들보기에 약점으로 보이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것마저 사랑의 대상이 됩니다. 가여성은 남편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나서 맺어진 사이입니다. 여자가 가정에서 기를 못편다면 사랑을 고대하는 원초적 본성으로 인해 가정 밖에서 기를 세우려고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여자는 계속해서 자신이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외로움에 빠지고 맙니다.
사랑받은 자의 당당함이 누이동생 입에서 나옵니다. “내 사랑은 나의 절벽같은 가슴이기에 더욱 사랑스럽다”고 말하더라는 겁니다. 이처럼 우리들도 남들에게 전도할 때는 이 방식으로 다가서야 합니다. 남의 사정을 분석해서 한 수 가르칠려고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입장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즉 “나는 죄인이고로 구원되었다. 당신도 자신이 죄인이라고 인정한다면 구원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장점만 골라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면을 다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를 이를 증명합니다. 누가 우리를 송사하고 정죄할 수 있습니까! 우리를 위해 죽으신 분이 계신데 말입니다. 전도와 신앙생활이란 자신의 장점을 살리는 생활이 아니라 자신의 전체를 죄라고 규정짓는 생활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더욱 넘칩니다.
누이동생을 우습게 보았던 오빠들이 되레 누이동생이 사귀는 남자인 솔로몬 왕으로 인하여 생계까지 보장받게 되었습니다. 왕 소유로 되어 있는 포도원 관리를 임대계약해서 일년에 약 320만원 정도의 수입을 한 사람을 챙기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무시했던 누이동생으로 인하여 자신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이 시대에도 우리가 감추고 싶은 십자가 복음으로 인하여, 또 사람들에게 조롱당할 듯한 내용인 십자가 복음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십자가를 우리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도 우리와 같이 약점을 가지고 등장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즉 우리도 우리의 죽음을 수치스럽게 생하는 바를 참작해서 하나님도 자신의 가치를 수치스럽게 죽음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왕의 포도원은 마치 에덴동산과 같습니다. 거칠 것 없이 마구 달려도 누가 뭐라 할 사람이 없습니다. 어린 사슴과 노루는 달려야 제 값을 합니다. 이것이 자유입니다. 사랑 안에서는 자유를 막을 그 어떤 법은 없습니다. 달리고 또 달릴 때, 사랑의 생명력은 마음껏 표출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멈출 수 없는 사랑이 말을 하는 신앙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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