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의 강의를 비평해 주세요
각각의 강의를 비평해 주세요
이름 : 김대식(IP:220.81.176.141)
남포교회 20주년 학술제가 있었는데 그 11개의 강의가 올라와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시고 평가해 주시길 바랍니다.
주소는
http://www.lamp.kr/zb41/zboard.php?category=7&id=special_sermon&page=1&page_num=20&sn=off&ss=on&sc=on&keyword=&select_arrange=headnum&desc=asc
강의는 아래와 같습니다.
1 [20주년학술제] 박영선 (남포교회 담임목사) / 나의 목회에서 구원과 성화
2 [20주년학술제] Bryan Chapell (브라이언 채플, 카버넌트 신학교 총장) / 은혜의 능력과 설교
3 [20주년학술제] 김영재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한국 교회의 구원과 성화
4 [20주년학술제] 김정우 (총신대 교수) / 구약 성경의 구원과 성화
5 [20주년학술제] 변종길 (고신대 교수) / 신약 성경의 구원과 성화
6 [20주년학술제] 이수영 (새문안교회 담임목사) / 칼빈의 구원과 성화
7 [20주년학술제] 박영실 (총신대 교수) / 어거스틴의 구원과 성화
8 [20주년학술제] 오덕교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조나단 에드워즈의 구원과 성화
9 [20주년학술제] 김병훈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 개혁신학의 구원과 성화
10 [20주년학술제] 박영돈 (고신대 교수) / 오늘의 구원과 성화
11 [20주년학술제] 질의 및 응답
이근호(IP:117.♡.137.199)
08-01-16 23:26
박영선씨의 설교만 비평하겠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관심있는 바에 의해 자아가 재구축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 즉 성화에 관심을 두게 되면 "과연 나는 어떻게 성화할 것이냐?"를 가지고 성경을 해석하게 됩니다. 이것은 성경 해석에 있어 자아가 성경 해석에 개입한다는 해석학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한다는 것인데 이 사람은 성경을 가지고 "사람은 이렇게 살아가는 목표가 있으면 그것이 사도 바울의 권면입니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60세가 다 되도록 아직 이런 설교를 계속하고 있다는 것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과 자아를 동일시하고 싶어하고 성경이 그 지침서가 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박영선 씨는 그것이 곧 십자가 앞에서 죄악의 또다른 양상임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신앙적인 절망이란 십자가 앞에서의 절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일시적 결핍을 두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가 보기에 이 사람은 최종적으로 자아의 열심을 믿고 붙잡고 있습니다.
성령충만이 십자가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이 사람은 성령 충만이 성경 말씀에 부합되는 모델적인 인물로 자아가 새롭게 세워지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그는 설교에서 말하기를, "예수 안에서 자신을 다시 세우지 말라"라고 하지만 그의 주장대로 열심내고 분별하고, 절제하는 그 주체는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소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설교 논리가 앞 뒤가 안맞기 때문입니다. 이런 박영선씨의 설교를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으로 측은해 하는 자는 바로 불교 학승들일 것입니다. 완전히 불교 사상에 해당되는 것을 박영선씨는 기독교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설교나 목회에 대해서 그 어떤 대가를 원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성령충만하여 살아가는 그 어떤 교인이나 자아가 된 상태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불신앙입니다. 성령을 못받은 자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이근호(IP:117.♡.137.199)
08-01-17 11:12
나머지 신학 교수들의 주장들은 근원적인 죄인으로서 인간을 가지고 출발을 하는 생각들이 아니라 소위 '개혁주의'라는 상추쌈에 둘러싸인 자아를 가지고 외곽이 있는 각종 신학들을 비교하면서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혁주의'라는 그 상추쌈 같은 신학이 자신의 정당함을 옹호해 줄 줄 알고 있기 때문이며 더나아가서 '개혁주의'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자신이 건전한 신앙적 사고를 지녔다고 일단 대외적으로 선전하면서 방어하려는 자세를 취합니다. 쉽게 말해서 '개혁주의 신학'마저 왜 죄인가?를 따지지 않는 것입니다. 더나아가서 십자가를 아는 내가 왜 여전히 죄인일 수 밖에 없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점검하지 않으려합니다. 이들은 내가 보기에 자기 방어에 급급한 인물들입니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예수를 잘믿고 있는 자의 가치를 제발 좀 알아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자'들입니다. 악마가 과연 이들에게 속아넘어갈까요? 어림도 없는 소리입니다.
이근호(IP:117.♡.137.199)
08-01-17 11:19
다음은 1월13일 화평교회 오용익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얼마나 뛰어난 설교인지 이런 남포교회 사이비들 하고 한 번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 12절)
언젠가 TV에서 번찌쩜프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몸 뒤에 자신을 묶은 줄이 달리고 높이가 134미터 정도위에서 뛰어내려야 하는 건데, 보기만 해도 아찔하고 실제로 뛰어내리는 사람은 대부분 자기가 스스로 못하고 뒤에서 누군가가 밀어내는 걸 보았습니다.
성경은 신앙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데, 성도의 세계가 꼭 이렇게 번지쩜프와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발은 땅에서 들리고 몸은 대롱대롱 상태이고 내 의지대로 되지 않지요. 이 세상에서는 수시로 내 법을 만들어서 그 법대로 행동하면 오히려 편한데, 번지쩜프의 상태에서는 일정한 흐름이 잡히지가 않아요. 내 법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두렵지요. 불안합니다. 무엇이 죽을 맛이냐면 한번 쭉 내려가고 끝이 아니라 내려가는 반동에 의해서 출렁거리다가 다시 튀어오르고 이것이 몇 번씩 반복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번지쩜프의 세계는 내려오면 그만이지만, 신앙의 세계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2절에 보면 ‘주의 인자하심’이 나오는데요, 이 인자하심의 세계가 아주 죽을 맛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생각을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우리가 죽을 맛인데 고작 번찌점프냐? (번지점프는 재미라도 있지)’ 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그 정도로 독특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함이 성경 안에 제시된 신앙세계인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가 나옵니다. 육체의 정욕을 우리가 제어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그렇게 읽으면 불교가 되고 도덕 교과서가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환경에 둘러쌓여 있고, 시시때때로 몰아치는 환경에 떠밀리게 되어있습니다. 사는 게 팍팍하면 사람이 예민해지게 되어 있고 세상살이가 여유있을 때는 너그럽고 넉넉한 행실이 나오지요. 밥 한끼라도 사고 싶고 말이지요.
그러니 그때그때 자기가 편리한 쪽으로 합리화시켜서 행동할 뿐이예요. 인격, 품성은 사기입니다. 이랬다 저랬다 순간순간 변하는 자신의 되(지)도 않는 과거의 총체를 자기모습이라고 설정해 놓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인간의 품성을 따져서 구원하겠습니까? 과연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들의 자기나름의 인내심이라든가 착한 행실을 보고 영광받으려고 기대한다는 것일까요?
말씀 줘놓고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긍휼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10절)이 이 말씀을 대할 때 자신이 과연 지킬 수 있다고 고집하며 나올까요? 성도가 과연 무엇을 궁금해 하겠습니까?
여기보면 하나님께 영광 돌릴 대상이 누구냐? ‘사랑하는 자들아!’ 하면서 ‘나그네, 행인’이라는 독특한 대상이 규정되어 나옵니다. 이 말을 아주 낭만적 취향으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 말씀은, 이 세상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은 아주 특이한 인간을 뜻하는 겁니다.
즉 이 세상에 없는 것이 발생되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발생된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등 뒤로 묶여있는 채로 대롱대롱 끌려가는, 땅의 원리가 아니라 하늘의 원리로 살아가게 된 성도의 삶을 일컬어서 나그네라고 한 겁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의 나그네길 130년이라고 나옵니다. 제 뜻대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험악한 세월이었습니다. 물론 야곱은 자기생각이 있었고 야망이 있었습니다. 견고히 뿌리내리고자 장자의 자리도 빼앗고 열심히 일했으며 인정받고자 애썼습니다. 한마디로 야곱도 자신의 야망이 터져나오는 정욕의 삶을 살았으나 그 인생에 남들에게 없었던 것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이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원리에 따른 계획과 능력과 질서가 쳐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이 야곱의 나그네길 인생전체로 고백되어집니다. 이것이 나그네의 의미며 교회이며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원리가 지배하고 있으니 땅에 견고히 뿌리내리며 살아지지 않고, 따라서 지상에서 알아주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후서 1장 3-4절에 보면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가 나오는데,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준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이루고 그 공로를 전체에게 똑같이 나누어주어서(배분) 그것으로 살아가는 원리를 하나님의 질서라 합니다. 자기희생으로 만든 의가 차별없이 자기 백성에게 똑같이 공급되지요(롬 3:22). 그러니 교회라면 누가 이렇게 이만큼 했다느니 너는 왜 이것밖에 안되느니 이런 말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받은 입장에서는 똑같이 ‘자기 것이 나오지 않는다’는 공통고백과 함께 오직 한 분, 약속대로 말씀을 다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나그네길 고백이지요.
이 세상은 내 노동으로 내가 이만큼 살게 되었다는 땅에 충만한 원리에서 나오는 고백이 이어집니다. 땅은 노동의 효과를 집약시키는 성공의 현장이지요. 육체의 정욕이란 땅의 원리로 충만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내 생명은 내가 책임진다는 것이고 이것이 곧 종교의 원리입니다. 지상과의 결속이 든든해질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
창세기에는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나는 땅에서 종신토록 수고해서 살아가라는 하나님의 저주가 나옵니다. 사람들의 시각은 어떻습니까? 땅에 더 잘 밀착된 인생일수록, 견고히 뿌리내릴수록 하나님이 축복해주었다고 내세웁니다. 이것이 육체의 정욕입니다. 성령받은 성도라도 그 몸에는 육체의 정욕이 심겨있습니다(아담의 후손).
그러므로 하늘나라 원리가 들어올 때는 이 육체의 정욕을 뭉개면서 들어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20절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죽었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신체성 안에 있는, 땅에 밀착된 인생을 죽이시면서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는 늘 우리 자신에게 편리한 법을 만듭니다. 상대방의 법을 건드리지 않아야 하는 법까지 만들지요. 편하기 위해서요. 예를 들면 이런 거지요. 제가 운전하는 봉고차에 요한이가 탔다... 그러면 ‘히터를 꺼라’ 법에 다 순종해야 돼요. 더운걸 싫어하거든요. 김집사님 떴다~ 그러면 또 말조심하고 알아서 행동해야 돼요. 장로님 떴다... 알아서 조심해야 됩니다. 우집사님 계신 곳에서는 찌개 오기 전에 절대로 밥숟가락을 들어서는 안됩니다. (찌개 놓기 전에 절대로 밥을 먼저 퍼다 놓으면 안돼요^^)
이러한 육체의 정욕대로 서로에게 좋게좋게 행하면서 사람들은 착각합니다. 우리 교회는 따뜻하다고 말하고, 하나 되었다고 말하고, 사랑이 넘친다고 말합니다... 이 육체의 정욕속에서 하나님이 무슨 영광을 받겠습니까?
출애굽기 20:24-26에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란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것인데 그 이름이 기념되는 현장에는 제물의 피가 뿌려져 있고 그 피에 의해서 사람의 이름은 배제되는 위치에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는 일체 들어가지 않아요. 하나님이 영광받으시는 현장에서 반드시 수반되어지는 일이란 인간의 이름이, 인간의 의가 박살이 나는 것입니다.
흠없는 제물의 피가 놓여 있다... 네 인생은 끝났다... 한 번만? 아니 끝까지... 야곱의 나그네 인생길 130년동안...(오래 살고 싶습니까?) 이것이 주의 인자하심이고 사랑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성도에게 이 땅의 맛을 보게 하십니다. 실컷 맛보이면서 성도는 그것으로가 아니라 오직 하늘의 원리, 피의 은혜를 배분받아서만 구원된다는 것을 더더욱 확고히 하시는 겁니다.
이러한 과정이 덮씌워져서(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이리저리 대롱대롱 매달린 채 살아가는 전체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입니다. 약속 중심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 12절입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한마디로 땅과 결별된 삶을 살게 하는 하나님입니다. 절대 땅에 처박히지 않는 삶을 살게 합니다.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채 대롱대롱 예수님 한 분이 내려준 사랑에 의지하는데 그 사랑이란 바로 십자가 피뿌림입니다!
이렇게 나그네로 살아가는 자에게 세상 사람들이 비방합니다. 왜그렇게 사냐? 뿌리가 없어? 그러니 의욕도 없고 무능하지. 어떻게 피만 있다고 하냐? 세상살이는 믿음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다...... 이 현실 속에서 성도는 잠깐씩 죽을 맛입니다. 그깟 번지점프에 비할소냐? 이제는 갈데까지 가봐! 아예 으름장입니다.
이렇게 불평, 원망을 터뜨리며 말씀 앞에 끌려 나갈 때 ‘내가 이것 밖에 안되는 죄인 맞구나’를 또 고백하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고마워하는 진짜 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5:7-9입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 사이의 일에 우리 육체가 동원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꽉 찼습니다. 영원한 구원의 근거가 되시는 아들의 순종으로만 온전한 세계가 된 겁니다. 예수님의 눈물과 통곡과 간구가 그대로 성도에게 내려올 때, 우리 정욕에서 나오는 모든 눈물은 할 말이 없습니다......
이 은혜를 받는 성도는 비로소 성경을 보는 새로운 영적 안목이 생깁니다. 법에서 은혜로! 입니다. ‘말씀을 내가 지키겠다’가 아니라,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통곡과 눈물과 순종을 보는 겁니다.
그래서 시시때때로 대롱거리며, 우리에게 뿌려주신 십자가의 피만 가리킬 뿐입니다. 그 예수님을 증거하고 하늘의 원리를 퍼뜨리기 위해서 선택된 나그네, 날마다 새로운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취하십니다.(*)
고관규(IP:218.♡.107.153)
08-01-18 20:39
총신의 정훈택교수나,,,이한수, 글고 천안대의 최갑종, 홍인규교수같은 부류가 저기에 참가를 못 한 것은 아마도 판단하건데 박영선목사가 초청을 안 한 것 같습니다. 자기들의 신학과 안 맞아서 그랬을 겁니다.사실은..그들이 최근에 뜨는 인물들인데..그들은 개혁신학에서도 한참 빗나간 자들이기에 그런 것 같습니다. 그건 그렇고...
왜? 고신과 일부의 총신.합신의 교수들이 초청되엇는가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매일 저런 고리타분한 칭의와 성화문제가지고 우려 먹는 걸 보묜... 오래된 누런 변색된 강의안을 계속 보게 되는 것 같아 착잡합니다. 좀,,더 다른 걸 보여주면 안되나요? 그들이...
그런데,,저 정도 가지고 최근에 문제가 된 도올선생과 대결이 될까요? 도올
고관규(IP:218.♡.107.153)
08-01-18 20:42
도올의 공격에...오늘의 신학은 그저,,도올 욕 만 하고 있습니다. 좀 더,,공부를 해야 할 것 가타여
오죽하묜,,,감신대 세미나논쟁에서,,,
김광식 전 연대 조직신학 노교수도 도올에게 무안을 당할까요?
답답합니다.
개혁신학자들이....ㅠ,ㅠ,
최일규(IP:219.♡.86.111)
08-01-18 22:39
하나님의 원리가 쳐들어온 것이 싫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합니까? 쳐들어 온 것을^^
고관규(IP:210.♡.24.105)
08-01-19 05:07
하나님의 원리,,,라고 최일규씨가 말 한 것과,,,하늘의 비밀한 복음의 다가옴은 같은 말일 것입니다.
쳐들어왔다는 말은..사실이지만, 일방적으로 쳐 들어왔다고 상대방들이 느끼는 건 달라요,,
그들이 일방적으로 침범했다고 여기는 것들을 ,,이 쪽에서 설명을 해주거나,,까부수어야 합니다.
(물론,,.까부숨을 궂이...성도가 할 실력과,이유는 없읍니다만.) 그러나,,적어도 기독교신학자라면....
연구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개혁신학자라는 자들이,,. 밥벌이와,,학교강단의 밥벌이수업커리큐럼에 쪼달려서 지평을,,,좁히면 안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신학자가 뭔가요? 신학자는 목사와는 달라요,, 신학자는 신학자의 사명이 있는 겁니다. 이런걸,,,망각하고 그저 교사가 되려고 합니다.....저는 말합니다. 오늘의 신학자들이 세상으로부터 우습게 여김을 당한다는 것은 비극ㅡ입니다.
고관규(IP:210.♡.24.105)
08-01-19 05:20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하다고 하였습니다. 이 것은 주님이 정하신 주님의 일방적인 결정하심입니다. 세상이,,,저렇게 여기는 것이 미련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우리는 그들을 미련하다고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무시하고 갑갑해 해서도 문제이죠,, 도올을 마귀로 보기전에...도올의 헛점이 분명,,있습니다. 이걸 모르고, 핵심을 놓치는 욕과,,저주는 아무 쓰잘데기 옵는,,,우리들만의 잔치가 됩니다.
............
저 ㅡ남포교회에서 행한 소위 ㅡ우리들만의 잔치는 별로 감흥이 안되게 됩니다. 그리고 저 ㅡ신학자들을 보묜서도...아직도 신학교 책상에서나 하는 듯한 강의화술도 별,,감흥이 없습니다.
저 ㅡ정도의 칭의.성화문제는,,,,왠만한 성도들도 눈치,,채어 식상합니다.
요는.....
작금의 센세이널하게 등장한 오만한,,,,,도올과 같은 자들이 말하는 지나간,,,,신약의 역사비평학에 대한 지나친 과신을 이길,,,,해석의 달인들이 나와서,,, 신학으로 분장한,,,복음의 영광스러움을 펼쳐야 합니다.
신약학을 전공한 교수들도,,,,신약비평사를,,,도올보다 모릅니다. 이래가지고서야...
고관규(IP:210.♡.24.105)
08-01-19 08:22
저의 소견으로 볼 때에는...
박영선목사의 성화설교해석은,,, 근본주의침례교의 구원회심거듭남의 강조와.... 장로교의 윤리성도행함신학을 다,,부수면서, 자기의 내적과거회심체험애 대한 회상과,과거의 자기실패를 보묜서,,, 일찌기 누구도 보지 못한 기념비적인 신명기해설과,,,이 ㅡ신명기와 구약의 선인들의 실패를 신약의 백성들에게 가져왔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 사람의 기십년의 목회설교,성경해석은,,,,성도의 삶입니다. 그래서,,,타계하신 김홍전목사님의 사사기강설이나,,,구약해석설교의 또,,다른 축소판으로 보입니다, 거의 같아요,,,,
저는,,,, 박영선목사의 성경해석지평을 뭐라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의 교인들이 그런 설교를 듣고,,,과연 을마나,,,이해할까 하는 것이 저는 항상 !! 의문입니다.
저는 이 점에서는 부정적으로 봄이 극심합니다.
아주,,자주,,, 그 곳의 신자들이, 주님을 사모하고,,은총을 갈망하면서 나오기 보다는,
박영선목사의 설교가 주는,,,묘한 맛에 이끌리고,,취하여.
인테리겐차에 속하고,,종교적 아카데미컬한 인테리겐챠 부류에 속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서
진리를 모르고, 요상한 ㅡ멋에 취하여 구약강화와, 강의가 탁월한 학원선생의 비싼 강의를 들으러 습관적으로 참석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고관규(IP:59.♡.94.142)
08-01-20 09:07
변종길교수의 발제는,,,, 이근호목사님의 글중, "성경신학 2"에 나온,
"행하는 자라야.. 라는 자료집을 읽고" 라는 글을 봐야 뚜ㅡ렷이 대비가 될 것입니다.
대비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