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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사르트르와 야스퍼스의 사상강의에베소서

사르트르와 야스퍼스(실존주의 사상가)

Ⅰ 서론

실존주의 철학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죄와 허물과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 속에서 헤엄치는 현대인의 삶을 툭툭 짜개놓듯이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에베소서 2:1-2) 교회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사람을 끌어 모으기 위한 신학이나 성경해석이 결국 실존주의 철학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바에 접촉하려는 목회와 신학은 사이비다. 사람들이 뭘 원하는가? 개별자가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자유와 그 자유를 지원해주는 공동체를 원한다. 이런 아이디어는 이미 실존주의 철학에서 제시된 기획안이다. 이들 철학자들은 어떤 묘안을 내놓는가?

Ⅱ 본 론

1. 장 폴 사르트르 (1905~1980)

신이 있다면, 정말 있다면, 인간 됨됨이는 이미 신에 의해서 규정 잡혀 있다. 그러니까 본질이 우선이다 는 말이다. 그러나 신이 없이 인간이 그냥 세상에 툭 던져진 채로 존재한다면 확정된 본질이라는 것은 앞으로 본인들 각자가 새롭게 정립하기 나름이다. 그래서 사르트르는 ‘실존이 본질보다 앞선다’라고 말한다. 신이 있고 없고는 불확실한 사항이요 또한 인간에게 있어 신을 탐구하는 일보다 더 성급한 일들이 쉴새없이 다가오는 실정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질로 모르는 채 우선 존재성부터 품고 살아가게 되었다. 여기서 공포와 불안이 생겨난다, 공포란 바깥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라면, 불안이란 미확정적인 자기에 대한 두려움이다. 하지만 공포든 불안이든 모두 인간이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삶 속에 완전히 들어가 있지 않고 존재하면서 자신을 의식하고 있다. 이것을 ‘대자(對自) 존재’라고 한다.

하지만 돌멩이 같은 경우, 그것들의 내부는 아주 작은 빈틈도 없이 충만하다. 자아와 자기가 이중으로 분리되어있지 않다. 이런 존재를 ‘즉자(卽自) 존재’라 한다. 인간이나 돌멩이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우연적으로 이 세계에 던져진 존재라는 점이다. 만약 인간이 돌멩이와 같은 즉자존재라면 마냥 그 자리에 있는 존재로서 자신에 대해 그 어떠한 질문도 던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즉자존재가 아니라 대자존재이다. 자신의 의식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모든 사물과 그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질서를 갖추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 의식작용으로서 인간은 또한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삼고 지향한다. 즉 자기가 마치 타인인 듯이 자기를 보는 것이다.

이는 보고 있는 쪽과 보이는 쪽 사이에 거리가 벌어져 있음을 뜻한다. 이 간격을 사르트르는 ‘무(無)’라고 본다. 왜 무라고 지칭하느냐 하면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마치 없는 것처럼 행동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이 세상을 보거나 자기를 보고 또 의식하면서 이 ‘무(無)’를 계속해서 분비하게 된다. 이 벌어진 간격을 채우려고 시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유다. 그러니까 대자존재인 인간의 존재에서 풀려나는 인간만의 능력이 곧 자유다.

이처럼 자유라는 것은 존재의 속성이기보다는 의식이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다. 즉 인간이 먼저 존재하고 다음에 자유가 거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가 곧 자유 자체이다. ‘나’라는 것은 의식에서 나온 발상에 불과하다. 실은 인간은 신체 덩어리뿐이다. 예를 들면 눈이 사물을 볼 때, 내가 눈을 통해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눈이 사물을 보는 것이며, 이 때 나는 눈으로 존재한다. 이 때는 눈이 곧 ‘나’이다. 눈이라는 신체로 인해 발생된 것이 ‘나’이다. 의식과 신체의 이러한 관계를 ‘실존적 관계’라고 한다.

그렇다면 이 실존의 안목에서 볼 때 세계란 무엇인가? 예를 들면, 내가 하나의 책상을 의식할 때, 탁자가 드러나 있는 거기에 내가 탁자를 의식하면서 있다. 탁자가 자기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는 것과 나의 의식이 탁자의 모습을 드러내 보는 것이 함께 만나는 자리가 다름 아닌 ‘세계’다.

이처럼 세계를 구성하는 사물들은 결코 객관적으로 독립된 하나의 사물일 수 없고 항상 나의 의식과의 만남에서만 의미 있는 것으로 구성된다. 이 말은 곧 나만이 내가 선택한 인격과 삶을 자유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세계를 새롭게 창조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장애자로 태어났어도 다른 나만의 세계로 바꾸어놓을 수 있는 능력이 실존적인 자아로서는 가능한 것이다.

세계란 인간이 질문하지 않는 한 아무런 조언도 해주지 않는다. 나만의 의미를 가지고 세계를 의식하면서 살아갈 때에 비로소 세계란 응답해 준다. 그러나 실존의 길이란 어떠한 목적을 향해서 접근해 나아가는 전진이 아니다. 인간은 의식으로 존재하는 한 자기 초월을 중지할 수 없고 따라서 자유와 욕망의 여백은 언제나 생겨나게 마련이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결핍’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언제나 충족되지 않는 욕망을 가진 존재라는 말이다.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가? 그것은 ‘자기’가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의 충체성과 궁극성을 확보하고자 시도한다. 바로 이것이 인간의 최종 목표이다. 곧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다.

도달할 수 없는 신을 향하여 자아를 늘 던지는(기투 企投) 모습을 띤다. 맨처음 인간은 이 세계로부터 던져진 (기투된) 존재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본인이 알아서 기투(던진다)한다. 이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살아있기에 인간은 늘 자유하다.

그런데 인간은 즉자존재인 사물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인간인 타인도 만나게 된다. 그 타인은 나름대로의 시선을 가지고 나를 바라본다. 따라서 사물과 타인이 다른 점은, 타인은 ‘나를 바라보는 자’라는 점이다.

예를 들면, 공원에 나 외에 다른 사람이 없을 때는 나는 내가 보는 모든 것의 중심점이었다. 나는 나만의 시선을 던지므로 서 모든 것을 측량하고 판단했다. 이렇게 해서 이 공원은 내가 만든 질서로 갖춰진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다른 사람이 나타난다. 그 타자로 인해 나 중심의 세계는 흔들린다. 방해받는다. 내가 이 공원의 유일한 중심점이 아님을 느낀다.

이런 타자의 출현으로 생긴 현상을 사르트르는 ‘내출혈’로 본다. 즉시 나는 그 타인마저 나무나 꽃과 같은 객체로 파악하므로 서 내 중심에서 흘러나온 내출혈은 다시 응고되어 원상회복될 수 있다. 하지만 타인의 등장으로 인해 그 타자의 시선으로 본 나를 생각하게 만든다. 이럴 때 자아는 다시 ‘무無’를 느낀다. 자아와 자기 사이의 간격을 경험하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이 잠시 나의 자유를 응고시켜버린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의 존재 의미는 나의 바깥으로부터 규정받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이것을 나는 참지 못하고 그 타인마저 사물처럼 객체화 시켜버리고 시도한다. “네가 뭔데, 치” 하면서!

그래야지만 그 타자로 인해 평가받는 그 타자의 눈동자 속의 나의 모습을 파괴시켜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내 허락도 없이 나를 평가하는 그 타인의 자유를 그리워 그 자유마저 내 것으로 삼아버리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그 타인과 사랑하는 관계다. 상대방이 보는 자유를 내가 존중하고 더 나아가서 그 상대방의 자유까지 내 소유로 삼을 때, 나에게 있어 상대방은 더 이상 남남의 관계가 아닌 일시적으로나마 나에게 없으면 내가 누군지 불명확해지는 그런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사랑 관계는 계속해서 상대방의 의중을 알아야만 하기에 항상 불명확하다. 이 불명확함에서 튀어나오는 것이 바로 ‘언어’이다. 언어란 모호하고 불명확함을 감추기 위한 핑계로서 동원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곧 ‘참으로 당신의 자유성을 내가 확실히 가졌는지 알 길이 없이 대충 말로 표현하려 합니다’라는 뜻이다.

사르트르에 이 이론에 따르면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말도 진정 믿음이 뭔지를 몰라서 언어적 고백으로서 대충 때우려는 시도이다. 즉 내가 사랑하는 자나 예수님이나 타인이 나의 이 말을 듣고 진정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알 길이 없다.

타인의 모습에 비친 나의 모습을 내가 알 수 없는 것처럼 내가 한 말에 대해 타인이 어떤 의미를 부여했는지에 대해 나는 아무런 권리를 가지고 있기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쨌든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일시적으로 나마 내 뜻이 곧 당신의 의미하는 바이다 고 동일시 하겠노라는 자기 선언이다. 이 동일시에 대해 타인이 배반한다면 나로부터 사정없이 상대방을 향하여 증오가 날아간다.

이로서 사랑이란 곧 ‘숨어있는 증오’다. 타인은 단지 나의 존재근거를 위해 잠시 내 질서 안으로 들어왔다가 사라져간 것이다. 이처럼 타인과의 관계란 타인을 소유하려 하면서도 자신은 결국 소유되지 않으려는 대자간의 끊임없는 투쟁의 관계다. 이런 식으로 항상 욕구하는 존재인 인간은 항상 부지런히 주위를 살피면서 실천에 나선다.

이 피곤한 투쟁과 갈등을 해소하는 방식으로서 인간은 제 3의 매개를 찾게 된다. 그것이 바로 집합체요 집단이다. 사르트르는 ‘집합’과 ‘집단’을 구분한다. 집합의 예를 들면, 오는 버스를 기다리고 서 있는 사람들의 집합이다. 이 집합 속에서 인간들은 사물과도 같이 산재해 있다.

버스를 기다리는 집합 속에는 개인이 불특정의 어떤 사람으로서만 존재하기에 다른 누구하고라도 바꿔치기가 될 수 있다. 즉 내가 한 눈 판 사이가 내가 가다리는 버스가 왔다가 다 버려도 내가 그 버스를 탓할 수 없다. 단지 나는 내 존재의 무력감만 느낄 뿐이다.

하지만 같이 버스타고 등산하기 위해 계약된 전세 버스를 기다리는 경우는 다르다. 이 경우는 집합이 아니고 집단이다. 그 전세 버스를 나를 반드시 태워야 한다. 나는 그 집단 안에서 바꿔치는 대상이 아니다. 나대신 다른 사람이 등산할 수 없다. 나는 내가 등산하기 위해 ‘산악회’라는 집단에 자진해서 등록했다. 만약이 전세 버스가 제 때에 안 오면 산악회의 다른 회원들과 더불어 공통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

이 집단이 바로 가정이요, 교회요, 국가요, 민족이요, 기업체들이다. 나는 그 집단과 나를 동일시한다. 나는 그 집단의 회원들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제 3의 매개인 그 집단과 동일시한다. 따라서 만약에 그 집단에서 나의 자유를 효과적으로 발휘한다면 다른 다수의 회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동일시한 집단을 위해서 다른 다수와 의견을 같이 할 용의가 있다,

반면에 그 집단이 나에게 굴욕감을 준다든지 나의 자유를 심하게 훼손한다면 나는 더 이상 그 집단과 나를 동일시 할 수 없기에 탈퇴해버린다. 다른 회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탈퇴해서 또 다른 내가 동일시할 만 한 제3의 매개로서의 집단을 찾아 나선다. 내가 다닌 교회에서 나와서 다른 교회에 기웃거리는 것이 다 이런 이유에서이다. 혹은 그동안 살던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이민 가서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이다.

이 모든 일도 나의 연속적인 선택 자유에 의해서 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내가 행사할 수 있는 실천의 전모다. 사르트르는 이 실천을 ‘앙가주망’ 즉 ‘사회 참여’라고 보았다. 나를 끊임없이 세계 속으로 참여시키는 것이다. 그래야지만 나에게만 의미 있는 세계가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집단이란 나에게 있어 실체가 아니라 나의 자유성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다.

2. 칼 야스퍼스 (1883~1969)

야스퍼스는 개인 대념과 실존 개념을 구분한다. 개인 개념은 자아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분명히 한다. 하지만 실존 개념은 자아와 타인 사이의 경계가 과정적으로만 고정성을 나타날 뿐이다. 즉 실존 개념에서는 자아와 타인 사이에 일어나는 차이를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긍정적으로 보자는 것이다.
실존적 교제에서는 다름을 다름으로 받아들인다. 사람들이 다름을 틀림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다름이 나에게 불편을 주리라는 예측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름을 불편하게 느끼는 것은 상대방이 나와 같아야 한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무가치한 것으로 묵살해 버리는 주체의 특징은 ‘인식론적 편집증’이다. 상대방이 나와 다른 이야기를 할 때, 그에 귀 기울이는 대신 무의미한 것으로 배제해 버린다. 즉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위험한 것’으로 인식하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실존이 아니라 ‘현존재’이다.

야스퍼스는 ‘실존’과 ‘현존재’를 나누고 있는데, 현존재란 일상에 매몰되어 자기 존재에 대해서 별다른 의식 없이 살아가는 인간을 말한다. 실존이란 일상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현존재의 차원에서의 인간은 대중의 일부로서 다수의 의견이라는 미명하에 익명성을 즐기고자 한다. 현존재는 무반성적으로 환경에 반응하고 기능적으로만 작용하는 존재이다. 의문을 가지지 않고 현존하는 것이 특징이다. 현존재는 자신을 넘어서서 오는 것에 감이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간을 능가해서 오는 것인가? 한계상황이다.

한계상황이란 우리 인간을 한계에 부딪치게 만드는 상황을 뜻한다. 이 한계상황에는 투쟁과 고통과 죄책과 죽음 등이 있다. 한계상황은 마치 벽과 같아서 우리 인간은 거기에 맞부딪치고 난파해 버린다. 이 한계상황을 한계상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실존적인 인간이다. 만약에 한계상황을 그냥 받아들이지 못하고 회피하는 것은 현존재적 인간이다.

예를 들면, 현존재 차원의 인간은 죽음을 정말로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현존재 차원의 인간은 ‘모든 인간은 죽는다, 나는 인간이다, 나는 죽는다’는 논리적 단계를 제대로 밟아나가지 못한다. 그 대신 ‘모든 인간은 죽는다, 나는 인간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죽을 때가 안되었다’로 추론한다.

실제로 죽음이 나의 경험이 될 것임을 충분히 느끼지 못한 채 입으로만 말해버린다. 한계상황은 무시할 상황이 아니다. 야스퍼스에 의하면 죽음은 극복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고통이라는 한계상황도 마찬가지다. 실존은 고통이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나만 고통을 겪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한 어느 누구도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자각을 해야 실존적 인간이다. 반면에 현존재 인간은 자신의 고통이 타인의 고통보다 더 심하다는 억울함에 빠져 있다. 이렇게 되면 나와 같이 고통 속에 있는 타인과의 의사소통이 차단된다.

실존적 인간은 고통이 자신을 통과해가도록 둔다. 그리고 그 고통이라는 경험이 자신의 존재의 내용이 된다는 점도 받아들인다. 고통이 오므로 서 실존은 자신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자가 아님을 안다. 현존재적 사람들은 ‘내가 암에 걸린다’는 상상은 회피하고 싶어 한다. 고통을 주는 생각이라서 본능적으로 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과 고통의 한계상황을 받아들인 실존에게는 그것이 남의 일이 아니다. 나를 포함해서 누구든지 일어날 수 있는 한계상황임을 인식한다.

이처럼 그 누구에게 일어난 고통도 언제나 나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을 수용한 자에게는 ‘타인의 고통’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고통은 곧 나의 고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투쟁이라는 한계상황도 마찬가지다. 현존재적인 자들에게 있어 투쟁이란 ‘승자에 의한 착취’로 인식한다. 즉 다른 사람들이 나를 착취하기에 나도 다른 사람을 착취하겠다는 것이 곧 투쟁의지이다. 내가 이룩한 모든 성과에서 타인을 축출해 버린다. 지금 내가 투쟁에서 남에게 지게 되면 내 후손도 없다는 결연한 의지로 투쟁에 나선다. 투쟁에서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인간은 누구나 투쟁이라는 한계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누군가와 투쟁해 왔었다는 뜻이다. 참으로 투쟁을 인간이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으로 받아들이는 실존적 인간이라면, 이 투쟁에 대해서 이렇게 이해한다. “나는 다른 사람의 희생을 기반으로 해서 나의 생존이 가능했다”

타인의 희생이 내 생존을 장식하는 바닥 타일로 장식되어 있기에 여기서 실존적인 자들은 죄책감을 갖는다. 바로 이러한 죄책감을 가지면서 투쟁하는 것을 야스퍼스는 ‘사랑하면서의 투쟁’이라고 표현한다. 투쟁이 나의 생존본능에 의해 불가피함을 아는 자들은 그동안 투쟁했던 상대방을 악인이라고 간주하지를 않게 된다.

누가 되었든지 서로가 단지 존재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싸울 수밖에 없게 된 사이라는 것을 안다면 상대가 자신을 미워서 싸움을 걸어온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되면 투쟁(싸움)을 통해서 양편 다 서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투쟁이 되도록 노력하게 된다. 이런 사회적 관계를 가지고 야스퍼스는 ‘사회적 실존’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현존재적인 자들은 투쟁하면 할수록 그 존재성은 점점 더 사회를 등지고 오직 이익이 쌓여있는 품 안으로 감겨들어간다.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미안한 감을 갖지 않으려 하는 것이다.

또 다른 한계상황은 ‘죄책’이다. 내가 존재하고 산다는 것 자체가 다른 존재에게는 부담일 수 있다. 내가 마시는 물과 공기는 내가 마시지 않았으면 다른 누군가가 마실 수도 있을 물과 공기다. 내가 지금의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이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나는 버려야할 단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내가 사는 한 항상 다른 단점이 만들어지는 것을 내 눈으로 보고 인정해야만 한다.

이처럼 실존적인 사람은 자신의 한계가 계속 생산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죄책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죄책을 피하려 하지 않고 자신이 죄책이 있음을 인정해야 실존적 인간이다. 그러나 현존재적 사람은 다음과 같이 핑계 댄다. “원래 세상은 그런 것이다. 이런 상황을 바꿀 수 없다. 나는 책임이 없다.”

누구나 지기 싫고 이기고 싶어 한다. 이런 본능이 당연하다고 해서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야스퍼스가 보기에 이 세상에 그 어떤 정당한 질서에서도 착취가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이 사는 한 다른 사람을 착취하게 되는 결과를 완전히 피할 수 없으면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보다 덜 착취적인 사회가 되도록 노력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 그렇게 되려면 어떤 사회가 등장해야 하는가? 실존과 실존이 교류하고 교제하는 사회이어야 한다. 실존적 인간이 이해하는 실존적 사회란, ‘너 없이 내가 나일 수 없다’는 의식으로 모인 사회이다.

내가 어떤 인간일 것인지는 미리 알 수 없다. 미리 안다면 그것은 성질이지 실존이라고 말할 수 없다. 실존이란 과정 자체로만 말해야 한다. 즉 ‘밝혀짐으로서 생겨나는 바의 궤적’으로서의 실존이다. 이렇게 되려면 나의 실존을 말해주는 근거는 남과 공통 근원을 함께 해야 한다.

인간은 항상 의문이며 과제다. 따라서 실존은 현실 속에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서 그 실존적 본래의 해답을 찾고 경험해야 한다. 이것은 곧 한계상황을 함께 인정하고 수용하는 유대로 맺어진 실존적 사회를 말한다. 이 작업은 도중에 완성되었다는 이유로 멈추지 않는다. 결코 끝나지 않는 지속적인 자기됨의 내적인 과정을 동반한다.

예를 들면, 실존은 자신만 죽을 것이 아니라 타인도 죽을 것을 안다. 이 한계상황을 실존적 교제와 사회 안에서 만남을 통해 재확인하는 것이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자신이 자기답게 살고자 노력하는 만큼 타인도 자기답게 살 수 있도록 기여하고자 하는 그것이 바로 진정 한계상황 속의 참으로 자기다운 실존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일은 종교적 감정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는 이성적 반성 아래는 수시로 결단을 내리면서 진행될 일이다. 여기서 반성이란 단단하게 굳어버린 종교적 교리를 답습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현존재적 안주로 되돌아가 버린다. 도리어 이성적 반성은 그 굳어버린 질서를 파괴시켜 버린다.

야스퍼스가 말하는 종교적 초월이란 키에르케고르처럼 신에게 귀의하여 “다 이루었다”고 외치면 안주해 버리는 것이 아니다. 실존자가 초월자와 맺는 관계란 초월자가 보낸 암호를 해독하는 것이다. 즉 초월자의 품에 안기는 그런 현존재로 전락하는 것이 실존이 아니라 초월자의 암호를 해독하는 과정에서 실존자로서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 궁극적 타자는 신이었고, 하이데거에 있어 궁극적 타자는 존재였다면 야스퍼스에게 있어 궁극적 타자는 그야말로 타인들 그 자체이다. 그 타인들 품 속에서 서로가 안고 있는 한계상황을 서로가 인정하는 것이다. 정화라 성화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자꾸만 현존재로 전락하려는 서로를 격려하여 부단히 그 경계선을 넘겨야 한다.

이 긴장이 살아 있다는 것이 곧 ‘실존 안에서는 죽지 않는다’라는 말이다. 세상의 한계상황을 스스로 눈 감아버리고 자기 영토에 관해서는 자신이 정복했다고 여기는 것은 타인을 기만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존재와 의식이 영원히 일치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기 존재와 자기 의식이 일치된 것처럼 위장하는 짓이다.

실존은 교제 안에서, 운동 안에서만 완성된다. 상대방과의 사랑하면서의 투쟁에서만 실존이 진행된다. 한 명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모두가 자유로울 때뿐이다. 개인이 전체의 삶에 참여하지 아니하면 전체는 그 개인을 억압하게 된다. 따라서 자기뿐만 아니라 타인마저 현존재가 아니라 실존적으로 살도록 독려할 필요가 있다고 야스퍼스는 말한다.

개인과 집단 간의 완벽한 관계는 있을 수 없지만 집단이 개인의 실존됨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의 지향점으로 야스퍼스 철학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실존의 공동체’이다. 실존의 공동체는 본래적인 인간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폐쇄되어 있지 않고 조직화되어 있지도 않으며 조직화 될 수도 없는 공동체를 말한다. 실존의 공동체는 과정으로만 존재하고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단체이다.

이 안에서는 ‘용감한 겸손’이 필요하다. 즉 타인에게도 진리가 있다고 신뢰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교제가 가능하다. 따라서 계시신앙은 참으로 위험하다. 왜냐하면 계시신앙은 필히 타인을 비진리라고 배척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야스퍼스는 결론적으로 말하기를, 세상의 한계상황을 보고 철학적 허무주의로 빠지는 것도 실존이 아니며 신앙내용을 고정화 시켜놓고 그것을 신봉하는 것도 위험한 짓이라고 본다. 그 둘 사이를 지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진리의 전부를 모르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항상 의문투성이며 항상 과제가 새롭게 발생하는 중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바는, 타인들 안에서 나를 새롭게 발견해 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끊임없이 반성하는 생활을 해야만 한다. 현존재로 전락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Ⅲ. 결론

◇ 두 철학 사상에 대한 복음적 평가와 교회 사정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고 일하고 노력한 것이 이 세상에 어떤 ‘대가’의 이름으로 남아 있기를 원한다. 우리 인간들이 애쓴 만큼의 결실이 어떤 형식으로도 이 세상 한구석에 남아 있어 자신의 눈에 들어오기를 원한다. 그 결과물을 자신에게 다시 결부시켜 새삼 자신이 어떤 인간인가를 측정하려 한다.

쉽게 말해서 두 사상가는 이 현 세상이 자신의 마음에 영 들지 않는 것이다. 반면에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보시기에 현 세상에는 이 세상이 아주 만족스럽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예수님께서 심판주이심을 알리고 영광스럽게 되기 위해 저주의 불로 불사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10-11)

하지만 이 두 사상가를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에게 아주 불만이 많다. 이미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자신들 입장에서 어떻게 하든 이 험난한 세상 속에 개선의 삭을 틔우려고 한다. 그래서 개인적인 자유로 훼손되지 않는 방향으로 가능한 공동체적 삶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오늘날 교회에서 목회라는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 즉 목사는 자신이 목회나 설교하면서 어떤 식으로도 하나님으로부터 대가가 제공되기를 고대한다. 십자가를 증거하고, 복음만을 증거하고, 언약을 가르치고, 참된 교회 세우려고 애쓰고 또 애쓰고 그 애쓴 만큼의 대가가 있기를 원한다.

교회라는 이름의 근사한 공동체를 그리워하는 것도 자신의 노력이 가치를 눈으로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말한다. ‘언약의 피’로 이미 대가는 미리 성도에게 다 주어졌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정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로마서 5;8)

스데반 집사님이 이 세상에서 과연 자기만의 노고의 대가를 따로 원했던가? 그에게는 온 것은 참혹은 피살 현장뿐이었다. 그래도 그는 대단히 만족했다. 왜냐하면 그가 받은 피는 처음부터 공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 이외에 다른 것을 증거 하는 자는 이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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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02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6,117 성경 아가 8:1-4 / 깨우지 말라 아가 최고관리자 08-01-17
6,116 강의 아가 7:10-13 / 신랑 안내 아가 최고관리자 08-01-17
6,115 성경 아가 7:10-13 / 신랑 안내 아가 최고관리자 08-01-17
6,114 강의 아가 7:1-6 / 영적 쾌락 아가 최고관리자 08-01-17
6,113 성경 아가 7:1-6 / 영적 쾌락 아가 최고관리자 08-01-17
6,112 강의 아가 6:13-14 / 보고 싶은 얼굴 아가 최고관리자 08-01-17
6,111 성경 아가 6:13-14 / 보고 싶은 얼굴 아가 최고관리자 08-01-17
6,110 강의 아가 6:4-9 / 오직 하나 아가 최고관리자 08-01-17
6,109 성경 아가 6:4-9 / 오직 하나 아가 최고관리자 08-01-17
6,108 자유게시판 2008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 6강 [수련회] 최고관리자 08-01-17
6,107 우리교회 [일반] 대구의 옛날 사진 [일반] 최고관리자 08-01-17
6,106 묻고답하기 각각의 강의를 비평해 주세요 [신학] 최고관리자 08-01-16
6,105 우리교회 사 45: 15-17 (숨어계신 하나님) 이사야 최고관리자 08-01-16
6,104 자유게시판 2008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제 5강 [수련회] 최고관리자 08-01-16
6,103 자유게시판 06 대구강의 11 - [제국]을 읽고 - 최고관리자 08-01-15
6,102 성경신학 사르트르와 야스퍼스의 사상 [신학] 최고관리자 08-01-15
열람 ➜ 강의 사르트르와 야스퍼스의 사상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08-01-15
6,100 우리교회 [일반] 사르트르와 야스퍼스의 사상 [일반] 최고관리자 08-01-15
6,099 자유게시판 2008 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4강 요한복음 최고관리자 08-01-15
6,098 묻고답하기 여수 돌산갓김치 필요하신 분 - 최고관리자 08-01-15
6,097 묻고답하기 롬11:32에 대한 질문 로마서 최고관리자 08-01-14
6,096 자유게시판 2008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3강 로마서 최고관리자 08-01-14
6,095 우리교회 [일반] 계시록 강해 중간정리 2 (85-95강)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8-01-14
6,094 우리교회 [일반] 계시록 강해 중간정리 1 (1강 -84강)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8-01-14
6,093 묻고답하기 구속사와 성화? - 최고관리자 08-01-13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