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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산08년1월11일강의 고후6장7절 관계강의고린도후서

안산08년1월11일강의 고후6장7절 관계

이름 : 우리교회(IP:125.190.2.61)

080111 고후 6장 7절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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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IP:112.♡.81.14)

10-12-28 10:56

안산080111고후6장7절 ‘관계’ / 이근호 목사

고린도후서 6장7절부터 봅시다. 292페이지 제가 읽겠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7절-10절: 7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라고 돼있죠? 그런데 방금 읽었던 10절까지의 내용을, 우리가 하고 싶다고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이점이 이상한 거죠.

방금 읽었던 이것을 난 이렇게 되고 싶다 해서 일어난 일입니까? 아니면 우리의 의도와 상관없이 주님께서 이렇게 만드시겠다는 거예요? 어느 쪽이에요? 주님께서 이렇게 만드시겠다는 거예요. 우리는 유명하고 싶어요. 우리는 부유하고 싶어요. 우리는 고생 않고 싶어요. 그런데 여기 보면 어떤 사람이 나타나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바울 아닙니까?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라 해서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이 여기 운명에 합류된 것을 없는 듯이 알려주죠.

우리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자 같으나 산자, 라고 방금 읽었다 말이죠. 그런데 여기 사도바울이 ‘우리’니까 ‘나’로 나와 여러분이 성경에 나온 이런 식으로 살려고 애쓰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만들었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살아계시는 겁니까? 안 살아계시는 겁니까? 살아계시죠. 여기서 보세요,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말은 우리가 소원하는 것을 이루는 분이 아니고, 하나님 뜻이 성경에 박혀 있어요. 이거는 우리가 의도한 게 아니에요.

우리는 유명하고 싶어요. 우리는 부자 되고 싶어요. 하지만 하나님 뜻은 따로 있다 이 말이죠. 따로 있고, 우리가 원치 않은 상황을 만드시는 것 보니까 하나님은 생생하게 지금 살아서 일하시는 겁니다. 특히 여기 7절에 보면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의 의의 병기로 좌우한다.」 돼있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의의 병기’라 했으니까 이것은 주도권은 누가 갖고 있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이용하겠다든지 하나님을 믿어서 내 이익을 챙기겠다는 이것은 첨부터 거절당하고 순전히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를 뭐로 삼느냐,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뭐로 삼느냐, ‘의의 병기’로 삼아버린 겁니다.

마치, 군에 가기 싫은데 병무청에서 통보 나와 군대 가죠? 군대 가서 훈련할 때, “아, 나 평소에 박박 기고 싶었는데 잘 됐다” 이런 장정 한 명도 없습니다. 집에 가고 싶어 합니다. “아, 총 쏘는 거 왜 이리 재밌어?” 이런 병사 없습니다. “내가 이거 할 타입이 아니고 회사 갈 타입인데 이거 무슨 난리냐! 돈 있는 놈들은 다 빠졌는데 난 돈도 없어 못 빠지고” 원망하죠? 이게 뭐냐, 병사 아닙니까, 군인이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뭐로 삼았다? 하나님이 자기를 군인으로 삼은 거예요. 군인으로 삼았는데 평소에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과 안 맞지요.
안 맞아서 「우리가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고 」우리가 의도하지 않는 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몰아 세우는 겁니다. 자, 이럴 때 우리가 과연 ‘나는 누구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방금 전에 설명 드렸지요? 그럴 때 여러분 스스로 물으면 ‘나는 누구지?’ 나는 누군가 하는 문제입니다.

-전에 목사님 오실 때 화이트보드로 바꾼다던데 재정이…? -

‘나는 누군가?’ 하는 문제에 들어갑니다. 지금 주부 같으면 ‘빨랫감’ 있고 ‘저녁꺼리’ 해야 되고 ‘아이 키워야’ 되고 많잖아요. 이럴 때는 뭐가 생각납니까? 이럴 땐 나는 누군가에 대해 생각이 안 나요. ‘내가 뭘 할 건가’만 생각하는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지만 목사님도 마찬가지로 분주해요. 금요일 이 시간이 바쁩니다. 바쁘기 때문에 그 시간에 명상하면서 ‘나는 누군가’ 그럴 여유가 없어요. 안산 시내 분주한 사람 다 마찬가집니다. ‘나는 누군가’ 없습니다. 왜냐면, 나는 누군가 하지 않더라도 나는 아니까. 나는 부자 되고 싶어 하고, 나는 남보다 출세하고 싶어 하고, 했다하면 ‘성공, 성공, 성공’ 성공이란 남에게 인정받고 싶은 것.

이 사회에서 ‘저 사람 괜찮아, 자기 일 착실히 하더니만 역시 복 받았구먼’ 이렇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이 누구다? 나다. 이거는 확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명상하며 ‘나는 누군가?’ 이거 할 필요 없어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열심히 살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다고요? 강의 처음에? 하나님께서 그런 나를, 그런 나가 되고 싶은 나를 어떻게 한다고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세요? 의의 병기로 삼아서, 유명하고 싶은데 안 유명해, 부자 되고 싶은데 부자 안 돼, 그럴 때 새삼스럽게 뭘 얘기하게 됩니까. ‘나는 도대체 누구냐’ 왜 세상만사 뜻대로 안 돼, 도대체 나는 누구냐 말이죠.

일단 내가 생각한 것은 나는 바탕이죠. 내가 지어낸 거죠. ‘나는 이렇게 되고 싶어,’ 하는 나의 욕망이고 나의 기대죠. 그러나 그런 식으로 하면 고린도후서 6장과는 아무 상관없는 사람 아닙니까. ‘차라리 내가 성경 쓰겠다.’ 내가 집에 가서 컴퓨터 앞에서 ‘자, 내가 성경 쓴다, 고린도후서 누구누구는 위대한 사람이다’는 내 위주로 내가 주인공 삼아서 내가 시간을 내어가지고,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인데, 하나님께 꿈에서 받은 것이다’ 라고 할 수 있어요. 예, 할 수 있다고요. 그런 식으로 내가 하나님 계획대로 칠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고린도후서 6장에 와버리면 졸지에 내가 원했던,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나는 간 곳 없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너는 나의 의의 병기라고 하시면서 하나님 원하는 곳으로 몰아넣으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느냐 하면, 기존에 내가 갖고 있던 나를 내가 철회해야 되겠죠? 나는 이런 인간입니다. 이런 인간이라는 것을 강제로 하나님에 의해서 변하는, 바뀌어야 되겠죠. 근데 바뀌는데 이게 어려워요. 다시 얘기하겠습니다. ‘나는 누군가’는 생뚱맞게 아무것도 없는데 나는 누구냐가 아니라, 제가 말하는 뜻은, 이미 내가 되고 싶은 내가 있다 말이죠.

없는데서 하나님 뜻을 이루는 게 아니고, 이미 나는 이렇게 되고 싶다,는 게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뜻과 상관없이 고린도후서 6장에서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생각하는 나는 따로 있는 거예요. 그럴 때 나는 그 삶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은 하지만, ‘예, 알겠습니다. 그런 인간 되겠습니다,’ 나서지를 못해요. 뭘 알아야 나서지. 알아야 나서지. 쉽게 얘기해서, 하나님, 그러면 제가 하나님의 뜻대로 잘 안 되는 거 보니까 내가 지금 뭔가, 하나님 뜻과 충돌을 일으키는데 좋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십일조 하고, 교회 충성하고, 목사님 말씀 잘 듣고, 선교하고 전도도 하고, 아프가니스탄 가서 선교도 하고,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하여튼 내가 생각하기에 이만하면 하나님백성, 종 답다는 모든 걸 다 하겠습니다. 라고 하잖아요. 그거는요, 그거는 자기가 지어낸 거예요. 자기가 지어낸 성도라 그래요. 그거는 한국교회 목사가 좋아하는 성도예요. 그거는 성도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은 우리는 몰라도 되도록 돼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알고 싶어 한다는 게 우리의 문제가 되요. -어려운 얘기했는데 뭐냐면-

하나님 백성이면 그대로 하겠습니다, 라는 그것이 되바라진 거예요. 그러면 무슨 뜻이냐면 지금은 하나님백성 아니고 어떤 수준 높은 내가 청소해주고, 성화되고 훌륭한 사람이 될 때, 그 수준을 유지할 때 하나님백성이라고 자기가 자기 맘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교도소 가도 주의 백성으로 간주하는데 교도소 간 사이 주변사람에게 자기가 부끄럽잖아요. 나쁜 짓 많이 해놓고 나는 죽어도 천당 간다, 남 앞에 좀 머쓱하잖아요. 주의 백성이면 주의 백성답게 티를 내야 하는데 그게 뭐냐면,

불쌍한 사람 도와주고, ‘예수 믿으세요.’ 하고 고함지르고 교회 와서 충성하고, 집사로서 봉사하고 교회청소하고 이쯤하면 주의 백성 되겠지, 라고 스스로 자기가 이 문제를 만들어내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를 들어 분필이- 하나님께서 ‘분필’을 다루는데 분필이 이게 건방져가지고 자기가 여기다 색칠을 해요. ‘나는 하얀 분필이라 영 맘에 안 들어, 나는 빨간 분필이 돼가지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지, 찬양대를 만들어 찬양을 해야지’ 하나님의 뜻은 간곳없이 자기가 하나님백성답다는 것을 스스로 ‘하는 척’ 하고 연기를 하고 자기가 연출을 다 하죠. 그렇지 않습니까?

기도원에 가보세요, 골골 아파도 하나님께서 ‘너는 지옥백성이다’ 하지 않습니다. 아프다는 이유 때문에 지옥 간다고 하지 않았는데 그 사람은 뭐라 하냐면 아프면 지옥백성이고 적어도 건강하고 멀쩡하게 다녀야 하나님의 백성답다고 누가 얘기해요? 누가 그걸 원해요? 본인이 원한다고 본인이. 다시 봅시다. 여기 고린도후서 6장 다시 보면, 하나님의 의의 병기는 - 잘 들어 보세요 이 말씀- 병기는 하나님이 알아서 유명한 자도 뭐로 만든다? 안 유명한 자로 만들고, 하나님이 부유한 자를 가난하게 만들고, 징계 받을 필요도 없는데 징계를 받게 하시는 그 흔적, 그 자국, 손자국, 그게 하나님백성이에요.

나는 가만있는데 외부에서 손자국이 와서 나를 쥐고 흔드는 이걸 ‘관계’라 합니다. 관계.-어려운 말이죠, 관계- 이 관계성이 하나님백성 된다 이 말입니다. 이왕 어려운 거 더 어려운 거 해봅시다. 여기 ‘분필’ 몇 센티미터입니까. 2센티미터 되겠지요? 분필이 2센티미터라는 것은 분필이 미국가도 2센티미터이고 독일가도 2센티미터고 북한가도 2센티미터죠? 이거는 관계론이라 하지 않고 이거는 속성이라는 본질에 들어있어요. 그런데 ‘나는 형이다’ 하는 것은 누굴 만나야 형 됩니까? 동생이 있어야 나는 형 되고 동생은 내가 있어야 자신이 동생인 걸 알아요. 이걸 관계론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나 혼자 백성 되겠다고 교회 열심내고 충성하고 성경 열심히 읽고… 그게 백성 아니에요. 하나님백성은 나의 주도권자는 ‘내가 아니올시다, 주님이십니다.’ 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관계. 그렇게 이야기하는 관계가 그 사람을 백성 되게 하십니다. 주의 백성이라는 건 국회의원 되고 판사 검사되는 게 아니라, 또 교도소 가지 말라는 말도 아니에요! 교도소 가든 판사가 되던 뭘 하든 간에 내 인생의 주도자는 내가 아니고 따로 있습니다, 라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야기하고 배부른 상황에서도 이야기하는 그게 주의 백성이에요.

주의 백성은 강할 이유가 없어요. 집이 네 채가 있고 열 채가 있다 할지라도 이거요, 내꺼 아니고 주님의 것입니다. 라고 그 관계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 주의 백성입니다. 주의 백성이라 해서 감격해가지고 모든 걸 팔아 교회에 갖다 바치고 사람들을 의식하는 어떤 윤리 도덕 그걸 자꾸 만들려고 해요. 오늘 안산에 눈 왔지요. 안산에 눈 오면 안산 아닙니까? 눈이 오든 안 오든 안산은 안산이죠. 우리가 눈을 맞든 비를 맞든 주의 백성 맞지요? 그런데 우리는 머리 말리려하고 ‘이건 영 내 스타일이 아니야,’ 왜 이렇게 자기가 스스로 주의 백성 되려고 시도 하냐 이 말이죠, 그게. 그게 주의 백성 아니니까 하는 짓 아닙니까.

이 분필이 2cm잖아요. 2cm든 3cm든 주의 백성인데 3cm는 4cm로 늘이고 5cm는 6cm 늘이고 그렇게 해야 주의 백성이 된다는 그 사고방식. 교회 작으면 교회 아니고, 교회 작으면 천당 가도 더 낮은 자리에 가고, 봉사 안 했다고 천당 가서 벌세우고, 헌금 많이 하면 하나님이 복주고, 헌금 하든 않든 그 자체가 주의 백성인데 헌금을 해야 주의 백성이 된다고 가르치는 거예요. 기도 10초하면 기도 아니고 두 시간 정도 해야 기도고, 누가 그렇게 가르쳐요. 본인이, 이렇게 겸손한 체 하면 하나님이 ‘아이구, 세상에 네가 착하구나,’ 어릴 때 들었던 착함에다 하나님을 끼워 넣어서 착한 인간 되면 착한 성도되는 줄 알고, 성도는 애초부터 뭐냐면, 애초부터 죄인입니다.

특히 이 죄인은 자기가 행함으로 벗어날 수 있는 죄가 아니고, 이 죄는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는, 죄가 계속 발산되는 겁니다. 여러분, 밀가루푸대에 칼로 그으면 밀가루 푹 쏟아지죠? 70넘어도 밀가루 쏟아지고 90넘어도 밀가루 쏟아집니다. 학교에 있는 열 살 먹은 애들도 노는 거 보세요. 빤하게 안에 죄 쏟아집니다. 40대에는 40대에 맞는 죄 쏟아지고 90대 보세요, 죄 안 쏟아지는 줄 아세요? 죄 쏟아집니다. 하늘나라라는 것은 예수님의 피로 가는 것이지 우리가 밀가루가 안 쏟아진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상관없이 주님의 피로 그 문은 열리게 되어 있어요.

이 대목을 강조하는 것은 14절 이 대목이 어렵기 때문에 제가 강조합니다. 지금까지 강의한 것 정리하면 오늘 할 고린도후서 7절을 보면 ‘나는 누구냐’ 하는 나름대로의 자기의 생각이 있지요. ‘나는 이러이러 하다’ 나름대로의 자기 생각이 있는데 고린도후서 6장7-9절을 보니까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죠. 하나님께서. 여기 엉뚱한 사람이 누구라 했습니까? -복습하는 의미에서- 누굽니까? 사도바울. 사도바울이 ‘우리’라는 말했기 때문에 사도바울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사도바울처럼 구원받은 사람은 공통적으로 해당이 되는 사항이다 말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다?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돼있죠?
그런데 징계가 오고 초죽음 되는 그 작업을 자기가 이렇게 해야 구원받는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이미 구원된 자에게 이런 게 온다는 말입니까? 구원된 자에게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다? 하나님한테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기 싫어요. 왜 우리가 징계를 받아야 되는데? 우습잖아요. 우리도 남들처럼 똑같이 우리는 편하게 살고 싶어요. 우리의 행복이 넘쳐나고 내가 계획한대로 즉각, 즉각 다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기도 왜하는데? 기도 왜합니까! 몸 아프면 기도 나오게 돼있고, 그 기도는 몸 건강하게 해달라고 나오게 돼있어요. 이걸 인위적으로 고치려고 하지 마세요.

‘하나님 몸 건강하게 해달라는 거 이거는 기복신앙이죠? 저는 안 하겠습니다.’ 이런다고 하나님께서 ‘아이고, 기특하다’ 이러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성질 그대로 내 놓으세요. 여기 목사님 계십니다만, 우리 곁에 목사님이 하나님이라면 내가 뭐라고 촐랑대든 관계없이 ‘놀고 있네, 너 성질 그거 전체 다지? 알았어, 네가 어떤 짓을 하든 나는 너를 버리지 않고 네 원대로 내게 귀속시킬 거야. 또 까불어봐~!’ ‘하나님 아버지, 제가 기복신앙이 많으니까 이제부터 제 몸을 불사르게 내 주겠습니다.’ 라고 기도하잖아요. 하나님이 뭐란 줄 압니까. ‘놀고 있네~지 성질대로 기도 안하고 엉뚱하게 복음적으로 기도한다고 내가 꺼벅 갈 줄 알지?’

구원은 예수님이 알아서 하나님과 의논할 사항이지 우리가 재롱부린다고 점수 더 쳐주는 거 아닙니다. 근원적으로 구원은 십자가에서 완성을 해버렸어요. 십자가가 뭡니까, 한 마디로 십자가는 이것 빼버리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신 죽으심]이잖아요. 십자가가 뭐냐, 이거예요 이거. [대신]이에요. [대신] 대신 빼버리면 십자가가 아니에요. ‘주님~!’ 하고 찾아가니까, 주님께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이양반이 뭐라 하신다냐 하고 들어보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버림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그 버림받음이 누구 때문에 버림받았습니까. 우릴 살리려고 버림받은 거예요.

주여, 제가 지금 돈 2천만 원이 모자라는데 안 들리십니까, 이 양반 뭐하시나? 우리는 돈 2천만 원 있어야 되고 건강해야 되고 주님 찾아오니까 주님은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엉뚱한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우리가 뭘 원하든, 2천만 원 안 구한다고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주여, 건강을 위해서 다시는 기도 안하겠습니다.‘ 그런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우리는 철이 없어요. 우리가 세상을 다 압니까? 우리는 우리 욕망의 종인 거 알아요? 우리는 십년 뒤에 우리가 어떤 욕망으로 기도 할련지 압니까? 몰라요!

우리가 어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우리가 유혹에 빠지고 미혹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지금은 자기가 술 안 마신다하지만 5년 뒤에는 술 마실지 어떻게 알아요? 이거는 장담 못해요! 그런 장담! 안 해도 괜찮아요. 지금 저는 괜찮다고 하고 싶어요. 장담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뭘 해도 뭘 잊지 마라? [대신 죽으심] 그걸 가지고 아까 세 글자로 뭐라 했어요? [관계성] 형이 아니면 동생인지 모르고 동생 아니면 동생인지 모른다는 것.

주님이 ‘주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십자가에 내 대신 버림을 받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냐에 관계없이 나는 주님의 백성이 된 겁니다. 주의 백성이 되면 거기 고린도후서에 나오는 이런 말씀을 우리가 지키지 않더라도 주께서 우리에게 적용을 시키죠.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이 문제로 돌아가 봅시다.

나는 누군가. 나는 도대체 누군가. 이 문제가 상당히 어렵지만 이 문제를 풀어야 되요. ‘나는 도대체 누군가’ 14절 봅시다.『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나는 누군가’ 할 때 “어이, 이근호! 너 이리와!” “주여, 저는 누굽니까?” “너는 죄인이야! 내가 대신 죽어서 구원받았어.” “알겠습니다” 이렇게 쉽게 할 수도 있는데, “주님, 저는 누굽니까?” 라고 물으니까 뭐라 하시냐면, 「너는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이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너는 이 세상에 두 종류의, 두 종류로 나누어진 부류의 사람 가운데서 어느 한 부류에 속한 너다] 이 말입니다. 나는 “주님, 저는 누굽니까” 하고 부류고 뭐고 다 치우고 내가 누굽니까 라는 단독, 개별자로 딱 잘라서, 만약에 여기 사진이 있다면 저만 딱 오려서 이거 전데요, 저, 누굽니까? 라고 묻고 싶은데 주님께서 답변이 뭐냐 하면, 너는 두 부류가 있는데 이쪽 부류와 놀지 마라는 것으로 너는 이쪽사람이다. 이래 보는 거예요.

머리 좋은 사람은 잘 못 알아들을 텐데, 그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게 내 사진인데 내 자신을 가위로 나만 딱 오려가지고 저 사람 말고 내가 누굽니까? 나는 내 자신만 알고 싶어서 물었는데 주님께서 오는 답변이 뭐냐, “너는 이 세상에서 너만 있는 게 아니고, 너와 똑같은 부류가 있단다.”를 이야기해주는 거예요. 그 점이 어려워요.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부류가 있는데 ‘나는 누굽니까’ 물었는데 주님께서는 뭐냐, ‘믿지 않는 자들(부류)과 함께 하지 마라’ 로 해서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부류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더 쉽게 예를 들면, -이게 참 어려운데요- 안경이 나에게 ‘주인님, 나는 누굽니까?’ 라고 물으니까 나는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너는 물 컵과 가까이 하지 말라’ 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누굽니까 물으니까 물 컵과 놀지 마라는 거예요. 물 컵과 놀면 안경 버리니까. 물 컵과 놀지 마라는 거예요. 그러면 나는 뭐냐, 나는 누구냐고 물었더니 용납이 안돼요. 그게 용납이 안 되고,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 존재다’라는 것만 알고 있었던 거예요. 이 말 어렵습니다.

내가 누구냐! 라는 게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의미가 없고, 알려주지도 않고, 네가 누구냐는 알 필요 없이 너는 어떤 일을 해야만 하는 사람이다, 라는 것으로 끝나버린다 말이죠 그게. 그게 철학적으로 뭐냐면 [주체 해체]예요. 나는 누구다. 나는 아무개다. 나는 키가 얼마다. 나는 몸무게가 얼마다. 그게 하나님께 아무 소용없다는 거예요. 나는 지금 무엇이다. 나느 지금 목사다. 이게 의미가 없다는 거예요. 나는 무엇을 하기만 하면 되지, 내가 딱히 누구라도 이야기할 필요 없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 내가 무엇을 하느냐 하는 것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저쪽과 같이 안 놀면 된다는. 안 놀면 돼요. 불신자와 함께 놀지 않은 것. 그것이 내가 할 일이다 말이죠. 쉽지요? 무척 어려워요. 어려울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합니다. 제가 말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쉽게 합시다.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 뭐냐 하면 ‘옆집 아줌마는 해외 놀러도 가는데 나는 시집와서 놀러도 못 가고’ -해외 못가봤죠? -

‘옆집 아줌마’ 주체죠? A라는 주체죠? 그러면 이쪽은 누구에 비유해야 됩니까? B(나)는 해외여행 못 갔죠? 저쪽은 갔다 왔죠? A와 B. 개별자와 개별자 비교되죠? 우리 일상생활에 이거밖에 더 있습니까? 없지요. ‘좋겠다, 이명박은 좋겠다, 그런데 우리교회 장로는 왜 대통령 안 되나?’ 이명박이라는 소망교회와 우리교회가 또 개별자죠? 우리 삶이 뭐냐 하면, 왜 성경에 대해 이해 못하느냐 하면요, 성경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주여, 쟤는 사과 먹는데 저도 사과주세요.’ 이런 식으로 성경이 호응한 적이 없습니다!

‘저 사람은 30평 아파트에 사는데 저도 30평 아파트에…’ 이런 것은 응대한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그렇게 응답한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뭐냐면 ‘너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사명이 너를 새롭게 만드는 거야. 사명이’ 내가 어떤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고 숙제가 오면 그 숙제를 통해서 ‘아, 나 구원받는 사람 맞구나!’ ‘나 성도 맞구나!’ 확인시키는 방법으로 사명이 주어지는 겁니다. 아침에 눈 떠보면 천사가, 신문 배달하는 천사가 ‘오늘 사명은…’ 나오면 나는 개별자가 되는 겁니다. 나는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거예요. 그저 사명이 오게 되면 ‘주여, 오늘도 숙제 주셨군요.’ 그런데 그 숙제가 뭐냐면 ‘너는 불신자와 다른 인생이다’ 불신자와는 다른 길로 가고 있다.

불신자는 넓은 길, 멸망의 길로 가지만 어떤 일이 있더라도 너는 그 자체가 지금 좁은 길로 만들어져가고 있는 과정이다. [성도는 생산하는 것이지 내가 쥐고 있는 게 아니라 ] 얼마나 어려운 말이에요? 성도는 쥐고 있는 게 ‘나 성도 맞습니다.’ 이게 성도가 아니라 성도는 매일아침이 다가오면 매일아침 나를 성도로 생산해내고 만들어내는 과정에 있다. 무척이나 어려운 말인데, 이걸 쉬운 말로 하면 뭐냐면 주도권이 누구한테 있다? 주도권이 하나님한테 있고, 내가 성도된다는 것을 내가 소유하면 안돼요. ‘내가 예수 믿는다’를 소유하면 안돼요. 예수님이 나를 믿게 하셨다는 예수님을 내세워야 할 텐데 나는 예수 믿는 사람 맞다. 하면서 자기 자신을 내세우면 안 된다 말이지요. 그걸 오늘 며칠입니까? 2008년 1월11일까지의 일이고 내일 되면 ‘나는 예수 안 믿는다’ 하면 그만이에요.

내일 오후 다섯 시 돼서 ‘아, 나 이제 예수 빠이빠이다.’ ‘그동안 예수 고마웠습니다. 빠이빠이다,’ 하면 그전에 내가 믿는 예수가 되죠. 주님이 주도권을 쥐고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어봤는데 별 소득도 없고 이득도 없으니까 이제부터 나 예수 안 믿기로 했다. 그럼 전에 믿는 건 뭡니까. 내 이익을 위해서 믿는 거죠. 그러니까 전에는 주체가 해체가 안됐고 자아가 그대로 살아있었어요. 자아가 살아있는 이상 이 하나님, 이 예수는 다 가짜입니다. 그거는 자기가 모자라는 부분을 메꾸기 위해서 기독교를 도용한 것이지, 복음을 도용한 것이지, 그거는 궁극적으로 누가 주인공이냐 누가 하나님이냐면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에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인간은 어디서 쫓겨났습니까.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요? 그 쫓겨난 성질 어디 갑니까? 혹시 학생들 중 담배피우는 애들 있다면 ‘담배피운 애들, 담배피운 벌로서 화장실 청소다,’ 나중에 보니까 청소하면서 담배연기가 올라오더라 말이죠. 교회는 담배 피워서 화장실 청소하면서도 담배 피워서 이곳에 왔다는 속성을 버리지 않는 거예요. 우리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잖아요.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도 ‘미안합니다.’라는 소리 않고 쫓겨날 수밖에 없는 성질을 모락모락 피워내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나님 다야? 내가 더 중요하지’ 거기다가 기독교, 불교, 예수 뭘 집어넣어도 주인공은 누구예요? 누가 신이예요? 내가 신이예요.

성경이 알라딘 램프예요 알라딘 램프에 거인 나오죠? 아무리 최홍만 같은 거인이라도 주인이 불러내면 “주인님, 뭘 도와드릴까요?” 나오잖아요. 거인을 불러내고 않고 권리는 누구한테 있습니까? 나한테 있죠. 그러면 거인이 셉니까 내가 셉니까? 내가 더 세잖아요. 성경에 보면 천국 지옥 있지요? 내가 성경 보고 안 보고는 누가 더 세요? 성경 안 읽은 하나님이 세요 내가 세요? 내가 더 센 거죠. 왜? 안 보면 그만이죠. 성경 바깥의 주체가 누굽니까. 누가 절대자예요? 내가 절대자인 그 성질이 무슨 성질이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수밖에 없는 그 성질이에요. 천상천하유아독존, 내가 바로 신이다. 내가 신이 된 거예요.

신이 되는 특징이 뭐냐 하면, 신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 한 사람만 두잖아요. 최후의 자리에 누굽니까 ‘나’가 앉아 있잖아요.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인데, ‘목사님, 우리의 모습이라고 하면 안 되죠. 우리는 구원 못 받잖아요.’ 다시 얘기합니다. 이게 우리의 모습 맞습니다. 신자들 불신자든 우리는 평생 이렇게 삽니다. 이걸 부정하면 안 돼요. 물 마실 때, 이거는 저 목마르니까 먹는 거예요. 사람이 남의 사정을 이해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제가 어떻게 그 사정을 압니까? 사람은 사람 속에 못 들어가요.

사람이 이빨 아파보세요, 그 아픈 곳을 아프다, 아프다 말로 해가지고 그 아픔을 몰라요. 직접 아파봐야 되는데 직접 아파보지 않으면 그 사람의 아픔을 몰라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 바깥의 사정을 모릅니다. 그런데 역시 하나님을 몰라요. 인간은 선악과 따먹은 자기밖에 몰라요. 인간은 뭐냐, 결국은 무엇을 해도 나에게 이익이냐 손해냐 그것만 따지는 것이 인간이고 나이가 90이 되고 80,70 살아도 이거는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이거 변할 생각하지 마세요. 그거 마귀시험입니다.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받는가? ‘목사님, 목사님 말씀대로라면 성경에 아무리 천국 있다한들 이거 덮어버리면 천국도 업고 지옥도 없는 거예요? 왜? 내가 덮어버렸으니까. 성경 누르고 나 성경 안 들은 걸로 하겠다, 눌러버리면 바깥에 누가 주인공이라고? 누르고 있는 내가 주인공이죠? 왜, 내가 취사선택해서 내가 읽을 거냐 아니냐를 누가 발휘합니까. 내가 발휘하니까 나보다 더 센 자는 없지요? 그런데 여러분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게 정답이 아니고 그게 구원의 덫이에요. 구원의 시발점입니다.

내가 성경을 누르고 있는데(안 읽겠다고) 뭐가 와서 뒤통수를 친다 이 말이죠. 치니까 성경을 폈어요. 펴니까 성경 속에서 나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 말이죠. 누가 와서 때리고 성경을 펼치게 한 모든 것을 누가 했냐고 다른 사람이 물을 때, “어이, 이목사! 당신은 다신 자신밖에 모르죠?” “응, 나밖에 몰라” “그런데 어떻게 예수를 믿어?” “주님이 와서 그렇게 하대” “그러면 주님을 믿는 너는 착하네?” “착하기는 개 코가 착해?(ㅋ)” “나는 이렇게 누르고 있었는데 이것까지 주님께서 하셨어,” 라고 하니까 사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그 시점이 뭐냐 하면, 첨부터 그 공로가 누구한테 돌아가겠어요?

태어나고 성경보고 하는 이 모든 공로가 나에게 돌아올 이유가 없죠? 오직 주님께 돌아갈 때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원했던 천국의 사람(삶)이에요. 천국의 삶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뭐냐, 우리는 철두철미하게 뭘 알아야 돼요? 나는 뭐밖에 모른다? 나밖에 모르고 성경보는 도중에서도 나밖에 모르고 끝나도 누구밖에 모른다? 나밖에 모른다. 이거 청소년 같으면 ‘나는 나밖에 모른다’ 복창해야 되요. 아이들 잘 따라할 겁니다. 자기 살아가는 모습과 똑같으니까.

나는 나밖에 모른다, 해야 그렇게 이기적이고 죄 많은 인간에게 무상으로 찾아와서 구원한다면 그 모든 공로는 오직 홀로 우리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가짜 신자 보세요, “나는 절망했었는데 내가 성경공부 하고 싶었는데 주님께서 주셨어.” 이러면 그 공로가 누구와 합작했어요? 예수님과 자기의 착한 성품과 합작해서 구원받는 것이 되겠죠? 이거 가짜 천국입니다. 그거 지옥이에요. 그렇게 되어서는 천국 가서 심심해서 못 삽니다. 천국 가면 주님께 영광 돌려야 될 텐데 이건 뭐; 자기 안 알아줄게 빤하니까. 천국에서 삐졌어.

예를 한번 들어볼까요? 자기가 천국 왔는데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어머니가 있어요, 어머니는 예수 안 믿어 지옥 갔어요. 본인은 천국 왔어요. 천국와도 마음이 괴롭겠습니까, 안 괴롭겠습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엄마가 지옥 가있는데, 마음 편하겠습니까, 안 편하겠습니까.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이가 지옥 가있고 자기는 천국에 쉬고 있는데 천국 가서 마음 편하겠어요? 안 편하겠어요? 불편하겠어요? 상상해보면 마음이 불편하겠지요? 그런데 뭘 생각해야 되요? 천국 오고 싶어 온 게 아니고, 사실은 내 자리가 어느 자리다? 나는 나밖에 모르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 어디 가야 되요? 지옥 가야 되는데, 천국 와 있으니까 그 공로가 누구 공로예요? ‘아, 천국은 주님께서 마음대로 하시는 세계구나’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 세계가 아니고 주께서 가야한다면 가야될 세계. 그게 바로 천국이 되는 겁니다.

자, 그럴 때, 제가 길게 설명했는데 그러면 저에게 “목사님, 그러면 왜 길게 설명했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믿지 않는 자’ 이걸 설명해야 되요. 설명하기 전에 다짐을 해야 되요. 성경공부를 하든지 끝나든지 나는 누구밖에 모른다? 나밖에 모른다. 왜? 옆 사람의 사정을 내가 알고 싶어도 몰라요. 환경이 다르고 머릿속에 축적된 기억이 달라요. 사람은 과거가 만들어내거든요. 과거의 누적된 것이 층층이 쌓여서 오늘날 내가 되었습니다. 지난달에 강의 했지요? 과거가 스며들어 와서 과거가 만들어낸 현재. 그 현재가 뭘 예상하죠. 과거에 미흡한 것을 메꾸기 위해서 ‘나는 미래에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 하는 그 미래 가짜입니다.

‘믿지 않는 자’ 할 때 믿지 않는 자가 누구냐 하면, 「성도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 했는데 믿지 않는 자가 뭐냐, 믿지 않는 자가 안 믿는 자가 아니에요. -말이 좀 어렵습니다.- ‘믿지 않는 자’는 내가 믿는다 안 믿는다가 아니라, 믿지 않는 자는 15절에 나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나의 인생의 주도자로서 개입을 한 사람은 믿는 자가 되고요, -잘 들어보세요.- 예수그리스도가 타인 아닙니까, 타인. 그 타인이 나에게 개입하면 ‘믿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가 나에게 개입을 않게 되면 ‘믿지 않는 자’가 됩니다.

보통 믿지 않는 자, 사람이 믿는 다는 것은 확률이에요 사실은. ‘나는 저 운전사를 믿는다.’ 무슨 뜻입니까? 운전사의 오랜 노하우를 믿는다. 나는 비행기 탈 때 비행기조종사를 믿는다. 왜? 믿어야 안심이 되니까. 나는 내 남편을 믿는다. 왜? 내 남편이니까. 한번 적어봅시다. ‘나는 내 남편을 믿는다.’ 이거 믿음입니까? 믿음 아닙니까? 믿음 아닙니다! 왜냐면 여기 뭐가 들어있어요? ‘나’가 들어 있잖아요. ‘나’가 들어있는 것은 믿음 아니에요.

‘나는 오늘밤에 잠을 잘 것이다.’ 이거 믿음입니까, 믿음 아닙니까, 믿음 아니에요. 누가 들어가니까? ‘나’가 들어간 거예요. ‘나는 예수 믿습니다.’ 이거 믿음이에요? 믿음 아니에요? 믿음 아니에요! 여기 ‘나’가 들어가거든요.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건 믿음이에요. ‘그리스도께서 밤에 잠을 자게 할 것이다.’ 이건 믿음이에요. 「그리스도께서 무명한 자를 유명케 하실 것이고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같으나 산 자를 만들 것이다. 고후6:8」이렇게 할 때 믿음이다 말이죠.

내가 믿는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니까요. 그건 자기최면입니다. ‘하면 된다’ ‘하면 된다,’ ‘할 수 있어’ 이거거든요. 시험 칠 때 ‘아, 떨린다.’ ‘떨리지 않을 수 있어’ ‘떨리지 않을 수 있어’ 이건 믿음입니까? 믿음 아니죠. 자기 최면, 자신에게 정신력을 강화시키는 거예요. 믿음이라 하는 것은 매사에 예수님께서 나의 일에 관여해서 결과적으로 된 모습이 지금 내 모습이다.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살인강도가, 십자가의 살인강도가 한 쪽 사람은 지옥 갔지만 한 쪽 사람은 어디 갔습니까? “목사님, 한 쪽 사람 어디 갔어요?” 천국 갔지요? 천국 갈 때 그 사람이 뭘 믿었어요? 그 사람이 ‘나는 믿습니다.’가 아니고 옆에 있는 분이 우리 죽고 난 뒤에도 관여함을 믿었지요. “예수여!” “ 왜? ” “ 저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니까 한 쪽 강도가 “아이고, 놀고 있네, 예수란 양반도 우리와 같이 죽는 마당에 무슨 능력 있다고 믿나, 치워라!” “당신이 십자가에서 내리면 그때 믿을게” 하거든요. -이거 어려운 건데 어렵더라도 얼마 안 남았으니까 어려운 거 해봅시다. -

'십자가‘ 세 개 있잖아요. 지옥 갈 십자가 있잖아요. 지옥 갈 강도가 예수를 안 믿었어요. 왜 안 믿었는가 하며는, 아까 자기 현재는 뭐로 되어 있다? 과거로 되어 있다. 과거 기억이 들어오죠? 과거 자기 습성에 의하면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할 자는 일단 로마군대 보다 힘이 더 세고, 자기에게 묶인 십자가를 우지직~ 끊을 수 있는, 삼손 같은 사람일 때 로마군대를 처단해버리고 우리를 건질 수 있다는 게 자기 기억에 들어있지요. 그 기억이 뭘 만든다? 현재를 만들어서 거기서 뭐가 나온다? 현재가 나오거든요.

“예수여! 기적을 일으켜서 십자가를 뽑아버리고 로마군대를 쳐버리고 우리를 탈출시키면 그때 나는 당신을 믿겠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믿음이 뭡니까, 과거의 자기 체험이 현재로 이어져서 여기서 예수를 믿잖아요. 그런데 예수는 자기와 같이 묶여있는 신세가 됐지요? 그러니 믿어집니까, 안 믿어집니까? 안 믿어지잖아요. 안 믿어지는 게 정상 아닙니까. 안 믿어지는 게 정상이죠? 그런데 여기 비정상은 뭡니까, 구원받은 강도 보세요,

구원받은 강도는 똑같이 십자가를 지고 죽어가고 있는 것을 알지요? 아는데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예수님은 장차 천국을 만드실 분이다. 그렇게 평소에 말씀을 하셨잖아요. ’그 약속대로 예수님을 믿습니다.‘가 된 거예요. 이것은 자기 과거와 관계없어요. 그냥 이 사람은 예수님의 미래가 그 사람에게 밀어닥쳤어요. 이 사람이 한 게 아니고, 미래가 이 사람에게 점령한 거예요. 미래가 날 이끌어 간 거예요.

내 예상이 나를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고. 미래의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날 이끌고 가니까 강도가 하는 말이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니까 주님께서 “네가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했다 말이지요. 그러니까 이 강도는 무엇을 안 믿었어요. 자기의 느낌, 체험 안 믿었지요? 자기 자신을 안 믿은 거예요. 누굴 믿었어요?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예수님의 약속을 믿었지요? 그게 믿음이다 말이지요.

그 주도권이 우리에게 온 거예요. 사모님과 목사님 이 학교 운영한다고 힘들지요. 힘들 때 소망 있을 것 아닙니까. 예산이 많고, 애들이 어떻고, 많다 말이죠.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천당 가는 건 아니다 말이죠. 천국 가는 것은 뭡니까, 내가 어떤 힘든 일을 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고, 아침에 배달된 긍휼로 주께서 나를 이런 길로 가서 천국 가도록 인도하고 있음이 느껴질 때 어떤 일을 하더라도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멍에를 같이 안 메느니라.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데도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남겨둔다고요. 똑같은 쟁기질을 하고. 멍에를 같이 매지 마라 했다고 쟁기질을 하지 말라가 아니라 똑같이 해요. 잠을 자는데 한 사람은 데려감을 당하고 한 사람은 남겨두면 되죠. 이 말은,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기쁘게 여기라, 감사히 여기라 이 말입니다. 사고방식이 다른 것을 ‘아, 사고방식 달라가지고 미치겠다,’ 이게 아니고 달라진 것이 내 뜻이 아니고 주님의 뜻이기에 그 다라진 것을 믿으라, 이 말입니다. 왜? 주님이 아니면 나는 저 사람과 원수 될 필요 없어요. 좋게 지내고 싶어. 그런데 달라. 다른 것은 주님께서 특별히 주입한 거예요.(아멘)

그리고 주입한 것을 인정하는 그것이 바로 신자고 하나님의 일이다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문제 하나 나갑니다. 하나님이 일이 무엇입니까? 이거는 성경에 나오는 겁니다. 「하나님자신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그러니까 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나를 일체 안 믿고 외부인 예수그리스도의 약속을 믿는 그것이 믿음입니다. 자, 이렇게 보면 불신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는 것은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 그런 뜻은 아니지요? 세상에 신자와 결혼해도요, 깨질 때는 깨집니다. 왜! 왜 그럴까요? 아까 얘기했잖아요. 누구중심이기 때문에? 내 중심이기 때문에. 내 수 틀리면 신자고 뭐고 무슨 가정이고 간에 나한테 털끝 건드리면 벌컥 합니다. 그게 바로 인간입니다.

성경공부 마치면서 ‘나는 아마 주님을 위해 살 거다.’ 천만에 말씀, 여전히 누구를 위해 삽니까? 역시 날 위해 살아요. 한데 순간순간 뭐가 올라옵니까. 그게 바로 ‘죄’였구나. 그것 때문에 대신 죽으셨구나, 하는 것이 믿어져야 됩니다. 그러니 이 말씀은 뭘 하라는 말씀이 아니고, ‘너는 이미 주님의 사람 맞다.’ 라는 확인 절차가 바로 이 말씀(성경)입니다. 새삼스럽게 뭘 지켜라는 말이 아니고, 그 증거가 16절에 나옵니다.
『16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나는 저희의 뭐가 되고? 저희의 하나님이 되고. 이 말씀 기분 나쁩니까? 기분 나빠요? 제가 안산학교에 이제부터 제가 주인입니다. 하면 목사님 기분 나쁠 거예요. ‘지가 뭘 했다고…’ 기분 나쁘죠? 그럼 문제 나갑니다. 하나님이 이 학교 주인입니다. 기분 나쁘십니까? 아니죠. 그게 믿음이라니까요. 그게 믿음이에요. “목사님, 누구든지 목사님 말 듣고 욕 않겠습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이천에 불났죠? “이번 댁의 아들 죽은 것은 하나님이 죽였습니다.” 그 소리 듣고 뒤로 넘어질 거예요. “이 학교 주인은 목사님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기분 안 나쁘죠. 그런데 댁의 아들은 하나님께서 대신 죽였습니다. 하면 기분 대게 나빠요. 내기 이렇게 몸이 아픈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했습니다. 기분 대개 나빠요. 그게 진리든 떠나서 기분 나빠요. 그만큼 우린 평소에 누구중심이다? 다 나밖에 모릅니다. 하나님, 하나님 핑계대지만 결국 돌아오면 내게 잘 해줘야, 내 소원을 풀어줘야 좋은 하나님으로 모시겠습니다, 하는 이 마귀적이고 이 악마적인 본성 끝까지 갑니다.

끝까지 가 줘야 십자가 피 외에 우리가 구원받을 재주가 없음을 분명하게 아시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사도바울이 이렇게 사니까 징계가 왔을 때 안 삐집니다 그 사람은. 왜? 자기는 죄인이며 자기 주인은 누구라고요? 내 안에 누구 있다고?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니까! 하나님이 주인인데 주인인 하나님이 와가지고, 여기 피아노가 있는데 주인이 피아노 친다. “띠딩~” 피아노가 “왜 저를 칩니까?” 건방지게 왜 치냐고 못하죠. 왜? 주인이니까. 우리의 주인이 누굽니까.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주인이 와서 나를 어떻게 인도하든지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감사해야 되죠. ‘맞구나’ 나는 평소에 나밖에 모르지만. 이렇게 간섭하시고. 날 위해서. 아직도 버리지 아니하시고. 나 대신 죽었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어디 있겠어요. 끝으로 당부합니다. 제발! 스스로 인간되고 착하게 되려고 하지 마세요! 사람이요, 사람의 심리가 이래요. 한번 착해졌잖아요. 예를 들어 술을 두 병 마셨는데 한 병 마셨다. 착해졌잖아요? 착해졌으면 사람이 오기가 있어서 그 다음에는 더 높여갑니다. 더 높여가면 그 인간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모르고 점점 더 자기는 위대한 승리자고 인격자고 고매한, 우수한 인격자라고 착각합니다.(아멘) 그렇게 되면 그 사람에게는 더 이상 ‘너는 죄인이야’ 라고 하는 십자가가 싫어요.

‘십자가 저리가! 이만큼 착한데 내가 왜 죄인이야!’ 내가 이렇게 착해서 복 받았는데 내가 왜 죄인이야. 이래 되는 겁니다. 이제는 반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어떤 일을 할 때요, 못한 일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잘했다고 생각하는 그 일을 하면서, 왜 이런 일을 가지고 내가 천당에 못 가는가?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치하하도록 하려는 내 본성. 90, 100살 먹어도 내게서 안 물러갑니다. ‘아하~ 이게 바로 죄구나!’ 성경 좀 봤다고 까불락 대면서 전부 다 자기 영광으로 돌릴 수밖에 없는 이 본성. 이런 본성 고쳐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이런 못난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니…’ 그 은혜가 새로워지는 일부터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나 자신밖에 모른다는 이것보다 더 확실한 진리가 또 없습니다. 성경공부를 하고 하나님을 찾아도 ‘날 위해서’ ‘나의 이득을 위해서 찾는’ 것이 인간임을 이제 알았사오니 이런 못난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에 피까지 흘리신 주님께 다시 한 번 감사와 공로를 드리고 ‘오늘밤에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그 약속을, 놀라운 능력으로 믿어지게 하시는 하나님께 더욱 더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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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