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6 대구강의 9 - 지옥의 하나님 12자유게시판미가

06 대구강의 9 - 지옥의 하나님 12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06 대구강의 9 - 지옥의 하나님 12

06,07,03 강의 이근호, 정리 손하진, 구득영

◈ 인간들이 하는 성경해석의 한계 !!

오늘은 '노아 전쟁'부터 시작을 하겠는데, 성경을 여러 번 아무리 해석을 해도 사람들에 한계가 있는 이유가, 제가 그림으로 한번 그려보면, A 라는 사람이 여기 있고, B 라는 사람이 다른 여기에 있을 때, 이 A 라는 사람이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고, B 라는 사람은 생활에 바빠서 책 한자 본 적 없고 학력도 뒤떨어지고, 공부라는 것은 잘 모르고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A 라는 사람이 볼 때는, 이 B 라는 사람의 그 모든 것이 자기의 넓은 학식 속에 전부 포함이 된다고 보는 것이다. 자기가 그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은 다 알고 있다고, 실제로 시험을 치면 점수도 더 많이 나오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B 라는 이 사람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A 라는 사람이 다 포섭할 수 있고, 그렇게 모두 다 포함한다고 할 때는, 이 B 라는 사람은 A 라는 사람에게 무조건 배워야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것이 A 라는 사람의 일방적인 생각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B 라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A 라는 사람은 공부를 많이 했다고, 그것은 인정하는데, 그런데 B 라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A가 알고 있는 것과 일정 부분 공통점은 있을 수 있지만, A 라는 사람이 자기가 모르는 것을 모두 안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A 라는 사람은 그렇게 보지 않고, A 자신 속에 B가 다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또 이 B 라는 사람은 생각하기를, A 라는 사람이 자신하고 공통점이 있지만 자신에 대해서 온전하게는 다 알 수 없다고 할 때, 그럴 때 제 3자인 C가 볼 때, 이 둘 중에서 어느 것이 타당성이 있다고 보겠는가? A의 견해가 맞을까, 아니면 B의 견해가 맞을까?

이것을 제3자인 C 라는 사람이 볼 때, 지금 21세기 들어와서는 점차 B쪽의 주장이 진리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리고 워낙 사회가 다원화되다 보니까, D도 있고, E도 있고, F도 있고, 이렇게 여러 가지가 있고 말이다. 물론 어느 일정 부분 공통점은 있겠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서, 서로 축구를 좋아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그러나 어느 한 쪽이 야구는 싫어한다는 또 다른 차이점이 생기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방금 제가 그림으로 그린 이러한 사고방식이 성경해석에 여지없이 그대로 반영되는데, 어떤 사람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1000번을 읽었다고 한다면, 그렇게 읽고 읽고 읽고 또 읽었는데, 그런데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한번도 제대로 못 읽은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이렇게 1000번을 읽은 사람이 한번도 못 읽은 사람의 지식을 다 포섭하겠는가? 아니면 B의 생각처럼 일정 부분 공통점만을 가지고 있겠는가? 어느 쪽이겠는가?

역시 오늘날의 추세는 B의 생각에 가까운데, 성경을 천 번을 읽었든지 만 번을 읽었든지 간에 말이다. 물론 어느 일정 부분 공통점은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1000번을 읽었다고 해서 100번이 읽은 것을 온전히 모두 다 포함해서 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 동일한 사람이 성경을 10번 읽고, 또 100번을 읽었을 때 !!

방금 제가 쉬운 예를 들었는데, A하고 B하고 서로 사람이 다르게 해서 말이다. 여기서 좀 더 어려운 것을 해보면, 이제는 동일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A라는 동일한 사람이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를 읽었는데, 그런데 2번 읽었을 때 받았던 어떤 느낌이 있고, 그리고 10번 읽었을 때에 받은 느낌이 또 따로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2번 읽었을 때가 1998년이라고 하고, 10번을 읽었을 때가 2006년도라고 했을 때, 2006년도의 사고방식이 1998년도의 사고방식을 전부 다 포섭하는가? 아니면 일정부분 공통점만 가지는가? 다시 말해서, 2006년도에 10번째 읽은 그 느낌이 1998년도 2번째 읽은 느낌을 온전히 장악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과연 장악할 수 있겠는가? 두 번째 읽고 세 번째 읽었을 때, 그것이 첫 번째 읽은 느낌을 온전히 포함하겠는가? 아니면 일부만 가지고 오겠는가? 동일한 사람이 말이다.

◈ 동일한 사건은 없다 !!

옛날에는 한 사람이 10번 읽었으니까, 과거 2번 읽었을 때를 다 능가하고 충분히 그것을 다 안다고 주장했는데, 그런데 오늘날에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철학은 무엇이냐 하면, '사건' 위주의 철학이기 때문에, 처음 2번 읽을 때의 그때 그 당시의 느낌은, 그 뒤에 제 아무리 재현하려고 해도 재현이 안 된다는 것이다. 즉 똑같은 반복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렇게 10번이나 읽었다고 하지만, 그러나 사실 이 10번을 읽었다 하는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2번에서 10번이니까, 즉 성경을 8번을 더 읽었지만, 물론 성경책을 새로이 한번씩 더 볼 때마다 전에 못 느꼈던 새로운 느낌을 가지겠지만, 그러나 동시에 무엇을 손해보느냐 하면, 처음에 맛보았던 그런 짜릿한 느낌을 다시 재현할 수 없고, 그것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주장하는 성경해석의 문제점인데, 오늘날 성경해석에 있어서 이런 문제점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직도 '리쾨르' 라든지, '가다머' 라든지, '하이데거' 라든지, 이러한 수많은 세계최고의 해석학자들이 와도 이 문제를 결코 해결하지 못하는데, 아니 사실상 해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현대해석학 - 그때그때 달라요 !!

그래서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해석학은, 물론 '크로마톨로' 라는 '데리다'의 글도 있기는 하지만, 해석학이 무엇인고 하니, 지나간 것은 말 그대로 지나간 것인데, 이 지나간 것을 근거로 해서 지금이 더 우월하다고 장담할 수가 있는 근거는 없다는 말이다. 즉 "그때그때 달라요" 라는 것이다. 천 번을 읽든 만 번을 읽든, 그때그때 다르다는 것이다.

◈ 현대해석학이 성경해석과 만나면?

그렇다면 이렇게 그때그때 다른 새로운 느낌을 받는다고 하는 것으로 만족스럽게 여기는 입장에서, 즉 지금의 느낌을 과거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사고방식을 가지고서, 그런 입장에서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이 성경을 보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한 성경해석학이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하겠느냐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노아를 살펴보고 있는데, 과연 이 노아를 제대로 알아서 노아가 이해했던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과연 노아 이후에 나오는 모세가 노아의 그러한 것을 포섭하겠는가? 아니면 그 어떤 공통점이라도 가지고 있겠는가?

◈ 모세를 알면 노아는 그냥 ??

지금 성경책이 이렇게 있는데, 여기에 노아가 있고 저기에 모세가 있고, 그리고 따로 여기에 제3자인 우리가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이해한다는 것은 노아를 이해하고 모세를 이해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렇게 노아와 모세를 이해할 때, 만약 모세를 안다면 노아는 거저먹기로(?) 알게 되는 것인가? 아니라면 모세를 아는 것만으로는 노아를 아는 것이 모자라고, 노아를 또 따로 챙겨야만 노아와 모세를 둘 다 아는 것인가? 어느 쪽이 맞는가? 과연 모세를 알면 노아는 다 안다는 말이 맞는가?

이것이 성경해석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문제인데, 모세는 하나님의 계시를 추가적으로(?) 받았으니, "모세는 노아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월등하게 안다" 라는 말이 맞느냐는 것이다. 만약 맞다면 우리는 "노아와 모세, 두 사람 가운데서 모세의 입장에서 노아를 바라보면, 노아의 모든 것도 같이 풀린다" 라고 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이렇게 모세에 대해서 안다면, 그 뒤에 나오는 다윗에 대해서 알면 모세, 노아, 그리고 아담까지도 다 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다윗 이후에 누가 나오는가? 만약에 예수님이 나온다고 하면, 그러면 이 예수님을 알면 다윗, 모세, 노아, 그리고 아담까지도 몽땅 다 챙길 수가 있다고 하는, 그런 논리가 성립된다는 것이다.

◈ 과연 계시의 점진성인가?

그래서 성경해석을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로 들어가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다윗과 모세로 관통해버리고, 그 이후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와 사도바울도 그렇게 관통해버리는 성경해석을 하면 옳다는 것인데, 이것을 '계시의 점진성' 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이 '점진성' 이란 용어가 적당치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안 되니까 '만개한다' 라고 하는데, 그것도 뭔가 좀 부족하고 말이다.

그런데 이 '점진성(漸進性)' 이라고 하는 것은, 점진하기 때문에 지나간 것은 이제 잊어버려도 좋다는 의미가 있는데, 점진성이니, 즉 이만큼 왔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점점 더 1층에서 2층으로, 2층에서 3층으로 자꾸만 올라가는데, 왜 그렇게 올라가는고 하니, 아래층의 것은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고서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해석이 옳은가? 이런 해석은 겉으로 보면 맞아 보이는데, 그리고 예수님도 어떤 면에서는 이런 해석을 제안했는데, 마태복음 11장에서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세례요한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없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천국에서는 어떠한가? 지극히 작은 자라고 해도 그렇게 위대한 이 세례요한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마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 세대에 이미 들어와 버리면 지나간 것, 그리고 몰랐던 것까지 한꺼번에 알기 때문에 신앙도 거저먹을 수 있다고, 즉 그냥 다 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 생각이고, 우리가 생각할 때는, 물론 우리가 예수님의 전체를 다 안다고 하면, 방금 한 그 말에 동의가 되는데 말이다.

◈ 우리가 과연 예수님을 다 아는가?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예수님의 전체를 다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알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부분적으로 아는 것을 가지고 아담도 알고, 노아도 알고, 모세도 알고, 그리고 다윗도 알 수 있다고, 그렇게 주장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분명하게 우리는 죽을 때까지 예수님을 부분적으로, 그렇게 밖에는 알 수가 없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우리가 과연 "다윗도 다 안다. 모세도 다 안다. 노아도 다 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상당히 곤란하다는 것이다.

◈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출발하자 !!

제가 언급한 이런 난제들을 한꺼번에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데, 여기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한다" 라는 것이 물론 맞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렇게 예수님이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출발한다" 라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면,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우리가 노아, 모세, 다윗, 그리고 아담을 알고자 하는 현재의 '나' 자체를, 즉 "예수님, 저는 노아도 알고 다윗도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알고 싶습니다" 라고 하면서 다가오는 그 '나' 자체를, 그것을 십자가에서 공격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 해석하는 사람 자체를 공격하는 그런 성경해석 !!

이러한 성경해석학을 지금까지 아무도 내놓은 적이 없는데, 데리다도 그렇고 말이다. 하여튼 아무도 그런 해석을 내놓은 적이 없는데, 이렇게 해석자 자체를 공격하는 해석이 되어버리면, 즉 해석자체가 출발점부터가 시동이 안 걸리니까, 그런 해석학이 도저히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해석하는 사람을 공격하는 해석학을 말이다. 그런 해석학은 주장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큐티를 하는 사람이, "목사님, 어떻게 합니까?" 라고 물으면, (아기 기저귀 가는 것 말고)"이렇게 하세요"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큐티, 그까지 것은 해서 뭐 하려고" 라고, 그렇게 되어버리면 큐티를 하려는 사람의 기를 팍 죽여놓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해석은 무엇이냐 하면, "큐티는 해서 뭐 하는데" 라는 식인데, 예수님이 그렇게 퉁명스럽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노아는 알아서 뭐할 건데", "나를 알아서 뭐할 건데" 라는 식으로 나온다는 것이다.

◈ 해석자도 십자가로부터 공격을 받아야 !!

그런데 감히(?) 오늘은 십자가 중심으로 '노아의 전쟁'에 대해 해석하려고 하는데, 이렇게 노아에 대해 해석할 때 십자가 중심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우리는 제3의 중립지대에 그냥 앉아서, 예수님이 노아를 어떻게 해석하는 지를 쳐다보는 입장이 아니라, 그렇게 관람하는 우리조차도 예수님이 공격한다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지금 노아에 대해서 왜 이렇게 머리를 고생시켜가면서 공부하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노아에 대해서 공격할 때, 그렇게 공격하는 그 안에 누가 들어 있는고 하니까, 그 안에는 바로 우리 자신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말이다.

제가 이것을 초반에 길게 이야기했는데, 간단히 정리하자면, 우리가 노아에 대해 알고자 할 때, 이미 노아의 죄 속에 우리가 포함되어서, 즉 노아와 더불어 손을 잡고 십자가로부터 공격을 받을 준비를 하면서, 그러면서 노아에 대해서 해석을 해야 제대로 된 해석이 나온다는 것이다.

목사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다윗이 나오는 부분을 폈다고 하면, 다윗을 볼 때 "다윗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라고 하면서 바로 다가서지 말고, 다윗이 다 모르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다 모르듯이 말이다.

그렇게 다윗이 모르고 있는 것을 우리도 현재 모르고 있다는 입장에서, 즉 다윗이 당하는 그 자리에 우리도 함께 동참해서, 우리도 십자가로부터 당하는 공격을 흔쾌히 수용할 자세로, 그렇게 성경해석을 해야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할 때 생기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비로소 이 '전쟁' 이라는 개념에 우리가 충실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 철학자들의 특징 - 치고 빠지기 !!

손하진 성도님이 수고를 하셔서 철학강의를 녹취해서 올리시는데, 저는 올라온 글들은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다 읽는데, 얼마나 꼼꼼하게 녹취를 했는지 오자가 두 세 개밖에 없다는 것이다. '목사의 잘못은 간단하다' 라는 책의 오자가 서른 개가 넘으니까, 그 정도면 대단하다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다 읽는데, 그래서 제가 평소에 물어보는데, "공부하면서 어떤 것을 느꼈습니까" 라고 말이다. 그러면 세 사람이 다 입을 다물어버리는데, "아니, 철학인데 잘잘못을 따집니까?" 라고 말이다. 아무튼 "그냥 철학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진짜 철학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진짜로 자기 사상이 그 안에 들어가 있을까? 그것이 굉장히 궁금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생하게 녹취된 것을 보면, 그 철학을 하는 양반이 노아나 다윗이나 모세의 자리에 본인이 있지를 않고, 자기는 제3의 자기만의 자리를 따로 챙겨서 서 있음을 알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만의 자리를 챙겨서 신을 논하고, 기독교를 논하고, 천주교를 비판하고, 아무리 예수님을 이야기 해보았자, 그렇게 따로 챙기고 서 있는 이상, 그것이 예수님이든지, 신이든지, 노아이든 간에, 그것은 일체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을 모른다는 말은 세상에 대해서도 모른다는 뜻인데, "나는 이런 잘못이 있습니다" 라고 비판받을 입장에서 철학을 공부해야 되는데, 그러나 그렇지 않고 "당신이 아는 것이 뭐야? 한번 내놓아봐. 왜? 너하고 나하고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말이야" 라는 쪽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 레비나스의 '타인의 얼굴' - 잠자는 인간 !!

그 녹취한 강의 중에서 보면 레비나스를 이야기하는데, 이 레비나스 이야기는 제가 '타인의 얼굴'을 강의한 것을 녹취한 것이 있는데, 거기서 제가 뭘 강조했는고 하니, '잠'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잠시 설명하자면, 사람이 누워 자고 있는 모습을 보면, 자는 순간에는 그 사람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그 사람에겐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잠을 자니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으니,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서 의미를 두지만, 그러나 우리가 잠자는 순간에는 어느 누가 와서 코를 베어가든지 옷을 가져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아까워하겠느냐는 것이다. 잠자는 사람이 말이다. 아니, 죽어있는 사람에게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아까울 것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레비나스는 아주 결정적인, 인생을 바라보는 진리라고 하는 것을 끄집어낸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이렇게 사람이 살아있으니까 살고 싶어하는 것이지, 잠을 잘 때면 지금 누가 코를 베어가고 목을 베어가도 자기한테는 하나도 아까울 게 전혀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자기는 잠을 자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사람이 "아깝다, 분통터진다, 죽고 싶다, 화난다" 라고 하는 경우는 언제인가? 그것은 곧 자기 의식이 살아있을 때 나오는 것이라는 말이다. 사람이 의식이 늘 살아있으면 이런 것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낮에 이렇게 까불고 촐랑대다가 밤이 되면 잠을 잔다는 것이다. 잠을 잘 때 누가 들고 가서 절벽에 자는 통째로 밀어가지고 "아이고, 나 죽는다" 라고 할 것도 없이, 그런 고함을 지를 시간도 없이 죽어버리게 되면, 그 사람이 평소에 분을 터뜨리면서 "아깝다, 죽고 싶다, 애달프다, 사랑한다" 라고 했던, 그러한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 레비나스 -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 !!

다시 말해서, 레비나스 이야기는 무엇인고 하면, 인생이라는 것이 사실상 의미가 없는데, 그런데 의식이 있으니까 의미가 있는 것으로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의식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원래 의식이 없는데, 죽은 상태인데, 즉 잠자는 상태가 곧 죽은 상태라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렇게 인간의 실존을 '잠' 이라고 보았는데, 즉 죽은 상태라는 말이다.

이렇게 의식이 없으니까 죽은 상태인데, 사실 이것이 원래의 인간인데, 잠시 의식이 있으니까 여기서 무엇을 끄집어내는고 하니, "의미가 뭐냐, 삶이란 뭐냐, 신이 뭐냐, 천국이 뭐냐?" 라는, 이런 소리가 나오더라는 것이다. 의식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이런 의식 자체가 잠자는 시간에 의미가 없다면, 이 전체도 무엇이 없다는 말인가? 이 전체도 의미가 없다는 이 말이다.

그러므로 레비나스를 공부하고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은 무엇인가? 그냥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다는 것이다. 살아도 헛되고 죽어도 헛되고 말이다. 우리가 모든 의미를 해체시켜버리고 '나' 라는 것도 없애버리자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서 누가 반발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 노아의 전쟁을 통해서 레비나스를 공격 !!

그런데 지금 우리는 노아의 전쟁을 통해서 그것을 반발하고자 하는데, 어떻게 반발하는가? 왜 레비나스가 주장한 것이 의미가 없는고 하면, 레비나스가 뭔가를 알려고 할 때 자기 자신이 죄인의 입장에 서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하나 알아볼까? 의미 없네. 죽는 것도 의미 없네. 잠자면 그만이네. 그럼 잠이나 자자. 잠자다가 누가 죽어도 애달프다고 안 하면 그만이지. 그러면 고민이 뭐가 있는가?"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한다면, 이렇게 "노아에 있어서 노아를 어떻게 알까?" 라고 하면 레비나스 꼴이 나고 만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되어버리면, 일단 노아를 알아놓고 난 뒤에 "그렇다면 노아가 그렇게 한 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인가?" 라고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철학교수의 경우나 레비나스와 같은 사람은, 자기가 노아의 입장에 서있지 않기 때문에, 즉 십자가로부터 당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 자체가 곧 '죄' 라고 하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점에 대해서 김석수 교수님하고 둘이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그분에게 그 누구도 평생동안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없기 때문에 말이다. 아니면 여러분이 좀 이야기라도 해줬으면 좋겠는데, 그 양반은 십자가로부터 자기가 죄인이라는 입장에 전혀 서 있지 않다는 것이다.

◈ 우리를 계속해서 죄인으로 몰아넣는 전쟁 !!

사실 이 노아의 전쟁에서 제일 힘든 것은, 이 전쟁이 우리를 계속해서 죄인으로 몰아넣는 전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반발하는데, "노아를 알려고, 하나님을 알려고, 예수님을 알려고 하는데, 그런데 왜 내가 이렇게 되어야 되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이 '전쟁'이 해석이 안 되는데, 노아의 세 아들은 노아 속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세 아들을 통해서, 즉 하나님의 언약이 세 아들을 통해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즉 노아에게 작용하던 것이 그대로 이 세 아들에게 작용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노아는 분해되어 없어져버리고, 그것이 세 아들로 노아가 구체화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노아가 구체화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준 그 은총이 무엇인지에 노아는 모르는데, 마치 우리가 지금 노아에 대해서 모르듯이 말이다. 노아도 그렇게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모르고, 다만 자기가 알고 있는 그것만 알뿐이라는 것이다.

◈ 나는 니가 지난밤에 한 짓을 모두 알고 있다 !!

그러나 이 노아전쟁을 통해서, "당신과 나는 공통점이 있다" 라는 사고방식이 모조리 부수어지면서, 노아라는 A는 예수님이란 B에게 포섭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노아를 통해서 무엇을 알아야 되는고 하면, "당신하고 나하고 공통점이 있다" 라는 기본적 사고방식을 벗어버리고, "주님은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모두 알고 있다" 라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발걸음을 이쪽으로 갈지 저쪽으로 갈지도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주님의 은혜와 우리의 죄가 동시에 !!

이러한 것을 다 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면, "앞으로 이런 이러한 계획이 있다" 라는 말이 아니고, "이제는 앞으로 당신이 무슨 짓을 해도, 주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는 것을 당신이 옮긴 발자국을 통해서 들추어내고야 말리라"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의 죄와 주님의 은혜를 당신이 어느 방향으로 가든지 간에 거기서 반드시 들추어내겠다" 라는 것이다.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와 우리의 죄를 동시다발로 주님에 의해서 들춤을 당하는 대상이 된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말이다.

◈ 무지개 언약 - 나를 죽이면서까지 땅을 보존 !!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해보면, 노아는 '무지개언약' 인데, 이 언약은 그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 무지개 언약을 이야기할 때는 반응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 반응이 "나는 홍수로는 멸망되지 않는다" 라는 반응이고, 이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땅을 보존시킨다" 라는 것이기도 한데, 하나님이 물로는 심판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말이다.

여기서 두 번째가 뭐냐 하면, 여기에서 '나'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지개 언약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땅을 홍수로 멸망시키지 않고 보존하기 위해서 얼마든지 '나'를 죽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를 죽이면서까지 땅을 보존하고, 다시는 홍수로서는 이 세상을 멸망시키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 바벨탑 사건 - 무지개 언약으로 나를 향해 벌리시는 전쟁 !!

그런데 그 후손들을 보면 '나' 라는 것이 툭 툭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같은 언약 속에 있었는데 '내'가 튀어나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무지개 언약이 담고 있는 그 뜻을 가지고 '나'를 향하여 전쟁에 나서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바벨탑 사건' 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무지개 언약과 바벨탑 사건이 어떻게 관련이 되는가?

예를 들어서, 비가 많이 와서 집이 침수가 되어서 그 집에 자고 있던 노인네가 죽었는데, 그런데 그 노인네가 죽기 직전에 그 가족들에게 이 무지개 언약을 이야기했다면, 그것이 그 가족들에게는 무슨 느낌이 드는고 하면, "다른 사람에게는 이 무지개 언약이 땅을 보존하는, 즉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푼다고 이해가 되는데, 그런데 왜 '나'는 그렇게 느끼지 않고, 왜 우리 아버지를 침수 당하게 해서 죽이시는가?" 라고 하면서, 어떤 분노 같은 것이 분명히 생긴다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면, 사기를 쳐서 돈을 뺏고 도망간 놈이 있는데, 그런데 그놈은 미국에 가서 재벌이 되어버리고, 사기를 당한 사람은 돈이 없어서 노숙자가 되었을 때, 그때 노숙자가 된 사람에게 무지개 언약을 이야기하면 기분이 좋겠는가? 아마 사기를 쳐서 미국간 그 사람은 벼락 맞아죽고, 그 사람의 돈은 뺏어간 돈이니 그것이 자기에게 되돌려질 때 비로소 기분이 좋다는 것이다. "역시 하나님이야"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왜 하나님은 악인과 선인을 공평하게 대우하는가?

그런데 마태복음 5장에 보면, 선인과 악인에게 하나님은 햇빛과 비를 다 내린다고 되어있는데,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평소에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악인과 선인을 공평하게 취급을 하느냐고 말이다. 이것이 시편에도 나오고 말이다.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도 건강하게 잘 살고 죽을 때 고난이 없는 것이, 이런 것이 전부 무지개 언약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무지개 언약을 안다고 해놓고, 막상 무지개 언약 속에 있으면서도 우리는 불쑥불쑥 하나님께 분노와 불평과 화를 내고 있다는 말이다. 왜 나쁜 놈들은 잘 되고,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은 계속해서 처박히느냐고 말이다. 만약 무지개 언약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 그런 언약이라면 다 때려치우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노아를 안다. 예수님을 안다. 하나님을 안다. 무지개 언약을 안다" 라고, 그렇게 '안다'를 하면 할수록 우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분노와 불평이, 즉 하나님은 불공평하다는 것들이 마구 마구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또 하나를 예를 들면, '한나'와 '브닌나' 라는 여자가 있을 때, 왜 브닌나에게는 아들이 있고 하나님을 잘 섬기는 한나에게는 아들이 없느냐는 것이다. 왜 자식이 없을까? 지금도 제가 아는 사람 가운데는 시험관 아기를 한다고 5000만원 들여서 시술을 열 번해서 다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교회에는 잘 다니는데, 물론 믿음이 좋은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믿음이 좋은 것인지, 아니면 자식을 낳으려고 오기가 있는 것인지, 아무튼 이런 것이 전부 무지개 언약을 몰라서 벌어지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무지개 언약이 나오면, "아멘, 할렐루야, 넘어갑시다" 라고 하고, "그 다음에는 이제 모세를 압시다" 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성질 급해서 진도를 나가기에 바쁘지, 실생활에 있어서는 무지개 언약을 막상 당하게 되면 화딱질이 나고 기분 나쁜 일로만 여겨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악인을 도와주는지, 북한의 인민들이 그렇게 고생해도 김정일을 왜 안 죽이는지, 북한이 아웅산 테러를 해서 그때 죽었던 사람들 가운데서 교회장로가 많았고, 뛰어난 하버드대 출신들도 많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김정일은 저렇게 버젓이 살아있는데, 왜 그런고 하니까, 무지개 언약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무지개 언약에 대해서 하나 하나 따져보면, "아, 우리가 무지개언약조차 제대로 모르는구나" 라고 하는 것이다. 무지개 언약을 제대로 안다는 말은, 그러한 것을 아니꼽게 여기지 않고 산다는 것이고 말이다.

◈ 누가 강도를 만난 자의 이웃인가?

이 무지개언약을 설명하기 위해서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어떤 사마리아인이 길을 가는데 강도를 만난 사람이 있었는데, 이 강도를 만난 사람이 거의 죽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강도를 만난 사람이 거반 죽게 되었을 때, 그 강도 만난 자를 돌보아주지 않았던 레위인하고 제사장이 욕을 얻어먹을 이유가 뭐가 있는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욕 얻어먹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는 도와주지 않았을 뿐이지 강도는 아니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지금 책임추궁을 누구한테 해야 하는가? 그 강도한테 해야지, 도와주지 않았다고 해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강도 짓을 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가 강도를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라고 해서, 이러한 강도의 못된 짓은 문제를 삼지 않고, 단지 도와주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서 시비를 건다는 것이다.

왜 사람들이 그 점에 대해서 난해하게 생각하느냐 하면, 그 사람이 강도를 만난 것이 자기 책임이든 아니든 간에, 그냥 도와준다는 차원을 이해하지 못하면 무지개 언약의 기본도 이해 못했다는 것이다. 바로 그 무지개 언약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는 오직 예수님밖에 없고 말이다.

◈ 사마리아인 - 예수님은 도대체 누구인가?

바로 그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앞장 세워서 보여준 것이 누구인고 하니까, 그가 바로 '사마리아인' 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와서 들여다 모시고 비용이 없으면 내가 완전하게 치료할 때까지 더 주겠다" 라는 것인데, 사실 이것은 뭔가가 '오버했다'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이해할 때, 그분이 우리가 기대한 정도의 메시야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오버해서) 우리가 생각한 것이 이상으로 우리에게 무작정 베푸는 분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면, 우리가 남을 대할 때 그놈이 우리 집에다 불을 질렀든지 똥물을 퍼부었던지 간에, 우리는 그 원수마저도 우리는 사랑해야만 되는 책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니 말이다.

그렇지 않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해버리면, 이것은 이방인보다 더 나은 것이 뭐가 있느냐는 것이다. 적어도 "네가 하나님 아들 같으면 어느 정도 되어야하는고 하니, 하나님이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비를 내리듯이 원수마저도 사랑해줘야 한다" 라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답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 5장 45절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 아무도 그렇게 못하는데, 사실 아무도 못하는 데서 끝나는 게 아니고, "그것이 제 힘으로 안됩니다" 라는 것을, 우리를 상대로 해서 전쟁을 벌이는 식으로, 지금 하나님께서는 노아나 그 뒤의 사건들을 우리한테 퍼붓는 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노아의 전쟁인데, 그래서 우리는 "아이고, 나는 못합니다" 라고 기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렇게 기어 들어가도 계속 끄집어내어서, "왜 못해, 왜 못해" 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공격해대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철학공부만 하게 되면 그런 것을 놓치는데, 즉 하나님이 자기를 공격한다는 것을 놓쳐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 "저는 이렇게 하나님을 알려고 애를 썼는데 얼마나 대견합니까?" 라는 식으로 자기를 변호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 바벨탑 사건 - 땅의 일원성(一元性)을 깨는 것 !!

이제 그 다음으로 바벨탑을 살펴보겠는데, 땅의 일원성(一元性)을 깨는 것이 이 '바벨탑 사건' 이라는 것이다. 땅은 노아언약으로 하나가 되어있는데, 그런데 그 노아언약 속에 있는 하나됨의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는 미지수이고 말이다.

그렇게 모르는데, 그런데 그 하나됨에 대해서 사람들은 무엇으로 하나가 되어 있는고 하니까, 바로 '자기 이름'을 통해서 새로운 하나를 추구했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을 쌓아서 "우리 이름을 하늘과 땅 끝까지 해서 흩어짐을 면하자" 라는 것인데, 즉 "우리는 하나의 단결력으로 이렇게 뭉쳤습니다" 라는 것을 증명하고 보여주자는 것이다.

(창 11: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창 11: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창 11: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창 11: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바벨탑을 공격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땅의 하나됨이란 그들 이름의 하나됨으로서 구축되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아직 알지 못한다는 뭔가 모르고 있는 그 무지개 언약에 따라서, 즉 노아언약에 의해서 이 세상은 하나로 유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자기들의 이름을 하나되게 하자고 탑을 쌓았다는 것이다.

◈ 하나님은 어떻게 일원성을 깨는가? - 언어를 통해서 !!

이렇게 인간들은 자기들 이름을 하나되게 하자고 탑을 쌓을 때,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하나를 어떻게 하는가? 흩어버리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흩어버리면, 그들은 언어가 하나이기 때문에 힘을 합쳤던 것이 언어를 분산시킴으로 말미암아서, 그들은 이제 하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곧 그것이 땅의 분할인데, 땅이 어떻게 분할되는가? 언어에 따라서, 종족에 따라서, 그렇게 땅이 분할된다는 것이다.

◈ 노아언약의 하나됨이 전쟁의 원인 !!

이렇게 땅이 분할되면서, 노아언약의 하나됨이 곧 이 세상의 민족과 민족들 간에 전쟁을 유발시키는 이유와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 전쟁이 있어야 되는가? 아니면 없어야만 되는가? 전쟁이 있어야 되는데, 이렇게 전쟁이 있어야 노아언약의 하나됨이 부각된다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바벨탑과 노아언약과의 관계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전쟁을 시도하기 위해서 전쟁의 씨앗을 던져 넣는다는 말이다.

◈ 전쟁의 씨앗으로 심어지는 아브라함 !!

이것은 하나님이 일종의 시비를 거는 것인데, 그렇게 시비를 거는 게 무엇이냐 하면, '아브라함' 이란 사람을 선택해서 자기 나라말고 다른 언어를 쓰는 엉뚱한 나라에다 집어넣어 버린다는 말이다. 원래 그쪽 지역이 아닌데, 즉 다른 지역에 살던 아브라함을 이쪽 팔레스타인 지방에 심음으로 말미암아서 전쟁을 개시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가는 곳에 이미 전쟁이 있었는데, 그것이 가나안 9족속이 있었는데 4족속과 5족속이 패를 나누어서 전쟁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렇게 전쟁에 들어가는데, 그 전쟁에 휘말리게 된 사람이 누구인고 하면 바로 아브라함의 조카 '롯' 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약속의 사람인 아브라함과 연관이 되어있는 사람인 롯이 이 지상의 전쟁에 가담함으로 말미암아서, 자연적으로 하나님께서 지상 전쟁에 가담하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의 통로로서 제공이 되는 것이다.

◈ 노아언약과 인간들의 일원성 대결 !!

그래서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전쟁이 벌어진다고 보면 되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이 가시는 곳마다, 즉 하나님의 계시가 떨어지는 곳마다 거기서 전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이런 전쟁의 이유는 무엇인고 하니, 무지개 언약인 노아언약의 일원성과 인간들이 생각하는 자기중심, 즉 언어중심의 일원성의 차이점 때문인데, 이것이 서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 차이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이다.

사실상 모든 인간은 인간이 전쟁하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노아언약 안에서 이미 '하나' 이었는데, 사실 그렇게 하나였는데 사람들이 이것을 오해해서, "우리는 하나이니까 하나로 뭉치는 것이 어떻습니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큰 오해를 했다는 말이다.

◈ 하나됨에 대한 오해로 원수역할을 !!

여기서 '주님의 하나' 라고 하는 것은, 은혜의 하나, 즉 은혜 주심의 하나인데,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하나인데,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두고 자기 중심적으로 하나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것은 계속해서 언약에 대해서 도발적인 원수 노릇을 하는, 그런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 전쟁은 노아언약의 사랑 때문에 !!

여기서 지금까지 한 것을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이 지상에는 개인과 개인마다 민족과 민족마다 전쟁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월드컵축구도 그렇지만 말이다. 이렇게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노아언약에 주신 그 사랑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전쟁이 없는 것을 이상스럽게 여기고,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아주 정상적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이야기하면, 개별자는 남들을, 즉 타인을 전부 자기의 적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타인을 적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항상 만나도 투쟁하듯이 만나고, 물론 우선은 좋게 지내지만 나중에 이용가치가 없을 때는 곧 전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부부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 그것이 노아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인데, 이 노아언약이 무엇인가? 자기에게 비록 원수처럼 느껴지더라도, 하나님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을 우리가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화딱질이 나서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난다는 말이다. 이렇게 항상 싸우는데, 이것을 모르고 다윈은 생존경쟁으로 진화론적으로 잘못 해석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노아언약을 제대로 안다면, 이것을 제대로 아는 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니까, 예수님 같은 경우에는 전쟁을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들의 전쟁에 의해서 스스로 희생물이 되심으로 말미암아서 도리어 그 전쟁을 이겨버리고 통합해버리는 기초를 예수님께서 몸소 마련했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 전쟁에 대해서 !!

여기 교재 44페이지를 보면 '아브라함의 전쟁'이 나오는데, 이 아브라함의 전쟁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전쟁, 즉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가계, 가문, 가족과의 전쟁이란 말이다. 노아의 전쟁은 하나님이 노아를 보내서 민족과 민족들 자체를 전쟁을 유발시키고, 모든 민족이 서로 적으로 삼아서 대혼란을 일으키는 전쟁이라면, 이 아브라함의 전쟁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가문과 전쟁을 벌인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것은 노아의 되풀이인데, 즉 노아는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보니까 몰랐다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자기는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미처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어떤 자식이 나올지 몰랐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이 나오는데, 그런데 다른 한 쪽은 없다는 것이다. 분명히 아브라함의 자식은 이스마엘인데, 그런데 이삭은 없다는 말이다. 즉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이삭은 아브라함의 육신의 가계와 전쟁하기 위해서, 하나님에 의해서 투입된 하나님의 용사와 같은 역할을 감당하고 있기에 말이다.

이렇게 이삭은 없는데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이미 사라의 태가 죽은 상태에서 이삭의 낳았기에, 그렇게 이삭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서 말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 세상의 인간적인 민족과 민족의 전쟁 차원이 아닌 영적인 전쟁에 이미 돌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혼자서 말이다. 물론 사라도 그렇고 말이다.

이렇게 노아언약에 의해서 민족과 민족간에 서로 차별과 투쟁이 계속해서 벌어지게 되는데, 거기에서 낯선 인물인 아브라함의 가정이 투입이 됨으로 말미암아서, 이렇게 민족과 민족간에 전쟁이 일어나고, 거기에서 비로소 하나님은 자기 이름의 효력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이다.

◈ 아비멜렉 - 아브라함, 니나 내나 똑같다 !!

예를 들어서, 아비멜렉 같은 경우에, 왜 그 가문의 여자들이 임신을 하지 못했느냐 하면,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인데,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건드릴 뻔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이 저주를 받아서 여자들이 자식을 못 낳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제가 질문을 하겠는데, 아비멜렉 가문에서 그 동안 여자들이 자식을 잘 낳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노아언약의 덕택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기억나야 되는데, 그런데 난데없이 아브라함의 가족이 들어오니까, 이 아비멜렉 여자들이 아기를 낳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때에 아비멜렉 추장이 "제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아기를 못 낳습니까?" 라고 했는데, 지금 그 양반의 잘못이 무엇인고 하니, 아브라함의 가치를 자기와 같은 레벨로 보았다는 것이다. "니나 내나 똑같다" 라고 말이다.

그런데 아브라함 언약에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면, 노아언약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비멜렉이 하나님도 안 믿는데 그 노아언약을 알 수 있는가? 당연히 모르는데, 그런 모른다는 이유 때문에 아브라함 가족을 시시하게 봤는데, 그래서 아브라함의 여자를 건드리려고 했고 말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갑자기 노아언약이 갖고 있는 전쟁의 기능이 아비멜렉 가문에 퍼져서, 갑자기 그 가문의 여자들이 임신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일종의 '패배' 라는 것이다. 아비멜렉은 이렇게 손도 한번 써보지 못하고 졸지에 패배를 당했는데, 그럴 때 누구에게 호소했는가? "아이고 아브라함님, 당신을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라고 기도를 부탁해서, 그래서 아브라함이 기도를 해주니까, 다시금 그 가문의 여자들이 태가 열려서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아하, 노아언약 덕택에 !!

그렇다면 이러한 와중에서 그들이 안 것이 무엇인가? 그 이전에는, 즉 아브라함을 만나기 이전에는, "내 마누라가 아이를 낳는 것은 내 정력이지" 라고 느꼈던 것이, 이제 아브라함을 만나고 난 뒤에는 무엇을 느꼈는고 하니, 자기가 아브라함 만나기 전에 평소에 아이를 잘 낳은 것이 누구의 덕분인고 하니, 아브라함의 하나님인 여호와께서 주신 노아언약의 덕택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그러한 최초의 접선이 가능한 시점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이 성경에서 해석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예가 다니엘서에 보면 나오는데,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이 자기는 마르둑 신을 믿었기 때문에 유다 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그래서 여호와를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다니엘이 침투되니까, 그 왕이 무엇을 알았는가?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갔다가 나옴으로 말미암아서, 이 세상을 통치하는 신은 마르둑 신도 아니고, 더욱이 자기도 아니고, 자기 부하인 다니엘과 함께 있는 '여호와' 라는 신에 의해서 온 세계가 지배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벨부터가 아니라 말이다.

◈ 금 신상이 보여주는 것은?

이런데서 성경해석이 참 어려운데,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로 하여금 사자굴에 들어가도록 한 동기가 무엇이냐 하면, 그들이 무엇을 만들었는가? 금 신상을 만들었는데, 즉 바로 그런 금 신상을 하나님께서 만들도록 유도를 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이다. 왜 그렇게 유도했는고 하면, 그들이 자기의 본색을 드러내서 금 신상을 만듦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께서는 그 금 신상을 통해서 뭔가를 보여주고자 하신다는 것이다.

금 신상의 제일 위에가 무슨 나라인고 하니 바벨론이고, 그러면 제일 밑인 발목에 있는 나라는 어느 나라인가? 예수님 나라, 즉 인자의 나라가 오기 직전까지의 모든 세상 나라가 발목에 있다는 것이다. 로마뿐만 아니고 그 뒤의 모든 나라가 다 말이다. (물론 대한민국도 포함해서 말이다.) 인자의 나라, 즉 뜨인돌이 날아와서 태산을 이루는, 그 태산에 해당되는 인자의 영원한 나라가 올 때까지, 직전까지의 나라가 모두 발목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금 신상을 만듦으로 말미암아서, 그 금 신상에 다니엘의 세 친구가 절을 하지 않게 되고, 그래서 그들이 풀부불에 들어가는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느부갓네살이 금 신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간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다니엘이 사자를 그렇게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지금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 이외에 그 어떤 신이나 그 누구에게도 기도하지 말라고 하는 법령을 어겨서 사자굴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불신자, 즉 마귀에 속한 사람들을 자꾸 이용해서 금 신상을 만들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금 신상 만드는 것에 간섭하지 않는 이유는, 무슨 언약 때문에 그런고 하니, 바로 노아언약 때문에 금 신상을 만들든지 무슨 짓을 하든지 다 놓아둔다는 것이다. 지금도 김정일이 저렇게 까불든 말든 가만히 놔둔다는 것이다. (김정일은 동네북??)

◈ 노아언약을 보라 = 범사에 감사하라 !!

그것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해를 잘 해야하는데, 사기꾼들이 활개를 치고, 불신자들이 까불고, 중이 크다란 절을 짓고, 목사가 사기를 쳐서 큰 예배당을 짓고 하는 것은, 전부가 노아언약이 다 봐주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 봐주는데, 그렇게 해야 거기에서 십자가 고난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진짜 새언약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노아언약을 보라" 라는 말은 신약에서 "범사에 감사하라" 라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 성도는 교체멤버 !!

야구나 축구나 프로레슬링 등의 스포츠 경기를 보면 교체멤버라는 것이 있는데, 성도들은 이 세상을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고 교체멤버들이란 것이다. 이렇게 전하다가 터치하고 들어가고, 또 다른 사람이 전하다가 터치하고 들어가고 말이다. 앙리가 빠지고 그 대신 다른 멤버가 들어가듯이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다하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그렇게 교체를 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해석이 굉장히 어려운데, 이런 것까지 찾아내려고 하면 말이다.

◈ 아비멜렉 - 아브라함을 만남으로 비로소 노아언약을 !!

여기서 아브라함 언약을 다시 이야기하면, 아비멜렉은 그동안 자기가 자식을 잘 낳았던 게 노아언약 덕분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만나고 난 뒤 그렇게 잘 나오던 아기가 멈추는 것을 봐서, 이것은 아브라함을 건드린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함께 있는 하나님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바로 그 하나님이 그 이전에 노아언약을 통해서 자기들에게 아기를 잘 낳도록 축복을 해주고 은혜를 베풀어주었다는 것을, 그때 아비멜렉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만남으로 말이다. 그 뒤에 아비멜렉이 하나님을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는 성경에 안 나오니까 모르겠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노아언약의 혜택을 받고 있는데 아브라함을 왜 부하로 보냈는가? 그것은 아브라함이 안고 있는 자기의 자식이 있다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의 가계 속에는 두 개의 흐름이 있는데, 그래서 아브라함은 육과 영의 기초가 되는데, 그 육이 바로 '이스마엘' 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식이 있겠으니 믿으라고 해서, 아브라함이 믿겠다고 하니, 엉뚱하게도 이스마엘을 낳게 했다는 것이다.

◈ 이스마엘과 이삭이 커플이 되어서 !!

그 다음에 진짜 노선은 없는데, 즉 아브라함에게는 그런 영적인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삭은 사라의 태가 죽고 난 뒤에 나왔는데, 그것은 이삭은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 가계에 직접 개입함으로서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스마엘은 앞으로 누구하고 짝이 되느냐 하면, 그가 곧 이삭이라는 것이다. 이스마엘은 이렇게 이삭과 서로 짝이 되어서, 지금 노아언약으로 보호받는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언약을 주기 위한, 그런 하나의 커플로서 이스마엘 집단과 이삭 집단이 나란히 여기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집단이 등장하는데, 그것이 '이스마엘' 집단이 아니고, '에서' 집단이 나온다는 것이다. 에서는 나라 이름이 무엇인고 하니 '에돔' 인데, 그러니까 무엇인가 일을 하나씩 하자마자 툭툭 집어던진다는 것이다. 저쪽에서 툭툭 나오고, 다른 쪽에서 또 나오고 말이다.

◈ 전쟁에 의해서 다 떨어져 나가야 !!

그리고 여기서 또 요셉이 나오는데, 물론 이 요셉 집단도 떨어져나가고 말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결국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북쪽 이스라엘은 떨어져나가 버리는데, 이것이 무엇 때문인고 하니까, 그것이 바로 '전쟁' 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쟁에 의해서 하나 하나가 다 떨어져 나가야 된다는 말이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우리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지적을 받기 위해서 성경해석을 해야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인데, 성경을 보면서 "내가 성경을 알아야지" 라는 것이 아니고, "제가 어떤 죄가 있습니까?" 라고, 자기 자신을 지적 받기 위한 접근이 되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툭툭 떨어져 나갈 때 어떻게 나가는가? 그냥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미지수로 남아있는 하나님의 언약의 본질 때문에, 마치 이스마엘이 떨어져 나가듯이 그렇게 떨어져 나갈 때, 그때 바로 '나' 라는 것이 이스마엘로 단정지어져서 죄와 함께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다.

◈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은 오직 한 사람 !!

이렇게 떨어지고 또 떨어져 나가는데, 그런데 이 세상에 아들은 누구밖에 없는가? 오직 예수님밖에 아들이 없다는 것이다. 즉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은 오직 한 사람,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삭도 아니고, 야곱도 아니고, 그리고 요셉도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신 분은 오직 예수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수님을 한 분을 '남은 자'로 만들기 위해서, 도중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전부 다 떨어져나가게 했다는 것이다.

◈ 제가 바로 이스마엘이며, 제가 바로 에서입니다 !!

이렇게 떨어져 나갈 때, 그냥 "아, 떨어져 나갔구나" 라고 해버리면 안 되고, 이렇게 떨어져 나갈 때 가지고 있는 죄를 지금 우리가 쥐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쥐고 있어야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제가 바로 이스마엘이며, 제가 바로 에서입니다" 라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나' 라는 인간을 죄인으로 몰아넣으신 그 주님의 언약만 사모하고 믿게 된다는 것이다.

◈ 축복에 대해서 !!

이스라엘 나라가 둘로 나눠지고 난 뒤에 십자가에 직접 가담했던 족속은 유다 지파인데, 그래서 이름이 바로 '유다 나라' 라는 것이다. 창세기 끝에서 야곱이 유다를 축복할 때 어떻게 축복했는가? 최고로 축복했는데, 이렇게 최고로 축복을 했다는 것에 대해서, "유다 지파는 능히 이해했다" 라고 보는 것인데, 이렇게 이해를 했다고 하는 것은, 자기들이 바로 죄인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신명기 끝에 보면, 이 유다 지파가 배반자인데, 즉 유다 지파가 메시아를 배반한다고 예언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명기나 창세기에서 야곱의 축복을 해석하려고 할 때, 우리도 그들과 함께 축복을 받는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분명히 축복은 축복인데, 야곱은 12지파를 축복했고, 신명기에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창 49:28) 이들은 이스라엘의 십이 지파라 이와 같이 그 아비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그런데 그 축복을 두고서, 우리에게 축복했다고 여기면 잘못된 해석이라는 것이다. 이 축복은 누구에게 한 것이냐 하면, 예수님에게 축복을 해서 예수님이 죄인 된 우리를 축복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죄인인가? 주님의 축복을 자기 축복이라고 착각했던 그 죄인이라는 말이다. 주님의 축복을 자기 축복이라고 착각했던 그 죄인을, 예수님의 자기 공로로 그냥 불쌍히 여겨줌으로서, 즉 예수님이 받은 축복을 우리에게 축복되게 하는 것이란 말이다.

이런 해석이 구약성경에 개입되어야 되는데, 이것은 전쟁의 승리자가 전쟁의 패배자인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그 전리품을 거저 주는 은총으로 제공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신분 자체가 통째로 예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서 축복된 것이지, 우리가 예수님을 제대로 잘 이해해서, 그리고 성경을 100독을 해서 축복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항상 오해하고, 착각하고, 그렇게 자기 중심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 언약에 대해서 !!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아브라함 언약'을 시작하겠는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데리고 다니실 때, 그를 데리고 다니신 곳의 사건들을 다 모아보면, 하여간 아브라함이 가는 곳마다 사건이 터지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건이 터지는데 특히 제일 큰 사건이 무엇인고 하니, 멜기세덱을 만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서에서는 이 멜기세덱에 대한 해석이 어려워서 젖을 먹는 사람은 이해가 안 되고, 적어도 딱딱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만 멜기세덱 해석이 된다는 것이다. 딱딱한 것을 먹을 수 있다는 말은, 딱딱한 것을 먹으면 고통스럽지만 그러나 그럴 수록 더 깊은 맛이 우러난다는 것이다.

(히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히 5: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 멜기세덱 - 우리를 철저히 무가치하게 !!

그러니 이 멜기세덱을 이야기할 때, 자기 자신의 어떤 주장 같은 것을 기대했다가는 멜기세덱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취급을 받는다는 것이다. 멜기세덱의 위치와 의미가 무엇이냐고 할 때, 철저하게 우리로 하여금 무가치하게 만드는 분이 바로 멜기세덱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누구까지 무가치하게 하냐 하면, 아브라함까지 무가치하게 만드신 분이 바로 멜기세덱이라는 말이다. 철저하게 무가치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아브라함이 전쟁이 벌어질 때 318명의 병사를 이끌고 자기 조카 롯을 구원하려고 개입하게 되는데, 조카가 그들의 포로가 되어있기 때문에 말이다. 이렇게 해서 전쟁에 개입하게 되는데, 여기에서 아브라함이 하는 전쟁의 배후에서 승리케 하시는 분이 나오는데, 그분이 바로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03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6,092 자유게시판 2008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2강 사도행전 최고관리자 08-01-13
6,091 우리교회 [주보] 1월 20일 주보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8-01-13
6,090 우리교회 삿 5: 1- 3 (드보라의 노래) 사사기 최고관리자 08-01-13
6,089 우리교회 삿 5: 1- 3 (드보라의 노래) 사사기 최고관리자 08-01-13
6,088 설교 요한계시록22장 1- 4절 제목 : 새로운 나라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8-01-13
6,087 우리교회 계 22: 1- 4 (새로운 나라)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8-01-13
6,086 강의 안산08년1월11일강의 고후6장7절 관계 고린도후서 최고관리자 08-01-12
6,085 강의 서울08년1월11일강의 에베소서 1장 9절, 18절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08-01-12
6,084 자유게시판 안녕하세요? 이 은희여요^^ - 최고관리자 08-01-11
6,083 자유게시판 2008십자가마을겨울수련회 1강 [수련회] 최고관리자 08-01-11
6,082 자유게시판 06 대구강의 10 - 지옥의 하나님 13 로마서 최고관리자 08-01-11
6,081 우리교회 [일반] 관리자님 안녕하세요 [일반] 최고관리자 08-01-10
6,080 우리교회 사 45: 7-10 (토기장이) 이사야 최고관리자 08-01-09
6,079 묻고답하기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에베소서 최고관리자 08-01-09
6,078 자유게시판 십자가 마을 서버 운영비에 관하여 - 최고관리자 08-01-09
6,077 자유게시판 광주강의(07. 12. 21) 32-1 디도서 최고관리자 08-01-08
열람 ➜ 자유게시판 06 대구강의 9 - 지옥의 하나님 12 미가 최고관리자 08-01-08
6,075 자유게시판 동영상이 안되는데 원인이 무엇인지,,, - 최고관리자 08-01-07
6,074 자유게시판 2008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동영상파일 [수련회] 최고관리자 08-01-07
6,073 우리교회 [주보] 1월 13일 주보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8-01-07
6,072 자유게시판 06 대구강의 8 - 지옥의 하나님 11 미가 최고관리자 08-01-07
6,071 강의 2008년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파일 [수련회] 최고관리자 08-01-06
6,070 우리교회 삿 4: 1- 3 (여자 사사 드보라) 사사기 최고관리자 08-01-06
6,069 우리교회 삿 4: 1- 3 (여자 사사 드보라) 사사기 최고관리자 08-01-06
6,068 설교 요한계시록21장22-27절 제목:사라진 인간들의 성전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8-01-06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