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대구강의 7 - 지옥의 하나님 10
06 대구강의 7 - 지옥의 하나님 10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06 대구강의 7 - 지옥의 하나님 10
06,06,05 강의 이근호, 정리 손하진, 구득영
◈ 너 자신을 알라 - 그래, 나 자신을 알 게 !!
오늘은 교재 37페이지를 할 차례인데, 여기 제목이 '주의 이름의 등장' 인데, (먼저 우리 자신인 인간에 대해서 살펴보고 나서 교재를 하겠는데) 사람들은 흔히 생각하기를,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보통 그 중간에 성경이 놓여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성경을 살펴보게 되면, 인간도 나오고, 하나님도 나오고, 그리고 또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 자신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구조 속에서, 이 인간에 대해서 좀 더 제대로 알게 되면, 그렇게 알게 된 인간이 성경 말씀대로 바르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하는, 그런 논리에 쉽게 접근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기 위해서는 자기를 잘 관리해야 되는데, 그러니 자기에 대해서 좀 더 명확하게 알아야 자기를 제대로 관리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인간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을 파악하게 될 때, 즉 "인간은 무엇이냐?" 라고 했을 때에, 인간은 하나의 '존재'가 되고, 여기에서 '실체' 라는 개념이 나오고, '실재' 라는 개념이 나오고, '본성' 이라는 개념이 나오고, '본질' 이라는 개념이 나오고, '형상' 이라는 개념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질료(물질)' 라는 개념이 나오고, 그리고 '실존' 이라는 개념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라는 개념과 '신' 이란 개념이라는 것을 덧붙여버리면, 다시 말해서, 존재, 실체, 실재, 본체, 본질, 형상, 질료, 실존 등등, 이런 것이 다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어디에 모여지냐 하면, '인간' 이라는 여기에 모두 다 모여진다는 말이다.
◈ '하나님의 형상대로' 라는 의미는?
그렇다면 여기에서, 이렇게 수많은 개념들 가운데 '형상' 이란 개념은 무엇인가? 이 형상이란 개념과 인간이라는 존재, 실체, 실재, 본체, 본질, 질료, 실존 등등, 이런 것들과 어떤 연계를 가지고 있는지, 즉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를 일일이 검토하지 아니하면, 뭐가 성립되지 않는고 하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라는 개념이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도 모르고, 무슨 '하나님의 형상대로' 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어떻게 알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과연 하나님이 갖고 있는, 즉 소유하고 있는 것이 형상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내비치고 있는 계시가 형상인가? 하나님 안에 있는 품성이, 본성이 안으로 들어가면 품성이 되는데, 그렇게 해서 삼위일체의 그 인격이 나오는데, 즉 그러한 품성이나 인격이 외부로 드러난 것이 과연 형상이냐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소유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드러내고 있는 것인지, 어느 쪽이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 인간의 형상이 먼저인가, 하나님의 형상이 먼저인가?
그렇다면 하나님의 형상과 인간의 형상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먼저 "인간의 형상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인간을 아는가?" 라는 것과, 그것이 아니라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니까, 그렇게 "먼저 하나님의 형상을 알아야 인간을 제대로 아는가?" 라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의미가, 먼저 하나님의 형상을 알아야지 인간을 안다고 하면, 그렇다면 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하나님+형상' 인데, 그러면 이런 '하나님+형상'을 어디서 뽑아내는고 하니 인간을 가지고 뽑아내어야 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이 인간이 곧 '형상+질료'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질료라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살점덩어리인데, 즉 물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해체가 되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리고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그 흙이 인격을 갖추게 하게 어떤 또 다른 정신적 요인을, 즉 그것을 형상으로 본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의 형상과 질료, 그 자체를 모르게 되면, 하나님의 형상을 모르게 되고, 그리고 또 하나님의 형상을 모르게 되면, 또 인간을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 과연 되먹임해서 인간을 알 수 있는가?
그러니까 당연히 외부에서 "인간이 무엇인가?" 라고 해야 되는데, 그런데 신학을 하든지 성경해석을 하든지 간에 그 무엇을 해도 인간 내부에서 해답을 찾아서, 또 그것을 도리어 자기한테 되먹임시키는 방식으로 했을 때, 과연 그렇게 해서 나온 결론들이 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도대체 인간이 스스로 자기 자신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여기 나오는 존재, 실체, 실재, 본체, 본질, 질료, 실존 등은 철학에서 말하는 존재론인데, 이 존재론을 다른 말로 하면 형이상학(形而上學)이라고 하는 것이다. 파르메데스에 의하면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인간의 이런 존재론을 먼저 염두에 두지 않고, 그런 것을 생각하지 않고 곧바로 성경을 보게 된다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마치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집단적으로 모여서 성경구절을 외우라고 해서, "앞으로 전도할 때에 이런 소리가 나오거든 이 구절을 갖다 대시고, 저런 소리를 하면 저 구절을 갖다 되시면, 그래서 저 쪽에서 말을 못하면 승리한 것입니다" 라고, 만약에 이런 방식으로 되어버리면, 그런 것에 대해서는 신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은 무엇을 느끼느냐하면, 이 성경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치 샌더스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동일한 인물인 사도바울이 이야기를 해도, 자기가 한 말도 서로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 소리하고 뒤에서 저 소리를 하니 말이다. 이렇게 앞뒤가 서로 다른 소리를 내니까, 성경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도 성경공부를 좀 하려고 했다가도 나중에는 종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왔다갔다하고, 베드로 왔다갔다하고, 또 베드로와 사도바울하고 서로 다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예수님하고 뒤에 나오는 사도바울하고도 서로 안 맞는 같기도 하고 말이다.
◈ 산성설교 -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라 !!
여기서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가지고 한번 가상 실험을 해보면, 즉 산상설교 외에 아무 성경도 없다고 보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산상설교가 있는 마태복음 5장, 6장, 7장만 달랑 바람에 실어서 성경이 없는 북한 사람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필 똑똑한 북한 사람이 그것을 받아서 마태복음 5장, 6장, 7장만 달랑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펼쳐보니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가는 게 아니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간다" 라고 되어있고, 또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아니하면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무너진다. 그리고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반석 위에 지은 집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까, 이 5장, 6장, 7장만 딱 떼어서 보면, 그것은 백 사람이면 백 사람이 다 보아도, 그것은 산상설교대로 완벽하게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그런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또 바람에 실려서 날아온 것을 보니까, 이번에는 로마서 4장이 실려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로마서 4장도 전부가 아니고 5절만 딱 왔는데,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라는, 그것만이 달랑 바람을 타고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받아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겠는가? "사도바울은 도대체 산상설교도 전혀 모르는 인간이 아닌가? 어떻게 나보다도 더 성경을 모르는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마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산상설교를 할 때 다른 곳에 살았기 때문에 전혀 감을 못 잡아서, 그래서 자기는 일방적으로 자기 생각을 표현했다고 여긴다는 말이다.
◈ 혹시 '다양성'을 아십니까?
사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그것이 샌더스를 비롯해서 많은 신학자들이 내린 결론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서로 앞뒤가 안 맞다고, 신학자 입에서 그런 소리를 하려고 하니까, 그래도 교수된 입장에서 신학을 배우는 후배들한테 너무 미안스러우니까 뭐라고 이야기했는고 하니, 이것을 '다양성'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다양성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성' 이라는 이야기를 할 것 같으면, 존재, 본질, 봉선, 실체 등등, 여기에서 나왔던 형이상학이 나중에 존재에서 중세시대에 데카르트 이후에 가면, 그리고 둔스 스코투스 이후로 가게 되면, 이게 존재에서 실존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존재 위주에서 실존 위주로 말이다. 그 과정이 존재 위주에서 본질 위주로 가는데, 이렇게 본질 위주로 간 것은 토마스 아퀴나스이고, 그리고 본질 위주로 가서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실존 위주로 나간다는 것이다.
◈ 플라톤 - 존재가 다양한 이유는 모형이기에 !!
여기에서 이 '실존' 이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리고 이 '존재' 라고 하는 것은 플라톤에 의하면, 지금 이 땅에 있는 것은 전부가 다 허상이고 모형인데, 진짜 실체는 어디에 있는고 하니까, 저기 이데아 세계에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원을 사람마다 그리게 하면 여러 삐뚤어진 원들을 그리지만, 그러나 진짜 완벽한 둥근 '원' 이라는 개념은 진짜 원형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마다 그 원의 원형을 분배받아서 오른쪽으로 비뚤고 왼쪽으로 비뚤고, 그렇게 불완전한 원을 그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 이라는 개념의 원형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플라톤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다양하지만, 그렇게 다양한 이유가 그것들은 모형들이 때문인데,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신의 품성을 받기는 받되 양적으로 어떤 것은 많이 받고, 또 어떤 것은 적게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이해가 잘 안 됩니까? 여기서 플라톤 이야기를 좀 더 해보면, 여기 착함, 즉 선(善)이 있는데, 그런데 이렇게 착하다고 하는 것이 원래 신의 세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착하다는 것이 사람마다 다들 다르다는 것이다. A라는 사람, B라는 사람, C라는 사람이 있고 말이다. 이렇게 사람마다 다 다른데, 그런데 매우 착한 사람이 있고, 중간쯤 착한 사람이 있고, 또 아주 못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 중세 - 이 세상에는 선한 것밖에 없다 !!
그런데 그런 사람을 못된 사람이라 하지 않고 덜 착한 사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못됐다고 하는 것은 악이 있어야 되는데, 이 세상에는 선한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즉 '존재=선' 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플라톤도 이야기한 것인데, 다시 말해서, 이렇게 있다는 것 자체가 선인데, 그러니 이렇게 있다는 것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즉 있음은 선함이라는 말이다.
◈ 실존주의 - 웃기고 있네, 있음은 그냥 있음이다 !!
여기서 실존주의 철학을 좀 살펴보면, 이 실존주의는 무엇인고 하니까, 있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지, 있는 것에 어떻게 '선' 이라고 하는 가치를 부여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말도 안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있음은 그냥 있음이다" 라는 것이다. 이렇게 있는 것은 그냥 있는 것뿐이지, 있는 것을 두고 어떻게 '선하다', '악하다' 라는 가치를 부여하고 논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악은 없고, 그것을 조금 선한 것이라고 했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니까, 이렇게 조금 적게 선한 사람은 어떤 희망을 가질 수 있는고 하니, 앞으로 많이 선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인간에게 희망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많이 선한 사람은 어떠한가? 그렇게 많이 선한 대로 희망이 있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런 사람은 죽으면 신과 가까이 있는 좋은 세계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것도 역시 희망을 준다는 것이다.
◈ 역시 철학은 희망을 제공해야 !!
그러니 결국은 존재가 무엇이냐고 할 때는, 그냥 존재가 무엇이냐고 묻는 게 아니고, "과연 이 세상을 낙담하지 않고 앞으로 계속 살아야 돼? 과연 살만한 세상인가? 이렇게 힘든데 살아야 되겠어?"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희망을 제공하는 철학이란 말이다. 다시 말해, 실제가 아니라 사람들을 격려해주고 북돋아준다는 것이다.
어제 주일학교 설교시간에 제가 설교하면서 아이들에게 질문을 했는데, "여기 솔로몬 시대 사람들은 하나님 섬기기를 애썼는데, 우리 어린이들은 하나님을 좋아하십니까?" 라고 하니, 아이들이 "아니요" 라고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을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안 좋습니까?" 라고 하면, "예, 안 좋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어른들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 하나님, 제가 그리 죄가 많습니까?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느냐 하면,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데, 자기가 현재 고생을 할만큼 그 만큼 죄를 안 지었다는 것이다. 자기가 지금 이렇게 고생하는데, 자기는 아무리 봐도 이런 고생을 할만큼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인간성이 좋아서 교회에 나오지, 다른 사람 같으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신이시여. 그래도 저 정도 되니까 나왔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억지로 헌금을 하고, 예배에 참석한다는 것이다. 더러워서 말이다.
그런데 성경에 나와 있는 세리나 창기와 같은 사람들을 보면, 예수님이 너무 좋아서 섬긴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너무나 좋아서 말이다.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경우에도, 용서받은 그 사랑이 너무나도 커서 예수님을 섬기고 말이다.
그리고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도,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현재 사람들은 저를 보고 고생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이렇게 고생하는 것도 제가 지은 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한 유명한 말이 있는데, "내가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로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낮아진 것인지, 자기가 모든 사람에게 빚을 졌다는, 자기는 모든 사람에게 채무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당신들이 날 대우하지 않더라도 나는 당신들을 대우하고 싶어 환장했습니다" 라는 뜻이란 말이다. 그것이 바로 올바른 주의 종이 가질 태도가 아니겠는가?
사람들을 제가 잘못 봐서 그런지 모르지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진짜로 예수 당신 너무한 것이 아니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해서 이렇게 사람을 고생시킵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마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전부가 다 자기가 고생을 제일 많이 한다는 것이다.
◈ 나는 철학을 몰라, 정말 ??
그래서 이 철학이라는 것이, 만약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신학을 보게 되면, 산상설교를 봐도 거기서 바로 이러한 철학사상의 영향이 그대로 다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철학을 몰라. 철학은 안 배울 거야"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현재 철학에서 이야기한 그대로의 사상을 다 가지고 산상설교를 해석하다 보니까, "아, 이것은 다 지켜야 반석 위의 집이 되는구나" 라는 해석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도바울의 서신들을 보고는 하는 말이, "야, 이제 완전히 농땡이 쳐도 되는구나" 라고, 이렇게 해석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이런 기존의 존재론적인, 즉 자기의 품고 있는 그런 본성이 그대로 다 들어있기 때문에 말이다.
◈ 중세 - 존재에서 본질로 !!
중세시대에 들어와서는 존재에서 본질로 나아가는데, 여기에서 '존재에서 본질로' 라고 하는 의미는, 인간은 허구이고 진짜 존재는 플라톤에 의하면, 신이 진짜이고 선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없고 신에게 진짜 선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나가다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세시대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본질을 주었고, 그래서 그 본질을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가 못 받는가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천당으로 가는가, 지옥으로 가는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가, 그렇지 않는가?" 라는 것이 결정이 난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미 부여받은 신의 품성의 양에 따라서 그렇게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다.
◈ 존재, 이외의 모든 것은 허구이다 !!
그러니까 이 본질 위주가 되면, 여러분, 잘 보세요. 철학이 이렇게 되는 겁니다. '존재', 글자로 쓰자면 굵게 써야되는데, "존재 이외에 본질,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라는 것이다. 그리고 "실존, 그것은 허구이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말이다.
그렇게 하다가, 그런데 이렇게 존재만 주장하면 우리가 있는 것이 허구가 되니까, 본질을 이야기하게 되는데, 그런데 이 본질은 존재에서 넘겨받은 본질이기 때문에 우수한 본질이니까, 이것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세시대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본질을 가지고 어떻게 사는가?" 라는 것이 중요한데, 즉 바르게 살면 천사이고, 그렇지 못하면 악마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세철학이고 곧 신학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어느 것이 맞는지 입맛대로 한번 골라보라는 것이다.
◈ 근대 - 본질이 아니라 실존 !!
그런데 이것이 근대에 들어오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이렇게 '본질' 위주로 나아가게 되면, 소위 더 착한 사람이 덜 착한 사람을 폭력적으로 압제를 하게 되고, 더 많이 아는 사람이 덜 아는 사람을 종속시키는, 그런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덜 배운 사람은 더 배운 사람에게 종속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어떤 본질을 신으로부터 받았다고 해놓고, 사실은 신으로부터 본질을 받은 것이 아니고, 이 '나' 라는 본질이 어떤 특정인간의 본질에 예속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과연 옳은가?" 라고 자문하면서, 참으로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이 신으로부터 온 피조물이라고 한다면, 그렇다고 한다면 본질이 아니라 실존이 더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실존은 '개별자의 가치'를 말하는 것인데, 이런 최초의 실존철학을 한 사람이 키에르케고르인데, 이 사람은 '단독자' 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경말씀 에스겔 13장 19절을 한번 찾아보자.
(겔 13:19) 너희가 두어 웅큼 보리와 두어 조각 떡을 위하여 나를 백성 가운데서 욕되게 하여 거짓말을 곧이듣는 내 백성에게 너희가 거짓말을 지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을 죽이고 살리지 못할 영혼을 살리는도다
◈ 에스겔 - 개별자(실존) !! ◈ 사도바울 - 본질 !!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보리와 떡 조각을 위해서, 죽지 아니할 영혼은 죽여버리고, 살려내는 안 되는 영혼을 두고는,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라고 사기를 쳐서 살려낸다고 하는 것이다. 누가 말인가? 에스겔 당시의 거짓 선지자들이 말이다.
이렇게 되면 일단 사람숫자를 끌어 모으는 목회는 물 건너갔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람 수를 끌어 모으는 목회가 되어버리면, 이렇게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는 자체가, 즉 사람숫자가 많은 교회가 어떤 행세를 하는고 하니까, 진짜 구원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집단으로 구원받은 것처럼 여기게 한다는 것이다.
마치 에스겔 시대에, 백성들이 자기들 유다나라는 집단적으로 구원되는 것으로 여긴 것처럼 말이다. 그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그렇게 유포를 했는데, 그래서 에스겔은 그것을 각개전투를 벌여서 일일이 모두 다 파괴시켰다는 것이다. 각개전투로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혈통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구원을 받는다고 스스로 안심하고 평강이 있다고 하는 백성들을, 이 에스겔이 각개전투로 모두 다 찾아가서, 에스겔 자기 자신에게 떨어진 여호와의 말씀을 통해서, 진실로 순종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각개전투로서, 즉 개별자로 전부다 구별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무엇과 관계되는가? 존재가 본질이 아니라 실존과 관계된다는 것이다. 실존과 말이다. 이렇게 실존과 관계된다면, 즉 실존적인 측면에서 관계된다면 사도바울이 말한 지체, 즉 몸의 개념과 또 맞지 않다는 것이다. - 아쿠, 골치야 !
◈ 저는 교회가 필요 없는데요 ??
어제 오전설교에 대해서 토요일에 미리 준비한 내용 가운데 이런 것이 있었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제가 교인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는데, 과연 여러분에게 교회가 있습니까?" 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복음으로 구원받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교회가 뭐 필요하나?" 라고 하는 소리가 거침없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마치 제가 듣기에는, 교회가 구원받는데 필요가 없다든지, 교회가 없어야 구원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교회가 없다고 이야기해야 진짜 진짜 구원이 된 사람처럼 행세하는, 그런 오해를 나타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러면 당신에게 교회가 있습니까?" 라고 하면, 가짜로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십자가 있는데 교회가 뭐 필요합니까?" 라는 소리가 나올 것이란 말이다.
그렇게 되면, 주님이 주신 교회가 분명히 있는데, 그러한 주님이 주신 교회도 없이 천국에 가겠다는 사람과 똑같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 교회 없는 성도가 있는가?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의 몸이 없는 성도가 있는가? 서로 섬기며, 화목하며, 도와주고, 등등 말이다.
◈ '뒤에서 본 한국교회'도 제대로 읽지 않고 말이야 !!
이것이 '뒤에서 본 한국교회'에 나오는데, 그런데 사람들이 저의 책을 보고 나서 교회를 비판하니까, "아, 나는 교회에 안 가고 이제 집에서 혼자 인터넷으로 믿겠습니다" 라고 하는, 혹시나 그런 사람이 나올까 싶어서 "서로 섬기며, 서로 화목하며, 서로 도와주며..." 라고, 거기에 이런 '서로...' 라는 것을 열 몇 개를 적어놓았다는 것이다. 혹시 기억이 납니까?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이런 '서로'에 해당되는 사람이 없는고 하니, 모두가 다 자기를 위한 구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몸을 위한 구원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교회를 비판하고, 그렇게 해야 될텐데, 달랑 자기 몸 하나만 구원을 받으면, 즉 그렇게 구원을 받고 내빼면 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교회가 어떻게 돌아가든, 말아먹든지 말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
◈ 피조성은 이름의 세계 !!
이것이 바로 실존인데, 철학적 용어로 '실존'에, 즉 '개별자'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지금 하나님의 이름을 이야기 전에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 자체가 이렇게 붙어있다는 것은, 현재 있는 피조성을 겨냥해서, 즉 피조물에 이름이 붙어있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이 피조성이 없다면 이름도 없어져야 되고 말이다.
이렇게 반드시 지은 자가 잇고 지음을 받은 자가 있는데, 즉 피조성은 이름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의 세계 속에 이름을 가지고 들어와야, 이것이 교제가 되고 관계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이름은 그냥 호칭하는 그런 이름이 아니고, 능력을 한껏 품고 있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이름이, 그 이름에 담겨있는 능력대로, 맹세한대로, 언약대로, 그렇게 실천해 가는 가운데서, 계속해서 주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여기에 섞어 넣는다는 것이다.
◈ 이름과 이름의 만남 속에서 !!
그것은 바로 그냥 역사를 초월해서 방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역사 속에 같이 이름을 가진 피조성과 함께 더불어서, 그 이름과 이름의 만남 속에서, 우리가 구원받을 이름으로 계속 부각시키는 방식으로 구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런 이름이 나중에 어떤 육체성, 즉 인간성을 띠게 될 때, 그것은 현재 인간이 안고 있는 문제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고, 그 문제 속에 그대로 들어오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이런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 것인데, 여기서 좀더 이야기를 해나가면, 존재에서 본질로, 본질에서 실존으로 이렇게 나가버리면, 그런데 그 다음에는 실존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려운데 집중을 좀 더 하고 계속해보자.
◈ 선배님들왈, 인생은 '우연'이니라 !!
토마스 아퀴나스나 플라톤이 실존에 대해서 왜 그렇게 신경을 별로 안 썼느냐하면, 실존은 우연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우연' 말이다. 이런 철학적인 용어를 알아야 하는데, 여기서 우연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하자면 "영원하지 않다" 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죽으니까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라는 것이다. 그것을 철학에서 두 글자로 줄여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우연'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 신은 영원한데, 인간은 왜 우연인가?
왜 그것을 두고 철학자들은 우연이라고 주장하는고 하니, 그냥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하면 되지 말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 신으로부터 어떤 본질을 받았으면, 그것은 신으로부터 온 본질이기 때문에, 그것이 계속해서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들이 아는 철학에 의하면, 신으로부터 받은 가치라고 하는 것도, 역시 그것도 신으로 받았기 때문인데, 그런데 신은 영원한가, 아닌가? 당연히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으로 받은 가치도 역시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영원한 가치가 있는, 즉 신의 본질을 받은 인간이 죽으니까, 그래서 인간은 그야말로 개뿔(?)도 아닌 우연한 존재에 불과하고, 영원한 것은 신에게만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만 영원하지 인간은 우연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고민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인간이 만약에 우연이라고 하면, 이렇게 인간이 우연이라고 하는 사고방식이 스토아 철학인데, 그들은 이렇게 인간은 우연이니까, 그냥 대충 살면 된다고 하는 것이다.
피타고라스 학파나 디오게네스 학파 쪽도 마찬가지인데, 그냥 그렇게 대충 대충 살라는 것이다. 우연이니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90세를 살면 우연이 아닌가? 그런데 천년의 입장에서 보면 100세도 살지 못하는 우리 인간은 그야말로 반딧불처럼 반짝하고 없어지는 순간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그러니 역시 우연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본질주의자이기 때문에 고민이 있는데, 만약 인간이 우연이라면, "인간이 진짜 우연한 것인가?", "인간 속에 영원한 것이 없는가?" 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에게 영원한 것을 찾아내었는데, 그것을 영혼으로 보았고, 이 영혼만큼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 -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토마스 아퀴나스는 영혼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았기 때문에 후배들한테 욕을 많이 들었는데, 왜 욕을 먹었는고 하니, 그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고 신플라톤주의의 플로티누스의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에 영원한 것이 영혼이라면, 우리는 창조론에 있어서 뭔가 많은 것을 양보해야되는데, 즉 창조한 것이 아니고 섭리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여기서 골치가 조금 아픈데, 하나님께서 무(無)에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섭리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 소멸은 무엇이며, 파멸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서, 여기 이렇게 탁자 위에 꿀홍삼주스가 놓여있는데, 제가 지금 이것을 부수게 되면 없어지는데, 그런데 여기 있는 것을 저 쪽으로 옮기면, 그것은 부순 것이 아니라 관리한 것이라는 말이다. 아무튼 관리를 했던 무엇을 했든지 간에 이 탁자 위에 없으니, 없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렇게 없을 경우가 두 가지인데, 하나는 관리, 즉 섭리해서 다른 곳에 치워버렸다든지, 아니면 아예 없애버리던지, 이 두 가지라는 것이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구분하는데, 소멸과 파멸로 말이다.
그런데 목사가 이런 용어를 쉽게 사용한다면, 예를 들어,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멸케 합니다" 라고 한다면, 교인이 100명 같으면 100명이 다 받아드리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소멸이냐 파멸이냐를 두고서 자기 마음대로 해석을 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나름대로 그렇게 해석한 것에 대해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라고 명확하게 개념을 목사가 설교할 때 짚어주어야 할텐데, 그런데 목사는 목사대로 설교를 하면서, "성경대로 했는데 내가 뭐 잘못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 목사의 사명 - 나는 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 !!
그러니 제대로 봉사하는 목사라면, 교인들이 어떤 점에서 성경에 대해 지금 오해를 하고 있는 것까지 파악을 해서 "여러분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해도 아마 성경과 다른 비복음적인 생각들을 이미 철학적으로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이런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은 이것입니다" 라고 딱 집어서 이야기를 해주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흔히들 목사들은 자기는 성경대로, 즉 성경본문대로 인용했는데 뭐가 잘못이냐는 것이다. 그러니 목사는 그만큼 설교함에 있어서 공부를 해야 되고 신경을 써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다른 분들이 설교하는 것을 이렇게 들어보면 어떤 생각들이 드는고 하니까, "저 설교를 들으면 세 가지 오해가 생긴다. 그 다음의 설교를 들어보면 네 가지의 다양한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그 다음 설교를 들으면 아예 처음부터 오해할 수가 있다" 라고, 그런 것들이 마구 들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반드시 "이 대목에서는 분명히 이겁니다" 라고 확정을 짓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 설교를 들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이것을 할 때 왜 그 소리를 뺏을까. 이것을 집어넣어야 될텐데. 앞뒤를 바꿔야 되는데" 라고 말이다. 어제 오후에도 아침설교 때문에 많이 후회가 되었었는데, '사탄의 깊은 곳' 이라는 설명을 했는데, 설교가 다 끝나고 난 뒤에 누군가가 "목사님, 사탄의 깊은 곳이 도대체 뭡니까?" 라고 딱히 물으면, 사탄의 깊은 곳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해주지 않은 것 같다는 것이다.
사탄의 깊은 곳은 하나님의 깊은 것과 대비되어서 아는데,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사탄의 깊은 곳이든 하나님의 깊은 곳이든 간에, 인간은 깊은 곳이기 때문에 꺼낼 수가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어떤 식으로 깨내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난데없는 어떤 이상한 행동들을 통해서, 즉 에스겔을 예를 들면서, 남들이 깨닫지 못하는 사탄의 깊은 곳을 파헤치는 장면을 설교했어야 되는데, 그렇게 바둑에서 복기를 하듯이 되새긴다는 것이다.
◈ 장로님, 감사하는 마음이 있나요?
그래서 사실 설교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분들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자기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기회가 되니 말이다. 우리 장로님도 목요일에 강의하시는데, 강의를 해보면 반성이 되고, 수정이 가해지니 말이다. 그래서 말씀 전하는 것이 큰 행복이란 것이다. 우리 집사님도 그렇게 자꾸 남들을 붙들고 싫은(?) 소리를 해가면서 전도하다가 나중에 집에 오면 반성이 되고 말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 - 시간아 멈추어다오 !!
아무튼 토마스 아퀴나스의 지금 고민거리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은 우연한 존재인데, 어떻게 우연한 존재에 영원이 담기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어떻게 해결했는고 하니, '시간론'으로 해결했는데, 즉 "인간은 유한하지만, 시간은 유한하지 않다" 라고 했는데, 그렇게 하니까 또 후배 신학자들이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반기를 들고 나왔다는데, 다음과 같이 따지면서 말이다.
"당신은 지금 영혼의 영원함과 신체의 우연함을 결합시키려고 하는데, 잘 조화가 안 되니까 영원한 영혼 대신에 시간의 영원함을 가지고, 즉 '시간은 영원하지만 인간은 시간 속의 하나의 점이다' 라는 식으로 우연성을 결합해서 해결하려고 하는데, 그렇다면 정말로 시간은 영원합니까?" 라고 말이다.
◈ 오스카 쿨만 - 시간, 시간, 시간 !!
그런데 만약에 시간이 영원하다고 하면, 그것은 누구의 사상인고 하니,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즉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영원하다고 하는 사상으로 오늘날 유명한 신학자가 있는데, 그가 바로 '오스카 쿨만' 이라는 것이다. 그는 주장하기를, 창세 전에도 시간이 있었고 끝나도 시간이 있다는 것이다. 오스카 쿨만이 왜 그런 소리를 하는고 하니까, 우연과 영원을 결합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연과 영원과 결합된 그 지점에 뭐가 있는고 하니, 거기에 바로 인간의 본질이 있다는 것인데, 바로 이것을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야기했고,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이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실존이 말이다. 즉 인간 자체가 있다고, 즉 인간의 실체가 있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인간은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키에르케고르도, 토마스 아퀴나스도 그렇게 인간은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왜 그런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기 때문인데,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이 무엇인가? 그것은 영원한 것인데, 그 형상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고 물으면, 본질적으로 들어가면 이것은 인간의 영혼이라는 것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 - 인간의 자아성은 영원히 존재한다 !!
여기서 다시 한번 더 이야기하자면, 인간은 '형상+질료' 인데, 그러니까 질료, 즉 인간의 몸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인간의 형상, 즉 영원한 형상은 영혼이 되어서 영원토록 그 자립성은 영원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자아성은 영원히 존재한다고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했다는 말이다.
◈ 키에르케고르 - 하나님의 사건 때문에 !!
그런데 그것이 나중에 현대신학에서 깨져버리는데, 현대신학의 경우에 인간의 실존에서는 뭐냐하면, 여기서부터 좀 어려운데, 잘 들어보세요. 인간은 우연한데, 시간 때문에, 즉 그렇게 시간과 비교해서 우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건 때문에 우연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사건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주신 사건이 중요해서 인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만약 그런 사건이 없으면 인간은 아무 것도 아닌데, 하나님의 사건이 담기기 때문에 인간은 비로소 하나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그렇게 해서 영원성과 접촉된다고 본다는 것이다. 이런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을 이어받은 사람이 바로 하이데거와 불트만이고 말이다.
◈ 불트만의 '실존적 종말론'이란?
그래서 불트만의 종말론을 두고서 '실존적 종말론' 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면, 인간이 여기에 있으면 수평적으로 시간이 따라가는 게 아니고, 그 위에게 수직으로 뭔가 순간적으로 사건이 임할 때, 비로소 거기서 무엇이 발생되는고 하니 믿음이 발생되고, 이러한 믿음의 사건을 일으킨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현재 영원성에서 일으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런 영원에서 내뿜는 사건에 의해서 우리에게 믿음이 생겼다고 하는 것이 곧 불트만의 사상이라는 것이다.
불트만의 이러한 사상이 등장하니까, 주위에서 무엇이라고 평하는고 하니, 불트만은 루터와 그 사이에 아무 것도 없이 루터에서 바로 '붕' 날라 온 사람이 불트만이라는 것이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이 그냥 날아왔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좀 지나치고) 불트만이 이런 사상을 주장하게 된 원인은, 키에르케고르나 앞에서 있는 선배들과 하이데거의 사건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해서 불트만의 신학이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 성경을 모르니, 다양성이 !!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들어보고 나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할 수 있는고 하니, 성경을 해석할 때는, 첫째로, 명확하게 복음을 이야기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복음이 명확하게 드러날 때까지는 성경해석을 멈춰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만약에 복음이 명확하게 안 드러나는데도 계속해서 설교를 한다는 것은, 나중에 목사가 그 중간에서 무엇이라고 희석시키느냐고 하면, "성경에는 다양성이 있습니다" 라고,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성경에서 다양성을 인정해버린다면, 그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철학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철학은 존재, 본질, 실존 모두가 하나라는 것이다. 결국은 모든 다양은 하나로 모아진다는 말이다.
이것은 약간의 철학적 사고나 논리적 사고만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라도 다 이야기한다는 말이다. 심지어 성경에도 나오는데,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고 말이다. 과연 성경에 다양한 것이 있는가? 만약에 다양한 것이 있다면 반드시 순서를 짓게 되는데, 사실 다양한 건 없다는 것이다.
제가 항상 십자가를 강조하고 십자가의 피만을 이야기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성경에는 다양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성경에 십자가 피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무식한 소리인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는 것이다.)
◈ 존재의 유일성이 아닌, 주의 이름의 유일성 !!
이제 본론으로 우리 교재를 보겠는데, 서론이 너무 길었나? 여기 '주의 이름' 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다양성의 이름을 한꺼번에 원자폭탄을 가지고 다 터트려 버리고 그 터진 그 구멍에 모든 이름을 다 부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을 빌립보서에서는 '(무릎을) 꿇고' 라고 하는데, 모든 이름을 무릎을 꿇리고 폭탄을 터뜨려서 큰 구덩이가 생기고, 그 구덩이에 오직 하나만 남기는데, 그것이 '주의 이름' 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렇게 오직 단독으로 하나, 즉 주의 이름밖에 없다는 것이다.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다시 말해서, 다른 이름으로는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는 말이다. 이건 다양성이 아니라, 오직 유일성이라는 것이다. 존재의 유일성이 아니고, 주의 이름의 유일성 말이다. 그래서 사건의 유일성이라고 하면 안 되는데, 사건이란 것은 계속해서 또 다른 다양한 사건이 벌어지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사건의 유일성도 아니고 존재의 유일성도 아니고 무엇인가? 오직 주의 이름이란 말이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을 수 없는 주의 이름의 유일성,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진정한 유일성이라는 것이다. 너무나 분명하지 싶은데, 그렇지 않는가?
이제 교재 37페이지에 나오는 출애굽기 6장 2절에서 5절 말씀을 보자.
(출 6:2)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출 6:3)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출 6:4)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출 6:5)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 성경에 앞뒤가 맞는 것이 있기는 한가?
여기 2절에 보면 "여호와의 이름을 알리지 아니하였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이것이 서로 앞뒤가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뿐만 아니라 사실상 성경에는 앞뒤가 맞는 것이 없는데, 그 말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4장에 보면 아벨이 죽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아벨 대신 셋을 주셨는데, 그런데 이 셋을 주고 난 뒤에 그때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창세기 4장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이 된다는 것이다.
(창 4:26)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계속해서 무슨 이름이 나오는가? 여호와의 이름이 계속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브라함이 이삭을 잡으려 할 때 그 지명 이름이 뭔고 하니, '여호와 이레' 라는 것이다. 이렇게 여호와가 나오는데, 그런데 왜 이 출애굽기 6장에서는 다른 이름으로는 알리지 않았다고 하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대해서 신학자들은 대답하기를, 왜 그런고 하니, 자료가 서로 달라서 그렇다는 것인데, 과연 그런가? 그러니 성경에는 따지고 보면 맞는 게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맞는 게 없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일상적인 해석을 가지고 성경을 더 이상 해석할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해봐야 제대로 되지도 않고, 또 억지로 해석해봐야 베드로 후서에 나오듯이, 사사로운 개인의견을 더 집어넣어서 혼란만 더 가중시킨다는 것이다.
(벧후 1:20) 먼저 알 것은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이러한 여호와 이름에서, 이 이름이라는 그 명칭과 더불어 함께 있는 것이 있는데, 즉 '여호와' 라는 호칭과 더불어 그 내용이, 즉 그 능력이 함께 병행해서 나타나야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 이름으로 어떤 일을 실행에 옮긴다고 할 때에 그 능력도 함께 나타나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 조금 어려운데 잘 한번 들어보라는 것이다.
◈ 여호와의 이름도 언약에 따라서 !!
이게 논리적으로 굉장히 어려운데,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위에 2층이 있고 아래에 1층이 있는데, 그런데 아래층 사람들이 여호와 이름을 불렀고, 또 '여호와 이레' 라고 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이렇게 했는데,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께서는 여호와 이런 이름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았다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제단을 쌓았고 말이다.
이렇게 했을 때, 여기서 생각하는 이게 여호와의 이름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래층이라고 하면, 그러나 2층에서 여호와 이름이라고 이야기하는 것과는 서로 기름과 물처럼 그 층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층이 있다는 것은, 과연 어떤 언약이 투입되느냐에 따라서, 즉 언약은 그때 그때마다 층을 둘로 구분시킨다는 것이다.
그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노아가 방주를 만들 때 사람들은 여호와를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이렇게 '노아방주' 라는 어떤 물체가 등장하면서 새롭게 알게 되는 여호와가 2층에 해당이 된다면, 노아방주 이전에 기존의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여호와는 1층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언약이라는 것은 새로운 창조력을 품고서 계속해서 등장하기 때문인데, 그래서 사무엘상 15장에 보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사울왕은 나름대로 제사도 잘 드리면서 열심히 율법대로 살려고 했는데 말이다.
(삼상 15:22)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렇게 새로운 언약이 투입되게 되면, 기존의 언약과 새언약 사이에서 완전히 새언약에 추종할 수가 있는 그런 능력이, 즉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능력이 1층에서는 나오지 않는데, 사실상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로지 2층에 있는 새로운 언약의 계시에 의해서, 그렇게 해서 1층에 있는 사람 중에서 진짜 여호와를 아는 사람만 따로 분류해서 구원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 홍해의 여호와, 요단강의 여호와 !!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는데, 홍해를 건널 때 누가 했는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요단강 건널 때에, 즉 이 요단강이라는 새로운 상황이 벌어지게 되면, 홍해를 가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여기던 1층 사람들은, 즉 그대로 1층 상황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요단강을 건널 때 건너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자기들이 알고 있는 여호와의 범주 바깥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말이다.
이것은 마치 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더하기 빼기를 가르쳐주고는 나중에 시험을 칠 때는 곱하기 나누기를 시험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배운 적이 없는 시험을 치게 해서, 그리고 나서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경우에도, 그녀는 그 전에 아기 밴 적이나 나아본 적이 없는데, 특히 육신이 아닌 말씀으로 낳아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 이것은 그야말로 돌발적인 사태라는 것이다.
◈ 목사님, 여호와 이름이 뭡니까?
제가 왜 이러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는고 하면, 여호와 이름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목사님, 여호와 이름이 뭡니까?" 라고 할 때,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는데,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호와 이름을 무엇이라고 딱 규정짓기는커녕, 여호와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규정지으려는 그 인간을 도리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공박하는, 바로 그런 능력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부자청년의 문제점은?
사실 저는 이렇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논리가 여러 군데 많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부자청년하고 예수님이 만났을 때, "선한 선생이여, 제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할 때, 그때 예수님 뭐라고 하셨는고 하니, "영생은 이렇게 해서 얻는다" 라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무엇부터 시비를 거는고 하니, "왜 나보고 선하다고 하는가?"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왜 "나보고 선하다고 하느냐?" 라는, 그런 물음을 왜 던졌는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 이 부자청년의 문제가 뭔고 하면, 현재 1층에 있으면서 1층에 있는 개념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2층에 옮겨갈 수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1층에 있는 이런 개념은, 십계명 개념, 선의 개념, 영생의 개념 등인데, 이러한 개념들이 있다는 말은, 이미 자기화 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미 자기에게 예속된 여호와 이름이라는 것이다.
◈ 여호와의 이름은 미꾸라지 ??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여호와는 항상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이러한 인간의 손에서 빠져 나와서, 외부에서 그 인간을 장악하시는 방식으로, 그렇게 우리를 인도해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두고서, "오늘날 우리 성도들을 인도해가기 때문에, 이 분이 여호와다. 이것이 여호와 뜻이다" 라고 한다면 자꾸만 미끌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야야, 그것이 다가 아니야. 그것 가지고는 모자란다. 계속 내가 널 인도해야 돼" 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새로운 사건들을 통해서, 또 우리로 하여금 당황하게 만들고, 그렇게 당황하는 순간 진짜 성도 같으면, "주의 뜻대로 하옵소서. 저는 십자가만 바라봅니다. 제가 바라볼 것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날마다 절 죽이겠습니다. 저는 주님 앞에서 늘 부수어지고 죽어야 됩니다" 라고, 이렇게 항상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상태로, 그런 상태로 만들어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 하나님 이름은 인간의 이름을 죽이면서 !!
주님은 성도를 그냥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항상 자기를 계속해서 부수는 가운데 있는데, 그 부수는 작업이 무엇이냐 하면, 이것을 강도사 고시에 출제하고 싶은데, "하나님 이름의 특징은 인간의 이름을 죽인다" 라는 것이다. 그 근거를 대라고 하면, 그 근거는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은 십자가에서 완성되기에 말이다.
◈ 성도는 항상 주님의 생명에 의해서 죽음에 넘기움을 당한다 !!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은 요단강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그 뒤 여리고 성에서 완성되는 것도 아니고, 계속해서 가는데, 계속 가다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다 이루었다' 라는 것을 근거로 해서, 지속적으로 우리의 이름을 죽인다는 것이다. 우리의 이름을 말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늘 주님의 생명에 의해서 죽음에 넘기움을 당한다는 것이다.
어제 오후 설교시간에 중요한 포인트를 이야기한 것이 바로 이 점인데, 이렇게 십자가를 바라볼 때, 불신자들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 자기에게 도움되는 십자가로 바라보지만, 그러나 성도들이 십자가를 바라볼 때는 심판을 통해서 십자가를 바라본다고 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심판을 당하신 예수님인데, 심판을 받으신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이런 심판을 통하지 아니하면 십자가를 모른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무엇인가? 심판을 당하신 주님의 십자가라고, 그렇게 해야 정답이라는 것이다. 심판 말이다.
◈ 여호와의 이름은 심판하는 이름 !!
그러나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라고, 이렇게 '나의 구원'이 앞장서면 안되고, 그냥 심판을 당하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심판을 당했기 때문에, 그렇게 심판 당한 십자가를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들이댄다는 것은, 그것은 바로 우리로 하여금 매일같이 우리 안에서 우리 이름을 심판하시는 것이 주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심판하는 이름이,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이름이 갖고 있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매일같이 우리를 죽이는 것이고, 그리고 매일같이 우리를 살려내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규정하려고 할 때, 그것마저 죽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이여!" 라고, 이렇게 외칠 때 그것마저도 죽여버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철학자들은 주장하기를, 이것은 옛날 고대철학자들이 존재를 규정하는 철학을 가지고는 이러한 사건을 해명할 수 없다고 해서, 그래서 존재의 형이상학 철학을 모두 다 날려보냈다는 것이다. 이렇게 과거의 철학을 다 날려보냈는데, 왜냐하면 과거 철학은 존재에서부터 존재로 규정되는 것인데, 그런데 이것이 날마다 돌발적이고 우발적이고 우연적으로 등장하니까, 이런 사건 하나 하나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성령의 십자가에서 온다고 했으면 그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사실상 그럴 리는 만무하고, 그것을 그렇게 보지 않고 무엇으로 보느냐 하면, 또 '나' 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이다. 자기에서부터 말이다.
◈ 들뢰즈 - 인간의 모든 사건은 자기 욕망에서부터 나온다 !!
이것을 들뢰즈는 '자기의 욕망' 이라고 했는데, 인간의 모든 사건은 욕망에서부터 나온다고, 즉 욕망에서부터 사건화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건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는 사건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모르겠다는 것이다. 자기는 광야에 비오는 이유를 모르겠고, 교통사고가 왜 나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것은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그런데 다만 '사건화' 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것을 '의미화' 라고 하는데, "그것이 의미가 있다. 혹 의미가 없다" 라고 결정하는 것은, 자기의 욕망에서 나온다고, 그렇게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들뢰즈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가운데서 어제 보신 분이 계신지 모르겠습니다만, 가나와의 축구에서 우리가 3대 1로 졌는데, 그렇게 졌을 때 호주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사건이 아닌데, 즉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3대 1로 지는 것을 두고서 안타깝다고 여기느냐 하면, 이것은 자기의 욕망 속에서 이미 이 사건에다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부여한 욕망을 자기가 그대로 취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의 틀을 그대로 신학에다 그대로 가져오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왜 사건을 일으키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에게는 자기에게 욕망이 있는데, 그 욕망에 대해서 하나 하나 의미를 주기 위해서 사건을 일으킨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 - 창조보다 섭리가 우선 !!
그런데 이것이 어디 철학인고 하니, 놀랍게도 토마스 아퀴나스의 철학에 다 나온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는 창조가 강조되지 않고, 반면에 무엇이 강조되는고 하면, 그것이 곧 '섭리' 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일하시는가?" 라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을 통해서 의미를 두시는가?" 라는 점이 강조된다는 것이다.
◈ 영원한 테마 - 신의 의지와 그 의지로 인한 실존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여기서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기 욕망이 있는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하나님께 욕망이 있다고 했는데, 그런데 이 욕망은 어디에 속하느냐 하면, 본질, 즉 본성에 속한다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의 이 본성과 실존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논문으로 쓰라고 하면, 신의 품성 개념에 있어서 신이 갖고 있던 욕망이라고 하는 것, 어거스틴은 이것을 '의지' 라고 했는데, "신의 의지와 그 의지로 인한 실존은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라고 했을 때, 이것은 영원한 논문 테마가 되고, 이미 이런 논문이 수백 개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은사론'과 관련되고 말이다.
◈ 스피노자 - 신은 보이지 않고 이름만 등장 !!
그런데 제가 썼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에 관한 글을 보면 이것이 나오는데, 스피노자의 주장에 의하면, 신은 감추어져 있고, 없다는 것이다. 신은 이름을 통해서 오는데, 이 이름은 무엇을 품고 있는고 하니, 하나님의 본성, 즉 속성을 품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 말이다. 그런데 이 본성이 양태를 이루면, 이것이 실존이 되고, 이것이 하나의 개별자가 된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 스피노자의 말이 과연 맞습니까? "신은 보이지 않고 이름만 등장하고, 그 이름은 어떤 이름인고 하니, 자기는 신이 갖고 있는 속성을, 즉 능력대로 이루는 속성인데, 이 속성에 의해서 여러 가지 양태 또는 양상을 보여주면, 그 양상 하나 하나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이고, 개이고, 소이고 등등, 이런 실존들이다" 라고 말이다. 스피노자가 그러게 주장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분여' 라고 하는데, 분배 말이다. 다시 말해서, 신의 속성을 분배한다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그런데 왜 당신은 이렇게 신으로부터 출발했습니까?" 라고 물으면, 그가 뭐라고 답변을 하겠는가? 만약에 그가 개별자로부터 출발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신은 하나인데, 즉 그 어떤 것도 신으로 모이는데, 즉 모두 다 하나로 모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은 곧 하나를 말하는 것이지, 신이 둘이 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스피노자 - 범신론이 아닌 내재적 신 !!
사실 이 스피노자는 유대인이고 유대교인이라서, 즉 다신론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로 모아져야 된다는 것이다. 하나의 유일신으로 모아져야 하기 때문에,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