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214-(2)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2강
20071214-(2)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2강
이름 : 오용익(IP:211.194.56.72)
에베소서 제 2강 (이 근호목사, 2007년 12월 14일(2), 서울의존교회)
내가 만든 ‘나’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내가 만든 ‘나’는 폐기처분 되어 버리고, 예수님이 만드시는 ‘나’만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할 ‘나’를 가지고 애지중지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어떤 식으로 만들었는가, 거기에 관심을 두고 살아야 됩니다. 에베소서 1:6에 보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려면 “거저 주시는”것으로 만드는 ‘나’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아야 거저 준다는 사실에 대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할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부모님에게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면서 막 찡그리면서 하는 고맙습니다, 가 될까요, 안될까요? 안됩니다.
보통 고마워서 고맙습니다, 할 때는 얼굴에 반짝 반짝 윤기나 나면서 환하게 피지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만든 인생은 보지도 않으시고 주님께서 만드신 ‘나’를 천국에 넣어주시니 고맙습니다, 할 때는 얼굴이 확 펴지지요. 얼굴이 다리미질 한 것보다 더 확 펴지면서 굉장히, 정말 기쁩니다.
수능시험 제대로 못 치렀다고 25층에서 뛰어 내리는 쌍둥이자매. 그 자매가 뛰어 내리면서 고맙습니다, 하고 뛰어내렸겠습니까?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인생을 듣도 보도 못한 겁니다. 열심히 내가 만들고 내가 가꾸어 놓은 자기 것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저 주시는 것이 없기 때문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할 마음을 먹은 적도 없고 그렇게 할 기회도 못 가졌어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은혜의 영광”스러움을 찬미하게 하려면 반드시 원칙이, “거저 주시는 바”가 성립되어야 되고, “거저 주시는 바”가 성립되려면, 내가 안 죽고, 안 망하려고 애쓰고 가꾸는 그것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나’라는 인생이 따로 있다는 것을 느낄 때, 거저 주시는 것을 알게 되고, 거저주시는 것을 알면서 고맙습니다, 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첫째시간에 이야기 한것,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이 무엇인지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여기 1층과 2층이 있습니다. 2층을 받쳐주는 판(대기)가 아래층으로 내려옵니다. 1층 밑바닥까지 내려오게 됩니다. 내려오게 되면, 1층과 2층이 함께 들러붙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도(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2층만 있는 것이 아니고, 1층도 있고 그 위에 2층도 있습니다.
1층은 내가 안 놓치려고 내가 가꾸어서 되고자 하는 ‘나’가 따로 있고, 2층,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이것(2층)을 “거저 주시는 바”라고 합니다. 그런데 1층,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삽니까? 우리의 열심을 가지고 노력해서 내가 생각하는 ‘나’를 만들기 위해서 따로 애쓰겠지요. 이렇게 노력하는 것을 가지고 한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죄’, 두 글자로 이야기한다면 이것이 ‘죄인’이 됩니다.
2층 판대기가 아래층까지 내려오면 아래층과 겹쳐지는데, 그 2층은 “거저 주시는 바”가 되고, 1층,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뭡니까? 내 노력으로 열심히 닦아 놓은 내 인생 따로 있지요. 아래층은 ‘죄사함’을 받아야 되기 때문에 ‘죄인’이 되겠지요. 혼자 있을 때는, 거울을 보고 있을 때는 죄인인줄 몰라요.
자기 보고 이야기 합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거울 속에 있는 자기를 보고 이야기하지만 놀랍게도 겨울이 답변을 합니다. 사실은 자기가 자기를 보고 자기에게 답변하는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것은 바로 당신(왕비)라고. 백설공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속상한 일이 생깁니다. 지금 궐 밖에 가출해 있는 그 백설공주가 나보다 더 예쁜데, 아, 기분 나쁘다.
“거울아! 거울아! 어떻게 할까?”
“죽여 버리죠.”
“알겠다. 죽여 버리자!”
자기가 자기에게 질문하고, 자기에게 답변하고, 그런 겁니다. 만약에 그 왕비에게 백설공주가 없었더라면 그 왕비는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지요. 자, 2층에서 “거저주시는 바”의 그 거저주시는 분(그림에서 2층의 판대기)이 누구입니까? 그분이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이 밑에 깔려 있는 죄인은 누구입니까? 우리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졸지에 죄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했지만 우리는 죽었다가 그냥 죽어 버립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영이 오지 않으면 그냥 죽는 겁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롬 6:23) 죄짓고 난 뒤에 값이 얼마가 나왔는지 따져 보니까, ‘사망’이 나왔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죄의 값이 사망이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그냥 꽉 죽어 버리면 그만이지, 이렇게 하는데, 이 사망이 두 종류의 사망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을 몰라요.
사망이 두 종류인데, 첫째 사망이 있고 둘째 사망이 있습니다. 첫째 사망은 그냥 죽는 것(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콱 죽어 버리겠다는 그 사망)이지만, 둘째 사망은 안 죽고 영원한 지옥 불에서 안 죽고 영원히 허덕이면서 헤엄치는 겁니다. 부자처럼 물 안방울이 아쉬워서, 물 한 방울 달라고 애걸복걸하고(눅 16:24), 모든 것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모자람을 느낄 때 가장 지옥스러워요.
요새 아가씨들이 성형수술을 많이 합니다. 왜 얼굴을 뜯어 고칩니까? 참다 참다 못 참는 것이 뭔가 결핍증(뭔가 미흡함을 느끼는 것)을 느끼는 겁니다. 하! 이것만 깍아내면 되는데. 이것, 한 꺼풀만 벗겨내면 되는데. 사람이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지옥생활 하는 이유가 뭐냐? 그 조그마한 모자람이 이미 자기가 가진 많은 것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많이 가지고도, 약간 모자란 그것을 마저 채우기 전에는 참을 수가 없어요.
지옥에 간 부자는 물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물이 없으면 물 없는 채 살면 그만이지 뭐, 이렇게 되면 되는데, 물 없다는 그것이 물 없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물 없으면서도 물을 적시고 싶어, 물을 적시고 싶어, 나는 그걸 원해, 나는 원해, 사람 미치는 겁니다. 지옥 간 부자의 성질(성깔)이 지옥 가서야 그런 성깔이 나온 겁니까, 살아 있을 때부터 그런 성질이 계속 이어진 겁니까? 살아 있을 때부터, 조금 더, 조금 더, 하는 그 성깔이 그대로 지옥 가서도 그대로 이어져서 나오니까, 하나님께서 결핍으로 가득 찬 세계를 만들어 줘버렸어요.
얼마나 속이 타고 답답했으면, 천국 간 거지보고 자기 있는 지옥에 와서 물 한 방울 찍어 주고 천국으로 돌아가라고, 요청할 정도입니다. 그 답답증이 이틀, 사흘이 아니라 영원토록 쉬임없이 계속 간다는 겁니다. 지옥에 당도해서부터 그런 것이 아니고 살아 있을 때부터, 자기가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하니까 그렇게 살던 그 버릇이 지옥에 가서도 계속 되는 거예요.
천국 가는 사람들은 주님 뜻에 의해서 그걸 바꾸게 합니다. 내가 내 노력으로 내 부족함을 채워서, 아이구, 만족스럽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늘 결핍을 느끼는 이런 나는 채워도 채워도 소용없음을, 그래봐야 우리로 하여금 더욱 괴롭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진짜 구원은 내가 채워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거저 주시는 데, 그 거저주시는 분,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는 거예요.
고물 처리하는 곳에 가면 집게 달린 크레인이 있습니다. 그 집게로 집어 올려서 트럭에 옮겨 싣습니다. 그 집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덮석 집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 잡혀서 뭐합니까? 나는 채워야 해! 나는 결핍을 느껴! 지난번에 수학시험에서 한 문제 틀렸는데, 다음에는 다 맞아야 돼! 지금 우리 반에서 1등인데 전교 1등 해야 돼!
매일 우리는 몸부림치면서 더 채워야 된다, 고 하는 그것을 채우든지 발버둥을 치든지 우리는 우리 맘대로 그렇게 하고 있고, 그것보다 더 센 힘으로 우리를 딱 쥐어서 가자, 하고 데려가면 우리가 몸부림치다가도 위를 쳐다보면 거기에 누가 우리를 쥐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쥐고 있을 때, 그것은 뭡니까? “거저 주시는 바”입니다. 거저주시는 “그 은혜의 영광”을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찬미하게” 되는 겁니다.(엡 1:6)
제가 첫째 시간에 던진 문제 아직 해결 안 되었습니다. 첫째 시간에 던진 문제, 왜 예정되었는데 왜 꼭 죄인으로 만들어서 예정하는가? 예정된 자가 왜 죄인이 되어야 하느냐? 죄인이 안 되고 예정하시면 안 되는가? 그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여기 에베소서 1:10의 말씀처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가 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내가 천국 가서 편하게 사는 것, 이것이 예수님이 일하시는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편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라면 애초부터 우리가 죄 안 짓도록 했을 겁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기 아들 예수님이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예수님 쪽으로 통일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 사람이 있더라도 그것이 한사람으로 모아지도록, 자석이 있으면 주변의 쇠붙이를 자기 쪽으로 다 당겨옵니다. 그것처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역시 내 아들이 최고야, 내 아들은 만유중의 만유, 만유보다 더 높은 이름을 가져도 합당해, 다른 이름이 아무리 많아도 내 아들 이름은 최고가 되어야 해, 라는 그것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이었고,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뜻이었습니다.
모든 이름이 그분의 이름 밑에 다 무릎을 꿇고, 모든 이름은 그분의 이름만을 찬미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전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골로새서 1:16-18에 보면 나옵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로마서 11:36에도 나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예수님께로부터 와서 예수님으로 말미암고 예수님께로 돌아간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으로 통일되게 한다고 하는데,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는 뭐냐?
“4대성인중의 한사람, 33살밖에 안 먹은 인간이 너무 건방지더라.”
“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몇 년이나 살았다고 함부로 그런 소리 하느냐?”
그래서 그 인간 죽어도 싸지, 라고 싸가지 없는 청년이라는 식으로 예수님을 평가합니다. 좀 아는 것도 있고 똑똑한 것은 있지만, 그 인간 못지않게 똑똑한 사람이 이 세상에 많은데, 자기만 똑똑한 줄 알고 착각해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독단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고 밉상 받는 그런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솔직하게 자기 뜻을 이야기 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니까 그냥 보통 인간으로 보이거든요. 너도 인간, 나도 인간인데, 왜 나보다 네가 더 잘났다는 근거가 되어야 하는가, 라고 하거든요.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인데 네가 뭐야? 이런 식으로 아주 가볍게 대하죠.
예수님보다 586년 먼저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석가모니. 기원전 586년에 석가모니가 태어났습니다. 석가모니가 예수님보다 선배입니다. 인생을 알아도 선배가 다 안다는 겁니다. 공자도 예수님 보다 선배입니다. 소크라테스도 선배입니다. 후배가 어디서 까부냐,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이다, 합니다.
와! 이런! 이런 돌발발언이! 자기가 하나님이래! 자기가 만들어 놓고 자기가 심판한대요. 아버지께서 모든 심판을 자기에게 맡겼다(요 5:22)는 겁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자는 저주를 받을찌어다.”(고전 16:22) 막가자는 이야기죠. 만약에 제가 여러분보고, 이근호를 믿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하면 이것은 막가자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것은 돌아도 보통 돈 경우가 아닙니다.
그런데 나를 믿지 않으면 저주받는다, 그 이야기가 막가는 이야기 같고 과대망상증 같은 소리인데 세상에 그걸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그걸 아멘! 하고 그렇게 진실로 될 겁니다, 하고 믿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종이 되어서 우리에게 전하는 겁니다.
만났다는 겁니다. 누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겁니다. 어디서 봤는데? 나는 봤다는 겁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그저 번개쳤다, 우뢰가 울었다, 그것뿐이고 모릅니다. 무슨 소리를 하던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핍박하는구나. 네가 나 핍박해봐야 너만 힘들다.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이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이제 너는 이방에 나를 전하는 나의 종이다. 그런 이야기가 들려 왔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예수만 미쳤는지 알았더니, 여기 미친놈이 또 생겼구나. 그런데 사도바울이 그 편지를 쓰면서, 예수님이 세상에서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종인 내가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이제 내말 듣고 나처럼 미친 사람은 누구뇨? 그자만이 ‘예정된 자’라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라는 것은 나의 품위, 나의 인격을 아주 훌륭하게 높이기 위해서 스스로 도를 닦는 것을 종교라고 하고, 이웃과 국가를 위해서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이것을 종교라고 하는 겁니다.
신이 계시다면 어떤 인간을 원할 것인가? 착한 사람 모델로 삼아서, 자기 인격을 닦아서 이웃가 남을 사랑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훌륭한 일을 하다가 장렬하게 죽을 때 천국에서 받아준다. 이런 시나리오가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인데, 에베소서는 그게 아니라, 미친 예수 나도 믿는다. ‘예수가 다 이루었다’고 나옵니다.
지금 방금 제가 이야기한 종교라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악한 나를 뭐로 바꾼다? 악한 ‘나’를 선한 ‘나’로 바꾸는 것, 이것이 보통 알고 있는 상식적인 종교 아닙니까? 예수님의 복음은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창세전에 예정한 사람에게 거저 주셨다는 겁니다. 거저 줬다는 것을 가장 방해하는 것이 뭐냐? 그게 바로 종교라고 하는 겁니다. 종교단체.
거저 줬다는 이기쁜 소식, 거저 줬기 때문에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이것을 가장 방해하는 것이 뭐냐? 내가 교회 다녀서 훌륭한 사람 되어서 착한 일 많이 하는, 이런 사고방식이 가장 방해가 되는 거예요.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창세전부터 예정하신 것은 우리로 뭐 되게 하려 함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날 때부터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려 함입니다. 죄인이기만 하면 되는데,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내가 알아서 죄인에서 벗어나 버리면, 거저 주시는 바가 뭐가 됩니까? 그리 되면 예수님께서 거저 주시는 용서함을 주시는 그 자리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점차점차 발전해서 훌륭하게 된다는, 나의 미래상, 내가 기대하고 있는 나의 목적치, 거기서 나를 발견하니까, 나는 엉터리 같은 나를 계속 쥐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스스로 어리석은 원숭이처럼 거울보고 싸우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나는 죄인인데 이미 용서받아서 사건이 종결되어 버렸습니다. 사건종결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미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를 받았는데, 갑자기 내가 움직이면서 점점 나아지는 쪽으로 나가니까 그것은 종결된 것이 아닙니다.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착한 일을 하면 점점 천당으로 간다고 하다가, 갑자기 나쁜 짓을 하면 뒤로 점점 후퇴하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나아갔다가 후퇴했다가 에라이! 모르겠다, 하고 교회 안 나와 버립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나’를 잡아야 하지,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잡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내가 나를 가르치는 교주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 되면 예수님에게 통일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나한테 통일되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지금은 잘 모르지만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사회에 나가게 되면 이런 경우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석유 값이 오르게 되면 대다수 시민들이나, 기름 값이 오르면 손해 볼 사람들은 중동사람들을 마구 욕을 하겠지만, 만약에 자기 친구나 형님, 혹은 자기가 대한석유공사에 몸담고 있다면 기분이 좋습니다. 보너스 1000프로! 석유 값이 오르면 엄청난 이익이 들어오잖아요. 대한석유공사에 취직해 있는 아들을 둔 엄마 같으면 석유 값, 올라라, 올라라, 올라라, 하지 않겠습니까?
석유 값이 오른다는 같은 사건이 어떤 사람에게는 화가 되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복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이것은 다 ‘나’ 위주로 세상을 통일시키려는 버릇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수능시험결과를 점수제로 하면 쉬운데 등급제로 매기니까 혼란스럽다? 등급제를 실시하는 이유는 공평하게 하기 위함인데 한 문제 더 틀려서 2등급이 되어 버리면 마치 큰 손해 본 것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자기입장만 생각하니까 자기는 손해라는 겁니다. 어릴 때는 잘 모르는데 커서 사회에 나가보면 사람들은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것이 진리냐, 옳은가를 묻는 것이 아니고, 그 일이 나에게 얼마나 큰 이익이냐, 아니면 나에게 손해냐, 그것만 달랑 묻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안 묻고 그것만 묻습니다. 지난여름에 수영장에 가서 애들이 아폴로 눈병에 많이 걸렸습니다. 그때 누가 좋아서 기뻐했겠습니까? 전국의 안과병원, 매년 9월이 되면 연례행사로 그렇게 좋아들 했습니다. 돈이 되잖아요. 가족이 다 덩달아 좋아하면서 할렐루야! 하는 겁니다.
전부 다 자기 입장만 생각합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자기에게 얼마나 이익이냐, 그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나’에게 통일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 6:23)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결국 사람은 죽잖아요. 그런데 첫째 사망은 그냥 죽는 것이고 두번 째 사망은 영원한 유황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황불에 들어가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계의 중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으로 통일되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로 통일됨을 거부하고, 내 중심으로 통일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대단히 피곤하실 겁니다. 그 이유는, 마음은 안 땡기는데 목사님이 하는 소리가 틀린 소리는 아니지, 이 괴리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라는 것 때문입니다.
그것은 현재까지의 ‘나’의 자화상이 허깨비라 여기고(그것은 괜히 빈껍데기에 내 망상을 채워버린 것) 그것을 터뜨려 버려야 합니다. 새우깡 빈 봉지 다 먹고 나서, 밟아 터뜨리면 뻥, 소리가 나잖아요. 허구와 욕망만으로 가득 들어차 있는 ‘나’를 밟으면 뻥, 하고 터져 버리고, 그 터진 그 빈자리에서 “거저 주시는 바, 창세전에 예정한 ‘나’”를 그동안 하나님께서 고이고이 길러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도보고 이것도 죄, 저것도 죄, 죄, 죄, 죄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죄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내가 만든 인생을 새우깡 먹고 난 빈 봉지를 밟아주는 것처럼 밟아주시는 그 은혜입니다. 내가 못 밟으니까 주께서 밟아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우리 뜻대로는 안 해주십니다. 우리 뜻대로는 안 해주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되게 하십니다. 그 뜻이 뭐냐? 예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좀 쉬웠는데 약간 어려운 것이 나옵니다. ‘예정론’입니다.
1:4,5을 다시 봅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 .”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그 안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정이란 말은 미리 정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뭘 미리 정했는가? ‘내가 너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미리 정했어요. 요한복음 15:16에 나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창세전부터 모든 것이 생기기도 전에, 모든 것이 하나도 없을 때에, 그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했는데, ‘너를 미리 선택하기로’ 정했습니다.
두번째, 용서하기로 정했습니다. 선택하고, 그 다음에 선택된 자에게만 용서를 베푸신다. 왜 이렇게 하시는가? 예정하신 당사자가 그렇게 했습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예수님 안에서란 말은 아무리 선택하고 예정해도 그것이 예수님 바깥으로 안 벗어난다는 것, 예수님이 하셔야 하는 그 사명 안에서), 예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선택과 용서하심은 누구 할일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실 일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심으로써 결과는, 예수님을 찬미하게 하기 위해서, 모든 피조물로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면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미리 정하신 겁니다. 선택하심과 용서하심을 예정하신 것은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죄가 있어야 되고, 그 죄가 있어야 용서하심이 성립됩니다.
죄가 없는데 용서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잖아요. 죄가 있을 때 그 죄를 용서하기 위해서 피를 흘리시고 그 피로 인하여 용서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여기 어린이가 있습니다. 이 애를 용서한다, 이렇게 용서하는 것이 아니고, 이 애의 등에다가 어린양의 피를 발라요. 이게 무슨 뜻입니까? 지금 너를 용서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네 등에 발린 예수님의 피를 알리기 위해서 용서하심을 받아야 된다는 겁니다.
옛날에 유월절에, 용서할게, 용서할게, 이렇게 용서하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문설주와 문지방에 뭘 바릅니까? 어린양의 피를 바릅니다. 피를 바르니까 그 결과로 안에 있는 사람이 용서를 받습니다. 죽음의 사자가 그냥 건너갑니다. 이것은 뭐냐? 내가 용서받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대체 이 용서가 무엇에 의해서 이 용서가 왔느냐,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우리를 하나의 도구로서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가 자기를 용서해준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구원받고 싶으면 자기가 애쓰고 착하게 되어서 구원을 받아야 됩니다. 용서해주는 주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진짜 구원받은 사람은 용서해준 분의 피 때문에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할일은, 저 피가, 저 피가, 저 피가 나를 용서했다, 그 고백만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게 “거저 주시는 바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함이라”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이야기를 할 때 예수님의 피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 봤습니까? 주로 누구 이야기입니까? ‘나’의 이야기 좀 들어줘, ‘너’의 이야기도 들어줄게, 이거잖아요. 그러면 누구의 이야기입니까? 자기의 이야기입니다. 자기 이야기를 남에게 한다는 것은, 나를 좀 알아달라는 말 아닙니까? 내가 잘났다는 것을 좀 알아달라는 것. 그런 사람한테는 미리 정한 것이 없기 때문에 믿어도 자기만 믿어야 되지, 다른 것을 믿을 구석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세전에 예정된 사람한테는, 난데없이 주님의 뜻이 밀려와서 용서하심을 이야기하고, 그 용서하신분이 그냥 용서하신 것이 아니고, 선택한 자에게만 용서한다는 겁니다. 여러분은 지옥이 있다는 것을 아시지요? 하나가 있는데 하나를 선택한다면 선택할 필요가 없죠. 선택했다는 말은, 컵을 가질까, 안경집을 가질까?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되는데 어느 것을 선택하지? 이렇게 선택이라는 것은, 둘 이상이 있을 때 하나를 배제하고 하나를 가질 때 선택이란 말이 해당됩니다.
창세전부터 선택했다는 말은 어떤 뉘앙스가 있습니까? 한쪽은 선택 안하기로 작정했다, 그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몽땅 사랑하면 사랑이 아니라는 겁니다. 한쪽을 미워해야 한쪽이 사랑이라는 것이 비로소 등장한다는 겁니다. 로마서 9장을 봅시다.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3)
언제부터? 그들이 아직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입니다. 언제부터요? 창세전부터. 창세전부터 미움이 있었고 창세전부터 사랑이 있었습니다. 미움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요, 사랑이 없는 미움은 미움이 아닙니다. 사랑받지 않는 것이 미움이요, 미움 받지 않는 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사랑받았다는 말은, 반드시 여러분 주위에 미움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가 사랑받았다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 미움 받는 사람들이 누구일까를 찾아다니는 그 즐거움도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상당히 독한 맘을 먹어야 하는 이상스런 악취미입니다. 하나님께 미움 받은 사람, 그 사람이 누구냐? 바로 예수의 “거저주시는 바”를 믿지 않는 사람이 미움 받은 사람입니다. 찾아오신 분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미워했다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반대로 내 아들이 미워한 그 점을 하나님도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미워한 사람들을 한 장소에 모이게 했습니다. 그게 뭐냐? 지옥입니다. 지옥은, 예수님이, 나는 저 인간을 사랑하지 않기로, 미워하기로 했습니다, 라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잘했다, 아들이 미워한 놈들을 한데 모아라, 해서 모아진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창세전부터 이미 결정된 겁니다.
우리가 미운 짓해서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지옥가야 하는 사람이기에 태어나야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랑하기로 했기 때문에 태어나야만 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왜?”
“저 사람을 사랑하렵니다.”
“옳지, 결정 잘했다.”
아들이 결정을 영원히 잘했다고 기념을 세운 곳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천국을 아들의 나라라고 합니다. 아드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발생된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면 지옥과 천국 말고 어중간한 이 세상은 뭐냐? 이 세상은 중간거점입니다. 하나의 과정에 불과합니다. 언젠가는 자기 위치로 분류됩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양과 염소로 분류되고,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로 분류되고, 알곡과 가라지로 분류되고, 참감람나무와 돌감람나무로 분류되고,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로 분류되고, 거듭난 자와 거듭나지 못한 자로 분류됩니다.
성경전체가 분류, 분류, 분류작업입니다. 분류작업을 하는데, 이 분류작업을 이미 창세전에 확정된 그것을 그대로 시행에 옮기는 것 뿐입니다. 지옥 갈 사람이 천당 가려고 아무리 애써도 안 됩니다. 태생이 지옥 갈 사람은 지옥에 가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결정을 믿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결정대로 따라가는 것이 가장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골로새서 1:13-16을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도다 그는(예수님)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라는 말이 뭐냐 하면, 지옥이 있어야 되는 이유도 누구를 위하여 입니까? 지옥을 보내기로 결정한 예수님의 결정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지옥에 가야만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천국 가는 사람은 천국 보낸 예수님의 결정이 훌륭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빼도박도 못하게 천국에 가야만 하는 겁니다.
미래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세전부터 결정된 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미래라는 것은 우리의 과거가 만들어내는 겁니다. 사람은 과거에서 현재를 통과해서 미래로 갑니다. 이 현재라는 것은 나의 과거 경험이 누적되어서 되어진 현재입니다. 과거 없는 현재가 없잖아요. 과거의 것들이 쌓여서 현재가 되고, 그 현재에서 뭔가 기대할 것이 있을 때는 그것이 미래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과거, 인간의 현재, 인간의 미래라는 것은 전부다 자기가 지어낸 겁니다. 자기의 상상(꿈)에 불과하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어릴 때부터 보리밥만 먹고 쌀밥을 못먹은 사람은, 나중에 장가가서 쌀밥 많이 먹어야지, 쌀밥 많이 먹고 싶다는 미래가 과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고 3때 공부 지겹게 하면서, 내가 대학 들어가기만 해봐라, 내가 맘대로 놀겠다, 그 말은 고 3때 공부를 힘들게 했다는 것을 근거로 미래가 나온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상상한 것이고, 예수님의 미래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예수님의 현재란, 우리와 함께 계심입니다. 예수님의 과거란 창세전에 예정한대로 십자가에서 이미 우리 죄를 용서한 것입니다. 우리의 미래와 예수님의 미래가 이렇게 달라요. 우리는 우리 중심으로 통일되려고 하고, 예수님은 자기중심으로 통일되려고 합니다.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죄사함을 얻게 하는, 그것을 예정했다. 선택하고, 죄 용서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선택하지 않은 자에게 지옥이 있다는 그 결정을 참 잘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당부합니다. 천국에 가게 되었어도 여러분은 자기 자랑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천국 가는 것이 내가 나를 관리 잘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덕분에 천국 가는 거예요.
지옥 가더라도 너무 섭섭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처음부터 천국 갈 팔자가 아니고 지옥 갈 팔자이기 때문에 주님의 결정을 존중해야 됩니다. 그래서 지옥 가는 사람들은 이 사실조차 안다면 그 사람은 천국 갈 사람이지 지옥 갈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옥 갈 사람은 이것을 공손히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니고, 예수님이 창세전에 예정했다는 그 자체부터 아예 거부해 버립니다.
예를 들어, 지도를 펴놓고 여기가 천국이고 여기가 지옥이거든, 우리가 이곳으로 가거든, 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듣는 사람이 지도를 둘둘 말아서 찢어버립니다. 자, 이제 지도 없어졌으니까 너의 이야기도 없는 거지, 하고 찢어 버리는 거예요. 불신자들은 이 성경에 대해서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고, 성경 자체를 찢어 버리는 거예요. 그저 성경도 옛날에 있던 하나의 종교경전인데, 불경도 있고 다른 경전도 많은데 왜 성경만 고집하느냐고 하면서 이것 자체를 거부해 버립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인데 이 땅에 임마누엘로 오셨거든. 그게 바로 크리스마스 아니냐. 그렇게 왔거든. 지옥 갈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아이고! 그러면 나는 지옥 가겠네. 이렇게 하지 않고, 봤냐? 봤어?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봤어? 누가 아기 예수인데? 그날 기타치고 놀면 그만이지. 이렇게 나오지, 그래? 와! 선택 못 받았다면 지옥 가겠네.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중심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자기중심이기 때문에 자기중심을 포기를 못한다니까요. 그래서 심지어 지옥 간 부자는, 지옥에 가서조차 자기중심으로 봐서, 저, 아브라함님! 저기 천국 가 있는 나사로에게 나의 목마름을 채워주기 위해서 물 한 방울 찍어주게 해 달라, 고 합니다. 지옥 가서라도 자기중심을 포기 못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옥가도 싸지요. 좀 안됐다고 이야기할 필요도 없어요.
천국가나 지옥가나 모두 그리스도 뜻에 의해서 되었기에, 그리스도의 예정된 약속이 담겨 있는 사람은 그 사람 자체가 성공입니다. 사랑받는 것 자체가 이미 성공자고, 아무리 잘나고 훌륭해도 그 사람 속에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이 없으면, 그 사람은 검사, 판사, 변호사, 의사, 무엇이 되어도 하나님께 버리운 자입니다.
목사님! 그것을 어떻게 확정합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도가 된 사도의 편지(성경)를 보고 확정합니다. 그러면 사도의 편지를 무시하고, 나는 안 봤다, 나는 옛날에 들었어도 잊어 버리겠다, 나는 무시하겠다,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 됩니까? 성경이 날아가 버리면 누구 중심으로 됩니까? 자기중심이 되겠지요. 그러면 자기중심끼리 모인 곳이 어디입니까? 그게 바로 지옥이죠. 지옥에서 자기중심끼리 모여서 잘 살아 보자는 겁니다.
예수님 중심이냐, 아니면 내 중심인가?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성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아기 예수로 오셨고 죽은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이유는 정말 그분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고, 그분 아니면 아버지께 갈자가 없음을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인줄 압니다. 웬 은혜인지 이 사실이 믿어지고, 주님의 거저 주시는 은혜 덕분에 구원받았음을 생각할 때, 이제는 우리가 만드는 나를 포기하고, 주님 주시는 사랑으로 살아가는 저희들 만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