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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6 대구강의 4 - 지옥의 하나님 7자유게시판-

06 대구강의 4 - 지옥의 하나님 7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06 대구강의 4 - 지옥의 하나님 7

06,04,17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법에 체포된 아담 !!

시작하겠습니다. 교재 29페이지를 보면, '체포된 아담' 이라고 표현된 제목이 있는데, 이런 용어는 잘 사용하지 않는데, 아담이 누구에게 체포된 것인가? 물론 하나님인데, 무엇을 하나님은 아담을 체포했는가? 포승줄로, 수갑으로? 그것이 아니라면? 아담을 '법'으로 체포했다는 것이다.

체포된 아담, 낯설고 생소한 용어이지만, 그러나 사실 범죄한 자에게는 이 체포라는 말이 적절한데, 분명히 죄를 지었는데 '내몰라' 라고 하면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를 했으니 체포당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체포하는 방법이, 수갑을 사용하면 육체적인 것은 가능하지만 정신적인 것은 여전히 죄가 나오고 활개를 치기 때문에, 수갑이 아니라 법으로 꼼짝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그리고 율법이라는 것은 그 사건 뒤에 오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그런데 어떻게 법으로 체포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고 질문할 수 있는데, 그것은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이 구약전체를 다시 해석하는데, 왜 그런지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아직 언급하지 않았던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창조는 완벽한가?

하나님께서 6일만에 창조했을 때 이 창조가 완벽한가? 즉 에덴동산에 선악과가 심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창조가 완벽하냐는 것이다. 이 문제가 2000년 동안 계속 논쟁거리가 되었는데, 만약에 완벽하다면 죄를 짓는 것이 없어야 하는데, 그렇게 완벽하지를 못하기 때문에 선악과가 있었고 죄를 지은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렇게 '다 이루었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라고 하는 것은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완성을 제대로 했는데 왜 죄가 나왔는가? 앞부분은 전반전이고, 그 다음부터는 후반전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능력이 미처 그런 부분까지는 예상하지 못한 것인가? 즉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있다고 하는, 즉 그것이 완전을 깰 수 있다는 그 자체마저도 대비할 정도로 하나님의 능력이 완벽하지 못했는가? 그런 하나님이라면 정말 제대로 된 하나님인가? 라는, 그런 등등의 것들이 엄청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에 의하면, 그는 십자가를 가지고 창세기부터 다시 해석해가기에, 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완벽하면 창조도 완벽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니, 창조를 했는데 죄를 지었다면 미흡하고 허점이 있었던 것이 아니냐?" 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로부터 시작하는 인식이 아니라, 자기가 죄를 지었기에 고통스럽다고 하는, 즉 자기 고통에서 말이다.

◈ 사도바울 - 십자가 중심 !! ◈ 인간 - 자기 고통 중심 !!

이러한 인간의 주체가 중심이 된 해석이 나와버리면,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는 실패했다고 주장하게 된다는 것이다. 창조는 처음부터 허점이 있었고, 마귀가 그것을 파고들었다고 말이다. 연이어 이러한 이론들이 마구 쏟아지는데, "아니, 가롯유다가 없었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십자가에 달렸겠는가?" 라는 주장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들의 기준점이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가 중심이 아니라, 즉 십자가을 지신 예수님이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의 시작점이 곧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 즉 현재에 이렇게 어려움에 처해있는 자기 자신부터 시작한다는 것이다. 성경을 보더라고 그런 여지를 하나님께 남기고 시작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물론 자기가 잘한 것은 아니지만, 자기도 잘못을 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러한 잘못을 하도록 여러 가지 환경을 조성하고 조장한 하나님에게도 일말의 책임이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 대들고 덤벼든다는 것이다.

사실 설교가 바로 이런 싸움인데,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으로 생각하세요" 라고 하는 것이 설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교회에 나올 때 항상 자기 입장에서 오기에 말이다. "하나님, 열심히 살았는데 도저히 안 됩니다. 그러니 어떻게 좀 해주세요" 라는 식으로 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저는 열심히 주님만을 믿고 이 세상을 산다고 살았는데, 그런데 더욱 힘들게만 되었습니다. 정말이지 제대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것은 하나님의 책임도 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책임을 지든지, 알아서 도와주세요" 라고, 그렇게 하나님께 따지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따진다고 하는 것은 감사와 기쁨이 소실되었다는 것인데, 그런데 이렇게 감사와 기쁨이 소실된 것은 자기로부터 시작했기에 그런 것인데, 그런데 이것을 모두 남의 탓으로 돌려버린다는 것이다. 예수님 탓, 하나님 탓, 그리고 인간 탓으로 말이다. (물론 자기는 쏙 빼고 말이다.)

◈ 설교자의 임무 - 십자가로부터 시작할 수 있도록 !!

그래서 설교자의 임무는 무엇인고 하니, 어떤 식으로 해서 왔든지 간에 그 시작을 다시 십자가로부터 시작할 수 있도록 해석을 하게 되면, 그 자체가 십자가 앞에서 완벽한 상황이 된다는 것을 감사하고 기뻐하도록, 마치 사도바울이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말이다. 아니, 사도바울이 자기 신세를 처량하게 여긴다든지 억울하다는 느낌을 우리에게 준 적이 있는가?

보통 사람이 하루에 몇 번이나 자기가 억울하다고 생각하겠는가? 모르기는 해도 수천 번은 된다는 것이다. 자기가 이런 고생을 할 것이 아닌데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이다. 그렇게 억울하다고 여기면서 "하나님은 나를 억울하게 만들어도, 나 정도 되니 참으면서 살아가는 것이지, 내가 아니면 누가 하나님께 감사하겠는가?" 라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주체'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왜 이러한 주체가 나올 수밖에는 없는지, 그 이유를 지금부터 교재를 통해서 살펴보겠는데, 조금 복잡하기는 해도 이런 작업이 필요한데, 이제 교재 29페이지를 보자.

** 체포된 아담 - 육체에서 태어나지 않은 인간은 없기에 인간은 그 육체의 근본속성으로 인해 죄만 짓고, 이는 인간이 본래 죄의 지배아래 놓여있음을 증명하는 증거들이다.

읺것은 바로 그 어떤 인간이라고 해도, 육체를 지녔기 때문에 십자가를 중심으로 생각하기가 그렇게 용이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십자가 중심으로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육체는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배가 고프면 '꼬르륵' 그대로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또한 지갑에 돈이 떨어지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던 말던, 구름을 타고 오던 말던 말이다.

◈ 엄마, 배고파요 !!

이렇게 육체의 요구부터 들어주어야, 육체가 눈을 좀 떠야 예수님이 보이고 십자가가 귀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지금 자기 육체가 아파서 비실비실 거리고 있는데, 다른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을 두고 다그치기를 "육에 속한 인간" 이라고 하는데,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우리는 "그러면 어쩌란 말인가?" 라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방종교를 신봉하던 아브라함을,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오셨다는 것은,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그 이전에는 어떤 계약도 체결되지 않았는데, 그리고 아브라함은 우리와 동일한 육적으로 살았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이다.

◈ 사도바울의 갈라디아서 !!

그런데 이것이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육적인 생활에서부터 영적인 생활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이렇게 육적인 생활에서부터 영적인 생활로 전환이 된다면, 아브라함은 분명히 알 것인데, 무엇이 육이고 무엇이 영인지를 말이다. 하지만 이것을 아브라함만 알아서 안 되고 우리도 알아야 하는데, 따라서 우리는 육적생활과 영적생활을 아는 성도이기 때문에, 육적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철저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 영적생활 - 육적생활을 드러냄으로 !!

제 설교나 강의에 대해서 사람들이 제일 오해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제가 육적생활에서 영적생활을 이야기하니까, 사람들은 어디로 쫓아가는고 하니, 육적생활은 생각하지 않고 영적생활만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육적생활에서 영적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은, 육적인 생활이 무엇인지를 뚜렷이 드러내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지, 육적생활은 생각지 않고 영적생활만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 그렇게 영적생활만을 쫓아가는 생활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물론 아브라함도 전혀 그렇게 산 것이 아니고 말이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그리고 야곱도 철저하게 자기의 육적인 생활이 무엇인지를 피부 깊숙이 느끼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영적생활이라는 것이다.)

◈ 목사님, "정죄하지 않는다" 라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오늘아침에 우리교회 사이트에 보면 이런 질문이 들어왔는데, "예수님께서는 다시는 우리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제가 자꾸만 저를 죄인이라고 하면 안 되잖아요?" 라는 것이다. 혹시 이런 질문을 본 적이 있나요? 그래서 제가 참 좋은 질문을 했다고 했는데, 하지만 질문을 한 이분이 무엇을 오해했는고 하니, "정죄하지 않는다" 라는 것을 잘못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기존의 무엇을 염두에 두었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너희는 죄인이었는데, 내가 너희를 죄인으로 간주하지 않겠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정죄하지 않겠다고 하면, 철저히 우리는 자기가 왜 죄인인지를 뚜렷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답변하면서 '정죄' 라는 용어가 어렵기에, '용서' 라고 표현을 했는데,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한다는 것은, 결국 "너는 용서받지 못하면 끝장이야"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무엇을 느껴야 하는가? 자기는 나름대로 착한 일도 제법하고, 교회도 이렇게 열심히 다니는데, 성경도 좀 알고 말이다. 그런데 왜 주님께서는 이 용서가 없이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다고 하시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것을 평생을 두고 되풀이하면서,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로마서 8장 1절에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바로, 왜 우리는 육으로밖에 살 수 없는 존재인가를 더욱더 들추어짐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죄함이 없다고 해서 영적으로 쫓아간다고 하면 그것은 미친 짓이라는 말이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렇게 '체포된 아담' 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이것이 성경에 있는 줄도 모르고 너무나 생뚱맞게 여긴다는 것이다. 성경에 아담은 있는데 체포라는 말은 없다고 여기니 말이다. 그러나 분명히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갈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갈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그러니 우리가 정말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면, 자기 구원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성급하게 덥석 집어들려고 하지 말고, 왜 우리는 그분의 그저 주시는 용서가 없이는 안 되는지, 즉 "정죄함이 없다" 라는 것이 그 얼마나 귀한 말씀인지, 지금부터 더욱더 깊이 있게 자신의 육적임에 대해서 양보함이 없이 추적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천 목사님은 머리를 보니 전보다 더 많이 허연 것 같은데, 마사지라도 좀 해보심이 어떠한지? 저는 그렇게 마사지도 받고 했더니만 좀 나아진 것 같은데, 제가 나오는 동영상을 보면 덜 허연 것 같기도 한데, 아닌가?

지금 교재 29페이지를 하고 있는데, 다시 한번 읽어보자.

** 육체에서 태어나지 않은 인간은 없기에, 인간은 그 육체의 근본속성으로 인해서 죄만 짓고, 이는 인간이 본래 죄의 지배아래 놓여있음을 증명하는 증거들이다. 이 증거는 율법으로 인해 확실해진다.

이 말이 맞잖아요? 육체에서 태어나지 않은 인간이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다른가? 아니, 영적생활을 한다고 해서 육적생활이 나오지 않는가? 모두 다 육체를 그대로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그야말로 웃기는 짜장면이라는 것이다. 돈 20억 앞에 무너지지 않는 목사가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지 말이다.

인간은 이렇게 육체를 가지고 있기에 죄에서 벗어날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을 이렇게 죄의 지배아래 놓여있다고 한다는 말이다. 육체인 이상은 육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결국 인간은 죄를 생산하는 주체자라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들이 주체, 주체, 주체, 주체를 강조하는데,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마저 객체로 만들고 말이다. (김일성만 주체사상을 강조한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영적 인간 - 자기가 육적 인간임을 제대로 깨닫는 자 !!

그런데 문제는, 이 주체는 신체를 가진 주체이기 때문에, 죄를 생산하는 주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물론 사람에게는 자아가 있지만 그러니 그 자아는 죄를 생산하는 자아라는 것이다. 육체를 그대로 지닌 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 것을 제대로 아는 인간을 두고 영적인 인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영적으로 산다고 하면서 미친 짓을 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그 다음에 교재 30페이지를 보자.

** 율법의 투입은 '두 언약 구조'에서 한 언약으로 모든 인간들을 확실히 몰아넣고 가두는 조치였다. 율법으로 가두어버린다. 약속된 믿음이 오기 전까지는.

(갈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여기에 나오는 갈라디아서 3장 23절의 말씀이 얼마나 어렵고 난해한지, 사실상 성경이 다 그렇지만, 특히 갈라디아서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에 보면 '믿음의 때까지' 라고 했는데, 성경에서 '~까지' 라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이다.

◈ 믿음의 때까지 !!

그 용어을 오해해서 전천년설이 등장하게 되는데, '천년이 차기까지'에서, 이 '~까지' 라는 말을 잘못 생각해서, 시간적인 그 이전까지를 말하는 줄로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명한 신학자들이 모두다 이 전천년설에 동조를 하곤 했는데, 래드 같은 사람도 말이다. 그리고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이 '천년이 차기까지'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 제대로 답변을 하지 못하고 그냥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간다는 것이다.

◈ 성경에서의 사건은, 수평적이 아니라 수직적 !!

그런데 '~까지' 라는 것을 시간적으로 따지자면 완료를 의미하는데, 사실 이 완료라는 말도 어려운데, 예를 들어, 사장님이 "점심 묵을(?) 때까지 서류를 가지고 와" 라고 하면, 그 서류는 점심때까지 갖다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시간적인 수평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성경 자체가 말씀을 사건화 시켰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사건화 시켰다는 것은, 수평적이 아니라 '수직적' 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어떤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라고 하면, 그런데 이 주님의 사건은 시간 밖에서 원인이 제공되는 것인데, 즉 시간 밖에서 시간 안으로 사건을 유발시킬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일으키는 사건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사야에 나오는데, "이 세상은 소멸되어도 말씀은 영원하다" 라고 말이다.

(사 51:6)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지금부터 여러분들이 이해를 하든 말든 무조건 진도를 나갈 텐데, 사람들이 죄를 짓고 난 뒤에 시간적인 인식과 공간적 인식이 어떻게 되었는고 하니까, 시간적 공간적 인식을 할 때는, 시간과 공간이 우선 깔려있고, 그 다음에 거기에서 사건 하나 하나가, 마치 모내기할 때 모를 심듯이 그렇게 심겨진다고 보는 것이다.

◈ 영원한 것이 시간 속에 들어올 때는?

우리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3차원의 세계에 갇혀 있기 때문에 사실 우리의 인식이 그럴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보는고 하니, 그 사건을 담기 위해서 시간과 공감이 있다고 본다는 것이다. 우리가 처해있는 시간과 공간에 주도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말씀에 주도권이 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원한 것이 시간 속에 들어올 때는, 즉 시간을 초월한 것이 시간 속에 들어올 때는, 이 영원한 것을 맞이하기 위해서 재배치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즉 시간적인 재배치가 말이다.

◈ 성경의 시간 - 도대체 몇 층이야?

예를 들어서, 신명기와 여호수아의 경우에, 왜 성경순서가 민수기, 신명기, 여호수아, 사사기, 이렇게 진행이 되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사건들도 이렇게 순서대로 차곡차곡 진행이 된다고 보는데,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보면) 모세의 경우에, 모세가 살아있을 때 모세의 사건은 이렇게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여호수아인데, 이 여호수아의 사건은 모세의 시간과 겹치지 않고 여호수아에게 준 말씀을 성취하는 다른 것으로 채워진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방식이 지금까지는 철학에서는 나온 적이 없는데, 그런 가운데 그럴 수도 있다고 어렴풋이 약간 감을 잡는 철학자가 바로 베르그송과 들뢰즈라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십자가와 언약으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을, 즉 자기 몸을 출발점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현대철학은 몸 철학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 현대철학, 왜 몸 철학인가?

이것이 하나의 유행인데, 메릴 퐁티의 '몸의 현상학'으로 시작하는데, 즉 이제는 철학을 인간의 육체로 해야지 그동안 관념 쪽으로 너무 나가버렸다는 것이다. 관념은 이미 하이데거에서 끝장을 보았는데, 이 하이데거를 극복하려면 육체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몸 철학인가? 지금은 과학적이고 생물학적인 시대로서, 두뇌를 가지고 정신을 파악하는, 즉 정신의 원천을 두뇌에 두기 때문에 말이다. 바로 이런 두뇌의 작용에 의해서, 신도 나오고 사랑도 나오고 철학도 나온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철학에 있어서 하나의 유행이 되다보니까, 쉽게 말해서, 유물론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렇게 유물론에 근거한 나온 정신을 다루는 것이 세련된 현대철학을 강의하는 교수들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 신에 대한 관념은 언제, 어디에서 ?

그러니 신이라는 것은, 뇌세포(뉴런)이 이전인 네안데르탈인 시대에는 구역 구역에 이렇게 단절되어 있었는데, 지금부터 일 만년 전에 현세인류인 크로마뇽인이 등장하고부터는, 영역과 영역을 가로지르기를 하면서 연결하는 집합적인 관념이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신의 관념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까지는 이런 신에 대한 관념이 없었다는 말이다.

어떻게 이런 추론을 하는고 하니, 네안데르탈인의 매장풍습과 도구 등을 만든 것 등과 크로마뇽인이 만든 도구 등을 암석에 그린 그림을 비교해 볼 때 말이다. 그러한 차이는 바로 두뇌의 진화의 결과에 의해서 서로 다른 관념이 나왔다는 것이다. 물론 도구가 발전된 것도 관념에 의해서 그렇게 발전된 것이고 말이다.

이러한 관념의 발달은 신과 종교의 발달로 연결이 되는데, 물론 이 신은 처음에는 다신론적인 세계에서 요정이나 요괴, 그리고 귀신 수준에 머물러 있다가, 나중에 유일신으로 되는데, 이렇게 점차 진화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것을 철학자들도 알고 있어야 철학자로서 나름대로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 덕분에 !!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베르그송과 들뢰즈는 시간이 단층이 아니라 여러 층이라는 것을 비로소 감을 잡고 이야기했는데, 왜 그런 용기(?)가 나올 수 있었는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 때문에 그러한데, 그 이론에 의하면 절대적인 것은 빛의 속도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빛의 속도 이외의 것들은, 즉 시간과 공간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주 높은 산에 올라가면 시계가 늦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같은 시간인 줄로 알았는데, 그런데 시간이 장소에 따라서 그 속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시간은 고정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즉 시간은 절대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은 사건을 일으켜도 순서대로 이렇게 이렇게 일으킨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 말씀을 보여주는 시간들은 따로 따로 !!

읺렇게 시간 순서대로 사건이 일어난다고 본 것이 2000년 동안의 신학의 모토인데, 소위 칼빈과 루터의 개혁주의 신학도 그 당시의 시간관에 근거해서 성경을 해석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시간을 주셨는데, 물론 어거스틴에 의하면 이 시간은 영원할 때 꺼져버리고, 즉 날아가 버리고, 물론 시간은 정확한데 다만 사건이 모심기를 하듯이 담겨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이제는 말씀위주로, 즉 말씀을 보여주는 시간들은 따로 따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쪽 층이 있는데, 또 다른 저쪽에 층이 있고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의 경우에, 여호수아에게 일으킨 사건을 담아내기 위해서 필요한 시간의 의식들을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배치를 해주시고, 즉 따로 제조해주신다는 것이다.

◈ 아버지, 홍해는 홍해이고 !!

물론 지금 여러분들이 이해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지만, 그래도 좀 더 설명을 하자면, 여호수아서의 경우에, 제1장부터 들어가면서부터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나는 선배들이 믿었던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 라고 하는 것이다. 즉 홍해가 갈라졌다는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지만, 그것을 지금 현실로 받아들이지는 못하겠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것이 아버지의 시간 때에는 맞는 것일지 몰라도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말이다. 지금 후손들이 그 아버지 때 신앙을 존중하고 인정해준다고 할지라도, 그 신앙에서 나온 원칙을 현세에다 적용시켜버리면, 이것이 전혀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맞는 이야기이고 말이다.

그렇게 아버지 때에 홍해가 갈라졌는데, 그런데 삼손 때에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해서 압제하고 있다면, 우리나라 일제시대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35년이 아니라 그 수십 배의 기간 동안 고통을 당했는데, 그야말로 죽을 맛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때 홍해가 갈라진 것을 기억하라고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설령 그때 그렇게 바다가 갈라졌더라도, 지금은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은 물을 가르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적들을 쫓아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이 무너진 것을 가지고, 그것만 믿으라고 하니 그것이 어떻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마치 베드로가 자기가 물위를 걸었다고 해서, 우리에게 와서 우리도 걸으라고 하는 것과도 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다에 가고 싶으면 배를 타면 되지 말이다.

◈ 선배의 말이라고 해서 다 맞는가?

연세 많은 장로님들이 하는 말이, 교회를 지을 때 기도하면 땅을 준다고 하는데, 물론 그러한 아버지 때의 일을 존중은 하지만,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땅값이 오르고 하면 좋겠지만, 그러나 그런 방법을 꼭 써야 하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그것이 동일하게 반복된다는 것이 지금 이 과학시대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주장이 맞는데, 성경을 보게 되면 홍해가 두 번 다시 갈라지지 않는데, 그런데도 선배들은 홍해가 갈라진 그 사건을 믿자고, 즉 자기 시간대의 사건만을 우기고 있고, 그런데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홍해는 갈라지지 않고 그 다음에 여리고 성이 무너지고, 그리고 삼손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 삼손은 홍해를 가른 것이 아니라, 두 기둥을 잡고 블레셋 궁전을 와르르 무너지게 했지 말이다.

◈ 삼손과 같은 용사를 주세요 !!

그런데 또 이 삼손 이후에 자손이 있다면, 그 선배가 말하기를, "너는 삼손을 믿어야 돼. 삼손의 하나님을 믿어야 돼" 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 자손에게는 삼손이 아니라 소년 다윗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골리앗이 덩치가 3m라고 하면, 이스라엘 쪽에는 삼손의 시간대라면 4m의 누군가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등장했는가? 소년 다윗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소년이 말이다. 삼손과 같은 분위기는 오히려 골리앗 쪽이고 말이다. (사실 삼손이 덩치하고는 별 상관이 없는데) 아무튼 저쪽에 골리앗이 등장하면, 이스라엘 쪽은 삼손과 같은 인물을 찾아야 하는데, 머리카락이 긴 놈을 찾던지 해서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어디에서 죽었는가? 언약궤를 붙잡다가 죽었는데, 그것은 바로 앞선 사건에서, 즉 요단강을 건널 때에 언약궤가 앞장섰고, 그리고 또 여리고 성을 돌 때도 이 언약궤를 앞장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홉니와 비느하스는 이 언약궤를 붙들면 승리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기 시간대를 그대로 고수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 자기 인식의 실패, 그것이 곧 말씀의 위력 !!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인식이 완전한 실패로 끝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말씀의 위력이라는 것이다. 말씀의 위력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 이것이 꿀물인데, 저에게는 이것이 좋지만 그러나 신세대에게는 아니라는 것이다. 더 좋은 새로운 상품이 있기에 말이다. 그래서 꿀물을 자꾸만 마시라고 해도 마시지를 않는데, 즉 자기에게는 더 좋은 음료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는 자기의 시간대가 있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하나님은 이 꿀물이라는 말씀(?)이 그 당시 필요했고, 그리고 그 다음에는 우리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말씀으로 그들을 권고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을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사건'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말씀의 새로운 사건, 물론 성경말씀은 동일하지만 그 말씀을 적용하는 것은, 기껏해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시간대에서, 즉 우리가 알고 있는 경험을 가지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그 어떤 새로운 사건이라도, 이미 십자가에서 도출된 사건 !!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능가해서 새로운 사건으로서 이 성경말씀을 그 다음 우리 세대에는 어떤 사건을 줄지, 그것은 우리가 상상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도, 그 사건의 출처가 이미 십자가에서 도출된 사건이라는 점은 너무나 확실하다는 것이다.

◈ 새로운 말씀에 어울리는 시간대 - 때가 차매 !!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정리하면, 먼저 시간이 있고 그 다음에 사건이 심어진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새로운 말씀에 어울리는 시간대가 배치가 되는데, 바로 그것이 '~까지' 라고 해서 뒤의 것을 제거해버리는데, 즉 새로운 말씀의 사건이 터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신약에서는 '때가 차매' 라고 하는데, 여기서 '때'는 '아이온'이 아니라 '카이로스'이고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때'는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형편을 따라 주님께서 "저 놈은 한번 조져놓아야 되겠다. 십자가 망치로 한번 패야 되겠다" 라고 할 때에, 즉 십자가의 능력이 일어나는 때가 되면 기존의 우리가 가진 그 어떤 교만과 오만은 묵사발이 되고, 주님의 새로운 십자가 때가 되어서, 우리는 다시 한번 십자가를 의지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는 기회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말씀은 사건이고 그 사건이 우리를 십자가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돈을 사랑하지 말라" 라고 하면, "아, 돈을 사랑하지 않으면 되겠네" 라고 하면 안 되고, 이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을 통해서,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돈밖에 모르는 죄인이었는가가 제대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즉 다시 한번 우리를 십자가로 몰아넣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5년 뒤에는 돈이 아니라 다른 문제로 사건을 일으켜 우리를 십자가로 몰아넣고 말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또 다른 문제로 사건을 일으켜서 우리를 십자가로 몰아넣고 말이다. 그것이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저는 '체포된 아담' 이라고 표현했는데, 즉 체포되어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마음대로 자기의 말씀을 적용시키는 대상으로 만드신다는 것이다.

◈ 설교비평 - 똥통에 빠트리는 잔인한 사랑 !!

저와 함께 공부한 사람들이 어떤 점을 오해하는고 하니, 노회 목사님들이나 복음을 알고 있다는 분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저는 매주 그분들의 설교를 듣는데, 첫째 이유가 배울 점이 있어서 인데, 제가 미처 놓쳐버린 말씀에 대한 힌트를 다시 찾기 위한 것이고, 그리고 둘째 이유가, 설교를 어떤 식으로 구성하는지를 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물론 둘째 이유가 강하지요.)

그런데 이렇게 설교를 들어보면, 뭔가 마음에 앙금 같은 것이, 즉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구속사나 복음을 강의식으로 마구 집어넣으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복음의 내용이 제대로 펼쳐지지 못하고 구겨서 넣는 것 같다는 것이다. 구속사, 혹은 언약사, 아니면 복음의 전개과정이라고 해도 좋은데, 그러한 신구약을 통째로 뚫어 가는 그러한 통달한 지식적인 내용들이 설익은 채로, 앞서 말한 대로 그냥 구겨져서 설교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는 "이만하면 되었지요. 제가 뭐 잘못한 것 없지요" 라는, 그런 자기 정당함을 주장하는 좋은 근거가 될 수 있는 이유도 일부 포함되어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성경본문에서 주님의 사건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알았던 성경지식들을 그 본문에다가 마구 퍼부어 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본문 속에 전체 구속사가 담긴다는 것은 좋지만, 그러나 그렇게 되면 다른 본문을 택해도 거의 같은 말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 설교는 교인들의 예상을 뛰어넘어야 !!

그렇게 되면 이 본문을 선택하는 것과 저 본문을 선택하는 것의 차이가 없어지는데, 그러면 교인들이 교회에 나오면서 설교내용에 대해서 미리 예상을 하고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예상을 하는 것은 교인들의 자유지만, 목사는 그런 교인들의 예상을 뛰어넘는 설교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교인들이 예상하고 있는 설교를 하게 되면 목사 자신도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뭔가 새로 집어넣을 것을 찾게 되고 말이다. 그런 것을 느끼면서 참으로 아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설교구성에 있어서 순서도 뒤바뀐 면도 있고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본인에게 해주면 큰 실례(?)가 되는데, 좌절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되면 제가 복음을 훼방하는 역할을 하게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무엇이든 사랑으로 이야기해야지 시비를 거는 조로 해버리면, 설령이 그것이 천사의 말이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지켜보는데, 그러다가도 어떤 때에는 지식에서 놀라울 정도로 자유로운 설교도 발견하게 되는데, 그러면서 복음은 복음대로 전하고 말이다. 그러면 얼마나 감동을 받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교비평(?)을 제대로 하려면, 구체적으로 설교본문을 정해서, 왜 이전에 이런 이야기를 한번 한 것 같은데, 설교문장을 하나 하나씩 다 따져서 말이 되는지, 이것은 또 반복이 아닌지, 또 순서는 이렇게 옮기는 것은 어떤지, 이런 식으로 하면 제일 좋은 공부가 되겠지만, 하지만 그 설교를 한 사람은 완전히 똥통에 빠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이 "당신은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 라고 하면서 더 큰 똥통을 들고 기다리지 않겠는가?

아무튼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사실 본인이 먼저 느끼게 되는데, 물론 "제가 뭐 잘못한 것 없지요" 라는 자기 변명도 들어가겠지만, 그러나 촉촉함이 없다고 하는 뭔가 메말라 있음을 본인도 알고 교인들도 알지 싶다는 것이다. 뭔가 찜찜하기는 한데 그 원인을 몰라서 안타까워 할 때, 그것은 성령께서 알아서 속시원하게 뚫어주신다는 것이다. (즉 주께서 사건을 일으켜서 알게 하신다는 것이다.)

교재 30페이지를 다시 보자.

** 율법의 투입은 '두 언약 구조'에서 한 언약으로 모든 인간들을 확실히 몰아넣고 가두는 조치였다. 율법으로 가두어버린다. 약속된 믿음이 오기 전까지는.

(갈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 믿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이 먼저 와야 !!

여기에 "믿음이 오기 전에" 라고 되어있는데, 이 믿음은 누구를 말하는가? 아브라함이 아니면 예수님인데, 누구인가? 그리고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라는 문장에서, 이 율법이 오기 전에 믿음이 있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없었다는 말인가? 그것은 바로, 율법이 먼저 오고 믿음이 왔다는 것이다. 아참, 제가 말을 잘못했는데,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이 먼저 와야 한다" 라는 것이다.

◈ 아브라함은 과연 믿음이 있는가?

만약에 예수님이 올 때 믿음이 왔다면, 그러면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아브라함은 율법 이전의 사람이니 말이다. 그런데 무슨 믿음의 조상이냐는 말이다. "믿음, 율법, 예수님" 이렇게 순서가 매겨지면 납득이 되는데, 그런데 믿음이 오기 전에 먼저 율법에 매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제가 이것을 설명하려고 말을 그렇게 빙빙 돌려서 했는데, 지금 이 사도바울의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라는 말은, 사도바울 그 당시 시간대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구조가 그렇다는 말이다. 아브라함 시간대 따로, 사도바울의 시간대 따로, 그렇게 보는데, 그런데 사도바울의 시간대로 보면 예수님이 올 때 믿음이 처음으로 왔고, 그 이전에는 율법에 매여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 맞으니, "아브라함의 믿음, 율법, 예수님의 믿음" 이라는 순서가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두 개의 시간대를 억지로 겹치기에 그렇게 되는 것인데,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이렇게 억지로 겹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펼쳐서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라고 하는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이 완전한 믿음인가? 이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브라함 때에는 완전치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실 분을 기다려야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간대에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완전한 믿음이라는 것이다. 혹시 제가 말을 반대로 한 것으로 여길지 모르겠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님의 시간대에 있어서는 율법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예수님의 믿음이 오는데, 이 예수님의 시간대에서 보는 믿음으로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시간대에서는 예수님의 믿음이 없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의 신학 - 예수님으로 출발하면 모든 것이 OK !!

결국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예수님으로부터 출발하면 그 전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완전함이 되는데, 그래서 전에도 말했지만 창세기의 창조도 완전한 창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빠트리고 보면 비록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고 할지라도 완전하지 않다는 것이 사도바울의 신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어려운(?) 신학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유대인으로서, 그야말로 아브라함을 하늘같은 아브라함으로 바라보는데, 그래서 예수님을 빼고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의 모델케이스는 되는데, 그러면 "아브라함을 본받자" 라고 하는 것이 말이 되는데, 그러나 예수님이 온 이상은 "아브라함을 본받자" 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본받자. 그래서 아브라함의 믿음은 완전하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아브라함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라는 것 때문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이 주체가 되면 의미가 없는데,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비로소 아브라함의 믿음은 의미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완전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모르게 되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면 천국에 갔습니까, 못 갔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당연히 아브라함은 천국에 갔는데, 그래서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아브라함이 이렇게 예수님이 없이도 천국에 갔으면 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굳이 예수님이 오실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다.)

◈ 믿음의 완성은, 그 안에 예수님이 담길 때 !!

하지만 이것은 '~까지'를 자기 구원주체로 보니까, 즉 자기 혼자서 달랑 천국가면 '~까지'가 완성되는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완성이란 말은, 완성된 예수님을 담고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지, 자기가 어떻게 알고 어떻게 구원받고 하는 것은 완성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출발점이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완성은 그 안에 예수님이 담길 때 비로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왜 이런 것을 알아야 하는고 하니까,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항상 자기 구원만 챙기려고 하기 때문인데, 예를 들어서 이런 질문이 가능한데, "목사님, 왜 나사로가 예수님 품에 안기지 않고, 하필 아브라함 품에 안겼습니까? 이것 때문에 천주교에서는 연옥을 만들고 했는데 말입니다" 라고 할 수 있는데, 천주교에서는 아브라함의 품을 연옥으로 보고, 예수님의 품을 천국으로 보는데, 이렇게 단계가 1단계에서 2단계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시시한 것(?)은 아브라함이 처리하고 마지막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처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연옥설이 나오고 교회헌금이 문제가 되는데, 그것은 교회가 사도바울의 사고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않고 사람들을 납득시키려고 하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주체를 가지고 있으니 이런 일들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 품에 안겨도 분명히 천국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까지' 라는 것이, 예수님이 사건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 과연 아브라함 이후에 예수님이 오셨는가?

여러분이 알고 있는지 제가 질문을 하겠는데, "아브라함 이후에 예수님이 오셨는가?" 물론 맞는 말이지만, 그러나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때가 끝나고 난 뒤에 말씀께서 완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의 시간대를 따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의 시간대는 여기에 복속이 되고, 아브라함의 시간대가 완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천국에 있다는 것이다.

◈ 아브라함과 엘리야는 앞서 깔려지는 모형들 !!

그 다음 질문은, "엘리야가 불수레를 타고 간 곳은 천국이 맞습니까?" 천국이 맞는데, 그러면 더 이상 예수님이 필요 없는가? 그것이 아니라 엘리야가 간 천국은 이 엘리야 시간대인데, 나중에 변화산에서 보니 모세하고 엘리야하고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시간대에 이 엘리야의 시간대는 역시 복속이 되는데, 왜냐하면, 진짜배기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러한 모형들을, 바로 여기서 모형이라고 해야 제대로 쓰는 용어가 되는데, 즉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런 모형들을 미리 깔아놓았다는 것이다.

◈ 새언약 속에서 옛언약이 완전의 빛을 !!

이렇게 되면 구약성경해석을 뒤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해석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시간대에서 구약을 본다는 말이다. 선악과 사건이든 뭐든 말이다. 그렇게 되니 구약전체가 완전한, 하나님의 창조도 완전하고 방주도 완전하다는 것이다. 노아가 비겁하게(?)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완전하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새언약 속에서 옛언약이 완전의 빛을 다 바라본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동일한 시간대로 봐버리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물론 앞서도 말했지만, 이런 것을 베르고송과 들뢰즈가 약간 나름대로 인식을 하기는 했는데, 그러나 그들은 이렇게 언약적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심성이 정신적인 두뇌에 의해서 진화되어서 그렇게 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 '갇혔느니라' 라는 의미에 대해서 !!

지금까지 제가 주장한 이러한 이론들이 맞다고 한다면, 지금부터는 교재 30페이지에 있는 갈라디아서 3장 23절의 '갇혔느니라' 라는 말을 제대로 설명을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갈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렇게 '갇혔느니라' 라는 것은, 계속해서 갇히게 하는 것인데, 즉 갇혔는데 풀어주었다고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개혁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인데, 그들은 "전에는 율법에 갇혔는데 이제는 율법에서 해방되었다" 라고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율법에서 해방이 되었기에, 이제는 율법의 완성인 사랑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개혁주의자들의 신학인데, 언뜻 들으면 맞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니 저 이근호의 주장은 그것이 아니라, 율법의 갇힌 것은 그대로 갇혀있고, 예수님이 와도 그대로 갇혀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율법보다 더 센 것에 갇히는데, 즉 십자가 안에 갇힌다는 말이다. 이 십자가가 바로 율법의 완성인데, 그래서 이 율법의 완성 안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6장에 나오는데, 즉 세상에 대해 십자가 안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도 역시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런데 이렇게 갇혀있다면 그것으로 끝인가? 그것이 아니라 어디서 뭔가를 공급받는데, 그것이 어디인가? 그 뭔가가 2장 20절 뒷부분에 나오는데,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피조물 - 창조주가 처음 만들 때에 목적이 있었다 !!

금방 자기는 사는 것이 아니라고 해놓고, 그런데 뒤에는 다시 산다고 하는 것이다. 다시 사는 것이, 분명히 갇혔는데, 이 갇힘에서 해방되는 것이 아니라, 갇혔는데 누군가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해방되면 안 되는데, 해방되면 신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인간은 피조물이란 말은, 처음 만들 때에 목적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것을 인간 자신이 만들어버리면 악마가 되는 것인데, 악마가 욕을 듣는 이유가 목적을 자기가 만들어서 그렇다는 말이다.

◈ 가롯유다가 왜 마귀인가?

가롯유다가 왜 마귀인가? 예수님을 팔아먹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기가 피조물인 주제에게 자기 목적을 자기가 만들어낸 것이 문제라는 말이다. 자기가 알아서 은 30냥에 팔고, 죽을 때도 자기가 알아서 죽었다는 것이다. 언제 예수님이 자살하라고 권유했는가? 무슨 일본의 오옴진리교도 아니고 말이다. 가룻유다는 지시고 없이 자기 목적을 자기가 만들었다는 것이다.

길가는 사람들을 붙들고 물어보면, 모두가 다 자기 목적을 자기가 만드는데, 이것은 인간이 주체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그러한데, 하지만 성경적으로 보면, 우리의 목적은 외부에서 주입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피조물인 주제에 우리가 살아가는 그 목적을 창조주가 주어야만 되는 것이지, 자기가 목적을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격도 없는데 말이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억울해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억울해하면서 살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억울하다' 라는 것은, 자기 목적을 자기가 만들지 못할 때 적용되는 말인데, 하지만 처음부터 인간에게는 자기 목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지옥에 갈 놈들은 그냥 놔두고, 천국으로 갈 놈들에게는, 그들이 자기 인생의 목적을 만들지 않도록 아예 모두 다 박탈시키기 위해서 계속해서 갇힌 꼴을 유지시켜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갇힌 꼴에다 우리는 계속해서 갇혀있게 되는데, 그런데 외부에서 목적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자기 아들이 말이다. 이렇게 주어지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보면,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고후 5:15)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 갇혀있음 - 다른 누구를 위해서 살라 !!

여기에 보면 분명하게 갇혀있음이 드러나는데, 그것을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라고 했는데, 즉 자기 인생의 목적이 완전히 다 박탈당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애써 외면하려고 하는데, 왜냐하면, 교회에 나올 때 나름대로 자기 목적을 가지고 오는데, 그런데 그런 목적을 완전히 다 무시하고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살라고 하면, 즉 예수만 바라보고 살라고 하면 누가 좋아하겠는가? 아니, 예수만 바라보면 밥이 나오는가, 떡이 나오는가?

◈ 성도의 자유 - 차원이 달라졌다 !!

왜 이런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고 하니까, 강의 처음에도 말했지만,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는 우리 육체가 요구하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히 죽은 놈으로 간주하고, 거기에다가 다른 목적을 집어넣는데, 그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라는 것이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그러면 인간의 자유는 어떻게 되는가? 자유는 없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자유는, "더 이상 저쪽 편은 아니다" 라는 차원에서 자유라는 것이다. 이렇게 저쪽에서 빠져 나왔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이지, 그 어떤 인간도 자기의 독자적인 목적을 만들어낸다는 것은, 그것은 처음부터 성경에서 용납한 적이 결코 없다는 것이다.

◈ 주님의 별난 취미 - 매일 언약으로 자기 백성 묵사발 만들기 !!

그러니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그야말로 물위를 걷는 것보다 더 큰 기적인데, 하나님은 이렇게 자기 택한 자들을 매일 같이 그야말로 병신쪼다로 만들어놓는다는 것이다. 이것을 언약으로 묵사발을 만든다고 하는데, 즉 "니가 언제 나를 위해서 산 적이 있는가?" 라고 하면서, 오전에도, 오후에도, 심지어 한 밤중에 마누라하고 사랑(?)을 나누는데도 찾아와서 마구 묵사발을 만들어놓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당하면서 살아갈 때 그 사람이 바로 언약의 사람이고, 누군가가 방문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즉 주님께서 그 사람을 찾아왔기 때문에 그 사람은 박살이 난다는 말이다. 인간은 당당한 주체가 있기에 결코 스스로 자기 자신을 박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마 고린도후서 5장 15절이 가장 인간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씀이지 싶다는 것이다.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라는 것보다 더 듣기 싫은 말이 어디 있겠는가?

◈ 성도에게는 매일 같이 얻어맞음이 선물로 !!

예수 이름으로 해방되었다면, 이제 갇혔다는 것에서 풀린 것이니 자유를 달라고 하는 것이 개혁주의인데, 그래서 자유의지가 나오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신학은 전혀 성경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의하면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이다. 성도는 끝까지 갇히고, 매일 같이 얻어맞으면서,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놀랍게도 그것을 은혜라고 했는데, 진작 지옥으로 갈 놈이 이제 은혜에게 얻어맞으니, 세상에 이런 복이 또 있느냐는 것이다. 주님에게 매일 같이 얻어맞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사생아가 아니니, 남의 자식이 아니니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이러한 자체를 두고 완성으로 본다는 것이다.

◈ 다시, "믿음의 때까지 갇혔다" 라는 의미는?

다시 정리하면, "믿음의 때까지 갇혔다" 라는 것은, 믿음의 때까지만 갇혔다가 그 다음부터는 해방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믿음의 때' 라는 새로운 지층 안에 새롭게 갇히는 꼴로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때까지' 라는 것은 다른 지층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율법에 갇힌 층은 벗어버리고 새로운 다른 층으로 말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층으로 갈 때는 그냥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늘 죽이면서 믿음의 세계에서 살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이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사는 것이지, 혼자서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30페이지를 보자.

** 어느 날 부자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온다. 그는 선함이 곧 영생을 제공받는 근거가 된다고 보았다. 예수님은 그 선함의 규정에서 자신을 한 발자국 물러서시고 그 자리에 거룩한 율법을 두어 그 청년에게 다가간다. 그래서 청년은 자신이 선함을 위해 그동안 애써왔음을 강변한다.

예수님을 찾아온 이 부자청년은 거룩한 율법을 객체로 보았는데, 이렇게 율법을 지키는 주체가 있고, 또한 이렇게 주체가 형성되었다는 말은 반드시 객체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더 어렵게 말하자면, 주체, 즉 자아라는 것은 반드시 분리가 있어야 형성이 된다는 것이다.

◈ 내가 바지에 싼 똥 - 너무 아까버 !!

아침부터 이런 이야기를 해서 좀 그런데, 예를 들어서, 어린아이가 똥을 누면 그 똥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데, 그것은 그 안에 있는 똥이 밖으로 나와도 그 똥을 자기와 한 몸으로 여긴다는 것이다. 물론 어린아이들이 말이다. 혹시 여러분은 그런 느낌이 없는가? "아, 아까워" 라는 말이다. 라캉은 이것을 상상적 단계라고 하는데, 즉 동일시하는 단계 말이다.

아이가 엄마와 떨어지지 않는 이유가 엄마와 하나가 되기 때문인데, 그러면 주체(자아)는 언제 생기는가? 드디어 그 엄마와 분리되면서 독자적인 개념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때 자아가 처음 생기는데, 그러니 이렇게 자아가 있고 주체가 있다는 것은, 이제는 뭔가 '나'는 원래 자리에서부터 떨어져 나간 입장임을 고려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일단 떨어져 나온 자아는 재결합이 꽝 !!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아가 그렇게 떨어져나간 입장에서 다시 결합되기는 완전히 끝장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어느 놈도 자기 자아를 부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 자아가 완전히 떨어져 나왔기 때문에, 그 자아가 스스로 자아임을 포기하고서 다시 결합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 자기와 나는 하나야 !!

(지금부터 3,4초간 12세 이하는 관람불가) 물론 가끔씩 그 흔적은 남아있는데, 남녀간에 잠자리에서 사랑을 나눌 때, 그때 그 순간이 너무나도 황홀하고 사랑스러울 때, 그런 느낌이 올 때 약 3,4초 정도는 "아앙, 자기와 나는 영원토록 하나야" 라고 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끝나고 나면 다시 원상복귀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니는 니고, 나는 나다" 라고 하면서 말이다. (특히 대부분의 남자들은 돌아누워 잠이 들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에게 자아가 있는 이상, 이 자아를 자기 스스로 부인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데, 자아의 형성과정 때문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바로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없음을 아시고 요구했다는 말이다. 겸손하다고 될 문제가 아니라, 그것은 아예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데카르트가 말하기를, 만약에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냐는 것이다. 즉 '나'가 증식되는데, 이것을 '순수자아', 혹은 '순수인격'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 어려운 말인데, 이것을 좀 더 설명해보면, 인격에는 순수인격이 있고 그냥 인격이 있는데, 이 인격은 남의 인식을 약간 짊어지고 있기에 남을 배려하는 인격인데, 그러면 순수인격은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다 떨어지고 없을 때가 순수인격이라는 것이다.

◈ 순수인격에 대해서 !!

예를 들어서, 여기 성경책을 천 목사님에게 생일이라서 줄 때는, 즉 "목사님, 생일을 축합니다" 라고 하면서 성경책을 준다면, 책을 주는 것인가? 아니면 생일을 축하는 것을 담아서 주는 것인가? 만약 후자라고 한다면 이것은 순수성경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일을 축하하는 것이 들어있는데, 이것을 두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교환' 이라고 하지 않고, '증여'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자본주의 - 증여와 교환의 대립에서 발생 !!

자본주의가 증여와 교환의 대립에서 발생하는데, 이것은 나중에 자본주의를 다룰 때 자세히 하기로 하고, 아무튼 이것을 증여라고 하는데, 자기가 싫어하는 사람에게 줄 때는 돈을 받고 주는데, 그것은 그 가치가 인격적인 것이 빠져버리면 숫자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성경책을 예로 들면, 그 성경책이 물(物)로 바뀐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물로 변하게 되면 그 교환가치가 양적으로 되어서, 즉 돈으로 매겨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3000원 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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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 8,422건 중 31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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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