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 21: 6- 8 (불신자의 운명)
계 21: 6- 8 (불신자의 운명)
이름 : 우리교회(IP:220.81.176.141)
본문: 요한계시록 21장 6- 8절
제목: 불신자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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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07-12-16 13:17
불신자의 운명
2007년 12월 16일 본문 말씀: 요한계시록 21:6-8
(계 21: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계 21: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계 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성경에 나와 있는 표현들은 세상 사람 모두다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이에게는, 왜 신께서 이런 표현으로만 이야기하는지 짜증이 날만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의 신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이런 표현들에 대해서 찬동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참예한다’라는 하나님의 생각에 대해서 “참 잘 하셨습니다. 제대로 일처리 하셨습니다”고 고마움을 표하게 됩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다 이루었다’에 대해서 성도는 너무나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하지만 불신자들은 “나는 아직 이루고 싶은 남아 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을 거부한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왜 불신자들이 이런 식으로 나올까요? 그것은 그들이 ‘나중’이라는 지점에 서서 세상을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끝’의 서서 세상을 못 보기 때문입니다. ‘끝’이란 ‘사건 종결’을 나타냅니다. 끝에 서서 세상을 보게 되면 세상이 완료된 상황으로서 새롭게 보이게 됩니다. 완료된 상황이라면 미완료란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에게 있어 미완료란 곧 불안이요 두려움으로 전환됩니다. “열심히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목표치에 도달될 수 없다”라는 정신은 항상 불안과 두려움을 야기시킵니다.
우리 인간은 매일같이 불안과 두려움을 휩싸여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서로 힘들고 아프게 살아갑니다. 하루하루 삶에서 안 힘들고 안 아프게 살아가는 법이 없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신이나 종교라는 것도 이런 아프고 힘든 삶을 보상해주고 위로해주는 신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성도들만 알고 있는 ‘다 이루었다’의 상황이 찾아오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두려워하는 자’는 불과 유황이 타는 못에 들어가게 됩니다. 심판입니다. 무서운 심판입니다. 왜 이들이 심판을 받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지옥 가는 항목에 해당하는 자들의 공통점은 그들 곁에 누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믿을 자가 그림자처럼 늘 따라 붙어있지 않습니다. 항상 혼자입니다. 자기 인생을 홀로 꾸려나갑니다.
그러니 끝에 서서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요 처음 지점에서 세상을 출발하는 것도 아니요, 어디로 왔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면서 하여튼 가는데까지 움직여 보는 것이 전부입니다. 로마서 6:23에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이들 불신자들은 인생이 고달프고 힘들면 그만 “약먹고 칵 죽어버리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사망 속에는 첫째 사망이 있고 둘째 사망이 있다는 점을 모릅니다. 숨이 끊어지는 것이 첫째 사망이라면 둘째 사망은 죽는 이도 없고 죽는 일도 없는 상황을 말합니다. 영원히 살아서 영원히 저주받아야 됩니다. 지옥은 결핍이 만연한 곳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지옥 광경이 나옵니다.
지옥에 간 부자가 한 처신을 보세요. 그는 이미 천국에 올라간 거지 나사로에게 심부름 시킵니다. 그렇게 살아있을 때, 그렇게 흔해 빠진 물이 전혀 없어 나사로 편에 손가락으로 찍은 물 방울만 있어도 살겠다는 겁니다. 지독한 결핍증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삶도 이에 못지 않습니다.
잘 사는 자나 못 사는 자나 가리지 않고 지독한 결핍증을 발휘하면서 삽니다. 아무리 가져도 또 부족한 것이 발견됩니다. 사망의 반대말이 생명이 아니라 부활인지를 생각해보세요. 부활이란 일단 먼저 죽은 적이 있다는 뜻입니다. 즉 이 땅에서 지옥 맛을 보지 못하면 부활이 주는 환희로서 감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심한 결핍에 시달리게 됩니다.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인생의 운명의 질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심판을 행사하게 됩니까? 우선 노아의 심판의 경우부터 봅시다. 노아가 방주를 두딱두딱 만들고 있을 시간에도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를 되풀이 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어느 누구도 노아가 왜 방주라는 물건을 만드는 이유를 몰랐습니다.
즉 그들은 세상 중간을 달리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노아는 세상 끝, 즉 물심판의 시점에서 세상을 다시 보기에 참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로서 하나님의 심판이란 하나님의 ‘다 이루심’의 활동을 모독하고 무시하는 자들에 대하여 현실의 진면목을 알리기 위한 조치로서 취해지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이 세상의 일 가운데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말고 다른 일이 있는가 말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나 말씀의 관여없이 자기 스스로의 능력과 재능으로 살아보려고 그렇게들 애쓰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은 이 세상 현실과 전혀 무관한 일입니다. 즉 그들은 지옥이 있다는 이 참다운 현실에 부딪쳐버리게 되는 겁니다. 비로소 그 지옥에서 그들은 자신의 환상이 깨어짐을 체험할 것입니다.
방주를 예비한 가운데 물심판이 오므로서 졸지에 그 당시 세상에 어항이 되고 말았습니다. 물고기만 노뉘는 어항말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방주로서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방주는 곧 십자가 사건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통해서 물심판을 내다보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앞으로의 세상이 어떻게 심판될 것인가를 내다 볼 수 있습니까?
만약 요즈음도 방주라면 공간적으로 자기 몸을 이동시켜 방주라는 부동산 속으로 집어넣으면 그만일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 그 어느 구석이라든지 그 어느 인간이라도 자력으로 구원될 방도가 없음을 말해줍니다. 즉 십자가 능력이 다가오는 자만 구원되지 반대로 자력으로 구원되려고 하는 모든 시도는 다 무용지물임을 알려주는 것이 십자가 복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값없이 주는 생명수’ 표현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십자가가 다가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냥 귀에다 대고 “용서할께”하는 식으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에다 ‘어린 양의 피’를 발라서 이 피흘리신 분을 찬미하겠다는 목적으로 구원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과 악이라는 윤리적인 갈등 속에서 두려움과 불안에 떠는 것이 성도가 아니라 이 거저 주시는 피의 약속에 대해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두려움이 자력으로 설칠 때 주어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