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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안산 12월 14일 고린도후서 6장강의고린도후서

안산 12월 14일 고린도후서 6장

이름 : 우리교회(IP:125.190.2.61)

071214 고후6장 탈출과 하나님의 일

우리교회(IP:125.♡.2.61)

07-12-15 12:24

박온정(IP:123.♡.206.192)

11-01-01 00:42

안산071214고후6장‘탈출과 하나님의 일’ / 이근호 목사

『고후6: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

오늘은 고린도후서 6장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6장에 제일 먼저 보면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대목이 나오죠. 사도의 특징은 사람하고 일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사람과 일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일거리 없다,’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이 사도는 하나님과 일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하시는 그것을 그대로 이야기해야 될 중차대한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 일이 뭐냐, 6장에 보니까 『내가 은혜 베풀 때 너를 덮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도다.』이사야49장8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내가 은혜 베풀 때 너를 덮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이래 돼있는데, 여기에 보면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의 일이 ‘은혜 베풀 때 너를 덮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여기 두 가지가 나오죠? 하나는 ‘은혜 베풀 때’ 나오고 ‘구원의 때’가 나오죠? 은혜란 말은 다른 말로 하면 ‘구출’이거든요.

‘구출’이니까 어디서 탈출한다. ‘탈출’개념 아닙니까? 탈출하는데 그 탈출은 인간의 힘이 아니고 은혜 베풂으로서 구출되는, 그런 때를 다른 사람은 안하는데 누가 해야 되느냐, 바로 사도나 성도가 이 일을 하게 된다 이 말입니다. 누구와 함께? 하나님과 함께. 이 이야기가 그렇게 되요. 다시 한 번,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데 그 일이 무슨 일이냐 하면, 우선 구출돼야 하는 그런 때고 은혜 베풂을 입은 자만이 구출된다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는, 그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사도가 되는 겁니다.

그 말은 무슨 뜻이냐면 사람과 일 않는다는 말입니다. 세상 모든 일이 사람과 관계된 일이잖아요. 사람하고 관계한다 말이죠. 그런데 애를 엄마가 맡기는데 두 시간 봐달라면 안 봐주지요? (?) 사람과 관계하는데 그러면 애를 두 시간 봐줬다 안 봐줬다 상관없이 봐주든 안 봐주든 때는 이미 침범됐는데 때는 무슨 때입니까? 구출돼야만 하는 때고, 어떤 형편에 있든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상관없이 어떤 경우에 상관없이 하나님과 함께 하면 이 세상 사람과 상대 않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든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 때 이야기해야 됩니다. 그러한 사도 일이 고린도후서 이야기가 시작이 되는 겁니다.

이 점을 우리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예레미야에 한번 가봅시다. 예레미야 5장1절에 보면 1057페이지에 있죠?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개정』이래돼있죠? 이 말은 뭐냐, 한 사람도 하나님의 공의와 진리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는 말입니다.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예레미야 선지자가 지금 증거 해야 되는 겁니다. 이 세상의 형편, 이 세상이 구출되지 아니하면 희망이 없는, 그러한 세계라는 것을 누가 전한다는 말이죠? 선지자가,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이 해야 된다 그런 말이죠. 그 말은 뭐냐, 결국은 선지자와 성도가 살아가는 것은 사람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상대하는 것이다. 아까 고린도후서6장1절 그 말씀 그대로죠? 예레미야5장12절에 보면 『그들이 여호와를 인정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여호와께서는 계시지 아니하니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할 것이요 우리가 칼과 기근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개정 』그렇게 돼있습니다.

여호와를 인정하지 아니한 때. 이 때라하는 것은 구원받은 때인데 이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여호와를 인정하지 아니한 때’ 여호와를 인정하지 아니한 때라는 것은 ‘여호와의 약속’도 인정하지 않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구원한다든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 하신다든 지, 그런 이야기도 일체 인정하지 않는 그 때입니다. ‘이때’가 그 이때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신다. 재앙이 임한다. 그걸 예레미야보고 이야기하라는 거예요.

예레미야는 만약에 사람과 상대하면요, 같은 사람과 서로 좋게 지내고 웃으면서 지내고 반갑게 악수하고, 격려할 것은 격려하고, 가르칠 것은 가르치고 이러면 문제없는데,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사람과 친하게 지낸다든지 정답게 지낸다든지 그런 여지를 일체 허용을 않는다 말입니다. 이걸 어렵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예레미야가 여기 있다면 에스겔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레미야 속에 하나님의 심판이 먼저 앞당겨서 체험케 하죠.

체험케 하는데 이 체험이 무슨 체험이냐, 이게 바로 심판의 체험이죠. 이런 점이 좀 어려워요. 구약의 선지서하면서 선지자들 속에 심판이 앞당겨 온다는 이점이 굉장히 어려워요. 왜냐면 우리는 여기 있다고 합시다. 우리가 선지자를 이해할 때 ‘아, 하나님 일을 하는구나, 참 잘한다. 멋지다.’ 이런 쪽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우리가 선지자를 이해하려면 선지자가 먼저 하나님의 심판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선지자다 말이죠.

그러니까, 선지자를 이해하려면 우리도 똑같이 하나님의 심판 체험이 있는 사람만이 선지자를 이해를 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 심판체험은 어디서 온다했습니까? 다시 얘기하죠. 심판체험은 무엇 때문에 온다했어요? 이때가 어떤 때라고요? 두 가지, 뭡니까. 여호와가 계시지 아니한 자(렘5:12) 두 번째, 여호와가 계시지 않으니까 여호와의 뭐가 없어요? 여호와의 약속도 일체 인정하지 않는 그런 때에 대해서 하나님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방치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한다? 하나님께서 심판이 임하죠.

그 심판이 앞당겨서 누구한테 임한다? 예레미야한테 그대로 온다 이 말이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무시할 때 백퍼센트 당하는 그 심판을 예레미야나 에스겔이 먼저 당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예레미야나 에스겔이요, 목회한답시고 사람과 좋게 대화하고 그럴 입장이 아니에요. 사람자체가 여호와를 무시하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의사소통이 안 되니까 이게 치열하게 뭐냐, ‘외로움’이죠. 외로움. 처절한 외로움이죠. 무진장 외로워야 되고 한없이 외로워야 되요. 사람과 친해서 어떻게 해보겠다는 노림수는 애시당초 마음먹지도 말아야 되요. 생각하지도 말아야 된다 말이죠. 이런 외로움을 갖고 예레미야가 걸어가 줘야 이때 여호와를 인정하지 않고 여호와의 약속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이 누구를 확신해서 공격하겠습니까. 이건 보나마나 선지자를 공격하겠죠?

선지자를 공격하니까 이것이 선지자에게 무슨 체험이냐면 일종의 지옥체험이죠. 무지무지한 외로움이라든지 슬픔이라든지 아픔이라든지 저주스러움을 그 당시 온 몸으로 다 받아내는 겁니다. 그 사람들과 좋게 지낼 수가 없어요. 그런 것을 선지자에게 허용한 적이 없습니다. 어쨌든 오늘 고린도후서6장 하는데, 고린도후서6장에 제일 먼저 나온 게 뭐였다? 다시 한 번 봅시다. 고린도후서6장. 우리가 누구와 함께?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그걸로 족하답니다. 그걸로.

그러니까 사람하고 일할 생각하지마란 말이죠. 사도는 사람과 일할 생각 않습니다. 하나님과 일하기 때문에 그 일한 내용이 뭐냐, 바로 지금은 이때에서부터 구출되어야 되고, 무조건 구출되어야 되고 구출될 때는 어떻게 구출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이 세상에서 구출이 가능하다 이 말입니다. 2절에 보니까「…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결국 이 말은 뭡니까, 이 세상 사람들에게 기대는 이제는 그만해라, 이 말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기대감이라든지, 이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 같은 것은 애초부터 버려야 된다는 말입니다. 아예 버리고, 사람과 어떻게 해보려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체로 족한 줄 알아라 말이죠. 딴 건 더 원하지 말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깐, 그 다음 3절부터 4절 이해가 되죠. 뭐냐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경우라도 ‘사람 때문에 속상합니다.’ 라는 소리를 할 수가 없죠. 이게 사도의 뭐가 되냐면, ‘사도의 자유’입니다.

어떤 경우라도 사람 때문에 당한다는 그런 핑계를 하지마라, 말이죠. ‘저 사람 못돼서 일 못했습니다. 저 사람이 방해 놔서 일 못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마라, 이 말이죠. 고린도전서 6장12절 한번 봅시다.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하죠? 『고전12:12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이거 두 자로 얘기하면 뭡니까? ‘자유’죠.

내가 무슨 일을 해도 제재를 받지 아니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지금 뭘 해도 괜찮은 그런 자유를 갖고 있다. 물론 모두 유익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행사할 수 있는 자유는 있다 이 말이죠. 이것은 뭐냐 하면, 이것을 설명하려면, 왜 사도가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할 수 있느냐 하면 바로 고린도후서6장1절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과는 상대를 안 해요. 사람하고 이야기 안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시를 누구한테 받아요? 지시를 위로부터 받고 있기 때문에 사람에게 지시를 받을 이유는 없죠. 사도에 의하면.

그래서 모든 것이 가하고 어떤 사람으로 제재를 받을 필요가 없지요. 그러면 이 악한 세대에 그리 산다는 것은 곧 무엇을 자초하는 겁니까? 이것은 사람들로부터 욕설과 모욕과 모멸과 방해를 자초하는 일이 되겠죠. 그렇잖습니까? 다른 사람은 하나님께 지시를 안 받는데 혼자 하나님께 지시받고 내 모든 것이 가하다, 이래 되니까 결국 이것은 뭡니까, 다른 사람에게 자초해서 따돌림 당하겠지요. 따돌림 당하는 그 모습이 바로 지금 보려고 하는 고린도후서 6장 4,5,6,7절에 나오는 겁니다.

‘모든 것이 가하다’는 그 말이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뭐든지 해도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고, 그런 즐거움이나 이익을 얻기 위해서 그런 소리를 한 게 아니라, 어쨌든 모든 것이 가하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으로서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일이 발생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가하다는 것은 함부로 할 수 없는데 사도가 그런 소리를 했다는 말은 결국,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이죠. 이 세상에는 살아도.

사람들에게 시달릴 때는 호되게 시달리는, 그에게 그런 인생이 남았습니다. 그게 뭐냐,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처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란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이거요. 여기에 예레미야 얘기 다시 할게요. 예레미야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아서 어떤 시대를 얘기했습니까? 복습하는 의미에서 다시 한 번 해봅시다. 예레미야 시대는 어떤 시대였습니까? ‘여호와는 없다’ 그 다음에 여호와가 없으니까 뭐가 없습니까? ‘하나님의 약속도 없다’

심판이고 뭐고, 곧 끝난다는 말도 없고, ‘여호와는 없다.’ ‘여호와 약속도 없는’ 시대에 그런 때에 그는 외롭게 뭘 하냐면 여호와의 약속을 증거(증명, 입증)하는 사람으로 예레미야가 살아가니까 결국 예레미야는 누구와 의논하지 않아요? 자기 가족과도 의논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살아라, 하는 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유브라데로 가서 허리끈 풀어라,”: “예, 풀었습니다.” “허리끈 풀어 유브라데 강가에 묻어라,” “예, 묻었습니다.” “묻은 것 다시 파봐라,” “파 보았습니다.” “어떻게 되었느냐?” “썩었습니다.”(렘13장)

이 백성은 썩으리라. 이런 것. 누구한테 의논해가지고 ‘허리끈 묻어볼까?’ 이렇게 한 적 없어요. 그냥 위에서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면 되요. 그런데 말은 쉬워요. 주님이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면 되는데 뭐는 각오해야 됩니까? ‘너는 이제 죽었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거, 세상 사람들로부터 환영받는다는 것은 일체 있을 수가 없죠. 하나님의 지옥체험을 본인이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때나 이때나 구원받아야만 하는, 구출돼야만 하는 데에 우리도 현재 놓였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이나 선지자는 하나님과 의논한다면 이때에 속한 사람은 누구와 의논합니까, 인간들끼리 의논하겠죠. 모든 것을 인간들끼리 숙의하고 생각하고 협상하고 힘을 모으고 힘 다지고, 전부 다 인간들끼리 하죠. 여기에 누가 개입하면 안 됩니까? 하나님의 약속이라든지 하나님의 뜻이 개입되면 안 되겠지요? 그리되면 구출되는 의미가 없습니까. 구출이 뭐예요? 구출이란 이쪽 동네에서 저쪽 동네로 나가는 게 구출이잖아요.

지금 사도나 예레미야를 구출해놓고 다시 집어넣었다 이 말이죠. 구출해놓고 다시 집어넣어요. 그냥 하늘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끄집어내면 끄집어낸 채 들어가니깐, 사도는 말하기를 ‘내게 모든 것이 가하다!’ 이미 구출된 입장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가하다. 모든 것이 가한 이상 뭐는 각오해야 된다? 벌떼 같이. 만약에 위통 벗고 몸에 꿀 발라놓고 누워있으면 개미란 개미는 다 불러 모으죠. 바로 그 일을 예레미야나 사도가 해야 됩니다. 온갖 것들이 다 뜯어먹죠.

왜 우리들은 사람들과 의논하는지, 무슨 통뼈라고 우리들과 의논하지 않느냐! 이러한 비난을 개미한테 뜯기듯이 다 뜯겨야 됩니다. 뜯기는 건 무엇을 뜯깁니까, 뜯기는 대목 다시 한 번 봅시다. 뜯기는 대목이 뭡니까? 환난이나 궁핍이나 곤란이나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한 것. 이거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죠.

얼마 전에 티브이에 어떤 아주머니가 나오는데 내 평생 그렇게 야윈 아주머니는 첨 봤어요. 몸무게가 24킬로그램이에요. 욥인 줄 알았어요. 욥. 가죽과 뼈만 남은 욥이라고 하잖아요. 같이 보다가 ‘야, 저기 욥이다 욥’ 욥 첨 봤어요. 완전 미라에요. 사도바울도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못지않잖아요. 스데반집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그게 뭐냐면 하나의 징후예요. 하나의 징조인데 사도에게 있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탈출해야 될 세상이지 눌러 앉을 세상은 아니라는 것을 그런 사람을 통해서 확실하게 보여주는 겁니다.

탈출해야 될 세상이지 그냥 눌러앉을 세상은 아니다 말이죠. 그런데 탈출이 만만치 않습니다. 왜 탈출이 만만치 않느냐면, 지금 탈출얘기 나와서 말인데, 탈출이 되려면 세상이 악한 것을 알고 이 세상을 버리든지 포기하든지 해야 탈출이 되는데 우리에게는, 우리 인간 자체에게는 탈출하고 싶어도 탈출할 수 있는 용기라든지 능력이 우리한테는 없습니다. 탈출하고 싶어도 벗어날 수가 없어요.

이걸 알아야 됩니다. 사도바울이라든가 예레미야는 뭐가 자기가 잘났다고 구원받았겠습니까, 자기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에요. ‘아, 세상 드럽다 벗어나야지,’ 기껏해야 머리 깎고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밖에 더 있습니까, 산속에 들어간다고 구원받겠습니까, 다시 할게요. 구원이라 하는 것은 고린도후서6장에 보면, 뭘 알아야 구원이냐, -오늘 제일 중요한 대목입니다.-

구원됐다는 말은 내 힘으로 안됐는데 ‘주님의 은혜의 밧줄’ 사다리 은혜에 의해서 구원됐습니다, 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그 사람이 어디에 박혀있어도 이미 구원된 사람이에요.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되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되지, ‘세상 더러워서 세상 벗어나 살아야겠다.’ 이렇게는 구원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이지, 만약에 자기 자력으로 탈출하게 되면 이렇게 궁핍과 갇힘과 매 맞음과 갇힘이 올 때 하나님께 원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탈출하려고 내가 열심히 애를 썼는데도 왜 이렇게 힘들게 합니까,’ 라고 나올 수밖에 없는데 이미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은혜가 어떤 경우라도 환난이나 궁핍이나 핍박이나 그런 경우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흐를수록 더욱더 빛이 나죠. ‘야, 내 성질 같으면 못 참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니까, 구원받았으니까 이런 환난 속에서도 내가 기뻐할 수 있다.’ 그걸 새록새록 고백할 수 있는 겁니다.

고린도후서를 보면서, 성경을 보면서 예레미야부터 신구약 전체를 통해 봐야 되지 이 한 대목 봐가지고 나도 어려울 때 이겨내야지, 안 되는 거예요. ‘때’가 뭐냐? 시간관념부터 쭉 따져봐서 해야 됩니다. 아이도 나갔으니까(강의에 동석한 아이) 어려운 거 ‘때’에 대해서 다시 해봅시다.

‘시간’이라 하는 것은 없습니다! 시간이라 하는 것은, 피아노가 여기 있잖아요. 피아노 같으면 여기 있는지 알아요. 피아노 같으면 여기 있다는 걸 아는데 ‘시간’은 어디 있습니까? 머리, 두뇌 안에 있습니까, 심장에 있습니까,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시간은 어디에도 없어요. 없으면서 시간이라는 말을 해요. 누가 합니까, 원숭이가 합니까, 개가 합니까, 시간은 어디 있느냐 하면, 시간은 ‘나’라는 존재감을 느낄 때 시간은 같이 느껴지는 겁니다.

시간은 있어요. 어디 있느냐, 나 존재를 느끼는 그 순간에 시간은 느껴지는 겁니다. 느껴지는데, 시간이라는 것이 ‘빨갛다’ ‘파랗다’ ‘노랗다’ 이렇게 느껴지는 게 아니고 시간을 물건처럼 ‘아, 시간 빨갛네?’ ‘시간 노랗네?’ 이런 식으로 시간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은 ‘벌써 내가 있다.’ ‘아직 내가 있지 않다’ ‘이미 나는 있다’ 이 세 가지를 통해서 시간을 느끼게 됩니다. 어렵다 했죠? ‘성경에 안 나오는 이야기를 왜 하십니까,’ 할 텐데. 다시 해봅시다.

시간은 어디 있다했습니까? 시간은 어떤 존재가 다가오면 시간도 함께 다가오죠? 그죠?

예를 들어서, ‘김전도사님 전에 봤던 김전도사님 맞습니다.’ 할 때 그때 나는 뭘 느끼느냐면 과거의 김전도사님과 지금 김전도사님을 비교할 수 있죠? 벌써 두 가지 나왔죠? ‘과거’와 ‘지금’ 존재를 느낄 때 시간도 같이 따라오는데, 이 철학적인 얘기를 제가 왜 하느냐 하면, 지금 문제는 우리 얘기가 아니고 누구이야기냐면, 메시야가 오신다는 겁니다. 메시야가.

메시야. 예수님이 오시게 되면 뭘 가지고 오시느냐, 그냥 오시면 되는데 뭘 가지고 옵니까, 시간을 가지고 오신다는 게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요. 시간을 가지고 온다는 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냐면, 「옛날부터 약속한 내가 이미 왔고, 구름타고 다시 오리라.」 했거든요. 「전에 왔었고.」 과거죠? 한번 왔잖아요.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시잖아요. 현재 아닙니까, 또 뭐라고요? 「장차 오실 것이라.」미래에 오실 것이라고 얘기했다 말이죠.

우리가 생각하는, -예수님 생각하지 않고 예수님 없애버리고.- ‘이때다’ 하는 것은 무슨 때냐 하면, 다시 얘기해서, 이스라엘의 이때는 어떤 때입니까, ‘여화와가 없는 때’고 또 무슨 때다? 여화와가 없는 때니까 ‘여호와의 약속’이 없는 때죠? 이때 같으면 세상 사람들은 누구만 의존합니까? 우리끼리. 우리 인간들끼리 얘기하죠? 인간들끼리 얘기하니까 인간들이 생각하는 시간은 뭐냐, 존재는 뭐냐, 옛날에 나는 이런 것을 그리워했었는데 지금 나는 이렇게 되었고, 앞으로 나는 이렇게 될 거야, 라는 게 나오죠? 왜 나옵니까,

‘나’라는 존재가 있을 때는 ‘과거’ ‘현재’ ‘미래’를 다 생각하잖아요. ‘아, 과거의 나는 서른 살 때 아파트 사고 싶어 했는데 지금 아파트 샀구나, 나는 40되면 아파트보다 더 큰 큰 아파트 사야쥐~, 이건 뭐예요? 과거에서 보는 기대가 있고, 그 기대가 앞으로 장차 우리의 소망을 갖죠? 그거는 바로 예수님이 안 계신 이상, 예수님이 안 계신 우리끼리 있을 때, 우리끼리 얘기한 거잖아요.

그냥 교회서 사람들 만났다 하면 하는 얘기가 뭡니까, 예수님 약속이고 뭐고 다 날아가 버리고 ‘우리끼리’이야기 하잖아요. 이게 대안학교죠. 대안학교에서 꿈이 있잖아요. 목사들과 선생님들이 가르치는 게 뭐냐, ‘너는 꿈을 꾸어라’ ‘좌절하지 말고 희망이 있어’ ‘크게 될 미래가 있어’ ‘잘 되는 사람 많아’ 이렇게 희망을 주잖아요. 그럴 때 애들이 납득이 되죠. ‘그래, 나도 열심히 공부해가지고 반듯한 사회인이 돼야지, 보란 듯이 출세해야지’ 뭔가 희망을 갖죠? -요새 애들 희망 갖기는 갖습니까?-

그때 애들이 의사소통이 되고 납득이 되죠. 지금 제 말이 납득됩니까? 예수님 이야기 다 빼버리고 우리끼리 얘기할 때도 이미, 우리는 희망을 품고 꿈을 가지고 뭘 하면 된다, 출세한다, 뭐가 있을 것 아니겠습니까. 인간들끼리 모이면 뭘 가지고 모입니까. 자신의 뒤에다 이런 소망과 과거에 나는, 과거도 끌고 와요. ‘내가 과거에 엄마 없이…나는 여자가 싫어’ 이미 이것이 남아 있잖아요. 이거 어려운데 한 번 더 해볼까요? 이거 어려운데…

과거라는 것이요, 과거라는 것이 지금 되면 과거는 없는 거예요. 과거는 없어지고 뭐만 남았어요? 과거에 있었던 것이 우리 밑에 들어와요. 이걸 훗셀이 2차기원이라 하는데, 어려운 말은 안 하겠습니다. 과거에 술 먹은 아빠에게 맞았다 과거의 기억이 내 밑에 있지요? 이거는 현재가 만들어낸 과거지요? 음악소리를 들었습니다. ‘Let It Be Me’를 들었다 말이죠. 음악이 끝났어요. 이제 음악소리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지요? 없는데 뭐가 기억나요? 그 렛잇비미가 기억나죠?

그러면 우리 머릿속에 과거가 있잖아요. 과거가 있는 거예요. 그 과거를 기준해서 현재를 생각하는 거예요. ‘아, 그 노래 다시 한 번 듣고 싶다’ 그런데 한 시간 뒤에 다시 렛 잇 비 미가 나오니까 ‘아, 그때 그 노래!’ 다시 생각나지요? ‘야, 그 노래 듣고 싶다’ 이거 현재 아닙니까, 그 노래가 자꾸 들려오지요? 내 안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시 만나죠? 하지만 과거라 하는 것은 현재 내가 만든 과거고, 미래라 하는 것은 현재 내가 그리워하는 미래가 되겠지요?

그런데 현재라는 것은 누가 만들어요? 과거가 누적돼서 현재가 되요. 과거 없는 현재가 어디 있어요. 쌓여져 가는데. 어제 없는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없잖아요. 어제 때문에 내가 있잖아요. 두 시간 전의 나 때문에 두 시간 후에 내가 있잖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맞죠? 그러니까 이게 뭐냐 하면, 사람이 올 때 뭘 몰고 온다? 자기 나름대로의 남과 차이나는 과거의 상처를, 상처가 됐든 화려함이 됐든 자기 나름대로 현재가 있든 자기 나름대로의 미래가 있을 것 아닙니까, 이걸 모아가지고 누굴 만나요? 똑같은 인간들을 만나서 얘기하고 서로 의사소통이 된다 말이죠.

그러면 거기서 만들어내는 게 뭐냐 하면, 그게 바로 종교가 되는 겁니다. 종교. 메시야가 올 걸. 메시야 오면 나는 구원받을 걸. 이건 뭡니까, 그게 종교죠 종교. 이제 제 말의 취지를 아시겠습니까? 이게 교회니까 다시 말해서 이단입니다. 그거는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복음이 없는 교회 다니지 마세요. 해도 계속 다녀요. 왜? 과거에 돈 퍼 넣는 게 있어가지고. 떠나기가 뭣하잖아요. 왜냐면 자기의 과거의 추억들이 있기 때문에. (장로, 권사 되려고 투자한 것도 있고-녹취자) 집사님들이 자기 친구고 동창생이고 그런 사람들이니까.

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예레미야가 지금 누구를 만납니까, 예레미야는 누구 지시 받아요? 하나님 지시받죠. 그러면 뭐가 날아와 버려요? 사람들이 몰고 오는 시간개념이 이걸 완전히 거부해버리죠. 거부하니까 예레미야에게 동창생이란 의미가 없어요. 가족이라는 의미가 없어요. 그저 지시받고 살아가는 거예요. 지시 받고.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의 종교라는 것을 분해해보면 뭐냐면, 과거에 있었던 자신의 체험이 담겨있어요 종교 안에. 그리고 미래로부터 자기의 포부라든지 소망, 그것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자기만의 구원이죠. 자기만의 구원.

그러니까 이 종교는 뭐냐 하면, 자기로부터의 구원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지요! 안 되잖아요! 예를 들어, ‘나는 저 피아노의자에 앉고 싶다.’ 하고 앉는 것 이거는 종교예요. 이거는 종교라고. 그런데 피아노 의자가 와가지고 내 뒤통수 칠 때, 이게 복음이다 이 말이죠.

-이 부분 어려우니까 다시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시간이 어디에 있다했습니까, 시간은 어디에도 없어요. 그런데 내가 펄럭이면서 움직일 때마다 뭘 느낀다? 시간 없이 움직이는 법이 없어요. 항상 시간과 동반해서 움직이는데 어떻게 움직이는가, ‘어제는 이런 계획이었는데 오늘 계획이 미달됐네,’ 벌써 두 개죠? 어제는 이런 계획을 세웠는데 오늘은 계획이 미달됐잖아요. 벌써 뭘 생각해요? ‘과거’ 떴지요? 오늘은, ‘현재’ 떴지요? 그다음 내일은 잘해야지. ‘미래’ 떴지요? 시간은 없는데 내가 펄럭이면서 움직이니깐 시간이 펄펄펄 내 몸에서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러니 인간들과 인간이 만나면 무엇을 만나겠어요? 각자, 각자 노림수가 있겠지요. 사람마다 과거의 체험이 다 다르잖아요. 너는 내 과거의 등 뒤에서 소망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 그 사람을 이용하지만, 그 사람이 나를 만나라 때는 그 사람의 어제를 품고 달성하기 위해서 나를 만나는 거예요. 어쨌든 간에 만나는 거죠. 만나면 각자, 각자 이용하죠. 각자, 각자 이용하면서 각자, 각자 뭘 냅니까, 자기의 시간의 소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서로 부대끼죠. 이게 뭐냐,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라 했죠? 그래서 선지자는 누굴 안 만난다? 사람에게 의논하지도 않고 누구로부터 제재를 받을 필요가 없다. 왜? 하나님과 함께 일하기 때문에.

그래서 선지자 같은 경우에는 자기 시간대가 아니고 누구시간대입니까? 예수님의 시간대와 만나요. 예수님을 만날 때 예수님이 펄럭일 때마다 뭐가 나오겠습니까? 예수님의 과거 나오고, 예수님의 현재 나오고 예수님의 미래 나오겠지요. 미래 나오겠죠? 그 예수님의 과거 현재 미래가 누굴 박살낸다? 내가 갖고 있던 소박한 나의 과거 현재 미래를 박살낼 때 이게 뭐냐, 이게 바로 복음이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은혜라는 겁니다.

피아노 얘기 다시하면 ‘나는 피아노에 앉고 싶다’ ‘나는 어제부터 피아노 의자에 앉으려했다’ 과거 생겼죠? 나는 지금 움직이죠? 현재? ‘앉으련다’ 앉게 됐죠? 그러면 과거가 현재 됐죠? 또 앉기 전까지는 뭐였습니까, 나의 미래는 뭡니까, 피아노에 앉고 싶다. 이거죠? 이게 내가 갖고 있던 과거 현재 미래다 말이죠. 그런데 앉고 싶었는데 갑자기 피아노의자가 날아와 날 칠 때, 피아노 의자를 치고 붙들어야 되죠. 붙들고 물어야 되죠. ‘피아노의자! 너의 과거는 뭐고 너희 현재는 뭐고 너의 미래는 뭔가 물어야 되죠. 물어야 되면 나는 뭘 포기해야 되요. 나의 과거 나의 현재 나의 소망을 포기해야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미래가 뭡니까? 예수님의 미래는 바로 ‘재림’입니다. 예수님의 ‘현재’가 뭡니까, ‘지금 내가 보이지 않지만 너희와 함께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과거가 뭡니까, 모든 신구약이 누굴 증거 한다? 예수님을 증거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약속으로 뒷받침 해 왔다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안다면 사도바울 본인부터 일차적으로 뭘 해야 된다? 자기의 과거 자기 현재 자기 소망은 완전히 다 깨져야 되죠? 그죠? 그 깨지는 과정이 뭐다? 여기 보면 뭡니까, 환난과 궁핍과 곤란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이런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 때문에 혼쭐나는 거죠. 소박한 나의 꿈 이런 거 박살나죠. 왜, 피아노 의자가 와서 나를 쳐버립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뭐냐,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긍휼의 감화와 이것도 자기가 원한 거 아니에요! 이런 게 날아오고, 또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의의병기로 좌우하고 영광의 욕됨(?)으로 말미암아 욕되고 악한 이름으로 말미암아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우매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은 것 같으나 죽음을 당하지 아니하고 이게 누구에게 속했기 때문에 그래요?

이걸 사도바울이 살면서 예상한바 아니잖아요. 이게. ‘나 열한 시 되면 구원받아야지.’ 그런 꼼수를 안 섞지요 이거는, 쓴 적이 없다 이 말이지요. 그냥 된통으로 당하고 있는 거예요. 된통으로. 성도의 성령의 열매를 맺어도 자기가 맺고자 해서 맺는 게 아니에요.(아멘) 맺어 줘요 그게! 왜?! 피아노 의자가 날아와서 쳐버리니까!(ㅋ) 여기서 한번 정리해봅시다. 사도바울이 여기 있다면, 사도바울의 뭐가 있다? 사도바울의 과거가 있고 그 다음 뭐가 있습니까, 현재가 있고 미래가 있지요.

과거라 하는 것은, 피아노 음을 따다다다󰁟󰁕 쳤습니다. 하지만 현재가 되면 과거의 음은 없어요. 없지만 뭐가 기억 되요? 피아노음 소리가 기억되죠? 그러면 과거는 어느 밑에 들어가요? 현재 밑에 들어오죠, 사실은 과거가 아니고 현재 내가 만든 과거죠. 이걸 현존이라고 합니다. 이걸 ‘이미 있음’ ‘벌써 있음’이라 하는데 이런 어려운 용어는 쓰지 맙시다. 어쨌든 간에 내 밑에 있는 과거죠. 내 밑에 있는 과건데 현재에서 미래가 나오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 과거가 누적된 것이 현재기 때문에, 이 과거에서 밀어낸 게 미래라니까. 그럼 미래와 나의 밑에 있는 과거와 연관돼 있어요. 가고 있는 도중이 현재고요. 사람이 배고프다는 것은 왜 배고픕니까, 이미 사흘 동안 밥을 안 먹었기 때문에 배고프잖아요. 과거가 만들어서 배고픈 게 왔잖아요. 배고플 때 과거의 기초위에 뭘 합니까, ‘아, 밥 먹고 싶다’ 하니까. 밥 먹고 싶다는 미래가 어디서 나온 거예요? 배고프다는 상태에서 이 말이 나왔다 이 말이죠.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밥을 시켜 먹게 되면 뭐가 사라져버려요? ‘아, 밥 먹고 싶다’가 사라지죠. 왜 사라집니까, 밥을 먹었잖아요. 방금.

그래서 우리의 미래라는 것은 내가 만들어낸 미래가 아니고 나도 모르게 나에게 차고 들어온 과거 체험들이 쌓여서 그것이 뭘 만들어낸다? 나의 미래를 결정해버린다니까요. 그러면 나는 어디 있습니까, 나는 없지요! 없고, 시간이 만들어낸 나만 있을 뿐이죠. 다시 말하면 과거가 만들어낸 ‘나’만 있을 뿐이고 미래가 어떻게 될 거라는 것도 누구 손에 달렸습니까, 내가 체험한 나의 과거에 달린 거예요. 그런데 과거를 만들어내는 것은 다가오는 ‘사태’ 날마다 어떤 사건이 주어지면 내가 꿈꾸는 것들이 주어지더라도 미래가 바뀝니다.

‘자, 강의 마치고 나는 가야지’ 나는 서울 가야지. 가는데 난로에 엎어져가지고 깨지면 나는 어디로 가야 돼? 병원에 가야되잖아요. 서울 가려다가 안산 고려병원으로 가야되잖아요. 내가 엎어진 걸 뭐라 합니까, ‘사건’ 다른 말로 하면 ‘사태’다 말이죠. 그래서 인간은 뭐냐, 사건과 사태에 노출되어 있어가지고 그것이 나를 어디로 인도할지 몰라요. 실지로 모른다고요 나를.

뭐,' 꿈을 이기리. 역경도 이겨보리. 역경을 이겨보는 것도 이길만해서 이기지 못 이기는것도 더 많아요. 역경을. 차라리 역경을 이겼다 하지 말고, 순순히 고개 숙였다. 이게 솔직한 얘기에요. 솔직히 고개 숙였다. 만약 어떤 교통경찰관이 있는데 돈 만 원 쥐어주면서 ‘아고, 한 번 봐주소!’ 했는데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 이겨냈다’ 만 원짜리니까 이기지. 1억짜리 수표 준다고 하면 경찰 때려치우고 그걸로 사업할 건데. 만 원짜리라서 이기지 일억 줘 봐요 못 이기지.

못 이깁니다. 인간은 원래 그래요. 이 세상을 이길 수 없어요.(주여! 이죄인) 그냥 순응한 거예요. 순응한 거. 고분고분한 거예요. 고분고분. 그리고 사도가 됐든 예레미야가 됐든, 어느 위인도 하나님이 만들어 둔 사태에 고분고분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고분고분하면서 뭘 느끼느냐, 이게 중요합니다. 그런 사태에 고분고분하면 뭘 느낍니까? 나는 여전히 내 시간 속에서 못 벗어나는,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아무리 예수 믿고 까불고 뛰고 해도 내 과거가 만들어낸 나라는 인간은 끄집어낼수록 죄인입니다.

그런데 이 죄인이라는 것은 언제 아느냐, 다른 시간이 왔을 때,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존재’가 왔을 때. 또 다른 말로 하면 ‘다른 존재’가 왔을 때 ‘다른 시간’이 왔을 때. 왜?! 존재가 시간을 몰고 다니고 시간이 그 존재를 만들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란 존재가 왔을 때 너무나 차이나죠. 내가 꿈꾸던 소망과 예수님이 꿈꾸던 소망과 너무 차이나죠. 예수님의 소망은 뭡니까, ‘재림’입니다. 나의 소망은 뭡니까, 내 과거에서 만들어낸 소망이 있겠지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빌딩을 짓는다. 한 15층짜리 빌딩을 짓는다. 나는 그 작업 현장에 있다. 이 사람 소망이 뭡니까, 빨리 건축 올리고 빨리 세 받아 돈벌어먹는 것, 이것 아닙니까? 예수님 재림하신다 해도 안 믿기죠. 왜? 이미 15층짜리 완공해가지고 세 받아먹는 게 있는데 예수님 재림과 예수님의 미래 얘기해봐야, 거들떠나 보겠습니까, 그게 잘 안 들린다니까요. 아주머니들이 결혼한 뒤에 아이들 낳은 뒤에 아이들 과외 같은 거에 관심 있지, 말씀에 관심 없잖아요.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어가지고 요새 놀라고 있는데 우리(?) 현숙 씨. 보통 새댁 같으면 아이들 키우는데 복음은 다 끝나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복음 생각하는 새댁이 있다하니까, 얘기를 들은 거지만, 수원에요.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내가 기대는 안 했거든요.

다른 새댁 같으면 아파트 장만하고 아이들 잘 키우고 그걸로 끝내지 무슨 복음을 왜 듣습니까, 복음 필요 없는데.

아까 예레미야 뭐라 되어있습니까, ‘여호와 약속도 필요 없고’ 그냥 인간과 인간이 더불어서 사는 거, 그게 전부다 말이죠. 그게 전부. 거기에 여호와 약속이 왜 끼어요. 복음이 왜 들어가요. 인간이 인간끼리 뭉쳐서 살면 그걸로 끝난다 말이죠. 서로서로 이용하고. 거기에 순응하고. 그게 현실이고. 그게 전부고. 그 속에서 나의 시간들을 달성하고. 나의 미래를 달성하고. 그것뿐이잖아요.

만나보세요. 이야기해보세요. 그것밖에 더 있습니까, 그런데 난데없이 여기 예수님의 미래가 자기에게 의미 있게 다가온다는 거. ‘예수님 재림한다.’ 의미가 다가온다는 거죠. 사람 만나는 것보다 예수님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구나, 그게 하나의 의미로 다가온다는 말은, 그 사람은 바로, 어떤 환난과 곤고도 이겨낼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구원받은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아, 목탄다! ㅋ- (물을 맛나게 마시는 순간임)

이제 얘기 아시겠죠? 예수님이 올 때 그냥 오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시간대를 가지고 온다했지요? 다른 말로 하면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온다,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는 시간으로 돼있어요. 왜? 예수님의 과거, 예수님의 현재, 예수님의 미래가 담겨있으니까! 그런데 무엇과 충돌됩니까, 나의과거 나의현재 나의미래와 충돌을 일으키죠. 충돌을 일으킬 때 성도는 뭘 느낀다? ‘나는 죄인입니다’ 성도 아닌 사람은? ‘당신 같은 사람 필요 없다,’고 밀쳐버린 사람. 그런 차이가 있어요.

그래서 고린도후서6장에 돌아와서, 지금이 무슨 때라 했습니까? ‘구출 돼야 할 때’ 이 시대 자체가 구출돼야할 때고, 그리고 은혜 받을 때다. 한 가지 더 얘기해봅시다. 여기서 제가 문제를 하나 낼게요. 방주 있잖아요, 방주. 방주가 몇 인용인가는 첨부터 예상해가지고 만들어놓은 거예요? 만약에 그 당시 사람 다 들어갔으면 수용을 못하게 되면 방주도 크게 지어야 되는데, 첨부터 방주 치수가 정해져있죠? 그런데 그 방주가 8인용입니까? 그건 아니겠죠.

방주라 하는 것이 무엇에 의지했느냐 하면, 물 심판이라는 것이 방주 뒤에 오죠? 방주가 현재라면 물 심판은 미래에 온다아닙니까, 미래가 오는데, 이것은 인간의 미래는 뭡니까? 노아 때 사람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이게 인간들의 미래였습니다. 그런데 방주라는 물건이 이게 뭐하는데 쓰는 물건인지 모르지만, 방주라는 물건이 등장했잖아요. 이것은 인간들의 미래 말고 다른 시간 노선이 등장했죠? 무슨 노선입니까? 장차 무슨 심판? 방주가 물 심판이라는 것을 노아 식구들만 알죠? 다른 사람은 모르죠?

그렇다면 이 미래가 ‘방주 있음’이라는 현재와 떨어져있는 겁니까? 같이 딸려온 겁니까? 같이 딸려온 거죠. 방주 떴으면 물 심판은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돼있죠. 방주 따로고 물 심판 따로 이런 거는 없다 말이죠. 방주가 생겼다 이 말은 그 뒤에 뭐가 따라온다? 물 심판. 홍수 심판이 온다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이것은 인간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하는 미래상은 ‘에구, 목사님 그때 가보면 알겠죠.’ 지금 그때 가보면 아는 게 아니고, 미래는 미래에 가봐야 아는 게 아니고, 미래가 현재에 앞당겨 왔을 때, 앞당겨 온 미래 속에서 전부 다 내다볼 줄 알아야 구원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이미 현재 속에 뭐까지 포함돼있다? 미래까지 한꺼번에 마실 수 있는 사람이 이미 구원을 아는 사람이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 사람은 만약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면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할 거예요. 그 노선은 어느 노선이겠습니까,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노선이 아니고 물 심판이라는 미래 노선으로 바꿀 것이다 이 말이죠. 바꾸고, 그리고 앞으로 먹고 마시고하는 것은 뭐다? 이것은 죄고, 여기서는 구원받아야 될 그러한 세상이란 것을 알려주겠지요.

사도바울이 이런 사람이었어요. 선지자가 이런 사람이었어요. 선지자가 ‘나만 구원받으면 됐지’ 하면서 도 닦는 사람이 아니고! 선지자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분명히 알고, 이것도 이야기하고, 그리고 방주얘기 드렸잖아요. 방주 예를 들었는데, 지금 오늘날에는 현재를 뭘 포함시킵니까, 십자가죠. 십자가는 미래를 뭘 포함시켜야할지 모르죠? 모르는데 성도는 알죠! 뭡니까, 물 심판이 아니고 무슨 심판? ‘불 심판’이죠.

불 심판은 뭐냐, 지난주에 설명한 거 있잖아요. 한쪽에는 신나 들고 한쪽에는 라이터 들고 확, 불질러버리죠. 이거는 무슨 세례? 예수님 세례는 두 가지 있다했는데 불세례가 뭡니까, 세상을 불질러버리는 것. 이게 불세례고. 또 하나는 뭡니까, ‘성령세례’ 예수님의 십자가의 영을 받아서 닥쳐올 미래를 미리 알아서 챙기는 세례. 믿음 소망 사랑 두 가지 얘기했죠?

십자가인데, 방주 뒤에 뭐가 나왔죠? ‘물 심판’ 방주는 배니까 아는데 십자가 뒤에 뭐가 나오죠? 이거는 안 떠오른다 말이죠. 십자가로 구원받는 게 뭐가 있을까? 이것은 잘 안 떠오르거든요. 우리는 알죠. 불심판인 거. 그런데 불심판과 십자가는 무슨 관계가 있냐 말이죠. 불 심판은 세상 모든 것을 불질러버리는 거죠. 지구도, 우주가 마치 종이 말려 올라가듯 없어지잖아요.

십자가가 뭐와 관련돼 있느냐, 십자가가 죄와 관련돼있죠? 십자가는 ‘죄 사함’을 해주는 거죠. 죄 사함.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죄가 없는 구석이 있다는 말입니까, 없다는 말입니까, 죄가 상관없는 구석은 한 군데도 없어요. 만약에 이 세상에 죄만 있다면 다 불살라버리는 게 아니고 죄 없는 부분 남겨놓고 다 탈거예요. 그런데 이 세상은 밑바탕, 이 판때기 자체가 불타 없어진다는 말은 그 위에 교회를 세우나 뭘 세우나 전부다 뭐가 된다? ‘죄’가 되는 거예요. 죄.

죄가 되니까 성경에서 이걸 뭐라 하냐면, 이걸 가지고 옛 하늘과 옛 땅이라 하죠. 보세요. 옛 하늘과 옛 땅 아닌 게 어디 있어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게. 모두 옛 하늘과 옛 땅이죠. 그렇잖아요. 예를 들어 옛 하늘과 옛 땅 속에서 전부 불살라버린다면 그 속에 누구도 포함 되느냐 하면, 사도바울 자신의 육신도 포함 되요, 안 포함 되요? 자신의 육시도 포함됩니다. 왜? 흙에 속했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바울은 빨리 자기 옷을 벗어버리고 새옷으로 갈아입기를 원했어요.

그러면 이 노선은 뭐냐, 현재 방주라는 현재를 찾은 사람은 물 심판을 미리 포함해서 알고 있듯이 십자가를 믿습니다. 하는 말은 뭡니까, ‘나 빨리 이 옷 벗고 죽고 싶습니다.’ 라는 뜻이에요. 다 더럽습니다. 천사와 같이 부활되고 싶습니다. 그런 뜻이에요. 십자가를 믿는다면. 그래서 십자가를 믿는 사람에게는 이미 땅에서 이미 죽은 자가 된다는 말이에요. 이미 죽은 자.

죽은 자라 하기 때문에 이 이야기를 왜 하냐면, 고린도후서6장 다시 봅시다. 『8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

여기보세요. ‘무명한 자(이름 없는 자)’ ‘죽은 자’ ‘욕된 자’ ‘속인 자처럼 느껴지는 것’ 복음 전하는 사람들 이것 때문에 욕 많이 얻어먹었습니다. 한국교회 다 이단이라고. 꼭 속이는 것 같죠? 속이는 것 아닌데. 그래도 좋은 게 있을 것 아닙니까? 이래 나오거든요. 우리가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우리가 살아오면서 징계는 나 혼자 다 받는 것 같아.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뭡니까? 죽음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한 자 같으나(근심은 혼자 다 하는 것 같은데)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 부유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걸 가진 자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이미 십자가의 현재를 가진 사람은, 천국의 영생이라는 미래를 이미 확보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는 자, 가난한 자, 항상 죽음을 당하는 자, 징계를 받는 자, 유명하지 않는 사람, 거기에 해당돼도 괜찮은 사람이다. 이게 자유다 말이죠. 이렇게 돼도 미래는 내 시간대, 과거, 현재, 미래는 이미 날라 간 거니까! 그거 연연하지 말고, 믿음 두지 말고. 새로운 주님이 주신 그 미래와 현재. 이것이 바로 우리의 것이다 이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하고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예수님 오셔서 얘기해준 거 사람과 의논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우리에게 정통으로 주어진 줄 압니다. 십자가가 어떤 의미인가를 이제는 미래 재림까지 확대해서 수용할 수 있는, 방주에 이미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남에게 제재 받을 것이 없는 마음껏 자유할 수 있는 저희들 삼아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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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