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2월 14일 강의 에베소서 1장
서울 12월 14일 강의 에베소서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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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214 에베소서 1장 예정
우리교회(IP:125.♡.2.61)
07-12-15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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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2-19 20:18
서울071214a엡1장1절
에베소서 제 1강 (이 근호목사, 2007년 12월 14일(1), 서울의존교회)
에베소서를 지금까지 몰랐다 치고 에베소서를 보게 되면, 우리가 사는 21세기에 접하는 용어들, 신문이나 방송에서 나오는 말들이 여기에 나오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적어 보겠습니다. “신령한 복.” ‘신령한 복’이라는 말은 잘 안 나옵니다. “예정되었다”, 그 다음에 7절에 보면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 “10절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일”, 이런 이야기는 학교에서도 잘 안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학교에서 이야기되는 그런 이야기만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성경은 이런 이야기가 쏙쏙 이해가 잘 되는 새로운 사람들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남들은 못 알아듣는데, ‘이것은 나의 이야기다’라고 알아듣는 사람들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어린이 여러분에게 질문합니다. 신령한 복, 예정, 그리스도의 피,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일, 이런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이 좋을까요, 이런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이 좋을까요?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은 좋겠지요? 이런 이야기를 알아듣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천국에 넣어주기 위해서 새로 만든 사람들만 알아듣게 되어 있습니다. 지옥 가는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몰라요.
여러분이 학교에서 상장 받고, 대회 나가서 일등하고,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것도 기쁘지만, 성경의 이야기를 모른다면, (예를 들어서 김연아 선수 같은 경우는 세계피겨스케이트 대회에서 일등을 했어요. 본인도 그렇고 온 국민이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하지만 김연아 선수에게 물어 보세요. 그의 피를 아십니까? 몰라. 예정하심을 아는가? 몰라. 그러면 피겨스케이트는 잘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못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이런 이야기를 적어 놓은 것은 이런 이야기가 이해되는 사람이 따로 있고 그들에게만 하늘나라가 허용되고 입장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내가 이런 이야기를 못 알아들어야 될 사람인데, 웬 은혜인지 웬 큰 사랑인지, 신령한 복, 예정하심, 죄 사함 받는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된다, 이런 이야기가 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온몸으로 전율을 느끼면서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남들은 몰라도 된다고 버리는 이야기가, 나에게는 큰 기쁨이 되는 이야기로 다가와서 ‘정말 이 말씀대로 내가 지음받았구나’, 이런 신령한 복, 죄 사함, 예정,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이런 말로 누구를 만들었습니까? 이런 말들을 가지고 새로운 사람을 만들었다는 겁니다. 새로 지음 받은 사람은, 신령한 복, 예정, 그의 피, 죄 사함,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이런 것들이 막 들어오는 겁니다.
이 사람 속에 아무개의 이름을 적어 보세요. 적어보면 ‘나’라는 사람에게 이런 신령한 복이 들어있고, 예정이 들어 있고, 그의 피가 들어 있고, 죄 사함이 들어 있고, 예수 안에서 통일이 들어 있는데 우리가 기뻐해야할 최고의 기쁨이 바로 이겁니다. 이런 것이 느껴진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어요. 세상에 좋다, 부럽다, 좋다하는 것이 다 시시합니다. 그 대단하다, 하는 그 사람에게 물어 보세요.
“그의 피로 죄사함을 알아?”
“몰라!”
“봐, 모르잖아. 바보네.”
에베소서에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이런 이야기가 나왔다는 것은 특별히 이것을 아는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하는 그런 뜻으로 여러분은 생각을 해 주시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문제를 던집니다. 성경이 한글로 적혀 있는데 왜 세상 사람들은 이게 무슨 뜻인지를 왜 모를까요? 그의 피로 죄 사함을 받는다, 이것이 7절에 나오는데 이것이 무슨 뜻인지를 왜 모를까요?
그것을 모르는 이유가, 사람이라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가 생각하는 자기만 생각합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가 만들어낸 자기 자신만 고수하다 보니까 모르는 겁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선악과를 따먹은 채로 태어나기 때문에 아는 게 뭐냐 하면, 나는 (어느 정도로) 선할까? 나는 (어느 정도로) 악할까? 이것밖에 몰라요. 나는 얼마나 선해질 수 있을까? 혹은 나에게서 얼마나 악을 제거할 수 있을까? 나는 얼마나 저 사람보다 더 훌륭할까? 이런 것을 매일 매일 생각합니다.
교회 나와서도, 제가 교회에 나왔습니다, 저 착하지요? 부모님 말씀대로 해놓고도, 제가 부모님 말씀대로 숙제 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착하지요? 사람은 항상 내가 착할까, 내가 나쁜 사람에 속할까, 아주 착한 사람, 약간 덜 착한 사람, 중간인 사람, 약간 나쁜 사람, 아주 나쁜 사람, 이 다섯 가지 중에서 어디쯤 속할까? 위로 올라갈까, 밑으로 내려갈까, 를 늘 생각하는데 이것을 다 없애야 됩니다.
내가 착할까, 악할까를 생각하는 이것이 뭐냐?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나는 내 생각밖에 안하고 이것이 통채로 죄가 되는 겁니다. 이것을 없애버리고 거기에 예정을 집어넣어 보세요. 하나님의 예정하심이 이 안에 들어오면 내가 선할까, 악할까, 그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이 예정되어서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아서 하나님의 의인이 되는 겁니다.
선과악 사이에서 물결치듯이 매일 왔다 갔다(나는 착한 일을 했기에 더 착해졌을거야, 나는 악한행동 했으니까 벌받을거야)하는 이 전체가, 하나님의 예정하심을 모르기 때문에,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피로 죄용서 받아서 의인되었다, 는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혼자서 자기가 만든 자기에 빠져서 고민을 하고 있는 겁니다.
어린아이들은, 짐승들도 그런데, 자기 그림자를 보고 깜짝 놀라곤 합니다. 어른들도 그런 경험을 하곤 하는데, 불 꺼진 캄캄한 방에 들어 왔는데 갑자기 불이 켜지고 보니까 왠 사나이가 거기 있더라는 겁니다. 정신 차리고 보니까 거울에 자기 모습이 비친 겁니다. 원숭이는 거울을 비쳐주면 자기 우리에 남이 들어왔다고 여기면서 거울 속에 있는 자기와 대판 싸웁니다. 사람이 원숭이와 같습니다. 자기가 스스로 만든 자기 자신에게 속아 넘어가서 매일 누구와 씨름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하고(악하면 안 돼, 착해야 돼) 씨름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내가 나쁜 짓을 했기에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면 나는 전보다 더 형편없는 내가 되는 것을 견딜 수 없어, 내가 지금처럼 된 것도 얼마나 선한 일을 많이 해서 이만큼 되었는데 나쁜 짓 한 것 때문에 그것이 하루아침에 다 깨어지는데 그리 되면 안 되지, 안 되지, 라고 매일 매일 고민합니다. 생각하는 것이 하루 종일 자기 생각밖에 하지 않아요.
가끔 개를 보면서 개가 철이 났다는 생각을 합니다. 집에 있는 강아지는 북한의 핵문제로 고민하는 법이 없어요. 서해바다에 기름 떴다고 고양이가 고민하는 것 봤습니까? 세상은 저렇게 살아야 됩니다. 그 개나 고양이, 돼지가 엘리뇨(바다의 수온이 높아지는 기상 이변, 서에서 동으로 바닷물이 밀려서 한쪽은 가뭄이 들고 한쪽은 홍수가 나게 되는) 현상 때문에 고민하는 것 없습니다.
비가 오면 비오는 대로 눈 오면 눈오는 대로, 혹 돼지우리에 화재가 발생하면 그냥 바비큐가 되고, 고민할 것이 없어요. 사람이 개, 돼지만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진짜 천국에 살 사람은 우리가 스스로 고민하지 않더라도 예수님께서 신령한 복을 주셔서, 창세전에 예정하사 예수님의 피를 보내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아서, 나중에 천국에서 통일되게 하심은 이미 하나님께서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어서, 자 알아들어라 이것이 너에게 해당되는 운명이고 너의 인생이다, 라고 성경을 통해서 알려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에베소서의 말씀을 집에 있는 신문보다 더 하찮게 여기는 겁니다. 방송드라마보다 더 우습게 여깁니다. 드라마 보면서 나도 빨리 검사되어야지, 나도 빨리 변호사 되어야지, 매일 생각하는 것이 지금보다 내가 더 나아질까, 얼마나 착한 일을 해야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까, 혹시 내가 나쁜 짓을 했을 경우에 지금보다 훨씬 안 좋은 처지로 완전히 추락하는 고생길이 될거야, 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을 주니까,
“성경 치워라 나, 안 본다.”
“왜?”
“성경에는 내가 출세하는 것도 없고 복 받는 것도 없고 돈 버는것도 없는데 내가 이것을 왜 보는데?”
개, 돼지보다 더 못한 인간입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릅니다. 마치 어리석은 원숭이처럼 어리석게 자기가 자기와 씨름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때리면 누가 맞습니까? 자신이 맞지요. 여기 오는 길에 보니까 50대쯤 된 분이 술이 거나하게 취했습니다. 광고지나 벼룩전단지 넣어진 통을 발길로 걷어차네요.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 인생관이 정립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며 내 장래는 무엇인지, 누가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알려줘도 믿지도 않고, 그저 세상만사 내 뜻대로 안된다고 술 한잔 하고 성질부리는 겁니다. 개나 돼지 보다 더 못합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에베소서(성경)을 왜 줬습니까? “네가 생각하는 너를 이제는 철수시켜라.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려라.”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그것은 상관없는 겁니다. 창세전에 예정되었다고 하면 끝난 이야기지 새삼스럽게 나는 예정될래, 나는 예정될래, 그게 말이 되지 않습니다.
새삼스럽게, 나 예정된 사람 하고 싶어요, 나 예정되게 해주세요, 이게 말이 안 됩니다. 초등학교 애가 동생이 엄마 품에 안기는 것을 보고서는,
“나도 엄마 품에 안길래.”
“너는 다 컸어.”
“아니야, 안길래. 안길거야.”
“너는 옛날에 많이 안아 줬잖아.”
“그래도 안길래!!!”
다 소용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을 우리가 우리 힘으로 돌이킬 수 없어요. 다시 말해서 나는 저것이 좋으니까 저것을 가지겠다는 생각을 포기하세요. 나는 저것이 나쁘니까 그 나쁜 길을 내가 안가야지, 라는 생각도 포기하세요. 사람이 죄짓는 것도 나쁘지만 훌륭한 사람 되는 것도 그 이상으로 나쁜 겁니다. 일부러 억지로 죄짓는 것도 나쁘지만, 내가 훌륭한 사람으로 남아야지, 하는 것도 그보다 몇 배 몇 배 더 나빠요.
왜냐하면 사람은 예정된 대로 사는 것이지 자기가 뭐가 되고 안 되고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우리의 착각, 우리의 망상이기에)는 하나님이 보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이, 네가 생각하는 너는 이야기도 꺼내지 말라, 고 꼴도 보기 싫어합니다.
“제가 학교 때 상을 몇 번 탔고요, 학교는 어디를 나왔고요.”
“저리 가! 그런 이야기 다 듣기 싫어.”
그런 것은 예정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것은, 그의 피로 죄 사함 받는 것, 을 예정하신 것이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것들을 예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신령한 복은 안중에도 없고, 더 못한 나를 더 낫고 훌륭한 나로 변화시켜 보려고 하나님께 아부나 하고,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나름대로 성경공부하고 애를 쓰는데, 하나님께서는, 웃긴다, 쓸데없는 짓 하고 있다, 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은,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가고 있구나,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성경을 보는 거예요. 새삼스럽게 훌륭한 사람 되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아, 이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이고 내가 쓰지 않는 일기장이네, 내가 쓰지 않는 일기장이 있어야지요, 내가 매일같이 쓰지 않는 일기장이 에베소서입니다.
이 계획대로 그 길을 갈수 밖에 없고 가고 있는 중입니다. 부질없이 내가 내 인생 따로 만들려고 부질없는 짓을 하지 마세요. 그런 것은 지옥 가는 사람들, 천국에 못가고 믿을 구석이 없고 성경도 안보고, 믿을 것이라고는 술 한 잔 먹고 취하는 식으로 자기가 자기를 만들어가는 자기밖에 기대를 걸 것이 없는 사람에게만 해당됩니다.
그런 사람은 죽으나 사나 자기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부지런히 자기에게 투자해서 훌륭한 사람 되기 위해서 애를 쓰는데, 그 사람은 하나님의 예정하심도 모르고, 십자가 피로 죄 사함 받는 것도 모르고, 부활하는 것도 모르고, 구름타고 다시 오시는 것도 모르고,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을 정한 것도 모르고, 그 뒤는 심판이 있는 것도 모르고, 그 뒤에 죄와 상관없는 자에게 두 번째 오시는 것도 모르고,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 잘났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입니다.(히브리서9:27,28)
사람들은 대선에 출마한 분들을 보면서, 야, 저 사람들 좋겠다, 하는 소리를 하는데, 그들은, 온 동네 선전벽보마다 붙어 있는 자기 얼굴에, 나는 지금 지옥에 잘 가고 있습니다, 하는 그 소리를 써 붙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훌륭한 사람은 없습니다. 없기 때문에 훌륭하게 되려고 하지 마시고, 내가 누구인가를 말씀을 통해서 알면 됩니다.
에베소서1:7에 보니,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성경을 통해서 훌륭하게 될 생각을 하지 말고 내가 누구냐, 를 알면 된다고 했지요. 이제 문제 나갑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제가 방금 에베소서 1장 7절을 읽었는데 여러분이 답변해 보세요. 우리가 누굽니까? 죄인입니다. 죄 사함을 받아야 될 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죠.
죄를 갖고 있는 사람 되었다는 이것이 차기 대통령 되는 것보다 더 위대한 겁니다. 대통령 되었다고 천국에 넣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대통령 되면 천국에 넣어준다면 저도 5억 걸고 나갑니다. 대통령 되어야 천국에 간다면 성경 덮어버리고 우리도 다 출마해서 선거운동 나갑시다. 그런데 에베소서를 펼쳐 봅시다. 죄인이 죄 사함 받으면 천국 갑니다. 그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 시간에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것보다 더 기쁜 소식이 있거든 나와 보라고 하세요. 없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얻기 위해서는, 이 기쁜 소식을 기쁘게 여기기 위해서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 이제부터 생각할 것은, 어떻게 해서 내가 죄인인가, 를 알면 됩니다. 나 죄인 아니다, 라고 도망치지 마시고 내가 죄인인 것을 알면 됩니다. 우리가 죄인인 이유는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 신령한 복, 예정, 이런 것은 생각이 나지 않고,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 자기를 악한데서 선한 곳으로, 못한 곳에서 더 나은 곳으로, 실패한 인생에서 성공한 인생으로 변모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 그래서 내가 보기에 괜찮아 보이는 나를 내가 가지려고 시도하는 것,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피를 모독하고, 예수님의 피를 무용지물로, 소용없는 짓으로 만드는 겁니다.
우리는 하루에 몇 번이라도 예수님의 피가 소용없다, 소용없다, 그런 이야기를 수백 번 씩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알아서 잘하는데 예수의 피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배고프면 밥 먹으면 돼. 배고프면 누워서 자면 돼. 마려우면 화장실 가면 돼. 예수의 피가 왜 필요한데!! 밥 먹는다, 잠잔다, 화장실에 간다, 여러분은 밥을 먹으면서, 혹은 잠자면서, 화장실에 가서 죄를 느낍니까?
우리가 죄를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이 피를 흘렸다는 그 사실 앞에서, 왜 저분이 피를 흘렸을까? 그것은 바로 나에게 죄가 있고 그 죄는 예수님의 약속의 피와 약속의 살점으로만 죄가 없어지기에 저분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피를 흘렸구나,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럴 때 비로소 나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죄인이 맞고, 예수님이 나를 위해서 피를 흘렸다는 말은 나는 그 피로 이미 용서 받은 사람이다, 나는 의인이 되었다, 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정을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저와 여러분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행복, 행복 하지만, 할리우드 스타들, 일 년 연봉이 일억 불이 넘는 그 부자들이 부러운 것이 아닙니다. 돈에 파묻히면 자기가 누군지를 몰라요. 돈에 파묻혀 살면, 나는 부자 되어야 합당해, 나는 부자 될 만한 사람이야, 왜, 워낙 훌륭하고 워낙 착하니까 신께서 나를 부자 만들어준 것이 나에게 너무 합당해, 이렇게도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몰라요.
부자 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 되고 싶어도 안 되는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닙니다. 부자가 되던, 가난뱅이가 되던, 여러분은 상관없이 실패자가 아니라는 겁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실패자도 아니고 부자라고 해서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는 사람, 예수님께서 왜 피를 흘렸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백날 살아도 거울 속에 있는 원숭이와 싸우는 것처럼, 자기에게 소스라치게 놀라고, 자빠지고, 자기가 자기에게 질겁하면서, 매일 자기 생각만 하고 있는 채, 어디로 끌려가는지도 모른 채, 죄인들이 몽땅 끌려가는 지옥으로 가는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겁니다.
안 믿는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할 필요가 있습니까, 라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이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해야 된다는 겁니다. 예정되지도 않은 사람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이야기인데 왜 그 이야기를 하는가? 예정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이야기를 해야 됩니다. 당신은 예정되지 않았기에 지옥으로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인사를 해 줘야 합니다.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당신이 어디로 가는지 이야기를 해 줘야 합니다. 예정되었다, 안 되었다를 어떻게 아느냐? 예정하신 뜻이 나타난 것을 거부하면 예정되지 않은 것이고, 예정한 사람만이 예정하신 뜻을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석류꿀차가 있습니다. 이 차를 다 좋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석류꿀차가 천국 가는 생명수라면 제가 이렇게 죽 다니면서 권하면서, 드시겠습니까? 안 드시겠다고요? 안녕히 가십시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권할 때, 나, 그거 좋아하는데, 그렇게 되면 당신은 창세전부터 석류차를 좋아하도록 예정되어 있네요, 라고 되는 겁니다.
예정된 뜻이 뭐냐? 예수님께서 자기 피로 죄용서 해준다는 것이 예정된 뜻입니다. 따라서 이 석류차처럼 들고 다니면서 그 이야기를 해 주는 겁니다. 해서 그 이야기를, 아! 나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구나, 라고 받아들이면 예정된 사람이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그런 것이 없이 내 힘으로도 착하게 됩니다, 내 힘으로도 죽어서 좋은 나라 갑니다, 라고 하는 그런 사람은 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 가는 사람입니다.
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석류차(생명)를 석류차인지도 모르고 거부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천국에 태어나기도 전에 어떻게 아느냐고 하는데, 천국에 가기도 전에 주님께서 웨이터처럼 이렇게 접시에 담아서, 창세전에 우리보고 가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창세전에 예정된 뜻을 협의했던 그 당사자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석류차(생명)를 갖다 바치면서, 이게 예정된 뜻인데 받겠습니까, 라고 물어 보는 것으로 확인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창세전으로 도로 돌아갈 필요 없이, 예정된 하나님의 뜻을 가지고 들이댈 때, 제가 그 피를 마시겠습니다, 라고 나오면 당신은 예정되었기 때문에 마신다, 마시기 때문에 예정된 것이 아니고, 예정된 자에 한해서만 마시도록 되어 있습니다, 원래 법칙이 그렇습니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사람이 죽어서 어디 가느냐, 하는 것은 아무도 안 가봐서 모른다는, 그런 소리 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람이, 내가 죽어서 어떻게 됩니까, 에 대한 정답은 뭐냐? 네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어떻게 될 것인지가 예정되었으면 그 끝은 그대로 가는 거예요.
“죽어서 가봐야 알지.”
“안 가봐도 압니다.”
죽어서 안 가봐도 창세전에 결정된 것이 일관성 있게 죽 붙어 나가기 때문에, 내가 죽어서 어디가지, 라고 물을 필요도 없이 창세전에 예정된 것, 그 이야기만 하면 된다는 말입니다. 창세전에 예정된 것은 어떻게 압니까? 창세전으로 가봐야 합니까? 가 볼 필요 없습니다. 창세전에 예정하기로 합의한 분이 예수님인데, 그 예수님이 와서 창세전에 예정된 내용을 가지고 우리에게 들이밀 때, 이 피를 마시겠나이다, 라고 되어 버리면, 그것이 곧 예정된 사항이기 때문에 그것을 접수하게 되는 현상이 벌어진다는 말입니다.
하늘나라 안가 봐도 하늘나라 계신분이 이 땅에 와서 우리에게 이야기를 할 때 그 이야기를 곧이들으면 그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오신 분을 영접한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편리하게 했습니까? 우리보고 뭘 하라고 했습니까? 도를 닦으라고 했습니까? 그저 와서, 너는 이런 인간이다, 확인해 줄때, 맞습니다, 제가 그런 인간입니다, 라고 확인만 하면 된다 이 말이죠.
얼마나 기뻐요. 다른 할 것이 전혀 없는데. 그런데 교인들은 일요일날 바쁘다고 확인하러 교회를 안 나옵니다. 자기의 가치를 더 높이는 그 일에, 허깨비같은 자기 자신에 몰두한다고 바빠서 뻔질나게 교회 빠지고, 관심도 없고, 그저 자기 품질 향상시키는데 매진하고 있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이야기 하면 듣기 싫다하고, 다 안다 하고. 갑자기 제가 너무 심하게 나무란 것 같은데, 하고 나니 예정된 분들에게는 참 미안합니다.
에베소서 1:1에 보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하고 상대하느냐, 같은 사람들끼리 상대합니다. 학생들은 학교에 가면 친구하고 선생님하고 상대하지 하나님하고 상대 안 하잖아요. 이렇게 사람들은 사람하고 상대하는데, 여기 보면 사도바울은 누구와 상대합니까? 하나님하고 예수님하고 상대합니다. 왜냐하면 그게 자기 할일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사람들과 관계가 없었습니다.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음성과 말씀을 들었습니다. 에스겔아! 45일 동안 모로 누워라, 그러면 꼼짝없이 예, 하고 눕는 겁니다. 이번에 이쪽으로 돌아누워라, 그러면 또 돌아서서 눕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미쳤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습니다. 사도바울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요.
하나님의 지시를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우리가 누구 말을 들어야 됩니까? 하나님이 안계시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마세요.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면 그 하나님의 뜻이 뭔지, 궁금증, 관심을 갖고 있어야 됩니다. 옛날에 솔로몬이란 임금님이 살았습니다. 그 솔로몬 임금님은 거판하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에 기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솔로몬아! 너의 기도가 정말 훌륭한 기도구나, 하고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자, 솔로몬 임금의 기도 내용이 무엇이었기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를 그렇게 칭찬했을까요? 솔로몬 임금님의 기도는 세 가지가 없었습니다. 첫째, 부자 되게 해달라는 기도가 빠져 있습니다. 두 번째,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해달라는 기도가 빠져 있습니다. 세 번째 나를 해코지 하는 사람(원수)이 망하게 해달라는 내용이 빠져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기도의 수능시험이라고 하는데, 이 세 가지, 부자 되는 것, 오래 사는 것, 원수가 망하게 되는 것을 기도하지 않았더니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를 그렇게 칭찬했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의 기도한 내용이 뭐냐? 아버지의 뜻이 나를 관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고스란히 꾸밈없이 그대로 전달되게 해 달라는 기도를 했습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뜻이, 나의 욕심에 의해서 걸치지 않고, 그대로 깔끔하게 나를 통과해서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수 있는 통로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주기도문으로 하면,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 와 같습니다. 그 기도가 하나님에게 합격되는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 와서 기도했다 하면, 빠짐없이 하는 기도가 뭡니까? 부자 되게 해주세요. 십일조 많이 내게 해주세요. 그래서 교회가 부흥되어 빨리 이사 가게 해주세요. 그 다음에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살게 하옵소서. 세 번째, 미운 사람이 있는데 콱 죽고, 망하게 해주시고, 저주받게 해주소서. 이 기도를 하면 우리의 속이 탁 트이죠. 이것은 누구 뜻입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자기의 뜻입니다.
자기 뜻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은 교회 와서도 자기를 못 버립니다. 원숭이가 거울 속에 있는 자기와 싸우듯이 자기하고 대판 싸워서 부자 되어서 질 좋은 나를 만들고, 건강하게 되어서, 나 복 받았잖아, 하면서 남에게 으시대는, 그런 질 좋은 자기를 만들고, 자기에게 해코지 하는 사람은 다 망해서, 나 건드리면 다 망한다고 해서 질 좋은 자기를 만드는, 이런 기도에 우리는 전념하고 몰두합니다.
제가 이 강의를 했더니만,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목사님,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기도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해요. 제가 이야기 했잖아요. 하나님의 뜻을 전할 수 있게 해달라 는 그 기도는 왜 안합니까? 그것은 하기 싫습니다. 왜? 그것은 나와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하고 관계없는 그런 기도는 안하겠답니다.
여러분, 솔로몬이 기도한 것은, 자기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해달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이 뭐냐? 솔로몬의 뜻이 뭐냐? 이 에베소서에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신령한복, 예정, 그의 피, 죄 사함,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이런 이야기를 에베소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바울이 전했던 하나님의 뜻을 우리도 고스란히 받으면 됩니다. 받고 내가 알아서 내가 나를 관리한다든지, 조절한다든지, 질 좋은 사람을 만들겠다는 이런 수고를 하지 마시고,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를 확인하면서, 내가 이미 구원되었구나, 라는 것을 기쁨으로, 구원받은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시면 되는 겁니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그런데 이 하나님의 뜻을 날마다 막는 게 있어요. 그게 누구 뜻입니까? 나의 뜻입니다. 그 나의 뜻은 어디서 나왔는가? 하나님의 뜻은 창세전부터 우리를 구원하기로 합의를 본 그 합의자인 예수님께서 직접 와서 우리에게 통보해 주니까, 아, 나는 구원받았구나, 하는 것을 알잖아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 방법은 주의 피,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용서함)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나의 뜻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나의 뜻은 선악, 선과악 사이에서 갈등하는 겁니다. 선하면 복 받고 악하면 저주 받는다. 복은 받고 싶고 저주는 안 받고 싶은 그 사이에서 늘 복만 받는 사람 되고자 따로 나를 만들고자 애쓰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는 나의 뜻이고 그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의 뜻의 모든 방법은 예수님이 주시는 것이고, 선악적으로 나를 훌륭하게 하려고 한다면 그 모든 방법은 누가 만들어 냅니까? 내가 만들어 냅니다.
안 믿는 사람들, 아주머니들 보면 아파트 청약할 때, 4동 444호 하시겠습니까, 하면 아니오, 합니다. 왜? 죽을 ‘사’(死)자가 네 개라고. 여러분, 4자가 많이 붙으면 지옥 갑니까? 그게 하나님의 뜻입니까? 그러면 4자가 많은 것이 누구의 뜻입니까? 내 뜻이지요. 찝찝하잖아요. 있으니까 찝찝한 것은 찝찝한 것이고 다시1장을 보면서, 뭘 발견합니까? 아, 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찝찝함, 이게 바로 죄구나, 라는 것을 처음 알지요.
4동 444호가 왠지 찝찝하게 여기지는 것. 13일의 금요일에 444호에 가는 것이 왠지 찝찝한 겁니다. 그런 것을 찝찝하게 여기고, 그런 것을 기분 나쁘게 여긴다는 것 자체가 바로 내 안에서 여전히 죄가 밑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서 솟구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교회 수련회를 좋은 장소에서 하는 것보다, 음침한 공동묘지 근처나 귀신이 출몰한다고 소문난 폐가, 밑에는 습기가 많아서 잡초가 무성하며, 거기에 목매어 죽은 처녀 귀신, 남편에게 얻어맞아 죽은 아줌마 귀신, 교통사고 나서 죽은 애 귀신이 한 가족을 이루어서 사는 아주 집값 헐게 매겨진 집에서 그것도 밤중에 수련회를 해봐야 합니다.
과연 그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아 이미 신령한 복을 받았다는 것이 확인되는지, 안 그러면 왠지 으스스하고 기분 나쁜지. 애를 키우다 보면 새벽 세시나 네 시에 깜짝 놀라서 엄마 방으로 뛰어오는 애들이 있을 겁니다. 꿈에 귀신을 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혼자는 무서워서 잠을 못잡니다. 이것은 어른들도 특히 여자 분들은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여자 분들은 남편 없이는 혼자서 못잡니다. 꼭 친구를 불러와서 잡니다. 그렇게 무서워해요.
그런데 요한1서 4장에, 사랑은 두려움이 없다고 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쫒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자기가 평소에, 내가 나를 지켜야 된다는 이것이 습관화 되다 보니까, 내가 나를 안 지켜도 된다는 생각을 못하는 거예요. 귀신이 나타나면 귀신에게 잡혀가세요. 그러면 그 가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러면 되는데 귀신한테 잡혀가면 지옥인줄 알고 있어요. 지옥, 천국은 내가 안 잡혀 가야 천국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벌 안 받아야 천당 가는 것이 아니라, 벌을 받아도 천당 갈 사람은 천당 가게 되어 있고, 잡혀 가도 잡혀 간 그곳이 천국입니다.
자꾸 내 선악적인 선입감을, 그 외투를 벗어 버리시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피로 푹 젖으시기 바랍니다. 홍의를 입은 분이 요한 계시록에 나오잖아요. 붉은 옷으로 여러분은 덧입으시기 바랍니다. 그게 바로 예수 안에서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창세전에 이미 여러분은 선택을 받았습니다.
에베소서 1:3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주시되.” 우리가 착해서 주는 것이 아니고 복 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는 복 마다하지 마세요. 그냥 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폭설 내리듯이 옵니다. 오는 눈 오지 말라고 하면 눈이 안 옵니까? 오게 되면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그의 피로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 1:3-5, 7)
어렵지만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는, 예정되었다고 해놓고 왜 우리에게 죄인 되게 해서 죄 사함 받으라고 하는가? 예정되었다면 처음부터 의인되어야 할 텐데, 예정되었다 해놓고, 아예 우리를 죄인 만들어 놓고, 용서는 용서대로 와서 예정된 대로 구원받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예정되었다면 선악과를 따먹는 죄도 짓지 말아야 하는데, 예정되었다 해놓고는 죄인 만들어 놓고, 죄인을 용서해 놓고는 그것이 예정된 뜻이라는 겁니다.
참 희한합니다. 예정된 속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죄인으로 살아야만 하는 것도 예정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죄인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 왜 예정되어 있는가? 다음시간에 계속하겠습니다.
우리교회(IP:220.♡.176.141)
07-12-23 19:53
서울071214b엡1장6절
에베소서 제 2강 (이 근호목사, 2007년 12월 14일(2), 서울의존교회)
20071214-(2) 서울강의녹취 : 에베소서 제 2강 이름 : 오용익 2007-12-21 08:40:22
내가 만든 ‘나’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내가 만든 ‘나’는 폐기처분 되어 버리고, 예수님이 만드시는 ‘나’만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지도 못할 ‘나’를 가지고 애지중지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나를 어떤 식으로 만들었는가, 거기에 관심을 두고 살아야 됩니다. 에베소서 1:6에 보면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려면 “거저 주시는”것으로 만드는 ‘나’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아야 거저 준다는 사실에 대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할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린이 여러분! 부모님에게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면서 막 찡그리면서 하는 고맙습니다, 가 될까요, 안될까요? 안됩니다.
보통 고마워서 고맙습니다, 할 때는 얼굴에 반짝 반짝 윤기나 나면서 환하게 피지요.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내가 만든 인생은 보지도 않으시고 주님께서 만드신 ‘나’를 천국에 넣어주시니 고맙습니다, 할 때는 얼굴이 확 펴지지요. 얼굴이 다리미질 한 것보다 더 확 펴지면서 굉장히, 정말 기쁩니다.
수능시험 제대로 못 치렀다고 25층에서 뛰어 내리는 쌍둥이자매. 그 자매가 뛰어 내리면서 고맙습니다, 하고 뛰어내렸겠습니까?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인생을 듣도 보도 못한 겁니다. 열심히 내가 만들고 내가 가꾸어 놓은 자기 것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거저 주시는 것이 없기 때문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할 마음을 먹은 적도 없고 그렇게 할 기회도 못 가졌어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은혜의 영광”스러움을 찬미하게 하려면 반드시 원칙이, “거저 주시는 바”가 성립되어야 되고, “거저 주시는 바”가 성립되려면, 내가 안 죽고, 안 망하려고 애쓰고 가꾸는 그것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나’라는 인생이 따로 있다는 것을 느낄 때, 거저 주시는 것을 알게 되고, 거저주시는 것을 알면서 고맙습니다, 라는 말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첫째시간에 이야기 한것,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뜻이 무엇인지 그림으로 그리겠습니다. 여기 1층과 2층이 있습니다. 2층을 받쳐주는 판(대기)가 아래층으로 내려옵니다. 1층 밑바닥까지 내려오게 됩니다. 내려오게 되면, 1층과 2층이 함께 들러붙게 되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도(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은 2층만 있는 것이 아니고, 1층도 있고 그 위에 2층도 있습니다.
1층은 내가 안 놓치려고 내가 가꾸어서 되고자 하는 ‘나’가 따로 있고, 2층,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이것(2층)을 “거저 주시는 바”라고 합니다. 그런데 1층,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삽니까? 우리의 열심을 가지고 노력해서 내가 생각하는 ‘나’를 만들기 위해서 따로 애쓰겠지요. 이렇게 노력하는 것을 가지고 한자로 뭐라고 했습니까? ‘죄’, 두 글자로 이야기한다면 이것이 ‘죄인’이 됩니다.
2층 판대기가 아래층까지 내려오면 아래층과 겹쳐지는데, 그 2층은 “거저 주시는 바”가 되고, 1층,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뭡니까? 내 노력으로 열심히 닦아 놓은 내 인생 따로 있지요. 아래층은 ‘죄사함’을 받아야 되기 때문에 ‘죄인’이 되겠지요. 혼자 있을 때는, 거울을 보고 있을 때는 죄인인줄 몰라요.
자기 보고 이야기 합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거울 속에 있는 자기를 보고 이야기하지만 놀랍게도 겨울이 답변을 합니다. 사실은 자기가 자기를 보고 자기에게 답변하는 것이지만,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것은 바로 당신(왕비)라고. 백설공주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속상한 일이 생깁니다. 지금 궐 밖에 가출해 있는 그 백설공주가 나보다 더 예쁜데, 아, 기분 나쁘다.
“거울아! 거울아! 어떻게 할까?”
“죽여 버리죠.”
“알겠다. 죽여 버리자!”
자기가 자기에게 질문하고, 자기에게 답변하고, 그런 겁니다. 만약에 그 왕비에게 백설공주가 없었더라면 그 왕비는 자기가 죄인인줄 모르지요. 자, 2층에서 “거저주시는 바”의 그 거저주시는 분(그림에서 2층의 판대기)이 누구입니까? 그분이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이 밑에 깔려 있는 죄인은 누구입니까? 우리입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졸지에 죄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죽었다가 부활했지만 우리는 죽었다가 그냥 죽어 버립니다. 나중에 예수님의 영이 오지 않으면 그냥 죽는 겁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롬 6:23) 죄짓고 난 뒤에 값이 얼마가 나왔는지 따져 보니까, ‘사망’이 나왔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죄의 값이 사망이라고 하니까 어떤 사람은 그냥 꽉 죽어 버리면 그만이지, 이렇게 하는데, 이 사망이 두 종류의 사망으로 나누어져 있다는 사실을 몰라요.
사망이 두 종류인데, 첫째 사망이 있고 둘째 사망이 있습니다. 첫째 사망은 그냥 죽는 것(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콱 죽어 버리겠다는 그 사망)이지만, 둘째 사망은 안 죽고 영원한 지옥 불에서 안 죽고 영원히 허덕이면서 헤엄치는 겁니다. 부자처럼 물 안방울이 아쉬워서, 물 한 방울 달라고 애걸복걸하고(눅 16:24), 모든 것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모자람을 느낄 때 가장 지옥스러워요.
요새 아가씨들이 성형수술을 많이 합니다. 왜 얼굴을 뜯어 고칩니까? 참다 참다 못 참는 것이 뭔가 결핍증(뭔가 미흡함을 느끼는 것)을 느끼는 겁니다. 하! 이것만 깍아내면 되는데. 이것, 한 꺼풀만 벗겨내면 되는데. 사람이 아무리 부자가 되어도 지옥생활 하는 이유가 뭐냐? 그 조그마한 모자람이 이미 자기가 가진 많은 것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많이 가지고도, 약간 모자란 그것을 마저 채우기 전에는 참을 수가 없어요.
지옥에 간 부자는 물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물이 없으면 물 없는 채 살면 그만이지 뭐, 이렇게 되면 되는데, 물 없다는 그것이 물 없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물 없으면서도 물을 적시고 싶어, 물을 적시고 싶어, 나는 그걸 원해, 나는 원해, 사람 미치는 겁니다. 지옥 간 부자의 성질(성깔)이 지옥 가서야 그런 성깔이 나온 겁니까, 살아 있을 때부터 그런 성질이 계속 이어진 겁니까? 살아 있을 때부터, 조금 더, 조금 더, 하는 그 성깔이 그대로 지옥 가서도 그대로 이어져서 나오니까, 하나님께서 결핍으로 가득 찬 세계를 만들어 줘버렸어요.
얼마나 속이 타고 답답했으면, 천국 간 거지보고 자기 있는 지옥에 와서 물 한 방울 찍어 주고 천국으로 돌아가라고, 요청할 정도입니다. 그 답답증이 이틀, 사흘이 아니라 영원토록 쉬임없이 계속 간다는 겁니다. 지옥에 당도해서부터 그런 것이 아니고 살아 있을 때부터, 자기가 자기 욕망을 채우려고 하니까 그렇게 살던 그 버릇이 지옥에 가서도 계속 되는 거예요.
천국 가는 사람들은 주님 뜻에 의해서 그걸 바꾸게 합니다. 내가 내 노력으로 내 부족함을 채워서, 아이구, 만족스럽다, 이런 식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늘 결핍을 느끼는 이런 나는 채워도 채워도 소용없음을, 그래봐야 우리로 하여금 더욱 괴롭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 진짜 구원은 내가 채워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거저 주시는 데, 그 거저주시는 분,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는 거예요.
고물 처리하는 곳에 가면 집게 달린 크레인이 있습니다. 그 집게로 집어 올려서 트럭에 옮겨 싣습니다. 그 집게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덮석 집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 잡혀서 뭐합니까? 나는 채워야 해! 나는 결핍을 느껴! 지난번에 수학시험에서 한 문제 틀렸는데, 다음에는 다 맞아야 돼! 지금 우리 반에서 1등인데 전교 1등 해야 돼!
매일 우리는 몸부림치면서 더 채워야 된다, 고 하는 그것을 채우든지 발버둥을 치든지 우리는 우리 맘대로 그렇게 하고 있고, 그것보다 더 센 힘으로 우리를 딱 쥐어서 가자, 하고 데려가면 우리가 몸부림치다가도 위를 쳐다보면 거기에 누가 우리를 쥐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쥐고 있을 때, 그것은 뭡니까? “거저 주시는 바”입니다. 거저주시는 “그 은혜의 영광”을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찬미하게” 되는 겁니다.(엡 1:6)
제가 첫째 시간에 던진 문제 아직 해결 안 되었습니다. 첫째 시간에 던진 문제, 왜 예정되었는데 왜 꼭 죄인으로 만들어서 예정하는가? 예정된 자가 왜 죄인이 되어야 하느냐? 죄인이 안 되고 예정하시면 안 되는가? 그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여기 에베소서 1:10의 말씀처럼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가 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내가 천국 가서 편하게 사는 것, 이것이 예수님이 일하시는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편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라면 애초부터 우리가 죄 안 짓도록 했을 겁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를 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기 아들 예수님이 잘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예수님 쪽으로 통일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 사람이 있더라도 그것이 한사람으로 모아지도록, 자석이 있으면 주변의 쇠붙이를 자기 쪽으로 다 당겨옵니다. 그것처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역시 내 아들이 최고야, 내 아들은 만유중의 만유, 만유보다 더 높은 이름을 가져도 합당해, 다른 이름이 아무리 많아도 내 아들 이름은 최고가 되어야 해, 라는 그것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본래의 목적이었고,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뜻이었습니다.
모든 이름이 그분의 이름 밑에 다 무릎을 꿇고, 모든 이름은 그분의 이름만을 찬미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전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그렇게 되는 겁니다.
골로새서 1:16-18에 보면 나옵니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로마서 11:36에도 나옵니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예수님께로부터 와서 예수님으로 말미암고 예수님께로 돌아간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님으로 통일되게 한다고 하는데,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는 뭐냐?
“4대성인중의 한사람, 33살밖에 안 먹은 인간이 너무 건방지더라.”
“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몇 년이나 살았다고 함부로 그런 소리 하느냐?”
그래서 그 인간 죽어도 싸지, 라고 싸가지 없는 청년이라는 식으로 예수님을 평가합니다. 좀 아는 것도 있고 똑똑한 것은 있지만, 그 인간 못지않게 똑똑한 사람이 이 세상에 많은데, 자기만 똑똑한 줄 알고 착각해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독단적이고 자기밖에 모르는 그런 소리를 하느냐, 하고 밉상 받는 그런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솔직하게 자기 뜻을 이야기 했는데,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니까 그냥 보통 인간으로 보이거든요. 너도 인간, 나도 인간인데, 왜 나보다 네가 더 잘났다는 근거가 되어야 하는가, 라고 하거든요.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인데 네가 뭐야? 이런 식으로 아주 가볍게 대하죠.
예수님보다 586년 먼저 태어난 사람이 있습니다. 석가모니. 기원전 586년에 석가모니가 태어났습니다. 석가모니가 예수님보다 선배입니다. 인생을 알아도 선배가 다 안다는 겁니다. 공자도 예수님 보다 선배입니다. 소크라테스도 선배입니다. 후배가 어디서 까부냐,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말하기를, 내가 하나님이다, 합니다.
와! 이런! 이런 돌발발언이! 자기가 하나님이래! 자기가 만들어 놓고 자기가 심판한대요. 아버지께서 모든 심판을 자기에게 맡겼다(요 5:22)는 겁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는자는 저주를 받을찌어다.”(고전 16:22) 막가자는 이야기죠. 만약에 제가 여러분보고, 이근호를 믿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하면 이것은 막가자는 이야기 아닙니까? 이것은 돌아도 보통 돈 경우가 아닙니다.
그런데 나를 믿지 않으면 저주받는다, 그 이야기가 막가는 이야기 같고 과대망상증 같은 소리인데 세상에 그걸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그걸 아멘! 하고 그렇게 진실로 될 겁니다, 하고 믿는 사람들이 등장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이 바로 사도바울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의 종이 되어서 우리에게 전하는 겁니다.
만났다는 겁니다. 누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겁니다. 어디서 봤는데? 나는 봤다는 겁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그저 번개쳤다, 우뢰가 울었다, 그것뿐이고 모릅니다. 무슨 소리를 하던데? 사울아! 사울아! 네가 나를 핍박하는구나. 네가 나 핍박해봐야 너만 힘들다. 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이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는 겁니다. 이제 너는 이방에 나를 전하는 나의 종이다. 그런 이야기가 들려 왔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예수만 미쳤는지 알았더니, 여기 미친놈이 또 생겼구나. 그런데 사도바울이 그 편지를 쓰면서, 예수님이 세상에서 미쳤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종인 내가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이제 내말 듣고 나처럼 미친 사람은 누구뇨? 그자만이 ‘예정된 자’라고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라는 것은 나의 품위, 나의 인격을 아주 훌륭하게 높이기 위해서 스스로 도를 닦는 것을 종교라고 하고, 이웃과 국가를 위해서 착한 일을 많이 하는 이것을 종교라고 하는 겁니다.
신이 계시다면 어떤 인간을 원할 것인가? 착한 사람 모델로 삼아서, 자기 인격을 닦아서 이웃가 남을 사랑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훌륭한 일을 하다가 장렬하게 죽을 때 천국에서 받아준다. 이런 시나리오가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인데, 에베소서는 그게 아니라, 미친 예수 나도 믿는다. ‘예수가 다 이루었다’고 나옵니다.
지금 방금 제가 이야기한 종교라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고 악한 나를 뭐로 바꾼다? 악한 ‘나’를 선한 ‘나’로 바꾸는 것, 이것이 보통 알고 있는 상식적인 종교 아닙니까? 예수님의 복음은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창세전에 예정한 사람에게 거저 주셨다는 겁니다. 거저 줬다는 것을 가장 방해하는 것이 뭐냐? 그게 바로 종교라고 하는 겁니다. 종교단체.
거저 줬다는 이기쁜 소식, 거저 줬기 때문에 “그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이것을 가장 방해하는 것이 뭐냐? 내가 교회 다녀서 훌륭한 사람 되어서 착한 일 많이 하는, 이런 사고방식이 가장 방해가 되는 거예요.
강의를 처음부터 다시 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창세전부터 예정하신 것은 우리로 뭐 되게 하려 함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날 때부터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하려 함입니다. 죄인이기만 하면 되는데,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내가 알아서 죄인에서 벗어나 버리면, 거저 주시는 바가 뭐가 됩니까? 그리 되면 예수님께서 거저 주시는 용서함을 주시는 그 자리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점차점차 발전해서 훌륭하게 된다는, 나의 미래상, 내가 기대하고 있는 나의 목적치, 거기서 나를 발견하니까, 나는 엉터리 같은 나를 계속 쥐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스스로 어리석은 원숭이처럼 거울보고 싸우는 것과 똑같은 겁니다. 나는 죄인인데 이미 용서받아서 사건이 종결되어 버렸습니다. 사건종결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더 이상 이야기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이미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용서를 받았는데, 갑자기 내가 움직이면서 점점 나아지는 쪽으로 나가니까 그것은 종결된 것이 아닙니다.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착한 일을 하면 점점 천당으로 간다고 하다가, 갑자기 나쁜 짓을 하면 뒤로 점점 후퇴하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나아갔다가 후퇴했다가 에라이! 모르겠다, 하고 교회 안 나와 버립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나’를 잡아야 하지, 내가 되고 싶은 ‘나’를 잡으면 안 됩니다. 그러면 내가 나를 가르치는 교주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 되면 예수님에게 통일되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나한테 통일되는 것입니다.
어린이들이 지금은 잘 모르지만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사회에 나가게 되면 이런 경우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석유 값이 오르게 되면 대다수 시민들이나, 기름 값이 오르면 손해 볼 사람들은 중동사람들을 마구 욕을 하겠지만, 만약에 자기 친구나 형님, 혹은 자기가 대한석유공사에 몸담고 있다면 기분이 좋습니다. 보너스 1000프로! 석유 값이 오르면 엄청난 이익이 들어오잖아요. 대한석유공사에 취직해 있는 아들을 둔 엄마 같으면 석유 값, 올라라, 올라라, 올라라, 하지 않겠습니까?
석유 값이 오른다는 같은 사건이 어떤 사람에게는 화가 되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이것이 복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이것은 다 ‘나’ 위주로 세상을 통일시키려는 버릇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수능시험결과를 점수제로 하면 쉬운데 등급제로 매기니까 혼란스럽다? 등급제를 실시하는 이유는 공평하게 하기 위함인데 한 문제 더 틀려서 2등급이 되어 버리면 마치 큰 손해 본 것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자기입장만 생각하니까 자기는 손해라는 겁니다. 어릴 때는 잘 모르는데 커서 사회에 나가보면 사람들은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것이 진리냐, 옳은가를 묻는 것이 아니고, 그 일이 나에게 얼마나 큰 이익이냐, 아니면 나에게 손해냐, 그것만 달랑 묻습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안 묻고 그것만 묻습니다. 지난여름에 수영장에 가서 애들이 아폴로 눈병에 많이 걸렸습니다. 그때 누가 좋아서 기뻐했겠습니까? 전국의 안과병원, 매년 9월이 되면 연례행사로 그렇게 좋아들 했습니다. 돈이 되잖아요. 가족이 다 덩달아 좋아하면서 할렐루야! 하는 겁니다.
전부 다 자기 입장만 생각합니다. 그것은 진리가 아니고 자기에게 얼마나 이익이냐, 그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나’에게 통일시키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 6:23) 그것이 바로 죄입니다. 결국 사람은 죽잖아요. 그런데 첫째 사망은 그냥 죽는 것이고 두번 째 사망은 영원한 유황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둘째 사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황불에 들어가는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계의 중심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으로 통일되게 되어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로 통일됨을 거부하고, 내 중심으로 통일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대단히 피곤하실 겁니다. 그 이유는, 마음은 안 땡기는데 목사님이 하는 소리가 틀린 소리는 아니지, 이 괴리를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 라는 것 때문입니다.
그것은 현재까지의 ‘나’의 자화상이 허깨비라 여기고(그것은 괜히 빈껍데기에 내 망상을 채워버린 것) 그것을 터뜨려 버려야 합니다. 새우깡 빈 봉지 다 먹고 나서, 밟아 터뜨리면 뻥, 소리가 나잖아요. 허구와 욕망만으로 가득 들어차 있는 ‘나’를 밟으면 뻥, 하고 터져 버리고, 그 터진 그 빈자리에서 “거저 주시는 바, 창세전에 예정한 ‘나’”를 그동안 하나님께서 고이고이 길러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도보고 이것도 죄, 저것도 죄, 죄, 죄, 죄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죄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아예 내가 만든 인생을 새우깡 먹고 난 빈 봉지를 밟아주는 것처럼 밟아주시는 그 은혜입니다. 내가 못 밟으니까 주께서 밟아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항상 우리 뜻대로는 안 해주십니다. 우리 뜻대로는 안 해주고 하나님의 뜻대로만 되게 하십니다. 그 뜻이 뭐냐? 예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로 인하여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좀 쉬웠는데 약간 어려운 것이 나옵니다. ‘예정론’입니다.
1:4,5을 다시 봅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 .”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그 안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예정이란 말은 미리 정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뭘 미리 정했는가? ‘내가 너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미리 정했어요. 요한복음 15:16에 나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창세전부터 모든 것이 생기기도 전에, 모든 것이 하나도 없을 때에, 그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미리 정했는데, ‘너를 미리 선택하기로’ 정했습니다.
두번째, 용서하기로 정했습니다. 선택하고, 그 다음에 선택된 자에게만 용서를 베푸신다. 왜 이렇게 하시는가? 예정하신 당사자가 그렇게 했습니다. 누구입니까?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예수님 안에서란 말은 아무리 선택하고 예정해도 그것이 예수님 바깥으로 안 벗어난다는 것, 예수님이 하셔야 하는 그 사명 안에서), 예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선택과 용서하심은 누구 할일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실 일입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심으로써 결과는, 예수님을 찬미하게 하기 위해서, 모든 피조물로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서, 그래서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면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미리 정하신 겁니다. 선택하심과 용서하심을 예정하신 것은 예수님이 어떤 일을 하는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죄가 있어야 되고, 그 죄가 있어야 용서하심이 성립됩니다.
죄가 없는데 용서한다는 것이 말이 안 되잖아요. 죄가 있을 때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