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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6 대구강의 3 - 지옥의 하나님 6 - "법"에 대해서자유게시판히브리서

06 대구강의 3 - 지옥의 하나님 6 - '법'에 대해서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06 대구강의 3 - 지옥의 하나님 6 - '법'에 대해서

06,04,0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이름 - 이름 자체에서 능력이 나와서 !!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지난 시간에 '이름'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는데, 이것을 잠시 요약해보면, 이 이름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이름을 지어주셨는데, 그냥 이게 이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름 자체에서 능력이 나오는 방식으로 이름을 지으셨는데, 그 증거를 대라고 하면, "너는 아담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언명은 그냥 막연한 이름이 아니라 의미가 담긴, 그리고 이름에 준해서 인간을 끌고 가겠다는 단호함이 들어있고, 그렇게 해서 그 이름이 어디에 모이는고 하니, 하나님의 약속에 모여서 약속이 움직이는 대로 이름도 거기에 합당하게 작용한다는 것이다.

◈ 법 - 창세기 3장의 약속과 관련하여 !!

오늘은 교재 26페이지에 있는 '법'에 대해서 강의하겠는데, 이 법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겠는데, 즉 창세기 3장과 연결해서 말이다. 사실상 구약에서는 이 법이 제대로 나타나지 않고, 요한복음에 13장에 보면 '새계명'이 나오는데, 그 새계명을 사랑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구약의 옛계명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그러므로 구약에서 율법을 이야기할 때는, 그냥 율법만 두고 따져버리면 율법의 의미가 제대로 나타나지 않고, 사랑과 법을 대비시켜야 법의 의미가 비로소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먼저 이 사랑은 무엇인고 하니, 일단 사랑은 법과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법과 상관이 없다는 것은, 사랑은 무조건적이라는 것이다.

언약신학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가끔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데, 물론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언약을 둘로 나누어서 조건 언약과 무조건 언약으로 말이다. 무조건 언약을 조건이 없다고 해버리면 말은 맞지만 상당히 소극적 태도인데, 그 내용이 반감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김의원 교수 등이 구약의 언약신학을 주장하는 것을 보면, 좀 답답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가 행해야 구원을 받는가?" 아니면 "행하지 않아도 구원받는가?" 라는 식으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인간의 행함을 기준으로 삼아서, 조건 언약은 행해야 하고 무조건 언약은 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 사랑은, 선택이고 그저 주심 !!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근본적으로 그 기초부터 오해한 것인데, 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것은 맞지만, 그러나 사랑의 여러 요소 가운데 하나가 무조건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그냥 주는 것으로, 즉 "우리가 조건 없이 값을 치러야 합니까?" 라는 방식으로 묻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시는 것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선택이란 말인데, 사랑은 선택하시고 그냥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저것을 조건 있게 받을까, 혹은 조건 없이 받을까?" 라는 것은 성경에 없다는 것이다. 즉 "행함으로 구원받을까, 아니면 믿음으로 구원받을까" 라는 것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를 제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는 것이다. 그런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저분께서 주셨다" 라는 것을 수용하는 차원이지, 자기 쪽에서 "제가 어느 쪽으로 가서 구원받을까요?" 라고 하는, 즉 자기 구원에 집착하는 것을 옹호해주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 멜기세덱 교회 - 엥, 이게 뭐야 ??

아무튼 사랑은 무조건 주시는 것인데, 이렇게 무조건 주시는 것으로 시작해서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멜기세덱의 교회가 되는데, 이 '멜기세덱의 교회' 라는 용어자체를 어느 책에선가 얼핏 본 것 같은데, 신학서적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 용어라는 것이다.

이것을 어제 설교시간에 소개해드렸는데, 이런 멜기세덱류의 교회, 이것이 히브리서 7장에 나오는데,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말이다. 그야말로 항상 제사장으로서 있다는 것이다.

(히 7:1)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히 7:2)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 즉 첫째의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히 7:3)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 족보도 없고, 아비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까, 이것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이 지상에서는 질문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즉 이 지상에서 바라볼 때는 전혀 연결고리가 없다는 것이다. 족보도 없고 아비도 없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고, 그야말로 아무 것도 없으니 말이다. 마치 불효자식과 같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멜기세덱이 등장하는 이유를 배제하고 성경해석을 해버리면, 언약에는 조건 언약과 무조건 언약이 있는데, 무조건 언약을 옹호하기 위해서 조건언약이 있었다는 식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개인적인 구원론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구원을 받음에 있어서, 조건적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구원을 받으면 된다고 말이다.

◈ 구원은 열차가 아니다 !!

그러나 이렇게 되면 그냥 주심의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구원문제는 하나님께 속한 문제인데, 그런데 이렇게 조건적이나 무조건적으로 접근하게 되면, 이 구원이 인간의 자기 개인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구원이 시작이 있게 되는데, 이렇게 시작이 있다고 하는 것은 도중하차도 있다는 말이니, 즉 시작했다가 잘못하면 중간에 뛰어내려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참으로 위험천만한 사고방식인데, 교인들이 교회에 나와서 그 얼마나 불안해하겠는가? 시작이 없는데서 시작을 해야 되는데 (말이 되나?), 그런데 시작이 형성되는데서 시작을 해버리면, 즉 그 시작의 조건이 미흡해버리면 도중에서 내려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처음에 구원을 시작할 때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했다면, 그런데 나중에 10년 정도 지난 뒤에 그래도 조건 쪽이 더 좋다고 기우러진다면, 물론 그 반대로 조건적으로 시작했다가 무조건으로 옮기는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말이다. 이미 이렇게 시작이 있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멜기세덱 쪽으로, 즉 이렇게 시작이 없는 시작으로 시작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로마서 9장에도 나오듯이,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태어나기도 이전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이라고 하는 새계명은, 물론 나중에 등장하는 개념이기는 하지만, 그 존재는 처음부터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새 능력이 임하게 되니, 사랑이 임한다는 것이다.

(롬 9: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렇게 사랑이 임하게 되면 이제 옛 계명은 철수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새로운 능력이 왔기에 말이다. 옛 부대는 옛 부대로 끝나야 하는데, 즉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 사랑을 근거로 해서 법이 추가되는데, 결국 나중에는 이 법이 떨어지고, 마치 지붕에 다 올라가서 사다리를 차버리듯이 말이다.

◈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 ??

그렇게 해서 결국은 사랑만이 남게 되는데, 여기서 난데없이 멜기세덱이 등장함으로 말미암아서, 물론 여기서 멜기세덱을 강조하려는 것은 아니고, 성경에 그런 방식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법을 제대로 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사랑에 대해서 제대로 공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 말이다.

목회자가 설교를 하면서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이 나야 하는데, 그런데 사랑이 아닌 법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나게 되면 마치 본인이 그 사랑을 반드시 받아 쥐어야 하는 것으로, 즉 법으로 여길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돌아와야만 오늘날 새계명의 시대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목회자라면 당연히 설교를 그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 사랑은 그냥 주어지는 것 !!

그렇다면 이 사랑은 무엇인가? 무조건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주는 것' 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받기 싫어도 말이다. 이 사랑은 자체적인 능력이 있기에 무조건 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법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 사랑과 법이 대조되지만 사실은 그 사랑의 길을 열기 위해서 법이 추가되니, 구약 시편을 보면 이 법 자체도 사랑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그것이 시편 119편에 나오는데, 주를 사랑함과 같이 법을, 즉 율례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시 119:47) 나의 사랑하는바 주의 계명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시 119:48) 또 나의 사랑하는바 주의 계명에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를 묵상하리이다

이렇게 법이 사랑의 일부로서 주어지는데,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사랑이 없는 상태에서 법을 지키다보니 이것이 자기에게 하나의 '짐'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새계명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셨고, 신명기에도 나오는 것인데, 그런데 이 법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하고 법을 지키려고 하는 자기 사랑을 거기서 계속해서 뽑아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러니 법의 완성이 사랑으로, 즉 십자가에서 무조건 주시는 것인데, 그런데 기존의 자기 것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그것을 튕기게 된다는 것이다. 무조건 주시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조건 주신다는 것이 어느 정도 기분이 좋은고 하니, 자기가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이 그분에 의해서 주시겠다는 것이다.

◈ 아가서 - 무조건 들이민다 !!

이게 구약의 아가서에 나오는데, 지금 주일오후 예배시간에 출애굽기를 설교하고 있는데, 그것을 끝내고 나서 전도서를 할 계획인데, 언젠가는 이 아가서를 반드시 하고 싶은데, 이 아가서에 보면 그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무조건 들이민다" 라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하는가?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인에게 어떻게 하는가? 무조건 들이민다는 것이다. (아니, 남자의 자존심도 없나?) 파파라치도 여기에 따라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 들이미는고 하니,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하다고 하면서 말이다.

(아 8:6)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전도서에 보면, 이 사랑은 표현할 수 없다고 했는데, 즉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없다는 것이다. 만약에 사랑을 표현해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표현한 것을 모두 다 동원해도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는데, 어떤 분이 이것을 어떻게 주해를 했는고 하니, 그 아이디어를 한번 들어보라는 것이다.

◈ 사랑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 !! - 그럼 몸으로 ??

(고전 13: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기에 믿음과 소망이 속하는 것과 사랑이 속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서로 동등한 것이 아니라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니 말이다. 사랑이 독보적이라는 말인데, 즉 믿음과 소망하고, 그리고 사랑은 서로 차이가 나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 믿음과 소망은 지상에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자기의 감정과 의지가 개입된 것이고, 그래서 초조하게 고대하고 인내해야 하는 반면에, 그런데 사랑은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냥 주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마지막에는 이 믿음과 소망이 사랑에 흡수가 되고 통합이 된다는 것이다.

저는 이런 성경해석에 대해서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보는데, 물론 좀 의구심이 가는 부분이 있지만, 성경에는 이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양반은 믿음과 소망은 시간적으로 먼저 날아가 버리니 조금 못하고, 사랑은 영원하니 우수하다는데, 그것이 약간 걸린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걸리는 것은, 이 믿음, 소망, 사랑은 은사, 즉 선물인데, 이 말은 사랑만 그냥 주시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소망도 그냥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자기 믿음 버리고 주의 믿음이 들어오고, 자기 소망 버리고 주의 소망이 들어오고, 물론 사랑도 그렇고 말이다. 그렇다면 믿음과 소망은 우리가 잡고 있고, 사랑은 주님은 잡고 있는가? 다 같은 은사인데 말이다.

저도 약 20년 전에 이런 설교를 한 적이 있는데, 부산에 있는 중앙교회에 강도사 선보러 가서 말이다. 물론 떨어졌는데, 설교를 못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데 얼마나 긴장을 했으면 말이다. 저 같으면 이 본문으로 어떻게 설교를 하는고 하니 다음과 같다는 것이다.

◈ 사랑을 원천으로 삼아 믿음과 소망이 !!

물론 앞의 그 양반의 설교도 일리가 있지만, 이 믿음과 소망을 유지시켜주는 원천이 사랑에서 출발을 해야 하는데, 그래야 새계명의 취지에 맞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새계명을 준다고 하면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준 것이 아니라, 사랑만 주었으니 말이다. 이 주님의 사랑에서 믿음이 생기고, 그리고 사랑으로 말미암아서 소망이 생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믿음을 풀어 헤쳐보니 주님의 사랑이 가득히 차 있고, 그리고 소망을 풀어보아도 주님의 사랑이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자꾸만 삐죽거리고 엉뚱한 소리를 한다면) 저 같으면 이렇게 하겠는데, "여러분, 니 마음대로 하세요" 라고 말이다. 아무튼 이렇게 새계명과 연결해서 생각해야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새계명, 즉 사랑을 준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무슨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고 하니, 구약에는 두 노선이 경쟁적으로 흐르고 있는데, 이것이 신약에 오면 하나가, 즉 법이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마치 고속도로를 자동차 두 대가 경쟁을 하는데, '율법' 이라는 차는 가다가 옆으로 빠져버리는데, '사랑' 이라는 차는 앞으로 계속해서 신나게 달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 구약 - 사랑과 율법이 나란히 달려가는 고속도로 !!

이런 식으로 구약에서 두 노선으로 '쭈악' 가는데, 물론 율법도 사랑에서 나온 것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왜 법이란 것이 필요한가? 아까도(?) 말했지만, 법에서 주님의 사랑을 무조건 주는 사랑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인데, 그러한 점이 바로 현재 인간이 처한 곤궁하고 난처한 입장이고, 그리고 인간의 타락, 바로 이런 것들을 찾아내기 위한 요소로서 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해보면, 인간에게 법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이 선악과를 따먹으면 인간이 될 수 없는데, 흙이 되니 말이다. 그런데 이 인간의 존재기반에는 말씀이 들어가야 하는데, 만약 말씀이 빠져버리게 되면, 이것을 타락, 혹은 부패라고 하는데, 이것은 말씀의 기초가 아니라 안에 미지의 뭔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또 다시 법이라는 형식으로 안에 있는 것을 공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자기 배후에 있는 세력의 주동을 힘입어 이 법을 지키는데, 지키는 그 과정 속에서 인간은 자기가 신처럼 절대자가 된다는 모양새를 들키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법을 지켰으니 절대적으로 이렇게 위대하다" 라고, 자기 신적인 모습을, 자기 절대성, 즉 죄악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법을 지키라고 했으니, 그렇게 하다가 자기 죄악을 드러내게 된다는 것이다.

◈ 선악과는 왜 율법이 아닌가?

그렇다면 선악과는 율법인가? 그렇지는 않은데, 그렇게 인간이 선악체제에 있음을 고발하기 위해서 추가된 것이 바로 '법' 이라는 것이다. 선악체제에 이미 놓여있는 그 죄를 더욱 더 죄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그 법에는 사랑이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법을 지키려고 함으로서, 주님의 사랑은 찾지 못하고 자기 사랑만 잔뜩 끌어않고, 그것을 되풀이해서 끄집어낸다는 것이다.

(창 2: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창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교재 26페이지를 보자.

** 4. 법에 갇혀버린 인간의 신세 - [ 금지된 것을 소망한다 ]

여기서 약간 어려운 논리를 소개하겠는데, 이것이 라캉의 논리인데,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과 이 라캉의 논리를 서로 비교하면서, 다시 정리하는 의미에서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 라캉 - 금지된 것을 소망한다 !!

라캉은 주장하기를, "인간은 금지된 것을 소망한다" 라고 하는데, 여기서 '소망' 이라는 것은 평소에 없는데, 그런데 무엇을 하지 말라고 금지하면 소망이 생긴다는 것이다. 인간은 평소에는 그냥 있다가도 누군가 '하지 마라' 라고 하면 그것이 곧 경계선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경계선이 생긴다는 것은, 그 선까지는 허용이 되는 구역이고, 그 다음부터는 출입금지구역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에게 무엇이 생기는고 하니, 그것이 바로 '주체성' 인데, 이런 주체성, 즉 "내가 누구인가?" 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예를 들어서, 학교복도에서 교장 선생님이 '어이, 학생' 이라고 부르면, 그렇게 부르는 순간 학생이라는 주체성이 확립된다는 것이다. 그 학교에서는 말이다. 그래서 시험을 칠 때가 되면 시험준비를 해야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 교장이 '김 선생님' 이라고 부르면, 그 김 선생님은 시험을 칠 때 시험공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감독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시험문제는 준비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이렇게 자기가 그 공간에서 어떤 사람이냐고 할 때에, 그렇게 호칭을 부를 때는 이미 경계선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만약 지나가는 여자에게 '아줌마' 라고 불러서 그 경계선을 치게 되면, 그 아줌마는 경계선 너머에 있는 아저씨를 소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 융 - 남성성향끼리, 여성성향끼리 !!

이것을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은 주장하기를, 우리 인간 속에는 남성으로서의 여성,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남성이 항상 있다고 했는데, 이 둘이 항상 있어서 남성도 여성적인 요소가 있고, 여성도 남성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사회에서는 남자는 남자끼리 이야기하고 여자는 여자끼리 이야기한다는 말이 있는데, 그러나 그것은 상징세계에서만 통하는 것이지, 실제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고 하니, 남성성향이 있는 사람은 남성성향끼리 만나고, 여성성향이 있는 사람은 여성성향을 그리워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경계선에서는 자기에게 부족한 것을 보충해야 하기 때문에 말이다.

예를 들어서, 남자 성향을 가지고 있는 여성은 물론 남성을 구하기는 하지만, 요즘은 레즈비안이라고 해서 같은 여자끼리도 살기도 하는데, 자기는 여성이기 때문에 경계선에서 남성을 구하기는 하지만, 자기는 남성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성적인 남성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보충이 되니 말이다. 이렇게 보충이 되면, 자기의 남성성향은 더욱더 남성성향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말이 굉장히 복잡한데, 그러니 남자는 남자끼리 만다는 말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남성적이니 남성적으로 살겠다" 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소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소망한다는 것은 미흡한 것을 보충한다는 의미인데, 이렇게 정신분석 학자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함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 수 만가지 경우를 모두 다 비교하면서 나온 이론들이라는 것이다.

◈ 라캉 - 남성도 여성도 아닌 미지의 X !!

융과 같은 경우에는 이렇게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어서 보는데, 그런데 라캉은 아예 밑으로 더 내려간다는 것이다. 즉 남성도 없고 여성도 없고 전부를 두리뭉실 하나로 뭉쳐버린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 같은 것 말고 완전히 하나로 만들었을 때, 이렇게 가장 밑바탕에 있을 때 그것이 과연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것을 라캉은 '미지의 X' 혹은 '라아지 엑스(X)' 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마치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혼돈(카오스)'와도 같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밑바닥은 혼돈으로 되어있는데, 그 근거가 무엇인고 하니, 정신병자들의 경우에 그들을 보면 혼돈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혼수상태 말고 말이다.

만약에 의사들이 누구를 연구한다면, 그런 대상이 정상인이겠는가, 아니면 비정상인이겠는가? 당연히 비정상인들인데, 그들에게 연구할 것이 더 많다는 것이다. 병도 희귀한 병에서 뛰어난 논문들이 많이 나오고 말이다. 왜냐하면, 안정상태에 있다는 것은, 무질서가 역사와 전통을 통해서 체계가 잡힌 것이 안정된 상태이기 때문에 말이다.

◈ 카오스를 찾아 삼만리 !!

그러니 안정된 상태의 밑바닥에는 아직도 안정된 상태에 들어와야 될 남아있는 여분의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여분의 것들이 원판이 되는데, 즉 안정을 추구하는 이전의 상태 말이다. 혼돈의 상태와도 같은 것 말이다. 그러므로 이런 원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아직 제대로 정리되지 않는 요소들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문화인류학 - 왜 원시종족을 연구하는가?

문화인류학이 무엇을 연구하는 학문인가? 안정된 서양사회를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저 폴리네시아에 있는, 그리고 아프리카의 미개한 원시종족들을 찾아다니면서 인류의 뿌리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국가경영에 있어서 법적인 체제로 합리적인 조립이 되기 이전의 준(準) 혼란상태로 있기 때문에 말이다. 그래서 감옥이나 특히 정신병원 등을 연구하는 것은, 인간들이 안정되기 이전에 뭔가 감추어져 있는 기본적인 인간의 감정과 같은 것이 있다는 것이다.

고대철학에 보면 신화의 세계가 있는데, 이 신화의 세계에서는 로고스가 나오는데, 이 로고스는 법적인 체제인데, 그 이전은 뮈토스의 세계, 즉 신화의 세계라는 것이다. 이 신화의 세계는 혼돈과 혼란의 세계로서, 즉 무질서의 세계라는 것이다.

바이올린 현의 마디를 이렇게 집으면 질서가 나오는데, 2;1로 이렇게 현을 그으면 도레미피솔라시도가 나오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하나의 점을 찍으면 이쪽과 저쪽에서 비로소 질서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을 아페이론(?) 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경계로 해서 실체를 잡는 것인데, 이렇게 끊어지게 되면 그 하나 하나가 실체가 된다는 것이다. 끊어지는 것이 없으면 신화의 세계, 즉 혼돈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로고스가 와서 끊어주어야 하는데, 이것을 땅의 배분이라 하고 말이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 로고스, 즉 법에 의해 주체가 결정 !!

원래는 무질서의 세계에서 이렇게 주체가 나오는데, 그렇다면 이것이 오늘 강의내용과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는가? 이 로고스가 바로 법이라는 것이다. 즉 주체가 되기 이전에 로고스가 먼저 있어서, 이 로고스에 따라서 주체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라캉은 주장하기를, 이런 로고스 역할을 아빠와 엄마가, 그리고 사회의 선배들이 한다는 것이다.

이전에 한번 강의를 했지 싶은데, 슈페이너(?)가 주장한 '유아도덕심리발달이론' 이라는 것이 있는데, 즉 유아에서 어른이 될 때까지 도덕의식이 어떤 순서로 차곡차곡 발달하느냐는 것이다. 여기서 주장하기를, 아이들은 법을 기다리는데, 왜냐하면, 아이들은 '단어'를 모르기 때문에 "저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는데, 인간은 이렇게 혼돈의 세계, 즉 인간의 밑바닥을 질문한다는 것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 ① 質料因 ② 形象因 ③ 運動因 ④ 運動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4가지 원인으로 보았는데, 그 첫째가 질료인(質料因)인데, "이것은, 저것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라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 둘째가 형상인(形象因)인데, "이것이 무엇인가?" 혹은 "이것은 무엇으로 규정되는가?" 라는 것이다.

그 다음 셋째가 운동인(運動因)인데, "엄마, 저것은 왜 흔들리지? - 바람이 불어서. - 그러면 바람은 왜 불지?", "엄마, 나는 어떻게 생겼지? - 응, 엄마 아빠가 밤중에 사랑을 해서" 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제적인 요소가 원인이 아니라 외제적인 요소가 원인이 되어서 현재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혹은 생겼는가?" 라고, 이렇게 자기 바깥에 관심이 있기에, 이렇게 자기 바깥과 자기를 연관시키는 질문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운동인(運動因)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넷째가 목적인(目的因)인데, 예를 들어서, 산불의 경우에 산불이 난 목적을 묻는다고 하면 목적인인데, "엄마, 저 산에 불이 왜 났지? - 응, 하나님이 인간들을 혼내려고 내셨지" 라고 하면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고, 산불이 어떻게 일어났느냐고 물으면 그것은 운동인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4가지 원인 위에 모든 사물이 다 있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인데, 그러니 원천을 모르면, 즉 근본을 모르면 자기 자신을 모른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4가지의 원인이 구체화된 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곧 '단어' 인데, 즉 이 4가지 원인을 함축해서 모은 것이 바로 단어라는 것이다.

◈ 엄마와 아빠, 그리고 선배에 의해서 !!

진도가 너무 빠른데, 다시 "엄마, 저건 뭐야? - 멍멍이야. - 왜 멍멍이인데? - 멍멍하고 짓거든" 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 '멍멍이' 라는 단어는 그 사물의 속성을 규정지을 때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는 4가지 원인을 살펴서 그 속성을 파악해서 규정을 짓고, 그 속성이 걸맞는 단어를 새겨주면, 그것이 바로 '이름'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누가 가르쳐주는가? 엄마와 아빠, 그리고 선배라는 것이다.

라캉의 경우를 이야기하면, 그는 경험주의자인데, 이 아기의 경우에 보통 백일잔치에 어떻게 하는가? 실과 책과 돈을 그 아기 앞에다 놓지 않는가? 실을 잡으면 오래 살고, 책은 일류대학을 가고, 그리고 돈은 재벌이 된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 앞에 있는 그것들을 다 치워버리고 컴퓨터를 가지고 오라는 아기가 있는가? 그런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아이는 부모가 자기 마음대로가 아니라 지정해주는 가운데, 사실은 엄마와 아빠가 그렇게 유도하는 셈인데, 그렇게 해서 그 아기의 자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부모가 아니라면 선배의 인도함으로 말이다. 바로 그렇게 해서 인간의 주체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 주체 - 기본적인 혼란을 배척하고 형성됨 !!

그러면 이렇게 주체가 형성되기 위해서 어떻게 했는가? 기본적인 혼돈과 혼란을 배척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배척을 하고 난 그 나머지가 무엇인고 하니까, 그 인간 속에 법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법이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배척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왜 하나님을 배척하는가? 자기는 부모로부터, 그리고 선배에게 나름대로 뭔가 배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평소에 이렇게 배웠으니, 신이시여 인정해주소서" 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하나님이 어떻게 그것을 용납해주시겠는가? 하나님의 법은 사랑인데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어떠한가? 태어나면서부터 혼란에 대해서 나름대로 대비하게 되는데, 그 혼란을 극복해야 할 위험부담을 느끼고서 말이다. 그래서 스스로 자립해서 그런 혼란을 극복해 나가려고, 즉 자기 힘껏 노력하는, 그런 시도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선악체제를 가지고서 말이다.

그래서 엄마가 "야, 너는 피아노를 배워 - 왜? - 그래야 피아노 학원이라도 차려서 먹고살지" 라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엄마가 그 아이에게 "너는 이런 식으로 하면 살아갈 수가 있어. 너는 피아노에 소질이 있단 말이야" 라고 규정을 지어준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원인들 중에서 고르자면 형상인으로서 말이다. 부모나 선배는 뭔가 이렇게 규정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질료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왜 주전자는 나무처럼 타지 않는가? 무엇이 다르기 때문인가? 질료가 다르기 때문인데, 그래서 나무로 주전자를 만들어서 난로 위에다 올려놓으면 다 타버린다는 것이다. 선배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기 때문에 후배들에게 가르치기를, "애야, 주전자는 나무로 만들면 안 된단다. - 왜요? - 그렇게 하면 타기에 말이다. - 선생님은 어떻게 알았지요? - 나의 선생님에게 배웠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 왜 법이 필요한가?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고 하니, 이 세상에서 문명이라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로고스, 즉 법적인 체계가 갖추어져야 하는데, 그렇게 해야만 혼란 속에서도 버텨내고 견디어낼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후배가 또 묻기를, "선생님 쇠를 가지고는 무엇을 만들 수 있나요? - 응, 쇠는 단단하기 때문에 주전자를 만들 수 있어. - 그리고요? - 응, 또 칼을 만들 수 있지. - 왜요? - 적들이 쳐들어오면 막으려고 말이야. 물론 쳐들어가기도 하고 말이야. - 왜? - 그렇게 전쟁을 해서 토지와 노예를 얻지. - 왜요? - 그렇게 하면 우리는 편안하게 놀고 노예들을 일시키면 되. - 야, 대단해요 - 뭘 그 정도를 가지고" 라는, 이것이 바로 고대사회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쪽은 청동기 문화이고 저쪽은 철기문화라면, 칼싸움을 하는데 전혀 게임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가 묻기를, "선생님, 왜 이렇게 지지요? - 응, 우리는 철이 없어서. 내가 몰래가서 배워와야지" 라는 것이다. 그것이 원자력이 되고, 컴퓨터가 되고, 그리고 IT문화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고급문명을 가질수록 승리자가 되는 로고스 체계 속에 우리가 있다가 보니, 이 법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냐는 것이다. 우리가 체계를 가지고 살아가는데 있어서 말이다. 바로 이 법에서 언어가 나오고, 이 언어에서 명령체제가 나오고 말이다. 언어는 모든 것이 명령체제라고 전에 이야기했는데, 즉 "비가 온다" 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명령이라는 것이다.

◈ 누군가가 '꽃' 이라고 불러줄 때 !!

라캉에 의하면, 이 주체라는 것이 타인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을 상징체제라고 하는데, 그 전까지는 포승이 되어서 '나' 라는 것이 없었는데, 누군가가 '나'를 '누구' 라고 이름을 불러줄 때 '그'가 되어서, 즉 의미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꽃' 이라고 불러줄 때, 비로소 그것이 의미로 자기에게 다가와서 꽃이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하나의 상징체제인데, 그런데 회사에 가게 되면 기존의 상징체제는 다 부수어 버리고 새로운 상징체제로 다시 조립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젊은 아이들이 처음 회사에 가서 사표를 내고 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자기 체제를 버리고 새로운 회사에 맞는 체제로 만들려고 하니 너무 힘들어서 말이다. 그래서 기존의 체제가 그대로 통용될 수 있는 그런 직장을 찾는다는 것이다.

◈ 주체는, 항상 타인에 의해서 조종 받음 !!

제가 여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직장을 잘 고르고 잘 참으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주체라는 것은 항상 타인에 의해서 조종 받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타인에 의해서 조종을 받는데, 타인 중에 제일 큰 타인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구약성경에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뱀, 즉 악마라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악마에 의해서 조종을 받는데, 라캉과 같은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욕망'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현대철학은 욕망의 철학인데, 왜 그들이 악마라고 하지 않는고 하니, 악마나 천사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선배들이 가지고 있던 종교형식구조에서 나온, 서로 대비되는 구조이기에 인정하지 않고, 그러면 어디까지 인정하는고 하니,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 욕망의 특징 - 어디로 튈지 모른다 !!

그런데 이 욕망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결혼을 해서 잘 살고 있다가 정말 꿈에 그리던 여인을 만났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청년 때에는 그리던 이상형을 만나지 못해서 그 대타로 적당한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했다면 말이다.

실제로 옛날에 봉화군수(?)인지 누군가가 그런 일이 있었는데, 서울에 공부를 하다가 방학이라서 촌에 내려왔는데, 왜 이전에는 부모끼리 약속을 해서 사돈을 미리 맺고 하잖아요? 그래서 부모의 강제적인 권유로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공부를 시켜주었으니 부모 말을 들어야지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그냥 같은 동네에 사는 오빠 동생 정도이지 말이다. 정말 자기 타입이 아닌데도 결혼을 했는데, 그런데 나중에 자기가 군수가 되고 나서 20대에 그리던 이상형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두 집 살림을 살게 되었고 말이다. - 아쿠, 부러버 !!

◈ 들뢰즈 - 예수 믿는 것도 욕망 !!

이것을 현대철학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비록 부모가 아이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이 자아가 된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그 밑바닥에 혼돈이 있는데, 이 혼돈이 바로 욕망인데, 이 욕망은 그 특징대로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것이다. 즉 부모가 만들어준 상징체제로 그렇게 다 잡히지를 않고, 다른 욕망으로 삐져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들뢰즈의 철학은 무엇인고 하니, 인간의 욕망 가운데는 예수를 믿고자 하는 욕망도 들어있다는 것이다. 즉 기존 체제에 대한 저항의식으로 본다는 것이다. 기존 이 세상에 대한 불합리함과 나름대로의 탈출하고 싶은 욕망이 하늘나라를 사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욕망의 구조를 살필 때, 사실 욕망이라면 라캉도 한가닥하는 사람인데, 라캉 이전에는 법으로 금지하면 욕망이 줄어든다고 가르쳤는데, 사실 그렇게 가르쳐야 될 이유가 있는데, 왜냐하면, 아이가 막나니이고 자기 마음대로 할 때는, 그것을 붙잡아야 되고 야단을 쳐야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그 아이가 그것을 발견하게 되고, 그 상황에서 질서가 잡힌다는 말이다.

일요일에 하는 개그콘서트에 보면, 마지막 순서에 '반갑습니다' 라는 인상 깊은 코너가 있는데, 배경이 식당이고 여장을 한 이 남자종업원이 나오는데, 이 식당에 아이가 부모와 함께 와서 식사를 시켜놓고 식당을 분주하게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종업원이 그 아이를 발로 차버리는데, 개도 그렇게 차버리고 말이다. 왜냐하면, 종업원은 아이는 말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 라캉이 어떻게 로마서 7장을 알았지? - 아하, 신부님 !!

그것을 과장되게 표현했는데,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옛날에는 법 자체가 권위가 있고 힘이 있어서 법으로 눌리면 눌러진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라캉의 뛰어난 점이 나타나는데, 사람에게 이렇게 하나의 법을 정해서, 즉 경계를 만들어서 그 선을 넘지 말라고 하면, 그때부터는 관심도 없었던 경계 너머에 있는 것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분출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로마서 7장에 나오는 내용 그대로인데, '탐내지 말라' 라고 하는 그 순간, 그 어떤 것이 탐내는 것인지 그리워지고 맛보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롬 7: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렇다면 이 '나' 라고 하는 것은, 법대로 지켰다고 했을 때, 라캉 이전에는 법대로 지킨 사람은 착한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인정을 받았는데, 그런데 라캉이 등장해서 하는 말이, 이 '나' 라고 하는 것은, 법대로 지켰다고 하는 그 순간 내용물과 잠시 붙었다가 도로 떨어지고, 경계선 저 너머에 있는 지금 이곳에 없는 새로운 '나'를 찾는다는 것이다. 이게 라캉의 아주 뛰어난 점인데, 지금 여기에 없는 다른 곳에 있는 새로운 '나'가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다.

◈ 왜 남의 고추가 더 큰가?

우리나라에 축제가 엄청나게 많은데, 의성 고추축제, 하동 녹차축제, 악양 대봉감 축제 등등 말이다. 그런데 이런 곳만 찾아다니는 상인들이 있는데 자기들만의 정보가 있어서 말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자리잡기' 인데, 자기들끼리 그야말로 난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새벽부터 와서 제일 좋은 자리를 잡았다고 여겼는데, 그런데 나중에 보면 저쪽이 고생해서 얻은 자기 자리보다 장사가 더 잘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으로 이상한데, 그렇다고 자리를 바꾸면 어떻게 되나? 역시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다 같은 식당을 해도 남의 식당이 더 잘되는 것으로 보이고 말이다. 즉 남의 떡이 더 크게 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을 옛날에는, 그렇게 남의 자리를 욕심내면 안 된다고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라캉은 말하기를, 언젠가는 그쪽으로 가도록 멈추지 않는 것이 곧 인간의 욕망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욕망은 자아가 아닌데, 왜냐하면, 자아라고 하는 것은 남들이 그렇게 불러줄 때만 자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아는 곧 보따리를 싸서 이사를 갈 그런 자아인데, 여기서 저기로, 또 저 너머로 말이다.

◈ 라캉 - 주체는 없다, 다만 있는 척 할뿐 !!

라캉 그 이전까지는 인간이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 거대한 세계문명을 이루었다고 했는데, 그런데 라캉은 말하기를, "주체는 없다. 다만 있는 척을 한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체가 있는 척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법' 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이 있으면 주체가 되는가? 그것이 아니라, 법이 오게 되면 사람은 그 법을 가지고 자기 힘을 모은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힘을 소유할 때 존재가 되면서 일시적인 자아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아 속에는 힘이 들어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라캉의 이론이 구약성경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는고 하니, 이방종교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항상 자기 힘을 믿는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레미야에도 나오고 이사야 등에도 나오는데, "유다나라야 애굽을 의지하지 말고, 항상 여호와를 의지하라" 라고 말이다. 애굽이 제 아무리 말과 군사가 많아서 힘이 강해 보여도 말이다.

(사 36:9) 그런즉 네가 어찌 내 주의 종 가운데 극히 작은 장관 한 사람인들 물리칠 수 있으랴 어찌 애굽을 의뢰하여 병거와 기병을 얻으려 하느냐

그런데 문제는 여호와가 힘이 없는데 어떻게 하는가? 이 여호와는 힘이 없고 오직 약속만이 있는데, 이것을 호세아와 아모스에 보면 '사랑의 약속'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호 11:4)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고 저희에게 대하여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같이 되었으며 저희 앞에서 먹을 것을 두었었노라

그런데 이 사랑은 힘이 없는데, 이 말은 사랑 앞에서는 있는 힘도, 즉 자기가 자기답게 되려고 만들어놓은 그런 힘도 다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자기 힘이라고 여기는 것이, 그것이 오히려 그분이 주시는 사랑을 훼방하고 추방시키고 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추방시킨다고 해서 추방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사랑을 시시한 것으로 차버리고, 오직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 즉 자기를 존재케 하고 자아를 형성케 하는 힘을 최고라고 우기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인데, 그러나 교회가 힘을 모으게 되면 촛대를 옮기게 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사자 - 교회의 촛대를 옮겨야 !!

어제 오전에 이런 설교를 했는데, "교회가 무엇인고 하니, 촛대를 옮기는 것이다" 라는 것인데, 무슨 말인고 하니, 텐트 속에서 남녀가 분위기를 잡고 사랑을 속삭이고 있다가 그 텐트를 '쑤욱' 하고 들어 옮기게 되면 얼마나 민망스럽겠는가? 적나라하게 다 들키게 되고 말이다.

이렇게 촛대를 옮겨버리면 촛대는 공간에 잡히지 않는데, 마치 별이 옮겨지는데 있어서 옮기면 옮겨지는 데로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 별은 주님의 오른 손에 붙들린 하나님의 사자인데, 결코 우리편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이동하라고 시키는 데로 그렇게 이동할 뿐인데, 이게 곧 하나님 사자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자는 사람 편에 속하는 것이 아니니, 당연히 목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매우 간단한 원리도 한국교회는 모르고, 하나님의 사자가 목사인 줄 안다는 것이다. 사자는 그냥 주님 손에 붙들려서 촛대를 옮길 뿐인데 말이다.

◈ 신의 세계가 처음의 혼돈의 세계와 왜 동일한가?

라캉의 이론에 있어서, 상징계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까 이동성에 있는데, 즉 변화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변화하지 않는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고 하니, 이것을 '실재계' 라고 하는데, 상징계는 이동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 실제계는 이동하는 것을 모으는 세계이기 때문인데, 상징계가 갈라진 그 틈을 통해 잠시 실재계는 얼굴을 내비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이론인고 하니, 혼돈을 법으로서 정리한 것이 상징계인데, 그런데 이 상징 위에 실재계, 즉 신의 세계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신의 세계가 처음에 출발했던 혼돈의 세계와 같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이 실제계에 변함이 없고 안정된 신의 세계, 즉 신이 있다면, 혼란스러운 자아가 늘 목표처럼 추상적으로 자기 것을 투사한 세계가 실재계라는 말이다.

이러한 신과 인간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는데, 이런 유사성이 있다는 것은 서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렇게 끊어지지 않는 것은 인간의 요소가 확장된 것이라는 말인데, 이렇게 확장되는 것을 철학에서는 '외삽'이라고 하는데, 외부로 둘러 싸여있다고 해서 말이다. 또는 외부로 '좌악' 늘어났다(extension)고 하는 말이다.

◈ 신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내었다 !!

이렇게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외삽, 즉 뚝뚝뚝 확장되고 늘어지는 것이 바로 무한한 신이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인간은 앞일을 예상하지 못하는데, 이렇게 앞일을 예상하지 못한다는 것은 경계가 있다는 것인데, 이렇게 경계가 있으면 인간은 경계 너머를 소망하게 되는데, 그런 소망하는 대체물이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은 결국 인간이 만들어내었다는 말이 되는데, 그래서 인간이 이성적으로 신을 만들면 냉혹하고 전능한 신이 되는데, 그런데 이렇게 이성적으로 되지 않는, 즉 아직도 인간 속에 정리되지 않은 감정과 의지가 있는데, 이것을 해결하는 신이 바로 '사랑의 신' 이라는 것이다.

◈ 포이에르바하 - 신은 사랑이다 ≠ 사랑은 신이다 !!

그래서 포이에르바하는 "신은 사랑이다" 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신이다"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 "신은 사랑이다" 라고 해버리면, 신이 주어(주부)가 되고 사랑은 술어(술부)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원래 주어라는 것은 내용이 없는데, 즉 주어의 내용은 술어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술어에 예속되는 것이 주어라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이다" 라고 하면 말이 되는데, 그리고 "신은 사랑이다" 라고 해도 같은 말인데, 그러니 신은 내용이 없고 사랑이 진정한 신이라는 것이다. 언어구조상 그렇게 되는데, 술어가 주어를 지배하게 되는 것이 현재의 언어구조인데, 이 언어구조가 로고스, 즉 인간의 이성에서, 즉 법 체제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뭔가 이렇게 경계를 쳐야 되는데, 항상 이 경계를 잊지 말라는 것이다. 아무튼 법에 의하면 경계를 치게 되는데, 이 경계선 밖에 있는 저쪽에다 '나'를 몽땅 이사를 해서 자아를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아를 만들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자아를 능가하는 힘을 모으고 뚫을 수 있는, 이것을 사회에서는 '정의' 혹은 '의로움' 이라는 것이다.

◈ 전율을 일으키게 하는 말씀, 값없이 !!

여기서 로마서 3장을 한번 찾아보자. 우리가 다 아는 말씀이지만, 그러나 성경을 볼 때마다 그 의미가 새롭게 밝혀진다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얼마나 좋고 감사한지 말이다. 어제 오후예배 설교 시간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 로마서 3장의 말씀을 볼 때마다 전율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특히 '값없이' 라는 이 말씀에 말이다.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러니 20년을 목회하고 어쩌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한 순간에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의미 없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20년 동안 죄 지은 것도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값없이' 주심에 의해서 말이다. 우리 모두가 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값없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이야기인가?

여기서 로마서 10장을 한번 찾아보자.

(롬 10: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롬 10: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 10: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이 말씀이 굉장히 어려운 말씀인데, 왜 어려운고 하니까, 4절에서 6절을 보면,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찾아 나선다고 우리 손에 잡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에 올라가도 안 되고 지옥에 내려가도 안 된다는 것이다.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10:5)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롬 10:6)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확정된 상황에서는, 그런 상황에서 또 예수님을 찾기 위해서 천국이나 지옥으로 가겠느냐, 그런 신비주의에 빠지겠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 계시는가? 그것이 8절과 9절에 나오는데, '네 입에, 네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롬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야 좀 쉬운데, 이미 하나님의 의(義)가 다 퍼져버렸는데, 그래서 완전히 상황이 종료된 상태인데, 이미 하나님의 의가 확정이 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고 말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의의 확장으로 주를 찾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기 의로 주를 찾는 행위가 의로운가, 아닌가? 의롭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의를 기초로 하게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기게 되는고 하니, 예수님을 찾아서 믿겠다고 하는 것도 자기 의의 확장으로, 연장으로서 포함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목사들은 당연히 이것을 끊어져야 하는데, 그런데 오히려 장려를 해준다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에게 마지막 착한 일이 남았는데, 그것은 예수 믿는 착한 일입니다" 라고 말이다.

◈ 지옥에서도 그리스도를 찾는 인간 !!

이렇게 예수 믿는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자기가 행한 것을, 그것이 자기 의로움인데, 만약 그것을 자기 죄로 본다면 포기하는데 문제가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 자기가 살아온 것이 자기 의이기 때문에, 그런 의(義) 중에서 하나를 더 추가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믿기'를 시도하게 되는데, 그런 시도 중에 하나가 천국의 맛을 보려고 하고, 심지어 지옥의 맛을 봐서 그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깥에 있는 것 전체가 자기 의가 되는데, 즉 유대인들의 신비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찾기 위해서 하늘로 올라가고 하느냐는 것이다. 바로 입에 있고 마음에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쪽에 시도하는 그 어떤 것도 다 단절시켜버린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약시대의 상황이라면, 지금 우리가 하려는 것은 구약인데, 이 구약에서 두 노선이 있는데, 하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법인데, 이렇게 사랑과 법은 같이 가는데, 이 사랑에 법이 주어짐으로 말미암아서 어떻게 되는가? 그런데 이 법은 사랑으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인데, 즉 예비적인 조치로서 법이 먼저 오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법에 들어있는 사랑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법을 통해서 자기 의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기 의가 더욱더 누적이 되는데, 마치 마일리지가 차곡차곡 쌓이듯이 말이다. 이렇게 마일리지가 쌓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 자기 힘으로 하나님마저도 뚫으려고 하는 인간 !!

이것이 라캉의 이론에 의하면, 순간 순간마다 자아가 되고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아가 되고 주체가 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는 이것이 모이면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렇게 힘이 생기게 되면, 이 힘을 더 의지하게 되고 이 힘으로서 경계선을 뚫고, 하나님마저도 뚫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 의를 확장시켜서, 이것이 의가 되어서 힘이 되니까, 의의 세계이고 정의의 세계인 천국까지도 뚫어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시도를 로마서 10장 3절에서는 완전히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의를 힘써 그것을 확장시키면 주님의 의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주님의 의는 자기 의를 완전히 절단해버리고, 오직 예수님의 행한 것을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로마서 9장 9절과 10절의 말씀이고 말이다.

◈ 다시 정리하면, 경계를 넘어서 !!

여기서 다시 정리해보면, 법이란 것이 원래는 사랑인데, 그런데 인간은 법을 이용해서 자기의 혼란스러운 주체를 형성하기 위해서 법의 경계를 넘어서게 된다는 것이다. 즉 이렇게 법이 있고 난 뒤에는 새로운 주체를 얻기 위해서 말이다.

예를 들어서, "도둑질을 하지 말라" 라는 경계를 쳤을 때에, 일단은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그 경계선에서 도둑질을 하지 않으면 그것이 자기에는 의가 되고 이 의는 힘이 되고 이 힘은 주체가 되는데, "나는 도둑질을 한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착하다" 라고 하게 되지만, 그런데 사건이 벌어지게 되면 우연히 도둑질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 욕망 속에 도둑질을 해야 된다는 것이 있으니까 말이다. 즉 금지된 것을 소망하니 말이다.

◈ 엄마 지갑은 내 지갑 !!

그런데 그렇게 해서 엄마 지갑에서 100원을 훔치게 되면 이 경계선이 이동하게 되는데, 엄마 지갑에서 100원을 훔치는 정도는 도둑질이 아니라고 말이다. 즉 자기 변명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또 이동하는데, 엄마 돈을 아무리 가져가도 도둑질이 아니라고 말이다. 즉 같은 식구끼리는 괜찮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또, 남의 물건을 훔치게 되면, 그때는 배가 고파서 훔친 것은 어쩔 수가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 뜻이라고까지 한다는 것이다.

이게 주일성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처음에는 0시부터 24시까지라고 거창하게 하다가, 그 다음은 새벽 4시부터, 결국 나중에는 교회에 갈 때부터 교회에서 올 때까지라고 나름대로 결정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계속해서 변명을 하면서 경계선이 옮겨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변명을 하면서 경계선을 옮기는 것을 두고, 예수님은 그것을 율례와 전통이라고 지적했는데,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임의적으로 자기들의 이런 전통과 율법을 조정하고 했는데, 그 기준은 자기들만 지킬 수 있는 것에 한해서이고, 그렇게 자기들은 전통과 율법을 지킨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사실상 목사가 설교를 할 때도, 목사 자기가 지킬 수 있는 것을 설교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교회는 목사가 바리새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목사가 "저도 죄인입니다" 라고 설교를 해야 하는데, 그런데 목사가 "저는 지키는데 여러분은 왜 못 지킵니까?" 라는 식으로 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목사가 하나의 경계가 되고 교인들은 이 목사를 넘기를 소망한다는 것이다.

◈ 산상설교 - 그 누구도 옮기지 못하는 경계선 !!

그래서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통해서 인간들이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요소들만 모으고 모아서 설교를 하셨다는 것이다. 마음속으로 음욕을 품은 것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해버리니 누가 이것을 감당하겠느냐는 것이다. 마음으로 형제를 미워한 것을 살인으로 간주하고 말이다. 그러니 경계선을 아주 철저하게 쳐버린다는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것을 사랑하는 그것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을 해주는 그것이야말로 율법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은 접근조차도 하기 힘들게, 오직 예수님 자기만이 지킬 수 있는 법으로 규정시켜놓았다는 것이다.

(마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누구든지 예수님 자신의 말을 듣고 행하는 자라야 반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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