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대구강의 2 - 지옥의 하나님 5 - "이름"에 대해서 --- 강추!!
06 대구강의 2 - 지옥의 하나님 5 - '이름'에 대해서 --- 강추!!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06 대구강의 2 - 지옥의 하나님 5 - '이름'에 대해서
06,03,20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중세철학 - 이름 자체에 의미부여 !!
시작하겠습니다. 이름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중세철학에서는 개체성(개별성)이라고 해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다른 사람에게, 즉 옆 사람에게, 또 옆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주지를 않고, 각각 따로 주었기 때문에 심판을 받을 때에 책임성을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름' 인데, 그래서 "이름 값을 해야지" 라고 하면서 강요를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목사는 목사답게, 집사는 집사답게 말이다. 이것이 곧 개체성이고, 이런 개체성은 이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름의 개별성의 독특한 것이 고대철학에서는 없는데, 즉 고대철학에서는 개체성이 다 날아가 버리고 두리뭉실하게 하나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전도서에도 보면 이런 내용이 있는데, 초기 고대 철학에서는 이렇게 개체성이 인정을 받지 못하는데, 나중에 성경을 보면서 이것을 다시 한번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와서는 개체성, 즉 자기 개성으로 나가야 나중에 심판을 받을 때 자기 행함대로 받기 때문에, 이렇게 개체성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보면 이러한 개체성이 다 깨어지는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 현대철학 - 이름은 남들이 관심을 가져줄 때 의미 !!
두 번째는 무엇인고 하니, 이름이라는 것은 언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즉 "이름이 언어에 종속된다" 라는 것인데, 그런데 이 언어는 작년에 강의할 때도 말했지만, 상징이라는 것이다. 즉 '우발성' 이라는 말이다. 마치 물을 따라 흐르다가 뭔가 있으면 모이고, 없어지면 또 흘러가고 말이다. WBC 야구를 하면 TV에 모였다가 다시 각기 일상으로 돌아갔다가 축구를 하면 다시 모이고 말이다. 이렇게 모일 때 WBC 야구대회나 월드컵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즉 '의미' 위주로 발생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더 상세히 설명을 드리면, 이런 예를 드는 것이 좀 미안하기는 한데, 임창정이 결혼한다고 하면, 그런데 그때 다른 사람은 결혼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그에게는 카메라가 동원되고 하는데, 그 옆에 있는 웨딩홀에서 결혼하는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는가? 이것을 가지고 '이름 없음' 이라고 하는데, 즉 '유명하지 않음' 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의미를 가지고 관심을 가질 때만 그 이름이 이름 값을 한다는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 말이다.
그런데 중세에서는 비록 남에게 인기가 없고 유명하지 않더라도, 이름을 주신 하나님께서 개별성에 여전히 관심을 가져 주니까, 즉 비록 남들은 알아주지 않더라도 주께서 지켜보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중세철학에서는 이름이 개별성과 붙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 자식을 낳았더라도 차라리 안 태어났으면 하는 자식에게는 이름을 함부로 지었는데, 돌쇠나 말자, 순자(?) 등으로 말이다. (꽤 좋은 이름인데?) 그런데 시집을 가게 되면 이렇게 대충 대충 지은 이름마저도 다 날아가 버리고 없다는 말이다.
◈ 현대철학 - 이름은 우연히 마주친 상징(언어)에 불과 !!
현대에 들어와서는 실재가 중요하지 이름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하는데, 즉 현대에서는 이름이라는 것은 우연히 마주친 상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물론 중세에서는 언어가 영혼을 대신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신체(물질)가 우연히 이렇게 마주쳤는데, 그것을 '철수' 라고 하자는 것이다. '나' 라는 신체가 이름이 없다가 점쟁이가 이름을 골라잡으라고 해서 그렇게 골라잡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자기 신체이지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대에서는 이름이 이런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에 와서는 이 이름의 의미가 중세의 개별성보다도 오히려 더 앞선 시대인 고대철학으로 되돌아가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 고대철학 - 시작과 머무름과 귀환 !!
이 고대철학의 특징은, 플라톤이 주장한 것인데, 그 원형은 '아르케' 라고 해서 따로 있는데, 하늘인 신의 세계에 말이다. 그 하늘 밑에 있는 눈에 보이는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조각 조각들이고 파편들이고, 즉 원형의 모형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나중에 깨어지면서 귀환하게 되는데, 즉 시작과 머무름과 귀환, 이렇게 되는데, 이러한 절차를 가지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톤의 주장에 대해서 누군가가 반박하기를, "아니, 당신은 하늘에 가봤어? 그 원형이 신의 세계에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시작과 머무름과 귀환의 그런 과정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라고 할 때, 이렇게 따질 때 고대철학의 천재성이 발휘되고 진면목이 나타나는데, 사람이 이렇게 머무르고 한다는 그런 과정을 눈치챘다는 것은, 이미 그 과정 속에서 앞뒤를 다 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의 전도서와 잠언서에도 나오고 말이다.
◈ 만질 수 없는 시간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서, 사람이 시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실 이게 만질 수 있는 그런 사물도 아닌데, 그런 시간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즉 현재에 살면서 과거와 미래를 꿰뚫어보고 있다는 것은, 그렇게 경험해보지 못했던 미래까지 생각하는 자체가 시간을 느끼게 하는 다른 어떤 존재가 있기 때문에 이런 시간관을 가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현재에 우리는 우연한 존재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거기에 대비해서 우리라는 것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어렵기 때문에 또 예를 들면, 사람이 이렇게 있다면 팔이 이렇게 있고 손이 이렇게 있다면, 팔이 아플 때 손이 아픈가? 그렇지는 않은데, 그래서 팔이 아프면 팔과 아프지 않은 손을 대비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팔이 아픈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손이 아프면 이 손만 아파야 하는데 마음도 함께 아프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록 팔과 손은 분리가 될 수 있어도, 하나로 통합하는 통합 시스템이 우리 속에 가동된다는 것인데, 이 통합 시스템을 영혼이라고 하고, 다른 말로 마음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마음은 나누어지지 않는데, 전체를 통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통합은 어디서 하는가? 심장인가? 두뇌인가? 통합할 수 있는 물질로서 포착되지 않는 통합체제는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 생각이 있게 하는 그 '있음'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렇게 되면, 신체 말고 우리 신체를 통합할 수 있는 생각이 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러한 생각이 있게 하는 그 '있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신체를 초월한 다른 '있음'에서 왔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 신체가 이렇게 있는데, 이렇게 있다는 것은 또 다른 먼저 있음이 있기 때문인데, 여기에 대해서 반박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어디서 태어났는가? - 아버지", "그러면 아버지는? - 할아버지"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올라가면, 결국 "신은 누가 만들었는가?" 라고 하는데, 이때 중세철학에서는 뭐라고 하는고 하니, 신은 창조하는 신이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창조하는 신은 누가 만들었는가? 그것은 신이 있어서 창조하는 신을 만들었는데, 그런데 여기서 이러한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창조라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자꾸만 이렇게 하는고 하니, 있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앞에 무엇인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인데, 그런데 앞에 없는 것이 있다고 해버리면 원인과 결과가 깨어지는 것이기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반드시 무엇인가 있어서 무엇인가가 생긴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통합하는 것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즉 모든 것을 통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은 어디에서 나왔느냐는 것이다. 생각하기 때문에 꽃이 있다고 생각되어지는 것이 여러 가지가 있다면, 그 생각하는 것은 어디서 왔느냐는 것이다.
◈ 고대의 헬라철학이 중세신학으로 변신 !!
이것을 고대철학에서는 아르케, 즉 원형이라고 보았는데, 그것은 바로 생각하게 하는 하나에서 뭔가 나왔기에,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마치 물질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듯이, 생각하는 것도 역시 먼저 생각하는 분이 계시기에 그대로 물려받았기에, 그래서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대의 헬라철학이 중세에 와서 딱 들어맞아 떨어지는데, 그래서 이것이 곧 중세의 신학이 되었다는 것이다.
◈ 개신교 신학의 '있음'은 어디에서 왔는가?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우리가 지금 개신교가 아닌가? 총신에서 신학을 배웠는데, 그런데 이 신학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어느 교수 하나 시비를 건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냥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 즉 개신교 신학만 하면 됩니다" 라고 만했지, 그 개신교 신학의 있음은 어디에서 있음이 되었는지 누구 하나 이야기해준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것에 이야기하다가는 짤리는 수가 있는데, 그것을 제대로 이야기해버리면 신학은 철학에 종속되니 말이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리스도를 아는 순간 철학은 배설물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배설물, 즉 똥오줌에서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복음이 나왔으니, 이 복음은 그야말로 '똥오줌 복음(?)'이 되고만다는 것이다.
(빌 3: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논리가 이렇게 되니, 이것을 따지지 말자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아라비아 사막에서 계시를 받았듯이 그렇게 계시를 받은 것으로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총신 1학년 때 배우는 신학서론에 바로 나온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거듭난 자들만의 사고방식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놀랍게도 플로티누스의 철학에 다 나오는데, 물론 플라톤에게서도 나오는데, 거듭남에 대해서 말이다.
현대철학에서는 이렇게 고대철학의 뿌리까지 이야기하는데, 고대철학에서는 왜 사물을 그렇게 이해했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언어의 조합에서 나왔는데, 그런데 이 언어라는 것은 허구라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철학에서는 모든 사고는 허구이고 남는 것은 몸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대철학에서는 몸의 철학으로 나아가는데, 즉 신체철학 말이다. 이것이 동양에서는 김용옥의 기(氣)철학 같은 것으로 나가고 말이다. 자기 몸 하나 편하면 그만이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는 것이다. 있음의 있음은 어디이고, 거듭남은 무엇인지 그렇게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현대철학은 고대철학을 조롱하면서 나왔는데, 그러나 고대철학은 진지했다는 것이다.
◈ 이름 - 현대철학도, 중세철학도, 고대철학도 아니라면?
우리가 지금 공부하려는 '이름' 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현대철학도 아니고, 중세철학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름이 영혼에서 나왔다고 하는 고대철학도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이 3가지를 다 거부하기 위해서 살펴보았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더 이야기하면, 이 고대철학에서의 이름이라는 것은, 그 원형은 따로 있고, 우리는 거기에 한 모형이라는 것이다. 왜 그렇게 주장하는고 하니, 이 '있음' 이라고 하는 것은 또 다른 것을 있게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있다는 것인데, 어떻게 말이 되는가?
우리가 이런 고대철학을 몰라도 되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제대로 알아야 우리가 성경을 해석하면서, "아하, 이런 것은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 고대철학자들이 주장한 것이구나" 라고 하면서, 그런 것을 미리 짐작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욥의 친구들처럼 말이다.
무엇이 있으니 있다고 하는 것은, 마치 과거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처럼 말이다. 이렇게 인간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있다고 해버리면, 또 그런 단순한 것에 은혜를 받는다고 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인 깊이를 알았다는 것뿐이고 거기서 오는 기쁨이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감동을 받았다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설교비평이 왜 안 되는가? - 판넨베르그와 가다머가 미워 !!
사실 목회자의 설교에 대해서 이런 철학적인 요소들이 없는지 제대로 살펴보아야 하는데,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설교비평집이 없다는 것이다. 문학이고 음악이고 예술이고 모두 다 비평집들이 나름대로 있는데 말이다. 그러나 설교에 대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얼마 전에 대구의 어느 성결교회의 목사가, 이 양반이 판넨베르그 신학을 주장하고 했는데, 이 사람이 박영선 목사를 비롯한 유명한 목사의 설교를 비평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말이다. 이렇게 설교를 비평하려면, 즉 이렇게 한 문장이 있다면, 설교는 언어로 되어있으니 설교비평은 자연히 언어비평이 되는데, 그러니 이것을 하려면 가다머가 들어가고 하이데거가 다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문장이 있다면, 딱딱 끊어서 여기서 여기까지는 어느 어디에 해당되고, 이 문장은 어디에 해당된다고 하면 되는 것이다. 그들은 복음이 아니라 개혁주의 신학으로 설교를 하니, 이런 개혁주의 신학을 비롯한 신학들은 모두 다 철학에서 나왔으니 말이다. 특히 중세철학 말이다.
저에게 만약 이런 설교비평의 기회가 주어진다면, 딱딱 끊어서, "이것은 어느 철학, 저것은 어느 철학에 속한 것이다" 라고 하면서 일일이 지적하면서 비평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여기서 교재에서 '이름'에 관해서 적어놓은 22페이지부터 살펴볼 것인데, 1번도 아니고, 2번도 아니고, 그리고 3번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철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말인데, 하지만 그것도 일단 철학이라면 철학이라고 하더라도, 이렇게 고대, 중세, 현대철학에서 나올 수 없는 '이름' 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것이다.
◈ '이름' 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 '아담' 이라는 이름을 도대체 누가 지었는가? 바로 여기에서 힌트를 얻는데, 이 이름을 다름 아닌 하나님이 지었다는 것이다. 중세철학에서는 이것을 신이 지었다고 하는데, 그런데 저는 이것을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으로, 즉 언약을 가지고 규명해야 이게 복음적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새언약을 완성하러 왔기 때문에 말이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이 있는데, 즉 언약을 완성하는 방향으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주(主) 라고 하는 것은 언약의 하나님인데,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먼저 던진 자기 언약을 친히 성취해나가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이사야에서는 '하나님의 열심' 이라 이야기했고 말이다. 이 언약을 성취해나갈 때마다 주가 나오는데, 즉 하나님이 주로 바뀌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사 37:31) 유다 족속 중에 피하여 남는 자는 다시 아래로 뿌리를 박고 위로 열매를 맺히리니
(사 37:32) 이는 남는 자가 예루살렘에서 나오며 피하는 자가 시온에서 나올것임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이다
◈ 하나님은 무엇이며,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이러한 하나님이 주로 바뀌는 과정을 분리하지 않으면, 즉 구약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분리되지 않으면 구약에서의 신학이 다 엉망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지금 신학교에서는 하나님과 하나님 이름의 차이점을 전혀 모르고 있는데, 이 이름이라는 것을 우습게 여긴다는 것이다. 이름이라는 것은 그냥 개성마다 하나 하나씩 다 붙이는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과 주(主)와 존재론적으로 동일하다고 보게 되는데, 이것이 중세시대에 삼위일체 신학으로 나오는데, 물론 존재론적으로는 말이 맞는데, 그러나 그것이 성경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부시 대통령과 이근호가 입은 옷하고 색깔이 똑같다고 하면, 물론 맞는데, 틀렸다고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이근호가 미국 대통령인가? 이것을 철학에서는 우유적 속성이라고 하는데, 존재를 규정하는 수 천가지 속성 가운데 하나가 맞았다고 해서 동일한가?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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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유성(偶有性) - 사물이 일시적으로 우연히 가지게 된 성질 ≒ 우성(偶性)·우유적 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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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이름이 나오니, 사람들은 이 이름을 주(主), 즉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즉 언약의 하나님이 아니라 언약의 하나님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물론 언약의 하나님과 언약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과 존재론적으로는 동일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같다고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님과 여호와는 같은 분이지만, "주님=여호와" 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 여호와가 주님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나타나야 !!
사실 이런 것이 엄청나게 어려운 것인데, 여호와가 주님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긴긴 역사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주님이 해야하는 일들이 앞에 쫙 깔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깔려야 하는 이유도 모르면서 "주여!" 라고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묵시문학이 어디에서 나왔는고 하니,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갔을 때 묵시문학이 나왔다는 것이다. 물론 묵시적 개념은 이사야서에서 이미 나왔지만, 묵시문학이라는 형식을 갖춘 것은 그들이 포로로 잡혀갔을 때 그들이 원했던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고 했을 때, 그것이 바로 '호산나' 라는 것인데, "주여, 우리를 구원하소서"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고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게 되는데, 물론 그들이 원하는 호산나와 주님이 생각하는 호산나는 서로 다르지만 말이다. 그러나 주님이 하시는 일이, 항상 그들이 알고 있는 그 개념을 그대로 환급시켜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우리가 해석할 때는 예수님의 용어와 성경에 나오는 용어를, 그 두 가지를 다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먼저 하나는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인간이 죄인이며, 그리고 둘째로 오직 주님만이 사용하실 때 의가 된다는 것이다.
◈ 인간이 사용하면 죄(罪), 예수님이 사용하면 의(義) !!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에서 "영혼이 떠나시다" 라고 했을 때, "아하, 인간이 육체와 영혼이 나누어져 있구나"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로 죄이고, 다만 예수님께서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있다고 사용하시는 경우에만 의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되어있다는 것이 아니라, 즉 예수님이 이분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그렇게 그들이 잘못되게 가지고 있는 개념까지도 그대로 받아드려서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육과 영과 혼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즉 삼분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 27: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러한 성경에 나오는 모든 혼란을 첫 매듭부터 맺어나가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과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차이가 난다' 라는 것이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용어인데, 그냥 쉽게 말해서, '다르다' 라고 보자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다르다고 하면, 존재론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냐고 시비를 걸 것이 분명하지만, 그러나 존재론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왜 다른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수 천가지 속성 중에서, 즉 이근호와 미국 부시가 같은 노란색의 옷을 입었다고 해서 같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이 "그렇다면 부시가 빨간색의 옷을 입었다는 말인가?" 라고 하면서 달려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좀더 쉽게 말하면, 이 존재라는 것은 여러 속성 중에 하나인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인데, 즉 사람마다 머리카락이 노란 사람도 있고, 키가 작은 사람도 있고, 몸이 뚱뚱한 사람도 있고 말이다. 존재도 역시 그러한데, 존재도 이런 속성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왜 이렇게 속성으로 포함시키는 무리한(?) 짓을 하는고 하니, 그렇게 해야 신의 존재를 존재로서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존재의 속성을 낳게 하는 존재가 있을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속성이 모든 존재를 존재케 하니까, 그것은 존재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논리적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안셀무스가 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존재를 하나의 속성으로 만들어놓았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성경의 분위기를 결합해서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여호와께서 이루시는 언약의 결실 - 주님 !!
일단 이렇게 '다르다' 라고 보아야 하는데, 물론 존재론적이 아니고 말이다. 삼위일체의 하나님도 다르지만 한 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름은 언약의 하나님, 즉 여호와께서 언약을 이루심으로 나타나는 결실이 무엇인고 하니, '주님' 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주님은 이미 언약의 하나님께서 주님을 겨냥해서 일을 하신다는 말이다.
이것이 시편 110편에 나오는데,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라고 말이다. 이렇게 분명하게 다른데, 그런데 이것을 존재론적으로 같다고 해버리면 이것은 해명할 필요도 없겠지만 말이다. 이것을 구약의 유대인들은 "주께서 내 주에게" 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것을 속된 말로 하자면, "하나님이 저거끼리 이야기하고 다 해버린다" 라는 것이다.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 여호와께서 자기 언약을 이루시는 언약의 상대자를 지칭할 때 !!
그렇다면 이 이름이 도대체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자기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언약의 상대자가 필요한데, 그 상대자를 지칭할 때 붙이는 것이 바로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어떠한가? 사람은 이미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것이다. 이미 범죄하고 마귀에 복속된 상태로 말이다. 그러니 아담이란 이름은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천천히 반복해보겠는데, 그렇다면 이 아담의 이름은 누가 지었는가? 당연히 하나님인데, 그렇다면 이 아담의 이름을 누가 이루어 나가는가? 역시 하나님께서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과는 다른 점이라는 것이다.
◈ 부모가 자식의 인생을 대신 살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이근호' 라는 이름은 부모가 지어주었는데, 그렇다면 그 이름은 누가 이루는가? 그의 부모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근호 본인이 그 인생을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근호의 이름에 합당한 인생을 부모가 산다면, 그렇게 되면 부모가 하나님이 되겠지만, 그러나 우리 인간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더 해보면, 아담의 이름은 누가 지었는가? 언약의 하나님이 지으셨는데, 그런데 아담이란 이름에 어울리는 일을 누가 하는가? 언약의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일하심의 결과로 주님이 나오니 말이다.
그런데 이 아담의 이름이 처음과 달라졌는데, 인간이란 의미의 이름에서 범죄하고 난 뒤에는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름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이름은 짐승과 다를 바 없는데, 즉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그런 사건들이 임하는 대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도서 3장 19절을 잠시 살펴보자.
(전 3:19)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다 동일한 호흡이 있어서 이의 죽음같이 저도 죽으니 사람이 짐승보다 뛰어남이 없음은 모든 것이 헛됨이로다
(전 3:20)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 다 한 곳으로 가거니와
◈ 인간은 항상 당하면서 살아간다 !!
지금 우리가 이름이 무엇인지를 따지고(?) 있는데, 여기 전도서 3장에 보면, "인생에게 임하는 일이 일반이라" 라고 되어있는데, 인간은 항상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당' 이란 글자를 하나 넣어서, "인간은 당하면서 살아간다" 라는 것이다. 이렇게 당할 때 사건들이 밀려오는데, 이 사건을 인간에게 임하게 하시는 분이 곧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에게 소속이 되었기에 말이다.
인간에게 이름을 지어준 분도 하나님이고, 그 인간을 반드시 흙으로 돌려보내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냥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사건과 사건이 임한다는 것이다. "너는 흙이야. 반드시 죽어야 되" 라고 하는, 그런 사건과 사건들이 말이다. 그러니 인간들은 무엇을 할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무슨 일을 당할 것인가?" 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 부정사 - 시제에 저촉을 받지 않는다 !!
현대 언어학자들이 이것을 발견했는데, 즉 "동사와 명사는 없고, 부정사만 있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 부정사를 알면 로마서 8장 30절이 통하는데, 이 부정사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시제에 저촉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미래와 과거와 현재에다 동일한 원칙을 개입시켜놓은 것이 곧 부정사라는 것이다. 그것이 미래가 되었던, 현재가 되었던, 과거가 되었던 하나님의 동일한 원칙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에베소서 2장에는 '하늘에 앉히시니' 라고 했고 말이다.
(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엡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경우에 이런 부정사 개념이 없는데, 그래서 '하늘에 앉히시니' 라고 하면서도 여운을 남긴다는 것이다. 동사와 명사는 시간에 의해서 풀어놓아 버리게 되면, 마치 셰퍼드를 풀 듯이 말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즉 시제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을 따라서 돌아다니는 것들을 하나로 묶어버리면 부정사가 되는데, '~하는 것, ~라는 것' 이라고 말이다.
그러니 "이러이러한 속성으로부터 못 벗어남", "이러이러한 속성으로부터 당해야 됨" 이라고 말이다. "너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의롭게 되어야 됨", "네가 인생을 어떻게 살았든 간에 영화롭게 되어야 됨" 라고 말이다. "그러그러한 속성을 지녔음" 이라는, 즉 부정사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부정사는 시제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다만 그 속성을 드러내고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 속에 있는데, 즉 주님이 우리를 시간 속에 풀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시간 속에 있는 우리를,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사건을 계속해서 연속적으로 임하게 해서 만나게 하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변하지 않는 속성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라는 말이다.
◈ 우리의 원형은, 마지막 아담인 예수 !!
다시 말해서, 시간에 따라서 변하는 우리가, 시간을 따라 변하지 않는 속성에 의한 사건에 투입되는 대상이라면, 그러면 우리의 원형은 어디 있는가? 따로 있는데, 그분이 바로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진짜 아담, 즉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할 때 구상한 참된 언약의 대상자를 따로 꼬불쳐놓고, 그렇게 한 그분이 사건을 우리에게 임하게 한다는 것이다.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한 그분이 말이다.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그 예를 들어보면, 어제도 이 부분을 설교했지만, 요한계시록 1장에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를 비롯한 일곱 교회가 나오는데, 이 교회가 터키 서부와 남부 쪽에 있었는데, 사도요한이 말하기를, "내가 보니 일곱 교회가 보이는데 일곱 촛대 사이로 인자가 거닌다" 라고 하는 것이다.
(계 1:11)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계 1:12)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계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 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같고
(계 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계 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여기 나오는 일곱 금촛대는 원형인데, 이것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원형적인 교회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일곱 교회는 임시적이고 우발적이라는 것이다. 즉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일곱 금촛대는 주님이 오른손으로 붙들고 있기에 시간과 관계없이 '부정사적' 이란 것이다. 즉 결정된 속성이라는 것이다.
◈ 언약완성의 사건이 우리 몸 속에 박할 때 - 심봤다 !!
그러면 서로 관계가 없는가?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교회를 원뿔로 삼아서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러한 사건들이 벌어지면서 다시금 귀환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건들이 주어져서 벌어지면서 귀환되는 그러한 과정이, 주님께서 죄 있는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부활의 영광스러운 몸이 되시는, 그런 과정을 이 사건 속에 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언약사건' 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주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해서 얻어낸(?) 열매가, 그 결과물이 바로 언약완성이라는 것이다. 그 언약완성을 사건으로 팍 터트려 버리면, 마치 폭죽이 터지듯이 수천 개의 사건으로 갈라지는데, 그 사건 하나 하나를 시간 속에 있는 우리 몸체에다 임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 사건이 우리에게 임하게 되면,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는, 주께서 우리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하나님과, 동시에 죽이고 새로운 그리스도의 하늘의 몸으로 변화시키는 사건을 함께 동반해서, 그러한 사건 속에 받아드리게 된다는 것이다.
◈ 주의 이름 - 니 이름은 꺼져 !!
이렇게 그런 사건이 임하게 되면, 그 사건을 누가 일으키는 사건인고 하니, 여기서 주의 이름이 나오는데, 즉 주의 이름이 일으키는 사건인데, 이렇게 되면 기존 인간의 '이근호' 라는 이름은 죽인다는 것이다. 이근호는 시간 속에 있는 이름이고, 그냥 흙이 되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죽고 난 뒤에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냥 흙이 되어 사라질 뿐이라는 것이다. 아니, 흙인데 무슨 이름을 붙이는가? 무슨 고령토인가?
그러니 이 이름이라는 것이 성경에서 얼마나 중요한 개념인가? 스가랴 3장에 보면, 여호와가 흰 돌에 새겼다고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그것은 그야말로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즉 시간과 공간에 관계없이 이름은 그 이름의 효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는 것이다. 아니, 이렇게 확실한 주의 이름이 있는데 왜 그렇게 굳이 자기 이름을 고집해야 하는가?
(슥 3:9)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 여호수아 앞에 세운 돌을 보라 한 돌에 일곱 눈이 있느니라 내가 새길 것을 새기며 이 땅의 죄악을 하루에 제하리라
우리는 모두가 다 흙인데, 이렇게 흙이란 것은 하나의 속성으로서, 이름을 걸칠 자격도 없음을 말해주는데, 그렇다면 이근호하고 김대식이 이렇게 서로 싸운다면 주님이 보시기에 어느 누구의 편을 들어줄 이유가 있는가? 이들은 각자 고유의 이름이 없으니까, 이것은 마치 첫째 손가락과 둘째 손가락이 서로 싸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코피가 나고 치고 박고 싸웠다고 하더라도, 둘 다 오로지 주의 이름만을 쳐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서로 통용하고, 가난한 자를 도와주고, 그렇게 유무상통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원형적인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행 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왜냐하면, 이들은 그리스도의 오른 손에 붙잡힌 교회가 되기 때문에, 인간들끼리 싸우고 말고 할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중세철학에서는 '개체적' 이라고 했는데, 이런 개체적인 것이 모두 다 날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 전체를 '아담 안' 이라고 하고, 이 그리스도와 관계 된 것을 시간을 당겨서 '마지막 아담'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붙인 이름은 다 껍질에 불과하고, 진짜 실효성이 있는 이름,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언약적인 성취도가 포함되어있는 이름, 그 이름으로 인하여 구원받게 되는 이름, 그 이름이 바로 주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주의 이름 말고 어디 다른 이름이 있는가?
그래서 로마서 10장에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른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사도행전 4장에서는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하여 "다른 이름으로 우리에게 구원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다" 라고 이야기했고 말이다.
(롬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행 4:10)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행 4:11)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러니 이런 실효성이 있는 이름 앞에서 인간의 이름은 당연히 날려버려야 하는데, 그렇게 날아가게 하는 사건도 당연히 주께서 일으키신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 스스로는 그런 사건을 도저히 못 일으키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사건에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 성도 - 오직 그리스도에게 복속된 존재 !!
그러므로 택함을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에게 복속된 존재이지 자기 자신에게 복속된 존재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싸움을 하더라도 주님에게 자기편을 들어달라는 요구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 저는 왜 이렇게 가난합니까? 저 사람처럼 부자 되게 해주세요" 라고, 그렇게 요구할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저 사람이 부자이면 자기도 부자이고, 저 사람이 아프면 그것이 자기의 아픔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지체이고 한 몸이라는 말이다.
이렇게 이름으로 출발하지 않으면 고린도전서 12장의 지체와 몸 부분이 전혀 해석이 안 되는데, 물론 다른 부분도 마찬가지만 말이다. 그거 기껏해야 손에 손잡고 "WE ARE THE WORLD" 노래나 부르고 말이다. 그것으로 만족한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고전 12:14)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고전 12: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고전 12: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 인하여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고전 12: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뇨
(고전 12: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고전 12:19) 만일 다 한 지체 뿐이면 몸은 어디뇨
(고전 12: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만약에 손에 손잡고 잘해보자는 단체가 생기면 다른 단체와 또 하나의 경계가 생기는데, 이것은 마치 교회대 교회로 축구대회를 하는 것과 같은데, 이렇게 되면 교회가 하나의 법인체가 되고 마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주도 하나이고 몸도 하나라고 하는데, 교회들끼리 편싸움을 할 가능성이 있고 말이다.
요즘은 테이블에 주스도 한 잔 없고, 강의를 하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다시 말해서, 주의 이름은, 그냥 붙인다고 이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실효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름을 붙일 때 대충 대충 하겠는가? 아니, 하나님께 무슨 대충이 있는가? 아담이라는 이름을 붙으면 언약을 완성하라고 붙이는 것이지 말이다.
처음 아담은 흙으로 끝나고 말았는데, 그래서 진짜 아담으로서 실효성이 있는 이름은, 우리가 이루지 못한 율법을 십자가를 지시고 다 이루었다고 하신, 그것을 인하여 오직 주의 이름만이 진짜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주시는 이름이라는 것이다.
◈ 요한복음 14장 '처소' - 성령 !!
그리고 이제는 그 이름과 우리의 이름을 교체시키는 그 사건이 일어나는 것도, 주님이 우리에게 그 사건이 일어나고 당하도록 성령 안에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요한복음 14장에서는 '처소' 라고 하는데, 성령이라는 처소 안에서 아버지와 함께 새롭게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 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그러니 이름이라는 것은 그냥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적들도 물리치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이고, 이것이 신약에서는 주(主)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름이 다르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라고 할 때,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주는 하나님의 이름이 완성된 개념이라는 것이다.
(시 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일으킨 사건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는가? 하나님의 이름이 구원하기 위한, 그리고 심판하기 위한 이름인지를 말이다. 이것을 알 수 있도록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그렇게 검출하는 실험도구가 바로 구약의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 제사 - 하나님의 이름이 이스라엘 내부에서 일하는 방식 !!
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즉 아무런 힘도 없고 매가지도 없는 그들을 통해서, 즉 여호와의 이름을 앞장세워서 그 막강한 적들을 물리치고 또 물리침으로 말미암아서, 또한 그들 내부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어떤 식으로 일하느냐가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제사' 라는 것이다.
제가 방금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적들도 물리치고 승리케 하신다고 했는데, 이런 이야기만 들으면 사람들은 상당히 신나 하는데, 부흥사들도 "주의 이름으로 승리케 하신다" 라는 것을 마치 자기들의 전매특허처럼 사용해 먹는데, 그런데 이 주의 이름이 활동할 때 어떻게 활동하는지에 대해서는 빼먹어버린다는 것이다. 왜 입을 다물고 있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제사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이 '주의 이름으로' 라는 것이 추상적이 아니라 이렇게 실질적이고 구체적인데, 아무리 주의 이름을 녹음기를 틀어놓고 소리치고 또 소리쳐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해서, 즉 '예수님' 이라고 백 번을 부른다고 해서 마귀가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주의 이름이 언어로 표현되면 안 되는데, 이것이 또 골치 아픈데, 분명히 주의 이름은 언어인데, '예수님'도 분명히 글자인데, 영어로 'JESUS' 라고 해도 그렇고, 이것이 그냥 언어로 와버리면 내용물이 없고 표현에 불과한데, 즉 껍데기라는 것이다.
◈ 주의 이름 - 언어의 한계를 먼저 알아야 !!
예를 들어서, '주스' 라고 할 때, 이 '주스' 라는 글자를 뜯어서 마시면 시원하고 맛이 있는가?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언어는 어디까지나 상징이니 말이다. 실제내용은 분명히 언어가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언어자체는 내용이 아닌데, 그런데 말을 할 때는 언어로밖에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나요?
흔히 여자들이 경상도 남자에게 뭐라고 하는가? "당신은 왜 나를 20년 동안 사랑한단 말을 하지 않는가요?" 라고 하는데, 그러면 경상도 남자가 뭐라고 하는가? "꼭 말로 해야만 사랑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굳이 말로 안 해도 행동을 보면 알지 않느냐는 것이다. (어떤 행동?)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 주님의 사랑 - 내 제사에 들어온나 !!
실제적으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할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우리를 자기 제사에 동참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제가 왜 십자가에 동참시킨다는 말을 바로 하지 않고, 제사를 이야기하는고 하니, 십자가를 또 하나의 언어처럼 사용해서, 그냥 '쳐다본다' 또는 '뜯어먹는다' 라는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러나 십자가 자체가 바로 제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제사의 어느 부분에 동참시키는고 하니, 놀랍게도 제사의 '제물'에 동참시킨다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12장에 나오는데, 흔히들 교회에서 헌신예배에 단골로 등장되는 구절인데, 우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면 그것이 바로 영적예배라는 것이다. 몸으로 드리는데 물적예배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천주교처럼 떡 먹고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영적예배라는 것은 영의 인도함을 받아서 드리는 예배라는 것이다.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 산 제물 - 그리스도의 제사 제물에 동참 !!
조금 전에 뭐라고 했는가? 교회와 교회사이에서, 즉 성도와 성도사이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소통시키는 것, 그것이 우리 몸을 주 앞에 드리는 것이, 보통 세대가 아닌 이 악한 세대에서, 그것이 독특한 산 제물이 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죽으라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 14장 7절과 8절에 나오는데, 우리가 제사에 끼어 들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끼어 드는데, 그것은 우리보고 그렇게 하라는 게 아니라 우리가 당하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롬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여기서 로마서 15장 16절을 한번 찾아보자.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롬 15: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 보면, 사도바울 본인이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제물로 바쳐지는 이방인들은 무엇으로 거룩하게 되는가? 성령을 통해서 거룩하게 되니까, 이것이 바로 영적예배라는 것이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지금 전도한다는 것은,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해놓고 도망(?)치는 게 아니라, 그런 사람을 낚아채어서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에 다 집어넣어 버린다는 것이다. 거룩한 제물로서 말이다. 사도바울이 지금 그런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것을 두고 "헌신하세요, 봉사하세요" 라고 하는 것인데, 즉 영적인 예배라는 것이다. 물론 과거에는 유대인이었다고 해도, 지금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두 집어넣어 버린다는 것이다. 헌신하고 봉사하라고 말이다.
◈ 헌신과 봉사 - 당신의 주체는 없다 !!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제 당신의 주체는 없어졌습니다" 라는 것인데, 사실상 인간의 주체가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주(主) 앞에서 무슨 주체가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사건을 당하는 입장인데 말이다. 만약 우리가 주체 같으면, 사건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내는 입장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나 우리는 주께서 만들어내는 사건에 일방적으로 당하도록 되어있는데, 그 사건이 무엇인고 하니,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단에 몰아넣는, 즉 산 제물이 되게 하는 일이란 말이다.
이것이 에스더에 의하면,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것이고, 요한 계시록에 의하면, "죽도록 충성하라. 그러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라고 하는 것인데, 이러한 것이 이미 사건화 되어서 계속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 사건, 그 다음 사건, 그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한 사건이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자기 자신의 공적이나 자랑거리를 남기지 않도록,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되도록, 그렇게 만든다는 말이다.
(에 4:16)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계 2:10)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찌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일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래서 빌립보서 1장에 있는 것처럼, 자기 안에 살아있는 것도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다는 것이다. 사실 얼마나 무서운 말인가?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있으니, 더 잘 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죽음도 전혀 두렵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이라는 말이다. 이런 모든 것이 다 주의 이름으로 감행되고 사건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아담(흙)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들이닥칠 사건이라는 것이다.
(빌 1: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실을 안다고 해도 우리의 고집도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들이 주체자, 즉 사건을 스스로 만드는 자가 되기를 원하고 영화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선악과를 먹고 난 뒤 "신처럼 되리라" 라는 것인데, 이것이 선악과라고 한다면, 분명히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따먹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 당신만 신입니까? 그럼 저는 뭡니까?" 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 선악과의 효과 - 나도 갈 때까지 간다 !!
다시 말해서, 이렇게 하지 말라고 금지했는데 그 선을 넘었다는 것은, "나도 이제는 독자적인 행동에 나설 자격이 있다" 라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범죄한 아담의 속성인데, 아무튼 하늘에게 어떤 혜택이 주어지든지 간에 우리는 그것을 모으고 모아서, 그렇게 해서 자기가 자기를 주인공으로 돋보이도록 하는데 소모시켜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는 자기가 당하는 존재가 아니라, 무엇을 (주체적으로) 하는 존재로서 자기 자신을 굳히려고 하는데, 이렇게 됨으로 주님은 밀침을 당하고 싫어버린바 되는데,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진행이 되겠는가? 그것이 교재 26페이지 이하부터 나오는데, 즉 인간의 이름과 주의 이름이 한바탕 전쟁을 벌이게 된다는 것이다.
◈ 여호와 전쟁 - 이름과 이름의 싸움 !!
그렇다면 누가 누구를 공격하는가? 주의 이름이 인간의 이름을 공격하는데, 거기에 대해 인간의 이름도 주의 이름을 공격하는데, 즉 이방인들도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이스라엘도 이방인들을 공격하다가, 그래서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난 뒤에는 그 이름이 이제 이스라엘 내부로 들어와서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주의 이름을 외치는 선지자들을 공격하는데, 이 선지자들의 뜻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바벨론으로 쫓겨나고 말이다.
그리고는 주께서 직접 육신으로 이 세상에 왔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이 주의 이름마저도 밀치고 공격하게 되는데, 그런데 주께서 부활하고 난 뒤에는 이 모든 세상을 깡그리 공격해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쟁이 벌어지는데, 그것이 곧 여호와 전쟁, 즉 거룩한 전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전쟁을 하고 미워하는데, 전부가 다 내세우는 의미가 무엇인고 하니,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한 개념으로 서로 싸운다는 것이다. 즉 "주의 이름이 의로운가? 아니면 내 행동이 의로운가?" 라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죄가 옳은가? 당신이 생각하는 죄가 옳은가?", 그리고 "내가 행하는 심판이 옳은가? 당신이 행하는 심판이 옳은가?" 라는 것으로 말이다. 즉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말이다.
◈ 법 - 선악체제를 선악체제로 공격 !!
사실은 이것이 다 같은 말로서, 여기에 대해 실천을 하게 되는데, 그래서 교재 26페이지에 보면 '법'이 나온다는 것이다. 이제 법이 등장해서, 이것은 이미 선악체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선악체제에 맞도록, 왜 예수님은 기성체제를 사용한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이 선과 악에 맞추어진 맞춤법이 등장해서, 그래서 이 법으로 선악체제를 집요하게 공격한다는 것이다.
한편 인간은 이러한 공격에 대해서 선악체제를 가지고 집요하게 대항하는데,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나는 지켰습니다" 라고 우기는데, 즉 "너는 죄인이다" 라고 하면, 우리는 "나는 의인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법에 의하면 의가 되면 능력이 나오기에 말이다. 그래서 인간들은 의로운 자에게 고난을 줄 수는 없다고 하는데, 즉 의로운 욥이 고난을 받는 일은 있을 수가 없고, 축복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생과 고난은 죄를 지었을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인데,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 된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인간이라도 의인을 찾지 누가 죄인을 찾겠느냐는 것이다. 도대체 죄인을 믿을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것이다. 이왕 믿으려면 의인을 믿지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인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그 누구도 돌아볼 수가, 즉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만든 죄와 의라는 개념 자체가 인간의 선악과 쪽에서 나왔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그 자체를 폭파시켜버리려고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선악체계 자체를 말이다.
◈ 아이쿠, 내가 왜 그런 짓을 !!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제일 괴로운 것은 과거에 자기가 실수한 것인데, "아이쿠, 바보 같이 그런 말은, 그런 행동은 말았어야 하는데. 그러면 지금 얼마나 좋았을까" 라고, 이렇게 자신을 자책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인간의 선악체제 자체를 붕괴시켜버린다는 것이다. "니가 그런 짓을 안 한다고 구원받나? 그런 짓을 하든지 말든지 구원은 받게 되어있어" 라고 말이다.
이렇게 법이 동원된다는 것은, 이미 선악체제로 들어왔기 때문에 이 선악체제를 무엇으로 만들어버리는고 하니, '역사'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선악체제를 역사로 만들어버리는데, 그러면 법은 어떻게 되는가? 역사세계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되어있는데, 이것은 묵시가 아니라 분명히 역사인데, 사람들은 이 역사 속에서 이것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되어있기에, 새끼를 깐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이 번성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역사를 만들어주셨기 때문에 말이다. 이렇게 되면 목회라는 것은 하나의 긴긴 역사로 전환이 된다는 것이다.
◈ 역사란, 아담이 긴긴 오징어포가 된 것 !!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마치 오징어를 눌러버리면 오징어포가 되듯이, 아담을 길게 눌려서 긴긴 역사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니 역사는 아담의 목적을 지닌 아담의 긴긴 그림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아담이 새끼를 까는 것인데, 물론 이 전체가 아담 안이고 그것을 못 벗어나지만, 그 안에서 자기 새끼를 친다는 것이다.
다윗이 이야기한 것처럼, 자기 부모의 죄가 자기를 죄 짓게 했기에, 즉 자기는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역사는 이렇게 새끼를 치는데, 그런데 여기에 누가 뛰어드는고 하니 주님이 역사 속에 뛰어든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역사 속에서 또 하나의 역사가 만들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시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예를 들어서, 왜 옛날에 우리가 졸업할 때 졸업장과 길다랗고 동그란 통이 있었지요? 그 통 속에서 졸업장을 끄집어내었다는 것이다. 즉 역사가 통이라고 하면 그 안에 졸업장이라는 구속사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언약이고 말이다.
◈ 이스라엘 역사의 특징 - 항상 새로이 만들어진다 !!
이 통을 잘라보면, 이 안에 들어있는 두 개의 역사가 서로 싸우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 역사라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부분인데, 즉 이스라엘의 역사가 따로 있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싸우다가 보면, 없는데서 이스라엘 역사가 새로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삭은 아브라함의 자식이 아닌데, 즉 아브라함은 자식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라의 태가 닫히게 함으로 자식을 못 낳는데, 그런데 이런 자식이 없음에서 이삭이라는 자식이, 즉 새로운 역사가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만들어나가는 졸업장과 인간의 통이라는 역사가 만들어지는데, 이것을 갈라디아서 4장에서 '두 언약' 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나는 육체에 속하는 것이고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디에 속하는가? 양쪽에 다 속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부모로부터 육체를 받았다는 것이다.
(갈 4:22) 기록된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계집 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율법의 저주를 받게 되는데, 우리의 몸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체 속에 엄연히 피가 흐르고 힘줄이 있고 말이다. 유전자를 조사를 하면 부모와 99%가 같은데,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육을 지녔다는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양쪽에 다 속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역사가 어려운 것이, 이스라엘 역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역사를 새로 만드는데, 그 만드는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