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12월 7일 강의 창세기 25장, 큰자 예수님이 어린자를 섬김
울산 12월 7일 강의 창세기 25장, 큰자 예수님이 어린자를 섬김
이름 : 우리교회(IP:125.190.2.61)
071207 창25장, 큰자 예수님이 어린자를 섬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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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07a 울산강의-창세기 25장 이름 : 한윤범 2007-12-15 16:48:30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 강의 해봅시다.
오늘 강의는 창세기 25장입니다. 25정 21절부터 하겠습니다. “이삭이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함으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간구를 들으셨음으로 그 아내가 잉태하였더라” 여기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아내가 잉태하지 못했지요. 아기를 낳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앞에 리브라란 사람은 누구의 아내지요? 리브라가란 사람은 이삭의 아냅니다. 이삭한테 시집갈 때에 분명히 천만인의 네 씨가 하늘의 별처럼 많다고 창세기 22장에서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을 했는데 이 여자는 아기를 못 낳아요.
그러니까 이거는 약속은 이루길 이루는데 리브가의 개인적인 능력이나 자질로써 이루지는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똑같이 마찬가지에요.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되 약속이 우리를 사용하는 건 맞지만 우리 힘으로 약속을 이루지는 못합니다. 그걸 분명히 여러분 정리해 주셔야 돼요. 약속이 닥쳐서 약속대로 인도하는구나. 아이구, 감사합니다. 이러면 되지 요시, 내가 이루자. 이러한 망발을 하지 마세요. 이런 생각은 본인을 힘들게 합니다.
흔히 교회에서 교회 가는 목적이 뭐냐? 내가 교회 왜 오지? 목사님,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왜 와야 됩니까? 구원받았으면 되지 교회 왜 와야 됩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 거기에 대해서 우리 목사로서 이야기할 것은 뭐냐 하면, 구원받은 사람들의 기준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성경에 그 기준이 나와 있습니다. 그 기준에 부합되는지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교회 나오셔야 됩니다.
그 기준이 뭐냐 하면, 바로 어렵게 여러 가지 많습니다만 간단하게 줄여서 여러분 잘 아시는 것 하겠습니다. 뭐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죠.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나와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건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아요.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한 것이 박혀있다는 것이고, 그 영원한 것은 달랑 세 가지 밖에 없어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 고린도전서 13장이죠. 마지막에.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거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것, 영원한 것에 의해서 사로잡혀서 살아가는 그런 모습 그것이 성도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뭐, 여기서 더 보태라면 감사, 기쁨, 희락, 형제우애 쭉 나오겠지요. 하지만 그 원천은 뭐냐? 하나님이 주신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사랑 안에는 희열과 기쁨이 다 들어있어요.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다 들어있거든요.
그러니까 성령의 열매라 하는 그런 것은 사실은 원천이 뭐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에요. 소망이라는 것은 보이는 것은 안 믿고 보이지 않는 것을 소망하는 거예요. 믿는다 하는 것은 자기를 안 믿고 주님 하신 일을 믿는 거예요. 사랑이라 하는 것은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 먼저 날 사랑했다는 그 사랑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
따라서 이런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는 사람은 어떤 질문을 하지 않느냐 하면, 구원받았는데 미쳤다고 교회 나옵니까? 하는 것, 그런 질문이 안 나오겠지요. 왜냐하면 사랑이라 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은 내리 사랑인데 주님의 사랑은 반드시 자기를 경과해서 그러니까 자기를 통과해서 다른 사람에게 전하도록 돼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이러한 영원한 사랑을 받아놓고 아이고, 나만 챙기면 됐지, 형제고 뭐고 아이고 다 귀찮다. 이래 돼버리면 주님의 사랑이 나한테 철썩 하고 막히는 그런 사랑이 어디 있겠어요. 주님의 사랑이라 하는 것은 나를 통해서 무지개 일곱 색깔처럼 쫙 퍼지게 돼있죠.
그래서 다시 간추려보면, 우리 교회 왜 나와야 됩니까? 왜 우리 신앙 생활해야 됩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준이 뭡니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습니다. 그 믿음과 소망과 사랑 왜 있어야 되는데? 그게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영원한 것은 돈 주고도 살 수가 없어요. 사람의 의식이라 하는 것은 순간적이고 일시적이거든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게 아니고, 영원히 이렇게 우리에게 와서 우리를 통해서 관통해서 다른 사람에게 퍼져 나가는 겁니다. 그걸 이제 향기처럼 하지만.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이야기할 하나님의 약속도 영원한 것이겠어요, 일시적인 것이겠습니까? 영원한 것이잖아요. 그래 영원한 것에는 주어질 뿐이지 우리가 생산해내는 게 아니겠지요. 따라서 제가 하는 말이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내가 만들려고 시도하지 마시라 이 말입니다. 나는 영원하지 않거든요. 나는 일시적인 사람이고, 나는 살다 죽으면 그만이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졌을 때 내가 만들어내지도 않는 것으로 인하여 구원받습니다. 영원한 것이 오기 때문에 영원하지 않는 내가 하나님의 약속에 가담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게 오늘 아까 창세기 25장 이야기에 의하면 이삭의 자식이 하늘의 별만큼 많아지는데 그 자식 낳기에 대해서 누가 빠져야 됩니까? 리브가의 개인적인 육적인 생식 능력은 여기서 빠져야 됩니다. 그게 바로 리브가가 아기를 낳질 못한다. 리브가가 잉태치 못한다.
그런데 리브가 본인한테 물어보세요. 그 심정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마치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성도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나오게 돼있는데 그 이야기를 목사님에게 저한테 듣고 집에 가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도통 나한테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안 나오더라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게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그 답답한 심정이 오늘 이 리브가가 아길 못 낳는 심정과 동일한 심정이다 이 말입니다.
나를 통해서 자식이 하늘의 별만큼 많다 했는데 아무리 보약 다려 먹고 어떻게 뭐 온갖 기술을 발휘해도 애가 생성되지 않으니까 이거 환장할거다 말이죠. 교회 나와서 교회 나오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과 그것도 모자라서 희락과 희열과 감사와 기쁨, 고마움 이게 막 터져 나와야 된다는데 교회 백 날 다녀도 안 터져 나오는 거예요. 얼마나 속으로 답답하겠습니까? 답답해야 됩니다. 답답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답답한 게 정상이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답답하게 만들어요.
수요일 날 제가 그런 이야기했는데 하나님은 성도를 화나게 만듭니다. 한시라도 성도를 화 안 나는 경우는 없어요. 항상 성도는 하나님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이루지 우리를 완전히 배제시킵니다. 그 배제 당할 때 자존심 많이 상하지요. 하나님이 나를 무시한다고 차버릴 때 기분 나쁘겠지만 하나님께선 그렇게 우리를 기분 나쁘게 하시면서 일을 하셔서 모든 공로를 하나님이 홀로 하셨다는 것으로 솔직하게 고백하게 하는 거, 이게 하나님의 전략입니다. 작전입니다.
이게 그 증거를 대겠습니다. 그 다음에 보니까 창세기 25장 21절하고 있는데, 21절 보니까 드디어 리브가가 아기를 낳지요. 아기가 태어나기 이전에 뭐가 먼저 오느냐 하면, 갓난애 둘이 태어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이 두 아이를 낳아요.
보통 사람이 어떤 여자가 아기를 낳아버리면 이 두 아기를 누구 소유가 됩니까? 누구 소유가 될까요? 여자 자기 소유죠. 내 자식이다. 내가 낳았다. 이렇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는 불임여성, 아기를 못 낳는 여자를 통해서 아기를 낳게 함으로 말미암아 자식이 있더라도 이거는 여자의 기대나 어떤 희망, 이거는 완전히 배제된 채 약속의 자식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기 가졌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약속 가졌다고 생각해 주시라 이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그렇습니다. 야, 나에게 드디어 쌍태, 쌍둥이가 있네. 쌍둥이를 낳았어. 라고 말하면 안 되고. 야, 하나님의 약속이 내 안에 나를 부풀었다. 그렇게 보시라 이 말이요.
크리스마스가 되면 아기 예수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세상에 재수 없는 여자 중에 하나가 마리아라는 여자에요. 이 여자는 우리와 똑같이 자기의 희망, 자기 장래, 자기 미래 똑같이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요셉과 함께 조만간에 결혼식해서 행복한 살림살이할 그런 꿈에 있던 처녀가 그 기대를 완전히 묵사발 만들어요.
자기가 예상하지도 않았는데 임신이 되고 말았어요. 이거 누구한테 설명도 못하지요. 나는 어떤 남자와 관계도 없었는데 아기 낳았다. 이거 누가 알아줍니까? 구청에 가서 알아주겠어요, 동사무소에 가 알아주겠어요. 대통령, 국민고충위원회 한다고 이거 알아주겠습니까? 아마 욕이나 얻어먹을 겁니다. 이게 어디서 거짓말도 그런 거짓말을. 니가 한나나 되나. 뭐고?
남자와 관계도 없는데 아기를 낳은 이런 경우는 그전에 일체 마리아 이전에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었어요. 비슷한 건 있었지요. 아브라함의 경우, 한나 경우 있었지만. 진짜로 이거는 아예 남편하고 관계도 없었는데 생겼다 이 말은 이거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죠.
그래서 하나님이 하는 일은 항상 그 사람에게 역사상 최초로 있는 일일뿐입니다. 그게 하나님 일이에요. 교회에 교인 열 명 있는데 하나님이 일을 하셔도 열 명이 다 달라요. 다 다르기 때문에 옆에 있는 사람이 다른 집사님 보고 당신 나처럼 되라. 이렇게 요구하면 안 돼요. 왜? 다 달라요. 다 나름대로 생소해요.
어떤 사람은 담배 두 갑 피던 걸 담배 끊으려고 그렇게 애를 쓰다가 포기했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으로 두 갑 피우던 것을 한 갑으로 줄였어요. 이건 놀라운 기적이에요. 어떤 사람은 소주 한 자리에 세 병 먹는 사람이 소주 반 병으로 줄였는데 이건 놀라운 기적입니다.
그런데 그 기적을 교회에서 말을 못하죠. 왜? 아예 술을 안 먹는 사람이 있거든요. 이참에 끊어, 끊어. 나는 딱 끊었잖아. 너도 나처럼 끊어봐. 또 자기 기준으로 해서 저쪽에 자기 놀라운 기적을 또 무시하기 모독하기 일쑤니까 말을 못하지만 항상 하나님께 일이라 하는 것은 본인 그 당사자에게 예상치도 못한 것으로 다가옵니다. 왜 그렇게 일을 하느냐? 그렇게 해야 자기 공로가 섞이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항상 하나님은 인간을 배제하고 일합니다.
그래서 리브가가 아기를 낳을 때 이것은 리브가는 남들 보기에는 야, 너도 아기 낳았네. 이렇게 하지만 리브가 당사자 입장에서는 이거는 내가 낳은 게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아기가 낳은 거예요. 그렇다면 아기에 대해서 어떤 기대감, 포기해야 되는 겁니다. 아기에 대해서 내가 잘 키우리라. 이런 생각도 포기해야 돼요.
그래서 막 결혼해서 아기 낳을 쯤 되었을 때 새댁들이 기도를 많이 하겠지요. 하나님, 아기 주시면 국가와 민족과 교회를 위해서 훌륭한 일군이 되겠습니다. 빛과 소금이 되겠습니다. 뭐, 아는 구절 총동원해서 기도를 열심히 하겠지요. 그거 다 소용없는 짓입니다.
한 가지는 알아야 돼요. 뭐냐 하면, 그 아기를 통해서 하는 일은 내가 기대한 예상하지 않은 일만 일어날 것이다. 라는 그런 기대는 가져야 됩니다. 내가 예상하지 않는 내가 꿈꾸지도 못한 일이 애한테 벌어질 것이다. 그것은 아기만 준 것이 아니고, 아기에 뒤따라서 하나님의 약속도 함께 겸하여서 아기의 운명에 섞여서 함께 들어와 버립니다. 아기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내가 몰랐던 하나님의 새로운 뜻이 우리 집안에 몰려온 거예요.
몰려들어오면 우리는 거기에서 심한 갈등을 일으키죠. 개그에 보면 이런 거 있지요. ‘이건 아니잖아. 이건 아니잖아.’ 우리는 자식을 통해서 주여, 이건 아닙니다. 내가 이런 자식을 원했던 건 아닙니다. 이건 아니잖아. 하루에도 수십 번 이야기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주님의 뜻은 좁은 길이에요. 우리가 인간이 태어나면서 갖고 있는 뜻은 뭐냐? 넓은 길입니다.
우리는 애를 주든 어떤 걸 주든 간에 애를 잘 키우겠다는 말은 은근히 뭘 염두에 두느냐 하면, 내가 애를 잘 키웠다는 그 보상으로 아마 편하고 넓은 길을 줄 거라는 그 뒷부분, 그 반대급부에 더 매료되어서 그것을 은근히 고대하면서 핑계는 뭐냐 하면, 고난이 온다 할지라도 주의 말씀대로 애를 잘 키우겠습니다. 이러거든요. 그런 수법에 주님이 안 넘어갑니다. 아이고, 솔직해, 솔직해.
제가 버스타고 울산에 오는데 다리가 위에 있는데 6차원 도로가 있거든요. 강변 따라. 버스는 1,2,3-1,2,3 이렇게 돼있는데 버스가 가고 있는데 이쪽 길에 웬 차가 헤드라이트 번쩍번쩍 하고 있어요. 이리 가고 있어요. 버스는 이리 가더라도 옆차는 이리 가야 되는데 이 차가 길을 잘못 들었어요. 야, 내가 그걸 보고 느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가는 넓은 길을 안 가고 역주행하게 만들어요.
그 이유가 뭐냐? 이 우주의, 이 인간의 그리고 이 세계에 원천을 역주행하지 않으면 찾을 길이 없어요. 그게 십자가 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 잘 되기 위해서 같이 동반해 가는데 예수님만이 뭐라 하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거든요.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하는 말은 휘발유 지고 불 속에 들어가란 말이거든요.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살고자 하는데 예수님 하는 말은, 누구든지 하나의 밀알이 되지 아니하면 살 수 없다. 누구든지 자기 생명을 사랑한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자기 생명을 잃고자 하는 자는 얻으리라. 이거는 역주행입니다. 이거는 이렇게 이야기한 사람이 없어요. 지금까지.
기도하면 복 받습니다. 교회 나오면 축복 받습니다. 전부다 지금 가시는 길에 가속을 가하기 위해서 당신이 희망하는 당신이 소망하는 그 길을 하나님이 뒤에서 턱턱 밀어주시면 빠른 시간 내에 당신의 소망은 이루어집니다. 될 것입니다. 복 받습니다. 전부다 우리가 원하는 방향을 뒤에서 한껏 밀어주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밀어주는 것으로 방향으로 이야기하지 그걸 거꾸로 누구든지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래 거꾸로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다 말이죠.
그래 그 차는 오도가도 못해요. 빠꾸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여기서 오는 차들은 기겁을 하고 3차선이니까 2차선이 큰일 났거든. 전부다 2차선 가다가 전부다 이 쪽으로 피하는 거예요. 오늘날 교회에서 성도 있는 한 사람하고 똑같잖아요. 그 교회에 성도 한 사람 있으니까 모든 교회가 그 성도하고 이야기 안 하고 다 피해가잖아요. 전부다 피해가요. 말이 안 통하니까.
지금보다 더 나은 형편을 얻기 위해서 교회 나오는데 그 사람 하는 말이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아십니까? 이따위 소리하니 누가 대화가 되겠습니까? 교회에서 저도 청년부 맡아봤거든요. 교회 청년부 하는 일이 뭐겠어요? 어떤 사람은 성경공부 합니다. 전도합니다. 성가대, 주일학교 봉사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청년부 맡아봤고 청년회 활동을 십년을 오랫동안 해봐서 알아요. 청년들 모여서 하는 건 뭐냐? 취직과 짝짓기입니다. 취직하고 짝짓기 그런 기회를 얻기 위해서 청년들 모이는 겁니다. 취직하고 짝짓기 위해서는 자기 가치를 높여야 되거든요. 신앙 좋다는 소릴 들어야 빨리 팔리고 신앙 좋을 때 하나님이 좋은 취직자리 줄 것이다. 그 두 가지 이유 외에는 청년들이 안 모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청년들 거의 없어요. 그 두 가지 빼놓고는 없어요.
성가대, 주일학교 봉사는 이유가 이만큼 봉사했으니까 하나님 내 원하는 취직과 결혼을 해 달라. 그런 요구조건을 뒤에 걸고 하는 소리에요.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하고 전혀 다르고 개인의 욕구, 욕망이 표현된 것뿐입니다.
그건 하나님의 약속이 아니고, 타고난 자기의 죄가 발현된 거예요. 자기 안에 있던 감추어진 죄가 바깥으로 종교란 이름으로 소위 신앙이란 이름으로 위장되어서 나온 거죠. 나중에 그게 바알종교가 되거든요. 인간 욕망이 들어주는 바알종교로 튀어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리브가도 마찬가지고 이삭도 마찬가지고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그럴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고맙게도 리브가에게는 리브가가 원하는 자식을 주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한 자식을 줘버렸다 이 말이에요.
지금 마리아 이야기마저 해야 되는데 그 마리아가 얼마나 황당하겠어요. 그때 뒤늦게 천사가 와서 이야기하잖아요. 마리아야,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니까 마리아가 그때 비로소 자기가 욕 얻어먹는 걸 감내하고 어떻게 하든 순종하죠. 그저 말씀이 원하는 대로 말씀대로 이루어지이다. 이렇게 하죠. 이제는 저는 포기했습니다. 말씀대로 알아서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거예요.
그때 누굽니까? 세례요한의 엄마가 와서 주고받는 이야기 그리고 마리아가 찬양을 해요. 그 찬양이 바로 한나의 찬양과 똑같은 찬양을 합니다. 주여,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과 다윗의 약속이 내 몸 안에서 이루어지는군요. 그러니까 이 마리아는 남들에게 처녀가 애 뱄다는 그러한 스캔들에 휘말리는 것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도 말씀이 내 속에서 잉태하고 있다는 이 자체를 더 귀하게 여겼다 이 말이죠. 참, 그게 인력으로 안 되지요.
그걸 저는 아까 강의하면서 뭐라고 하던가요? 그게 영원한 것이라 했지요. 그 영원한 것에 세 가지 있죠. 뭐라고 했습니까? 믿음과 소망과 사랑. 그러니까 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 때문에 우리가 세상 사람한테 욕 얻어먹어야 돼요. 사고방식이 괴팍하다고 욕 얻어먹어야 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때문에.
세상에 보이지 않는 소망만 바라고 있으니까.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로마서 8장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래. 그 따위를 위해서 기도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진자 영원한 것을 믿는 사람은.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욕을 하겠습니까? 놀리고.
자, 그러면 창세기 25장 22절에서 24절에 보면, 25절에 나오는데 그 약속이 어떤 약속인지 보겠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 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게 약속입니다.
여러분들이 포커를 칠 때나 화투를 칠 때 우리 새순교회 교인들이야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화투 손 안 만지지요. 화투 칠 때 화투 뒷면에 보면 똑같아요. 까보면 다르지만 뒷면은 똑같잖아요. 사람들 보기에 똑같은 애에요. 그게 화투의 뒷면이에요. 그런데 앞면 까보면 내용이 정반대에요. 한쪽은 시월 단풍이고, 저쪽은 똥 갖고 있단 말이죠. 완전히 달라요.
사람은 성도는 화투장입니다. 근데 그 화투장의 그림을 본인이 그릴 수 없어요. 하나님의 약속이 그려져야 돼요. 인간은 하나님의 화투장인데 그 화투장에 그린 그림은 하나님의 약속이 와서 친히 새겨버린 그림이지, 자기가 공들여 애써서 노력해서 자기 인생 자기가 빈 그릇 채우듯이 채워지지 못합니다. 그래 안 돼요.
그게 하나님의 약속과 약속에 대한 이해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에요. 내 인생 내가 채운다? 아닙니다. 이미 채워진 것이 발현될 뿐이에요. 하나님이 채워진 것이 그 성깔 어디 갑니까? 안 갑니다. 그 성격? 딴 데 안 가요. 하나님이 주신 성격을 악마의 성격은 악마의 성격대로 결국 다 퍼주고 다 퍼내놓고 90세에 죽게 돼있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성품은 그 성품 80평생, 90평생 다 드러내놓고 나중에 천당 가게 돼있어요.
이 대목 이 쌍둥이 대목은 로마서 9장에 나오지요. 야곱과 에서가 자기들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태어나서 그들이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이전부터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했는데 그것은 전부다 사람의 행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굳게 서게 하심이라. 로마서 9장에 나오지요.
그러니까 우리들은 매일같이 여러분의 화투 패를 까보세요. 여러분의 화투 패를 까봐야 된다고. 진노의 그릇인지 긍휼의 그릇인지 까봐야 된다 이 말이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는지를 까봐야 됩니다. 그거 DNA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한번 박힌 DNA에 변하지 않아요. 방송에 나왔던 24키로 아줌마. 뭐, 베르너 증후군인가 그런 병인데 유전자의 변이에 의해서 그래 된답니다. 갈수록 야위지는. 몸무게 24키로가 뭐예요. 내 딱 보고 욥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니까.
왜 그런가? 그 사람의 화투 패거든요. 베르너 증후군 보기 위해서 그 사람 그렇게 태어나야만 했던 겁니다. 그래서 몸무게가 30키로가 안 되도 구원받을 길은 얼마든지 있어요. 자기 일을 안 믿고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약속, 주 예수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
자기 일은 믿으면 안 돼요. 자기 잘난 것, 자기 과거에 노력한 것, 선한 일 한 것, 교회 충성 봉사한 것, 헌금한 것 그거 믿으면 안 돼요. 주님이 하신 일을 믿어야지 자기 하는 일을 믿으면 안 됩니다. 우리 이름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아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0장 15절에 나오지요.
신약에 로마서 하나 쓰기 위해서 이 창세기 25장 꽉 준비 다 된 겁니다. 두꺼운 구약 전체가 왜 인간의 힘으로 구원되지 못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주의 이름으로 구원되는 이유를 알기 위해서 왜 인간의 자기 노력은 왜 안 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구약 전체가 긴긴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이 25장 23절 보니까 그 약속의 내용을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참, 엉뚱하십니다. 크게 쓸게요. 이건 오늘 강의 꼭 기억하시라고 크게 씁니다. 그것도 빨간 걸로 쓸까요? 약속이 뭐냐? 이겁니다. 한번 따라해 보세요. 뭡니까? ‘싸움’이에요. 이게 말이 됩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면서 내가 뭘 줄꼬? 골라잡아라. 1, 200억 재벌이 2, 160세까지 사는 것. 3, 너한테 욕한 놈 다 죽는 것, 졸지에 다 당하는 것. 어느 거고? 어느 거 줄까?
이게 솔로몬이 일천번제 한꺼번에 일천번제 드리고 양을 천 마리 드립니다. 소를 천 마리 잡습니다. 일천번제 드리고 응답받을 때 솔로몬이 하나님께 칭찬받는 기도를 했죠. 일종의 기도에 대한 모의고사입니다. 수능시험쳤어요. 솔로몬의 기도가 세 가지가 빠져 있었어요.
첫째는 뭐 되기를 기도 안 했다? 부자 되기를 기도 안 했어요. 두 번째는 뭡니까? 자신의 건강과 장수에 대해서 기도 안 했어요. 세 번째는 뭡니까? 자신을 욕하는 사람이 망하도록 기도하지 안했어요. 그 세 가지 포함 안 되었더니만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기도를 아주 높은 점수를 줬어요. 에이플러스 줬습니다. 이거 오늘 한국교회 금요철야기도회에 써먹어보세요. 그 다음주 금요일 날 아무도 안 나옵니다. 이 세 가지 빠졌습니다.
그러면 네 번째 있어요. 뭡니까? 나는 하나님의 종일뿐이기 때문에 화투장이죠. 나는 하나님의 그냥 화투 패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 백성들에게 구김살 없이 깔끔하게 그대로 전달되게 하옵소서. 이 기도했습니다. 야, 이 기도, 그 공 드려서 일천번제 드린 애쓰고 했을 때 일천번제 소 천 마리 잡아서 기도할 때 마음자세부터 뭐냐 하면,
뭔가 쑥 빠져나가서 마치 설사하듯이 들어왔다 나갔다, 주의 뜻이 나를 통해서 쑥 나가서 백성들에게 그대로 전달되는 거예요. 나의 탐욕과 욕심과 개인적인 사적인 명예 그것이 거치적거리지 않고 주의 뜻을 방해하지 않도록 해 달라. 그러니까 요새 말로 하면 나, 목사가 주의 뜻이 교회에 뜻을 전하는데 있어서 절대로 하나님의 일을 중간에 틀리게 반대로 또는 거추장스럽게 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솔로몬이 한 겁니다. 주의 뜻만 그대로 전달되게 하소서.
그러면 솔로몬이 만약에 하나님의 뜻이 덜커덩 하고 나한테 거쳐서 가게 되면 엉터리 아닙니까? 깨지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위에서 날계란이 떨어지면 그냥 물에 풍덩하면 좋은데 앞에 만약에 절벽이 있다면 떨어지면 날계란 다 깨져서 깨진 파편들이 물에 떨어질 거 아닙니까? 이런 돋아난 이런 역할을 이 목사가 하지 않게 해달란 말이죠.
그러면 자기는 어떻게 돼요? 자긴 부인해야 되죠. 자기 부인하려 하니까 자기 오래 사는 것, 재벌 되는 것, 자기가 사적인 개인 원수 갚는 것, 이런 기도는 쑥 들어가야 되죠. 하나의 튀어나오면 안 되니까 돌출되면 안 되니까 쑥 기어들어가고 그대로 주어지도록. 주어진 기도. 그래 그 기도대로 그 기도를 가지고 뭐라 하느냐 하면, 그 응답을 가지고 두 자로 ‘지혜’라 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뭘 썼습니까? 지혜서를 썼지요. 잠언 그 다음에 전도서 솔로몬이 쓴 겁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자기를 부인하는 거란 말이죠. 하나님의 지혜라 하는 것은 뭐가 지혜냐? 자기의 오래 사는 것과 돈 부자 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과 그 다음에 자기 애먹이는 사람 졸지에 망하도록 하는 것, 원수는 하나님이 갚아야지 자기가 갚겠다는 것 이래 돼야지, 자기가 손으로 원수 갚겠다. 이런 건 빠지는 이게 하나님의 성도의 지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죽을 때 연약하게 돌아가셨잖아요. 아무 힘없이 심지어 귀싸대기 얻어맞아가면서. 스데반 집사도 돌에 맞아 죽었잖아요. 그러면서 뭐라고 했습니까? 주여, 저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 용서해 달라. 완전히 이거는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 하고 이거는 틀리다는 정도가 아니고, 정반대에요. 정반대로 가면 돼요.
그러니 이것은 싸움해야 된다는 약속이 오니까 세상에 사람이 평화를 원하지 싸움을 원하는 사람 누구 있습니까? 직장 갔다 와서 집에 들어오면 온 .... 제가 어릴 때 고등학교 때 꿈이 뭐냐 하면, 대통령 이런 꿈이 아니었어요. 아주 소박했습니다. 아내가 앞치마 두르면서 아내는 숏파마해야 돼요. 여보, 회사 잘 다녀오세요. 라고 인사하면 나는 회사가방 들고 아내하고 빠이빠이 하고 출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앞치마 두르고, 앞치마 꼭 둘러야 돼. 잘 다녀왔어요. 인사 하는 것, 이거 외에 다른 소망을 안 가졌습니다. 아주 소박하지요.
그 모습이 한 마디로 말해서 뭐냐? 평화에요. 천주교신자들이 차려놓은 가게에 들어가면 뭐가 붙여져 있습니까? 이 집에 들어온 사람들은 평화라 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에 뭐라고 돼있든가요? 평화든가요, 뭡니까? 성경은 주님이 오게 되면 평화가 아니고, 완전히 불화하게 만들어요. 내가 온 것은 이 땅에 평화를 주려온 게 아니라 불을 던지려왔다. 시어머니하고 며느리하고 싸우고, 아비가 자식과 싸우고, 딸이 어미와 싸우고 개판 오 분 전으로 만들어요.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라는 겁니다.
이게 우리들의 예상하고 완전 상상을 초월하는 거예요. 성경은. 사람들이 얼마나 평화를 원합니까? 남북도 평화무드. 평화가 이뤄진다면, 공자가 그런 이야기했지요. 될 수 있는 대로 남하고 싸우지 마라. 그게 사람 사는 행복이라고. 그런데 주님께서는 친하게 지내고 싶어도 복음 들어오고 나면 원수 되는데 어떻게 합니까? 실컷 싸워야 돼요. ‘실컷’ 하나 더 붙여야 돼요. 싸움 정도가 아니고 실컷.
그래서 이 약속이 주어진 난 뒤에 이삭의 가정은 어떻게 됐습니까? 파토 났지요. 실컷 죽으라고 싸워요. 심지어 형은 동생을 진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걸 눈치 채고 엄마 리브가가 동생 야곱을 빼돌려서 삼촌 집으로 줄행랑치도록 만들었죠. 가정이 그 정도 되면 개판 오 분 전입니다. 완전히 개판 돼버렸어요. 이게 다 누구 때문입니까? 없던 자식 생겨났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다른 말로 하나님 약속이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본다는 게 아, 하나님께선 이런 좋은 분이기 때문에 내가 좋은 마음을 갖고 있으면 좋은 축복을 줄 것이다. 이런 선입관이 깨어지지 아니하면 그건 성경 잘못 본 겁니다. 착하고, 아름답고, 힘차게. 라든지 올림픽 구호는 아니지만 르까프처럼. 보다 착하게, 보다 아름답게, 진선미죠. 보다 참되게. 그거 성경하고 아무 상관없습니다. 치열한 싸움이에요.
에베소서 5장에 보면 현재 우리의 싸움은 누구하고 싸움이다? 공중권세 잡은 이 세상 악한 마귀하고 치열한 싸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실컷 싸우되 웃으면서 싸우세요. 즐기듯이 싸워야 돼요. 억지가 아니고. 적어도 실컷 싸울 수 있는 자유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실컷 싸워도 구원에 아무 지장 없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실컷 싸웠는데.
가정에 싸움이 없다면 이미 그 가정은 남남입니다. 그거는 폭풍, 곧 냉각기에 접어들어서 별거 수순을 밟아요. 15일간 조정기간에 들어갈 그런 수순이에요. 말 안 한다는 거. 아, 이거 무섭습니다. 싸울 때가 그리울 겁니다. 왜 싸워야 되느냐? 하나님께선 우리는 싸워야 우리의 숨겨진 본색들이 나열되고 터져 나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플 때 참으면 안 돼요. 아플 땐 아프다고 고함을 질러야 돼요.
신명기에 보면 그런 게 있어요. 여자가 길에서 강제추행 당할 때 고함지르지 않으면 그것은 그 강제추행한 사람에게 죄를 물을 수 없다. 이래 돼있어요. 강제추행 당할 때 힘껏 고함을 질러서 자기 사태를 알리게 되면 그 강제추행한 놈은 벌을 받는다. 그래 돼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 뭘 의미하느냐 하면, 사람은 생속이기 때문에 스스로 도덕과 윤리로 위장하지 말라는 거예요. 생속 그대로 건드리면 아프면 아프다고 그대로 이야기해 버려라 이 말이에요. 왜 그래야 되느냐? 그래야 자기가 자기 착함으로 자기 의로움으로 위장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아, 이거 너무 어려운 말을 했나? ‘생속’이란 말 아시겠지요. 민감하게 뭔가 오게 되면 온 대로 그대로 고함지르고 아프면 아프다고 하고, 좋으면 좋다고 이야기해버리란 말이죠. 그걸 꾹 참는다는 것은 결국 뭐로 나와요? 난 이렇게 성화됐다, 난 이렇게 훌륭하다, 이만큼 착하다. 그건 자기 껍데기만 과시하는 것밖에 안 돼요. 그거 우울증 걸립니다. 그게 병 되는 거예요.
나도 교사해봐서 알지만 애 못되면 패버리고 미안하다 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걸 나는 훌륭한 교산데 어떻게 요령을 부리고 그거 복잡해서 싫어요. 에라이 해놓고, 미안하다. 내 맘 알지. 다 사랑하니까 하는 거야. 두사부일체 아이가. 요령 따져 그거 하면 저거 부모 찾아올 거야. 그거 따지게 되면 결국은 뭐냐? 자신의 의로움, 나는 그만큼 우수하다는 걸 훌륭한 인간이라는 그걸 과시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작은 감정에도 반응을 나타내야 됩니다. 그 반응을 나타내야 우리에게 숨어있던 죄들이 그걸 통해서 톡톡 튀어나오지요. 싸움입니다.
자, 이제 이 싸움을 풀어야 될 텐데 아, 이거 골치 아픈 이야기, 무지무지하게 어려워요. 싸움이 굉장히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왜 복잡하냐 하면, 싸움을 하는데. 이거 하기 전에 어렵기 때문에 물어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뭐라고 했습니까? 싸움이죠. 이거 층이 두 층이 있어요. 일층이 있고, 이층이 있는데 말로 설명하면 너무 어렵기 때문에 그림으로 일단 설명 드리고 말로 설명 드릴게요.
일층에서 선과 악이 구분되고, 이층에서의 선과 악이 구분돼요. 이층에서는 이걸 까만 걸로 합시다. 이게 복잡하기 때문에. 이층의 선과 악, 일층의 선과 악이 구분됩니다. 그러면 이 선과 악이 총 몇 가지입니까? 하나, 둘, 셋, 넷 네 가지죠. 선1, 악2, 선3, 악4 총 네 가지 나오지요. 가치가 나오지요. 가치란 말은 선과 악을 가치라 합니다. 네 가지 종류가 나오지요. 이게 서로 네 가지가 서로 물고 뜯어요. 그러니까 이게 복잡해 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자, 이렇게 제가 말씀드리고 구체적으로 해보겠습니다. 약속대로 해보겠습니다. 여기 보면 이게 뭐냐? 우선 쌍둥이죠. 싸웁니다. 싸운다 하니까 이건 리브가가 아기 낳을 때 본래 기대했던 내 자식, 예쁜 자식, 예쁜 아기 잘 키워야지. 그런 인간적 기대는 날아가 버렸어요. 그건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하나님의약속이 화투 패처럼 까보니까 서로 싸우고 있더라 말이죠. 심지어 둘은 태어날 때 전부터 싸웠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싸움을 하늘의 싸움을 이층의 싸움이 어디까지 미치게 한다? 일층의 싸움으로 번지게 하는 거예요. 이층이 만약 하늘나라라 생각하고 일층을 땅의 세계, 지상의 세계라 한다면, 하늘나라의 선과 악은 누굽니까? 선은 예수님이 되고 악은 누굽니까? 악마가 되겠지요. 이 싸움이 어디로 번진다? 지상에 번지는데 그 지상에 번지는 그 처음 접촉점이 누구 가정입니까? 이삭의 가정에서 이 싸움이 벌어졌다 이 말이죠.
자, 그러면 그 약속의 내용을 보겠습니다.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선에 속한 국민과 악에 속한 국민이 싸우고 있는데 이 두 국민이 복 중에 나눠진다. 그러니까 이거는 뭐냐 하면, 싸움을 하는 것은 누가 승리자가 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이 지상에서는 무조건 싸움 자체를 위한 싸움, 나누어지기 위한 싸움을 하는 거예요. 계속 나눠지기 위한 싸움을 하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고린도전서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파당이 있어야 누가 옳은지 드러날 것이다. 라고 했어요. 어떤 교회 내에 장로 투표하거나 권사 투표하니까 서로 처음에는 형제고 집사님 하다가 투표하다 보니까 표가 나눠졌어요. 나눠졌을 때 그 교회는 아이고, 우리 교회 나눠지다니 문제다. 하는데 사실 문제가 아니고, 나눠지게 하는 것이 그게 뭔 뜻이다? 하나님의 뜻이다 이 말이죠.
뜻이 있어서 이쪽이 밀어줬던 사람이 장로 안 되니까 저쪽 한 사람은 교회 나가서 따로 장로 해버리고 교회가 반 쪼개졌어요. 그래서 나머지 사람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한 형제 됐다. 우린 한 마음이다. 라고 생각하겠지요. 죄송합니다. 일년도 안 되서 또 둘로 쪼개졌습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고? 왜 쪼개진 데 또 쪼개지게 하느냐? 하지만 그 쪼개지는 나눠지는 자체가 뭐라고요? 하나님의 뜻이 된다 이 말입니다.
도대체 어디까지 나눠지느냐? 이게 남은 잔데 결국은 한 분만 남을 때까지 계속 나눠져요. 그 한 분이 누구겠어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진짜 자기 참 아들, 진짜 구원받은 자를 속아내는 데 있어서 계속해서 분류하고, 분류하고, 나눠지고, 나눠지고, 나눠지고 하는 그 과정 절차를 바로 싸움이란 절차를 통해서 나눠지는 그것을 계속해서 유발시킵니다.
에서하고 야곱하고 나눠지지요. 야곱의 아들 가운데 요셉하고 또 누구하고? 요셉하고 나머지 열한 지파 나눠지지요. 또 열두 지파 가운데서 유다와 베냐민 따로고 나머지 열 지파 나눠지지요. 유다 가운데서 바리새인 쪽에 속한 사람과 예수님 따른 사람 또 나눠지지요. 예수님 속한 사람 중에서 제자들하고 예수님하고 또 나눠지잖아요. 결국 누가 남아요? 달랑 예수님만 남아요.
그러니까 신약 시대에 나온 교회는 뭐냐? 더 이상 나눠질 것도 없게 만들어 버려요. 왜 나눠질 게 없게 만듭니까? 누구만 쳐다보기 때문에? 이미 머리가 하나 밖에 없기 때문에 머리가 한 분 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쪼개져도 한 분 예수를 쳐다보는 사람은 어디가도 저 멀리 서울 가도 우리는 한 형제 되는 겁니다.
몸이 하나요, 주도 하나요, 머리도 하나요, 몸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 밖에 없어요. 그 하나 됨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줄기차게 줄 창 싸우는 거예요. 결국 싸움을 통해서 어디로 모입니까? 우리가 이렇게 싸워도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예수님 덕분이야. 이렇게 나오면 그건 한 교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숨어있는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줄 창 싸우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유도하는 겁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고 우리가 그냥 인간적으로 좋게 하자, 화목하자, 하나 되기를 힘쓰자. 에베소서 4장에 있잖아요. 성령의 하나 됨을 힘써 지키라. 있잖아요. 그런 구절, 알죠? 교회연합회 안 가보셨구나. 가면 많이 그런 이야기해요. 하나 됨을 힘써 지키자. 그런 소리 많이 해요. 백날 해봐야 그런 것은 실망만 하는 거죠.
피곤하신데 조금만 하고 10분 쉽시다. 조금 참으세요. 중요한 거니까.
이층의 예수님과 악마의 싸움이 일층에 내려오게 됩니다. 그런데 일층에 있는 사람들은 선과 악의 기준이 이층의 선과 악의 기준하고 다르지요. 왜 다르냐 하면, 일층 자체가 이층 보기에 악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복잡하다 했잖아요. 일층에서 나름대로 선과 악을 기준 지었지요. 일층에서 나름대로의 선과 악의 기준 자체가 이층에서 보게 되면 몽땅 그게 뭐다? 그 자체가 악이 되는 겁니다.
아버지 이삭은 누굴 좋아합니까? 에서, 맏아들 좋아하지요. 왜 좋아합니까? 자기가 맛있는 거 해주거든. 그러니까 일층에서 아버지가 보는 선과 악이 있을 거 아닙니까? 이것만 하고 쉽시다. 아버지 이름이 뭐지요? 이삭. 이삭이 생각하는 선과 악이 있지요. 그 다음에 아내 이름이 뭡니까? 리브가. 리브리가가 생각하는 선과 악 따로 있지요. 큰 아들, 에서. 에서가 생각하는 선과 악 따로 있지요. 그 다음에 누굽니까? 야곱. 야곱의 선과 악 따로 있지요. 전부다 선과 악 다 달라요. 다 다른데 이게 몽땅 하늘나라 보기에 네 명 다 뭐가 된다? 악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뭘 구상하고 있느냐 하면, 이삭과 리브라, 에서, 야곱이 서로 싸우게 만들어서 그 싸우는 과정을 통해서 너희의 싸움 자체가 악 속에서 싸우는 것이고, 그 싸우도록 유발한 가운데서 아하, 선은 따로 있다, 하나님 뜻은 따로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줄 창 네 명은 싸우기 만드는 겁니다.
싸우게 하는데 그 원인이 뭡니까? 두 사람이 서로 싸우리다. 그 다음에 싸우면서 그 뒤에 나와요.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고 작은 자는 큰 자한테 섬김을 받을 것이다. 이 내용의 해석을 두고 네 명이 서로 싸우는 거예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면 누가 큰 잡니까? 이게 참 어려워요.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면 작은 자를 섬기는 것이 큰 자가 되죠. 그러니까 섬김을 받는 자가 작은 자가 되죠. 섬김을 받는 작은 자가 되면, 섬김을 받으면 이게 뭐냐? 큰 자가 되거든요. 그러면 큰 자는 자기를 섬겼던 그 애한테 섬길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내가 해놓고 무슨 소린지 내가 모르겠는데 야곱이 큰 자 아닙니까? 나중에 큰 자지요. 큰 잔데 야곱이 누구한테 절합니까? 일곱 번 절하지요. 누구한테? 에서한테 절하지요. 에서가 절 받았지요. 그리고 야곱은 큰 자기 때문에 절하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절 받은 큰 자가 오히려 작은 자가 되고, 절한 야곱은 큰 자가 된다 이 말이죠. 분명히 둘째기 때문에 작은 자기 때문에 분명히 큰 자한테 절했는데 절 받은 그 사람이 작은 자가 되고, 절한 그 사람은 큰 자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이 얍복강 하기 전에는 어땠습니까? 서로 뭐 된다? 서로 큰 자가 되려고 하는 거예요. 결국 이것은 뭐냐? 큰 자가 되겠다는 그 품성은 인간의 죄악 됨 속에 들어있다, 안 들어있다? 들어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서 인간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선이 악이 될 수밖에 없는 모든 이유를 다 까발리는 그런 쪽으로 하나님은 이 약속을 써먹는 겁니다.
10분간 쉽시다.
무슨 이야긴지 모르겠지요. 내가 이야기해놓고 잘못 이야기했는지
우리교회(IP:220.♡.176.141)
07-12-16 13:46
20071207b 울산강의-창세기 26, 27장 이름 : 한윤범 2007-12-15 16:49:19
(강의:이근호 목사)
둘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어린 자가 큰 자를 섬기리라” 아, 얼마나 정상적이에요. 맞지요, 그죠? 어린 자가 큰 자를 섬기리라. 참, 정상적이죠. 그런데 약속은 뭡니까?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이렇게 해버리니까 사람들이 지금 섬기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될지, 큰 자 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될지 상당히 난처하게 됐어요.
큰 자 되는 건 좋아하는데 이 큰 자는 오히려 어린 자를 섬겨야 되니까 뭐하고 싶어요? 여러분, 큰 자 하고 싶습니까, 어린 자 하고 싶습니까? 어린 자 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어린 자 된다는 것은 큰 자한테 눌리잖아요. 어리기 때문에.
이 말은 복잡하게 안 할게요. 쉽게 할게요. 예수님이 큰 자로 왔잖아요. 예수님보다 큰 자가 어디 있습니까? 하늘나라 영광을 버리시고. 근데 그 큰 자가 이 땅에서 어떻게 됐어요? 죽기까지 복종하셔 섬겼으니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지금 그걸 앞당겨 보여주는 겁니다. 세상에 천하에 예수님이 쓰레기보다 못한 우리 오히려 우리를 섬겨서 구원해내신다는 그것을 벌써 수천 년 전에 이천 년 전에 리브가의 뱃속에서 아기 낳는 사건을 통해서 표현하신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말을 하려면 예수님이 우리를 오히려 내가 온 것은 내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내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너희를 섬기기 위해서 그냥 말로만 립씽크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생명, 목숨까지 바쳐서 사모님을 위해서, 집사님을 위해서 그냥 내줬다. 그러니 너희들은 세상의 권세자를 본받지 말고 나를 본받아라. 이래 되었다 이 말이에요.
그런 이야기할 때 제일 먼저 우리에게 와 닿는 게 뭐냐 하면, 아니 하나님, 일을 정상적으로 하세요, 정상적으로. 우리가 뭔데 비정상적으로 하십니까? 예수 떴다. 야, 주님이다. 섬기면 되지, 왜 주님께서는 떴다 이래 오는 게 아니고, 귀싸대기 맞고 매 맞고 왜 이렇게 처참한 우리가 제일 꼴 보기 싫어하는 처참한 모습으로 와서 왜 그런 식으로 몰래 와서 몰래 구원하시는 겁니까? 좀 일을 정상적으로 하세요. 거지꼴로 오지 말고.
우리가 뭐가 부족해서 뭐가 못나서 왜 그렇게 합니까? 라고 이야기할 건데. 예, 우린 못났습니다. 우리가 지금 모든 걸 거꾸로 이해하고 있으니까 주께서 우릴 구원하기 위해서 거꾸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정상적으로 하면 지옥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도 생각하는 게 모든 게 거꾸로기 때문에 거꾸로 뒤집어야 돼요. 뒤집어서 일해야 돼요. 이래 하시는 분으로 왔다 이 말이죠. 그 뒤집음 때문에 우리가 성경해석하기가 굉장히 힘들다 말이죠.
자기 긍정, 하면 된다는 자기 긍정. 이 자기긍정 가지고 성경해석 백 날 모르고, 자기부정, 나는 죽어 마땅하다. 이런 자기 부정의 입장에서 성경을 봐야 성경이 보이게 돼있어요. 자기긍정으로 해서 되질 않는다 이 말이죠. 그런데 여기 자기긍정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게 또 인간이죠.
여기 자기긍정으로 나선 사람이 네 사람 나와요. 네 사람 누굽니까? 이야기해보세요. 이삭, 또 한 사람 리브가, 또 한 사람, 에서, 야곱. 이 네 사람이 우리를 대신해서 자기긍정으로 나서서 다 깨집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거예요. 다만 하나님의 약속이 개입되면 야, 이건 나의 긍정으로 될 일이 아니구나. 이걸 깨닫게 하죠. 나는 하면 된다. 나는 하게 돼있다. 이런 것 가지고는 되는 일이 없음을 깨닫게 하죠.
그래서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임한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 이름을 믿음으로 구원받게 돼있어요. 다시는 나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나를 안 믿겠습니다. 주님만 믿겠습니다. 하는 식으로 구원받게 돼있다 이 말이죠. 지금도 그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지요.
그러면 오늘날의 싸움은 마귀하고 싸움이라 했는데 그 마귀하고 싸움이 줄 창 이뤄지는 현장은 바로 우리 속입니다. 목사도 마찬가지고, 집사도 마찬가지고 늘 우리 속에서 싸움이 일어나요. 목사는 설교하면서 오늘도 교인들을 감동시켜야 될 건데. 그래서 한번 온 교인이 두 번 다시 오도록 만들어야 건데 이러한 자기의 포부를 담고 하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묻지요. 와서 뭐하느냐? 그렇게 해서 감동받아서 교인들이 오게 되면 넌 뭘 얻어지느냐? 주여, 저는 승리자가 되는 겁니다. 글쎄, 그게 문제라니까. 큰 자가 되고, 섬김을 받으려 하는 자고, 승리자가 되고자 하는 싸움 했다 하면 승리자가 되고 했다 하면 승리자가 되고 이게 우리들의 마음속에 있던 포부였습니다.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가 뭡니까? 승리자가 될 공산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실패할 것이 두려워서 먼저 자기가 자기를 죽였잖아요. 실패자 될까봐. 승리자 못 될까봐. 그런데 그걸 아셔야 돼요. 우린 태어날 때부터 이미 실패자에요. 새삼스럽게 실패하고 자시고 말 것도 없어요. 처음부터 우린 실패하고 혹시 구원 받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처음부터 우린 실패자에요. 남하고 비교하니까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래서 제가 이야기할 것은 이 네 명이 실패한 이유가, 그 사람이 진리, 선과 악은 누구하고 비교해서 그런 겁니까? 서로가 서로한테 비교한 거예요. 수능시험 치는데 네 명이 서로 컨닝하는 거예요. 애는 400점 만점에 보통 50점 나오는 아이고, 40점 나오고, 400점 만점에 20점 나오고. 백 날 봐야 한 30점 밖에 안 나오는데 컨닝하면 뭐 합니까? 400점 만점에 390점 되는 서울대 법대 그런 애 걸 봐야 되는데 백 날 봐야 30점 밖에 안 나오는데. 안 되잖아요.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왜 매일같이 울고불고 낙담하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왜 그런 것을 매일같이 합니까? 똑같은 인간들만 쳐다보고 그 사람과 비교했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이 참 얼마나 어리석은지 남보다 좀 늦게 승진했다고 해도 일단 세월 가서 그 직급에 이르면 똑같아요. 제가 한 말이 아니고, 어떤 서울대 의대 나온 사람이 아는 교인이 있어서 그리 이야기하는데. 자기가 서울대 치대 나와서 치과 원장 할 때 서른 살 좀 넘어서 할 때 자기는 일찍 출세했다고 여겼던 겁니다. 왜? 사람들이 초반에 원장님, 원장님 해주니까. 그런데 사십 대도 원장님이고, 오십 대도 원장님이고 발전성이 없어. 자기는 분명히 빨랐다고 생각했는데 똑같아요. 특히 교사들. 아이고, 선생님, 선생님 하는데 삼십 대도 선생님, 사십 대도 선생님, 오십 대도 선생님. 진짜 교장, 교감 안 되면 맨 날 선생님 밖에 안 돼요. 남하고 비교하는데서 자신의 잘못된 게 드러나죠.
그 뒤에 창세기 26장부터 창세기 마지막까지 있던 모든 일은 결국은 뭡니까? 남하고 비교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계시를 엉터리로 읽는 거예요. 전부다. 모든 사람이 다. 요셉도 마찬가지고, 야곱도 마찬가지고, 리브가도 마찬가지고, 이삭도 마찬가지고, 야곱의 열두 아들 전부다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뜻을 읽어낼 능력이 없으니까 기껏해야 눈에 보이는 사람하고 상대해서 나는 이루었다, 나는 하나님 뜻을 이루었다. 맨 날 자기 착각에 빠지면서 창세는 끝이 나는 겁니다. 참, 하나님 뜻하고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예수님도 이런 이야기했어요. 제자들 가운데서 서로 자기가 높다고 천국 가면 자기가 높은 자리 앉는다고 싸우니까 어린아이 하나 데려와서 앞에 세우면서 하시는 말씀이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 같은 심성이 아니면 천국은 글렀다고 생각해라. 왜 어린아이를 세웠을까요? 어린아이는 경쟁대상이 아니잖아요. 모든 사람이 다 무시하잖아요. 모든 어른들은 모든 어린아이를 다 무시하잖아요.
그러니까 어린아이를 어른들 앞에 세웠다는 말은 어른들이 아무리 날고뛰어도 어린아이 같은 심성을 가질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가질 수가 없어요. 왜? 좀 아니까. 좀 한다고 나대니까. 다시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나는 못합니다로 돌아갈 수 없어요. 결국 인간의 힘으로 천국은 들어갈 수 없는 겁니다. 그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인간의 힘으로 안 되고, 바로 어린아이를 세우는 예수님 능력으로 심성이 어린아이처럼 만들어질 때 그때 그 사람이 천국백성이 되는 것이지, 자력으로 스스로 자기를 어린아이 될 수는 없는 겁니다.
이제부터 약속을 풀이해봅시다. 약속을 다시 한번 읽어봅니다. 23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민족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 중에서부터 나누리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심기리라”
무슨 암호 같지요.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자, 이 해석을 두고 드디어 쌍둥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이 쌍둥이 에서와 야곱 사이는 형제일 수가 없고 언젠가는 이게 나누리라. 갈라져야 되겠죠. 갈라지는데 좋게 갈라질 수 없지요. 왜냐하면, 둘이 싸우는 중이니까. 누가 승자인지, 패자인지 들통 나는 순간에 영원히 빠이빠이하게 돼있는 갈라서게 돼있는 형제로 태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그냥 태어나는 게 아니고, 두 민족은 한쪽은 강하겠고, 한쪽은 두 민족은 이쪽보다 강하겠고. 강한 민족 따로 있고 약한 민족 따로 있겠죠. 그럼 누가 강한 민족이 되느냐? 미리 한번 봅시다. 창세기 27장 29절. 잠도 오는데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제가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이래 돼있지요.
여기서 뭐냐? 한쪽이 복 받으면 다른 쪽이 복 받으면 참 좋겠는데 그게 아니라 한쪽이 복 받았다는 말은 한쪽은 필히 저주받게 돼있다는 말입니다. 그 저주가 39절에 나옵니다. “너의 주소는 땅의 기름짐에서 뜨고 내리는 하늘 이슬에서 뜰 것이며 너는 칼을 믿고 생활하겠고 네 아우를 섬길 것이며 네가 매임을 벗을 때에는 그 멍에를 네 목에서 떨쳐버리리라”
이건 모든 축복은 축복받은 자에 완전히 몰아주기 하는 식으로 몰표가 다 가버리고, 저쪽에는 전혀 축복이라는 것은 남아있지 않고 몽땅 다 가는 그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축복과 저주는 구분하는 겁니다. 결국은 이 약속을 준 것은 뭐냐 하면, 이 세상에는 두 민족이 등장하는데 한 민족은 영원토록 뭐 받고? 축복 받아야 되고, 한 민족은 영원토록 저주받아야 되는 민족이 그 두 개가 합쳐서 구성해서 약속이라는 것을 이룬다 이 말이죠. 약속.
그러니까 하나님의 약속이라는 것은 떨어졌다 하면 한쪽은 중립되는 게 아니고, 떨어지면 도 아니면 모에요. 축복 아니면 저주, 저주 하나면 축복이지, 어중간 중립지대가 없어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뭘 받을지어다? 저주를 받을지어다.
제가 어제 심방 가서 이야기했어요.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받거든. 참 내가 미워서 이런 소리 하는 게 아니고, 내 말이 아니고 성경에 있단 말이죠. 있으니까 심방 가서 이 이야기밖에 못하겠네.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받는다. 심방 가서 딴소리 할 게 없었어요. 그렇습니다. 하면 복이고, 기분 나쁘다 하면 저주고. 야, 목사님 생각이 우째 저하고 똑같습니까? 하면 복이고, 들어보니 기분 되게 나쁘네. 그럼 날 주님 사랑 안한다 이 말이죠. 목사님 보시기에. 이런 식으로 튕겨나가면 이상한 사람이고.
중립지역에 모아놓고 한쪽은 저주를 쪼아대고 한쪽은 축복을 쪼아대는 게 아니라 축복된 그 순간부터 남아있는 자체가 저주가 되고, 축복을 끄집어내면 나머진 자동적으로 저주가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약속의 올 때 모든 약속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온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 잃으면 소용이 있으리요 유익이 있으리요 말씀처럼 이 세상에 구출되는 것보다 더 큰 복은 없어요. 왜냐? 구출 안 되면 저주기 때문에 구출됐다는 이 사실, 구원됐다는 이 사실 그것만 챙겨도 이 세상에서 건강 잃고, 재산 잃고, 자식 잃고 다 날려도 손해 안 본 장삽니다. 남는 장사에요. 괜찮은 장사한 거예요. 진짜 복 받은 겁니다.
문제는 이 사실을 네 명 어느 누구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축복을 받아 놓고 야곱은 몰랐습니다. 왜 몰랐느냐 하면, 야곱이 이런 축복을 받을 때 야곱은 오해했어요. 이 축복을 누가 이룬다? 자기가 이루는 줄 알았습니다. 아, 이게 큰 또 오해에요.
창세기 27장 29절 다시 한번 봅시다. “만민이 너를 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