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대구강의 1 - 지옥의 하나님 4
06 대구강의 1 - 지옥의 하나님 4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06 대구강의 1 - 지옥의 하나님 4
06,03,06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없음과 있음에 대해서 !!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조금 어렵게 하겠는데, 지금 강의할 것은 '있다'와 '없다'의 문제로서,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우리의 상식과 실제와는 좀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없는데서 있게 하신다" 라는 것은 누구나 다 동의를 하는데, 즉 별이 없었는데 있게 하셨고, 달도 없는데서 있게 하셨고, 그리고 인간도 그렇게 없는데서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그 의도와 의미와 목적을, 없음에 도로 집어넣어야만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없음에서 있음을 존재론적으로만 생각을 하는데,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있음에는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있음에만 적용시키지 말고, 없음에까지 적용을 시키면 없음이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없음이 이해가 되면 있음도 다른 의미로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선악과나무가 왜 있는가?" 라는 것인데, 그것이 없었다면 우리가 죄도 짓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이 '왜' 라는 말에 대해서, 이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답변을 해도 우리는 그것이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왜 사는지, 하나님의 그 정확한 목적과 의도를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자기가 살아있다는 것은 알지만 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없음'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즉 죽음에 말이다. 우리들 생각에는 인간 존재만 있으면 있음에 해당한다고 여기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지 않으면 있음이 아니라 없음에 해당하고 죽음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은 본다고 여기는 자는 소경이고 소경이라고 여기는 자는 보는 자라고 했는데,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성도에게 이러한 인식의 변화를 설명해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설명해주려면 본인이 이런 과정을 겪어야 설명할 것이 나온다는 것이다.
(요 9:39)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이렇게 되면 인간존재의 문제가 아니라 율법, 천국, 구원, 믿음 등등, 성경에 나오는 이런 모든 개념들을 새로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것을 다 태워버리고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는 것을 새롭게 말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은 텅텅 비어있는데, 공기만 들어있는 '곽' 이라고 할까? 그런 종이상자는 발로 눌러버리면 박살이 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외부에서 충격을 가하면 마구 찌그러드는데, 즉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 예수님이 없다면 모든 것이 다 죽음 !!
그런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이 들어있지 않다면, 즉 예수님이 들어있지 않으면, 이것은 있어도 없음이 되고, 역시 죽음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현대인들은 어떠한가? 대부분 다 죽어있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으면 죽으리라고 하신 것처럼 모두 다 죽어있다는 것이다.
껍데기가 어떤 것이든, 미스코리아이든, 영화배우이든, 야구선수이든, 그런 것에 전혀 관계없이 말이다. 그 안에 하나님의 본래 의도한 뜻이 담겨있지 않으면, 밟으면 그냥 짜부라들듯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즉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존재개념을 다시 수정해야 하는데, 안 짜부러지는 사람을 등장시켜야 하는데, 그분이 누구인고 하니,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그냥 짜부러지고 박살이 나는 빈 박스와 같은 우리와 예수님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은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야곱과 이스라엘의 차이라고 보면 되는데, 야곱은 분명히 자기가 존재한다고 여겼는데, 하나님의 천사 앞에서 자기는 빈깡통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다. 이런 야곱에게 축복할 때 이 야곱 안에 뭔가 들어오게 되는데, 하나님의 뜻이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은, 장차 오실 예수님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언약, 즉 약속의 능력이 야곱 안에 들어오게 되면, 이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야곱은 과거의 빈 박스가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새로운 실존이 된다는 것이다.
◈ 채움이 아니라, 안의 내용물이 바깥을 결정 !!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빈깡통 같은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고 하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내 속을 채워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라는 걱정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생각을 하는 자체가 비어있는 것에다 채우는 방식으로 생각을 하기에 그런 것인데,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비어있는데 채우는 식이 아니라, 안의 내용물이 바깥을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 말도 어려운데, 흔히 생각하기를, "아, 나는 예수님도 없고 예수님을 찾았으면 좋겠다" 라고 말이다. 그러나 참된 성도의 경우에는 그것이 아니라, 야곱처럼 이미 창세 전부터 사랑 받기로 되어있는데, 하나님의 이런 희미한 뜻이 우선되어서, 그것이 야곱을 만들고 주인공 되신 예수님께서 이 야곱을 탄다는 것이다. 마치 배의 선주가 배를 만들어서는 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성도가 아닌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아하, 예수님이 안 계시네. 얼른 예수님을 모시고 와서 내 배에 태워다 드려야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출발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만약에 이렇게 되어버리면, 즉 "나는 빈 배였다. 예수님을 모셨다. 이제부터는 예수님을 붙잡아야지. 어떻게 붙들까? 평소에 기도를 열심히 하고 교회에 충성하면 설마 예수님이 떠나지는 않겠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이 한국교회에 계속해서 있어왔는데, "성령이 온다. 성령이 떠나지 않도록 기도하고 행동을 조심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빈 껍데기가 되어서 망한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고방식 자체가 예수님을 모셔서 자기가 더욱 더 향상되고 수준 높은 새로운 피조물로 달라진다고, 그렇게들 생각하면서 사도의 서신들을 해석해왔다는 것이다.
◈ 서양철학 - 어떻게 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낼 것인가?
방금 제가 말한 이러한 인식의 변화의 요청은, 철학을 공부하게 되면 어느 정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중세철학을 비롯한 서양철학의 특징은 무엇인고 하니까, "어떻게 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낼 것인가?" 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을 인간의 지혜와 노력과 용기와 결단력으로, 어떻게 그것을 맞추어서 신에게 흡족한 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인데, 그러나 이것은 모든 철학적인 흐름을 조사해볼 때, 인간들의 이성적인 바탕에 의해서 된 것이지,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 즉 십자가의 영에 의한 하나님의 언약과는 전혀 딴 판이라는 것이다.
◈ 어떤 마음가짐으로 예수님을 대하는가?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이야기할 때 두 가지를 말해주어야 하는데, 이 '지옥의 하나님' 이란 책도 그런 내용을 담고 있는데, 먼저 첫 번째로는, 사람들이 평소에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예수라는 분에 대해서 인식을 하고 있는지, 즉 어떤 식으로 천국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믿음에 대해서, 등등 이러한 개념들을 전부 그 뿌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제대로 다 들추어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가장 근원적인 것부터 들추어내면, 여기서 튕기고, 덤벼들고, 달아나고, 도망치고, 등등 온갖 것을 다 할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한 가운데서 야곱이 이스라엘처럼, 아브람이 아브라함처럼, 그리고 사도바울처럼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말이다.
이런 사람들을 두고서 주께서 직접 역사하는 성도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인간적인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다 설명하고, 그것이 아니라고 했을 때, 그러한 반발과 거부반응 속에서도, 그야말로 자기의 자기 된 것은 출생 이전부터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예정으로 된 것이라고, 그것을 지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그야말로 기적이 만들어낸 인물이란 것이다. 그래서 교재 22페이지의 '인간의 이름과 운명'을 하기 이전에 이것부터 좀 더 살펴보자는 것이다.
◈ 불의한 청기지가 과연 예수님인가?
누가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불의한 청기지를 예로 들었는데, 이 불의한 청기지가 과연 예수님인가? 이렇게 바로 연결될 수 가 있으면, 즉 자기의 퇴직 이후를 걱정해서 회사 돈을 마치 자기 돈처럼 다 해먹고, 자기만 살 궁리를 한 이기주의자라는 것이다. 회사는 망하든 말든 자기만 살겠다고 말이다. 이러한 불의한 청기지가 과연 예수님인가?
◈ 불의한 청기지 비유 - 너 자신을 알라 !!
(눅 16:1)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예수님께서 이러한 불의한 청지기를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서, 인간의 세계와 예수님의 세계가 서로 건너가고 또한 건너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세계로 건너가지 못합니다" 라고 하면, "그러면 우리에게 무엇이 문제입니까?" 라고 질문하기보다는, "그렇다면 예수님이 건너오면 구원받을 수 있겠네" 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런 희망을 갖는 것이 문제인데, 왜냐하면, 자기의 문제점을 전혀 살펴보려고 하지 않기에 말이다.
이 불의한 청지기는 말 그대로 불의한데, 쉽게 말해서 나쁜 놈인데, 그런데 예수님이 이 나쁜 놈을 두둔하는 것처럼 이야기했을 때, 우리가 이 누가복음 16장을 미리 알고 있으니 그렇지, 만약에 그 당시 예수님이 그런 이야기를 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의 그런 이야기에 동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고 싶어서 성의를 다해서 귀를 기울였는데, 예수님은 성의를 표하지 않고 못 알아듣도록 이야기했을 때, 우리 쪽에서는 밀쳐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인간의 근본 마음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과 분노가 있는데, 사실 우리들 자신도 그런 것이 자기 속에 들어있다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가지고, 미처 자기도 모르는 자기 모습을 들추어내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에게는 "주님이 우리에게 건너오시면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라고 할 자격조차도 없다는 것을 아부 철저하게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인간은 "나를 구원해주세요" 라고 하는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속에 문제점을 도외시하고, 자기 속에 있는 주님에 대한 적개심은 뒤로하고 어떻게 구원해달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자기의 잘못에 대해서 진지하게 여기지를 않고, 그 심각성을 제대로 모르고 있는데, 즉 주님이 우리의 잘못을 지적하면, "예, 제가 잘못했고 못났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구원해주이소" 라고 하기는 하는데, 그러나 거기에는 진정성이 없다는 것이다. "아니 예수님, 그래서 제가 잘못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했으면 되었지 더 이상 무엇을 원하십니까?" 라고 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당당하다는 것이다.
◈ 총신 교수들, 무엇이 그리 당당한가?
총신 교수들이나 교회사에 나오는 신학자들을 보면 참으로 당당한데, 그러나 사실상 그런 당당함이 큰 문제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비밀에 전혀 접근을 하고 있지 못하니 말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신학함에 대해서, 즉 진리를 제대로 안다고 여기서 대단히 당당하게 생각을 하는데,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를 제대로 알아야한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 당시 예수님이 불의한 청지기를 설교하는 바로 그 현장에 있었다면, 우리도 예수님에 대해서 적개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라는 말이다.) 이 불의한 청지기의 경우에도, 예수님이 이 불의한 청지기를 두둔할 때에,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 불의한 청지기를 두둔할 수 있는 안목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 오직 십자가에서 다시 시작해야 !!
어제도 설교를 했지만, 요한복음 20장에서 도마가 예수님을 알아볼 때에 몸에 난 창자국과 못자국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신학공부를 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창자국과 못자국의 흔적과 우리 자신의 본질을 직접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즉 우리 자신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가해자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 속에는, 즉 우리가 부모로부터,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품성 속에는 예수님을 해치려고 하는 가해자의 모습이 있음을 도마가 보여준다는 것이다.
(요 20: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요 20: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그렇게 싫어한다는 것을 미처 몰랐는데, 그런데 예수님이 내미시는 그 못자국을 보면서 우리 속에는 주님에 대한 반발심과 적개심이 (숨겨져) 있다고 하는 것을, 그것을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안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신학이 시작되어야 복음이 제대로 증거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도 역시 그러하고 말이다.)
◈ 나는 주님을 죽이려는 킬러이다 !!
우리가 손들고 나와서 항복한다고 해서, 즉 "제가 잘못했습니다" 라고 한다고 해서, 거기에서 시작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자기의 반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시작을 해야지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킬러입니다" 라고 하는, 바로 거기에서 신학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러할 때에 구원이 무엇이며, 천국이 무엇이며, 믿음이 무엇인지,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 제대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여기에 예수님이 이렇게 계시는데, 여기서 우리는 생각하기를, 구원과 천국과 율법에 대해서 인간과 예수님이 같은 공통점인 개념이 있는데, 다만 우리는 구원도 없고, 천국도 없고, 믿음이 없기에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악마밖에 없으니 말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과 악마와 믿음 등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우리 인간이 이미 알고 있는 기존의 천국과 악마와 믿음에 대한 개념도 만만치 않은데, 그러니 이 둘 사이에 적개심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부분에서 모자라는 것을 채워달라고 하는 반면에,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깨부수려고 하시는데, 즉 "네가 생각하는 그런 천국과 구원개념 때문에 내가 죽었다" 라는 것이다.
◈ 나를 '없는자'로 간주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몇 몇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서양 철학사를 공부하고 교회사를 공부하고 삼위일체를 공부해보니, 교회에서 인간들이 주장하는 전체 내용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목사님, 그것을 버리면 안 됩니까?" 라고 할지 모르겠는데, 그러나 버릴 수가 없는데, 그러한 믿음과 구원과 천국에 대한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개념을 버리려고 하려면, 자기 자신을 '없는자'로 간주할 때만 가능하고 말이다.
이러한 자기 자신을 '없는자'로 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제일 하기 어려운 것인데, (아니, 사실상 불가능한 것인데) 데카르트가 이것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어떻게 내가 없다고 생각할 수가 있는가?"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데카르트가 이것이 안 된다고 했으면 우리도 역시나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이것이 되는데, 왜냐하면, 자기를 '죽은자'로, 즉 '없는자'로 간주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되는가? "나는 죽었다" 라고 하는, 그 '나'는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데카르트의 생각인데, 그런데 사도바울은 뭐라고 했는가? "'나는 십자가에 이미 죽었다' 라고 생각하는 내가 살아있다" 라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님이 보기에 죽은 자들이 생각하는 것이란 말이다. 그는 성령을 받았기에 이렇게 감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날마다 쏟아지는 두려움을 어떻게 감당하리요 !!
제가 그래도 목회를 하고 교회에 봉사하고 남자로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이 성경을 보면서 제일 어려움을 겪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나는 분명히 없는데 왜 내가 걱정을 하는가?" 라는 것이다. 아니, 없는 놈이 무슨 걱정을 하느냐는 것이다. 아까 말한 공기 밖에 들어있지 않은 빈 박스가 무슨 걱정을 하고 두려움을 가지느냐는 것이다.
성도는 이렇게 예수님 안에 들어있는데, 아니 예수님이 무슨 걱정을 할 리가 있는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꿰뚫고 아시는 분이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가 공부를 좀 못해도, 마누라가 차를 몰고 나가도 사고를 낼까봐 벌벌 떨지 않는가? 성경말씀대로 하면 성도는 걱정과 근심이 없어야 하고, 항상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고, 범사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살전 5:16)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물론 설교를 하려고 그런 성경말씀을 달달 외우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고,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등의 말씀을 보면, 무엇을 느끼는고 하니,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데, 즉 우리는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기가 못한다는 데서 그치면 안 되고, 그것을 왜 못하는지를 제대로 알아야 설교가 된다는 것이다. 교인들에게는 물론이고 먼저 자기 자신을 향해서 말이다. '왜' 항상 기뻐하지 못하느냐고 말이다.
물론 인간은 오기가 있어서 참기는 참지만, 즉 "주께서 알아서 하겠지. 그러니 참자" 라고 하는 것은 되는데, 그런데 막상 집에서 세살 먹은 어린놈이 자다가 열 경기를 해서 눈동자가 뒤집히고 그냥 뒤로 마구 넘어가는데 어떻게 기뻐하느냐는 것이다. 119에 신고하고,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난리를 부리지 말이다. 그러니 그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 자기 자신에게 너무나 관대한 인간 !!
하지만 우리는 그런 것에 대해서, "우리는 인간이니 다 그렇지 뭐" 라고 하면서 아주 관대하게 넘어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인간이라고 해서 슬쩍 넘어가 버리면 무엇이 빠지는고 하니까, 조금 전에 말한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진짜 복음의 핵심인 이 적개심이 빠진 채로, "인간이니 할 수 없지요. 주께서 은혜를 주시면 됩니다" 라고 하는데, 마치 자기가 항상 기뻐해야 할 자격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자기의 잘못은 이렇게 대충하고 넘어가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은혜를 들먹이고 말이다.
그러니 '왜' 라는 것에 대한 진지한 생각은 하지 않는데, 그러다가 막상 조그마한 손톱이라도 다치게 되면, "하나님, 어찌하여 제 손톱이 깨지게 하십니까? 아파서 죽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제가 오늘 목욕탕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5000원을 잊어버렸는데 얼마나 화가 나든지 말이다. 그런데 오다가 10원 짜리 하나를 주웠는데, 그러면 4990원이 남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빈 박스인 주제에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감지덕지한 것이지, 왜 5000원을 잊어버렸다고 화를 내느냐는 것이다. 그런 이유도 모르면서, 이렇게 성경을 남에게 설교한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을 추궁해 들어간다는 것이다. 교재 22페이지 이하의 '인간의 이름과 운명' 이란 제목으로 말이다.
왜 우리는 그런 것이 안 되는가? 만약 5000원이 아니라 주식을 해서 5000만원을 날려보라는 것이다. 아마 항의하는 차원에서 자살을 시도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마치 요나처럼 말이다. 이 요나가 어디 남의 이야기인가? 우리는 요나의 핏줄을 그대로 이어받고, 그의 품성을 그대로 이어서 받아놓고서는 말이다. 그런데도 이 요나서를 해석하면서, "아니, 이런 나쁜 놈이 다 있나" 라고 하면서, 자기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투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 성경해석 - 제가 바로 요나이고 욥입니다 !!
그러니 이것이 무슨 성경해석인가? 자기 자신도 요나와 같은 입장이 되면 그렇게 하나님께 항의하고 자살을 시도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왜 이렇게 자살할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주어야 하고 말이다.
그리고 자살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자기 인생에 대해서 하나님 때문에 전면적으로 후회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욥이라는 것이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이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남의 이야기란 말인가? 만약 남의 이야기하면 성경은 전혀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성도가 되어서 성경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을 하면서도, 왜 그 말씀대로 살지를 못하는지를, 그것이 평생을 두고 의문점으로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렇게 '왜?' 라는 질문을 던져놓았으니 답변이 있어야 하는데, 답변이 없는 '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 사건이 시간을 만들고 공간을 만든다 !!
여기서부터 좀 어렵게 할 것이니 잘 한번 들어보세요. 이 문제의 실마리를 제가 약간 언급을 했는데, 이 세상이 말씀으로 창조가 되었다면 모든 사건의 의미는 말씀으로 드러나는데, 이 사건은 두 가지를 만드는데, 사건이 시간을 만들고 공간을 만든다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밤이 되고 낮이 되니 그것이 하루인데, 그런데 우리는 하루를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까, 성경에 보니 낮과 밤의 사이를 하루라고 했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낮과 밤이 바로 하루인데 말이다. 즉 낮과 밤이 있을 뿐이지 하루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질문하기를, "하루가 무엇인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하루는 시간을 말하는데, 그러나 이 시간이라는 것은, 밤이 되는 사건과 낮이 되는 사건이 있을 때만 시간이 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 사건은 의미가 있을 때만 사건화 된다는 것이다.
◈ 물체가 놓일 때 공간은 의미가 있다 !!
이런 것이 참 어려운데, 예를 들어서, 여기 안경이 있다면, 여기 탁자에 안경을 놓지 않았는데 안경을 놓게 되면, '안경이 놓인 탁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안경을 치우게 되면 그런 의미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즉 안경으로 말미암아서 공간에 의미가 담긴다는 것이다. 원래 공간이라는 것은 없는데, 그 안에 어떤 물체가 놓일 때에 비로소 공간이 그 값을 한다는 것이다. 즉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참 앞에 말을 실수했는데, 공간에 의미가 담기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공간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노동을 하지 말라고, 노동하면 죽인다고 했을 때, 이것은 일곱째 날에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하지 말라고 말씀이 영향력을 가지고 사건화 시키면, 그 날은 거룩한 날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실 안식일은 없고 안식을 거룩하게 하는 말씀이 있으면 그것이 안식일이 된다는 것이다.
이게 참으로 무지 어려운데, 만약에 시간이 이렇게 동일하게 흐른다고 하면, 그래서 첫째 날에 무엇을 만들고, 둘째 날에 무엇을 만들고, 이렇게 해서 계속해서 만들어나간다고 하면 그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간이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를 받아주는 바탕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간은 창조가 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게 바로 우리들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성경을 보려고 하니, 어떻게 성경해석이 되겠는가? 그러니 '타락 전 선택' 혹은 '타락 후 선택' 같은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가 바로 시간은 영원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생겨나는 것이다. 오스카 쿨만이 구속사를 이야기하면서 이런 주장을 했는데, 잘못이라는 것이다.
◈ "시간이 창조되었다" 라는 의미는?
하지만 시간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시간은 분명히 창조되었는데, 이것을 어거스틴이 주장했는데, 사실 어거스틴 본인도 무슨 뜻인지 잘 모르고, 그냥 하나님이 다 창조했으니까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간은 창조된 느낌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에 사물 같으면 없음이 있는데, 그래서 창조되었다고 하면 감이 잡히는데, 그런데 이 시간은 흐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은 없다는 것이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이 없다" 라고 하면 말이 안 되는데, 그것은 바로 '없다' 라는 것을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시간에 관한 한 '잘못된 없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잘못된 만남이 아니라 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가 존재하니, 즉 자기의 존재에서 좍좍 뻗어 가는 시간과 공간을 생각하니, 이렇게 자기 존재를 중심으로 생각하니 시간이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왜곡된 시간관과 공간관이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으로 !!
(그런데 참으로 건방지고 웃기는 것은) 바로 이러한 존재를 붙들고 있는 자기를 예수님이 건너와서 구원해달라는 것이다. 자기의 틀, 즉 천국관, 구원관, 시간관 등은 건드리지 말고 말이다. 우리는 다만 능력이 부족한 자로서 죄가 많은 자이니까, 그런 우리 자신을 용서해주고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잘못된 시간관과 공간관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으로 그 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불의한 청지기 비유' 인데, 이 불의한 청지기의 모습으로 예수님이 왔을 때, 어느 인간이 그런 청지기를 보고 공의롭고 정의롭다고 이야기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이 불의한 청지기를 두둔할 때, 그런 예수님을 보고, "당신, 참으로 지혜롭습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했는가? 이 세상의 어둠의 아들들이 빛의 아들들보다 낫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러한 예수님의 이야기를 누가 알아듣겠는가? 거지 나사로 라면 몰라도 말이다.
(눅 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그러니 기존의 시간개념을 다 깨부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물체가 움직이고 이동할 때에 비로소 시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남보다 훨씬 빠르게 이동하면 시간이 남보다 훨씬 짧아지고 말이다. 물론 느리게 행동하든지 느리게 생각하면 시간이 느려지고 말이다. 그래서 천 명이면 천 명의 시간이, 물론 만 명이면 만 명의 시간이 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다보니까 달력을 만들어서 24시간을 하루로 정해서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생활의 의사소통을 위해서 도움을 주는 차원인데, 그래서 어떤 사람은 24시간이 엄청나게 바쁘고 어떤 사람은 엄청 지루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시간대에 비해서 24시간이 길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고, 또 짧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70이 넘은 노인네들에게는 이 24시간이 엄청 지루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20대의 청년들에게는 엄청 바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도 새벽 2시에 자고 말이다. 물론 목사에게는 하루가, 아니 24시간이 너무 지루하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녹취하는 것도 좀 도와주면 좋을 텐데 말이다.
◈ 시간 - 의미가 있는 사건과 사건의 간격 !!
이렇게 각 사람마다 시간대가 다른데, 그런데 다른 사람의 시간대에 보조를 맞추다보니 자기 시간대를 놓친다는 것이다. 이것이 괴로운데, 그렇다면 시간이란 무엇인가? 중요하니 꼭 기억해야 하는데, 의미가 있는 사건과 사건의 간격을 시간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의미가 누구에게 있어야 하는가? 자기에게 의미가 있으면 자기 사건이 되는데, 이렇게 자기 사건과 사건의 간격이라면 자기 시간이 된다는 것이다.
어제도 그런 예를 들었는데, 자기 딸을 골프선수로 만들기 위해서 20년 동안 모든 재산을 다 털어서 학교도 보내고 해서, 드디어 미국 LPGA에 보내서 마지막 4라운드까지 15 언드파로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는데, 그런데 그날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모에게는 자기 딸이 우승컵에 입맞춤하는 그것이 자기의 시간이었는데, 이것이 그들에게는 알파와 오메가인데, 즉 골프를 시작해서 우승하는 것이 말이다. 주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만 죽었기에, 그렇게 되니 본인이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는가? 그렇게 해서 우승한 날이 2006년 3월 20일이라고 한다면, 그 날이 그들에게는 그야말로 엄청난 사건이고 일일지 몰라도,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 의미가 없기에 말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요?
예를 들어서, 2006년 3월 5일에 이승엽이 9회말에 역전 투런홈런을 쳤다면, (이때 야구하나?) 사실은 따지고 보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나무배트라는 물체로 공을 멀리 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컴퓨터 게임과 같은 그냥 게임에 말이다. 그런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기 위해서 무려 2시간 이상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집에서 TV를 보는 사람의 경우에는, 마누라가 드라마 본다고 다른 채널로 틀려고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의미가 있는 자기만의 시간이니 말이다. 이것은 그냥 2시간이 아니라, 즉 다른 시간과는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 시간과 공간의 주인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시간을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 시간과 공간 안에 하나님만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사건들을 담아두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인간들이 이 시간과 공간에 자기를 위한 사건과 의미를 담아서, 이 시간과 공간을 함부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놓고는 거룩하다고 했다는 말이다.
(이것을 안식일에다 적용을 시켜보면) 하나님은 자기의 사건에다 의미를 담아서 안식일을 거룩하다고 했는데, 그런데 인간들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들의 사건과 의미를 둔 거룩을 가지고서 안식일을 지켰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 누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가?
이것을 좀더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게 해서 안식일을 지킨 인간들이 어떻게 했는가? 그것이 요한복음 5장과 9장에 보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다. 누가? 안식일을 지킨다는 사람들이 말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시간과 공간을 주셨고, 여기에다 자기가 행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사건들을 담아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겠다는, 바로 그 인간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다. 불의한 청지기로 오신 예수님을 말이다.
(요 5:18)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요 9: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가? 주님께서 이렇게 그들의 적개심을 드러내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쫓아났다고 해서 그냥 봐주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따라가서 마구 밟아놓는다는 것이다. 그들 속에 예수님이 대한 적개심이 있음을 드러내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예수 이름도 모르고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더욱이 자기가 예수님을 그렇게 미워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니,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할 줄 누가 알았는가? 고기를 잡을 때 예수님이 깊은 곳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을 때, 베드로가 자기는 죄인이라고 했는데, 그때 과연 베드로는 자기가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눅 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눅 5:5)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되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
(눅 5: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그러나 누구는 아는가? 예수님은 아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악마는 너를 지배해도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기도해주겠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즉 끝까지 사랑해주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끝까지 사랑한다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하지 않도록 해주면 안 되는가? 그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3번을 부인해야 예수님의 그 사랑하심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3) 저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
(눅 22:34) 가라사대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 사건은 의미와 함께 !!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이야기해보면, 예수님은 우리들처럼 빈 박스가 아니라. 예수님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뜻이 가득 담겨있는데, 이것이 사건이 되어서 밖으로 나오는데, 즉 하나의 의미로 나온다는 것이다. 즉 의미가 없으면 사건이 없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이것도 저것도 요것도 다 사건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자기에 해당되는 것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에게 의미가 있는 것만이 사건이라는 말이다. 즉 사건화 된다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 주변에 공기를 주시고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시는데, 이것을 우리는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데, 마태복음에서는 이것을 뭐라고 하는가? 악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다 주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 공기가 좋은 줄 아는가? 즉 이것이 언제 우리에게 사건화가 되는가? 높은 산에 가서 헥헥 거릴 때는 공기가 좋은 줄 안다는 것이다.
(마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우리가 이렇게 평소 건강할 때는 성경공부도 하고 하면서 잘 모르다가,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보면, 그런 주님의 의미가 담긴 사건이 발생될 때, 즉 주님께서 그 동안 건강을 주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였는가가 빈 박스와 같은 우리 속에 사건화 되어서 담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과 공간이 있으면 어떻게 생각하는고 하니, 우리 나름대로의 거룩이 있고 구원이 있기에, 이 시간과 공간에다 자기에게 의미가 있는 고상한 행동을 모으고 모아서,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자기에게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성경보고, 기도하고, 헌금하는 것이 말이다.
◈ 성도라면, 주님의 사건이 못살게 군다 !!
그런데 그것을 주님이 방치해두면 그 사람은 성도가 아니고, 우리의 그런 의미 있는 사건 속에 주님이 들어와서, "이 놈아, 그것 때문에 내가 죽었다" 라고 하면, 즉 그런 사건이 부딪쳐서 폭발하게 되면 그때 우리는 "아하, 내가 주님과 함께 있구나" 라는 것이 느낀다는 것이다. 즉 사건화 된다는 것이다.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언약이라는 것은, 한 쪽에 죄가 드러나고, 또 다른 쪽에는 은혜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우리교회 김집사님이 질문하기를, "목사님, 죄의 반대말이 은혜입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나 죄의 반대말은 의(義)이고, 은혜라고 하는 것은 죄의 반대말이 아니라, 죄도 나오고 은혜도 같이 나온다는 것이다. 은혜는 용서이지 죄의 반대말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 토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누군가가 "목사님, 내가 죄인임을 알면 그것은 선한 것이 아닙니까?" 라고 질문을 하는데, "죄를 안다는 것은 선한 것이라고 하지 않고, 은혜라고 합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질문의도는 죄를 알면 자기가 완전해지지 않겠느냐는 것인데, 그 사람은 완전이란 개념과 은혜의 개념을 같이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가 상당히 많은데, 자기 죄를 스스로 자인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나 죄를 자인하면 고마움과 부끄러움이 같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지, 거기에서 "이만하면 되었다" 라고 하는 완전함을 느낀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도 자기 완전함을 포기하지 않는데, 이것을 자기 의(義)라고 하고 말이다.
◈ 하나님의 사건에 반발하는 인간들 !!
사건과 의미를 다시 한번 더 이야기하면, 하나님께서 만드는 사건은 항상 의미가 있지만 우리는 모른다는 것이다. 사실은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반발한다는 것이다. "야, 그건 아니야. 진짜로 너무했다" 라는 식으로 반발할 수밖에 없는 의미로 다가온다는 말이다. 그 의미가 항상 사건을 동반하는데, 이 사건을 자기에게 의미를 두면 당연히 자기에게 사건이 되는데, 이 사건과 항상 쾅쾅 하면서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충돌이 일어남으로 비로소 "이만하면 되었겠지", "나는 의롭다", "나는 착하다" 라고 하는 그 모든 것이, '믿음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천국에 대해서' 라는 것까지 다 포함해서, 이런 것들이 주님이 일으킨 사건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면, 드디어 죄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죄를 느끼면서 무엇까지 느끼는고 하니, "나는 빈 박스가 아니야. 가득 들어있어" 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 주님이 보시기에 이미 죽은 것이고, 즉 의미 없는 것임을 처음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몇 초를 가지 않지만 말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 괜히 살아 가지고 말이야. 지금 주님이 데리고 가시면 그런 복이 없을 텐데" 라는 것이 말이다. 그것도 없으면 신자가 아니고 말이다.
이런 순간이 지나고 나면, "이런 생각까지 하는 나 자신이 얼마나 믿음이 좋고 대단한가" 라고 한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또 그런 것이 튀어나오는고 하니, 자기의 사건이 계속해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물론 주님의 사건도 계속해서 의미 있게 가고 있고 말이다.
◈ 모든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
그렇다면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가? 아직도 이것은 말하지 않았는데,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꽉 차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아는 바인데, 바로 이 말씀이 하나의 의미이고 사건인데, 이런 하나 하나가 다 의미이고 사건이란 것이다. 그러면 그 모든 의미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그것이 골로새서 1잘 16절에 나오는데, 모든 피조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골 1: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이렇게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라고 한다면, 여기서 출발하게 되면, 예수님은 이것을 위해서,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데, 이것이 곧 언약의 법칙인데, 하나님은 가난한 자도 높이시고 높은 자도 낮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무엘상 2장의 한나의 찬송에 나오고, 또한 누가복음 1장의 마리아의 기도에도 나온다는 것이다.
◈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데서 살리시는 여호와 !!
(삼상 2: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음부에 내리게도 하시고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삼상 2:7)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눅 1: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 1: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눅 1: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이렇게 '예수님을 위해서' 라고 볼 때, '없는데', '죽은 데' 라는 것이 어디에 해당되는고 하니, 인간세상 전부에 다 해당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이 놀지 않고 활동을 하신다면, 이런 점들이 어려운데, 이렇게 없는 데서 있게 하신다면, 이 인간세계로 하여금 "너는 없는 거야, 너는 죽은 거야" 라고 하는 의미를 발현시키는 사건을 동반하면서, 그렇게 주께서 일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벌의 내용이 곧 죄의 내용이다 !!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죄인의 모습인 예수님을 앞장 세워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당연히 이 죄인을 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죄인이니까 말이다. 이런 말은 성경에 나오는 전체법칙이니 노트에 좀 적어놓으면 좋은데, "벌의 내용이 곧 죄의 내용이다" 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벌을 내리는지 조사를 해보면, 그 사람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벌을 통해서 죄를 알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의 주제라는 말이다.
요한계시록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벌하심으로 말미암아서, 그 벌을 통해서 자기 죄를 알게 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냥 '죄' 라고 하면 반발이 엄청 심해서 안 되는데, "아니,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대단한 죄를 지었는가? 지금 이렇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그렇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은 좀 감안해달라는 것이다.
"내가 저 사람처럼 강도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가룟유다처럼 예수님을 팔아먹은 것도 아니고, 어찌되었던 내가 잘못했다고 하잖아요" 라고 말이다. 제가 누구를 만나서 이야기해보면, 제일 대화가 잘 안 되는 것이 "그래, 제가 잘못했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어쩌란 말인가" 라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주님에 대한 영광이라든지, 감사와 기쁨 등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냥 자기 변명으로 초지일관하는데, 다시 말해서, "제가 죄인이니까,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게 아닙니까? 제가 잘났다는 것이 아니라 못났다고 하잖아요"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냥 그렇게 팍 죽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되는 줄 안다는 것이다. (그러면 제가 하는 말이 있지요. - 니, 그렇게 죽 사세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기쁘시게 하느냐고 묻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것을 보면 정말 섬뜩한 느낌마저 드는데, 자기가 잘못했다고 시인을 하면서도 끝까지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못하고 버틴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주님에 대한 적개심이 이 정도까지일 줄 미처 몰랐다는 것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 앞에서마저도 기를 죽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없는 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 데서 살리신다" 라고 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인간 세상 전체를 없는 것으로, 즉 죽은 것으로 의미를 두어서 사건화 시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앞장 세워서 일하시는데, 즉 예수님은 죄인이기에 처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왜 착하디 착한 아들을 벌주시는가?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아들을 처벌해버린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착하디 착하고 선하디 선한, 죄 없으신 그분을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했다는 것이다.
(막 15:34)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도대체 예수님이 무슨 죄를 지었느냐는 것이다. 이게 마지막 어려운 난관인데,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다고 하는데는 동의를 하면서도, 막상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하면 그만 말문이 막힌다는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도 설명하지 못했고, 그 당시 예수님을 고소했던 자들도 사실 예수님의 죄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말하기를, 나무에 달린 자마다 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했는데, 이것이 신명기 21장에 나오면서 갈라디아서 3장에도 나오는데, 즉 하나님께서 이렇게 예언을 통해서 구약의 사건을 신약에서 의미를 두어서 사건화 시킨다는 것을 바리새인들도 알기는 아는데, 이렇게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데 대해서는 찬성을 하면서도, 왜 저주를 받아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그래서 그들이 나름대로 끄집어낸 죄목이 무엇인고 하니, '성전모독 죄' 라는 것이다. 성전을 사흘만에 짓는다고 하나님의 그 거룩한 성전을 모독했으니 저주를 받아도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이 드디어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형 집행에 나섰다는 것이다. 가야바 대제사장을 비롯한 바리새인들이 말이다.
그렇다면 성령을 받은 자들은 여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가? 스데반 집사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성전의 완성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사실은 예수님 자체가 성전인데,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는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예수님이 죄를 지었는지를 이야기하면 안 되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했다는 것이다. 즉 사도바울이 말하는 십자가는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의 십자가를 사도바울 본인의 십자가로 보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가 그 저주를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 때 사도바울은 어디 있었는가? 분명히 그 십자가에는 없었는데, 그런데도 사도바울은 예수님이 못박힐 때 자기도 함께 못 박혔다고 하는 것이다.
◈ 사도바울 - 나도 함께 못박혔다 !!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바울이 이렇게 주장함으로 말미암아서, 즉 인간에게 나올 것은 오로지 죄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3장에서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했고 말이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인가? 율법은 하나님의 심판을, 즉 자기가 당해야 하는 심판을 마땅히 받게 하기 위해서 율법이 첨가되었다는 것이다.
(롬 3: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율법이 주어지는데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그야말로 완전히 빈 박스로 만들어놓는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 편에서 볼 때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그 잘난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전부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존재하니 말이다. 지옥에 가든지 천당에 가든지 관계없이 말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했다는 것이다. (물론 지옥에 가는 것조차도 말이다.)
세상 사람들 편에서 보면 완전히 또라이인데, 사도바울이 실제로 예수에게 미쳤다는 소리도 들었고 말이다. 그러자 사도바울은 자기가 미친 것은 맞는데, 그 이유가 예수님의 사랑에 강권해서 미쳤다고 하는 것이다. (사실 미치려고 하면 이 정도는 미쳐야 하지 않겠는가?)
(고후 5:13)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 예수 믿고 천국 간다 - 과연 맞는 말인가?
그런데 기존의 신학에서는 이런 예수님의 대속(代贖)이 '예수님을 위하여' 라는 것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몇 번이나 강조했는데, '제가 부족하기 때문에' 라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비록 자기는 부족하지만 누군가가 자기 죄를 대속해주려고 건너오기만 한다면, 자기는 그분을 다리로 삼아서 천국에 가겠다는 것이다.
(이거 어디서 많이 듣고 보던 것 같은데, 소위 4영리인지 뭔지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령은 받은 사도바울의 주장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던 죄관이라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의 아류에 속하는 계파라고나 할까?
◈ 현대신학 -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파트너 !!
그러면 현대신학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하나님은 인간 없이는 외로워서 안 되니까, 자기 창조의 파트너로서 인간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했기에 하나님은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그래서 사랑하는 인간을 위해서 자기 아들을 보내서 대신 죽게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 사랑의 파트너로서 인간과의 그 관계를 유지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화목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신학의 주장인데, 이것이 바로 인간들의 기본인식에서 나온, 즉 서양 철학사에서의 하나의 분파 정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복음도 아니고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하나의 철학이라면 철학이겠지만 말이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십자가에서 출발해서 인간자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존재한다고 해서, 그렇다고 인간 스스로가 자기 존재나 자기 의를 추구한다면, 사도바울은 그것을 두고 뭐라고 하는고 하니, 오히려 예수님에게 도전하는 악마적 요소라고 보았다는 것이다.
◈ 율법은 십자가로 인하여 찢어졌다 !!
사도바울은 이 십자가를 통해서 구약전체를 다 해석하고 있는데, 율법은 십자가로 인하여 찢어졌다는 것이다. 이것도 어려운 부분인데 다시 해보면, 십자가에 의해서 율법에 속한 모든 것은 다 찢어졌는데, 그러면 신약 빼놓고 구약도 다 찢어졌는가? 몰론 그러한데, 십자가에 의해서 율법도 찢기고 심지어 십계명도 다 찢겨졌다는 것이다.
◈ 신약시대에는 돈 한 푼 없이도 완벽한 십일조가 가능 !!
어제 제가 그런 설교를 했는데, 신약시대에는 교회에 돈 한 푼도 헌금하지 않고서도 십일조를 했다고 창고가 차고 넘친다는 것이다. 단돈 십 원도 들이지 않고도 말이다. 그것이 말라기 3장이라는 것이다. (얼마나 경제적인가?) 왜냐하면, 십자가가 다 이루었기 때문에 말이다.
(말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그렇다면 신약성경만 남기고 구약성경은 다 찢어 없애버려야만 하는가? 그렇게 찢고 안 찢고 하려는 점이 오히려 문제라는 것이다. 말씀의 사건화를 시키는 것은 우리 몫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몫인데, 주님께서 이 구약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소개하는데, 그런데 왜 그것을 우리가 찢고 말고 하는가?
주님께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 전체를 가지고서,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에 의해서' 모든 피조물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활용하는데, 그런데 우리들이 신약은 그대로 두고 구약은 어떻게 하고 하는 것은, 그야말로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건방지게 우리 힘으로 신약성경을 가지고 구원을 받으려는 시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항상 자기만 열심히 일한다는 인식을 버려야만 하는데, 지금도 열심히 주님이 일하고 있는데 말이다. 오히려 우리는 "나는 죽은 놈이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근호는 어떻게 말을 하고 숨을 쉬고 있는가? 주님께서 은혜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발걸음까지도 세신 바 되는 주님께서 모두 그렇게 사건화 시켰다는 말이다.
◈ 주님의 사건화 - 가면 갈수록 죄가 드러남 !!
전에 목이 마를 때는 물만 사건화 시켰는데, 그런데 날씨가 추우면 난로까지 사건화 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에는 양말 같은 것도 다 사건화 시킨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덩치가 큰 것으로 하다가 점점 더 세세한 것으로 말이다. 자기가 죄인임을 알면 알아갈수록 말이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이렇게 주님께서 이렇게 자꾸만 사건화 사건화를 시켜버리면, 작은 것도 죄가 되고 그 죄에서 더욱더 은혜가 넘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먹는 것 입는 것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구나" 라고 고백하게 되고 말이다.
그래서 이제는 사도바울의 말한 것이 틈새가 없어져버리는데, 처음에는 듬성듬성 감사하다가, 이제는 촘촘히 감사하고, 나중에는 결국 죽는 것도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저를 사용하셔서 죽음을 맛보게 하시니, 이것보다 더 감사한 것이 없군요" 라고 말이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런 말을 20대에게 전혀 통하지 않는데, 물론 90대로 안 통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래도 죽을 때가 되면 "이왕 살아있는 것 내가 사건화 시킬 것은 더 없고 주님의 사건만 남았구나" 라고 되는데, 물론 이것은 믿음이 아니라 자포자기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대부분이고 말이다. 아무튼 주님의 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이제는 매사가 다 주님이 일으키시는 사건이 된다는 것이다.
◈ 새대가리보다 더 돌대가리 인간 !!
이것을 누가 아는고 하니, 인간은 아무도 모르는데 들풀이 알고 공중의 새가 안다는 것이다. 즉 인간만 빼고 모든 피조물이 다 안다는 것이다. 시편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