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대구강의 5 - 지옥의 하나님 3
05대구강의 5 - 지옥의 하나님 3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지옥의 하나님 3
05,12,19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시작하겠습니다. 책 23페이지를 보자.
**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법이 주어지기까지는 이 점이 명확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법이 주어지기 전까지 도대체 어떤 점이 명확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법이 주어지면 그동안 명확하지 않던 것이 명확해진다는 것인데, 구약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법이 주어진다는 것은, 법을 받게 되고 그것을 행사하게 되면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 즉 천국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바울의 입장은 다른데, 바울은 하나님의 법이 주어지게 되면 그 동안 인간들이 왜 죽어갔는지, 즉 인간이 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었는지, 그 점이 더욱 명확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사도바울의 구약성경 이해는, 이미 확정된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입장에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법 - 무엇이 더 명확하게 드러나는가?
예수님을 팔아먹은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을 이렇게 이해했는데, 여기에 하나님이 계시고 저기 인간이 있다면, 이렇게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희미하게 된 것을 하나님의 법이 확실하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희미한고 하니, "하나님이 너희를 선택했다. 너희들은 거룩한 백성들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언약의 나라이다. 천국은 너희 것이다" 라는 것들이 희미했는데, 그런데 율법을 받음으로서 이런 것들이 뚜렷해졌다는 것이다.
사도바울도 과거에는 이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생각이 바뀌었는데, 율법은 뭔가 거쳐서 온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인데, 그렇게 됨으로 이 율법을 통하여 우리 인간이 왜 십자가로 인하여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가가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율법이 주어짐으로 그런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양쪽이 모두 분명해진다고 하는 것은 같은데, 그런데 무엇이 분명해지는지는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내년 1월에 서울 의존교회에서 집사 임직식이 있는데, 제가 그 설교의 본문을 생각하는 중인데, 어떤 부분인고 하니, 사도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에,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해서 인식에 어떤 큰 변화가 있었는지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은 어떠한가? 사도바울의 이러한 획기적인 대변화에 대해서는 전혀 무감각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앎으로서 이 세상이 좀 더 시끄러워졌다는 정도로만 생각하지, 뭔가 획기적인, 즉 하나님도 다 같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이 엉터리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는 사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에 동조하는 자들이 신학교 교수들이고 학생들이고 목사들인데, 사도바울의 이런 대변화가 어떤 대변화인지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주로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인간을 구원하신다. 그런데 이것이 과거에는 희미했지만 성경말씀이 동원되어서 이제는 분명해졌다. 그래서 성경대로 하면 구원받는다" 라는 식이지, 이러한 생각자체가 엉터리라는 것을 주님을 만나보기 전에는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 사도바울 -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약율법의 완성이다 !!
사도바울이 율법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약율법의 완성이다" 라고 했는데, 즉 율법과 십자가를 연결시키는 방향으로 율법을 해석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을 십자가 중심으로만 해석을 해야 나오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서나 히브리서에서 이런 이야기를 보다 더 확실하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것이 유대인들에게 그야말로 돌팔매를 맞아도 당연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맞아서 죽음 일보직전까지 갔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유대인들이 왜 사도바울을 그렇게 싫어했는지 조금이라도 알아야하는데, 그렇게 해야만 흔히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그야말로 이단 중에 이단이란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도바울은 십자가를 어떻게 이야기했는가? 어떤 놈이든 간에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가리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사도바울 본인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도 이러한 공로를 가리면 안 되는데,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이 구원해주신다면 고맙게 생각해야지, 미리 자기가 나서서 구원받겠다고 설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이 예수님의 자발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말이다.
◈ 처음부터 지옥에서 태어나는 인간 !!
오늘 책 23페이지 내용이 무엇인고 하니까, 인간은 처음부터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는데, 즉 죄를 지어서 저주를 받았는데, 그러니 저주를 받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해야 하는데, 그런 인간들이 어떻게 구원받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악마가 인간을 부추겨서, 즉 악마의 노림수로서 나왔다는 것이다.
◈ 칼바르트 - 하나님은 예수님만 구원했다 !!
그래서 칼바르트는 "하나님은 예수님만 구원했다" 라고 했는데, 예수님 말고 다른 사람들은 저주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칼바르트가 이렇게 하나님이 예수님만 구원했다고 말하는 의미 속에는, "예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자들은 구원받는다" 라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예수님 말고 다른 사람하고는 더 이상 말도 하기 싫다는 것인데, 아니 저주를 내리기로 되어있는데 다른 것이 뭐가 더 필요하냐는 것이다. 판사가 변호사하고 이야기하면 되지 죄 지은 놈하고 무슨 이야기가 더 필요하냐는 것이다. (판사가 피고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이렇게 율법이 주어짐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 라는 것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그동안 죄를 계속해서 키워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대하면 대할수록 점점 더 죄가 증가됨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은 이렇게 죄가 증가되는 것을 감사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죄가 증가하지 않고 자기 의(義)가 증가하면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훼손하는 것이기에, 그것이야말로 진짜 큰일이라는 것이다.
◈ 점진적이라는 것은 즉각적이다 !!
지난주 토요일에 칠곡강의시간에 누군가가 참으로 중요한 질문을 했는데, "어떤 사람은 점진적으로 구원된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즉각적으로 구원된다고 하는데, 누구의 말이 맞습니까?" 라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점진적이라는 것은 즉각적이다" 라고 말이다. 아니, 도대체 즉각적이라면 몇 초를 이야기하는가?
성경은 전체가 다 즉각적 구원이라는 것인데, 그러니 사실 점진적 구원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두가 다 즉각적인데,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순간에 바로 믿고, 또 어떤 사람은 시간이 좀 많이 걸리고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이렇게 '점진적'과 '즉각적'을 나누어서 생각하는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구원을 '자기 중심'으로 여기기에 그렇다는 말이다.
이런 자기 중심적인 구원관은, 율법에 의해서 죄가 불어나야 하는데, 이것은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저는 주님의 방해물입니다" 라는 것이 성도에게는 평생 동안 인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조금 뭔가 되었다 싶으면 자기가 주님의 협조자인줄 착각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사랑'과 '완전'을 구별해야 하는데, 이것이 무슨 말인고 하니, 주님을 사랑하면 되는데, 그런데 자꾸만 자기가 완전해지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완전은 주님의 십자가를 가로막는 것인데, 사도바울은 자기가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했는데, 그러나 그것을 십자가를 모를 때 이야기이고, 그런 것은 다 엉터리라는 말이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율법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책 23페이지를 보자.
** 하나님은 아예 이런 식으로 굳혀서 인간을 보려고 하셨다. 그것이 '두 언약 구조'로 보는 방식이다.
이것이 어려운데, 제가 질문을 하나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두 언약구조로 보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보았는가?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오해하게 되면, 두 언약구조를 자기가 결정짓고 자기가 알아서 한 쪽에 속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가 어느 쪽에 들어가려고 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그 어떤 인간도 죽어서 좋은데 가고 싶지 지옥에 간다는 놈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오기로 술 한잔 먹고 그런 소리를 하는 인간은 있어도 말이다.
아니, 어느 미친놈이 자발적으로 감옥에 들어가려고 하겠는가? 물론 하도 배가 고파서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그런 사고를 치는 사람은 가끔 있겠지만 말이다. 자기의 자유를 빼앗기면서까지 감옥에 들어가고자 하는, 그런 인간은 이 세상에는 없다는 것이다.
◈ 두 개의 언약구조가 보여주는 것은?
성경을 보면서 어렵다고 하는 것은, 성경을 보면서 자기가 무엇을 취사선택을 할 수 있는 대상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들이 생긴다는 것이다. 점진적인지 즉각적인지 하는 질문도 그렇고 말이다. 자기가 점진적이든 즉각적이든 선택할 입장이 전혀 아닌데, 본인이 그렇게 선택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주께서 만들어놓은 데로만 살면 된다는 것이다. "니나 잘하세요" 라고 하듯이 말이다. 주님께서 두 개의 언약구조가 있다고 하면, 있는 줄로 알면 되고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두 개의 언약을 구조를 살펴보니, 한쪽을 율법을 잘 지켜서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있고, 또 한쪽은 십자가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십자가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성령이 임해서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감사하면 되고 말이다.
이것은 죄를 짓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인데, 만약에 자기가 구원을 선택할 수 있다면 사람은 죄를 잣지 않으려고, 그리고 실수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마치 두 개의 언약구조 중에서 하나를 자기가 마치 골라잡을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한 경우라는 것이다.
교회에 와도 이런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얼마나 걱정스럽고 위험한지, 도대체 그런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 두 가지 언약 구조는 주님이 만든 구조이지, 우리가 선택하고 말고 할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여기에 대해서 인간들은 당연히 반발을 하는데, 아니 모두가 다 천국에 가고 싶은데, 왜 그렇게 일방적으로 두 개의 구조를 만들어서 누구는 무조건 지옥으로 보내고, 누구는 무조건 천국으로 보내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 밴틸 - 도와줘요, 스파이더맨 !!
이것은 코넬리우스 밴틸이 만든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 답변을 해보라는 것이다. 밴틸은 모든 인간은 선지식(先知識)이 있는데, 이 선지식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서 성령께서 성경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선지식에 머무르게 되는데, 하나님을 알기는 하지만 희미하게 알고, 나중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죄책감을 느끼는 가운데 핑계치 못하게 되어서 지옥으로 간다는 것이다.
이상이 밴틸의 주장인데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밴틸은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서, 물론 왜곡되어서 조금 문제는 있지만 완전히 박살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루터와 완전히 다른데, 비록 밴틸이 칼빈주의에서 나왔지만 말이다.
루터는 인간의 이성과 양심이 어떻게 되어있다고 보았는가? 그는 악마에게 사로잡혀 있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밴틸은 그것이 아니라 조금 고장이 났다는 것이다. 즉 수리하면 된다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이성은 지금 고장이 나서 길에 방치가 되어있는 자동차와 같은데, 그러니 성령이 AS맨으로 와서 고쳐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 너도 나도 십자가의 원수 !!
십자가의 복음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러한 밴틸의 이야기를 해주면 고개를 끄덕인다는 것이다. 이런 기막힌 복음을 듣고도 거부한다면 지옥에 가도 당연하다고 맞장구를 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본인 자신들이 악마 노릇을 하고 있음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의 이성과 양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무용지물로 만들기 위해서 십자가을 공격하고 대적하는, 즉 십자가의 원수 역할을 하고 있음을 말이다.
사도바울이 로마서 14장에서 뭐라고 했는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것을 반대로 해보라는 것이다. "살아도 나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나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나의 것이로다" 라고 말이다. 그야말로 딱 맞지 아니한가?
(롬 14: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롬 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것은 강원도 산골의 할머니가 살아도 이렇게 자기를 위해서 살 수 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을 모독하는 짓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아니 한번도 교회에 가보지도 못하고 예수님도 모르는데 어떻게 지옥에 보낼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뭔가 다른 조치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런 할머니의 행위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로막는 짓임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후한 점수를 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두 언약구조를 만들어서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물론 이것도 주님이 만든 것이지만, 인간은 처음부터 그 사람이 복음을 들었던 못 들었던 간에 하나님의 원수 노릇밖에는 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두 언약 구조가 보여주는 것이 말이다.
좀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1895년에 우리나라에 언더우드와 아펜셀러가 들어오기 이전 1392년 이성계 때에 복음이 들어왔다고 해도, 그래도 역시 십자가를 모독한다는 것이다. 뭐 들을 기회가 없어서 못 믿었다고? 그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2001년에 단 한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한다면, 설령 복음이 단군 할아버지 때 들어왔다고 해도 믿는 사람은 2001년도에 단 한 사람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이전까지는 무슨 일이 있는가? 그것은 바로 교회를 통해서 십자가를 모독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교회사가 아닌가? 하지만 사람들은 이 세상을 악마가 다스리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는 중립지대에 있어서 복음을 믿고 안 믿고는 자기가 결정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칼빈주의의 도르트 신조에 보면 다음과 같은 것이 나오는데, 소위 칼빈주의 5대교리라고, 물론 칼빈이 직접 주장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전적타락,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된 구속, 저항할 수 없는 은총, 그리고 성도의 견인이라는 것이다.
◈ 강원도 할매는 지금 음주운전 중 !!
아니, 전적인 타락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밴틸이 말한 것처럼 고쳐주면 되는 것인가? 방치된 자동차와 음주운전을 하는 자동차와 차이점이 무엇인가? 방치한 차는 그래도 남을 들여다 박지는 않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가 다 음주운전 중인 자동차와 같다는 것이다. 자동차라면 핸들도 제대로 잡을 줄 모르는 강원도 할머니가 지금 음주운전을, 즉 주님의 십자가를 모독하고 있다는 말이다.
왜 이러한 생각을 확대하지 않는가? 그것은 두 언약구조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아서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두 개라고 하니 또 고르려고 하는데,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고르고 말고 할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두 개가 있다고 하면 있는 줄 알면 되는 것이지 말이다. 그러나 사실 이것이 현실적으로 다가오면, 즉 집안에 안 믿는 사람이 있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차마 매몰차게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두 언약 구조 - 모세마저도 오해했다 !!
제가 어제 오후설교에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모세가 지도자로서 자기 백성들에게 너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연연해했다는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자기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큰 오판이라는 것이다. 아니, 자기가 왜 돌판을 깨트리느냐는 것이다. 화가 나서, 그리고 백성을 생각해서 깨트렸다는 것이다. 모두 다 진멸하도록 되어있는데 말이다.
이렇게 오직 주님만이 사랑과 공의를 한꺼번에 다 베풀 수 있지, 인간에게는 그런 능력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세의 이런 태도자체가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짓이라는 말이다. 이런 것이 보여주는 바가 무엇인고 하니,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사도바울에 있어서 인식의 대변혁이 일어났듯이, "아하, 이미 확정이 되었구나" 라고 말이다.
아참, 하나 빠트린 것이 있는데, 조금 전에 말한 밴틸의 문제점이 무엇인고 하니, 좀 어려운 내용이니 잘 들어야 하는데, 밴틸은 주장하기를, 처음에는 지옥이 없었는데 인간이 죄를 짓고 난 다음에 지옥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마치 현대자동차 공장이 먼저 만들어지고 난 다음에 현대자동차 정비공장이 생기듯이 말이다.
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지옥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지옥에 갈 사람들을 작정하고 만든 것이 되고, 그런데 밴틸의 주장대로 하면, 하나님이 인간이 죄를 짓는 것을 보고 허겁지겁(?) 지옥을 만든 것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처음부터 지옥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미 다 그렇게 예정이 된 것인데, 여기에 선지식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밴틸에게 푹 빠진 사람이 총신의 박아론 교수인데, 자기가 어느 교회에서 어버이 주일 설교를 들어보고 효도설교를 해서 큰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런 효(孝) 설교 뒤에다 십자가만 같다 붙이면 그것이 바로 밴틸에게 배운 신학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옥을 만드신 하나님"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면, 이런 것이 그 얼마나 엉터리인지, 그렇게 이 세상을 바라보지 못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말이다.
◈ 십자가는 두 글자로 '구멍' !!
제가 어제 설교시간에 "십자가는 구멍이다" 라고 이야기했는데, 즉 십자가는 한번 아래로 뚝 떨어져보라고 만들어놓은 것인데, 즉 풍덩 빠져서 지옥의 맛을 한번 제대로 맛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나 빠지나? 그것이 바로 성도라는 말이다.
책 26페이지를 보자.
** 법에 갇혀버린 인간의 신세 - [ 금지된 것을 소망한다 ]
여기 "금지된 것을 소망한다" 라는 것이 마치 소설제목이기도 하고, 잠언에도 나오지 싶은데, 인간은 "하지 말라" 라고 하면 "하지 말라" 라고 하는, 그것이 오히려 인간으로 하여금 그 금지된 선을 넘어가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아담이 비록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서 대대로 죽음이란 속성을 대물림해주었어도, 그 후손들이 그런 실수를 두 번 다시 하지 않고, 주어진 거룩한 천상의 법을 다 준수하면 될 것이 아닌가?
이것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고 하니,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죽음은 받더라도, 그래도 법은 따로 지키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조상을 잘못 만나서 죽음은 피할 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죽을 때 죽더라도 법은 지키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이런 생각이 가당치나 한 것인지, 아니면 그렇지 않느냐는 것이다.
◈ 그 어떤 인간도 죽음 앞에서는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
정말 죽을 때 죽더라도 죄를 짓지 않을 수가 있는가? 성경은 분명히 불가능하다고 하는데, 왜 그런고 하니, 사람이 죽음 앞에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살고 싶어서 말이다. 아무리 윤리와 도덕으로 중무장한 인간이라도 죽음 앞에서는 살려고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신학교 친한 친구가 있었는데, 서로 동역자 의식이 어쩌고저쩌고 그렇게 지내다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마침 둘 다 취직이 안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마침 전도사 자리가 하나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처음에는 자기가 가려고 이력서를 내었다가 합격되면 입닦는 것이고, 만약 떨어지면 친구에게 소개를 해준다는 것이다. 마치 자기가 양보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음에 자리가 있으면 이와 같이 자기에게도 소개해달라는 복선을 깔고서 말이다.
이런 경우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이 경험하게 될지, 그야말로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잘 아는 사람이 돈 되는 땅이 나왔다고 누구누구에게 전해주라는 연락을 받았다면, 그런데 그만 중간에서 자기가 가로채고 만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 2장 15절에 나오는데, 인간은 죽음 앞에서는 사랑이고 우정이고 나발이고 다 날아가 버리고 없다는 것이다.
(히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결혼을 할 때는 호감을 사기 위해서 집이든 뭐든지 다 마누라 앞으로 해준다고 하지만, 그러나 막상 이혼을 하게 되면 다시 되찾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돈이 없으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뭐라고 하는가? 그 어떤 경우에든지 죽기 전까지는 재산을 자식에게 넘겨주지 말라고 말이다. 일단 재산을 받고 나게 되면 부모고 뭐고 다 나몰라라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 인간은 이미 갇혀있는 상태 !!
다시 정리하자면, 비록 아담은 죄를 지어서 그 죄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었지만, 자기는 아담처럼 그런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혀 우리에게 해당이 안 되는 것이, 그 이유는 이미 우리는 어디에 갇혀있는 상태인데, 그러니 굳이 아담의 흉내를 내지 않아도 이미 이렇게 살아가는 자체가 아담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성도에게는 이것 말고 하나의 다른 체험이 더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의 체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개의 체험이 날이 갈수록 더욱더 또렷해진다는 것이다.
지난 토요일 칠곡강의에서 누가 질문하기를, 앞에 말한 것과 동일한 사람인데, "목사님, 만약에 성도가 생활하면서 죄를 지었다면, 그것이 점차 사라집니까? 아니면 그대로 남아서 또렷해집니까?" 라고 말이다. 당연히 또렷해지는데, 이렇게 죄를 지었다는 것도 또렷해지지만, 그렇게 되면 절망인데, 그런데 성도에게는 사랑의 깊이도 역시 병행해서 또렷해진다는 것이다.
◈ 결코 은혜가 죄를 삼키는 것이 아니다 !!
그런데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그 죄를 삼켜버린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둘 다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많이 받으면 죄기 다 없어져버린다는 것은 자기도 속이고 남도 속이고 주님도 속이는 태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서로 동전의 앞뒷면처럼 말이다. 즉 빛과 어둠이 같이 간다는 것이다. 물론 불신자들은 이러한 의식이 없고 말이다. 사실 죄만 좍 깔린다는 것이다.
참된 성도 같으면, 자기가 아담의 속성을 지녔기에 죄를 짓는 것이 더욱 더 또렷해지고, 또한 예수님의 고난의 아픔도 같이 또렷해진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얼마나 큰 희생을 하셨는지, 그 희생의 공로에 대한 고마움도 같이 또렷해진다는 것이다.
◈ 인간에게 과연 주체가 있는가?
그런데 저처럼 이렇게 이야기하면 무엇이 날아가는고 하니까, '주체' 라는 것이 그만 사라져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인간에게는 주체라는 것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자기가 결정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냥 악마에게 이용당하거나, 아니면 주님에게 이용당하거나 말이다. 자기가 알아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자유 - 이제 주님의 종이 되었다 !!
인간은 그냥 이렇게 다 이용만 당할 뿐이지, 자기의 것 자기만의 개별적인 성격을 찾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갇혀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갇혀있다는 것은, 도저히 거기서 빠져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자유' 라는 개념은, "이제 주님의 종이 되었다" 라는 의미에서 사용이 가능한데, 아주 독특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가만히 살펴보면, 이 책이 언뜻 보기에는 만만해 보여도 상당히 어렵다는 말이다.
여기서 26페이지를 보자.
** 하나님께서 인간을 처음 만드실 때는 아예 선악을 아는 지식과는 무관한 피조물로서 만들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냥 금지령이 아니라 '선악을 아는 지식'이란 내용자체에 대해 모르기를 원하는 금지령을 두신 것이다. 즉 '악을 짓지 말라'에 관한 금지령이 아니라, '선과 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먹지 말라'는 금지령이다. 이 둘은 큰 차이가 있다. 즉 하나님은 인간에게 금지를 위한 금지령을 내리신 게 아니라, 참으로 인간다움을 규정짓는 요건을 알려주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선악과에 대한 금지령은) "인간이라면 이러이러하게 살아야만 한다" 또는 "이렇게 해야 인간답다" 라고 선악과를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에 이러이러한 조건하에서 만들었다고 하는, 바로 그 조건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여기 난로가 있는데 아이에게 말하기를 "여기 난로에 가까이 가면 위험하니 가지 마라" 라고 했다면, 그래서 난로에 가까이 하지 않았다면, "아하, 나는 난로에 가까이 하지 않는 괜찮은 인간이구나" 라고 생각하는데, 그런데 문제는 그 난로를 가까이 하지 않으면 그 아이는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 선악과 - 왜 인간이 인간인가?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제대로 된 인간을 만들자고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이 알아서 결정하고 말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고 하는 바로 그 토대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범죄를 하고 난 뒤에 곧잘 죽어도 "나는 인간이다" 라고 우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이렇게 인간이니, 그 다음에 어떻게 바르게 살아가느냐?" 라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과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온 유명한 소설이 '인간의 조건' 인데, 인간은 자기 조건을 모르는 체로 인간이라고 우기는 셈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악마에게 매여있으면서 말이다. 길을 걸어가는 인간에게 한번 물어보라는 것이다. "인간이 무엇입니까?" 라고 말이다.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신학자들도 그러한데, 신학자들은 항상 하나님과 인간을 생각하는데, 인간을 기정사실화해서 "인간이라면 이렇게 살아야지. 그렇게 해야 죄를 짓지 않지. 왜 따먹었는가?" 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접근은 전혀 선악과를 심어놓은 취지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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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의 조건(La Condition humaine) - 프랑스의 작가 A.말로의 소설. 1933년 발표, 그해 공쿠르상(賞)을 받은 작품이다. 장제스[蔣介石]가 공산당을 이용하여 상하이에서 북방군벌(北方軍閥)을 몰아내고 즉각 공산당을 탄압한 1927년의 상하이 쿠데타를 배경으로 하여, 연대적인 행동의 중심 속에서도 고독감에서 헤어날 수 없는 테러리스트 첸[陳], 고독에 사로잡히면서도 집단적 행동과 우애정신 속에서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혼혈아 기요[淸], 강철같은 의지를 지닌 혁명가 카토프와 같은 주요 인물 외에, 기요의 아버지이며 아편중독자인 대학교수, 권세욕과 에로티시즘의 화신(化身) 같은 자본가, 공상과 기행(奇行) 속에서 현실을 잊으려는 성격파탄자, 공산당에 대한 증오에 불타는 비밀 경찰서원 등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모두가 고독의 그늘이 짙은 인물로서, 말로는 그의 고정관념이었던 허무주의적인 고독감에서 탈출하려는 인간의 필사적 모습을 그렸다. - 두산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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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참으로 짜증나는 신학자들의 글을 많이 보게 되는데, 자기 뿌리도 전혀 모르는 체, 즉 인간이 무엇인지도 전혀 감도 잡지 못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이다. 글을 제대로 쓰려고 하면, 다음과 같이 적어야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고 여기 예수님이 계신다면, 인간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거쳐온 인간이 되어야 하는데, 즉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인간을 만드실 때 예수님의 어떤 면을 증거하기 위해서 만들었는가? "아하, 인간은 선악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은 선악이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인데, 생명나무에서 그저 주시는 것이다" 라고,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방향으로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 창세기도 예수님을 보여주는 방향으로 해석 !!
창세기 3장을 비롯한 성경말씀을 이렇게 해서 시작해야하는데, 출발점을 이렇게 잡아야 제대로 하는 것인데, 그런데 이런 부분을 몽땅 다 없애버리고 나서, 훨씬 뒤에 일어난 일,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도로 가지고 와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식으로 말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를 위한 주님인가? 하나님을 위함이 아니고 인간을 위한 예수님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성경을 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속성이라는 말이다. 분명하게 빌립보서 2장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늘과 땅과 심지어 땅 아래에 있는 자들까지 오로지 예수의 이름에 무릎을 꿇는 것이, 그렇게 예수님을 높여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높여야 하나님을 높인다는 말이다. 그러니 죽었던 아담도 당연히 그렇게 예수님 중심으로 생각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다.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은,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면서 가지게 되는 걱정과 근심, 염려 등을 아울러서 말했다는 것이다. "살아도 나를 위하여, 죽어도 나를 위하여" 라고, 이렇게 맨 날 자기만 생각하니까, 그리스도를 위한 존재라는 의식 그 자체가 십자가를 모독하면서 살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책에서는 "참으로 인간다움을 규정짓는 요건을 알려주기 위해서" 라고 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책 26페이지를 보자.
** 인간이 더 이상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이 되지 못하고 죽음으로 되돌리게 되는 조건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지식뿐이다. 이는 애초부터 인간이라는 피조물이 선과 악을 아는 지식과는 무관한 조건하에서 계속 산 생령이 되도록 지음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으면 죽는다" 라고 했을 때, 그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그것은 인간이 되기 이전인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 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은 무엇이 빠진 조건인고 하니,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창조했다는 조건이 빠진 상태라는 것이다.
◈ 죽음 - '하나님의 형상대로'가 빠진 상태 !!
논리가 너무 급작스러운가요? 이해가 되지 싶은데, 죽음이란 흙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인간을 흙에서 만들었기에 그래서 이름도 '아담'인데, 그런데 그 흙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라는 조건이 추가되어서 창조가 된 것인데,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형상대로' 라는 조건을 빼버리면 도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그 자체가 곧 죽음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자기를 지배하고 있다는 의식이 사라지면, 그 자체가 살아있어도 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 중심으로 살지 않으면 그 자체가 죽음이라는 것이 지옥에 가면 비로소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가슴 아프게도 말이다. 그러니 지옥에 가서 아무리, "야, 처음부터 인간이 혼자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창조된 줄을 모르고 말이다. 예수가 나를 구원하려고 있는 줄 알았네" 해도 헛방이라는 것이다.
◈ 권사님, 걱정이랑 하들들 마시라고 !!
어제 우리교회에 나오는 연세가 70이 된 권사님이 식사를 하면서 하시는 말씀이, "야, 나는 지금까지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네. 내가 주님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오늘 설교시간에 처음 알았네" 라고 한다는 것이다.
제가 설교시간에 지금까지 여러 수십 번을 그렇게 이야기했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목사가 제아무리 목이 터지라고 외쳐도 교인들이 거기에 관심이 없으면 자꾸만 놓치고 흘려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그 권사님이 그렇게 라도 해서 알았으니 참으로 다행인데, 지옥에 가서 안 사람들이 그 얼마나 많은데 말이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자기 가정이든 직장이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자기가 전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 일이 아니니 말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처음 인간을 만든 취지라는 것이다.
여기서 책 27페이지를 보자.
**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 아담 안에 놓인 모든 자들에게 생긴 현상은, 선을 악과 견주어서 생각하는 방식 이외에 다른 방식으로 선을 분류시킬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렇게 악을 선과 견주어서 생각하지 그냥 따로 떼어서는 생각할 수가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선을 행한 곳에는 반드시 악이 같이 등장해야되고, 더 놀라운 사실은 그 악은 그 사람이 선이 행하고 있을 때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런 딜레마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목사가 설교를 하고 나서, 교인들의 반응도 좋고 자기 스스로 참 잘했다고 생각했을 때, 그 자체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를 가로막는 훼방꾼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예수님의 방해꾼이 되는, 즉 새로운 악이 또 등장한다는 말이다. "야, 오늘 설교에 은혜 받았습니다" 라고 하는 그 악을 설교자는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데, 평생동안 간다는 것이다.
◈ 로마서 7장 - 두 개의 自我 !!
여기서 로마서 7장이 제대로 분석이 되는데, 자아(自我)가 선한 쪽과 악한 쪽으로 갈라지게 되는데, 즉 자아가 분리가 된다는 것이고, 이것은 자아에 단절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을 로마서 7장에서는 자기 속에 또 자기가 있다는 것이다.
(롬 7:17)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 도다
(롬 7:20)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이렇게 선을 추구하는 자아와 악을 추구하는 자아가 분류되는데, 이것을 니체는 "인간에게는 점령당하는 자아와 점령하는 자아가 있다" 라고 했는데, 니체가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은, 사람에게 왜 사느냐고 삶의 목적을 물으면 사실 목적이 없는데, 그런데 개인적으로 보면 다들 나름대로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될 때, 오늘에 비로소 목적이 생긴다는 것이다. 또 그 내일이 오늘이 되고 말이다.
◈ 어제의 나는, 오늘이 되면, 내일의 나에 의해서, 늘 점령을 당하고 싶어한다 !!
그런데 인간에게 이렇게 목적이 생기려고 하면 반드시 '어제보다 더 나은 나 자신'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늘 새롭게 하소서" 라는 것인데,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인데, 기독교 방송에 나오는데, 이것을 니체가 발견했다는 것이다. 기독교 방송이 아니고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어제의 나는 오늘이 되면 내일의 나에 의해서 늘 점령을 당하고 싶어한다" 라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한번 반박해보라는 것이다.
이것을 '메조키즘'이라고 하는데, 프로이드도 말하지 않았는가? 인간은 늘 남에게 강간을 당하고 싶어한다고 말이다. 인간은 이렇게 매를 맞을 때 쾌감을 느끼고, 그리고 또 매를 때릴 때도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것을 '새디즘'이라고 하고 말이다.
이것을 온 세상에다 확산시킨 사람이 바로 에릭 프롬인데, "소유냐, 존재냐" 라는 유명한 책을 지은 사람 말이다. 이 사회의 모든 병리적인 현상을, 황우석 사태나 정치인들 등이 그러한데, 이것을 에릭 프롬은 하나로 보았는데, 그것은 얻어맞고 싶어하는 심리와 때리고자 하는 심리가 같이 겹쳐져서 그렇다는 말이다. 병리적이라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는 말인데, 즉 비정상적인 상태라는 것이다.
◈ 니체 - 날마다 새롭게 하소서 !!
이러한 비정상적인 사고방식에 대해서 니체는, 여기서 니체 이야기를 좀 하겠는데, 니체는 이것을 말리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 말리지 말라고 했는고 하니, 인간은 조금만 안정이 되면 권태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이 권태는 쉽게 말하면 지루함인데, 이런 지루함을 제발 좀 파괴를 시켜달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냥 안되고 꼼짝달싹을 못하도록 점령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새롭게 점령을 당하면 어떻게 되는가? 날마다 새로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즉 "날마다 새롭게 하소서" 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생의 작은 목적인데, 그러면 큰 목적은 무엇인가? 정작 큰 목적은 없다는 것이다. 단절이 되었는데, 그런 큰 목적에 대해서 무슨 이야기를 해도 다 헛소리이고 구라치는 것이라는 말이다.
니체는 욕망의 이러한 작은 목적을 말리지 말라고 했는데, 왜냐하면 이것을 말리게 되면 인간의 기본의지가 그만 숨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이렇게 숨어버리면 문제가 더 커지는데 마치 암과 같은 것이라서 말이다. 사라지면 괜찮지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으로 들어가 버린다는 것이다. 이렇게 내면화가 되면 그 속에서 다른 욕망으로 변형되어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가만히 두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아야 되니 말이다.
◈ 신은 죽었다 - 인간의 의지와 욕망을 긍정하라 !!
그래서 니체가 "신이 죽었다" 라고 말한 것은, 기독교의 신이 있으면, 이것이 계속해서 내면화가 되니 문제가 더 커진다는 것이다. 욕망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위선이 되니 말이다. 그러니 신이 나타나지 않으면, 욕망이 밖으로 표면화가 되니 진정한 자아는 마음껏 자유를 누릴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기독교가 들어와서 되지도 않는 짓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의지와 욕망을 긍정하라는 것이다.
이런 니체에게 힌트를 얻어서 또 다른 이론들이 등장하는데, 조금 다르기는 해도 프로이드나 라캉 등에 의해서 말이다. 라캉은 여기서 더 깊이 들어가는데, 자아가 이렇게 있다면 또 다른 자아가 있는데, 그것을 'X' 라고 한다는 것이다. '미지의 엑스' 말이다. 이렇게 미지의, 즉 뭔가 모르는 괴물이 있어서 인간을 자꾸만 자극하는데, "거봐, 그것으로는 모자라잖아. 다른 것으로 시도해봐" 라는 식으로, 계속해서 모색을 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 미지의 'X'가 말이다.
◈ 라캉 - 니체가 말한 목적조차도 없다 !!
여기서 라캉의 놀라운 통찰력이 발견되는데, 니체는 욕망의 작은 목적이 새로운 자아라고 했는데, 그런데 라캉은 목적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니체 이후의 사람이니 니체보다 더 뛰어나게 보이는 면도 있지만 말이다. 인간의 욕망은 그냥 다른 것을 해보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직장 생활을 30년 하다가 사표를 던지고 나오는데, 물론 더러워서 못하겠다고 나오지만, 그러나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정작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도 전혀 모르고 말이다. 물론 닥치는 대로 무엇을 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막상 50대 초반에 직장에서 나와서 무엇을 하겠는가? 그야말로 대책 없이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나름대로는 대책을 세웠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대책 없이 나오는 것도 일종의 대책이 되는데, 사실 이런 점이 엄청나게 어려운데, 수학이나 논리학에 보면, '메타구조' 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왜 디도서에 보면 그레데 사람들이 모두 거짓말쟁이라고 되어있는데, 그렇다면 이 그레데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는가, 하지 않는가? 그레데 사람들이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그레데 사람은 거짓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그레데 사람들이 몽땅 거짓말쟁이라는 것에 또 어긋나고 말이다.
(딛 1:12)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다시 예를 들어보면, 누군가가 회사를 나와서 크라운 베이커리를 차린다고 하면, 그것이 하나의 대책이 되는데, 그러나 그것도 '대책 없음'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크라운 베이커리가 제대로 안 되면 무엇을 할거냐고 물으면, 뭐 다른 것을 한다고 하다가, 결국은 "몰라" 라고 나오니 말이다. 그러니 사실상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 결국 인간은, I don't know !!
여기서 라캉은 말하기를, 왜 사람들이 이렇게 한 곳에 끈질기게 오래 동안 있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오래 동안 있어라" 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를 이야기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그 이유를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으면, 그렇게 말씀한 취지를 알아야 하는데, 인간으로부터 "안 따먹으면 되었는데..." 라는 소리를 들으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에는 전혀 몰랐는데, 그리스도를 모르기에 말이다. 선악과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 있는 것인데, 그것은 아담이 모른다는 것이다. "안 따먹으면 산다" 라는 것만 알지 말이다.
무엇이 이렇게 인간을 자꾸만 한 곳에 있지 못하게 하고 변신하게 만드는지, 이 점에 대해서 라캉은 "I don't know" 라고 이야기하면서, 이 세상에 유수한 철학자들을 보고 "너희들은 아는가?" 라고 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철학자들은 "나도 몰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철학자들끼리는 뭐가 통하는지 말이다.
◈ 아이쿠 내 팔자야 !!
그러니 결국 인간은 모르는 미지의 세계에 의해서 농락 당하는 팔자를 타고났다는 것이다. 뭔가 모르는데, 그런데 이 모르는 것이 자기의 움직임에 가장 중요한 힘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뭔가 모르는 것이 자기 자신을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성도는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가? "목사님, 왜 그걸 모릅니까?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말하는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고 말입니다. 그런데 왜 자꾸 모른다고 하십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성도가 맞는데, 그런데 문제는 이것만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이것도 또렷하지만, 그 반대쪽에 이유 없이 땡기는 어두운 면도 역시 또렷하게 있다는 것이다. 이것도 인정을 해주자는 것이다. 자꾸만 없다고 숨기지 말고 말이다.
목이 마른 데 누가 물 좀 가져다주세요. 그냥 찬물이면 됩니다. (속으로) 아침햇살 누가 좀 주지...
책 28페이지를 보자. 여기 로마서 7장이 나오는데, 23절만 보자.
(롬 7: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 도다
여기에 보면, 내 마음의 법과 다른 한 법이 서로 싸운다는 것이다. 이렇게 싸우면 집안에 평화가 없는데, 사실은 이렇게 싸우는 구석이 있어야만 성도라는 것이다. 이런 것이 없다면 사기꾼인데, 성경에 의하면 그런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데, 성도든 아니든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다만 성도에게는 "예수 안에서 정죄함이 없다" 라는 말씀이 믿어지는데, 성경말씀이 말이다. 그 외에는 불신자와 모두가 다 똑같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인간도 자기 내부에 갈등이 없는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렇게 갈등이 생기는 이유를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겠지요? 인간은 원초적 인간본성에서부터 이탈해서 선과 악을 아는 새로운 자아가 발견됨으로 말미암아서, 이 자아성이 하나님이 만든 자아성과는 달라서 갈등을 유발시킬 수밖에 없는 인간성을 지닐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죽을 때까지 말이다.
물론 천국에 가서는 이런 갈등이 전혀 없겠지만,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인간은 이미 선과 악을 알기 때문에, 선(善) 쪽에 이끌리는 자아와 악(惡) 쪽에 이끌리는 자아가 서로 사로 갈라지게 되고, 그렇게 되어서 그 악을 통해서 선을 알고 선을 통해서 악을 안다는 것이다.
이렇게 분리가 되면서 서로 다툴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참으로 심란한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심란함을 메우기 위해서 새로운 자아를 실현하게 되는데, 즉 새로운 모험을 하고, 직장을 바꾸고, 머리를 볶고 말이다. 성(性)을 바꾸는 것도 여기에 해당되나?
◈ 율법 - 누가 누가 잘하나, 한번 해보자 !!
바로 이러한 갈등을 더욱더 유발시키기 위해서 도입한 것이 바로 '율법' 이라는 것이다. 이제 율법의 정체가 서서히 밝혀지는데, 율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 정신적인 분열을 일으키도록 한다는 것이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속에 감추어놓은 거리감을 더욱 더 날카롭게 '쫙' '쫙' 찢어버리기 위해서 법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법을 알면 알수록 다툼은 점점 더 치열해진다는 것이다. "니가 목사면서도 설교를 그렇게 해, 니가 집사이면서 그 따위로 살아" 라고 하면서 말이다.
예를 들어서, 목사가 설교를 잘했는데도 교인들이 떠났다면, 설교를 잘하면 교인들이 모인다는 자아상과 설교를 잘했는데도 교인들이 떠나는 현실 사이에서 분노가 발생하는데, 바로 그런 분노를 야기시키는 분이 주님이라는 것이다. 주께서 율법을 통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오징어 다리 찢듯이 그렇게 마구 찢어놓는다는 것이다. 왜? 절대로 자기 힘으로 모아서 구원받지 못하도록 말이다.
◈ 교회 - 평상심의 집합체 !!
이미 천국은 있고 그 방식은 주님이 다 정해놓으셨는데, 그런데 사람들은 주님의 방식은 쳐다보지도 않고 자기 내부에 있는 중심적인 안정성, 즉 평상심을 가지고, 그런 것을 동원하고 근거로 해서 구원을 따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인 단체가 바로 교회라는 것이다. 그래서 늘 새롭게 하고, 마음이 안정되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교회가 모여서 교회사가 되고 말이다.
책 29페이지를 보자. 여기 갈라디아서 3장 21절을 보자.
(갈 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갈 3: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이렇게 하나하나 따져보면 정말 쉬운 성경구절이 하나도 없는데, 여기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인간과 율법의 만남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의(義)라는 것이 발생되었다면, 하나님은 율법을 가지고서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셨다는 말이다. 구원을 율법을 가지고서 말이다.
그런데 22절에 보면,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라고 하는데, 이 말씀이 참으로 어려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잘 한번 들어보세요. 법을 주었기 때문에 "하라", "하지 말라" 라고 하면 반드시 뭐가 생기는고 하니, 그 보상으로 의가 생기는데, 법대로 하면 하나님의 의가 나온다고 시편에 나오는데, 바로 그렇게 생각을 하도록 율법을 주었다는 것이다.
◈ 율법 - 인간내부의 법칙을 까밝힘 !!
그러니 동일한 법을 인간들에게 주어봤자, "법은 우리에게 의를 만들어서 이 의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한다" 라고 해석하도록 하는 규칙 같은 것이 인간 내부에 이미 있으니까, 법을 줄 때 비로소 인간은 자기 내부의 법칙에 스스로 사로잡히는 현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의도했다는 것이다.
더 쉽게 이야기하면, 원숭이에게 지폐를 주니 원숭이란 놈이 돈을 '쫙' '쫙' 찢는다는 것이다. 재미를 부쳐서 말이다. 원숭이 무슨 돈의 가치를 알고 그 용도를 알겠는가? 돈을 아무리 많이 주어도 나중에는 뭐만 남겠는가? 찢어진 지폐 무더기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거기서 무슨 새로운 가치가 나오는가? 폐지만 잔뜩 만들어지지 말이다.
하나님이 이처럼 인간에게 계속해서 율법을 주니까, 인간들이 이 율법을 가지고 인간 내부에서 기껏해야 하는 짓이 무엇인가? "아하, 이것을 지키면 의가 나오는구나" 라고 해서, 던져진 이 율법을 잘 지켜서 구원받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마치 원숭이가 돈을 찢는 수준밖에 안 되니, 즉 법의 원래 취지는 모르고 율법 안에 갇혀있는 꼴인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래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율법을 던져주신다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자기 꾀에 자기 스스로 빠지는 꼴로 말이다.
책 29페이지를 계속해서 보자.
** 이것으로서 하나님은 인간을 개별적으로 다루지 않고, '죄 안에 놓여있는 인간'으로 봐서 통째로 다루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하나님은 인간을 개별적이 아닌 통째로 상대 !!
하나님은 인간을 개별적이 아니라 통째로 다루시는데, 즉 예수님 맞은 편에는 모든 인간들이 다 통채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어떤 인간도 이런 자기의 법칙을 뚫고서, 즉 극복해서 예수님 곁으로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전한 갈라디아서이고 말이다.
그렇다면 이 갈라디아서가 없다면 어떤 오해가 발생하는고 하니, 십자가 한 편의 강도는 자기 능력으로 예수를 믿었다는 말이 나올 수 있고,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은 자기 겸손으로 구원받았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소경과 창기도 그렇고 말이다. 그런데 정작 목사들은 이 갈라디아서를 고려하지 않은 체로 설교를 했고, 지금도 마구 내뱉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반발한 사람이 루터인데, 인간을 그렇게 개별적으로 다루어서, 누구는 겸손해서 구원을 받고, 누구는 자기 능력으로 구원받고, 그렇게 개별적으로 이야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분명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사도바울이 밝히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사도바울의 안목을 가지고서 복음서를 제대로 설교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은 바로 반칙행위라는 말이다. 아니, 어떻게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을 잘 대접해서 구원을 받았는가? 그렇다면 예수님의 모친인 마리아는 예수님을 제대로 잘 낳아서 구원을 받았는가? 십자가의 강도는 어떻고 말이다.
◈ 갈라디아서 - 인간은 자력으로 구원받지 못한다 !!
그러나 갈라디아서에 의하면, 예수님의 어머니든, 막달라 마리아든, 강도든, 그리고 동방박사들이든, 그 누구든지 간에 그 어떤 인간이라도 자력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그것이 분명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리아를 이야기하든, 강도를 이야기하든, 동방박사들을 이야기하든, 누구를 이야기하든지 간에 반드시 이 갈라디아서를 거쳐서 다시 이야기하고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 지옥의 하나님 - 갈라디아서, 갇혀있음 !!
그래서 이 책에서는, 이 갈라디아서와 인간은 갇혀있다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앞으로 계속해서 전개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구약 창세기의 아담으로부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점을 모르게 되면, "물론 사도바울은 그렇지만 강도는 아니지 않습니까?" 라고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질문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책 29페이지를 보자.
** 아예 '왜 나는 필연적으로 죄만 짓는가'를 거룩한 법을 보면서 점검해야할 입장에 놓여있다. 율법은 인간의 모든 입을 막아버린다.
◈ 왜 나는 필연적으로 죄만 짓는가?
여기 "왜 나는 필연적으로 죄만 짓는가?" 라는 부분이 있는데, 만약 여러분들이 평소에 짓는 죄를 다 끌어 모으면 여기에 대한 답변이 되겠는가?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나름대로 "죄를 지었다, 안 지었다" 라는 것을 구분해내기에, 순간 순간 죄를 짓는다고 하는 것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죄를 지을 때도 있었다" 라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러나 "매 순간 순간 죄만 짓는다" 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여기에서 하는 질문인 "왜 나는 필연적으로 죄만 짓는가?" 라는 것은, 당연히 "그렇다" 라는 대답을 전제로 한 질문인데, 이것은 바로 그 어떠한 인간이라도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구원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는 것을 달리 표현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 자신이 날마다 우리에게 새롭게 알려주실 때에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결단코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즉 우리가 나름대로 준비를 많이 한다고 해서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건을 일으키시고, 그리고 그 일으킨 사건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을 방해하는 훼방꾼으로서,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서 산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확인시킴으로서, 그것이 또렷한 죄로서 우리를 부각시키게 되고, 그리고 그 맞은 편에 또렷한 십자가로서 완성된 구원의 방침을 우리에게 대비시킴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케 하는 일을 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은 평소에 자기 생각만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다 이루었다는 주님의 십자가를 생각해볼 때, 전혀 걱정하지 말아야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