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07. 11. 23) 1번 녹취록
광주강의(07. 11. 23) 1번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16.37.101.23)
광주 강의(07. 11. 23) 31-1
아까 아파트 안내방송에서 매곡초등학교를 새로 지었으니까 그쪽으로 전학할 사람들은 옮기라고 했는데, 이것이 이 생에 관한 것이지요. 그런데 오늘 우리가 디도서 1장부터 공부할 텐데, 이 성경말씀에 오늘 아파트 안내방송에서 ‘아이들 초등학교가 새로 생겼습니다. 옮기세요.’ 라는 이야기가 적혀 있겠습니까? 없지요.
앞으로 한 달 뒤에 대통령 선거하는데 그 이야기가 디도서라든지 다른 성경에 적혀 있겠습니까? 없지요. 이런 것이 왜 안 적혔을까요? 우리 일상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아이들 초등학교 보내고, 대통령 뽑는 일이 중요한 일인데 왜 중요한 것이 성경에 안 적혔느냔 말이지요.
그 이유가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방금 제가 이야기했듯이 애들 초등학교 보낸다는 것은 이 생에 관한 것, 눈에 보이는 세상에 관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어떤 이야기가 추가되는가 하면 저 생의 이야기, 죽고 난 뒤의 이야기, 거기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관한 이야기, 그 세계, 그 세상이 미리 와서 이 세상에 같이 뒤섞여 있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내 생활에 어떤 도움이 될까?’ 이렇게 보시면 곤란해요. 지금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눈에 보이는 세상밖에 없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 ‘하늘나라가 현재 어느 구석에 차고 들어왔느냐?’ 그것까지 우리가 파악할 수 있어야 됩니다.
‘교회 다닌다. 예수 믿는다. 하나님 믿는다.’ 라는 것의 의미가 뭐냐? 죽어서 가는 세계를 안 죽어도 여기서 미리 맛보고 있다는 겁니다. 죽어서 가야될 그 나라를 지금 안 죽은 상태에서 그 나라 속에 접촉되어 있는 것을 경험해야 됩니다. 그것 때문에 교회 나옵니다.
교회 나오는 시간에 쇼핑할 수도 있고, 목욕탕에 가서 때 밀수도 있어요. 그런데 목욕탕에서 때 민다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니잖아요. 교회라는 것은 죽음 + 생명입니다. 죽음이란 것은 현재 우리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점차 죽어가고 있어요. 사람들은 ‘대통령이 최고다. 왕이 최고다.’ 하지만 요즘 드라마에 보면 정조이야기입니까? 사극에 나오잖아요? 임금(왕)을 보세요. 전부다 그 앞에 무릎 꿇고 엎드리고, 말할 때도 정면으로 보고 못하고 고개 숙여서 말하고 하는 것을 보잖아요.
이런 것을 현재 민주주의에서 사는 사람들이 보면 ‘참 웃기네. 똑같은 인간들끼리 왜 엎드리고, 말도 벌벌 떨면서 하는가?’ 이렇게 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권력을 왕이 쥐고 있기 때문에 왕에 대해 예의를 잘 지키지 못했다고 하면 그것으로 3족을 멸합니다. 아주 잔인하게 징벌해 버리죠. 그래서 그 당시 사회는 왕을 무서워하면서 그 밑에서 질서가 유지됐던 사회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에는 뭐가 무서워요? 왕 대신에 뭐로 바뀝니까? 민주주의 되면서 법으로 바뀌지요. 왕에서 법으로 바뀌는 것이 1789년 프랑스 혁명이었어요. 왕이라는 신분에서 만인이 평등하다는, 신분제를 철패하고 거기다가 다수가 합의한(이것이 의회제도 아닙니까) 그것으로 대체해서 법으로 지배하는 세계가 오늘날 이 세계입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 이유야 어찌됐건 다수결에 의해서 대통령 뽑히고, 다수의 의견이 법으로 확정되는 겁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이 법의 지배를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사람 위에 지배하는 것은 법도 아니고 임금님도 아니에요. 제가 보기에는 세월이에요. 시간입니다. 젊을 때는 천하에 무서운 것이 없다가 나이가 많으면 나이가 무서워요. 우 집사님 그렇지요? 안 그래요? 늙는다는 게 무서워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죽음이 우리의 왕 노릇 한다.’는 말입니다.
드디어 로마서 5장에 그렇게 박혀있던 그 말씀이, 그 말씀 볼 때는 문자로 알았는데 이제 나이가 좀 들어보니까 죽음이 나의 왕으로서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온 몸으로 실감하게 됩니다. 우리 광주 사람들이 존경하는 김대중 전 대통령. 나이한테는 못 이기잖아요. 나이가 83입니까, 84세입니까? 그 정도 됐지요?
천하에 최고의 인기를 얻었지만 세월 앞에서, 죽음 앞에서 이기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죽음 + 생명이라는 것은 뭐냐? 사람이 지금 20대가 됐든 30대가 됐든 다 죽는단 말이지요. 죽으니까 나이가 90이 되든 10이 되든 막 태어난 신생아이든 개인 위에는 죽음이 있습니다.
오늘 오다가 버스에서 뉴스를 들었는데, 수험생인데 수능 치고 오토바이 사고로 둘 죽었습니다. 수능 시험치고 까불다가, 촐랑대며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박아서 죽었습니다. 수능 쳤다고 죽음이 왕 노릇 안 하는 게 아니에요. 수능 쳤다고 죽음이 봐주는 것이 없어요. 수능을 치든 뭘 하든 죽으면 죽어야 되는 겁니다.
야고보서 4장 14절을 봅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이것 맞는 이야기죠? 걱정돼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성경을 볼 때는 어떻게 보라고 했습니까? 여기에 무엇과 무엇이 결합되어 있다? 죽음과 우리가 장차 가야될 나라가 결합되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했지요.
그러면 이것은 우리 입장에서 보는 겁니까, 하늘나라에서 볼 때 우리를 이렇게 보는 겁니까? 하늘나라에서 볼 때 우리는 ‘장래 일을 알지 못하는 안개 같은 존재다.’ 이렇게 보는 겁니다. 이제 성경 해석 쉽지요. 무슨 눈으로 본다고 했어요? 펄펄 살아있는 내 눈으로 보지 않고, 내가 이미 내 할 일을 다 끝내고 더 이상 내가 나에게 더 이상 어떤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이미 죽은 자로서 전적으로 주님 손에 맡겨진 그 주님의 안목에서 거꾸로 이 성경책을 보면 해석이 됩니다.
나는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너희는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그렇게 되어 있지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대목이 아니고 15절입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도시에 가서 장사해서 이를 보겠다고 하는 사람이, 자기 생각에는 펄펄 살아있는 내가 스스로 취사선택한 일이라고 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 도시에 가서 그 일을 하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하늘나라 입장에서 보면 우리가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인생에서 무슨 계획을 잡고 이것 하다가 저것 하다가 때려치우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고 온갖 변동이 많더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너는 원래 그 코스로 가야 돼.’ 라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것을 가지고 기존 철학에서는 ‘결정론’이라고 합니다.
결정론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철학적 결정론이 있고, 이것은 방금 제가 이야기한 겁니다. 인간이 무슨 짓을 해도 신의 눈에는 하나님이 정해준 대로 간다. 이것이 철학적 결정론이고, 또 하나는 과학적 결정론입니다. 과학적 결정론은 도킨스가 이야기한 DNA. 그 인간이 어디서 어떻게 살던 간에 그 사람의 타고난 성격과 타고난 체질은 변동이 안 된다는 겁니다. DNA자체가 환경의 영향을 안 받아요. 영향 받는다면 그것은 돌연변이가 되어서 더 나빠지고 오히려 오래 살지를 못하고 도태될 수밖에 없는 허약한 DNA가 되고, 정당한 DNA는 어떤 환경이라도 DNA인자 자체가 변동이 없어요. 이게 아주 희한해요.
그래서 과학계에서는 그 DNA가 어디서 생겼느냐? 처음에 아메바에서 인간이 진화될 때 그놈의 괴물 하나가, 우리 몸속에 세포 만들 때 그놈의 괴물이 삽입되어서, 미트콘드리아라고 이것이 원래 세포가 아니고 세포 바깥에 있는 벌레인데, 그 벌레가 들어가서 굳어져서 미트콘드리아가 되고, 그 안에 DNA가 같이 들어 있으니까 이 DNA는 우리 DNA가 아니고 미트콘드리아가 되기 위한 벌레, 아주 미세한 벌레가 가지고 있던 그 DNA가 각자의 DNA가 되어서 새끼를 깠다. 이렇게 설명하는 겁니다. 언제? 수억년 동안.
그런데 그렇게 되는데 계산을 해 보니까 55억년이 걸려요. 아메바에서 인간 되는데 55억년 걸리는데, 지구 나이를 계산해보니까 45억년 밖에 안 돼. 뭐가 이상하죠. 지구보다 지구에 사는 생명이 더 오래 됐어. 그러면 그 사람들은 10억년 동안 어디에 살았는지? 그래서 이것이 문제가 되어 있어요. 계산이 잘못 되었다는 둥 여러 소리가 있어요.
어쨌든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생명의 세계에서 보게 되면 그가 어디서 어떻게 살게 되며 무엇을 하든지 간이 이미 그것은 다 정해진 것이고, 백날 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 바깥으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이게 야고보서 4장(14절)에 보면 ‘주의 뜻이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처지에 놓인 것이 인간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디 가서 어떻게 살든 간에 ‘이것도 주의 뜻이다.’ 하고 고맙게 여기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제가 전화를 한 통 받았어요. 서울에 계시는 어떤 교사 선생님인데 하는 말이 “제가 뇌경색이 왔거든요. 그리고 당료도 있어요. 그런데 제가 지금 교사인데 힘이 들어서 도저히 못 가르칠 입장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뇌경색에 당료까지 걸려서 그야말로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이렇게 하나님을 만나서 그 새 목사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빨리되는 목사, 속성과 목사를 받은 모양이라. 그러니 목사이면서 교사인데, “그런데 지금 뇌경색이 와서 수업을 못할 지경이 되었는데 어떻게 하면 됩니까? 사표를 낼까요?” 이런 이야기를 해요.
‘학생들은 선생님의 지식을 얻고자 학교 다니는 것이 아니고 친구 될 만한 선생이 있으면 그것을 재미 삼아 학교에 다니니까, 아이들에게 한 수 가르친다고 생각하지 말고 놀아줄 생각으로 가시면 그 돈값 합니다. 월급 값 하니까 놀아주세요.’
뇌경색이 오니까 기억이 안 난다는 거예요. 이런 것도 솔직히 이야기해서 “‘내가 잊어버려서 잘 가르치지는 못하지만 남은 생애 몇 년 살지 모르지만 너희들 듬뿍 사랑해 줄게.’ 이러면 아이들이 더 감동합니다. 그리고 존경하니까 그만 둘 때까지는 그냥 학교에 있으세요.” 그렇게 답변을 했습니다.
자, 보세요. 죽음이라는 것이 자기가 실수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오토바이 타다가 실수해서 죽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것조차 주의 뜻으로 생각해 줘야 생명의 관점에서 거꾸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볼 때는 현재 어떤 관점을 구박하는 말씀이냐 하면, 이 성경이 내가 지금 펄펄 살아있다는 쪽에서 다가서는 것을 구박하고 나무라고 ‘이미 너는 죽은 잔데 생명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는 쪽으로, 그런 관점으로 성경을 보라는 겁니다. 우리보고.
이미 우리는 늙어 죽어요. 젊어도 곧 죽습니다. 곧 죽어 가는데, 그리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죽더라도 산다는 것. 죽으러 가는 그것이 곧 살러 가는 것이다. 영원히 천국에서 살고자 해서 지금 주께서는 고맙게도 우리를 조금씩, 조금씩 죽이신다는 이 고마움.
그리고 이 땅에 있는 이것이 다가 아니라,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주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낙원 새 예루살렘이 있다는,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그러한 기쁨을 가지고 이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 하면 “죽어봐야 알지!” 하거든요. 글쎄 죽어봐야 아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이미 그것을 맛보고 있는 사람이 누구냐를 모아놓을 때 그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라는 것은 도저히 내 힘으로는 천국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는데 내 마음속에 천국의 힘이 다가와서 죽어가는 내 육체 속에 천국의 마음이 미리 앞당겨서 담길 때 이것을 가지고 교회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말로는 그리스도의 몸.
그래서 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아주 특이한 사람입니다. 방금 제가 한 이야기를 구약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사람만 모인 곳이 고대 국가인데 그 고대 국가에 살아계신 하나님이 동행하더라. 이게 바로 이스라엘 아닙니까. 참 신기하죠? 하나님이 가시는 길을 홍해 바다가 막는다? 이것은 말도 안 되지요. 하나님이 가시는데 여리고 성이 막는다? 이건 말이 안 되지요.
미디안에 수십만 대군이 하나님과 함께 있는 이스라엘을 구박한다? 이건 말도 안 되지요. 하나님이 함께 있다면 누가 그것을 막습니까? 죽음이 어떻게 생명을 이깁니까? 한번 적어볼까요. “죽음이 어떻게 생명을 이길 수 있습니까?” 정답은 뭡니까? ‘없다.’ 이것이 정답이죠. 죽음이 어떻게 생명을 이깁니까. 나라는 인간이 어떻게 나를 구원하겠다는 그 하나님의 열심을 막을 수 있습니까. 끌려가야지. 나라는 이 죽음이, 내가 죽는데. 죽음을 안고 있는 내가 나에게 허락도 없이 찾아오신 하늘나라를 내가 무슨 수로 ‘나는 안 갈래. 나는 지옥 갈래.’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어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냥 ‘이게 웬 떡이야!’ 하고 그냥 감사하면서 맛있게 먹으면 되지.
로마서 6장 봅시다. 하나님이 찾아오게 되면 이런 현상이 벌어집니다. 10절입니다.
제가 디도서 1장 7절을 하기 전에 미리 사전에 준비 차원에서 몇 가지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기 보면, 제가 이 말씀을 읽고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질게요.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에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이미 죽은 자요, 그런데 예수님 보시기에 우리는 어떤 자다? 죽은 자가 아니고 산자다. ‘그렇게 여길지어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죽음을 누가 마중 나왔습니까? 죽음을 생명이 마중 나온 거예요. 예수님은 이미 죽었다가 부활 했잖아요. 죽었다가 부활했으니까 어떤 능력이 있느냐 하면, 어떤 죽음에도 생명을 안 빼앗기는 그런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 생명의 능력을 가지고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다가오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 내 자신에 대해서는 뭐 볼 것 없지요. 그냥 늙어가고 죽은 자 맞고, 우리에게 다가온 예수님의 죽었다가 살아나신 부활의 능력이 오니까 우리는 예수 안에서 산자가 되는 겁니다. 이걸 교회라고 합니다.
‘목사님, 이것이 교회라는 대목이 어디 나옵니까?’ 물으신다면 에베소서에 나옵니다. 1장 19절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그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다음 22절에 보면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그러니까 죽었다가 살아나신 부활의 능력이 충만한 곳이 어디입니까?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죽음이 다시는 이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모임, 무리들 그것을 교회라고 합니다. 분명히 늙어 죽어가고 있어요. 그런데 본인들은 알아요. 죽음은 생명으로 가기 위한 절차에 불과하단 말이지요.
아파트 3층에 사는데, 1층에서 부부싸움 한다고 ‘죽어라. 죽어!’ 하고 고함을 쳐요. 그것 때문에 너무 속상해 하지 마세요. 우리 집은 3층이니까. 2층에도 빚쟁이가 와서 물건 다 들고 나가고 ‘내 놔!’ 하고 고함쳐요. 그럴 때 “참 안 됐네!”하고 그냥 넘어가세요. 왜? 남의 집이기 때문에. 우리 집은 3층이란 말이지요.
그러니까 1층, 2층이 뭡니까? 지옥 같은 1층, 2층을 거쳐야 3층이라면 우리는 보기 싫어도 1층을 봐야 되고, 보기 싫어도 2층을 봐야 됩니다. 그래야 3층이에요. 1층, 2층 안 거치고 3층 갈 수가 없어요. 하나의 절차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몸이 아프고, 사는 것이 힘들고, 늙어 죽는다는 것 이런 것을 다 겪어야 돼요. 그러나 로마서에 보면 ‘그러한 고생은 장차 올 하나님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합니다. 비교가 안 되니까 그냥 ‘세상은 그렇구나!’ 하고 그냥 지나가란 말이지요.
공장에서 일했는데 사장이 노름해서 돈 다 날리고 월급도 떼먹고 도망갔다. 그러려니 해버리란 말이죠.
한 군데만 더 찾아보고 오늘 본문으로 들어갑시다. 갈라디아서 1장 4절입니다. 이 대목은 상당히 중요한 대목이니까 설명을 좀 해야 되겠어요.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는데, 그러면 진짜 복음이 뭐냐? 4절에 나오지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여기에서 복음이 뭐냐 하면, 첫째는 ‘악한 세대’라는 환경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뭡니까?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는 것. 세 번째는 방법이 나오는데, 우리 죄를 위해서 (예수님이)자기 몸을 드리지요.
죽음은 무엇을 만나야 삽니까? 생명을 만나야 돼요. 예수님께서는 이 길이 천국 가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줘요. 자기 몸을 드림으로. 보통 우리는 죽으면 끝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은 죽었다가 삼일 만에 살아났지요. 생명을 얻었잖아요. 지금 개구멍을 뚫어 놓은 거예요. 우리가 뚫을 수 없는 길, 천국 가는 길을 뚫어놓은 거예요. 자신의 몸을 드려서 영생의 나라 갔기 때문에 그 뒤에 우리도 졸졸졸 그 코스를 따라 가면 숨통이 터이면서 생명, 영생의 나라에 도착됩니다. 그래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에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바로 그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여기 첫 번째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려고 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드림으로 우리가 영생을 얻었다’는 것을 어떤 사람이 아는가 하면, 악한 세대가 악한 세대인 것을 인정을 해야 됩니다.
‘목사가 왜 철학 공부를 하느냐?’ 그런 질문을 종종 하시는데, 목사는 구원 안 받아도 됩니까? 구원 받아야 되잖아요. 그렇다면 목사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악한 세대에 속했었는데, 우리 힘으로 구출될 수 없었는데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드리심으로 우리가 구원 받았잖아요. 그렇다면 악한 세대가 뭔 줄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Do you understand? 이해되십니까?
악한 세대인 줄 알아야 거기에서 벗어남을 감사할 것 아닙니까. ‘야, 이 악한 세대에서 예수님 때문에 벗어났구나!’ 하면서 좋아하는데, 악한 세대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대신 드려 구원했는데, 자기가 보기에는 이 세대는 악한 세대가 아니래요. 아주 좋은 세대래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옆에서 ‘애야, 이 악한 세대에서 참 힘들지? 내가 네 대신 죽으면 악한 세대에서 나와서 나와 함께 천국 갈 수 있어.’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이 세대 좋은데요. 이게 왜 악한 세대입니까?”
이런 사람은 악한 세대가 아니고 멋진 세대입니다. 내 욕망을 펼칠 수 있고, 내 꿈을 펼칠 수 있는 이 세상이 멋진 세대입니다. ‘자유롭게 경쟁이 허용되고 승리자가 대우받는 세대. 아니 이보다 더 좋은 세대가 어디 있습니까? 멋진 세대지 악한 세대 아닙니다.’ 그런데 옆에서 ‘악한 세대 맞거든.’ 그러면 또 ‘악한 세대 아니거든.’
예수님은 세상을 악하게 보고 자기 몸을 십자가에서 드렸는데, 우리는 이 세상을 좋은 세대로 보고 이 세상에 대해서 기대를 잔득하고 있으면 옆에 거치적거리는 것이 누구예요? 예수가 자꾸 거치적거려요. “저리 가소. 나는 이 세상이 정말 좋은데, 왜 자꾸 악한 세대라고 하면서 남을 긴장시킵니까? 듣기 싫으니까 저리 가소. 나중에 늙어서 죽기 전에 예수 믿든지 할 테니까.” 이렇게 밀쳐버립니다.
‘왜 악한 세대냐?’ 라는 것을 알려면 우리가 철학을 공부해야 됩니다. 철학을 공부해 보면 이 세상이란 것이 자기밖에 모릅니다. 그래서 악한 세대입니다.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가 최고고, 자기가 돛대가 되면 남이 어떻게 되든 망해도 전혀 기분 좋은 세대. 얼마나 자기중심적입니까. 이것이 악한 세대입니다.
사람은 희한하게 자기 손톱에 가시 박힌 것은 그렇게 아파하면서 다른 사람 이빨 빠지는 아픔은 못 느끼는 아주 다행스런 체제로 되어 있습니다. 아주 다행스럽게. 남이야 죽든 말든 자기 편하면 아주 천국 같은 세대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몸의 체제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포괄적으로 다루죠. 어떻게? 만약 광주에 비가 내린다면, 제가 질문합니다. ‘광주에 비 내릴 때 여기 쌍용아파트 안에 있으면 광주에 비 옵니까, 안 옵니까?’ 역시 비 오지요. 내가 비를 안 맞고 있을 뿐이지 비는 오잖아요. 그런데 사람은 이상하게 광주 전역에 비가 와도 자기가 비 안 맞고 있으면 비 안 오는 것으로 느낍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이 세상은 지옥 불에 들어가는 겁니다. 지옥 불에 들어가는데, 남들 지옥 불에 들어가도 자기는 아파트에 앉아서 평안하면 이 세상은 아주 좋은 세상인줄 알고 자기 보는 관점에서 세상을 보니까 “이 세상에 왜 유황불이 떨어져. 이상한 소리 하네.” 하고 자기 입장에서 부분만 보니까 하나님의 관점이 자기 마음에 와 닿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이가 좀 들게 되면, 나이가 들고 세상을 좀 살았다는 것이 뭐냐 하면, 자기가 알던 세상의 범위가 넓어져서 이제는 안 만날 사람 만나고, 만나야 할 사람을 못 만나고 이런 여러 가지 얽히고설키고 해요. 거미줄처럼. 나만 알고 있던 좁은 세상이 나이가 많을수록 점점 더 미지의 세계로 모르는 사람을 만나게 돼요.
그런데 미지의 세계마다 지평선이 있어요. 지평선이란 것은 굽어져서 여기서는 안 보이는데 좀 더 가보면 언덕 뒤에 있는 사람이 보이죠. 이처럼 인생을 살아가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학교 졸업할 때 ‘우리 10년 후에 어디서 만나자. 첫눈 올 때 만나자.’ 뭐 이런 약속을 해놓고 나중에 10년 후가되면 그 친구 만날 시간이 없어요. 왜? 새로운 사람 만나기 바빠서. 새로운 사람 만나기 바빠서 옛날 약속은 안중에도 없는 겁니다. 그만큼 생각의 폭이 넓어진 거예요.
흔히 처녀들이 남자친구가 없을 때는 엄마, 아빠밖에 모르다가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 친구가 생기면 이제는 남자친구밖에 모릅니다. 그러다가 시집가면, 시집가기 전에는 정치, 경제, 사회를 논하다가 결혼해서 애 낳으면 자기 애 이야기밖에 안 합니다.
우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교회 유아실에 젊은 새댁들 모여서 이야기하는 것 들어보면 딴이야기 안 해요. ‘어느 학원에 애 보내느냐? 영어는 어느 학원 선생님이 잘 가르치나?’ 그 이야기입니다. 이런 것이 주 관심사에요.
이것은 내가 오후예배 드리기 직전에 와서 들은 것이고, 사실은 그전에 복음 이야기도 많이 하겠지요. 오후예배 직전쯤 되면 복음 이야기는 많이 했고, 그 다음에 세상 이야기를 하겠지요.
어쨌든 복음이란 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이 세상은 악한 세대입니다. 이유 없이 무조건 악한 세대입니다. 악한 세대에서 착하게 산다고 구원 될 수가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얼마나 악한 세대이면, 내가 얼마나 악하면 악한 세대에 동조할 수밖에 없지 악하다고 하면서도 거기서 혼자 독야청청할 수 있는 그러한 대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악하다고 욕하지만 막상 악한 곳에 넣어보세요. 한 통속이 되어서 잘 먹고 잘삽니다. 삼성그룹이 악하다고요. 회사에 넣어 주기만 해 보세요.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라고 합니다. 남 대모하면 욕하지만, 막상 그 환경에 들어가면 같이 데모하게 되어 있고, 시위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전부 자기입장밖에 모르는 것이지요. 이렇게 자기 입장밖에 모르는 인간이 어떻게 자기 죄를 알아서 스스로 회개를 한단 말입니까. 이건 말도 안 되지요. 자기 죄를 자기가 알아서 회개하면 그 회개한 자기는 우수한 자기입니다. 훌륭한 자기, 대단한 자기가 되어서 또 자기를 신봉해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자기가 회개한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몸을 드리심으로 구원 받지 내가 회개하고 반성한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죄 지을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죄 짓는 것도 되지만 사회생활 하다보면 그 사회의 죄가 나에게 강요를 하고 우리는 그 강요에 저항할 수 없습니다. 같이 먹고 마시고 뒹굴어야 이 사회에서 살 수가 있어요. 뒤섞이지 않으면 자살해야 됩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우리는 이 악한 세대에 이미 물들었어요. 물든다는 말이 뭔지 아십니까? 하얀 천을 푸른 염색물이 던져보세요. 흰 천이 막 반발해요. ‘나는 하얗다. 파란 물은 싫어.’ 아무리 저항해도 어느새 파란 물이 하얀 천을 다 적셔서 어느새 나는 파란 천이 되어 있어요. 그러니 이것은 어쩔 수가 없어요. 내가 방어한다고 방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분위기에 편승해서 같이 놀아나는 그것이 처음에는 거부감이 들지만 한두 번 해보면 기다려집니다.
사람이 사는 재미는 뭐냐? 이런 것은 잘 안 가르쳐주는데 여기서는 특별히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죄짓는 재미’입니다. 그것도 앞에 하나 집어넣어야 됩니다. ‘몰래’ 죄짓는 재미. 대놓고 죄지으면 하나도 재미없어요. 몰래 해야 재미있습니다. 성경에 나오지요. ‘몰래 먹는 떡이 맛있다’(잠9:17)고.
프로이드의 [쾌락을 넘어서]라는 책을 보면, ‘하지마라’ 고 하는 것을 할 때 어떤 쾌감을 느낍니다. ‘하지마라’ 하는 그것이 도리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의 죄를 자극하게 만듭니다. 이것은 로마서 7장에 나옵니다. 왜 ‘하지마라’고 하는 것을 보고 오히려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뭘 이야기합니까. ‘너는 백날 해도 죽음이다.’ 그래서 뭐가 필요하다? 생명이 필요하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죽어가는 너를 믿지 말고 누구를 믿어라?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러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얼마나 간단합니까. 이걸 모르고 자꾸 자기변명, ‘나도 최선을 다했다. 노력하고 있으니까 기다려 달라.’는 둥 이런 쓸데없는 소리 하면 안 되지요.
제가 군에 가서 제일 놀란 게 뭔 줄 알아요? 멀쩡한 인간도 군에 가니까 군바리(군인) 근성이 나온다는 것. 나는 이것에 깜짝 놀랐어요. 저는 교회를 다니니까 너무나 대조적이잖아요. 군바리 세계와 교회 세계가 겉으로는 정 반대 아닙니까(속은 똑같지만). 정 반대다보니까 저는 죽음과 생명을 혼합해서 3년 동안 보냈어요.
군대생활하면서 ‘이건 아니잖아! 이건 아니야!’ 이런 것이 다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은 군바리와는 전혀 다른 세계가 있는 줄도 모르기 때문에 현재 자기가 군바리로 하는 행세 그것이 옳다고 여기는 거예요.
인간들이 이 어두운 세상 살면서 자기 딴에는 별 하자 없이 잘 산다고 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참, 놀고 있네. 네가 그 따위로 살면서 천당을 가? 네 힘으로. 우끼지 마라. 누가 넣어주는데?’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는 이미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니까, 죽더라도 마음 편하게 죽으시기 바랍니다. 마음 푹 놓고 죽으셔야 돼요. 안 죽겠다고 아등바등하면서 ‘난 죽기 싫어!’ 하는데, 마치 자기가 살만한 자격이나 되는 줄 알고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죽일 때는 ‘참 잘 하셨습니다. 더 안 살려줘도 됩니다.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겠습니다.’ 하고 하나님의 새로운 생명을 맞이하는 사람은 이런 고백이 나옵니다.
제가 문제를 던지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디도서 1장 7절을 봅시다. “감독은 하나님의 청직이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이란 것은 ‘믿음직한’ 것이죠.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자, 이 말씀에 대해서 묻겠는데, ‘자기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 자’(롬6:11)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감독이라는 사람이 왜 이런 일을 해야 됩니까? 아까 교회가 뭐라고 했습니까? 교회는 무엇과 무엇의 만남이다? 죽음과 생명의 만남이죠. 죽음은 나를 이야기하는 것이고, 생명은 예수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죽음과 생명의 만남이 교회이고, 다시는 죽음의 권세가 우리에게 작용 못하고 우리는 생명의 나라, 낙원으로 가고 있는 중인데, 그냥 곱게 죄 짓다가 가면 될 텐데, 교회는 부활의 능력이 역사하는 것이 교회인데, 왜 교회 감독은 이러이러해야 하는가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청직이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고 --” 왜 이러한 행위들을 드러내야 되는가 이 말입니다.
제가 이런 질문을 던지니까 여러분이 간단히 답변을 하기가 좀 어렵지요. 짧은 답변이 잘 안 떠오르지요? 자, 이걸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뭘 하나 나는 죽음이요 주님은 생명이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 받는다고 하잖아요. 여기서 죽음 + 생명에서 죽음을 A라고 보고 생명을 B라고 볼 때, 도착 지점을 C(천국)라고 봅시다. 그러면 방금 우리가 A가 C로 가잖아요. 누구를 만나서? B를 만나서. 아시겠습니까?
이런 관점만 생각했지 B가 A속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를 방금 제가 이야기 안 했죠? 이거 이해되십니까? ‘야, 예수 믿고 천당 간다.’ 이것만 이야기했지, 미리 앞당겨서 마중 나오신 생명 B가 A속에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제가 이야기 안 했지요?
그런데 B가 C로 갈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A에서 C방향으로 가지만 B는 C쪽 방향에서 오히려 A를 향하여 거꾸로 내려오고 있는 중이거든요. 산이 이렇게 있는데, 우리는 죽음이니까 A입니다. 그런데 C가 천국이라면 우리는 A에서 C방향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냥 못 가지요. 왜? 우리는 백날 해도 나밖에 모르는 죽음의 존재이기 때문에 뭐가 마중 나와야 됩니까? B가 마중 나와서 A와 B가 결합되어서 C천국에 간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B가 어디서 나온 B냔 말입니다. 이것은 C에서 굴러온 B거든요. 굴러온 바위덩어리인데, B는 C쪽으로 가는 게 아니에요. 어디로 가느냐? A를 향하여 갑니다. B가 A쪽으로 가다가 부닥쳐서 충돌되니까 ‘아하, 나는 죄인이며 예수님께서 내 대신 돌아가심으로 그냥 공짜로, 사랑으로 천국 가는 사람이 되었구나.’ 하고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인정하게 됩니다. 성령이 들어오니까.
그런데 B가 우리 속에 들어오게 되면, 자 그러면 교회를 봅시다. 교회라는 것은 죽음과 생명이 만나는 것인데, 그러니까 교회라는 것은 죄인들의 모임이다.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습니다. 맞지요? 맞는데, 이것은 한쪽 방향만 이야기한 거지요. 또 뭘 이야기해야 돼요? 천국의 그 능력이 변변치 않게 죄만 짓는 우리 A안에 들어와서 놀라운 변화를 야기하는 것도 교회가 보여줘야 될 일이라는 겁니다.
서로 방향이 다른 두 개가 어디에서 만나요? 함께 만나는 곳이 교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성화론이 아니지요. 만나면 만날수록 우리는 점점 더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알기 때문에 성화론은 아니에요.
이사야가 하나님 만나고 난 후에 뭐라고 했는가 하면,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했는데, 이 때 이사야가 많이 성화되어서 그렇습니까? 성화된 것이 아니고 자기의 현실을 보는 거죠.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생각할 때는, 사람 꼬셔서 예배당 짓는 것. 항상 인식이 사람 꼬여서 돈 받아 챙겨서 건물 지어서 장사하는 곳. 천국을 이야기하면서 장사하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어떤 책을 보니까 이렇게 쓰여 있어요. ‘교회의 주 수입원은 내세 사상이다.’ 어떤 역사학자가 비꼬면서 그런 주장을 했는데 맞는 말이죠.
교회는 교회를 포기하지 아니하면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를 포기 안 하면 나라는 인간의 대체물이 교회가 되어서 나 숭배하던 것이 교회 숭배로 잠시 포장만 바뀌었을 뿐이지, 이건 내 교회다. 우리교회다. 이렇게 되면 이것은 성경과 안 맞아요. 성경에는 교회 머리가 한 분입니다. 머리가 한 분이라면 교회는 몇 개입니까? 하나밖에 없어요. 머리가 둘이 아니고 하나라면 하나의 머리에 교회는 하나밖에 없어요. 그것을 한 몸이라고 합니다.
‘몸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한 몸입니다. 그러면 나머지 교회는 뭡니까? 그것을 지체라고 했잖아요. 한 몸의 지체지요. 쉽게 말하면 문어. 문어가 머리라면 그 밑에 딸려있는 다리는 뭡니까? 이게 그리스도의 지체들. 그러니까 이쪽 교회가 교인 수가 많다는 것이 하나의 몸 안에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너희 집에 동생 몇 명이니?” “2명이다.” “야, 좋겠네.” 동생 숫자가 많다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고, 동생들이 애 안 먹일 때 좋지요. 애 안 먹을 때 좋은 동생이지 숫자 많다고 좋은 동생이 아니지요. 한 동생은 교도소 가 있고, 한 동생은 이혼해서 아파 누워있고 이러면 보통 문제가 아니거든요. 좋은 동생 같으면 숫자가 적어도, 1명이라도 이것을 나쁜 동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쁘다, 좋다는 숫자와 상관없습니다.
‘숫자가 몇 명이든 좋은 교회, 그리스도의 지체되시기 바랍니다.’ 아멘이 안 나오네. 아멘이 나와야 할 타이밍에 아멘이 안 나오네.
한 몸이라는 것을 잊어버리니까, 작은 교회라고 해서 천국에 안 넣어주는 것이 아니잖아요. 숫자 작은 교회 출신이라고 부활 안 시켜주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작은 숫자와 관계없이 용서할 것 다 용서하고 구원할 것 다 구원해 주는데 뭘 더 바랍니까? 무슨 또 딴 욕심으로 뭘 더 바래요.
‘내 교회는 숫자가 많다’는 거예요. 갑자기 교회가 누구의 교회가 되어버렸습니까? 교회는 주님의 교회인데 갑자기 ‘내 교회’, 결국 이것은 또 내 중심이라. 또 내 교회, 내 중심이라. 그러니까 내 교회 중심이 얼마나 죄악스러운지, 이렇게 되면 하나님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졌다고 하는데 악한 세대의 의미를 모르는 거예요.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졌다’는 것을 다르게 말하면 이렇게 됩니다. ‘악한 교회에서 우리를 건지셨다.’고 하면 됩니다. 악한 교회가 뭡니까? 내 중심의 교회가 악한 교회입니다. 우리는 내 교회에서 구원(건짐) 받아야 됩니다. 누구의 덕으로? 예수님으로. 이제는 너 교회 없단다. 하는 식으로 우리는 거기에서 건짐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죽은 자요,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자가 됩니다. 주님 때문에 살아야지 내 교회 있어서 살고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이야기를 좀 더 해보면 이렇습니다. C가, 천국의 능력이 우리 A속에 들어와 버리면 이것을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교회지요. 교회라는 것은 죄인이 천당 가는 것도 교회고, 천국의 능력이 A에게 쳐들어오는 것도 교회지요. 자, 그러면 천국의 그분이 우리를 만나기 위해서 왔을 때 이게 교회가 되는데, 천국의 그분이 올 때 뭘 가지고 오십니까? 이것이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에 나옵니다. 세 가지를 가지고 오세요.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이 있어야 우리가 거룩하게 됩니다. 이 믿음, 소망, 사랑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 믿음, 소망, 사랑을 주시는데 이걸 ‘선물’이라고 합니다(엡2:8). 저 산 꼭대기에 있는 C가 B가 되어서, 산꼭대기의 인자가 이 땅의 예수님이 되셔서, A 죄 많은 우리를 만났을 때 뭔가 우리 속에 집어넣어 주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우리 믿음 아닙니다. 우리 소망 아니고, 우리 사랑 아니고, 예수님이 가졌던 자기 믿음과 자기 소망과 자기 사랑을 아무 한 것도 없는 우리에게 공짜로 선물로 주십니다.
이런 선물을 받으면 우리 속에는 예수님의 믿음, 소망, 사랑이 들어오지요. 이것을 ‘은사’라고 합니다. 이것은 영원한 곳에서 온 영원한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소망, 사랑은 영원토록 함께 있을 것인데, 그것이 밖으로 표출될 때는 사랑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식으로 가능하냐?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초등학교 애들이 제주도에 수학여행 간다고 그렇게 좋아해요. 여행갈 애들 모아놓으니까 100명이 됩니다. 그 중 어떤 아이가 “저는 멀미를 해서 비행기 못 타요.” 어떤 녀석은 “저는 비행기가 무서워요. 비행기가 추락하면 저는 어떻게 해요?”하면서 겁에 질려 있고, 어떤 녀석은 “비행기 타면 신나겠다.” 하고 있는데, 아직은 100명 어느 누구도 비행기를 못 탔어요. 선생님이 최면(잠자는) 가스를 다 뿌렸어요. 애들이 까불다가 가스마시고 몽땅 잠이 들었어요. 잠자는 애를 하나하나 들어서 비행기에 다 태웠어요. 그리고 비행기가 이륙을 했습니다. 이륙하고 난 후에 아이들이 부스스 잠에서 깨어나기 시작하는데 눈을 떠보니까 구름 속에 있거든요. 애들끼리 서로 얼굴을 보면서 ‘야, 어떻게 된 거야! 여기가 어디야? 와, 벌써 비행기 안이네.’
이 비행기 안을 성경에서는 ‘예수 안’, 이것을 다른 말로 ‘사랑 안’이라고 합니다. 새삼스럽게 사랑을 억지로 만들어 내라는 말이 아니고, 비행기 안에 탄 애들은 서로 얼굴을 보면서 ‘지금 우리가 비행기 안에 있다.’고 이야기를 하지요. 너도 비행기 안에 있고 나도 비행기 안에 있고.
그런데 누구도 자기 힘으로 비행기 안에 들어온 사람은 없어요. 왜? 잠든 상태에서 선생님이 안고 왔으니까. 어느 누구도 어떻게 비행기까지 왔는지는 모르는데 와보니까 그것이 비행기 안이에요. 방금 비행기를 뭐로 바꾸느냐 하면 사랑으로 바꿔 봐요. 사랑으로 다 바꾸면 ‘서로 사랑하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서로 얼굴을 보면서 “내가 널 사랑한다.” 이것이 아니고, 서로 얼굴을 보면서 “우리는 예수님 사랑 안에 함께 들어 있군요.” 라고 고백할 때 그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 사랑해 줄게.” 가 아니라, 이것은 비행기 타기 전에 기껏 하는 소리고, 이 사랑 안의 세계는 ‘내가 사랑해 줄게’가 아니라 이미 사랑 안에 우리가 놓여있어서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든 내가 어떤 모습을 하든 상관없이 우리는 이미 동일하게 누구의 사랑을 받았다? 주님의 같은 사랑 안에, '같은 비행기 안에 같이 놓여있는 형제이군요.' 라고 서로를 내놓고 그것을 인정할 때, 그게 바로 C가 A안에 들어온 겁니다.
방금 한 이야기가 고린도전서 12장에 보면 나와요.
1시간이 넘었네. 그만합시다. 이야기하다보니까 혼자 도취되어서---
이것만 합시다.
여기 9절에 보면, 가르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교육한다는 뜻도 되지만, ‘복음이 이렇습니다.’ 하는 자리에 누가 섰느냐 하면 감독이거든요. 감독은 교회 감독 아닙니까. 교회는 사도행전 20장 28절에 보면 ‘하나님의 피로 값 주고 산 교회를 치게 했다.’고 합니다. 감독하게 했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것은 ‘수입해온 사랑은 이런 사랑입니다.’ 라고 누가 그것을 솔선수범해야 되겠어요? 감독이 솔선수범해야 돼요.
그러면 목사님. 감독만 그렇습니까? 그게 아니에요. 목사가 그렇게 행동을 하게 되면 ‘어, 목사님 행동하는 것이 우리하고 똑같네.’ 라고 동질성을 갖게 돼요. ‘우리 목사님을 참 별라.’ 이렇게 되면 동질성이 아니라 이질성을 느끼죠. 어떤 집사님은 자기 마누라 구타하는데 목사님은 사모님을 안 때리거든요. 그러니까 ‘아, 내 행동이 잘못 된 것이구나. 우리 목사님 보니까 내가 아내 구타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구나.’ 이렇게 알면 그 사람도 역시 주님의 사랑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이 본문 해결 되었지요. C가 누구를 만났다? A를 만나니까 감독된 사람이 이 모든 것이 누구 공로다? 저와 여러분이나 다 같이 이런 사랑을 충분히 받았습니다. 이런 사랑을. 마누라 구타하지 않는 그런 사랑. 마누라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고. 술을 즐기지 않습니다. 술을 즐기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하늘나라를 더 좋아합니다. 하는 것이 이 감독된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속에 있어요. 끄집어내 놓으세요. 제 안에 있는 것 여러분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비행기를 탔습니다. 라고 이것을 시범해 보이는 사람이 누구라고요? 감독이란 말이죠. 그게 바로 교회입니다.
좀 쉽시다.
(2007. 12. 5. 11:20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