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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8 겨울 수련회 교재(1)자유게시판[수련회]

08 겨울 수련회 교재(1)

이름 : 이근호(IP:117.55.137.199)

강구만 집사님께서 이 교재를 복사를 해 오신다고 하니 그날 참석하시는 분들은 개인적으로 프린트 하시지 않아도 되십니다.

나와 저희 (시편 강해 )

2008년 십자가마을 겨울 수련회 교재

“주 여호와여 내 눈이 주께 향하며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 영혼을 빈궁한 대로 버려두지 마옵소서. 나를 지키사 저희가 나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행악자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하옵소서 악인은 자기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나는 온전히 면하게 하소서”(141:8-10)

Ⅰ 서론

1. 예술론

예술론

예술은 미(美)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행위이다. 옛날부터 진리가 곧 아름다움으로 간주해서 진리를 얻기 위한 예술을 했다. 하이데거(1889~1976)의 표현을 빌면 철학은 그 자체가 진리이자 비진리라고 할 수 있다. 철학적 진리가 감추어 버린 이 측면, 철학적 진리로서는 포착이 불가능한 이 세계의 측면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술적 진리’이다.

현대예술은 철학의 힘으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사물의 우연적, 구체적, 가변적 측면을 드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적 진리’는 철학적 진리보다 우월하거나 최소한 대등한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그 전에 칸트(1724~1804)로부터 이어져 온 것이다.

칸트는, 어떻게 인간이 자신을 절대화 하지 않고 상대화 할 수 있는가를 생각했다. 우주와 마주하면서 자신을 상대화하는 일은 타고난 인식 능력으로 파악할 수 없는 부분이 우주와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생긴 결과라고 보았다.

‘타고난 인식 능력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그 부분이 무엇인가?

칸트는 인식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영역과 그렇지 못한 영역으로 구분지었다. 인간이 인식 능력을 동원하여 원인과 결과의 자연법칙에 따라 조직화 할 수 있는 것을 ‘현상계’라고 분류했고, 이 인식 가능한 세계에 들지 못하고 남아 있는 영역을 예지계로 분류했다.

그런데 이 두 세계는 서로 배척 관계이기 때문에 중간에 연결 고리가 필요하다. 여기서 칸트는 ‘판단력이라는 인식 능력을 발견했다. 현상계와 예지계로 분류시켜서 인식하는 근대인의 주체는 역시 분열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이 분열을 연결하는 것을 그는 ‘판단력’이라고 보았다. 곧 ‘미(美)의 세계’이다. 미적 판단력의 활동은 두뇌를 사용하는 인식 활동에 속하지만, 활동의 결과 현상계에 해당되는 사물을 산출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장미꽃은 아름답다’는 판단을 내리는 두뇌의 활동이 ‘장미꽃은 빨갛다’는 판단을 내리는 활동과 다른 점은, 빨간 사물은 현상계에 존재하는 반면 ‘아름다운’이라는 술어에 대응하는 사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형용서는 판단주체의 내면에 일어난 즐거운 감정의 결과를 전달하는 술어일 뿐이다. 이처럼 칸트는 인식 능력들이 ‘미적’으로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주체가 즐거워한다는 구도를 고수했다. 미적 판단력은 보이지 않는 물자체의 세계를 흔적처럼 현상계로 불러들이는 것으로 보았다. 즐거워야 한다는 유쾌의 감정을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경제적 효용성으로 치면 전혀 쓸모없는 미적 사물들이 세상에 널린 까닭은, ‘신께서 우리에게 현상계를 넘어서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서다. 이 아름다운 대상을 무주했을 때, 우리는 분열된 주체와 상승하는 분열된 현실을 넘어 통합이라는 이념의 세계를 흡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존주의자인 키에르케고르(1813~1855)는 이렇게 말했다. “시인이란 무엇인가? 불행한 자다. 그의 가슴에는 깊은 고통이 감추어져 있다. 하지만 그의 입술은 그 어떤 신음이나 절규가 그것을 통해 흘러나오더라도 아름다운 음악처럼 들리게 만들어져 있다. 그는 팔라리스의 황소 속에서 약한 불로 서서히 고통을 당하는 불행한 자와 같다. 그의 비명은 폭군의 귀에 도달하여 그를 무섭게 하지 못한다. 폭군에게 그것은 달콤한 음악처럼 들릴 뿐이다. 사람들은 그의 주위에 몰려들어 말한다. 다시 노래를 불러라. 그게 비명 소리라면 듣기에 끔찍하겠지만, 그 음악, 그 음악은 정말 사랑스럽다.”

이처럼 시인은 세계를 괴로워하고, 그의 예술은 이 고통의 표현이자 거기서 벗어나려는 시도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향유의 대상이 된다는 것, 고통 때문에 지르는 비명이 미적 사건으로 감지된다는 것. 이런 예술가에 대해서 군중들은 오해한다. 마치 선지자를 오해한 것처럼.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 낭만주의적 예술관은 삶 자체에 미적 형식을 주려는 시도이며, 도덕과 법이 지우는 의무를 놀이를 하듯 무효화하려는 시도이다. 그의 실험은 심리학적, 윤리적, 종교적 혹은 정치적 관점이 아니라 미적인 관점에서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묻는다.

쇼펜하우어는(1788~1860), “모든 관계의 밖에서 그것과 독립하여 존재하는, 유일하고 본래적으로 세계의 본질을 이루는 것을 고찰하는 것, 그 어떤 변화에도 종속하지 않고, 따라서 그 어떤 시대에도 동일한 진리성을 갖고 인식되는 것을 고찰하는 것, 한 마디로 의지의 직접적이며 적합한 객관성을 이루는 이념을 고찰하는 것, 그것은 어떤 종류의 인식인가? - 그것은 예술이다. 천재의 작품이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개념적 인식에 대해 예술이 갖는 우월성은, 단지 예술을 통해 플라톤적 의미에서 이념에 도달하는 게 가능하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인식이 삶의 뿌리로까지 연결되는 어떤 ‘태도’를 필요로 한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에게 인식은 그저 지적인 작업이 아니라 인간의 전 존재에 관련된 작업이기 때문이다. “철학만이 아니라 예술도 본질적으로 현존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작업이다.”([세계]) 인간의 현존재의 문제는 모두 ‘의지’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의지로서의 인간은 우리 현존재의 물리적 조건, 즉 공간, 시간, 인과성의 사슬에 묶여 있다.

여기서 삶의 뿌리와 연결되는 ‘태도’의 미학. 여기서 쇼펜하우어의 미학은 더 이상 인식론적 미학이 아니라 벌써 존재미학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시간, 공간, 인과성에 사로잡힌 우리의 육체는 자기의 필요, 욕망, 번뇌로 인해 진정한 물 자체를 인식하는 것을 방해한다. 이것의 인식은 오직 시공과 인과성의 피안에서만 가능하다. 때문에 일상적 욕망과 필요에 사로잡혀 끝없이 변하는 육체의 필요를 충족시키며 살아가는 자는 불변적인 이념의 진리에 전념할 수가 없다. 때문에 어떤 “태도”, 즉 의지와 거기에 종속된 육체의 부정이 진정한 인식의 전제조건을 이루고, 이 위대한 ‘부정’의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미’다.

니체에 따르면 철학자들의 진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 역시 ‘시’이며 ‘가상’에 불과하다. “진리란 그것이 환상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망각한 환상이다. 한번 사용되어 감각적으로 힘을 잃어버린 은유이다. 새겨진 문양이 지워진 동작, 그리하여 사람들이 더 이상 동전으로 바라보지 않는 금속 조각이다.” 이렇게 니체는 예술의 이름으로 철학을 공격한다. “두 개의 절대적으로 상이한 영역들, 즉 주관과 객관 사이에는 그 어떤 인과관계도, 그 어떤 올바름도, 그 어떤 표현도 없다. 기껏해야 미적 태도가 있을 뿐이다.”

피들러(1841~1895)는 말하기를, “예술가는 다른 세계에 산다. 그는 비루한 세계에서 일탈한다. 개념의 세계를 곧바로 세계로 등치시키는 것. 거기에 오류가 있다.” 이렇게 사유와 구별되는 인식으로서 예술의 본질은 ‘직관능력’에 있다. “예술적 재능의 본질은 직관적 파악 능력을 가지고, 혹은 그런 능력을 위하여 태어난다는 점에 있다. 예술가에게 직관은 그밖에 있는 어떤 외적 목적에 복무하지 않는, 그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자유로운 직관이다.”

벤야민(1892~1940)은 “아무리 가까이 있어도 멀리 있는 것처럼 현상하는 것”을 ‘아우라’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것은 예술작품의 근원적 기능, 즉 종교적, 제의적 기능이 아직까지 작품에 잔존한 흔적으로 본다. 벤야민에 따르면 현실과의 모든 관련을 끊고 오직 자신만을 위해 아우라를 보존한 ‘예술을 위한 예술’ 역시 일종의 신학, 즉 “예술의 신학” 내지 “부정의 신학”이라고 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신은 세상을 '말'로 창조했기에 모든 사물은 언어적 본질을 갖고 있다. 즉 목소리 없는 사물이 몸 안에 말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신이 사물에 담아놓은 이 언어적 본질을 인간은 음성으로 '명명'한다. 바로 이것이 아담의 언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인간은 사물이 가진 이 언어적 본질을 무시하고 제 필요에 따라 거기에 제멋대로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언어는 한갓 수단으로, 자의적 기호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이 관행의 철학적 표현이 근대의 도구주의적 언어관이다. 여기서 언어는 더 이상 사물의 고유한 가치를 반영하지 못한다. 이 아담의 언어를 되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도구주의적 언어관이 지배하는 오늘날에도 아직 아담의 언어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바로 예술이다. 조각, 회화와 같은 예술언어에는 사물을 닮으려는 미메시스(모방) 기능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의 언어는 음성이 결여된 물질의 형태로 존재하기에 아담의 언어에는 못 미친다. 하지만 미메시스의 기능이 있기에 예술은 언어가 다른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이해가 되는 만국공용어의 역할을 할 수가 있다고 본다.

아도르노(1903~1969)의 미학은 ‘작품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비평의 과제는 더 이상 작품 속에 드러난 작가의 주관적 의도를 추적하는 것이 아니다. 작품 속에 재현된 세계와 작품 밖의 세계의 일치 여부를 가리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작품 속에 객관적으로 들어 있는 것, 작품이 객관적으로 수행하는 것을 포착하여 언어로 옮기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진리는 그 속에 들어 있는 미적 주체에 관한 진리도, 그가 재현으로 반영하는 세계의 겉모습에 관한 진리도 아니다. 거기서 몸을 빼야 한다. 미적 주체의 매개를 통해 작품 안으로 들어온 현실의 객관적 과정에 관한 진리이다. 주체는 이런 추방상태를 추구하면서 경험계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다. 이것이 ‘몸 빼기’를 견뎌야 하는데 이 인내가 곧 예술 작품에서 얻을 수 있는 행복감이다.

재현이 사라지고, 대상성이 무너지고, 서사적 연관이 파괴된 현대예술에서 작품의 구조는 수수께끼로 다가온다. 현대예술의 작품 앞에 사면 그 작품의 배후에 우리가 밝혀내야 할 그 무언가가 감추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하여 우리는 끝없이 해석을 시도하여, 그 수수께끼에 답을 내나, 그 답을 내는 순간 작품의 진리는 우리 앞에서 또 다시 모습을 감추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끝없는 숨바꼭질의 세계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작품의 진리에 관한 최종적 해석을 거부하고 무한한 해석의 놀이를 풀어놓는 현대예술의 구조를 아도르노는 “수수께끼”의 은유로 표현한다.

예술은 진리를 갖고 있으나 그 진리를 개념적으로 표현할 능력은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예술은 해석은 요구한다.” 현대예술 작품은 더 이상 우리에게 직관적으로 진리를 매개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것의 진리는 본질적으로 해석을 그 상관자로 요구한다. 하지만 “관찰과 사유로 남김없이 밝혀지는 예술작품은 작품이 아니다.” 예술작품에는 아무리 해석을 해도 해석이 안 되고 남는 부분이 있으며, 예술에 수수께끼의 성격을 부여하는 이 부분이 작품의 전체에 비로소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이다.

예술작품에 대한 해석, 그것에 대한 이해는 예술작품의 열린 성격, 수수께끼적 성격 때문에 본질적으로 운동, 과정, 생성의 성격을 띤다. 그리하여 아도르노는 “예술작품이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라는 것은 기술적으로 파악 가능하다”고 말한다.

들뢰즈(1925-1995)의 예술론은 차이들의 반복으로 설명될 수 있다. 시인은 언어적 차이에 의한 반복으로 액센트 있는 리듬을 창작해낸다. 단일한 의미로 차용된 한 단어가 주변의 가까운 단어들에게 어떤 인력(引力)을 행사하고 엄청난 중력을 전달하는 기법을 사용한다.

시인은 창조적 역량을 발휘하여 모든 질서와 모든 재현을 전복하는 가운데 본연의 차이를 긍정하게 된다. 영원회귀하는 영구 혁명 상태에 있는 차이를 긍정하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서 정치가는 그렇게 못한다. 정치가는 ‘차이 나는’ 것을 부정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역사 안에서 확립된 질서를 보존하고 확장하기 위해서, 혹은 이미 세상에서 자신의 재현 형식을 부추기도 있는 역사적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서이다.

시인이 시도하게 되는 반복은 행정가들의 단순한 되풀이 행정이 아니다. 세상을 구제하기 위한 반복이다. 이로서 반복에는 두 가지 형식이 있다.

첫 번째 경우(행정가나 정치가의 경우) 차이는 단지 개념에 외부적인 것으로 설정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똑같은 개념 아래 재현된 대상들 사이의 차이로서, 무차별성을 띤 시간과 공간으로 추락한다. 예를 들면 성경에 대한 문자적 적용 같은 것이다.

두 번째 경우(시인의 경우) 차이는 이념의 내부에 있다, 이 차이는 이념에 상승하는 역동적인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는 어떤 순수한 운동으로 펼쳐진다. 예를 들면, 성경에 대한 영적 해석 같은 것이다.

첫 번째 반복은 같음의 반복이고 개념이나 재현의 동일성에 의해 설명된다. 두 번째 반복은 자신 안에 차이를 포괄하며 스스로 이념의 타자성 안에, 어떤 ‘간접적 현시’의 다질성 안에 포괄된다.

첫 번째 반복은 개념의 결핍에서 성립하는 부정적 반복이며, 두 번째 반복은 이념의 과잉에서 성립하는 긍정적 반복이다. 첫 번째 반복은 가언적이고, 두 번째 반복은 정언적이고. 첫 번째 반복은 정태적이고, 두 번째 반복은 동태적이다. 첫 번째 반복은 결과 안에서 일어나고, 두 번째 반복은 원인 안에서 일어난다.

첫 번째 반복은 외연 안에서 일어나지만, 두 번째 반복은 강도(强度)적이다. 첫 번째 반복은 평범하고, 두 번째 반복은 특이하고 독특하다. 첫 번째 반복은 수평적이며, 두 번째 반복은 수직적이다. 첫 번째 반복은 개봉되고 설명되지만, 두 번째 반복은 봉인되어 있고 해석되어야 한다.

첫 번째 반복은 공전(公轉)의 성격을 띠고 있고, 두 번째 반복은 진화의 성격을 띠고 있다. 첫 번째 반복이 동등성, 통약 가능성(상호 약분할 요소가 들어있는 것), 대칭성을 띠고 있다면, 두 번째 반복은 비동등성, 약 불ㅇ가능성, 비대칭성 위에 기초하고 있다. 첫 번째 반복은 물질적이며, 두 번째 반복은 자연과 대지 안에서조차 정신적이다. 첫 번째 반복은 생기가 없으나 두 번째 반복은 우리의 죽음과 삶들, 우리의 속박과 해방들, 악마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첫 번째 반복은 ‘헐 벗은’ 반복이지만, 두 번째 반복은 옷 입은 반복으로서, 스스로 복장을 하면서, 가면을 쓰면서, 스스로 위장하면서 자신을 형성해간다. 첫 번째 반복은 정확성을 특징으로 하지만, 두 번째 반복은 기준은 진정(眞正)성에 있다.

첫 번째 반복은 주체를 대변하지만, 두 번째 반복은 그 주체의 심장이자 내부요 중심부며 또한 그것의 깊이다. 첫 번째 반복은 단지 겉봉투, 추상적 결과일 뿐이며, 두 번째 반복은 비밀이다. 예술은 이런 방식으로 진리를 말한다.

2. 신앙과 예술

신앙이란 특이한 경험이다. 보편화시킬 수 있는 방도가 없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우리 인간이 반복시킬 수 없다. 그냥 생겨버린 사건, 그래서 그대로 접수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하나님은 이 ‘신앙’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뜻을 나타내신다. 이 신앙이 만들어서 세상에 등장한 자가 시편에서는 ‘나’가 된다. 그리고 인자(人子)라고 불리운다(8:4)

그가 시를 읊는다. 시란 그 당시의 의사소통의 방편이었다. 여기에 해석이 필요하고 오고가는 의미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특별히 예술적 양식을 사용했기에 더 깊은 의미를 담거나 발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술적이지 않더라도 중요한 바는 그 시가 어떤 신앙 사건을 말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이는 곧 예술적 양식 자체가 신앙사건이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등장한다.

하지만 예술론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이 온전히 납득해서 인간이 신의 계시를 그대로 재현한다든지 소유용으로 전환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로서 예술 양식의 값어치는 있다고 보여진다. 확실하게 중요한 요점은, 예술과 비예술로 나눈는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저희’로 나누어지는데 의미가 있다.

이 ‘나’의 특수한 경험을 비난하고 조롱하는 세력들이 이 ‘나’라는 분의 주위에 몰려드는데 그것이 ‘저희’, 혹은 ‘저’가 된다. 시편의 시는 이 두 사이 세력 사이에 끼인 실존들의 서로 다른 세상 사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Ⅱ 본론

1. ‘나’라는 인간은 어떤 인간인가?

‘나’의 신은 고유한 내용이 있고 그 내용은 ‘나’를 고난으로 몰아세운다. 즉 ‘저희’에서 철저하게 당하도록 하게 하신다. 그 원인은 ‘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라는 인간을 따로 만들어내시기 때문입니다. 즉 ‘나’라는 인생이 따로 있어 그 인생과 더불어 하나님이 동행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할 인생’을 ‘나’라는 이름의 사람을 없는데서 새로 생겨나게 하시는 것이다.

이로서 ‘나’와 ‘저희’ 사이가 단지 구분되는 정도가 아니라 다툼이 일어난다. 그 다툼은 상이한 서로의 신에 대한 고백의 다툼으로 번진다. ‘저희’에 해당되는 자는 본인들이 본인을 인도하는 인생이다. 본인들이 생각한 신을 그때그때마다 호출해서 동행을 요청하게 된다. 그들의 신이란 고유 내용은 없다. 단지 ‘저희’에 해당되는 자들이 담아두는 소망들이 그 신의 실체를 채우는 내용물이 된다.

2. 시편에서 ‘나’에 해당되는 구절에 어떤 경우에 나오는가?

(1)적과 대결할 때 나온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3:1)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을 인하여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5:8)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하셨나이다”(7:6)

“ 내 원수들이 물러갈 때에 주의 앞에서 넘어져 망함이니이다”(9:3)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13:4)

“나를 압제하는 악인과 나를 에워싼 극한 원수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17:9)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저희는 나보다 힘센 연고로다”(18:17)

“주께서 또 내 원수들로 등을 내게로 향하게 하시고 나로 나를 미워하는 자를 끊어버리게 하셨나이다”(18:40)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렀으며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고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22:12-13)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23:5)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25:2)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27:3)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27:6)

“내 원수로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27:11)

“ 내 대적으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30:1)

“나는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31:8)

“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사오니 내 원수와 핍박하는 자의 손에서 나를 건지소서”(31:15)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35:1)

“나의 원수된 자로 나를 인하여 기뻐하지 못하게 하시며”(35:19)

“내 원수가 활발하고 강하고 무리하게 나를 미워하는 자가 무수하오며 내가 선을 좇는 연고로 나를 대적하나이다”(38:19-20)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시 41:2)

“나의 원수가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저가 어느 때나 죽고 그 이름이 언제나 멸망할꼬 하며”41:5)

“내 떡을 먹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41:9)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42:9/43:2)

“나를 비방하고 후욕하는 소리를 인함이요 나의 원수와 보수자의 연고니이다”( 4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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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9 자유게시판 칼 바르트와의 대화 (KARL BARTH"S TALK TABLE) 7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07-11-19
448 자유게시판 영역표시 - 최고관리자 07-11-19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