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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05대구강의 3 - 지옥의 하나님 2자유게시판예레미야

05대구강의 3 - 지옥의 하나님 2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1)

지옥의 하나님 2

05,11,28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 언약이 없으면 모두가 다 지옥 !!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책 15페이지부터 살펴보겠는데, 이 책의 제목이 '지옥의 하나님' 인데, 지옥의 하나님이라는 뜻은,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지옥을 만드는데, 왜 그동안 2000년의 교회사에서는 성경을 통해서 이런 하나님을 찾아내지 못했느냐는 것이다. 아니 찾아내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러니 사실상 사람들이 반칙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하니, 즉 예수님은 지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러나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는가? 구약 때부터 이미 하나님의 언약이 없는 것은 다 지옥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예레미야에 보면 나오는데, "언약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퍼부어 주소서" 라는 것이다. 교회에 가도 그런 구절을 찾지도 읽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듣기에 좋은 것들만 골라서 말하지 말이다. 여러분도 설마 과연 그런 구절이 있을까 하고 의구심을 가지지 싶은데, 예레미야 10장 25절을 보자.

(렘 10:25) 주를 알지 못하는 열방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아니하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 거처를 황폐케 하였나이다

여기에 보면 '주의 이름'이 나오는데, 얼마나 말이 거친가? 분노를 퍼붓고, 삼켜 멸하고, 황폐케 하고 말이다. 또 예레미야 11장 3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

(렘 11:3) 그들에게 이르기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언약의 말을 좇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니라

분명히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라고 하면서, 언약의 말을 좇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의 25절에 나오는,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는 자들이 누구인고 하니, 이방인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주여!' 라고 기도를 할 줄 모른다는 게 아니라, 여호와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즉 언약을 말이다.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을 모르는, 그 내막을 모르는, 약속을 모르는 말이다.

언제 들어봐야 관심을 가지든지 말든지 할 것인데 사실 그럴 기회도 없었다는 것이다. 만약 이슬람 쪽에서 하는 말이, "알라신에게 경배를 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라고 하면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겠는가? "알라신이지 고무신인지 말아야 뭘 하든지 말든지 하지 우리보고 어쩌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 것도 모르고 가만히 있다가 당하는 꼴이라는 말이다.

◈ 왜 가만히 있다가 당하는가?

우리는 이렇게 "가만히 있다가 당한다" 라는 것을 수긍해야만 하는데, 이러한 우리의 처지를 성경을 통해서, 다른 말로 하면 이스라엘이 받은 계시를 통해서, 왜 이방인들은 가만히 있는데 당하는지를,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인류가 한통속임을 보여주는데, 처음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들 때는 조상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런데 그 조상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만든 이 세상이 다 범죄로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창세기 6장을 보자.

(창 6: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에 보면,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라고 되어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놓고는 그 뒤에 보면 다시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약을 세우게 된다는 말이다.

(창 6:18) 그러나 너와는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너는 네 아들들과 네 아내와 네 자부들과 함께 그 방주로 들어가고

이렇게 하늘에서 뚜래박이 내려오게 되면, 이 '언약'은 뚜래박에 담기게 해주는 기구라는 것이다. 그래서 언약 안에서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예수 안'에서 구원받고 말이다. 그 나머지는 그냥 가만히 있는데 당한다는 것이다.

◈ 구원은 언약 안에서, 예수 안에서 !!

이러한 현실구조는, 만약에 사람들이 의논해서 종교를 만들고자 했다면 결코 이러한 내용의 구조를 만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인간에게 구원론을 쓰라고 하는데, 가만히 있는데 당하는 그런 구원론을 쓸 인간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이 들어있는 창세기는, 실제로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계시한 모든 것을 다 기록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신명기에 보면 이미 미래의 일들도 다 나온다는 것이다. (후대에 첨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가르쳐준 내용이라는 것이다.) 물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것을 전혀 믿지 않는데, 이렇게 인류의 팔자는 이미 처음부터 다 확정되었다는 것이다. 창조적 관점에서 확정되었다는 말이다.

칼빈주의 구원론에는 '타락전 구원론'과 '타락후 구원론'이 있는데, 그런데 후대 칼빈주의 학자들은 이 둘을 다 수용하면서 말하기를, '타락전 구원론'은 창조의 입장에서, 예정이 아니라 예지의 입장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에 비해 '타락후 구원론'은 구원론의 입장에서는 맞다는 것이다. 사실상 말도 안 되는 소리인데, 이렇게 주장을 한다는 것이다.

◈ 예지(豫智)와 예정(豫定)에 대해서 !!

그러면 예지(豫智)와 예정(豫定)이 어떻게 다른지, 몇 번을 설명했는데 여기서 다시 설명하면, 예지는 어떤 사람이 무슨 짓을 할지 미리 다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쉽게 말해서 도사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할지 모든 것을 미리 다 아신다는 것이다. 가롯유다의 그런 비참한 운명도 미리 알고, 베드로가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하고 하는 것도 다 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예지는 했지만 예정은 하지 않았는데, 처음부터 이미 다 구원되기로, 혹은 멸망되기로 예정하였다는 것은 과거에도 거의 없었고 지금도 거의 없다는 것이다. 교회사를 살펴봐도, 고트샬크나 라트람누스 같은 몇 몇 사람을 제외하면 말이다. 칼빈도 이러한 극단적인 주장을 하지 않았는데, 즉 예지는 그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고 지옥에 가는지를 아는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에 비해서 예정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제 아무리 구원받으려고 해도 "너는 이미 지옥에 가게 되어있어. 내가 다 정해놓았어" 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예정인데, 이게 지옥을 이야기할 때 엄청 중요하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말뚝이 여기에 이렇게 박아놓고 개가 이렇게 있다면, 예지라고 하는 것은 말뚝을 박지 않고 개가 무엇을 먹고 말고 할지를 내가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개집으로 돌아오고 말이다. 물론 여기서 인간은 개이고 내가 하나님이고 말이다. 반면에 예정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개를 말뚝에 박아 묶어 놓고는, 아무리 맛있는 것을 가지고 개를 꼬셔도 내가 박아놓은 말뚝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확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제 그 차이점을 알겠지요? 어느 것이 더 혹독하고 비정한고 하니, 예정이 훨씬 더 차갑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에 이 예정이 맞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지 않고 예지가 맞다고 하면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가 있는데, 즉 "나는 니가 그럴 줄 알았어. 넌 지옥으로 가도 할말이 전혀 없어"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정에 의해서 지옥에 갔다면, 지옥간 그 사람에게는 자기 책임을 지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는 천국에 가고 싶은데 그것을 막은 분이 하나님이니 말이다. 아니 하나님께서 직접 천국을 막아놓고는, "네 이놈, 네 죄를 알렸다" 라고 하면 도대체 말이 되느냐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말이 전혀 앞뒤가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소위 좀 배웠다는, 나름대로 한 철학한다는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도 예정은 결코 믿지 않는데, 제 아무리 불합리하다고 해도 세상에 이런 불합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야말로 삼위일체보다 더 심한 불합리라는 것이다.

중세시대의 안셀무스는 "나는 알기 위해서 믿는다" 라고 했는데,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믿음은 기본이고 믿는 자로서 이성을 어떻게 활용을 해야하느냐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이야기한 최초의 스콜라철학자라는 것이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삼위일체의 신비에 대한 논의가 많았는데, 종교개혁 이후에는 이 논쟁이 '타락전 선택과 타락후 선택'을 이야기하는 예정론 논쟁으로 넘어갔다는 것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 - 섭리론 !!

그러면 중세시대의 예정론은 무엇인가? 여기에 대해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하기를, 하나님은 회장님이고 인간은 공장장인데, 회장님이 공장장에게 자기 영역에 대해서는 모든 것 다 맡기는데, 그렇게 해놓고 나중에 책임을 묻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종의 하청을 주었다는 말이다.

이것을 토마스 아퀴나스의 '섭리론'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해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거스틴이 이야기한 예정론도 만족시키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인간의 자유의지도 나름대로 만족시켰는데, 즉 이렇게 서로 수준을 달리해서, 하나님은 회장님으로 인간을 공장장으로 말이다.

이렇게 되면, 토마스 아퀴나스의 섭리론에 의하면 인간측면에서 보면 무엇이 보장되는고 하니, 인간의 자율성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왜 이렇게 자율성을 보장해주는가 하면, 인간 속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있기 때문인데,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형상을 영혼으로 보았고 말이다.

그러나 칼빈의 경우는 영혼과 하나님의 형상이 다른데, 영혼은 형상을 바라볼 수 있는 기구로 보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거울이나 현미경 같은 것 말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을 반사하는 것을 영혼으로 보았는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고 말이다. 그리고 루터는 이런 논리적인 것을 언급하지 않았고 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에 인간의 영혼이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인간에게 이런 자율성이 없다면 신의 속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 자체가 자율이니 말이다. 그러니 인간 속에 신이 있다면 당연히 인간에게도 자율성이 있어야 하고, 이 자율성을 어떻게 보장하는고 하니, 즉 하청을 주는 식으로 하는데, 인간에 일을 맡기고 그리고 심판은 심판대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인간에게 자율성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장을 두고 개신교 신학자들은 반(反)펠라기우스적이라고 비판을 했는데, (펠라기우스를 변론한(?)) 어거스틴의 주장한 것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사실 둘 다 오십보 백보인데 말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의 문제점은?

그렇다면 이러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문제점이 무엇인가? 토마스 아퀴나스는 지금 타락전 구원론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맡기는가?" 라는 이야기이지, 구원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성경에 나와있는 명확한, 즉 로마서 9장에 있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 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해석을 내놓지 못한다는 것이다.

(롬 9:13)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토마스 아퀴나스가 왜 구원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는고 하니까, 중세시대에 구원은 개인적으로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믿으라고 하는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죄를 사하는 권세(열쇠)를 하나님이 교회에 주었으니 말이다. 그것이 마태복음 16장 19절이라는 것이다.

(마 16:19)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교회에서 베푸는 세례와 성찬식을 받았다고 하면 그때에 구원을 받는 것이지,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믿고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개신교는 직접 성경말씀과 함께 하는 것을 교회라고 보지만 말이다.

◈ 간단한 질문 - 한 명도 교회가 되는가?

어떤 분이 저에게 메일을 보내기를, "목사님, 한 사람도 교회가 될 수 있습니까?" 라는 것이다. 참으로 간단한 질문인데, 그래서 저도 간단하게 대답을 했는데, "교회치고 한 명이 되는 수는 없습니다" 라고 말이다. 왜 그런가? 과거에 이미 예수 믿는 사람이 있었고 또 앞으로도 있을 것이니 말이다. 즉 교회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자체로서 하늘나라의 장로들의 총회가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교회는 한 명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죽었던 아브라함도 교회이니 말이다. 광야교회 말이다.

이렇게 교회는 한 명인 적이 없었는데 왜 이런 질문을 하는고 하니, 소위 주일날 교회에 안 나가고 집에서 혼자 성경말씀보고 기도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하는 것 같은데,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교회라는 것 자체가 "주님에 의해서 부름을 받은 자가 교회이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질문하는 사람은, "내가 주님에 의해 부름을 받고자 하면 교회입니까?" 라는 것인데, 그러나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양쪽은 하늘과 땅 차이라는 말이다.

왜 지금 한국교회에서 지옥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는고 하니, 자기 쪽에서 어떻게 해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자기의 노력을 가상히 여겨서 도와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설마 이런 것을 방해하는 요소인 지옥을 적극적으로 만드는 하나님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지옥을 그렇게 적극적으로 만들어버리면, 자연적으로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나'와 지옥을 적극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나'가 충돌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는가?

예를 들어서, 엄마하고 딸이 집에서 같이 있는데 딸이 하는 말이, "엄마, 오늘 점심은 내가 책임질게. 잡채를 한다" 라고 하면, 엄마가 "그래, 잘해라" 라고 하면 딸이 부담 없이 잡채를 만들 것인데, 그런데 엄마가 그렇게 말을 해놓고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옆에서 열심히 돈까스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단무지를 썰어주지는 못할 망정 말이다. 그러면 무슨 일이 제대로 되겠는가?

흔히 사람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고 디모데전서 2장에서 말씀하던데, 그래서 "하나님, 제가 구원받기 원하지요? 좀 도와주세요" 라고 하면, 하나님은 "그래, 알았다. 내가 보낸 독생자를 믿으면 된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해놓고는 지옥을 적극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게 뭐란 말인가?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차라리 가만히 계시면 방해는 안 될텐데 말이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 한국교회 - 지옥과는 무관한 하나님 !!

그래서 사람들이 말하기를, 종교라는 자체가 인간 쪽에서 출발해서 천국을 따내는데 목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런 건전한(?) 목적에 대해서 든든한 후원자가 되면 되는 것이지, 지옥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쳐들어 와버리면, 실컷 천국에 가려고 노력하다가 하나님이 만든 지옥에 걸려버리면 자기의 가상한 노력이 도대체 뭐가 되느냐는 것이다.

물론 한국교회는 지옥이 있다는 것은 이야기하지만, 그러나 그것도 정치적으로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에게 협박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그러나 정작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지옥을 만든다고 하는 내용은 한국교회에게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거짓말을 하고 있고, 그래서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다.

◈ 이 세상은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 사이의 대결장 !!

창세기 3장 15절에 보면 두 상대가 서로 싸우고 있는데,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말이다. 그리고 여기에 이렇게 인간이 있다면, 이 인간은 무엇을 염원하는가? 이 대목이 오늘 강의의 하이라이트인데, 인간은 천국에 들어가고자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어떤 인간이라도 영생불사(永生不死)하고 싶다는 것이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그러나 문제는 정작 하나님은 인간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오로지 언약 안에서만 구원하는데, 즉 예수 안에서만 말이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작전을 인간세계에 펼쳐버리면, 이 두 상대는 그야말로 마치 카레이싱 경기에서 지지 않으려고 질주하는 두 대의 자동차와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여자의 후손이 공격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가 공격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뱀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뱀의 후손에게 공격을 하려면, 반드시 이 지옥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지옥을 말이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지옥의 특징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서 이 지옥은 악마를 집어넣기 위해서 만든 곳이라고 나와있는데, 여기에다 어린양을 믿지 않는 사람들, 즉 생명책에 자기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이 참여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악마가 당하는 저주에 동참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지금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그래서 지옥에는 악마와 뱀의 후손에 속한 자들이 있게 되는데, 물론 뱀의 후손이 뱀이고 악마인데,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이고 말이다. 이렇게 되면 표현이 이상해지는데, 여자의 후손이 예수님이니 예수님의 후손이 예수님이 되고, 뱀의 후손이 뱀이 되니 말이다. 왜 이렇게 표현이 되는고 하니, 그 당시 '뱀'이나 '여자'와 같은 것은 에덴동산에서의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기에 말이다. 그렇게 해서 각자의 갈 길을 간다는 것이다.

◈ 지옥을 만드는데 적극적이신 하나님 !!

처음부터 이것을 실현시키는 것이 천국이라면, 반드시 지옥이라는 것도 열심히 만들어야 하는데, 누가 말인가? 하나님이 직접 말이다. 왜 그런가? 뱀의 후손을 지옥에 집어넣어야 하니 말이다. 그런데 철없는 인간들은 자기가 천국에 가고 싶은 여망을 하나님에게 후원해달라고 하는데, 뱀과 여자의 후손이 벌이는 싸움은 안중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옥에 가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하시는가?" 라는, 거기에는 전혀 관심도 없이 삐딱하게 앉아서 제발 자기를 구원해달라고 소리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 밖에 모른다는 말이다. 즉 자기 구원에만 미쳐있다는 것이다.

◈ 주인공은 따로 계신다 !!

성경을 보다가도 창세기 3장 15절의 말씀이 나오면, "아하, 성경은 내 중심이 아니구나. 주인공은 여기 따로 있네" 라고 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면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그러면 나는 이 둘 중에서 어느 편이지?" 라는 것만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 인간은 "주여, 제가 구원을 받는데 도우소서. 창세기 3장 15절도 외우라면 외우겠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한국교회가 뱀의 후손 편에 서서 열심히 지옥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즉 그런 하나님의 원수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책 15페이지를 보자.

** 이 세상이 지옥인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이 세상이 지옥이 아니면, 그러면 천국인가?

이 질문이 재미있지 않는가? 이 세상은 아무리 보아도 천국이 아닌데, 그렇다면 지옥이라는 것이다. 천국은 완벽해야 천국이라는 말이다. 완벽하지 않는 것은 다 지옥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은 당연히 지옥이라는 것이다. 저주가 퍼부어지고 있다는 말이다.

천국은 완벽해야 하는데, 예수 안은 정죄함이 없는 완벽하다는 것이다. 착한 것도 조금 있고 나쁜 것도 조금 있는 상태가 아니라, 더욱이 착한 것이 많다고 천국을 쳐달라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이런 천국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완벽해야 천국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은 어떤 곳인가? 완벽한 곳인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인이 하나도 없는 곳인데, 그러니 이 세상이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뭐라고 하는가?

(벧후 3:6) 이로 말미암아 그 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벧후 3:7)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경건치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이 세상이 이전에는 물로서 멸망을 당했지만, 그러나 이제는 불로 멸망을 당하려고 예비가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아이쿠, 무서워라. 얼른 피해야 되겠네" 라고 할 것이 아니라, "왜 이렇게 세상이 불로서 멸망을 당해야 하는가?" 라는, 그런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창세기 3장 15절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가?

인간은 이렇게 항상 자기와 또한 자기에 관련된 것에 관심을 집중하게 되는데,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도대체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가?" 라는 것에다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자기와 상관을 짓지 말고 말이다.

계속해서 책 15페이지를 보자.

** 인간에게는 천국을 골라잡을 권리나 안목이 없다. 처음부터 그냥 살던 그대로 지옥에서 살다가 지옥 안으로 사라질 뿐이다. 일찌감치 지옥의 권세에 점령당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옥의 참혹함 못지 않으며, 인간이 절대로 자기 힘으로는 빠져 나오지 못한다는 상황도 아울러 지옥답다.

무슨 뜻인가? 지옥이 진짜 지옥다운 것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빠져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점은 천국도 마찬가지이지만 말이다. 천국도 역시 빠져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의 힘으로 결코 빠져 나오지 못한다는, 그 점이 진짜로 무섭다는 말이다. 그러니 있을 때 잘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 지옥만 생각하면 왜 그리 신나는지(?) 말이다. 이게 악취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지옥답다 - 내 힘으로는 결코 못 나온다 !!

중세시대에 이런 이야기를 해서 욕을 엄청나게 들은 양반이 있는데, (누구?) 아무튼 지옥에 한번 들어갔다 하면 결코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시원한지, 그야말로 열대야로 시달리는 한 여름 밤의 청량음료와도 같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 얼마나 화끈하신 하나님인지 말이다. 하나님은 누구보다도 요즘말로 '쿨'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보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빽(?)으로도 부자를 지옥에서 빼오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누구인가? 복의 근원으로서, 축복과 저주를 결정하는 사람인데 말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고, 저주하는 자는 저주한다" 라고 하지 않았는가?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창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그러니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진실을 알게 된 것을 다행스럽고 속시원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제 흙에 자빠져도 괜찮은데, 모든 것을 다 알았으니 말이다. 다시 말해서, 지옥을 모르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고, 지옥을 알면 전부를 안다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 같은데, 아무튼 지옥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데, 그래서 이 책이 이야기하는 바가, 지금까지의 책들은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는지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 책은 은밀하게 감추어진 하나님의 창조비밀인, 즉 '지옥 만들기에 열심인 하나님'에 대한 설계도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책 15페이지를 보자.

** 인간은 실수로 지옥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옥 같은 세상 외에 달리 살 곳이 없었다. 따라서 지옥은 인간에게 필연적이고 운명적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인간은 지옥 외에 달리 선택할 곳이 없었기에, 그냥 가만히 있으면 당한다는 것이다. 황우석 교수가 제 아무리 배아줄기세포를 만들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선택의 여지가 있을지 몰라도, 이것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책 16페이지를 보자.

** 지옥이 참으로 무섭다는 것은, 달라지지 않는 운명을 붙들고 그 운명이 달라지도록 몸부림치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는 점에 있다. 안 되면서도 될 것이라고 믿고 매달리는 시도의 연속이 결국 지옥을 더욱 뜨겁게 달굴 뿐이다.

이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저를 엄청나게 욕하지 싶은데, 저자가 아주 지독한 사다이즘적인 면이 있다고, 무슨 정신질환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아무튼 인간의 운명은 점점 더 뜨거워지는 지옥에서의 춘천 닭갈비 신세이고, 중국집 탕수육 신세라는 것이다. 물론 주님은 중국집 주방장이고 말이다. 그래서 마가복음에 보면 지옥에는 구더기도 죽지 않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막 9:48)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이렇게 천국에 왔으니 웃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지, 그렇지 않다면 얼마나 살 떨리는 이야기인가? 천국에 온 사람은 무슨 소리를 해도 지옥으로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배짱 두둑하게 이러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하고 말이다.

사도바울이 얼마나 자신이 있으면, "내 민족이 구원받을 수만 있다면, 나는 스스럼없이 지옥 가겠다" 라고 했겠는가? 이게 무슨 의미인고 하니, 자기 민족이 다 구원받지 않는 것이 확실하니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것도 확실하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알려면 이렇게 사도바울처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책 16페이지를 보자.

** 본 글은 지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인간들의 종교적 아이디어와 실천성에 대하여 ...

이 부분은 출판사 사장님이 나름대로 책 첫머리에 뽑아놓은 것인데,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아무튼 여기에 대해서는 시비를 걸지 않기로 사장님과 약속을 했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이제 책 17페이지를 보자.

** 2. 교회와 세상의 대립성 - [ 차단 ]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친히 세워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뿐이다. 그리고 이 몸은 이 세상이 지옥임을, 그리고 거기서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주기 위해 등장한다.

여기에 '차단'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 차단은 바로 창세기 3장 15절 때문에 그러한데, 그런데 이러한 차단은 계약된 것을 차단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차단되어 있는 것을 차단되게 한다는 것이다. 왜 차단되게 하는가? 사람들은 처음부터 생각하기를, 우리 중에서 누가 천국에 가고 지옥에 갈지는 유보되었다는 것이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 왜 처음부터 차단인가?

사람들이 이렇게 나오니까, 선지자들이나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웃기고 있네. 내가 12 제자 중에서 하나는 마귀를 선택했다. 너희들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이미 창세 전에 천국에 갈 자들과 지옥에 갈 자들은 이미 결정되었다" 라는 것이다. 즉 "차단이 되었다" 라는 것인데, 이렇게 차단됨을 차단됨으로 한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 세상은 차단이 아니라 결합 !!

여기서 조금 어려워지는데, 인간세상은 이 차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직 차단이 되지 않았는데, "니나 내나 똑같다" 라는 것이다. 즉 결합되어있다는 것이다. 물론 인간 세상에서 그 중에서 어떤 사람은 천국에 가고 어떤 사람은 지옥에 가는데, 지금 현재는 자기 행동여하에 결정될 문제인데, 아무튼 그 어떤 인간이라도 똑같다는 것이다. 결합되어있고, 융합되어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18세기 이후에 종교, 즉 로마 카톨릭의 교황과 분리된 근대주의인데, 1789년 프랑스 독립이후에 "정치는 정치이고 종교는 종교이다" 라는 것이다. 정치적인 입장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런 동일함에서 나온 것이 바로 민주주의이고, 지금 220개국 전세계 모든 나라가 다 민주주의 국가인데, 북한이든 아프리카이든 사회주의 국가라도 모두가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이다. 심지어 왕이 있는 나라에서도 말이다.

◈ 민주주의 - 결합됨의 집합체 !!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어떤 차등이 없다는 것이다. 유명한 몽테스키외에 의해서 삼권분립이 나오고 말이다. 여기서부터 민주주의의 구체적인 형태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세상은 결합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에게는 이렇게 결합된 것이 아니라 차단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즉 차단된 채로 놓여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님이 자기 백성을 골라서 갈 때 어떻게 고르는고 하니, 인간들이 자기 스스로 "저는 주님의 종이고 천국백성입니다" 라고 하는 방식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어렵다는 것이다.

구약의 엘리야의 경우에, "주님이여 다른 사람들은 다 배반하고 저만 남았습니다. 저라도 천국에 가겠습니다" 라는 식으로 구원되고자 하는 것을 주님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인정하지 않는고 하니, 구원될 자와 그렇지 않는 자를 모두 다 죽은 자라는 것이다. 죽은 자의 특징이 무엇인가?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살아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에스겔 37장에 무슨 장면이 나오는가? 바싹 마른 해골에다가 살점이 붙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이지, 해골이 스스로 돌아다니면서 뼈를 맞추고 살점을 자기 뼈다귀에 붙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겔 37:5)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겔 37:6)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
(겔 37:7) 이에 내가 명을 좇아 대언하니 대언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서 뼈들이 서로 연락하더라
(겔 37:8) 내가 또 보니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이나 그 속에 생기는 없더라

◈ 차단이 차단됨으로 드러나는 방식은? - 오직 '주의 이름'으로 !!

그 다음에 어려운 점이 무엇인고 하니, 죽은 데서 살리고 없는 데서 있게 하는, 이 주님의 방식 이외에는 차단이 차단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은 어떻게 하는가? '주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의 이름으로 어떻게 하는가?

주의 이름이 나타나면, 모든 인간의 이름을 저주하고 그것을 거부하게 하는 이들이 발생하면, 그것이 바로 주의 이름이 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믿는 자들이, 바로 죽은 데서 살리고 없는 데서 있게 하는 방식으로 해서, 그렇게 해서 믿게 된다는 것이다. (즉 기적이라는 것이다.)

어제께 교회사를 공부하면서 언약신학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이 누구라고 했는고 하니, '코케이우스' 라고 했는데, 이 양반은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언약신학을 주장한 사람인데, 이것이 나중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보면 언약신학이 들어있게 되는데, 그런데 문제는 이 언약사상과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이 다르다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언약사상은, 언약을 만들어내어서 이것을 지켜야 언약관계가 유지된다고 보았는데, 무슨 뜻인고 하니, 천국 갈 사람과 지옥 갈 사람이 이렇게 있다면,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언약을 믿을 때, 즉 그 언약을 스스로의 행위로 실현시킬 때 비로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엉터리라는 말이다.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언약으로 제시한 것이 3가지가 있는데, 먼저 하나는 안식일인데, 이것을 주일로 고쳤는데, 둘째는 세례와 성만찬이고, 셋째가 교리인데, 칼빈은 이 3가지를 교회의 표징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처음 안식일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이라고 해서, 그것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 구원은 약속 자체가 믿게 함으로서 !!

그러니 도대체 이게 무슨 복음이냐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이전에 언약을 뭐라고 했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믿게 해서 믿는 것이지, 즉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지, 우리가 약속을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서, 여기에 '솔의 눈'이라는 음료수가 놓여있는데, 이것을 제가 주어서 김 집사님이 마셨다고 한다면, 김 집사님은 뭐라고 해야 하는가? 김 집사님은 "예, 솔의 눈을 목사님이 주어서 마셨습니다" 라고 해야지, 그렇지 않고 "예, 제가 솔의 눈을 마셨기 때문에 마셨습니다" 라고 한다면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약속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지, 우리가 약속을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약속이 우리를 죽은 데서 살리고 없는 데서 있게 하는 방식으로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약속의 실현자가 칼빈주의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의하면 인간인데, 그러나 성경에 의하면 약속의 실현자가 인간이 아니라 '주의 이름' 이라는 것이다.

◈ 주의 이름 - 인간의 이름을 까부수면서 등장 !!

어떤 사람은 여기까지는 동의를 하는데, 그런데 그 다음에 꼭 무엇을 넣는고 하니까, 즉 이렇게 주의 이름이 나타나면 자기 이름을 거부하게 되는데, 이것을 또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꾸만 자기 이름을 집어넣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기를, "지금 네가 마귀에게 잡히는 것을 내가 기도해서 건졌다" 라고 하는데, "베드로야 기도해라" 라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이것은 구원받은 베드로조차도 베드로가 하는 모든 일은 결단코 구원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반드시 그 현장에서 드러나게 하신다는 것이다.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 3장에 나오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가다가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고쳤는데, 이것을 사람들이 개인의 능력으로 한 것처럼 여기니 베드로가 하는 말이, 이것은 주의 이름이 고친 것이고 자기들은 목격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주의 이름이 나타난 현장에는 자기 이름을 반드시 부인하게 되는데, 즉 그렇게 부인하는 일이 수반되어 일어나는 것이다.

(행 3: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행 3: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행 3: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 가려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행 3: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행 3: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행 3: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행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행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제가 광주에서 강의하면서 이런 예를 들었는데, "제가 목사라고 해서 설교를 하기는 하는데, 인간적으로 교인들에게 참 미안한 게 많습니다. 교인들은 일단 그래도 교회에 나올 때는 잘먹고 잘살겠다는 마음으로 오는데, 사업도 잘되고 가정도 화목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목사는 말만 잔뜩 해제끼니 얼마나 미안하냐는 것입니다. 말만 해놓고 자기 할 일은 다 한 것처럼 하니 말입니다" 라고 말이다.

광주강의를 그대로 리바이벌 해보면, "여러분, 고린도전서 15장 2절을 찾아봅시다. (지금 여러분은 안 찾으시는데) 거기에 보면, 사도바울이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았고, 또 자기의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습니다. 사람들이 돈을 몇 푼 더 벌도록 해주는 것이 사도바울의 할 일이 아니라, 자기가 전한 복음을 믿으면 구원을 얻습니다. 그렇게 해야 목사의 사명이 아닙니까?" 라고 말이다.

(고전 15: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고전 15: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그리고 부천에 있는 장로님 댁에 모여서 강의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정말 돈이 많이 있다면, 돈을 봉투에 두둑이 천 만원씩 넣어서 여러분에게 나누어주면서 교회에 나오지 말도록 하고 싶은데, 물론 돈이 떨어지면 또 나오겠지만, 그러니 돈을 가지고 교회를 모독하지 마세요. 교회는 말씀자체의 위력으로,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창세기 3장 15절의 뱀과 여자의 후손이 벌리는 전쟁의 여파에 의해서, 죽은 자도 그 전쟁의 부산물로 살리고 없는데서 있게 하는, 그런 주께서 친히 벌리시는 '붙이시매 전쟁'에 의해서 생겼던 부산물로 하나 둘 씩 죽은 자리에서 건져내어서, 그렇게 건져내어진 자리에서 자기 이름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따르는 모임이 바로 교회입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바쁘다는 것을 핑계로 해서 복음 듣기를 게을리 하면 정말 곤란하다는 것이다. 가을에 산에 단풍이 든다고 해서 우르르 가버리고 말이다. 물론 저도 그런 마음이 들 때도 있는데, 그러나 문제는 주님은 우리를 한번 정도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를 죽이시고 또 살리신다는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말이다.

◈ 무엇이 차단되었는가? -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 !!

다시 정리하자면, 주의 이름이 하시는 일에는 반드시 자기 이름이 부인되는데, 그렇다면 이렇게 주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것이 영생이라면, 이 영생이 있는 곳에는 자기 이름의 부인(否認)이 항상 지속적으로 반복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님의 산상설교에 의하면 심령이 가난해진다는 것이다. "나의 나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는 것이다. 작년에 한번 한 것으로 땜질을 하는 것이 아니라, 되풀이되고 또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씀을 통해서 되는데, 그것이 바로 '차단' 이라는 것이다. 차단은 이런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그것을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18페이지이다.

** '있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분'으로 접근해 들어가는 모든 통로는 차단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차단' 다음에는 '버림' 인데, 여기서 책 18페이지를 보자.

** 2. 교회와 세상의 대립성 - [ 버림 ]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생각하는 그 반대 방향으로 접근하리라는 것을 인간들은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 나름대로 이 세상 것에 대해서 기대하는 것이 많았는데, 마가복음 10장 38절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씀이 나온다는 것이다.

(막 10: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그래서 제가 이전에 강의를 하면서, 예수님은 함께 다니면 엄청 위험한 분이라고 했는데, 실제로 자기 목숨을 내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 '세례'는 연합의 의미인데, 즉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에 보면 뭐라고 했는고 하니,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심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 자취를 따라오도록 하려는 것인데, 즉 우리에게 본을 끼쳐서 말이다. 넓은 길을 가지 말고 좁은 길로 가라고 말이다.

(벧전 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리고 빌립보서 1장에 보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믿음뿐만이 아니라 고난도 받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 고난이란,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배설물로 여겨서 버려야 하는 아픔이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버리려면 얼마나 아까운지, 그것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자기 노동을 투자했는데 말이다. 다 자기 자존심이고 말이다.

(빌 1:29)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이것을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는데, 19페이지를 보자.

** 이것이 포기와 버림의 원리이다. 이 버림의 원리만이 교회 안에 영원히 살아있어야 할 원리이다. 이것이 없으면 그 교회는 하늘나라와 상관이 없는 사이비 단체이다.

왜 이러한 포기와 버림이 있어야 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이름이 있어야 하는 곳에는 인간의 이름은 부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교회에 다니면, 그야말로 실컷 다니다가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아니, 교회 그 자체가 지옥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이 책 제일 마지막 페이지를 보자.

** 그런데 사방에서 지옥에서 내려오는 마지막 커튼이 쳐지기 시작했다. 갇혔다. 이로서 지옥은 사방에서 떠오르고 있다.

여기 이 커튼은 가두는 용도인데, 이렇게 됨으로서 하나님은 지옥을 만드는데 무사히(?) 성공했는데, 창세기 3장 15절 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사방에서 떠오르는 것은 교회이고 말이다. 아무튼 하나님은 뱀의 후손을 용서하는 법이 없다는 것이다.

용서는 창세기 3장 15절을 근거로 한 용서이지, 주님의 나라에 그것을 무시한 용서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소위 철학이나 자유주의 신학을 좀 공부했다는 인간들이 뭐라고 하는가? 창세기 3장 15절도 모르고 사랑의 하나님을 운운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가롯유다도 용서를 받아야 한다면서, 가롯유다 복권운동을 벌인다는 말이다.

◈ 창세기 3장 15절이 완성되면 끝 !!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창세기 3장 15절만 완성시키면 손을 턴다는 것이다. 작전완료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미션 임파서블' 인가? 그러니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창세기 3장 15절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보여주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지난번에 교재로 한 '교회를 넘어서'는 대충 대충하면서 진도를 빨리 했는데, 사실 너무 어려워서 자세히 해도 이해가 안 되기는 마찬가지이기에 말이다. 그런데 이번 '지옥의 하나님'은 좀 쉽게 때문에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19페이지를 보자.

** 복음보다 교회에 신경 쓰는 자들은 결코 '자기 버림'의 정신을 가진 자들이 아니다. 인간들의 그 어떠한 '있음'의 정신도 하나님의 '버림'의 정신을 대신할 수 없다. 인간들은 꼭 눈에 보이는 '있음'을 주워 모아 '자기 소유화'로 전환시키는 방식으로 일한다.

◈ 아리스토텔레스 - 인간의 존재는 내용물을 가지고 존재한다 !!

이것이 좀 어려운 대목인데, 여러 번 했는데 다시 한번 더하자면, "인간의 존재는 껍데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용물을 가지고 존재한다" 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는데, 그는 이것을 존재의 '우유성'(偶有性, accident) 이라고 했는데, 쉽게 '속성' 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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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유성(偶有性) - 사물이 일시적으로 우연히 가지게 된 성질 ≒ 우성(偶性)·우유적 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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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서, '박지성' 이라는 존재가 있는데, 그는 어떤 속성이 있는고 하니, 신형엔진, 파마머리 등이 모여서 박지성이라는 독특한 존재성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박지성이 파마가 아니라 터벅머리를 했다면 사람들은 박지성이 답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즉 내용물이 바뀌면 다른 존재로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 여자들이 쌍꺼풀 수술을 많이 하는데, 그런데 의외로 그런 사람들이 개성이 전혀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두들 쌍꺼풀이기에 말이다. 쌍꺼풀이 없는 것이 그 여자의 속성인데, 그런데 쌍꺼풀을 다 해버리니 다른 존재로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 풀리면 다시 돌아오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반드시 존재라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외모, 성격, 그리고 직업 등이 모아져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속성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10가지 범주를 가지고 이야기했는데, 아주 복잡한 구조가 나온다는 것이다. 시간적 범주, 공간적 범주 등등 말이다.

◈ 존재는 하나의 '복주머니' !!

이렇게 존재라는 것은 이렇게 안에 들어있는 알맹이가 중요한데, 이전에 이것을 안에 뭔가 들어있는 '복주머니' 라고 했는데, 아무튼 인간은 무엇 하나가 좀 잘되면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는 새로운 존재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어느 수험생이 예비수능점수를 처음에는 340점, 그 다음에 320점, 그리고 360점, 제일 마지막에 380점을 받았다면, 그런데 수능시험을 쳐서 340점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그 학생은 난리가 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380점을 자기 점수라고 생각하기에 말이다. 하지만 이 380점은 우연히 주머니 속에 개입된 속성, 즉 우유적 속성(우유성)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학생은 제일 좋은 점수를 자기의 '자아'로 여기겠지만 말이다.

◈ 내가 바보인가? 같은 120만원이 아니다 !!

어떤 중소기업 사장이 인터넷에 글을 올렸는데, 초봉을 120만원을 주는데 왜 아무도 오지 않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공무원 초봉보다 더 많은데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9급 공무원이 되려고 그 얼마나 박이 터지는가? 5년을 재수에 재수를 거듭하고 말이다. 하지만 중소기업을 그렇게 오라고 해도 안 간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월급이 같은 120만원이라도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중소기업은 주 5일 근무가 안 되지요, 잔업도 있지요, 친척들이 중요한 자리를 다 차지해서 승진이 안 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평생직장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공무원은 무려 60세를 보장해준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중소기업에 자리가 많이 비어있다고 하면 공무원들이 좋아하는데, 자기들의 밥통이 제 아무리 튼튼하다고 해도 혹시 모르니 제발 그쪽으로 좀 나가달라고 말이다. 하지만 빠지기는커녕 더 몰려온다는 것이다. 그 놈의 공무원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라는 자체가 결코 뭔가 있으면 그것을 자기 존재화 시키기 때문에, 즉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버리라고 하면, "내가 왜 버려? 내가 미쳤나?" 라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이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끌어 모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무슨 쇠붙이 자석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인간을 보고 '포기와 버림의 정신'을 이야기하니, 그것이 먹혀들어 가겠는가? 그러니 어떻게 인간의 힘으로 천국으로 가는 교회가 되겠는가? 주의 이름으로 해서, 즉 우리 이름을 스위치 해야 가능하지 말이다.

이제 책 20페이지를 보자.

** 사도는 그리스도로 오는 은혜와 말씀 증거에만 온 몸을 투신했다. 은혜를 통해서만 유일하게 있게 되는 그 '있게 하심'의 기적 안에서 그들은 일생을 지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없음'으로 평가하는 하나님의 눈과 마음을 가졌다. 그들은 그리스만을 사랑하고 그분만을 영원한 것이라고 믿었다.

여기에 '있게 하심'이 중요한데, 예를 들어서, 여기 이렇게 시계가 있는데, 이것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면 감사가 나오지 않지만 있게 하심을 생각하면, 즉 주께서 있게 하셔서 시계가 있다면 이 시계를 볼 때마다 감사가 나온다는 것이다.

◈ 포기와 버림 - 과연 감사하고 있는가 !!

그러니 자기가 과연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를 알려면, 자기가 어떤 나쁜 짓을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과연 모든 것에, 즉 범사에 감사하고 있느냐를 보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감사라는 것은 교회에 어떤 재물이나 재산을 갖다바치는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버림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일종의 주식투자이고) 자기가 무엇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을 은혜인 줄 알라는 것이다. 오직 주님이 주신 것으로 고맙게 여길 때, 그것이 바로 포기와 버림의 정신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베드로 전서 1장을 보자.

(벧전 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벧전 1:25)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고 하니, 인간의 영광과 하나님의 말씀의 영광을 비교해서, 어느 쪽이 영원한지를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즉 말씀을 돋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말이다.

계속해서 책 20페이지를 보자.

** 사도들은 이 세상에 종교가 모자라서 안타까워 한 적이 없었다. 사람들이 신을 찾지 않기에 절망과 불행의 수렁 안에서 헤매는 것으로 이해한 적도 없었다. 도리어 수많은 종교 밀림 안을 용감하게 헤치고 다녔다.

사도들은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몰라서 안타까워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왜 보내셨는지,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사도들은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다. 신의 존재가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분은 "예수 이외는 모두 신이 아니다" 라고 했는데, 다른 신을 이야기해봐야 모두가 가짜이고, 진짜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양반의 말이 사실 맞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복음이 제대로 전달되지, 하나님도 믿고 예수님도 믿고 성령님도 믿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책 21페이지를 보자.

** 이제 이들의 일생은 복음에 새로 눈 뜬 후대의 몫이 되었다. 이들이 사도들의 고난의 운명을 재현하는 것이다. 이들만이 교회이며 그리스도 몸의 지체이다. 복음은 복음만이 순수하게 감사하는 복음인을 능력 있게 출현시킨다.

조금만 더하고 마치겠는데, 책 22페이지를 보자.

** 3. 인간의 이름과 운명
인간에게는 이름이 있다. 그것은 곧 '흙'이며, 하나님이 친히 지어주셨다. 이로서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야 할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름이 곧 운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이름은 각 개인의 이름인 철수나 영희가 아니라 공통된 것인데, 그것은 바로 '흙' 이라는 것이다. 이름은 보통 아버지가 짓는데, 아브람이란 이름은 그 아버지 데라가 지었고, 야곱이라는 이름도 그 아버지 이삭이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이라는 야곱의 새 이름은 누가 지었는고 하니 이삭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지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이라는 이름도 역시 그렇고 말이다. 이렇게 되면, 아브람은 데라의 자식이지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 이름을 지어주셨다 - 빼도 박도 못하는 신세 !!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름을 지어주셨다는 의미는, 제일 먼저 아담이 그러한데, 이렇게 되면 아담의 모든 운명은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봉사하는 차원에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선악과를 먹든지 해서) 하나님과 맞먹으려고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담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이름을 지음 받은 처음부터 빼도 박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말이다. 오직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위해서 소모품으로, 사실 소모품은 의미가 좀 다른데, 즉 비품으로 활용이 된다는 것이다. 비품으로 말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이름만 지은 것이 아니고, "아담아, 어디 있느냐?" 라고 부르시는데, 이렇게 호명할 때는 죽었다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나사로를 호명하시는데, 나사로가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편안히 쉬고 있다가 말이다.

이렇게 주님이 불러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 해골을 불러주어야 구원을 받듯이 말이다. 주의 이름이 우리를 불러줄 때, 아담의 이름은 없어지고 주의 이름만 남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름이 곧 운명이라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졌지만, 모두가 다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들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름을 지어주신 분이 하나님이기에 말이다.

이 세상에서 결국 남는 것은 아담밖에 없는데, 이렇게 이 세상에는 인간은 아담 밖에 없는데, 있다면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이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과 아담, 이 둘 중에서 어느 한 쪽에 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이 말의 뜻은, 죽어도 손해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원래가 흙, 즉 죽음이니 말이다.

(창 3:19)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렇게 하나님은 이야기를 해도 이렇게 얄미운 것만, 그야말로 인간을 무참히 짓밟아버린다는 것이다. "야야, 참으로 안 됐다. 흙으로 돌아가라. 내가 다시 구해줄 게" 라고 하면 되는데 말이다. 아니, 흙인 주제에 무슨 욕심이 그렇게 많은지 말이다. 솔로몬의 영광도 들풀만도 못한데, 이렇게 인위적인 것은 하나님께서 값을 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즘 식당들이 많이 폐업을 하는데, 1억 짜리 인테리어와 비품들도 단돈 백 만원에 넘어간다는 것이다.

◈ 인생을 그렇게 살지 마요 !!

이렇게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간단한지, 그냥 단 술을 마시듯이 꿀떡꿀떡 마시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영생이고, 말씀이 자기 속에서 살아 움직이면 그것으로 족하지, 왜 또 더 소유된 존재가 되려고 그렇게 쓸데없는 경쟁을 하느냐는 것이다. 흙이란 존재를 채우고 또 채운다고 해서, 그 존재가 흙에서 황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무슨 드라마에서 나온 말이지 싶은데, "세상을 그렇게 살지 마요" 라는 대사를 듣고 얼마나 은혜가 되던지 말이다.

마지막으로 제 경험담으로 마치겠는데, 제가 광주강의를 마치고 나면, 밤 10시 40분에 있는 심야버스로 그 위험한 88고속도로를 통해서 대구로 오는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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