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목사님 신학교 때려 치우고 싶네요.
정훈택 교수에게 이렇게 이야기해 주세요."열심히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고, '이웃'의 개념을 예수님에게 물었던 것이 그 당시 유대인들의 신앙관이었습니다. 즉 '이웃'이라는 개념만 알면, 그 다음에 '사랑'이라는 것은 자신의 실천력을 동원해서 그 말씀을 성취할 수 있다는 의식을 갖고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이웃이란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를 뜻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일조해서 가난한 자를 구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라는 분과 과연 자기와 같은 견해를 갖고 있는지 물어 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의식의 내면이 허점을 꽤뚫어버리는 말씀을 비유로 들어 설명했습니다. 즉 이웃이란 도움을 베풀려는 사람이 나서서 자기가 고르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자의 입장에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질문자는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이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자비와 이웃을 결정짓는 당사자는 자비를 베푼 자가 아니라, 자비를 받겠금 고통당한 자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고통이 없으면 자비는 형성되지 않고 따라서 '이웃 사랑'이라는 말씀도 성취될 수 없는 겁니다.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은 정당했습니다. 왜냐하면 진정 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고통을 받는 자가 누구냐로 이어질 수 있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이루려 오신 분입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할 때도 그 안에 '이웃 사랑'에 대한 율법도 다 이룬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모든 인류를 상대로 해서 고통받는 자로 돌아가신 분이요, 그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도 그 고통 안으로 들어간 사람입니다. 이로서 이 세상은 이웃개념이 확연해졌습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습니다.(고전 16:22) 예수님의 십자가를 뿌리로 해서 이웃과 자비가 결정된 것입니다. 오늘날 이웃 사랑을 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용서를 믿는 사람이요, 자비를 베푸는 자는 바로 예수님의 공로를 증거하는 자입니다. 성령께서 성도 안에서 이것을 해내십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처럼 제발 제 마음대로 이웃과 사랑을 결정지어서는 아니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