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크기
화면

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칼 바르트와의 대화 (KARL BARTH"S TALK TABLE) 10자유게시판고린도전서

칼 바르트와의 대화 (KARL BARTH'S TALK TABLE) 10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0)

제17회
제8부 제3절

학 생 : 만일 계시가 하나님에 의하여 부여됨으로서 한정된다면, 기독교인은 시편 19편에서 시인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시도다" 라고 노래한 것과 같이, 또한 성 바울이 로마서 1:19-20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창조를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알리셨으므로 무도가 그들의 죄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말할 수가 없겠습니까?

바르트 : 그렇지요. 계시 안에 서있는 사람은 시편 기자에게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19편을 좀더 읽어 내려가면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라는 구절이 있어요. 다시 말하면, 피조믈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지요. 기독교인은 이것에서 결론을 내리지 못해요. 그는 하늘이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반복할 수 없어요. 그는 하나님의 창조를 신앙고백은 할 수 있으나, 이것에서 하나님에 대한 별개의 주장을 만들어낼 수는 없습니다. 시편 19편 하반부를 읽어보면 거기서 인간은 계시자체에 직면합니다. 후반부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전반부도 말할 수 있어요. 로마서 1:18 이하에서 바울은 분명하게 하나님은 그의 세계에 - 그렇지요. 그의 행위와 계시로 - 현존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를 보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이렇듯 하나님의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에 관한 주장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지 않았어요. 바울은 기독교인으로서 전 세계에 편재하는 하나님의 계시를 수긍하고 있지만,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유출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오는 것이지요. 그는 이 사실들을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말하고 있는데,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인간은 변명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말할 겁니다. 그러나 저는 자연신학자는 되지 않겠지요.

학 생 :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높이지 않고..." 라는 귀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르트 : 그들은 객관적으로 그들을 알았고 또한 그를 부정하였지요. 동시적으로 말입니다. 학생이 외국어로 된 서적을 읽고 있다고 가정해보세요. 학생은 단어는 알지만 문법과 문장구조는 알지 못해요. 알기는 하지만 읽을 수는 없어요. 이것은 빈약한 예화에 불과하지만, 내가 뜻하는 바를 짐작할 겁니다.
학 생 : 인간의 타락과 같이 외부세계의 "타락"이 있습니까?

바르트 : 잘 모르겠어요. 나는 "타락한 피조물"(fallen creature)이 있다고 말할 준비가 갖추어져있지 않아요.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긍정할 수도 없어요.

학 생 : 교수님께서는 창세기 1:27(하나님의 형상)과 관련하여 "관계의 유비"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또한 "삼위일체의 관계의 흔적"(vestigium relationis trinitatis)에 대하여 말할 수 있겠습니까?
바르트 :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는 일종의 흔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독하시지 않아요. 하나님은 나와 너를 모두 내포합니다. 우리가 나와 너를 구별하는 것은 먼저 인간의 차원(quality)이 아니고 하나님의 차원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삼위일체와 관계시켜 말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항시 타자(other)를 가지고 있지요. 하나님은 역사 안에서, 즉 이스라엘과 하나님에 대하여 활동하고 계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나는 성령을 암시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렇듯 극단적인 방법으로 삼위일체에까지 적용될지 모르겠어요. 창세기 1, 2장은 이스라엘 전 역사의 기대(anticipations)라고 하겠습니다. 혹은 이스라엘 민족이 최소한도 그들의 역사를 이 창조설화의 빛으로 해석한 것이지요.

학 생 : 교수님께서 396페이지에서 진술하기를 "계시는 예증될 것이 아니라 다만 해석될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증"(illustrations)과 "해석"(interpretations)이라는 말들이 교수님께서 뜻하는 바를 진정으로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까? 바울은 고린도전서 12:12에서 그리스도의 "몸"에 대하여 말할 때 예증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까?

바르트 : 해석이란 동일한 사실(the same thing)을 다른 말로 말하는 것이고, 예증은 동일한 사실을 다른 말로(in other words) 말한다는 뜻입니다. 이 둘을 구별하기는 어렵지만 의도의 구별이 있어요. 예증하는 사람은 본문이 뜻하는 바를 안다(knows)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해석자는 본문을 표현하려는 것뿐입니다. 예증자는 본문의 주관자입니다. 그의 태도는 해석자의 것과 전혀 달라요. 학생은 본문을 앎으로서 예증자가 될 수 있으나 그때 학생의 예증은 본문을 지배하게 됩니다. 학생의 예증은 흥미진진하기 때문에 독립적인 생활을 가지기 시작하고 성서본문의 입장을 취하게 되는 겁니다. 그때 세계는 그 자체가 주요하게 됩니다. 그때 학생은 계시의 제2의 자원을 가지게 되지요. 물론 이것은 항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큰 위험이 깃들어 있어요. 참신한 해석에서는 해석자가 본문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나는 불트만이 해석자이기보다는 오히려 예증자라고 믿습니다. 물론 예증하거나 해석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이지요. 다만 문제는 무엇을 하느냐는 겁니다. 해석자는 본문에 귀를 기울이지요. 바울은 "몸"에 대하여 말할 때 예증을 사용하고 있나요? 확실히 "몸"이란 우리 언어의 한 요소이지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은 상징적으로 사용된 것이 아닙니다. 몸은 현실적인 것이거든요.

학 생 : 예수님의 비유들은 예증이었습니까?

바르트 : 예수님은 상황을 통달하고 있었어요. 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였고, 또한 그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나는 비유의 신학적 성경에 대해서 잘 모르겠어요.

학 생 :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 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르트 : 떡과 포도주기 실제적으로나 또는 상징적으로 취급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우리는 그리스도의 행위전체, 곧 사람들을 모으고 자기의 말을 듣고 그와 함께 이 식사를 나누고 그에게서 생명을 얻는 자들을 자기의 제자로 삼으시는 그의 행위를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요. 이것이 곧 떡을 떼면서 "이것은 내 몸이다" 라고 말씀한 의미입니다. 성만찬에 대한 논쟁전체는 오늘은 사용 가치가 없어요. 그것은 잘못된 것, 즉 떡과 포도주에 관심을 두기 때문이지요. 그 의미는 그리스도와 제자들의 관계 전체에서 찾아야 됩니다. 사실상 떡과 포도주에는 차이가 없어요. 떡은 몸에 영양을 공급하고, 구약시대에 포도주는 축제의 표시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메시아 왕국의 도래를 전망하게 되는 것이지요.

제18회
제9부 제1절-제2절

학 생 : 교수님께서는 이 절에서 "삼위일체의 대외적인 역사는 분리되지 않는다" (Opera trinitatis ad extra sunt indivisa) 라는 형식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외부적으로 실질상의 배분이 있지 않습니까?

바르트 : 있지요. 학생은 428페이지에 있는 각위속성론(各位屬性性論, the doctrine of Appropriations)을 읽어보았어요? 따라서 학생은 그 다음 페이지에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해석을 보이야 합니다. "창조자"(Creator)의 개념은 "아버지" 개념의 유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아버지는 상징적으로 창조자라고 불릴 수 있어요. 그 형식은 정확합니다. 그러나 그 형식 안에 있는 어떤 역사는 아버지에게, 어떤 역사는 아들에게, 어떤 역사는 성령에게 종속될 수 있어요. 만일 이 형식을 부정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칸 막은 방 속에 가두어버리는 것이 되지요. 하나님은 한 분뿐입니다. 그러나 각 위격(Person)에는 일정한 기능들이 주어져 있어요. 그렇지만 그들은 상호배타적이 아닙니다.

학 생 : 교의학의 기능은 선포에 대한 비판인 줄 압니다. 그러므로 건설적인 주자을 시도하는 것보다 비판적으로(부정적으로) 교의학을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바르트 : 학생은 지금 우리가 교의학 서론을 논의하고 있음을 잊은 듯 하군요. 삼위일체론은 하나의 비판적 원리로 사용되고 있어요. 따라서 원리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토론에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그 원리를 밝히기 위해서는 이것이 필요합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는 먼저 교회에 의해 벌어졌어요. 그러므로 나도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3가지 비판적 원리는 계시의 원리, 성서의 원리 및 선포의 원리입니다. 그러나 이 원리들을 정의하려면 건설적인 신학에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물론 나는 본래 동방이 아니라 서방의 한 신학자입니다.

학 생 : 성서는 초월을 존재론적, 원인적 및 윤리적으로 만드는 반면에 「교회교의학」은 초월을 인식론적으로 만드는 것입니까? 예를 들면, 교수님께서는 368페이지에서 언급하시기를, "성서에 증거된 계시는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가리워 질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바르트 : 독일어로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지요. "Die in der Bibel bezeugte Offenbarung ist die Offenbarung des seinen nach den Menschen unenthulbaren Gottes."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인간이 밝힐 수 없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인간에 의하여 밝혀질 수 없어요. 그렇지 않고 만일 하나님이 본질상 자기 자신을 계시할 수 없다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하나님은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불가능을 뜻하는 것은 아니에요. 서론에서 인식론적 개념을 발견하는 것이 나의 과제였지요. 거기서 비로소 하나님의 행위 전체에로 나아갈 수가 있어요. 거기서 나는 사건으로서의 하나님의 행위 전체에서 계시의 개념을 추출했어요. 개념 없이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학 생 : 그러나 왜 개념에서 시작하는 것입니까? 왜 사건을 직접 취급하지는 않습니까?

바르트 : 내가 사용하는 개념은 사건 자체에 대한 기술(記述)이에요.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 연구의 결과가 하나님의 비판적 원리라는 겁니다.

제19회
제9부 제3절-제4절

학 생 : 삼위일체상호내재성(三位一體相互內在性, Perichoresis)과 각위속성에 관한 교리와 그리스도의 인간성과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바르트 : "인간성"(human nature)이라고 할 때 학생은 무엇을 뜻하는 겁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그가 "의식"(意識)의 중심이라는 근대적인 의미에서 "인격성"(personality)을 지닌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의 인격성은 하나님의 아들의 것이지요.

학 생 : 그러나 만일 인간성이 인격성을 결여한다면, 사실상 그것을 인간성이라고 하겠습니까?

바르트 : 인간성에는 개성이 필요하지만, 위격에는 그렇지 않아요. 인격은 인간성 안에 존재하지요. 물론 그리스도는 "의식의 중심"을 지녔어요. 인격성은 이런저런 인간을 뜻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어떤 특수한 인간의 존재에만 적용될 수 있을 뿐이에요. 그가 이렇다는 것(thisness), 또는 저렇다는 것(thatness)은 그의 인격성입니다. 만일 옛 기독론적 교리가 그리스도의 인격성을 부정하였다면 그것은 하나의 인간이 있었다는 것과 말씀이 바로 그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겁니다. 이것은 잘못이지요. 이 사람은 - 처음부터 - 하나님의 아들로만 존재했어요. 하나님은 많은 가능성에서 인간성의 하나의 가능성을 선택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 안에 존재하도록 실현하였지요. 인간성은 인간의 본성, 또는 본질을 뜻합니다. 인격성이란 한 인간의 존재를 뜻하지요. 아버지와 성령은 또한 성육신(삼위상호내재성)에 관계되어 있어요. 그러나 "성육신 된 아버지"(incarnate Father)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세 사람의 예를 든다면, 두 사람이 한 사람의 외투를 입혀주지만 그것을 입는 사람은 하나 뿐이지요.

학 생 : 성육신이 삼위일체에 변화를 가져옵니까?

바르트 : 아니에요. 성육신은 삼위일체에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의지(eternal decree) 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입니다. 삼위일체의 제2 위격을 로고스로만 간주하지 마세요. 그것은 에밀 브루너(E. Brunner)의 잘못입니다. 성육신 되지 않은 로고스(Logos asarkos)는 없고 성육신 된 만이 있을 따름이에요. 브루너는 "Logos asarkos"를 생각하는데, 이것은 그의 자연신학에 기인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로고스가 추상적 원리로 되지요. "Logos asarkos" 만이 항시 존재함으로, 마치 성육신 후 제4의 요인이 들어오는 것처럼 삼위일체에 변화가 없어요.

학 생 : 삼위일체론의 문제는 사실상 계시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으로서 교회에 강요되었습니까? 또는 오히려 이단의 발흥으로 교회에 강요된 것입니까? 그 교리를 "자기 포위적 영역"(self-enclosed circle)이라고 보는 교수님의 개념이 시사하는 것은 그 기능이 적극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극적인, 즉 기독교 선포의 한계를 고수하려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바르트 : 여기서의 문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단이 그것을 강요했어요. 그러나 그것은 계시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이단을 반드시 나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단마다 적극적인 것을 배울 기회를 제공합니다. 예를 들면, 나는 독일 기독교인들과 불트만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이단은 진리를 근원적으로 모색하도록 촉구하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지요. 계시는 결코 고갈되지 아니하고 항시 새로운 방면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인간은 게을러요. 이단은 이 인간의 허점을 찔러서 그로 하여금 눈과 귀를 열어 새 것을 배우게 합니다. 중세기 후반에 기독교의 사태와 교리가 처참하게 붕괴되지 않았다면, 종교개혁은 수행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쉴라이에르마헤르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정통주의는 이단주의를 결코 승인할 수 없다고 강경한 법칙을 만들었어요. 우리는 이단을 측정하는 원리를 만들 수 없습니다.

학 생 : 교수님의 삼위일체과 로마 카톨릭주의 및 개신교 근대주의의 그것의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바르트: 이 교리에 관한 한, 나는 로마 카톨릭 교리에 매우 가깝습니다. 그들은 나의 교리를 대부분 용납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429페이지에 있는 각위속성론에 첨가된 제3의 법은 제외하고 말입니다. 하여간 로마 교회와 근본적인 면에서 일치한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니 기쁘군요. 이것을 근거로 우리는 피차에 이야기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틸리히와 니이버는 그것이 가능할지 의심이 갑니다.) 여기에서 간격이 넓지 않다는 것을 기뻐하세요. 근대주의에는 삼위일체론이 없어요. "사회적 삼위일체"(Social Trinity) 라는 개념은 환상적인 것이지요.

학 생 : 교수님께서는 삼위일체론을 하나님의 객관적인 자기 계시 대신에 의인(義認)의 주관적 경험 위에 수립할 수 있습니까?

바르트 : 물론이지요. 의인(義認)이나 성화(聖化)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교의학적 영역에서는 논리적으로 어느 점에서나 삼위일체로 지향할 수 있어요. 계시에서 출발하는 것이 나에게는 보다 유효했습니다. 그러나 학생은 원한다면 교의학을 교회론에서 시작하여 점차적으로 교회 존재의 근원인 존재론적 삼위일체로 돌아갈 수 있어요.

학 생 : 교수님께서는 도날드 베일리(D. Bailie) 저서인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God Was In Christ)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르트 : 베일리는 나의 절친한 친구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 대해서는 깊은 의문을 품고 있어요. 그는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을 은총론에서 설명하려고 시도하고, 따라서 기독론이 은총의 사실의 면모 또는 실례 또는 상징이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잘못이지요. 나는 은총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누구의 은총인가?", "어떤 은총인가?" 라고 물을 겁니다. 나는 여기서 베일리를 좋아하지 않게 되었지요.

제20회
제10부 제1절-제2절

바르트 : (서론적 논평) 여러분은 "하나님 아버지"(God the Father) 라는 이 구절을 좋아합니까? 나는 고백할 수밖에 없어요. 나는 특히 이 구절의 첫 부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여기에 거짓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이라면 그런 방식으로 말하지 않을 겁니다. 나의 과제는 창조주를 설명하려는 것이었고, 따라서 나는 그가 "우리 실존의 주님"(the Lord of our existence)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실존주의의 잔해이지요. 나의 근거가 너무 작아요. 하나님은 우리의 실존의 주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아닌 모든 것의 주님입니다. 우리의 실존은 하나님이 홀로 계시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에 그가 창조하신 일부분이에요. 하나님의 강력한 사랑, 곧 하나님이 자기 자신에서 나와서 피조물을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창조의 의미라고 봅니다. 나는 이러한 우리 실존의 주권을 서술하기 위하여 종말론을 지나치게 강조했어요. 여기서 나는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에 대하여 언급하지 말았어야 했어요. 나는 "생명자체"(life itself)를 말했어야 했어요. 창조주와 피조물의 질적 차이를 기술하는데 그치지 말고 창조에 대하여 적극적인 것을 말해야 했어요. 만일 내가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에 대하여 언급하였다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리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의 유사성을 훨씬 분명하게 할 수 있었을 겁니다. 여기서 부성(父性, fatherhood)의 개념은 차가워지고 아버지의 뜨거운 사랑에 대한 인상을 주지 못하고 있어요. 따라서 나는 여기서 골고다를 언급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죽음의 개념이 지나치게 부각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나의 「로마서」(Romerbrief)를 상기시켜 줍니다.

학 생 : 교수님께서는 창조주는 "우리 실존의 주님"을 뜻한다는 사실을 계시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고 언급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연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바르트 : 내가 그것을 기술할 당시에는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창조자임을 몰랐어요. 여기서는 인간이 지나치게 중요합니다. 제3권이 창조론에 대하여 훨씬 더 잘 기술하고 있어요. 나는 많은 것을 배웠어요. 자연은 하나님이 인간과 더불어 일하시는 극장입니다. (인간은 제6일 오후에야 비로소 등장하는 것을 기억하세요.) 하나님이 인간과 관계하는 위대성은 자연 안에(in nature) 있습니다. 제3권 1부를 보세요. 거기서 처음 두 장은 창세기의 두 가지 설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 설화에서는 창조가 계약의 외적근거이고, 둘째 설화에서는 계약이 창조의 내적 근거가 되지요.

학 생 : 아버지는 삼위일체 안에 있는 아들에게 주권을 행사하는 것입니까? 따라서 피조물을 떠나서 아들의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되겠습니까?

바르트 : 물론 아버지의 주권이 있지요. 그러나 나는 그 용어를 사용하기를 원치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육신에는 하나의 명령이 개재되어있고, 주 되신 하나님의 종 되신 하나님의 관계가 있어요. 그러나 종속관계는 없어요. 기독교의 하나님은 높은 동시에 낮고, 주님인 동시에 종이 될 수 있어요. 알라(Allah)는 그럴 수 없지요. 학생의 질문의 후반부는 하나님이 아들에게서 죽었다는 뜻인가요? 우리는 하나님 자신과 그의 목적에 나타난 하나님(신탁)을 구별해야 합니다. 영원부터 아들(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으로서)은 하나님 안에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성육신 이전에 발생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이것은 밝혀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삼위일체 안에 제4의 요인을 내포하게 되니까요. 하나님은 아들에게서 죽어요.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죽었다" 라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삶과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기억하게 됩니다. 암흑의 영역마저도 하나님의 능력밖에 있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은 우리의 영역이 되는 죽음의 영역에서 우리 대신 입장을 취해주셨어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고 말하지 않으면, 화해는 없어요.

학 생 : 우리가 골고다를 바라볼 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보는 것입니까?

바르트 : 그렇지요. 예수가 인간인 한에서 말입니다. 여기서 나는 제3권에서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humanity)에서 출발해야 했어요. 예수는 두 가지 죽음을 죽었습니다. 곧 자기 자신의 죽음(첫째 죽음)과 우리의 죽음(죄를 위한 둘째 죽음)이지요. (이에 대하여 하인리히 포겔(H.Vogel)은 나와 견해를 달리 하지요.) 이 두 가지 죽음은 십자가에서 일치하고 있습니다. 첫째 것은 자연적 죽음으로서 인간성 자체에 속한 것이고, 둘째 것은 인류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서의 죽음입니다. 예수는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를 위해 죽은 것이에요.

학 생 : 아버지는 "창설자"(Originator) 라고 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각위속성론에 들어가는 겁니까?
바르트 : 그렇지 않아요. 이것은 삼위일체의 내부적 정의입니다. 각위속성론은 외부적으로(ad extra)만 적용되는 거지요.

학 생 : 교수님은 왜 아들보다 성령에게 "구속"을 지정하거나 귀속시키는 겁니까? 구속(redemption)은 화해(reconciliation)와 동의어가 아닙니까?

바르트 : 나의 첫째 이유는 석의적(釋義的)인데, 즉 구속(apolutrosis)이란 신약성서에서 종말론적 용어입니다. 화해된 인간으로서의 우리의 상황은 석방되리라는 기쁜소식을 받은 죄수의 것과 흡사하지요. 문은 열렸지만 그는 아직도 감옥에서 나오지 못했어요. 아마도 "완성"(Vollendung, consummation)이라는 말이 "구속"(Erlosung, redemption)보다 훨씬 더 좋았을 겁니다. 우리는 지금 자유를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그 안에 있지 않아요. 구속은 화해 이상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성령의 역사와 관계됩니다. 로마서 8장을 보세요. 그러나 나는 "redemption"과 "Erlosung"이라는 용어에는 어떤 애매성이 있다고 인정합니다. 어느 것도 성서적 개념의 정확한 의미를 나타내지 못하고 있어요.

목록으로

이근호 목사 · 21,142건 중 608 페이지

번호 구분 제목 분류 날짜
5,967 우리교회 사 43:10-13 (유일한 구원자) 이사야 최고관리자 07-11-28
5,966 묻고답하기 목사의 위기와 헤겔 [신학] 최고관리자 07-11-28
5,965 묻고답하기 오네시보로 - 최고관리자 07-11-28
5,964 우리교회 [일반] 다운로드 안되시는 분 쪽지 주세요 [일반] 최고관리자 07-11-27
5,963 우리교회 [주보] 12월 2일 주보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7-11-27
5,962 자유게시판 알립니다(강의녹취록) - 최고관리자 07-11-27
5,961 자유게시판 20070413-(2) 서울강의녹취 : 갈라디아서 제 18강 갈라디아서 최고관리자 07-11-27
5,960 우리교회 [일반] 수고하셨습니다.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일반] 최고관리자 07-11-26
5,959 자유게시판 홈페이지 정상 운영됩니다.^^ - 최고관리자 07-11-26
5,958 우리교회 [일반] 동영상 실시간 방송은 안됩니다. [방송] 최고관리자 07-11-25
5,957 우리교회 삿 2: 6-10 (여호수아의 죽음) 사사기 최고관리자 07-11-25
5,956 우리교회 삿 2: 6-10 (여호수아의 죽음) 사사기 최고관리자 07-11-25
5,955 설교 요한계시록20장11-15절 제목:최후의 심판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7-11-25
5,954 우리교회 계 20:11-15 (최후의 심판)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7-11-25
5,953 강의 광주 11월 23일 디도서 1장 7절 디도서 최고관리자 07-11-24
열람 ➜ 자유게시판 칼 바르트와의 대화 (KARL BARTH"S TALK TABLE) 10 고린도전서 최고관리자 07-11-22
5,951 자유게시판 칼 바르트와의 대화 (KARL BARTH"S TALK TABLE) 9 미가 최고관리자 07-11-21
5,950 우리교회 사 43: 5- 7 (내가 모으리라) 이사야 최고관리자 07-11-21
5,949 자유게시판 칼 바르트와의 대화 (KARL BARTH"S TALK TABLE) 8 [신학] 최고관리자 07-11-21
5,948 성경 2007년 대구 성경공부 (완료) [신학] 최고관리자 07-11-20
5,947 자유게시판 광주강의(07. 10. 26) 2번 녹취록 미가 최고관리자 07-11-20
5,946 자유게시판 칼 바르트와의 대화 (KARL BARTH"S TALK TABLE) 7 누가복음 최고관리자 07-11-19
5,945 강의 대구 11월 19일 티끌만도 못한 주제에 2 [신학] 최고관리자 07-11-19
5,944 자유게시판 영역표시 - 최고관리자 07-11-19
5,943 우리교회 [주보] 주보 071125 요한계시록 최고관리자 07-11-18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