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와의 대화 (KARL BARTH"S TALK TABLE) 9
칼 바르트와의 대화 (KARL BARTH'S TALK TABLE) 9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0)
제13회
제1부-제6부의 복습
학 생 : 1932년 제1권 제1부가 기술되었을 때, 교수님께서 집필 중에 염두에 두었던 이단은 로마 카톨리시즘과 모더니즘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들을 이단시할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반대자들을 생각하고 계십니까?
바르트 : 만일 내가 다시 이 책을 집필한다면, 이단자들은 동일하겠지만 그토록 논쟁적이지는 아닐지 몰라요. 나는 좀 더 평화적인 정신을 가질지 모르겠어요. 나는 오늘의 상황을 바라보면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을 겁니다. 즉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이 모든 교파들을 볼 때에 기독교의 복음선포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말한 사실은 보다 선명해지고 있지 않나 생각해요. 오늘날 특히 유럽에서 자유주의가 되돌아오고 있거든요. 루돌프 불트만을 보세요. 그는 아버지 쉴라이에르마헤르에게서 태어났어요. 그리고 스위스의 상황(마르틴 베르너(M.Werner), 프리쯔 부인(Fritz Buri)을 보세요. 따라서 로마의 늙은 뱀이 아직도 거기에 도사리고 있어요. 나는 제3의 이단, 곧 근본주의, 정통주의를 언급했을지 모르겠어요. 나는 1932년에 근본주의자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어요. 근본주의는 자기들이 성서를 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성서를 지배하는 주인이 되었어야 하는데, 이것은 계시의 주인을 뜻합니다. 근본주의는 자연신학과 동시에 17세기 말엽에 발생하였어요. 따라서 나는 그것을 또 하나의 자연신학이라고 간주합니다. 이 말은 그것이 곧 계시를 조정하기를 바라는 현대인의 견해라는 것이지요.
학 생 : 교수님께서는 198페이지 이하에서 하나님의 언어를 그 일방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신비라고 말하고, "감추인 것"과 "드러난 것", "형식"과 "내용" 등을 관련시킵니다. 의인(justification)과 성화(sanctification)의 관계도 같은 방식으로 "신비" 속에 내포될 수 있겠습니까?
바르트 : "감추인 것"과 "드러난 것"은 적용될 수 있을 듯하지만, "형식"과 "내용"은 그렇지 못할 것 같군요. 나도 후자의 술어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의인과 성화는 한 실재의 두 가지 측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한번에 한 측면만 바라볼 수 있어요. 칼빈은 한 측면에 대하여 말한 다음에 다른 측면에 대하여 말합니다. 나는 그것을 두 가지 면에서 말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아요. "형식"과 "내용"이라는 술어들은 신학에서 발붙일 곳이 없어요. 그것들은 철학적 구분이니까요. 내가 그것들을 사용해서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학 생 : 교수님께서는 273페이지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논하는 중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즉 "죄스러운 인간에게도 하나님의 형상리 보존되어 있는 것은 바른 본성(recta natura)이다..." 라고 했는데, 여기서 "recta natura" 란 무엇입니까?
바르트 : 이것은 단순히, 인간이 죄인마저도, 인간으로 존속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recta natura"는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지요. 나는 "imago Dei"는 남녀의 관계라고 생각해요. 인간은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나-당신"(I-Thou) 관계가 흡사하게 일종의 "나-당신" 관계로 창조됩니다. 이 유사성은 없앨 수 없어요. 타락 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으로서 자기의 존재를 유지하고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에게로 계속 지향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목표를 쟁취할 수 없고 하나님이나 인간에게 미칠 수도 없어요.
제14회
제7부 제1절
학 생 : 교수님께서는 299페이지에 다음과 같이 진술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담화이고 행위이며 비밀이지 교회가 경청하고 신앙하는 사건을 떠나서 교회에 내재하는 또는 교회 내부에서 발견할 수 있고 전시할 수 있는 본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마저도 항시 계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고 교회는 자기가 경청하고 신앙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건 가운데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시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로 돌아갈 수 있지 않습니까? 따라서 우리는 교회가 신자들의 유기적이고 생동적인 조직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바르트 : 교회는 말씀의 사건으로서만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성서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확신할 수 없어요. 말씀은 생동적(living)인 실재이지 추상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행위 가운데 존재합니다. 우리는 말씀을 경청하고 그것에 복종해야 합니다. 학생이 교회에 대하여 언급한 것에 대해서는, 물론 우리가 신자 전체를 가리켜서 교회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것이 교회에 대한 신학적 정의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것은 일종의 사회학적 정의입니다. 우리는 신학적 정의를 내릴 때, 교회의 설립자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실재이신 그리스도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의 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가련한 피조물인 우리가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를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말하고 듣는 생동적인 사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의 실재를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교회를 모으고 그것을 키우는 분은 그리스도입니다. 사도적 상징들은 교회를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학생이 이 용어의 첫째 의미가 기독론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음을 이해한다면, 이 모든 개념들은 옳다고 볼 수 있겠지요.
학 생 : "그리스도의 몸" 이라는 말이 교수님에게는 어떤 사회학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까?
바르트 : 물론 이지요. 기독론적으로 본다면 말이지요. 교회는 간접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됩니다. 그는 그의 몸 없이 존재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전체(totus Christus)를 믿지요. 따라서 그것은 땅위에 있는 그의 몸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살아있는 몸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사건이라는 개념으로 돌아오는 것이지요.
학 생 : "몸"은 사건이라는 말씀입니까?
바르트 : 그렇지요. 육체적 실존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학 생 : "그리스도 전체" 라고 말하는 것은 위험한 것이 아닙니까?
바르트 : 아니지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일 따름이고 그 머리가 아니니까요. 이것은 우리가 이 땅위에서 교회의 머리를 가질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해요. 그것은 로마 카톨릭적 이단입니다.
학 생 : 그러나 그의 몸은 아직 완전하지 않다고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르트 : 나는 차라리 "그이 몸은 아직 계시되지 않았다" 라고 말하고 싶어요. 우리가 지금 보는 것은 불완전한 것이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묵시적 것"(apokalypsis) 입니다.
학 생 : 교수님께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몸을 구별하시는 듯 싶습니다.
바르트 : 그래요. 학생은 교회의 갱신(사실상 ecclesia semper refomanda - 교회는 항시 개혁된다 - 역자주)에 대하여 말할 수 있으나, 몸의 갱신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어요.
학 생 :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성서와 전승을 같은 차원에 올려놓습니다. 교의학이 이러한 맥락에서만 처리될 때 그것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현대교회는 단순히 과거교회의 신학을 수용하는 것이 아닙니까?
바르트 : 분명히 로마 카톨릭 교회에는 전승의 성문화(成文化)와 계통의 고수화(固守化)가 있습니다. 그러나 카톨릭 교회의 진정한 오류는 이보다 깊은데 있지요. 로마 카톨리시즘은 가공할만한 것이에요.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감금을 뜻하니까요. 그것은 성령과 계시와 예수 그리스도의 소지자라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과 인간을 동일시하는 것 이상으로 무서운 것이 어디 있어요. 이것은 그 어떤 범신론보다도 더 나쁜 것이지요. 그것은 그토록 경건하고 아름답기 때문에 더 무서운 것이에요.
학 생 : 그러나 아무도 이 오류를 범하지 않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바르트 : 학생의 말이 전적으로 옳아요. 그 때문에 나는 "당신의 마음속에 계신 하나님" (God in your heart)을 말하는 근대 프로테스탄트를 부각시키는 겁니다. 만일 내가 근대 프로테스탄티즘과 로마 카톨릭시즘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야 한다면 나는 후자를 택할 겁니다. 그것은 최소한도 인상적이고 흥미가 있으니까요. (번역이 맞나? 전자 후자가 바뀐 것 같은데...)
학 생 : 교수님께서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마리아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르트 : 그것이 알려지기는 중세기였으나, 로마 카톨릭 신학자들이 마리아론을 정말 발전시킨 것은 19세기에 와서 비로소 이루어진 것이지요. 지난 40년간 그 속도는 빨라졌어요. 마리아도 공동 속죄자(co-redemptrix)라고 주장하는 교리가 등장한다고 해도 놀랄 일은 아니겠지요. 그런데 우리의 질문은 왜 하필 마리아냐 하는데 있겠지요. 내 생각으로는, 그들이 마리아 상에서 하나님과 연관되어있고 그와 함께 역사하고 있는 인간의 어떤 위대한 상징을 갖고 있는 것 같이요. 마치 교의학이 그리스도와, 또는 성직자들이 하나님과 관계하고 있는 것 같이 말이지요. 로마 카톨릭 사상은 인간과 하나님의 협동(채-operation)에 관한 것이지요. "협동"에 대하여는 말하는 개신교 교도들은 카톨릭 교회로 지향하고 있다고 하겠어요. 마리아는 하나님의 사자에게 대답하기를 "보십시오. 나는 주의 여종입니다" 라고 하였지요. 이 대답은 협동하는 인간에 대한 고전적 표현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지요. 그러나 은총을 통하여 마리아는 공동 활동자(co-operatrix)가 되고 드디어는 공동 속죄자가 되는 겁니다. 만일 내가 로마 카톨릭 신학자라면, 나는 마리아론을 바탕으로 신학을 수립하겠어요. 그것이 왜 이루어지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 길이 없어요.
제15회
제7부 제2절-제3절
학 생 : 교수님께서는 우리가 교의학은 지나치게 많이 지니면서도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은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세계교회협의회 에반스톤 대회에서 어떤 이가 말하기를, "말씀이 신학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지 않았다" (The Word was made theology and did not dwell among us)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성육신 되지 않은 하나님의 말씀이지, 진정한 성육신은 아니지 않습니까?
바르트 : 나는 학생의 성육신에 관한 개념자체가 문제라고 봅니다. 성육신은 예수 그리스도일 뿐이지, 설교나 그밖의 선포가 아닙니다. 설교는 성육신에 대한 증거(testimony이지만, 성육신은 유일회적(once for all)인 것이에요. 우리는 카톨릭 신자가 아닙니다. 나는 교회의 증언에 있어서 교의학과 설교는 다같은 영역에 속한다고 생각해요. 교회의 사업인 설교는 인간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수정을 필요로 하며 그 수정작업이 교의학의 일입니다. 교의학은 교회의 겸손을 증명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성육신" - 이것은 요한복음 1:14에서 오고 예수님만 언급한다 - 이라는 말을 막연하게 사용해서는 안 되지요. 교의학은 도구에 불과해요. 그러나 그것이 도구라면 왜 훌륭한 도구를 가지지 못합니까? 이것은 우리가 연구하고 준비해야 함을 뜻하고, 따라서 그것은 학교는 학교가 되어야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미국에 있는 많은 학생들의 경우처럼 연구와 목회를 혼합하는 것은 좋지 않아요.
제16회
제8부 제1절-제2절
학 생 : 교수님께서는 367페이지에서 성서적 계시와 비교되는 경우 "다른 계시들"(other revelations)에 대하여 물어야할 두 가지 질문에 대하여 언급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교수님께서는 성서적 계시론의 정당화, 곧 변증론에 관심을 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바르트 : 두 가지 계시, 곧 성서적인 것과 그 밖의 것은 혼동되어서는 안 됩니다. 절반의 페이지가 이것을 다루는데 지나치게 소요된 것인가요? 교의학은 항상 변증론적 측면을 지닐 겁니다. 어떤 의미에서, 즉 한계를 설정한다는 의미에서 모든 교의학은 변증적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는 스스로 방어합니다. 나의 가장 저명한 신학의 스승은 켄터베리의 안셀름(Anslem)인데, 그는 교리의 맥락(context)을 제시하고 화해의 필연성과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였지요. 기독교 진리의 아름다움은 그것의 일치성(unity)에 있어요. 나는 안셀름의 문하생입니다. 나는 그가 하늘나라에서 나에게 뭐라고 말할지 모르겠어요. 나의 동생 하인리히마저도 내가 그를 오해하였다고 말하니까요. 비록 그렇다고 할지라도, 나는 안셀름에게서 배운 바가 있어요. 기독교 진리는 그 자체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도록 헤야 한다는 겁니다. 만일 학생이 변증론적 관심을 가지고 출발하려고 한다면 실패하고 말 것이에요.
학 생 : 교수님께서는 349페이지에서 "성서와 설교는 항시 하나님의 말씀의 말씀이 되기 위하여서 그것이 되고 있어야(becoming) 한다" 라고 진술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계시"가 되는 것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계시와 하나님의 말씀을 구분하는 것입니까?
바르트 :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가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서와 설교는 계시가 되지 못한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들은 계시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3가지 형태로 되어있지만, 다만 하나의 형태,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만이 "계시'와 동일시됩니다.
학 생 : "Historie" 와 "Geschichte"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바르트 : "Historie"란 일반 역사학으로 증명될 수 있는 것이고, 반면에 "Geschichte"는 시간과 공간에서 발생하나 증명될 수도 있고, 증명이 안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것은 발생하는 것이므로 역사적인 것이지만, 사료기술적 연구(historio-graphical investigation)에는 가리워 있는 것이지요. 나는 창조설화가 신화(myth)가 아니라 역사설화(sagas)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