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와의 대화 (KARL BARTH"S TALK TABLE) 8
칼 바르트와의 대화 (KARL BARTH'S TALK TABLE) 8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0)
제11회
제6부 제1절-제3절
바르트 : (서론적 논평) 말씀과 경험에 관한 이 구절은 「교회교의학」과 그 배후에 있는 신학을 추구하는 토론을 위해서 특별한 타당성을 지닙니다. 경험에 관한 이 대답은 앵글로-색슨 셰계를 만족시키는 것인가요? 감사한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만족시키고 있지 않은가요? "접촉점"(point of contact)에 과한 논의마저도 좋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부여한 것이에요.
학 생 : 우리는 우리를 인간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에 의하여 자유를 받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예" 라고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아니요" 라고 하면, 우리에게 부여된 자유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아니요" 라고 하는 것이 자유가 아닐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부자유로 돌아감을 뜻하는 것입니까?
바르트 : 중요한 점은,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자유가 헤르쿨레스의 자유, 즉 십자가의 두 길 중의 선택과 동일시되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것은 이교적 자유의 개념이에요. 악을 위해 결단하는 것이 자유인가요? 의미 있는 유일한 자유란, 내가 하나님에게 창조된 바와 꼭 같이 나 자신이 되는 자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중립적인 자유가 아니라 자기의 피조물을 창조하셨어요. 하나님은 그를 동산에 두시고 그것을 가꾸게 하셨어요. 그의 자유로 그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선악을 식별하기 시작할 때 이 지식은 죄의 시발이었습니다. 인간은 선악에 대한 이 질문을 묻지 말고, 참되게 창조된 자유에 머물러 있어야 했어요. 우리는 정치적인 자유의 개념 때문에 혼란을 느낍니다. 자유의 여신상에 나타나는 빛은 어떤 것인가요? 선악을 선택하는 자유인가요? 그것은 어떤 빛일 겁니다. 빛은 빛이지 어두움이 아니에요. 만일 그것이 비취면 어두움은 제거되며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은 자유함을 뜻합니다.
학 생 : 교회는 교역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종교적 경험과 소명에 대하여 질문합니다. 만일 순수한 경험이 없다면 도덕적 행위와 신학적 교육을 가지고 어떻게 교회가 좋은 목회활동을 보유할 수 있겠습니까?
바르트 : 신앙고백과 종교적 경험 자체는 좋은 것이에요. 경험 없는 신앙은 없어요. 그러나 목회 지망자는 경험 자체가 아니라 신앙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에요.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들은 바에 대하여 대답하는 겁니다.
학 생 : 교수님께서는 부흥회에서 하는 결단을 촉구하는 설교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르트 : 그것은 교육학, 전술, 심리학 및 구체적 상황에 관한 문제이지요. 나는 그것을 전도의 한 방식으로 삼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요. 나는 일반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무디(Moody)와 같은 특수한 인물들에 대하여 금지선언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모든 방법은 문제를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하나의 모험으로서는 좋아요. 호소를 제거한다면 설교, 기도, 예배와 같은 교회적 요새를 지키게 되요. 어떤 이들은 요새에서 나와 싸우기를 원해요. 사도들은 사람들이 실재를 받아들이느냐 또는 안 받아들이느냐를 묻지 아니하고, 거짓된 자유가 아니라 진정한 자유의 의미에서 실재에 대하여 말했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는데 열중하세요. 그리고 경험은 그 자체에 맡겨두세요. 그리고 내가 「교회교의학」에서 언급한 것은 설교할 것이 아닙니다. 그 책들은 학생들의 연구를 위한 것이지요. 강단에 올라갈 때는 성서와 성령과 함께 가세요.
학 생 : 말씀은 우리의 언어에 관계없이 통하는 것입니까?
바르트 : 우리는 이해할 만한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청중을 알아야 합니다. "접촉점"의 문제는 설교자와 청중들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 사이의 문제이지요. 어떤 사람이 목사로서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은 사랑(charity)의 행위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말씀의 보증은 아닙니다. 목사는 말씀을 섬기는 자에 불과해요. 우리의 설교가 말씀의 도래에 어떤 효과를 지니고 있는가요? 우리의 설교가 좋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비효과적으로 설교된 말과 부적당한 언어를 통하여 성령께서 말씀하실 수 있어요. 우리는 복종할 따름이고 따라서 이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겁니다. 논리적으로는 문제가 실재에 앞서 옵니다. 그러나 나는 이 구절에서 그 반대를 말했어요. 나는 나의 논리의 범주를 성서에서 이끌어냈습니다. 하나님은 심연을 넘어서 저 멀리 계신가요? 나는 심연에서 시작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다리 놓은 그리스도에게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분에게서 극복된 사실을 볼 때 하나님과 인간의 무한한 격리를 보게 되지요. 감사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을 보는 일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멀리 계신 것이 아니다" 라고 안심하고 말하는 것보다는 좋아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불가능한 것을 이루어놓으시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또한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놓았어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요. 그러나 지극히 계시는 하나님으로서 말입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라는, 이 두 가지는 분리될 수 없어요. 이것은 철학적 변증법이 아니라 성서전체의 내용입니다.
제12회
제6부 제4절
학 생 : 인간은 타락으로 하나님과의 존재론적 관계, 즉 "신앙의 유비"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은총에 근거한 "존재의 유비"를 상실하는 것이 아닙니까?
바르트 : 인간이 타락에서 상실한 것은 어떤 존재론적 관계가 아니라 그의 신앙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종하는 자녀로서의 관계를 상실하고 신앙의 유비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학 생 : 이 문제는 신앙의 성취와 관련된 것으로 압니다. 만일 신앙이 진정으로 하나님 자신이라면 종말(eschaton)에서 신앙의 성취를 위한 여백은 무엇이 남게 되는 것입니까?
바르트 : 신앙은 신약성서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언급하는데 사용된 용어 중에서 하나에 불과합니다. 희망과 사랑이라는 말도 있지요. 신앙은 무한적인 개념이 아니라 유한적인 개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전체(whole)를 묘사하는데 사용될 수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공간적(spatial)인 측면에서 관측한 것이지요. 성서적 의미는 성취를 위한 여백을 제공합니다. 신앙은 비전도 아니고 완성도 아니에요. 신앙은 희망과 사랑 없이 있을 수 없어요. 그것 자체가 완전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전체를 볼 수 없기에 여전히 결점이 있어요. 따라서 이것은 희망과 사랑의 개념에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지니고 있어요. 그러나 하늘에서는 교의학의 필요성이 없을 겁니다.
학 생 : 신앙은 비록 "완전한 신앙"이라도, 이 세계에서는 죄로 감염되어 있지 않습니까?
바르트 : 나는 신앙을 완전한 것으로 말하지만, 완전한 신앙을 가진 인간은 없어요. 신앙은 하나님의 완전한 선물입니다. 그러나 나의 신앙은 이 선물의 미미한 반영에 불과해요.
학 생 : 양육에 관한 것입니다만, 만일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직결되어있다면, 그리고 신앙이 완전한 것이라면, 성장과 성숙을 위한 기회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르트 : 지식과 신앙은 우리에게 오는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아래서 연구하고 살 수밖에 없어요. 그러므로 성장의 가능성 뿐만 아니라 그 필연성이 선언되는 것이지요.
학 생 : 왜 기독교 교육이 필요한 것입니까?
바르트 : 하나님의 측면에서 볼 때 하나님은 자유하시고 그 밖의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지요.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계에서 증인이 될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 우리가 길다란 교의학을 기술할 때도 - 그와 함께 활동하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수행하는 이 모든 사역은 마치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것처럼 실제적인 발명으로서가 아니라 봉사로서 이루어질 수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하여 역사하실 때 항시 그것은 기적이에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종이 될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권리를 주장할 수 없어요.
학 생 : 이 질문은 교회일치와 관계된 것입니다. 수직적인 것과 수평적인 것과의 관계, 즉 위에서 오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f revelation)와 교회의 역사적 행위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바르트 :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지요. 그분 자신이 교회의 역사적 연속성입니다. 그는 성령으로 현존하십니다. 가령 교회의 역사적 사건의 연속 가운데 성령이 흘러나온 역사가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현존이 부단한 연속성을 지닌 것이지요. 가시적 교회, 즉 인간의 노력을 믿어야해요. 그러나 우리는 이것 이상을 것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보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학 생 : 이 질문은 하나님의 정의와 관련된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이 그들은 기독교인이 아니고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하나님 자신의 계시에 의존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부정 당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선교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바르트 : 선교의 동기는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은총을 보이셨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주는데 관심을 둡니다. 성 바울의 예를 들어보지요. 그는 "기쁜 소식"을 듣지 못한 사람들의 세계를 보았기 때문에 증거할 수밖에 없었어요. 교회는 하나님께서 그의 은총을 거침없이 나타내심을 알고 있지요. 교회는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 대답은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것이에요. 참 선교사는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이 진정으로 거부할 수 있다고 믿을 수 없어요. 그는 어느 땅에 씨가 떨어질지 알지 못해요. 그 때만 선교사는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어요. 그는 대사(大使)에 불과하지 이 왕(王)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