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강의(07. 10. 26) 2번 녹취록
광주강의(07. 10. 26) 2번 녹취록
이름 : 서경수(IP:116.37.101.23)
광주 강의(07. 10. 26) 30-2
두 번째 시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도의 소망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뭐냐? ‘내가 전한 영생의 말씀. 믿음, 소망, 사랑을 그냥 그대로 좀 알면 안 되냐?’ 이것이 소원이에요.
여기 1절에 “하나님의 종이요” 이런 소리를 함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하나님의 종이에요.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진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맞습니다. 수제자 베드로까지 책망할 정도면 우리는 사도 바울을 믿읍시다. 이분의 권위를. 이분 말대로 하면 구원 받는다는 것을 믿읍시다. 든든하게 믿는 구석이 있어야 사람 사는 재미가 날 것 아닙니까.
사도의 말씀을 믿읍시다. 어떤 사람은 사도 바울을 욕하는 사람도 있는데, 저는 사도 바울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권위가 주님이 주신 권위이고, 곧 주님의 권위라고 인정합니다. 그래서 인생 어떻게 깨지고 망가져도 사도 바울의 말씀을 믿으면 그 인생 실패한 인생 아니에요. 성공한 인생입니다.
사도 바울의 너무나도 역설적인 이 말이 어떻게 믿어집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아니면 절대로 못 믿을 말만 해요. 그런데 이 사도가 디도서에서 하는 말씀은 뭐냐? ‘제발 이단, 그러니까 비 진리를 부러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사람이 이 세상을 보면 두려움과 공포가 밤안개처럼 쫙 깔려 있어요. 아까 사람의 행동은 지루함을 벗어나기 위해 한다고 했지만, 막상 지루해서 어떤 행동에 나서보면 뭔가 자꾸 두렵고 겁이나요. 그 이유가 뭔가 하면 ‘행여 실수하면 어쩌나? 행여 실패가 아닐까?’ 라는 두려움과 공포가 항상 엄습해요. 하루를 살아도 새로운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하고 내일이 되면 내일의 두려움이 덮쳐오고.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이 오는데 그것이 뭐냐 하면, ‘실수 아닐까? 행여 실패의 길이 아닐까?’ 라는 데서 나오는 거예요. 공포가 오는 이유는 환경이 나빠서가 아니라 내가 내 자신에 대해서 믿을 수가 없어요. 항상 실수 할 수 있고, 실패할 수 있기에.
그런데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와 실패에 대해서 관심조차 없어요. 내가 나한테 관심 있지 주님의 관심은 자기가 주신 복음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걸 사도가 지금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거예요.
사도가 전하는 영생, 믿음, 소망은 주님이 진짜로 관심 두는 것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믿음, 소망에 관심이 없고, ‘내 인생 낭패 보면 어떻게 하나?’ 하면서 자기 자신에게 신경을 쓰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사도가 전하는 영생, 믿음, 소망 이런 것들을 그냥 순하게 받지 않고 따져서 ‘이것이 내게 이익이 될까? 내 실수를 커버할 수 있을까?’ 계산을 해요. 이렇게 되면 그 영생과 그 복음은 사이비가 됩니다.
사이비가 되면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져요. 이단들이 부러워지고, 그렇게 되면 디도서에 나오는 그레데 사람들처럼, 한 사람이 범죄하면 그것을 흉내 내서 전부 그 범죄가 확산됩니다. 그래서 디도서에서 나무라는 것은 뭐냐? 이 죄가 전염 되었다는 겁니다. 죄가 온 교회에 퍼져버렸어요. 분위기 자체가 ‘열심히 죄 짓자.’ 하는 분위기로 바뀐 거예요. 그런데 그 분위기는 교회와 세상, 세상과 교회라는 그 벽을 헐고 이것이 세상인지 교회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세상에 있는 죄가 그대로 남김없이 교회 안으로 다 침범해 버린 겁니다. 침벌할 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사도 바울이 전한 제대로 된 영생과 소망과 믿음과 약속의 말씀을 전혀 몰라서 그래요.
그래서 사도가 ---
3장을 봅시다. 4절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기초적인 것을 왜 자꾸 3장에서 반복 했을까요? 앞에 있는 교인들이 세상 풍속을 그대로 모방해서 홍수 넘치듯이 교회 안까지 들어와서 교회인지 세상인지 분간이 안 되도록 되어버렸어요.
왜 이렇게 되었느냐? 세상이 부러워서 그래요. 왜 부러울까요? 그들을 따라가면 실수와 실패를 덜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따라 하면 좀 더 실수를 줄일 수 있겠지. 남에게 욕을 먹지 않겠지’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제가 할 말이 많아요. 이런 내력, 이런 경우에 대해서 소위 구조주의적 입장이라고 하는데, 제가 지금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세상의 의식, 사상이 세상 내에서 어떻게 퍼지는가?
지금은 뭐가 퍼졌습니까? 지금 자본주의지요. 자본주의가 세상에 온통 퍼졌습니다. 교회고 군대고 병원이고 학교고 향교고 절이고 청와대고 관계없이 전부 다 자본주의가 퍼졌습니다. 심지어 강원도 산골에서 감자케는 할머니도 장에 가서 거래를 할 때 거짓말로 중국산을 사서 ‘이것이 국산입니다.’ 라고 속인단 말이지요. 이것이 전부 자본주의에서 나왔어요.
젊은 아이들의 대학 서클이나 모임 전부 다 자본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어요. 자본주의에서 태어나서 자본주의에서 살다가 죽는 겁니다. ‘내가 뭐가 잘못 되었는데?’ 라고 하지만 자본주의 자체가 옳다고 여길 때는 잘못이 없지요. 그런데 자본주의 사상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한다면, 이 세상 현재 21세기를 사는 우리 중에 죄 안 지은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자본주의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입니까? 분명히 아니지요. 자본주의가 구약 여호와 중심의 사고방식입니까? 분명히 아닙니다. 잠언에서 솔로몬이 후손들에게 훈계하던 그 내용이 자본주의입니까? 분명히 아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교회나 뭐든지 자본주의화 될 때 이것을 진리로 보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돈 생기는 일이면 O, 돈을 잃으면 X. 어떤 행동을 해도 돈이 생기는 쪽이라면 이것은 하나님의 진리이고, 돈이 안 생기면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로 보는 겁니다.
왜 이런 사고방식이 있냐 하면, 자본주의적 의식으로 완전 무장되었기 때문에, 이 자본주의만이 진리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돈 위주로 나가는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단 말이지요.
이런 사상이 어떻게 퍼졌고, 어떻게 오염 되었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공부를 우리가 해야 돼요. 자본주의가 뭔가를 알아야 됩니다.
제가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파출소에 근무하는 경찰관이 쌀농사를 짓습니까, 안 짓습니까? 안 짓지요. 그렇데 왜 입에 쌀이 들어갑니까? 자기 할 일은 도둑 잡는 거잖아요. 그런데 도둑이 없으면 굶어 죽어야 돼요.
일단 도둑이 있다. 둘째, 도둑 잡았다. 셋째, 고마워서 쌀 한 포대 줬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아닙니다. 옛날 포졸들에게 행해졌던 방식이죠. 이건 자본주의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포졸들은 공무원들이 아니고 동네 사람들이 뽑아서 돌아가면서 했으니까, 도둑 생겼다. 도둑 잡았다. 아이고 고맙습니다. 해서 도둑맞은 집에서 쌀 한 포대 줬다. 이러면 입에 뭐가 들어갑니까? 쌀이 들어가는데 이것은 정상입니다. 그리고 도둑 없을 때는 농사를 지으면 돼요. 농사지어야지. 도둑이 없는데. 도둑 생기면 다시 모집해서 포졸 세우고.
그런데 왜 파출소 순경들은 자동적으로 입에 쌀이 들어가고, 채소도 안 키우는데 채소가 들어가느냐 말이지요. 이것이 무엇을 매개로 한 겁니까? 무엇을 매체로 한 거예요? 돈을 매체로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사람은 파출소에서 일하면 월급을 받잖아요. 그 월급은 어디서 나오는 겁니까? 세금에서 나왔지요. 그 세금은 쌀농사 짓는 사람이 나라에 뭘 냅니까? 세금을 내고, 그 세금 중 일부가 도둑 잡으라고 경찰에게 봉급으로 들어간단 말이지요.
그렇다면 쌀농사 짓는 사람하고 경찰관은 만나본 적도 없지만 무엇을 매개로 해서 연관이 되어 있습니까? 돈을 매개로 하지요.
자, 그런데 마르크스가 이 사상에 허점을 지적했어요. 돈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쌀 포대 들려고 하니 힘이 드니까 쌀을 살 수 있는 얇은 돈으로 바꿔서 줄 뿐이지요. 그 돈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지요. 쌀 포대 대신 주는 거죠. 그런데 이것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의 두 얼굴]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오는데, 돈 자체는 아무 의미가 없어요. 실제는 쌀이라든지 물고기 이런 것이 중요한데, 언제부턴가 돈 자체를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챙기는 일이 생겼어요. 돈이 채소도 아니고 물고기도 아니고 쌀도 아닌데, 의미 없는 거지요.
그러면 내가 글씨가 안 보인다. ‘목사님 안경 좀 빌려주세요.’ 그래서 안경을 빌려 줬어요. 그리고 다시 받았어요. 그런데 빌려준 안경 외에 하나를 더 달라고 하는 거예요. 왜? 빌려 줬으니까. 이건 나쁜 놈이죠. 돈을 100만원 빌렸으면 100만원만 갚으면 되는 거예요. 왜냐? 돈이라는 것은 물건도 아니고 하나의 매체니까. 지금 쌀을 바꿔야 되는데 아까 돈이 있었는데 개가 물고 가서 ‘나중에 개를 찾으면 드릴 테니 돈 좀 벌려주세요.’
돈은 하나의 매체기 때문에 이자를 받을 이유가 없다니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자를 받지 말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따져보니까 돈은 상품이 아니기 때문에 이자를 받을 이유가 없어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돈 빌려주고 이자 받지 마라.’ 고 했어요.
추운데 “옷 좀 빌려주세요.” 덮었다. “이자 주세요.” 이게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돈의 이자를 받아 챙기면 사람들이 계산을 하게 돼요. 이 돈 가지고 물고기 10마리를 사던 것을 돈을 빌려주니까(10마리 물고기와 바꾸라고 준 돈 가지고) 12마리 살 수 있는데, 이 장사를 누가 안 하겠습니까?
십자가 전쟁 이후에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에 무역이 발달하면서 대부업이 발달을 했어요. 무역을 할 때 원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고급품을 원할 때 미리 돈을 빌려줘요. 천만원 빌려줘서 다시 사와서 장사를 하면 오천만원 버니까 이자를 50% 받아 챙겨도, 1500만원 줘도 3500만원 남는 장사가 됩니다.
문제는 풍랑이 안 일면 돼요. 그래서 무역하는 사람들에게 뭐가 중요하냐 하면, 원산지 물건을 떼다가 현재 소비처가 있는 중세의 귀족들에게 팔아 챙기면 열배 장사는 족히 되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원산지 물건을 살 때 돈이 필요하잖아요. 일군들도 필요하고, 배를 빌리면 뱃삯도 줘야 하고. 이 돈을 누구한테 빌립니까? 은행에서 돈 빌려서 물건 구입해서 무사히 가지고 오기만 하면 떼부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은행에 이자 갚고도 충분히 남는 거예요. 그래서 은행의 대부업이 그때부터 융성하게 일어났습니다. 그것까지는 좋아요. 그런데 은행이 언제 망합니까? 돈을 빌려줬는데 오다가 풍랑을 만나면 풍랑 만난 사람도 망하지만 돈 빌려준 은행도 망하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은행이, 즉 자본가가 돈이 많으면 빌려준 돈 일부를 떼여도 큰 문제없는데.
은행이 대부업을 하면서 뒤에서 돈을 대주는 사람이 여럿 있다고요. 이런 사람들한테는 5% 주고 자기는 10% 먹어서 5%의 이득을 챙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요즘 펀드 아닙니까. 은행 하는 사람들이 자기 돈으로 은행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들의 돈을 모아서(전주에게 돈을 빌려서) 이자 5% 준다고 하고 자기는 돈 빌려주고 10% 먹고 이렇게 해서 발전을 하는 겁니다.
이런 것까지는 좋아요. 이것 가지고 자본주의를 욕하는 것은 아닌데, 문제는 이 은행 돈을 빌려서 중소기업을 하는데, 예전에는 일군 한사람 쓰는데 5만원이었는데, 농민들이 다 도시로 몰려오니까 인력이 남아돌아서 일당을 3만원만 줘도 서로 일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일당(하루 10시간에 일한 것에 대해) 5만원 원가 계산 했는데, 12시간 일하고 3만원 줬다면 그 나머지 2시간 더 일하고 2만원 적게 들어간 것은 누구 주머니에 들어갑니까? 이것은 고스란히 기업을 일으킨 사람의 손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업하는 사람이 5만원 주고 10시간 일 시키는 것으로 계산했는데, 실은 3만원 주고 12시간 일 시키니까, 돈을 더 많이 빌려서 일을 더 크게 벌이니까 점점 더 이윤이 많이 떨어지는 거예요. 이것은 상품을 팔아 이윤을 얻은 것보다 임금 격차에서 생기는 이익이 더 큰 거예요.
이렇게 되니까 은행도 문제지만, 은행에 돈 빌려서 큰 사업(대형 마트)을 일으키면 작은 사업체(슈퍼마켓)가 다 무너지는 겁니다. 슈퍼에서 1만원 받는 것 마트에서는 8천원 받고(원가가 9천원인데 8천원 받으면 1천원 손해 보잖아요.) 슈퍼 망하고 난 뒤에는 독가점이기 때문에 1만 5천원 받아도 다 팔립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대형 마트는 초반에 손해를 보면서 팔다가 슈퍼 망하고 나면 그때부터 값을 올려서 그동안 손해 본 것 다 만회해고, 그 이후 엄청난 이윤을 챙기는 겁니다.
결국 이것은 뭐냐? 다윈의 자연도태, 살아남을 놈만 남아라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런 사고방식에서는 노동자의 존엄성, 가치라는 것은 결국 무엇에 놀아납니까? 돈 있는 자 앞에서 돈 없는 자는 인격의 존엄성이라든지 ‘나는 인간입니다. 나는 짐승이 아니올시다.’ 라는 발언조차 돈 앞에서는 맥을 못 춥니다.
학교에서 수학여행 가는데 돈 있는 애들은 해외로 가고 없는 애들은 국내에 간다. 이렇게 이분화 시켜 놓았습니다. 그러니까 국내 수학여행 가는 아이들이 여행 중에 뭘 생각하겠습니까? 자기부모 원망할 것 아닙니까. 여행을 다니면서 ‘야, 참 재미있구나!’ 이런 감사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나는 언제 돈 벌어서 해외여행 한번 가보나?’ 그 생각 하면서 수학여행 하니까 수학여행의 기쁨이나 가치가 자동적으로 떨어지지요. 다 같이 가면 즐거움이 10이 될 텐데, 해외로 간 아이들이 따로 있는 이상은 그 기쁨이 8로 줄었다 이 말이죠. 그러면 2는 뭡니까? 2는 어디서 나온 사상이에요? 자본주의에서 나왔지요. 그 자본주의 사상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람을 지배하고 있으니까 이 자본주의 사상에서의 죄가 뭡니까? 결국 돈 못 버는 놈이 죄가 됩니다. 그러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인이 누굽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 번 사람이 그 사회에 영웅이 되고 의인이 됩니다.
대구에 어떤 외국 투자자가 왔을 때, 대구 시내 신호체계가 바뀌었습니다. 대통령 지나갈 때 빨간불도 다 파란불로 바꿔서 통과하게 하지요. 외국 투자자 올 때도 그렇게 했습니다. 한 사람의 자본가가 오니까 대구 공항에서부터 시청까지 신호체계를 다 바꿔서 논스톱으로 오게 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자본주의 시대에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의 지배지요. 이건 전염 정도가 아니지요. 완전히 통째로 뒤집어 쓴 거지요. 사고방식이.
12절을 봅시다.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이렇게 되어 있지요.
그레데인 중에서도 항상 거짓말만 하고, 항상 자기 이익만 찾는 것이 아닌 사람도 분명히 있잖아요. 분명히 있어요. 그레데는 섬입니다. 지중해 섬인데 한 나라입니다. 그 그레데 국가 사람 중에서 전부 다 나쁜 사람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것 아닙니까. 그래도 그레도 세람은 전부 다 거짓말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뭡니까? 인간의 죄의 오염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사람들은 그대로 수입해서 자기의 사상을 완전히 뒤집어쓴다는 그 점을 사도가 지금, 이 세상의 그 속성을 밝혀주는 겁니다.
따라서 이 디도서를 보게 되면, 사람이 개인적으로 몇 가지를 바꾼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진짜 바꾸려면 현재 우리가 받은, 사도가 전한 그 복음의 진수가 뭐냐, 진짜 본질이 뭐냐 이것을 제대로 알면, 그 사람에게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어떠한 사상이 오더라도 ‘아, 이건 아니야. 이건 나쁜 거야.’ 라고 판단할 수 있는 판단력이 설 수 있단 말입니다.
그 주신 복음이 뭐냐 하면, 아까 봤던 3장 4절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라는 이 복음, 사도가 전한 이 복음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통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까 제가 말한 것처럼, ‘나는 전염 안 되고 싶어. 어머니 저는 이 세상의 악함을 이기겠습니다.’ 백날 이야기해도 태어날 때부터 자신도 모르게 이미 자본주의 사회에 푹 젖어있는 이상은 그 중에서 무엇을 따로 뽑아서 ‘이것은 의롭다. 이것은 나쁘다.’ 할 것이 아니지요. 사상 자체가 자본주의 사상인데, 다른 사상은 들어본 적도 없단 말이지요.
어릴 때부터 공부하고 모든 것이 뭐냐? 다 돈을 잘 버는 쪽으로 보고 배운 겁니다. 의사가 되어도 마취과라든지 외과 이런 것은 안 하고 전부 안과 성형외과, 정형외과도 안 가요. 덜 위험하고 의료보험 적게 되는 것. 왜 이런 쪽으로 갑니까? 취미가 그래서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계속 어릴 때부터 배운 것이 뭐냐? 돈 벌어야 사람대우 받는다. 어릴 때부터 돈이 있어야 사람대우 받는다는 것.
그러면 돈이 뭐냐? 돈은 좋은 거지요. 아니 돈이 좋다는 것이 성경에 어디 나와요? 잠언을 보세요. ‘부자 되기를 애쓰지 말라’고 했는데. 디모데전서에 보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고 했잖아요. 도대체 이런 사고방식은 어디에서 나온 거예요? 하늘에서 온 거죠.
하늘에서 온 것은 우리한테 전염이 안 되고, 세상의 자본주의는 그렇게 전염이 잘 되고. 왜 그런 거예요? 그 이유가 뭐라고 했습니까? 실수와 실패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나는 실수하면 안 돼. 나는 실패하면 안 돼. 모든 사람이 자본주의로 갈 때 나도 같이 가야 돼.’ 왜? 만약 나 혼자 빠져버리면 나는 실패한 인생이 되니까. 돈을 사랑하지 않기로 하면 실패한 인생이 되니까. 어느 사회에서? 자본주의만이 진리로 통하는 사회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고 주장하는 자체가 그 인간 실패한 거예요.
그래서 제 글에 보면 나오지요. 사모님이 코치하기를 ‘남에게 상처 주는 구절은 그냥 건너 뛰어라.’고 하지요. “목사님! 목사님이 설교할 때 교인들에게 상처 주는 구절은 그냥 건너뛰세요.” 그러면 건너뛰는 구절 중에 뭐가 들어가겠어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이것은 건너뛰어야 됩니다.
철야 기도할 때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사랑하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라고 하면 기도하다가 다 가버립니다. 돈 벌려고 기도하러 왔는데, 돈을 사랑하지 않기를 기도하면 누가 붙어있겠어요. 교회 오면서도 차비 들고 돈 들었는데. 그 돈은 어디서 뽑습니까? 교회 오는 것이 주님을 사랑해서 오는 것이 아니고, 차비 든 만큼 더 건지러 왔단 말이지요. 이것은 무슨 사상입니까? 자본주의 사상 아닙니까. 돈 놓고 돈 먹기 아닙니까. 돈을 투자했으면 더 벌어야지 자본주의 아닙니까. 왜? 그것이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이것을, 제가 이런 이야기 한다는 자체가 이상스럽게 느껴져요. 왜냐하면, 모두가 이렇게 살아가니까. 만약에 이렇게 안 살아가면 우리는 실수하는 것이고 그 인생은 실패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도님! 양장점 아십니까?” “예.”
양장점을 하시는데, 손님에게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이런 말 해 보세요. 누가 오겠어요? 오자마자 “아이고 손님, 잘 어울립니다. 멋지네요.” 그러면 손님이 기분이 좋아서 “이 옷, 얼마예요?” “42,000원만 주세요. 제가 오늘 동대문에서 40,000원 주고 해온 물건인데 2,000원만 남기고 팝니다.” “아니, 40,000원만 받으세요.” “예. 오늘 손님 생각해서 이윤 안 남기고 드리겠습니다.”
사실은 15,000원에 가져온 물건인데 40,000원 받았으면 됐어요. 그래서 “하나님, 오늘도 축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축복이지요.
옛날 농경시대 때 양장점은 어떤 사람이 하느냐 하면, 모든 사람이 다 양장점을 해야 돼요.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집에서 자기 옷을 자기가 만들어 입었습니다. 대량 생산이 필요 없습니다. 자급자족이기 때문에. 자급자족하다가 양식 떨어지면 죽으면 그만입니다. 죽는 것이 실패가 아닙니다. 옛날 사람들은.
지금은 죽는 것을 실패로 생각해요. ‘아이고 이 사람아! 겨우 60도 못 넘기고 죽다니. 불쌍해라.’ 그러니까 요새는 돈 있으면 살고, 돈 없으면 호스 빼고 죽습니다. 호스 꼽혀있는 것도 돈 자랑하려고 꼽아놓는 겁니다. ‘나는 자식들 잘 만나서 호강한다.’ 이것 자랑하는 겁니다. 죽을 때 관도 비싼 것으로 하고.
사실 이런 짓은 옛날에는 왕들이 했어요. 귀족들이 했어요. 그래서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잖아요. 그런데 지금은 신분이 상승 돼서 전부다 왕과 귀족들이에요.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왕 같은 대우 받고, 다만 돈이 있어야 돼요.
미국 간 사람들, 또는 북에서 탈출해 온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놀래는 것이 ‘북한에서는 돈 없어도 인민 자체가 사람 대우받았는데 남한에서는 돈 떨어지는 그 순간 개, 돼지보다 더 못하더라.’ 고 해요.
미국은 참 살기 좋아요. 단 조건이 뭡니까? 돈 있으면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이에요. 그것은 미국뿐만 아니라 인도, 필리핀, 말레시아 등 돈만 있으면 다 사람 대우 받습니다. 돈 없으면 어디가도 인간 취급 못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구조 속에서 실수자, 실패자 안 되기 위해서 엄습하는 공포를 행동으로 막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 디도서를 보니까 “화 내지 말라.”고 하니까 “주여 화내면 돈 덜 벌게 하십니까?” “술 먹지 말라.”고 하면 “술 안 먹으면 돈 벌게 해 줍니까?” 모든 성경 해석을 돈과 연관해서 해석하는 겁니다.
노골적으로는 안 하지만 은연중에 디도서를 해석할 때 바로 그런 식으로 해석해 달라는 거예요. 디도서 말씀대로 살아서 복 받은 사람 그런 간증들을 해 달라는 거예요. 그래야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패자 안 되고 살아남기 위해서, 영웅이 되기 위해서 계속해서 교회에 다닐 용의가 있다는 겁니다.
지금까지 디도서를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해 온 거예요. 한국교회 전체가. 왜 그러냐? 한국교회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에 물들었기 때문에 그래요. 이게 뭐냐? ‘그레데 사람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이 말씀처럼, 한국교회 자체가 항상 비 복음이고, 비 진리고, 항상 이단이었고, 사도가 전하는 그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디도서를 보면서 이제는 바꾸어야 돼요. 정말 사도가 전하는 복음이 뭐냐? 거기에 기초해서 ‘왜 거짓말 하면 안 되고, 왜 화내서는 안 되는가?’ 하는 것을 살펴 봐야겠지요.
5-6절을 봅시다.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만큼 그레데의 의식 수준이라든지 분위기가 책망할 것밖에 없고 방탕할 수밖에 없고 불순중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분위기로 사회 분위기가 이미 그렇게 쫙 퍼졌습니다.
그런 퍼진 가운데서 진짜 바른 복음을 알아서 그 속에 복음을 전하려면 바로 그들의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복음적인 줏대와 복음적인 사상이 명확한 사람만을 장로로 혹은 감독자로 세울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분명히 복음이 전파되는 거지요. 행동 바꾸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전한 복음의 중요함과 그 본질을 다시 한 번 뚜렷하게 아는 사람이 장로가 되어야 그 세파에 흔들리지 않는 거지요.
여기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할게요.
3장 4절을 다시 한 번 봅시다. 여기서 뭐는 복음이 아니다? 인간의 행함은 아니다.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이것만 알아도 이 그레데의 더러운 속물에 넘어갈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인간의 행함이 아닌 복음이면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이 복음은 뭐냐? 성공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행함과 상관없이 복음 그 자체만으로 이미 성공이죠.
그래서 복음 안에 있는 사람은 이미 성공자지요. 성공자이기 때문에 실패자 될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세파가 아니라 어떤 파도가 밀려와도 실패자가 아닌 것입니다. 왜? 이미 복음 자체만 해도 성공자이기 때문에. 복음 자체가 이 어두운 세계에서 성공했다는 증거가 돼요.
예수님 십자가 죽었지요? 죽은 후에 그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흘 만에 부활 했잖아요. 그 부활한 분이 바로 복음 아닙니까. 그 부활은 우리의 용서를 증거하는 겁니다. ‘너는 이미 용서 받았어.’ 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부활 하셨잖아요.
‘너는 이미 생명을 얻었다.’는 이 증거가 있다면, 아무리 그레데 섬에 악한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이미 그 사람은 성공한 사람으로서 그 섬에 살 수가 있습니다. 성공자라면 어느 정도 배짱이 있느냐 하면, ‘두 번 다시 내 인생에 실패라는 단어는 해당이 안 된다.’ 이 정도 자신감이 있어요.
오늘 많이 졸고 피곤해 하시는데, 길게는 안 하겠습니다. 짧게 해도 두 시간은 해야지요. 짧게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벗어나서 산에 가서 도 닦으면 자본주의에서 벗어나는 겁니까? 아닙니다. 산에서 도 닦고 있으면 나중에 산에 도로가 나서 보상 받으면 입지 쩍 벌어집니다. ‘보상금 받았다. 앞으로는 더 좋은 자리에다 호화시설 짓고 기도원 만들어야지.’ 이렇게 나옵니다.
이게 뭐냐 하면, 그동안 내가 허름한 암자에 있었던 것은 ‘실패자였다.’ 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실패자가 안 되려면 복음적 성공 외에 다른 성공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이것은 사람을 볼 때 “당신 구원 받았습니까?” 이것으로 보는 것이 자유인이잖아요. “당신 돈 많이 벌었습니까?” 자본주의는 그렇게 묻지만, “당신은 예수님의 잉여, 과잉, 분에 넘치는 십자가의 사랑을 입고 있습니까?” “좋겠네요.” 이러면, 그 사람이 창녀가 되었던 세리가 되었던 관계없이, 이 두 사람은 성공한 사람으로서 자본주의 사회를 살고 있는 겁니다. 왜? 이미 용서 받았습니다. 이미 구원 받았어요.
3장 5절에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여기에서 ‘중생의 씻음’ 이라는 것은 피 흘림의 씻음입니다. 피로 거듭나게 한 씻음을 받았으면, 그러한 힘, 그러한 기능, 하나님의 말씀의 복음의 성공이 안에 내장되어 있다면 비록 그 사람이 돈이 없다 할지라도 도대체 그 사람을 누가 실패자라고 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 할지라도 누가 이런 사람을 손가락질 할 수 있느냔 말이지요. ‘당신 망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 보면 성공자 중의 성공자가 나오지요. 누구냐? 거지 나사로. “개야, 핥아라. 네가 여기를 핥으나 저기를 핥으나 내 천당 가는 것은 변함이 없다.” 개가 핥는다고 지옥 가는 거 아니잖아요. 그렇게 놀리고 비웃고 ‘아이고 이 인간아! 거지에 병자에 꼴좋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나사로를 죽을 때까지 병자로 살게 했습니다. 후시딘 연고 한번 사용 못하게 만들었어요. 죽을 때까지 병자라. 골인 지점까지 병자로 가요. 거지고. 그런데 그게 성공한 거지 아닙니까. 성공한 병자에요.
제가 강의 처음에 얘기했잖아요. 병들었다고 과잉 사랑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업 망했다고 하나님의 사랑이 철수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 정도로 사랑해요. 복음의 성공이 어느 정도냐 하면, 내 신세가 어떻게 달라져도 무관하게 성공은 성공입니다. 성공은 변동이 되는 사랑이 아니에요.
그 복음이 있다면 왜 그 사람이 구타를 하겠습니까? 구타한다는 것은 화가 난다는 뜻이고, 화가 난다는 것은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안 되니까 나는 실패자가 되기 싫어서, 실패자 되었다는 보복에서 하잖아요.
모든 행동의 원리가 어디서 나옵니까? 실수와 실패에 대해 뭔가 메꾸려고 하는 보상과 보복의 원리로 나오잖아요. 남편이 직장에서 화가 났으면 그 분풀이를 집안에 있는 자식들이나 마누라에게 푼다고요. 그 때 그 마누라가 얼마나 시달리겠습니까. 그런데 세월이 지나서 이제는 남자가 집안에서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있고, 여자가 밖에서 일하게 되었다면, 여자가 일하면서 뭔가 화나는 일이 있었고 집에 돌아왔다. 애꿎은 남편에게 퍼붓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입장 바꿔놓고 생각하면 마찬가지에요.
이게 뭐냐 하면, ‘나 오늘 실패자 되었다.’는 겁니다. ‘내가 오늘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해서 이런 손해를 당했다. 그래서 어떤 식으로든 이 스트레스를 안 풀면 화가 나서 못 견디겠다.’ 그래서 죄 없는 밥상을 발로 차고 뒤엎고 하는 겁니다.
사람이 화를 낸다는 말은 평소에 어떤 목표와 계획이 있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이 계획과 목적이 주님의 창조에 흠집을 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온전해진 세상에 우리가 따로 나만의 계획과 나만의 목적을 만들어서 이것은 내 영역이라고 딱 꼬불쳐 놓으니까 그 계획과 목적대로 안 되니까 자기가 실패자 되었다는 그런 착각에 빠져서 실패자 된 분풀이를 누구한테 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창조에다가 퍼부어요. 개처럼 술에 취해서 아무 곳에나 오줌을 갈기고. 이게 뭡니까?
옛날에 많은 남자들이 이렇게 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사회가 바뀌어서 여자들도 술 취해서 함부로 오줌 누고. 이게 뭡니까? 참 우세스럽지요. 한두 명도 아니고 다 합니다. 그러면 우세스러운 것도 없어요. 죄는 빨리 오염돼요. 왜? 같은 사고방식이기 때문에.
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는 실패가 없다는 거예요. 우리는 복음의 과분한 사랑과 은총을 받았으면 그 자체로서 이미 성공한 사람입니다. 내가 따로 어떤 목적과 계획이 있더라도 이것은 내 실수와 실패와 아무 상관없는 하나님이 맡겨준, ‘놀지 말고 이거나 해라.’ 하고 맡겨준 것이기 때문에 실수 실패는 내 소관이 아닙니다. 그냥 능력껏 하면 되고, 상황껏 할 뿐이에요.
늘 11시 이전에 교회에 오던 사람이 어느 날 11시 30분에 교회 왔습니다. 그럴 때 화가 나지요. ‘나라는 인간은 얼마나 반듯한지 11시 되기 전에 와야 나답고 그런 나를 사람들은 존중하고 그럴 때 나는 성공자다.’ 라는 인식이 있었는데, 그것이 목적이었는데, 교회 오는 길에 차가 막혀서 11시 30분에 왔다. 그러면 졸지에 자기는 뭘 느낍니까? ‘다른 사람이 나를 볼 때 실패자로 볼 것이고 나는 오늘 실패했구나! 아, 이 화풀이를 어떻게 하면 되지? 속상한다.’ 그때는 과잉과 여분의 감사를 찾을 길이 없지요.
어떤 목사님이 교인이 없다. 때려 치울란다. “이제 교회 나오지 마세요.”
원래 교회라는 것은 목사가 나오라고 해서 나온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발걸음을 인도해서 나온 겁니다. 그런데 목사가 전화해서 나오지 말라고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목사가 전화해서 나오지 말라고 했더라도, 그 교인이 안 나온 것은 전화해서 안 나온 것이 아니고 주께서 발걸음을 인도 안 해서 안 나온 겁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모든 창조의, 참새가 떨어지고, 시장에서 팔리는 것도 누가 관여한다? 하나님이 관여하고 있는데, 인간들은 하나님의 관여를 쏙 빼놓고 자기가 원인이 되고, 자기가 목적을 다 이뤄내야 그래야 자기답고 성공자라고 자꾸 그런 사고방식에 물들어서 그래요. 이런 자본주의적 사고방식, 영웅적 사고방식에 물들어서 그래요. 행함만이 통하는 그런 원칙에 물이 팍 들어서 그런 거예요.
이런 자본주의부터 손대서 다 뒤집어놓을 때, 사람들은 그런 설교를 들으면 기가차서 “아니, 날 때부터 자본주의 체제에서 태어났는데 지금 우리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이럴 때 목사가 하는 말은 뭐냐? “뭘 바꾸란 말이 아니고, 나밖에 모르는 그런 자본주의 사회에서 추가적으로 주어졌던 과잉과 여분과 잉여가 있습니까?” 라고 묻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자기머리카락 쥐어뜯어서 대머리 되지 말고, “하나님께서 대머리되게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묻는 그런 취지로 지금 이야기하는 겁니다. 앞으로 자본주의가 아니라 그보다 더 지독한 사회가 옵니다. 돈 앞에는 부모, 형제도 없어요. 지금 부모가 유산을 안 남겨서 문제지 유산을 남겨보세요. 그러면 형제간에 고소하고 난리입니다. 앞으로 로스쿨 해서 변호사 많이 양산하면 형제간에 소송사건에 많이 투입될 겁니다. 돈 앞에는 형제간도 없습니다. 돈 앞에는 부모자식 관계도 없습니다. 물론 돈 앞에 부부도 없다는 것은 옛날부터 그랬고.
돈 앞에 목사, 교인도 없어요. 전부 돈 가진 놈이 성공자고 돈 빼앗긴 놈은 바보, 병신입니다. 사회가 그렇게 규정해요. 우리는 그것에 익숙해졌고, 그것이 습관화되었고, 아무리 성경에서는 그것을 세상 신을 쫓는 풍습이라고 하지만 그런 소리는 들리지도 않아요. 어쨌든 우리는 실패자 안 되는 것이 성공자이기 때문에.
그런 분위기가 있다 할지라도, 나 같은 그런 인간에게 난데없는 잉여와 과잉과 여분의 사랑이 주어질 때 우리는 그 속에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주님 이것 때문에 나는 성공자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롯이 나갈 때 자발적으로 나간 줄 압니까? 롯이 그렇게 천사를 대접하고 천사의 말을 들어도 안 나가려고 했어요. 왜? 습관이니까. 사람이 습관을 버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것에 익숙해져서 습성이 되었고 습관이 되었는데, 그것이 자기 문화였고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나와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어떻게 나옵니까? 천사가 롯을 억지로 끌고나가요. 왜? 롯의 눈에는 유황불이 안 보이고 천사의 눈에는 보이니까 나가지 않으려는 롯을 억지로 끌고 나갑니다. 예수님 눈에는 십자가 피 아니면 다 죽는다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오늘날 우리들은 ‘십자가 피 그것 뭐 그렇게 중요하나? 돈이 중요하지.’ 십자가 피의 중요성을 몰라요.
노아 때 사람들이 방주의 중요성을 모르듯이, 오늘날도 십자가 피의 중요성을 몰라요. 교인들도 모르고 교회도 몰라요. 여기 화평교인들만 알아요. 주무시는 분도 아시고 다 알아요. 다른 사람은 십자가 피 안 중요해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많이 버는 것이 장땡이입니다. 돈 없으면 사람대우 못 받으니까. 돈 없으면. ‘나는 복음을 안다.’고 변명을 해도 실패자입니다. 돈 많이 가졌으면 복음 모르고 교회 안 다녀도 그 사람은 다 우대합니다.
권력과 금력과 유행, 이 세 가지 빼면 뭐가 있습니까? 여기에서 하나 더 보탠다면 건강. 건강과 명예와 권력과 돈. 드라마나 세상 신문이나 방송에서 이 네 가지 빼놓고 무슨 이야기가 나옵니까? 다 이 이야기입니다. 왜? 우리의 관심사가 이것이니까. MBC에서 무슨 복음이 나옵니까. 기독교 TV도 복음이 안 나오는데 MBC에서 복음이 나오겠어요.
어느 날 방송에서 [추적 60분]인지, 어딘지 “기독교의 전도”에 대해서 나왔어요. 지난 토요일 밤에 했는데 보신 분 계십니까? 기독교인들이 복잡한 지하철에서 전도하는 것이 문제 있다고.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반대하는 목사들이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이 뭐냐? 소위 종교다원주의입니다. ‘기독교만 진리가 아니고 예수 믿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다른 신 믿어도 구원 받는다.’ 이 소리 하는 목사들이 쭉 나와서 길거리 전도를 비판한 거예요.
길거리 전도도 나쁘지만, 그것을 나쁘다고 비평한 목사들, 과거 대광고등학교 교목 했던 그런 사람들이 나와서 ‘기독교라는 것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 봉사하는 것뿐이지 자본주의 사회를 떠난 기독교는 무가치하다.’ 라는 거예요. 왜냐하면, 한국 기독교회 5만 여개 전체가 자본주의를 위하여 교회가 있어야 된다고 보는 거예요. 그런 교회만 부흥되었고, 그런 사학단체만 성장했다는 거지요. 서울대학 많이 들어가는 기독교 학교가 필요하지 하늘나라 많이 들어가는 기독교 학교는 필요치 않거든요.
보세요. 어느 구석 죄 아닌 게 어디 있습니까? 그게 이 디도서 시대에 사도바울이 통탄하는 이유입니다. 윤리, 도덕문제가 아니에요. 근본이 썩었어요.
2장 1절에 보면,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라고 되어 있는데, 14절에 보면,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이게 뭐냐 하면, 2장 12절에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심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그 다음에 14절에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이게 같은 거예요.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에 적시고 올라갔잖아요. 그냥 죄 안 적시면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을 필요 없지요. 깨끗한 몸으로 오셔서 죄에 적시다보니까 돌아가실 때는 그냥 돌아가시지 못하고 어떻게 돌아갔습니까? 십자가의 처형인 저주를 받고 돌아가셨잖아요. 그렇다면 그 다음은 누구 차례입니까? 우리차례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이미 성공자지요. 이미 성령으로 거듭났지요. 이미 우리는 거룩한 백성이지요. 그렇다면 불법을 적셔서 올라가야 돼요. 우리도 똑같이. 적셔서 올라가면서 우리는 뭘 느껴야 돼요? ‘아하, 이것이 불법이구나.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내 대신 돌아가셨구나.’ 라는 그 죄를 절실하게 느끼면서 가야 돼요.
‘자본주의가 이 세상을 완전히 버려 놓았구나. 그리고 나는 자본주의 출신이고 지금 내 사고방식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이 자본주의에서 성공하는 것. 이런 나의 죄, 세상의 죄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죽었다.’ 그런 예수님과 우리의 불법을 대비하면서 우리가 다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따로 도 닦는 도사로 만들지 않고, 세상 시장바닥을 누비게 하시잖아요. 누비면서 “이 콩나물 중국산 아니지요?” “중국산 아닙니다. 국산입니다.” 해서 사보면 중국산이고, 그렇게 중국산 사서 “오늘도 속았다.”고 씩씩거리면서, 속은 중국산 콩나물 먹은 힘으로 또 남을 속이고, 왜? 속이지 아니하면 돈이 안 나오니까.
공물상하면서 속이지 않고 돈 될 수가 없어요. “이건 새 물건입니다.” 하고 팔아먹고.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짓말 안 하고 살아가는 방법이 없어요. 이것은 교사도 마찬가지고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공부 못해도 구원 받습니다.” 이런 소리를 어디 학교에서 할 수 있습니까. “공부 못하면 망한다.” 이런 말을 해야 애들이 공부를 해요.
공부 잘하는 학급은 능력 있는 학급입니다. 그 학급은 사랑받고, 성적 떨어지는 학급은 학급 취급도 안 해요. 학부형들이 항의하고 난리칩니다. 그 반 담임 교체하라고. 담임 교체하라는 것은 좋은데, ‘담임이 키가 커서 교체해야 된다. 선생님 목소리가 안 좋다.’ 등등 온갖 소리가 다 나오는데, 그것 다 원인이 뭐냐 하면 ‘공부 잘해야 돈 되는데 왜 내 아이를 돈 못 버는 아이로, 바보 병신으로 만드느냐?’는 것이지요. 전부 돈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런 불법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건져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알아야 돼요. 이 세상에 대해서 철저히 다 공부를 해야 됩니다. 예술분야, 과학분야 전부 다 알아야 합니다. 김주원이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무용수가 반 누드를 찍었습니다. 돈 때문에 찍은 거예요. 왜? 월급이 적으니까.
무용계뿐 아니라 음악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진주이야기 들어보면, 음악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줄리아드 대학에 공납금이 1억입니다. 그 대학에 다니는 동양인 중 반이 한국 사람이에요. 줄리아드 3년 공부하면 공납금이 3억입니다. 3억 들인 것 밑천 뽑으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돼요? 교수 되려고 하면 또 돈 내야 돼요. 그냥 학교에 안 넣어줘요. 돈을 몇 억 바쳐야 그래야 전임 강사 되는 거예요. 실력 좋다고 되는 것 아닙니다. 돈이 돈을 버는 거예요.
이것은 병원도 마찬가지고 교회도 마찬가지라. 돈 있으면 대우받고 돈 없으면 인간 취급도 못 받고. 세상 어떤 자리도 돈과 무관한 곳이 한 곳도 없는 판에서 한평생 살면서 우리는 온 몸으로 느껴야 됩니다. ‘아, 진짜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구나!’ 이것을 평생 절실히 느끼면서 살아야 돼요.
나중에 늙어서 병원에 가 보세요. 의료보험 되는 것인지 안 되는 것인지 하나하나 따지지요. 경북대 병원 특실은 하루에 20만원, 8명 있는 데는 훨씬 싸요. 그 20만원 병실도 싫다고 도망치는 사람이 있어요. 갇혀 있는 것이 실타고 도망쳐요. 4일 병원에 있었는데 병원비가 130만원. 그래도 감사할 줄 모르고. 그러면 그 돈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이런 것을 따져보면 --
없는 사람은 몇 푼 벌어봐야 물가 올라버리면 더욱 쪼들리는데, 있는 사람은 경제가 어려울수록 돈을 더 벌어요. 희한한 일이지요? 어렵다는 이유 때문에 이자율이 높아지니까 돈을 더 버는 거예요. 어려울수록 돈 가진 사람은 골프 치러 더 많이 돌아다녀요. 그런데 없는 사람은 전세마저도 뽑아서 월세로 나 앉을 판이라.
그런데 이렇게 욕하는 사람도 자기가 돈을 가지면 무슨 행세를 할지 몰라요. 없을 때는 돈 가진 사람을 욕했는데 자신이 가지게 되면 똑같이 그 행세 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그 체제에서 못 벗어납니다. 못 벗어나기에 오직 주님의 긍휼하심이 또다시 우리에게 하나의 과잉, 여분의 은총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이것이 디도서에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놓여있는 세계의 실상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서, 몰라도 되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알아서, 우리가 죄인 중의 괴수로 살면서 웬 은혜인지 웬 축복인지 주님의 십자가 피로 용서받은 이 은혜를 어느 자리에서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다음에 계속 디도서 1장부터 상세히 해 나갑니다.
(2007. 11. 20. 08:33 녹취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