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출 3:13-15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2003년 9월 7일 본문 말씀: 출애굽기 3:13-15
3:13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3:15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창조주는 피조물에 의해서 포착되지 않습니다. 인간도 한 때 하나님을 안 적이 있었습니다만, 죄로 인해 죄가 세상을 장악하고 부터는 어떤 하나님인지에 대해서 대 혼란을 겪게 됩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신이 아닌 신입니다. 그 신이 너무 강렬해서 참된 신을 반길 바탕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렇게해서 참된 신을 알 수 있는 방도나 지혜는 여전히 인간에게 차단되어 있습니다. 신과 신은 이름으로 구분합니다.
이 구별에 오늘 본문에서는 여호와 하나님도 가담하십니다. "나는 여호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기존의 거짓 된 하나님과 참된 하나님과의 특징은 어떤 차이가 날까요? 이 점에 있어 둘 다 경험한 자에게 물어보면 되겠지요.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사울이라는 자가 의기당당하게도 예수믿는 자를 체포하러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갑자가 하늘에서 빛이 나타나 사울 일행을 체포하고 맙니다. 사울이라는 자가 얼마나 놀랬던지 사도행전 9:5에 보면,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황급하게 묻습니다.
빛 안에서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것은 바로 진정한 '주'의 영광이요 권위였습니다. 분명히 사울은, "주여!"라고 호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이라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을 확실히 믿는다고 자청하면서 나사렛 예수를 믿는 자를 핍박하려 가는 중입니다.
요한복음 16:2에 보면,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할 뿐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하리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주라고 믿게 되면 소위 여호와 하나님을 주라고 제대로 믿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로부터 핍박을 받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는 겁니다.
어째서 같은 구약 성경 글자를 보면서도 참된 하나님의 신자와 거짓된 하나님의 신자로 갈라서게 되는 겁니까? 구약 요엘 2:32에 보면,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2:21에 보면, 분명히 다음과 같이 바뀌져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즉 '여호와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바뀌져 있다는 겁니다. 여호와가 주요, 주가 여호와라고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사울이라는 자가 다메섹에서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물을 이유가 없겠지요. 사울은, 자신이 그동안 잘못된 하나님을 알고 왔다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에 누구보다도 율법에 열심이었던 그였기에 그가 스스로 여호와를 몰랐다고 할 이유는 생기지 않습니다.
그는 얼마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만만했던지, 여호와 이름으로 예수를 믿는 자를 잡아 죽이는 것이 곧바로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고 여겼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진짜 '주님'이 나타나니까 그동안 여호와라고 알고 있는 있었던 사실상 하나님이 아닌 것들로 들통난 것입니다.
그는 나중에 사도가 되고 이름도 사울에서 바울로 바뀌는데, 심지어 그의 입에서 서슴없이 '저주'라는 표현도 등장됩니다. 갈라디아서 1:8에 보면,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확신에 찬 자신있는 단언입니까! 저주라는 말을 남긴 것을 봐서 더 이상 타협이나 융통성을 부릴 그 어떤 여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저주'라고 표현 한 취지는, 온 세상이 사도 바울에 대해서 반박하고 부정하고 대들더라도 현실은 여전히 '다른 복음=저주'라는 공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달을 손가락으로 가르킬 때만 그 때 달이 나타납니까? 아니면 손가락으로 달을 가르키기 전에도 달은 그냥 중천에 떠 있는 겁니까? 달은 인간의 손가락들과 상관없이 그냥 홀로 떠 있는 겁니다.
이와마찬가지로 하늘 밑에 세상에 있는 인간들 끼리 멱살을 쥐고, 이것이 복음이니 저것이 복음이니 하면서 서로 싸우는 그 순간에도 저주를 내리시는 요건은 그냥 하늘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마치 달이 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와같은 자신감으로 사도 바울이 전도하고 다녔기 때문에 그는 사람을 기쁘게 할 의사로 복음을 왜곡시키지 않았습니다. 그가 알게 된 복음은 옛날 그가 여호와 하나님에게 열심내었던 그 진리와 확연히 다르지요.
그 복음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의 이름'으로 오신 이가 바로 나사렛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마섹에서 들은 바로 그 내용 그대로입니다. '주의 이름'이 왜 이토록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중요한가 하면, 구약에 보면, 주의 이름으로 구원이 주어지기 때문이요.
시편 143:11에 보면,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인하여 나를 살리시고 주의 의로 내 영혼을 환난에서 끌어내소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왜 '주의 이름'이 중요할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하나님도 되고 노아의 하나님도 됩니다. 하나님이 먼저 찾아와서 모세가 단독으로 만났다는 사실은, 모세 이외의 사람들은 참 하나님을 아는데서 배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노아가 혼자서 방주를 뚝딱 뚝딱 만들고 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노아가 알고 있는 하나님에서 배제되어 다른 엉터리 하나님을 알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경우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친히 찾아온 자들은, 그들 시대에 있어 그 사람에게만 하나님에 대한 참 진리를 알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특별히 누구를 찾아오는 것은, 장차 하나님께서 보내실 메시야가 사실상 하나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제대로 알고 계신 분이라는 점을 미리 알려주는 모형들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인물들은 일종의 지도 위에 그려진 지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대구도 있고 서울도 있지만 실제, 대구도 아니요 서울도 아니지요. 그저 표시이지만 이와마찬가지로 다윗으로 인해 예언된 시편 143:11의 말씀에 나오는 '주의 이름'이나 '주의 의'라는 것도 인간들이 제대로 알고 부를 수 있는 주의 이름이나 주의 의가 아닙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아브라함이든 이삭이나 모세든 다윗이든 간에 그들의 말이나 행위를 아는 것은 예수님 입장에서 볼 때만 비로소 밝혀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바로 그들이 예언된 '주의 이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유대인들은 여호와만이 주라고 보고, 따로 하나님의 이름이 필요치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시편 110:1에 보면 분명히 거기에 주님이 두 분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예언을 성취시킬 주님으로서 누구가를 실제로 보내셨는데 그 분이 바로 이 땅에 '주의 이름'으로 오신 분, 곧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8:29에 보면,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두지 아니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을 결합시키지 아니하면 진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무지한 사람으로 남습니다. 마치 사울이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려 달려드는 양상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편 143:11의 말씀이 어떻게 성취가 되는지를 살펴 봅시다. 흔히 구약 성경을 존중히 여기서 지켜서 구원을 얻겠다는 자들은 '주의 이름'을 자신들이 부르게 되면 그것으로 자신이 구원되는 걸로 여깁니다.
그러나 사울의 경우처럼 이미 자신의 마음 속에, '주님'에 대해서 엉터리 견해를 지니고 살고 있기에 아무리 입으로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할지라도 구원되지 못합니다. 즉 바리새인들이 바리새인들이 지옥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들은 구약에서 '성전'에 관한 말이 나오면 그들이 지었던 성전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인 줄 압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2장에 보면, 구약 때의 성전은 신약 때에 예수님의 몸을 두고 말합니다. 이러한 대 전환은 그들은 모릅니다. 그러면 어떤 자만이 제대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주의 의로 구원될 수 있을까요?
바로 시편 143:11의 말씀의 성취자는 인간이 아니라 따로 계신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자신이 성취한 말씀 성취를 가지고 하나님 백성에게 선물로 넣어주게 되면 그 때 비로소, 성도는 '주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도는 고백하기를, "내가 예수님이 주님을 아는 능력이 저에게는 일체 나타날 수없고 순전히 주님 되시는 예수님의 선물로 인해 얻어진 믿음입니다"라고 고백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성도는 자기 자신의 자질에 대해서 대견해 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성도의 자질로 믿어진 것이 아니라 주님으로 살아계신 나사렛 예수님의 능력이 임해서 그 사람은 '믿음'이라는 선물이 생긴 것입니다. 마치 다마섹에서 사도 바울이 받은 선물처럼 말입니다. 이로서 성경 말씀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만난 모세처럼 구원받은 자가 생기나게 되었습니다. 이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분이 따로 있는 그 취지를 우리가 잊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