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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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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와의 대화 (KARL BARTH"S TALK TABLE) 7자유게시판누가복음

칼 바르트와의 대화 (KARL BARTH'S TALK TABLE) 7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0)

제9회
제5부 제3절

학 생 : 하나님의 언어와 하나님의 강력한 행위는 어떤 관계입니까? 계시의 기본적인 성격은 언어이기보다는 오히려 행위가 아닙니까? 예를 들어, 예수의 수난을 생각해보십시오.

바르트 : 하나님의 언어와 행위는 하나요, 동일한 사실이지요. 하나님의 행위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동일한 실재에 대해 말하며, 따라서 그것들은 상이한 것이 아니므로 관계를 논할 수 없어요. 누가복음에는 예수가 "말과 행동에 힘있는 자"로 기술되어 있어요. 복음서들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기는 하지만, 예수의 모든 행위를 하나의 실재로 간주합니다. 예수의 말씀 중에서 행위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의 부활에 있어서 그의 생애 전체는 성령의 능력을 통하여 말씀됩니다. 출애굽은 구약을 제정하는 행위이고 따라서 이스라엘 역사는 이 행위에 대한 이해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이 행위는 이해되어야 해요. 그것을 이해시키는 자들이 예언자들입니다. 구약성서에는 출애굽과 예언이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에요. 둘이 함께 있는 것이지요. 출애굽은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행위가 하나님의 말씀에 우선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우선적인 것이나 2차적인 것이 없어요. 나는 나의 서설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했지만, 그러나 이것은 말씀이 우선적 범주라는 뜻은 아니에요. 제2권에서는 하나님 자신이 우선적이고 제3권에서는 창조주의 활동이 우선적입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으로 부각됩니다. 교의학에서는 동일한 실재를 다른 측면에서 이해하는 변화가 있어요. 기독교적 주제에는 계급제도가 없는 것이지요. 다만 하나의 진리, 하나의 실재가 있을 뿐이지만, 다른 견해 다른 측면이 있다는 겁니다. 마치 태양이 다른 장소들을 비추는 것과 같다고 하겠지요.

학 생 : 교수님께서는 「교회교의학」의 서설에서 "말씀"을 의도적으로 중심으로 삼았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이 교회의 중심인 까닭이겠습니까?

바르트 : 말씀은 교의학의 과제가 관계될 때만 중심적이지, 반드시 교회전체에 중심적이라고는 할 수 없어요. 물론 개신교에서는 말씀을 강조하지만, 그러나 "말씀"에 대한 형이상학적 원이라는 없어요.

학 생 : 그러나 교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말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대신에, 우리의 행동을 통하여 행동할 수 있다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까?

바르트 : 나는 그것을 배제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나 여기서는 교회에 있어서 교의학의 역할에 관심을 두어야 하겠어요. 만일 내가 학생의 진술을 받아드리려면 "행위"의 의미를 설명해야 할겁니다. 그리고 나서 행위는 곧 말씀의 설교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나는 카톨릭 교인이 아니니까요.

학 생 : 치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도 하나의 행위입니다.

바르트 : 가령 치유목회라는 것이 있다고 합시다. 이 치유목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치유목회와 합법적으로 관계가 있다면, 그것은 세계에서 증거한다는 의미에서만 행위로 간주할 수가 있지요. 목회자는 세계를 개선할 수는 없지만, 예수의 능력에 대해서는 중요한 증인이 될 수 있어요. 따라서 만일 우리가 치유를 설명하려면 석의(exegesis)를 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말씀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학 생 : 우리는 하나님의 행위를 윤리로서 반복할 수 있지 않습니까?

바르트 : 나는 "반복"(repetition)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것도 로마 카톨릭교회가 이용함으로서 짙게 채색된 용어입니다. 그들은 또한 발걸음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행위를 반복하는 윤리를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바울이 뜻하는 바가 아니지요. 우리는 제자로서 증거하도록 부름을 받았어요.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동일한 행위를 할 수 없지요.

학 생 : 교회의 사명은 "복음선포"(proclamation) 입니다. 그것은 설교로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바르트 :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는 교의학에서 설교와 관련되어 있지요. 교회생활에서는 교의학이 교회의 교훈에 관계되어있고, 거기서 교회는 사상과 언어를 필요로 하지요. 즉 단지 행위뿐만이 아니라 두뇌의 활동도 필요로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교회생활의 교리적 측면입니다. 아마도 학생은 사실 이상으로 나를 교의학적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교회생활의 다른 측면들을 존중하고 있답니다. 의미

학 생 : 교수님은 164페이지에서 3가지 시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시간, 사도적 증거의 시간 및 교회의 시간에 대해서 언급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시간에는 기독론적 유사성이 있는 것입니까? 예를 들면, 부활은 곧 사도들의 시간, 승천은 곧 그리스도가 세계에서 물러가신 시간과 시간의 사이, 그리고 재림은 곧 모든 사람이 듣고 이해하는 그리스도 등으로 말입니다.

바르트 : 네 물론이지요. 그러한 유사성은 가능합니다. 다른 것들도 있을 수 있지요. 제사장, 왕 및 예언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역사는 어때요? 또는 삼위일체의 유비는 어때요? 안 될 리가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밝혀두어야 할 사실은 이것은 일종의 지적장난(intellectual play)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만일 이런 유사성들이 문제를 밝혀준다면 그들은 사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3가지 시간을 선택한 내적 필연성을 확인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확인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 유사성들에서 출발할 수는 없고, 추후에 그것을 발견할 따름이지요.

학 생 : 교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의 행위, 또는 사건이라고 강조하시면서 그것은 우연적(contingent) 성격을 띤다. 그것은 "우연적으로 동시대적"(contingently contemporaneous)이라고 언급하십니다. 그러나 그 우연적 성격이란 우리의 측면에서 보여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측면에서는 그의 성실성에 의하여 제기되거나 수정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우연적"이 "이유 없이"를 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르트 : 그러나 이 사건 배후에는 이유가 있어요. 내가 "우연적"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말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행위를 "일반적"(general)인 것의 윤곽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이에요. 그러나 이 사건의 성격이 하나님의 성실성을 배격하는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아요. 이 사건 자체가 하나님의 성실성의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행위를 하시거나 말씀하실 때 그는 성실한 하나님으로서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행위와 말씀의 의미이지요. 아무도 그것을 의심할 수 없어요. 그는 자기의 약속을 성취하실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목적을 지니고 있어요. 그것은 불꽃놀이 같은 것이 아니라, 마치 총과 같이 목표를 겨냥하고 일정한 시간과 일정한 상황에서 쏩니다. "사랑", "평화", "본질", "최고한 존재"와 같은 일반성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말씀은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학 생 : 하나님의 말씀은 교회밖에 있는 자들, 곧 전 세계를 통치하는데 어떤 영향력을 미칠 수 있습니까?

바르트 :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전 세계, 곧 그리스도 주권 아래에 있는 세계를 통치한다고 믿을 수 있지요. 성 바울을 생각해보세요. 그는 이 능력을 믿었어요. 따라서 그는 그것을 자기가 사는 세계에 설명해야했지요. 예수의 주권의 실재는 세계가 그것을 깨닫기 전에 도래합니다. 그것은 가능성으로 설명될 것이 아니라, 실재라고 하겠어요.

학 생 : 그러나 그것은 계시로서의 세계를 지배하는 것입니까?

바르트 : 그렇지요. 계시는 능력이니까요. 어두움 속에 들어오는 빛을 생각해보세요. 어두움이 그것을 전복할 수가 없어요. 그의 빛은 어두움을 극복합니다. 요한복음의 서론을 생각해보세요. 모든 만물이 로고스(Logos)를 통하여 창조되었고, 로고스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할 때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제10회
제5부 제4절

학 생 : 교수님께서는 하나님은 성육신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감추시는 동시에 드러낸다고 말씀하십니다. "감추신 것"(veiling)은 예수이고 나사렛의 "드러내신 것"(unveiling)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입니까?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어찌해서 보다 명백하게 언급되지 않습니까?

바르트 : 그러니까 학생은 내가 보다 기독론적으로 말하기를 바란다는 것이지요. 나는 학생의 진술을 받아드리기를 주저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하나님의 말씀의 감추인 성격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만일 학생이 하나님의 육신을 입으신 것, 즉 하나님의 말씀의 겸비의 관점에서 기독론을 상고한다면, 그것은 옳은 것이에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고찰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어요. 즉 하나님이 드러내시는 사실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드러내심이지요. 감추인 것과 드러낸 것을 구별하는 "법칙"은 없어요. 이 사건에는 두 부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두 계기가 있을 따름이지요.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한 베드로의 고백을 보세요. 그리스도 안에는 존재론적 일치가 있어요. 그러나 베드로에게는 이 일치가 다만 신앙 안에서만 있는 것입니다.

학 생 : 만일 교수님께서 바울의 말씀을 연구하신다면, 바울의 말이 당신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하게 되는 순간이 있을 것입니까?

바르트 : 그렇지 않아요. 당신을 위해서 일치(unity)는 있을지 몰라도 동일성(identity)은 없어요.

학 생 : 교수님께서는 198페이지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감추어지거나 또는 드러내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말씀은 감추어지거나 또는(or) 드러내어지는 것보다는, 오히려 완전히 감추어지고 또한(and) 드러내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제가 교수님의 신관 제2권 제2부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읽고 얻은 결론입니다.

바르트 : 나는 여기서 "감추어진 또는(or) 드러내진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그 까닭은, 나는 말씀의 일방성, 곧 그 계기(moment)를 강조하기 싶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나는 감추어진 계기와 드러난 계기를 구별하고 싶어요. 그러나 내가 제2권에 있는 하나님 인식에 관한 항목에서 감추어진 것과 드러난 것에 대해서 언급할 때 나는 하나님 자신의 견해의 맥락에서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나는 거기서 일치를 강조할 수밖에 없어요.

학 생 : 교수님께서는 205페이지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신비로운 "일방성"(one-sideness)에 관한 성서적 사례들을 들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교수님께서는 시내의 계약(the covenant of Sinai, 출19-20장)과 예레미야의 계약(the covenant of Jeremiah, 렘31장)은 종합하거나 조화될 수 없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있는 증언의 일치는 석의에 의하여 증명될 수 있지 않습니까?

바르트 : 내가 이것을 기술할 때는 두 계약 사이에는 상이성이 있음을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학생은 또한 제4권 제1부에서 "계약"에 대하여 언급하는 바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거기서 나는 약간의 일치점들을 보려고 했어요. 그러나 나의 동료인 월터 바움가르트너(W. Baumgartner)가 동의하는지 모르겠어요. 그것은 미해결의 문제입니다. 여기서 나는 이 가설에 대하여 지나치도록 자신있게 말했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나는 좀 더 회의적이에요. 석의로서 증언의 일치를 찾아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일치점은 신앙으로만 이해가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이것은, 나사렛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요한복음의 증언과 하나님의 아들은 나사렛 예수라는 공관복음의 증언의 경우에 사실일 겁니다. 신약성서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고 이것은 신앙으로만 이해가 가능합니다. 학생은 석의로서의 그리스도에 대한 매우 상이한 의견을 찾아볼 수 있어요. 석의는 케리그마(kerygma) 없이 완전할 수 없고, 또한 케리그마는 신앙의 대상일 따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은 석의에 있어서 훌륭한 역사적 및 비판적 작업의 대용품이 될 수 없어요.

학 생 : 교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3가지 형태(예수 그리스도 자신, 성서, 선포)를 말할 때 그 속에 성례전도 포함한다는 뜻입니까?

바르트 : 성례전은 설교된 말씀에 포함되는 것이지요.

학 생 : 교수님께서는 퀘이커 교도들의 "내적인 빛"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르트 : 퀘이커 교도들은 참으로 훌륭한 사람들이므로 나는 그들을 비판하기를 원치 않아요. 그러나 그들의 신학이 훌륭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성령 이외에 나의 마음속에서 말하는 또 하나의 영이 있을지도 몰라요. 성서는 계시에 대한 보다 확실한 자료입니다. "참 빛"(true light)을 이해하려면 요한복음 1장을 읽어보세요.

학 생 : 교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인간의 "개방성"(openness)에 대하여 언급하실 때 뜻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바르트 : 성령은 말씀 자체의 주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들은 것의 주님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마음의 개방성을 뜻하지요. 성령은 듣고 받아들이도록 인간의 마음을 개방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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