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와의 대화 (KARL BARTH"S TALK TABLE) 6
칼 바르트와의 대화 (KARL BARTH'S TALK TABLE) 6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0)
제7회
제4부 제3절-제4절
학 생 : "계시된 말씀"에 관한 이 절에서 성령이 보다 선명하게 부각되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르트 : 학생은 1932년의 신학적 상황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당시에 나는 계시의 객관적 측면,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크게 강조점을 두려고 하였지요. 만일 내가 성령을 강조하였더라면, 내가 바로 극복하려고 하였던 주관주의에로 되돌아가지 않았을까 염려되는군요. 나는 오늘날 성령에 관하여 더 많이 언급할 겁니다. 나는 지나치게 조심성이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여러분 학생들은 여러분의 논쟁적인 저술에서 그러한 과오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학 생 : 교수님은 지금이 신학이 성령론 위에 근거할 때라고 생각하십니까 ?
바르트 : 훌륭한 신학은 신조의 3가지 항목 중의 어느 것에도 기초를 둘 수 있어요. 학생은 그것을 성령론 위에 둘 수 있을 겁니다. 오늘의 훌륭한 성령론은 쉴라이에르마헤르와 모든 근대주의에 대한 최선의 비판이 될 겁니다. 내가 쉴라이에르마헤르에 대하여 공격한 것보다 훨씬 우월하리라 생각해요. 불트만과 실존주의 신학에 대한 훌륭한 비판도 이와 같은 노선에 있을 겁니다. 쉴라이에르마헤르는 신학을 성령 위에 확립하려고 온갖 시도를 다한 사람이지만,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였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큰 낭패였어요. 그러나 우리는 그 시도를 감사해야 할겁니다. 나 개인의 생각으로는 성령의 신학은 2000년 이후에나 해당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우리는 아직도 18세기 및 19세기에 너무 접근해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의 성령과 인간의 영을 구별하기란 아직도 너무 어려워요.
학 생 : 성령의 신학이 주관적 측면 대신에 객관적 측면, 즉 인간의 측면을 떠나서 하나님의 측면에 근거할 수 있습니까 ?
바르트 : 나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모르겠어요. 삼위일체가 인간을 만나는 초점을 만들어요. 우리가 인간과의 접촉을 제외하고 성령론을 생각할 수 있겠어요?
학 생 : 교수님께서는 136페이지에서 세 가지의 형태로 된 "하나님의 말씀론"(계시, 성서, 선포)이 "삼위일체론"(아버지, 아들, 성령)에 대한 유일한 유비(類比)라고 서술하셨습니다. 유사성과 비유사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바르트 : 삼위일체론에서 세 "위격"(位格, person)은 동일한 하나님이요, 또한 하나님의 말씀론에서 3가지 형태는 동일한 말씀이지요. 그러나 아들과 성령은 하나님이 "되지"(become) 못하는 반면에 성서와 선포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아들과 성령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버지와 구별되고 상호간에 구별됩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낳지만"(engender), 성령은 낳지 않아요. 성령은 "보내심"(sent)을 받지요. 비록 아무도 - 어거스틴까지도 - 그 이유, 즉 상이점을 분명히 설명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구별은 필요합니다.
학 생 : 교수님은 소위 "실존주의적 석의"(existential exegesis)에 대하여 어떤 반대의 입장을 취하십니까?
바르트 : 실존주의적 석의자는 본문과의 자기 자신의 대화뿐만 아니라 특수한 인간학 곧 하나의 사고유형을 전제로 합니다. 나의 경우에는 과오가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실존주의자의 경우에는 과오가 필연적인 것이라고 하겠어요.
제8회
제5부 제1절-제2절
학 생 : 계시에 대한 요구는 계시 자체와 구별되는 것으로서 경험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까? 즉 어거스틴이 "우리의 마음이 당신에게서 안식을 취할 때까지는 평안이 없나이다" 라고 말한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까? 따라서 틸리히에 있어서와 같이 상관관계의 여지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바르트 : 만일 우리가 어떤 요구를 경험한다면, 우리가 요구하는 사실에 관하여 아는 바가 있다는 것이 아닌가요? 나는 계시와 그것의 요구의 구분을 받아들일 수 없어요. 그 요구는 계시를 아는 자들에 의해서만 경험됩니다. 하나님의 답변은 질문을 불러일으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하기 전에 그분을 찾을 수 없고, 따라서 우리가 그에게 발견되기 전에는 그를 발견할 수 없어요. 이때 우리는 진정한 질문을 보게 됩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거짓 질문들이 많아요. 어거스틴의 인용구에 대하여 한 마디 한다면, 그의 「참회록」은 그가 플라톤에 얽매이었던 시대에 기술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학생의 마지막 질문에 답한다면, 나는 철학적 질문과 신학적 답변 사이에 어떤 상관 관계가 있다고 보지 않지요. 만일 하나님이 플라톤이나 나의 친구 폴 틸리히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존재라면 상관관계가 있겠지요.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분이라면, 해답을 찾기란 그리 단순하거나 용이하지가 않을 거예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나는 훌륭한 철학자에 대하여 진심으로 존경을 표합니다. 따라서 나는 나의 친구 폴 틸리히를 존경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가 기독교 신학을 저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이 자연적 영역 속에는 "피조물"이나 "창조주"와 같은 것이 없어요. 가령 나 자신이 피조물임을 인식한다면, 나는 나의 한계와 나를 한정하는 그분, 곧 하나님과 창조주를 인식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식의 영역에 처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밖에 있다고 해야지요. 이것은 계시 또는 신앙의 문제입니다.
학 생 : 이 질문은 하나님의 말씀의 형식과 내용에 관계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내용을 간접적으로, 즉 그 형식들에서 추리된 "반성된 영상"(reflect image)으로만 알 수가 있다면(pp.149-150), 이 간접적인 지식의 형식적인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유비에 근거한 것입니까? 나는 교수님께서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 반대함을 알고,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를 지지하신다고 추정합니다. 교수님께서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바르트 : 간접적인 지식에 대해서도 말씀과 우리에게 공통적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반성된 영상과 사물 자체 사이에는 유비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유비" 라는 말은 로마 카톨릭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이 존재의 유비를 주장하기 때문이지요. 로마 카톨릭교회의 자연신학 전체는 "존재"(esse)의 유비가 있다는 가정에 근거를 두고 있어요. 하나님은 존재(is)하시고 피조물도 존재합니다. 물론 다른 양식으로 존재(is)하지만 둘이 모두 존재(are)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그들 사이에는 공통한 것이 있어요. 가령 내가 존재(esse)에 대한 바른 개념을 지닌다면, 나는 하나님과 피조물에 관하여 어떤 사실을 알게 되고 존재의 개념을 심화할 수 있으며, 따라서 피조물과 창조자에 대한 모종의 지식을 습득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주의에서도 인간이 이러한 존재의 개념으로 하나님을 포착합니다. 내가 존재의 유비를 반대하는 이유는, "존재"란 하나님과 피조물의 성격과 전혀 무관한 순수한 철학적 개념이기 때문이에요. 그것은 그들에 대한 지식에 근본이 될 수 없는 추상적인 것이지요. 나는 신앙의 유비를 지지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의 3가지 형태를 지적할 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인식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3가지 장(場, places)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 속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유비가 깃들이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수립되는 유비입니다. 이 3가지 형태 속에 진정한 관계성을 위한 기회가 현존합니다. 그것은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행위와 인간의 경청하는 행위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지요.
학 생 : 성서에는 인간의 언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서에 진실할 때 진리를 언표하는 것으로 상정합니다. 그러나 그 근거가 무엇입니까?
바르트 : 우리는 인간의 언어가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주어지는 신앙으로 언표될 때 거기에는 진리가 있다고 상정할 수 있지요. 이 사건의 맥락 속에 진리가 있어요.
학 생 : 교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에 관해 피력하는 이 절에서 단순하게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명제로 시작하지 않고, 이 절의 나머지를 그 명제의 설명으로 채우지 않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르트 : 그것은 발전인지도 모르겠어요. 「교회교의학」의 기독론적 특성은 제1권에서 기대하는 것만큼 선명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교육학적으로 볼 때 처음에 주저하면서 시작하였다가 균형을 잡으면서 끝맺는데 유익한 면이 있어요.
학 생 : 저는 교회의 선포와 성서가 문자적 의미에서 언어임을 이해할 수 있으나, 계시가 꼭 같이 문자적 의미에서 언어로 간주 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계시의 완전성과 풍부성, 곧 그의 생애, 죽음, 부활 및 특히 교회 안에서 그의 현재적 생활을 관찰함에 있어서 지나치게 제한을 두는 것이 아닙니까? 예를 들면, 성례전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언어를 능가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르트 : 제3절의 첫 문장을 보세요.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곳에서 상응한 행위를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라고 되어있지요. 그것은 언어의 영역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물론 문자적인 의미에서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하나님의 언어는 인간의 언어가 없는 곳에는 없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말에서 분리시킬 수가 없어요. 예언자들을 생각해보세요.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라고 한 다음에 그들의 히브리말이 뒤따라와요. 나는 하나님의 언어, 즉 신적인 언어(a Godly Word)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께 말씀드리려는 시도입니다. 우리의 경청은 시도에 불과해요. 우리의 설교도 시도입니다. 그러나 시도는 있어야 합니다. 이 시도를 매개로 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시니까 말이죠.
학 생 : 말 속에 담을 수 없는 것은 없습니까?
바르트 : 있지요. 말은 지적할 따름이지만,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도 하나님의 말씀에 속하고 따라서 우리를 위한 말씀이라고 하겠지만, 성서와 선포의 증거를 떠나서는 있을 수 없지요. 성례전에 나타나는 말씀 - 나는 "성례"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 은 언어를 능가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언어입니다. 따라서 성례전은 언어가 없는 것이 아니에요.
학 생 : 그러나 문자적 언어가 인간의 합리적(rational) 측면에 호소된다고 봅니다.
바르트 : 아, 그러니까 학생은 내 전제에 반대하는 것이군요. 우리는 전적으로 합리적이 아니라면 비합리적(비이성적)이에요. 인간에게 발생하는 모든 사실은 그의 이성(ratio)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
학 생 : 우리는 152페이지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기본적으로 정신적"(primary spiritual)이라는 진술을 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페이지에선 그것은 "합리적이고 비합리적 사건이 아니다"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교수님은 정신적이라는 것과 합리적이라는 것이 동일하다는 것을 뜻합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제가 관심을 두는 이유는, 일부 사람들이 교수님에 대하여 신학에 있어서 비합리적주의를 진작한다고 비난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교수님의 신학이 근본적으로 합리적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르트 : 이 맥락에서 "정신적"(geistliche가 아니라 geistige)과 "합리적"은 동일한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성에 관해서는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즉 나는 이성을 불신하는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나는 이성을 크게 신뢰해요. 나는 합리주의자가 아니지만 이성은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고 우리는 신학에서 그것을 충분히 이용해야 한다고 믿어요. 이것은 둘에 둘을 더하면 다섯이 아니라 넷이라는 사실을 구별하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우리가 찬양을 드리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나의 합리주의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성을 으뜸가는 추상적 재판장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비합리적인 것이지요.
학 생 : 우리는 151페이지에서 어떤 물리적인 사건과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정신성을 근본적으로 강조한 것을 봅니다. 그러나 교수님께서는 물리적 사건 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없다고 조급하게 부언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 이전에는 말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뜻합니까? 그것은 말씀의 수용자들(addressees)의 존재는 교수님께서 그 장 158페이지 후반부에서 배제한 개념인 하나님의 말씀의 개념을 위해 어떤 면에서 구성요소가 된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입니까?
바르트 : 나는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보지 않아요. 하나님의 말씀은 성육신 이전에 성육신에 관심을 두었어요. 이스라엘 역사상에 언표된 말씀, 곧 홍해에서 표현된 물리적 사건을 생각해보세요. 추후에 출애굽은 이스라엘 민족의 기억 전체의 핵심이 되었어요. 그것이 사건 전체로서가 아니라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로서 받아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체적 사실들을 많이 내포하고 있는 구약성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복음이 단순하게 영혼과 천당을 위한 순전히 정신적인 것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은 좋은 현상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영혼과 육체, 하늘과 땅, 내면적 및 외면적 삶을 위한 것이지요. 나의 머리털 하나도 하나님의 관심밖에 있는 것은 없어요. 또한 신약성서의 기적들을 생각해보세요. 구세주는 질병과 육체적 죽음에 관심을 두고 있잖아요? 여기서 우리는 동방 정교회에서 배울 것이 많이 있어요. 우리는 종교적, 도덕적, 사회적, 심리적 측면에서 생각하고, 전체적 인간의 측면에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요. 우리는 전체적 인간, 즉 땅위에 두 발을 디디고 있는 합리적 존재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구속은 전체적 인간의 구속, 곧 육체적 부활이에요. 하나님의 말씀이란 정신적 측면에서만 이해될 수 없어요. 기본적으로는 그렇지만, 그것으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