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반복]
[ 차이와 반복 ] 질 들뢰즈 저 김상환 역 민음사(서울: 2005)
차이의 반대말은 동일자이다. 모든 것을 균등하게 보자는 것이다. 과연 이 세상은 인간들이 기대하는 바와 같이 균등한 질(質) 안에서 움직이고 있는가? 바로 이런 시비 점을 가지고 저자는 전통적인 모든 철학에 대해서 도전한다. 세상을 다른 관점으로 다시 보기를 요구한다. 그 새로운 관점이란 바로 이 세상이 ‘차이’와 ‘차이’들이 엮어져서 구성된 세상이라는 것이다.
‘차이’를 고려하지 아니하면 뭐가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특정한 법칙과 원리가 사람들의 인식 안에서 횡포를 부리게 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종교요 과학이다. 신에 관한 지식이 독점되면 그 원칙 밑에 모든 자를 종속시키려 한다. 이것은 비윤리적이다. 요즈음 과학이 진리에 대해서 독점하고 있다. 이 또한 비윤리적이다. 과거 인류 사회나 오늘날 사회나 역사는 이런 비윤리적 독재를 용인하면서 지내왔다.
우주는 인간이 생각한 그 이상으로 넓고 변화무쌍하다. 이 변화를 읽어내는데 있어 이제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그것은 곧 존재 위주가 아니라 차이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이 획기적인 안목에 따라 논리를 전개하게 되면 기존의 모든 이론들은 전부 전제주의적 노림수를 품고 있었음이 드러난다. 각자 주체가 되어 타인을 정복, 지배하려는 욕망을 진리라는 명목으로 포장해 놓는 기술에 불과한 것이다. 저자는 이 모두를 깨트려 버리려 한다.
서로 다르지만 대립하지 않는 쪽으로 나아가는 방도가 없을까? 그것은 모든 동일성을 일체 인정치 않고 모두 차이와 반복으로 해체시켜 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구체적 형상이나 입자를 띠고 있는 개체물들은 자체적으로 동일한 속성과 본질을 지니고 있는 게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 저자는 그 동일성을 달리 해석하자는 것이다. 무엇으로 해석하는가? ‘강도’ 즉 밀도의 세기로 보자는 것이다.
아무런 재료를 전제로 하지 말고 동일성이나 유사성으로 나아갈 소지가 있는 재료라는 개념을 선정할 것이 아니라 ‘차이의 강도’로서 설명해야만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차이의 강도가 구체적 실물을 낳는다는 아이디어는 영혼과 물질의 직접적 연결 및 그 메커니즘을 연구한 라이프니츠의 시도에서 발상된 것이다.
세밀하고 작은 차이들이 이 우주에는 가득하다. 그 차이들은 운동을 한다. 그 운동의 결과물들이 이 세상의 사물들이요 사건들이다. 차이란 최소 단위의 물질이 아니다. 차이는 감각되지 않는다. 단지 차이를 알 수 있는 것은 동일성과 일반성으로 이해되는 그 이해성이 깨어지는 틈바구니에서다. 차이는 곧 사람들 사이에는 죄와 악으로 불린다. 동일성을 훼방한다는 죄목으로 억눌려버림을 당한 것이 ‘차이’다.
이런 점에서 이 세상의 윤리성이란 실제로는 진정한 진실인 ‘차이’를 죄악으로 매도한 대가를 치러서 정립해낸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도리어 이런 윤리성을 비윤리로 보는 것이다. 저자는 ‘차이’를 죄에서 구원하고자 하면서 동시에 이 세상의 진정한 모습을 밝히려 한다.
이 세상의 공통의 개념만이 진리로 통해왔었다. 실은 인간은 반성적 이성 작용에 의해서 외부로 재현된 것들이다. 이 개념들은 동일성과 술어들의 대립과 판단의 유비와 지각의 유사성에 복종한 그 결과물들이다. 그렇다면 기존의 이론(형이상학)에서는 다 수용하지 변화들과 차이들을 어떻게 대접했나? 헤겔은 그것들을 ‘모순'으로 취급하여 무한이 큰 것을 동원하여 동일성 안으로 해소시켜 극복하려고 했다.
라이프니츠는 그 반대로, 오로지 무한하게 작은 것의 형태로만 무한을 유한 안으로 도입하려 했다. 그것이 미분법의 발명이다. 특이점 주변으로 차이들이 오밀조밀 모이는 양상으로 유기체의 나타남을 설명하려 했다. 헤겔과 라이프니츠는 ‘차이’가 유기적 질서 안으로 해소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 것처럼 소개한 셈이 된다.
그러나 둘에게 빠진 것이 있다. 그것은 사물이나 사건을 응시하는 제3자를 있음을 고려해야만 했다. 관찰자로서, 목격자로서 활약하는 영혼(정신)이 있다. 이 영혼은 인간의 영혼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기물을 비롯해서 모든 것에 다 작용하는 영혼(정신)이다. 그것이 모든 것을 반복성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 반복은 ‘반복’에서 뺏아 온 ‘차이’를 통해서만 반복을 말 할 수 있다. 이로서 영혼의 실제성과 활동성은 시간을 통해서 증명이 된다.
시계 소리를 ‘똑 딱’의 반복으로 일반성을 구축하는 것이(술어의 대립) 정신 활동이며 이 활동은 뭐든지 종합하기 위한 활동이다. 유기체는 이 종합으로 그 자태를 드러낸다. 모든 유기체는 수축, 파지, 기대들이 어우러진 어떤 총합이다. 생명은 이 안에서 숨쉰다. 이 총합의 세 가지 형식으로 정립된 일반성 아래서 시간은 영원히 현재 뿐이다. 즉 수축된 현재와 잡게 된 현재와 기대되는 현재 뿐이다. 이것이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의 내용이다.
시간의 두 번째 종합은 시간의 근거 살피는 종합이다. 현재란 실은 지나가버리는 현재다. 과거가 전달해 준 것만 쥐고서 현재를 구성한다. 이처럼 현재란 과거에 비해서 수동적이다. 과거는 결코 시간의 한 차원이 아니라 시간 전체의 종합이며 현재와 미래는 단지 그 종합에 속하는 차원들에 불과하다.
과거란 사라진 현재 속에 내속하고, 현행적 현재나 새로운 현재와 더불어 공속한다. 이 시간적 종합에 따라 정신(영혼)도 전체의 반복을 관찰할 수 있다. 따라서 정신은 항상 상기(想起)한다. 그러나 순수 과거의 애매성은 뭔지 모르게 항상 결핍을 남긴다. 따라서 시간의 두 번째 종합은 시간의 세 번째 종합을 부른다. 이 때 영혼보다 앞서가는 시간으로 결핍을 메운다. 주기와 습관과 반복에서 벗어나 있는 시간이다. 과잉 반복으로 인해 오로지 새로운 것만 불러온다. 과거의 반복을 늘 버리는 식이다. 태양마저 폭발시켜 태양조차 없는 세계다. 지금까지 이끌어온 모든 행위자를 추방한다. 신(神)의 동일성도 깨어진다. 과잉, 그 자신의 추진력만으로 존재하는 세계다.
차이에서 출발해서 실제 구체물이 각자 형성되기까지에는 먼저 ‘문제제기’부터 있었다. 이것은 어떤 질료가 먼저 있고 그 다음의 형상이 덧입혀져 동일성과 유사성을 낳는 식이 아니다. 문제제기란 개념과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이념과 연관된다. 즉 도식화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미분이란 이념적인 차이며 이 미분화에 의해서 이념은 연속체를 낳는다.
완결된 수준에서 미분화된 이념화된 상태를 ‘판명’이라고 칭하는 반면, 양적으로 질적인 분화의 형식들은 ‘명석’이라고 칭한다. 예를 들면, 파도의 물방울이 판명이라면 그 물방울이 바다 전체가 그렇게 몰아세웠음을 아는 것을 ‘명석’이라고 하고 그 명석은 복잡한 것임을 안다. 반면에 판명의 상태는 애매하다. 이념들이 곧 다양체들이다. 다양체들 간의 연관, 미분적(수학에서 말하는 微分) 비율관계는 상이한 시공간적 결합관계 속에서 현실화 되는데 이 이념의 역량이 내부에서 작용하여 질(質)을 만든다. 산출된 질들은 인식의 실재적 대상들 사이에 있는 차이들이다. 배란된 알에서 각종 아기 동물들이 나오는 그 과정을 연상하면 알기 쉽다.
잠재적인 것들이 주름 편을 통해 운동을 일으키는데, 강도적인 반복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 문제 제기에 일어나는 이념을 막-주름 운동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공존하는 다양체와 변이성들, 요소들의 규정들, 변동적인 독특성들의 분배들, 그리고 이 독특성들 주위에서 이루어지는 이념적 계열들의 형성들 등이 어우러져 있다.
현실적인 모든 강도적 계열들을 장악하고 포괄하는 카오스(혼돈)의 상태를 온-주름운동이라 부른다. 이때 현실적인 이 강도(强度)적 계열들은 이념적 계열들에 상응하고, 이 계열들을 구현하며, 그런 가운데 이 계열들의 발산을 긍정한다. 이 카오스는 또한 자기 자신 안에 문제들의 존재를 수용하고 또 자기 자신 안에서 형성되는 모든 체계와 모든 장(場)들의 문제제기적인 것의 항존하는 가치를 부여한다. 이러한 강도적 계열들의 상태를 안-주름운동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이 계열들은 자신들 간의 차이들을 통해 소통하고 공명하는 가운데 어떤 개체화의 장들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계열들은 다른 계열들에 의해 ‘안-주름져’ 있고, 다시 다른 계열들을 함축하는 것이다. 이 강도적 계열들은 체계 안에서 ‘봉인하는 것들’과 ‘봉인되는 것들’, ‘해결하는 것들’과 ‘해결되는 것들’을 구성한다.
끝으로 기저(基底: 밑바닥)의 계열들 사이에서 체계를 뒤덮고 개봉하는 질과 연장(延長)들의 상태를 밖-주름운동이라 부른다. 여기서는 분화들이 구체화되고, 최종적인 해(解)의 집합(애초 질문제기에 상응하는 그 해답)을 정의하는 적분(積分)들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봉인의 중심들은 여전히 문제들의 끈덕진 항존을 증언하거나 이 문제들의 밖-주름운동과 해결운동 안에서 안-주름운동의 가치들이 여전히 항존하고 있음을 증언한다. 이것이 겹-주름운동이다.
밖-주름운동 중에 있는 심리적 체계들 안에는 여전히 어떤 안-주름운동들의 가치가 있다. 다시 말해서 거기에는 개체화 요인들을 위해 증언하는 어떤 봉인(封印)의 중심들이 있어야 한다. 이 중심들은 분명 나에 의해서도, 자아에 의해서도 구성되지 않는다. (저자는 나Je 자아Moi를 구분한다. 나는 고유하게 심리적인 종별種別화를 형성하고, 자아는 고유하게 심리적인 유기적 조직화를 형성한다)
이 중심들은 오히려 나-자아 체계에 속하는 어떤 전적으로 다른 구조에 의해 구성된다. 이 구조는 타인이라는 이름으로서 지칭되어야 한다. 이 구조는 그 누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오직 다른 나에 대한 자아를, 자아에 대한 다른 나를 가리킬 따름이다. 예를 들면, 겁에 질린 나의 얼굴은 겁을 주는 타인이라는 무서운 세계의 얼굴을 내가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라는 인간은 표현되는 그 바깥에 실존하지 않고 있다. 결국 우리 모두는 봉인된 자아들이다. 우리의 눈을 빛의 표현이요 우리의 귀는 소리의 표현이다. 즉 나의 존재는 이 세계와 따로 단독적이고 절대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로서 ‘나’는 늘 다른 ‘나’가 된다. 바깥 세계를 그때그때마다 표현해서 봉인되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로서 자살이나 죽음이란 이 개체화의 최종 항변이며 동시에 해방이다. 그래서 죽음은 항상 우연적이고 폭력적이다.
저자는 성경을 가지고 영원한 세계를 이렇게 묘사한다. “결핍에 의한 반복에 해당되는 구약성서와 변신에 의한 반복에 해당하는 신약성서를 구별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p, 618) 이 이야기는 시간의 세 번째 종합에 요청하여 모든 미래가 완결된 상황을 말해주는 ‘세 번째 성서’를 영원한 세계의 본질로 삼겠다는 것이다.
이 세 번째 성서 안에서는 더 이상 결핍된 반복이 되돌아오지 않는다. 오직 영원회귀의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모두들 차이 나는 것들만 있는 그 한 가지 의미만의 남는 세계다. 모든 물방울에 대해 단 하나의 똑같은 바다가 있듯이 말이다. 이 차이들이야말로 긍정스럽다. 이제는 이 차이 스스로만 계속 복귀될 뿐이다. 그동안 시간 안에서 헐벗은 반복만을 재현되었지만 이제는 옷 입은(차이의 고유한 역량이 발휘되는) 반복만이 향유된다.
차이만 있다는 것은 허상들만 있다는 말이다. 동일성도 유사성도 없다. 진정한 실천이란 이 허상들의 보여주는 차이의 역량들이다. 이곳이 신이 노는 놀이터요 신과 함께한 놀이터이다.
(복음적 평가)
불교에서는 스스로 도를 닦는 것이 해탈의 방법이다. 철학에서는 알고 깨닫는 것이 진리 속으로 들어가는 방식이다. 그러나 복음의 세계에서는 ‘찾아오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점령당해야 한다. 구약에서 오로지 택한 백성에게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언약의 하나님으로 알리셨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거룩한 하나님이었고 그 하나님을 마중나간 이스라엘들은 죄인중의 죄인들이었다.
들뢰즈의 철학에서는 아담 계열 위해 지배하고 통치하는 죄의 무게감이 없다. 그리고 그 죄에서는 인간들이 아무리 탐구해도 못 벗어나는 이유도 거론하지 못한다. 즉 들뢰즈는 인간이 죄인됨을 말하기 위해서 인간보다 더 센 자를 불러오지 않고 있다. 따라서 구체적 인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그 모든 것이 ‘대신 죽으심’과 관련되어 있음도 모른다.
들뢰즈는 그냥 결핍을 느낄 뿐이다. 그리고 그 결핍의 원인을 미래의 완전한 초월 세계에 견주어서 상대적 불완전성만을 지적할 뿐이다. 이미 인간에게 진정한 죽음의 이유들이 뒤덮고 있음을 모른다. 진정한 죽음은 십자가의 저주가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그 분은 ‘죄있는 육신의 몸’으로 오셨다.(롬 8:3)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 죽음이란 ‘십자가 밖’에 그냥 방치되는 있는 상태를 말한다.(갈 6:14) 십자가 밖에서 인간들이 아무리 운동과 존재를 논해도, 그리고 깊은 산사에서 도 닦기에 정진해도 십자가의 공로가 찾아들지 아니하면 ‘대신 죽으심’의 효력도 못 본다. 결국 악마의 밥으로 남는 것이다.
‘십자가 안’에서 십자가를 천장으로 삼고, 십자가를 바닥으로 삼고 살 때만 정죄함이 없이 자이다. 복음이란 평생 신학이나 성경이나 철학을 연구한다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진정 복음을 아는 자라면,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증거 할 자들이 아니다. 십자가 능력이 그를 방치하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