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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나] 말고 [또 다른 나]자유게시판[신학]

[나] 말고 [또 다른 나]

이름 : 김대식(IP:125.190.2.61)

[나] 말고 [또 다른 나] 로 오신 예수님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냥 오신게 아니라 죄인의 몸으로 오셨다. 그리고 오신 목적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러 오셨다.
이것을 교회는 교리화 하여서 성육신 교리를 믿으라고 외친다.
참으로 믿을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맨날 속으면서도 말이다.

그래서일까? 성육신을 부인한다고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안티들이 있었는데 성육신 교리를 부정한다고 그들은 매도해 버린다.

그것을 반박하기를 당신네들은 예수님이 죄인의 몸으로 오신 십자가 사건을 믿기 싫어해서 그 빈자리를 성육신 교리로 채울려 한다. 그래서 자신은 반드시 교회 소속임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왜 교회 소속이 될려고 그렇게 안달이 나있는가? 교회는 너의 죄를 위해 피 흘린 적도 없고 그 속의 목사들은 더더욱 그러하며 그들이 교회를 보호하시 위한 수단들로 사용하는 교리들은 너의 죄를 대신 감당을 못한다 라고 아무리 이야기 해줘도. 거봐 저러니까 성육신 교리를 거부하는 이단이지. 라고 나온다.

이런 모습은 십자가마을도 마찬가지이다. 철학의 사상이 왜 십자가와 반대 되는 가를 아무리 강조해도, 거봐 저 십자가마을은 철학을 쫏는 주관신학을 펼치고 있어. 그렇기 때문에 저런 사상이 교회에 들어오면 위험해 배격해야돼

그런데 이것은 정말 웃지 못할 웃끼는 코메디 이다.

아마추어인 내가 봐도
교회를 보호하고픈 충심에서 비롯됨을 뻔히 볼수가 있다.
교회는 자기의 유일한 우상이기에 자기의 최후의 보루이다. 이것을 사수하고픈 것이다.
더더욱 목사들에게는 십자가는 당연히 배격해야만 한다. 교회야 말로 자기생계수단이다. 즉 돈과 유일하게 연결된 밥줄이다. 이것이 끊기면 곧 죽음이다.

그러니 당연히 십자가를 배격하고 그 빈자리에 교리를 채워야 하는 것은 교리를 믿고파서가 아니라 밥줄이기 때문이다. 이 밥줄의 통로는 교인들의 삶의 축복과도 연관되어 있으니
어쩌면 그 목사에 그 쫄개들이다.

목사가 자기의 죄 때문에 십자가도 진적이 없는데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다. 저렇게 믿고 간 쓸개 다 빼주는 것 보면 신기하다.

그렇다 죄의 신비. 그들은 죄의 신비를 모른다. 그래서 아예 그리심 산에 올라가 버리니 죄의 신비를 알 리가 없다. 은혜의 신비만을 알면 구원은 따 놓은 것이라고 착각을 하면서도 놀랍게도 목사들에게 놀아나고 있다.

어쩌면 자신들과 목사를 일치하는 그 마음일 것이다. 아니 주님께서 그렇게 묶어버린다. 유유상종으로서 말이다.

예수님이 죄인의 몸으로 오신 이유는 죄인을 구원함이 아니라. 죄인을 십자가에 못 밖기 위함 이다.
죄는 당연히 십자가에 못 밖혀야 한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십자가를 교회를 통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나서기 시작한다.
그래서 반대의 위치인 에발산이 아닌 그리심 산에 서서 축복의 모든 구색을 갖춘다.
성육신 교리를 믿어야 하고, 성화의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쳐야 하며, 새생명의 삶을 추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공동분모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바로 목사인 나는 절대 죽으면 안된다 나는 기필코 살아 남아야 한다 라는 생존을 깔아놓고서
예수 닮기를 출발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미 주님 쪽에서 출발한 것이 있는데 바로 내가 스스로 그렇게 감추기 시작하고 스스로 가리우는 무화과 니뭇잎의 성역을 벌거벗기기를 예수님 쪽에서 출발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죄인 곧 죄인인 나를 닮은 모습으로써 쳐들어 오신 것이다.

자 이 실제상황이 성육신의 교리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위기로 닥쳐 온다.

인간의 공포에는 자기와 같은 자가 나타날까봐 늘 두려워 하는 모습이 있는데
그것이 잘 반영이 된 것이 바로 쌍둥이나 또는 형제 이다.

그래서 평생을 형제 문제로 원치 않는 싸움에 놓이게끔 주님이 일하신다.

(미 7:6)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미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로다』
(마 10: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남자는 남자 스스로 증명이 되지 않고 그 차이성으로써 증거 되는데 바로 여자를 통해서 남자라는 구분이 생긴다.

이 차이성을 주님은 형제 속에서도 드러내신다.

주님의 소원 곧 약속을 드러내기 위해서 죄의 소원을 형제 속에서 나타내시는데 바로 닮았다 라는 것을 허용치 않고 차이성으로 구분해 버리신다. 피조물은 이런 토기장이의 지으심에 항거 자체가 불가 하다.

죄의 소원이라는 신비를 통해서 아들의 소원을 드러내신다.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마 11: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양쪽 다 권세 문제이기에 죄의 소원도 내가 다룰수 없고 아들의 소원도 내가 다룰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는 종교적인 신앙 행위는 그야말로 위선으로 포장 될 것은 뻔하다. 그것도 가장 신앙 답게만 꾸며진다. 거짓은 그들도 싫어한다.

그래서 거짓이 너무 너무 싫어서 선만 사랑하고픈 마음에 처음부터 그리심 산 교회로 꾸미기를 시작한다.

이것은 교회 뿐만이 아니라 선악과 나무의 열매를 먹은 인간이면 누구나 다 그렇게 자신과 자신의 주변의 모든 것들을 경제적 풍요(먹음직)와 종교적 신실함(보암직)과 지혜로운 성숙된 통치력의 확대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를 모두가 꿈꾸고 있다. 이것이 마귀 자식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야말로 나의 진짜 모습을 보여준다. 너가 밖혀야 할 그 자리로 그 근본의 자리로 예수님은 향하고 계신다.
그래서 저들은 비아냥 거린다. 아직도 십자가를 외치는가? 바보들아?
이미 2천년 전에 지나 갔고 지금은 회심 사건만 있으면 된단다.

그래서 유명인의 회심 사건과 자신의 회심을 결부 시킨다. 그런데 이상하다. 예수님은 그래도 십자가를 향하고 있다. 뭐가 아쉬워서 아직도 저들의 말 마따나 십자가를 왜 벗어나지를 못하시는 것일까?

그러나 이것은 신비 이다.

벗어나지를 못하시는게 아니라 오히려 가장 적극적으로 나 라는 자아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것을 예수님은 지금도 하시고 있는 것이다.

부지런히 나를 십자가에 못 밖기 위해서 [또 다른 나]의 모습으로 와서 내가 반대의 길로 향하고 있는 나를 허상이라고 알려 주고자
너의 참 자아는 저기에 달려야 한다고 하신다. 그런데 그 수치스러운 그 자리가 사랑의 자리 라는 역설을 무슨 재주로 인간의 능이나 손으로 그 잘난 믿음을 저기서 펼칠 수가 있을까?

예수님의 믿음은 결국 하나도 잘 난 모습이 일체 없는 그야 말로 외면하고픈 믿음만 골라 행하신다.

십자가 라는 그 없는 길로 몰아가신다. 낭떠러지로 떨어뜨리신다.

성화의 천개의 계단을 지금 올라가도 너무 늦은 뒤쳐진 판국에 떨어뜨린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이며 싫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밑도 끝도 없는 저 낭떠러지로 몰리는 것이 어찌 기분 좋으랴? 버림받는 모습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그 버림을 모르면 그 심판을 모르면 어찌 선택과 어찌 구원을 알수 있겠는가?

그래서 가인에게는 천개의 선행의 계단을 올라가 보라고 죄의 소원을 덮치겠끔 했고
반대로 아벨에게는 낭떠러지의 죽음으로써 아들의 소원을 덮으셨다.

참 두 쪽 다 이해불가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다. 외면하였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우는데 정신팔려서 몰라서이지 가만히 보면 정말 우리의 속내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두 상대적이고 극단적인 모습을 갖추고
[또 다른 나]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를 십자가에 못 밖고자 직행하시고 앞뒤 곁눈질 하나 없이 외골수로써 직진 하셨다.

그런데 이상하다. 혼자만의 외골수의 그 길에
처음에 베드로가 막어서더니만 그 당연한 막음이
약속하신 성령이 오신 후에 베드로도 아들의 소원이 덮쳐서 외골수의 길로 직행 한다.
그 무리들을 교회 라고 칭하였고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 했으며
머리되신 그리스도가 그 외골수의 길로 갔기에 몸도 간다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지금의 교회는 현재 어떤가?

죄의 소원만 덮친자들과 똑같이 행세를 하고 있다. 그들이 나빠서인가? 아니다 가장 인간적이고 신앙심으로써 선함이 가득하다. 그런데 죄의 소원이 덮쳐서 가득한 것으로만 보여서 선할 뿐이지 예수님의 선함과 일치점이 전혀 없다.

참 이것이 신비롭다. 에서를 미워 했다는 그 미움의 근거가 죄의 소원을 일방적으로 덮어버리듯이 장자의 명분을 무시했다는 근거는 너무 너무 일방적인 해석이다.

그런데 교회는 이것을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풀이 할려고 한다. 다 이유가 있어서 라고??
그 이유를 아무리 들어보아도 말이 안된다. 이것은 이유 없는 미움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유 있는 믿음을 가질려고 교회가 위선을 떨려고 한다. 야곱이 사랑받는 것이 무슨 이유가 있을까? 그 이유를 너무 너무 권태롭고 할짓이 없는 목사들에게는 교인을 향한 이유있는 사랑을 채우기 위해서 이유를 억지로 억지로 만들어 낼려고 한다. 그것이 바로 목적으로 이끄는 삶이라는 둥 새생명의 삶이라는 둥 성화의 삶이라는 둥 그런데 놀라운 이들의 공통점이 바로 마귀의 3가지 시험과 선악과를 먹고 난 뒤의 인간에게 나타난 현상과 일치한다.

야곱을 사랑한 이유는 없다. 그럼으로 그가 사랑 받을 짓을 아무리 찾아 보아도 오히려 이런 나쁜 놈이 있을까 하고 그런데도 사랑받아? 말도 안돼 라는 이해불가의 신비만 보게 될 뿐이다.

탕자를 사랑하는 아버지의 이유 없는 용서에 우리의 진짜 속내는 첫째 아들과 똑같은 마음이다. 도저히 납득이 안된다. 이것을 납득 시키겠다고 나서는 놈들이 더 수상하다. 구약의 내용들이 예수님의 비유에서 다시 재조명이 되었을때에 그야말로 더더욱 해석 불가 이다.

한마디로 믿는자가 나타나지 않도록 한 것이 성경이다. 예수님의 선포이다.

그럼 아무도 믿지 않아야 정상인데 이상하게 또 신비롭게도 나타난다. 그 근거를 인간에게서는 찾을 수 없다. 결국 성령이 하신다.

자 그럼 살길로 가야 한다. 그런데 또 신비다 죽을 길만 골라 간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교회는 이어 진자. 이야 이것을 역사적으로 캐 내겠다는 자체가 어쩌면 가장 방해꾼처럼 보인다. 그저 당하는 일 뿐인데 말이다.

결국 앋 믿겨질 방향으로만 일하시고 못 믿을 일만 펼치시고 이해불가 납득불가.
또 이런 의미를 인간들의 입으로써 전해진다는 것 조차도 불가 뿐이였다. 그 증거가 그들 입에서 외쳐진다, 내가 한 것이 없고 주님이 하셨다는 말이 정말로 맞다.

안 보이는 주님이 홀로 다 하신 것인데. 분명히 맞는데

오늘날 교회는 사기를 치는데 도사들이다. 보이는 인간을 통해서 뭔가를 자꾸 꾸며댄다.

그래서 인간은 자꾸 있음 있음 유에서 유를 조작하여서 겨우 억지로 어슬프고 서글픈 모습으로써 남 눈에 있는 척으로 가득한 모습을 의도적으로 갖추면서 한다. 아니 누가 도와 주고 있다. 죄의 소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부러 약올리듯이 우리의 반대의 길로만 가신다. 나아만 장군의 깨끗한 물로 치유라는 틀을 깨뜨리고 꾸중물 속으로
거룩한 성전은 바리새인들이 다 차지하고 오히려 그 성문밖에서 화목을 이루셨다.

왜 반대로만 가야만 하실까?

차이성 때문이다. 놀랍게도 인간들 속에는 공통성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신비하게도 예수님의 일에 무조건 반대의 길이다.

예수님이 죽으러 오셨다면 인간들은 살려고만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예수님이 에발산에 가시면 우리는 그 반대로 그리심 산에만 올라 갈려고 한다.
그 뿐 아니다 어쩜 반대인지 예수님에게 아주 걸맞는 별명까지 붙인다 아마 자신들에게 이런 별명이 붙여질까봐 평생을 성화하는 자들에게는 그야말로 치욕이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

(마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사실상 우리에게 딱 맞는 별명인데 예수님에게 다 뒤짚어 씌운다.

즉 원수라는 말이 아닌가? 원수

고아의 아버지, 과부의 남편, 거지의 임금
그래서 예수님은 나와의 만남의 자리를
고아의 자리에서 곧 먹기를 탐하는 자리 (개같은 이방인)
과부의 자리에서 곧 포도주를 즐기는 자리 (사망의 그늘에 주저 앉은 자)
거지인 떠돌이 나그네 자리에서 곧 세리와 죄인의 친구의 자리 (흑암에 앉은 백성)

(마 4: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 4: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마 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천국으로 완성하신다. 참 꼬라지 하고는 누가 가고파 하는 천국일까?

그래서 아예 인간들이 천국을 조작해 내는 것이 가고픈 마음이 절대로 안 생기는 천국에서
정말 가고픈 너무 너무 가고파 안달이 난 천국을 만들어 낸다. 그 천국 상을 그대로 모델 하우스 곧 맛배기로써의 미니 모형 하우스로써 실현화 할려는 미명 아래에 그들은 미쳐 있다. 이런 속성은 구약에 이미 다 들추어 내셨다,

구약은 인간의 모든 감추어진 속성을 다 드러내 주고 있다.

그래서 다윗언약을 기초로 한 참선지자들의 외침은 부정한 자리로 몰고 가고자 했고
반대로 거짓선지자들은 이미 확보한 긍정의 자리를 고수하는데 매진한다.

예수님도 같은 양상의 싸움이였고 지금 현재의 성도도 이런 양상으로써 두 패로 나누어 진다.

(눅 2: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그래서 비방받는 표적이다. 표적 또한 긍정적인게 아니라 부정적이다.
요나의 표적이 가장 그 시대의 거룩한 인간들이 보여달라고 요구하는 기적의 상대적인 표적인 것이다.

지금도 십자가 라는 표적은 유효하다. 아무리 성화론자들이 무효화 하고파도 이상스럽게도 그 신비로움은 멈추지 않는다. 아니 더더욱 뚜렷하다. 왜냐하면 그들 또한 신비롭게도 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인간의 태어남은 상대적인 피조물의 자리에서 외쳐야 하듯이
빛 되신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 죄인의 자리에서
원수의 자리에서 사랑이 외쳐지는 것이다.

그래야 그 사랑이 이유가 없다. 무조건 무조건이야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특급사랑이야
즉 이 풍성함에 우리는 놓여 있다. 이유 없는 사랑으로 오셔야만 하기에
죄인의 자리에 뛰어드신 것이다.

내가 외면의 자리에서, 원래 나의 자리였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당당하게 그 자리에서만 외치신다.

그 죄인의 자리에서
십자가의 사형수 자리에서

다 이루었다

(창 38:24) 『석 달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 내어 불사르라』
(창 38:25)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한지라』
(창 38:26)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예수님 나는 항상 틀리게 하셨고 예수님 당신은 항상 옳았습니다.

그 옳으심을 나의 원래 자리인 십자가의 불 속에서 내가 외면하고
주님이 대신 그 자리에서 외쳤습니다.

이 신비로운 지혜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항복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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