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산 11월 9일 강의 고후 5장 16절
안산 11월 9일 강의 고후 5장 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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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1109 고후5장16절, 화목과 세상
우리교회(IP:125.♡.2.61)
07-11-10 15:06
관리자(IP:220.♡.41.203)
10-11-10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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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071109a고후5장16절
2010-11-10 00:33:57 녹취 : 조현창
고린도후서5장 16절 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 아무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이렇게 되어있거든요.
성경 전체가 굉장히 어려운 이유가 영적세계하고 지상의 인간세계하고 연결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인간 쪽에서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 제일 힘들죠.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예수를 믿으라!’... 예를 들어서 ‘예수님을 만져라!’ ‘안경집을 만져라!’ 쉽잖아요. 내가 내 손으로 안경집을 만지면 된 단 말이죠.
‘여기 유리컵에 물이 있는 것을 믿으라!’ 믿지 뭐. 여기 컵에 물이 있잖아요. 그런데 ‘지나 간 예수를 믿으라!’. ‘미쳤나?’ ^^ 현재 그것이 실존하지 않는데 왜 내가 믿나? 지나 간 것은 지나 간 것이잖아요. 사도바울의 이 이야기도 예수도 지나갔잖아요. 지나 간 것을 어떻게... 하늘의 구름도 못 잡는데, 지나 간 옛날 이야기를 어떻게 잡습니까?
그런데 이 영적 세계에서는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안 잡으면 지옥’이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더욱 더 상당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하늘나라가 아니라 구름도 잡으려면, 이것이 수증기 아닙니까? 잡을 수 없잖아요. 사실 구름을 잡으면 축축한데 ‘야! 구름이다. 잡자!’ 하고 매미채 갖고 잡아봐야 안 잡힌다 말이죠.
구름도 안 잡히는 것을, 지나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지나간 사건인데, 예수님이 어디 잡힙니까? 잡히지는 않는데 예수님의 약속에 의하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말입니다. 딱 이렇게 목사가 이 안경집처럼 목사가 예수님을 딱 잡아서 주머니에 넣고 교인들 오는 사람마다 이렇게 내어주면 좋겠어요, 이렇게. ‘아, 이것은 예수님 손입니다. 만져보세요. 이것은 예수님 발입니다. 만져보세요. 만져져야 구원받습니다’ 이렇게 했으면 참 좋겠어요!
한마디로 말해서 이것이 뭐냐하면, 허황(虛荒)! 허황도 이런 허황은 없단 말이죠. 없어요. 지금 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벌기 위해서 늘상 바쁜 이 마당에 시간을 이러한 허황된 곳에 낭비를 꼭 해야되겠습니까? 시간을... ?
그래서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전부다 허황된 이야기로 신랄(辛辣)하게 아주 신랄하게 우리가 인증을 해 주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지금 착각에 빠져있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여기 16절을 다시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였으나 이제부터는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는 이 말. 사도 바울이, 예수는 육체다, 육신이다 라는 것이 상식이고 그렇지 않다는 것이 허황된 것인데, 그 허황된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확실하게 믿어야 되요. 이것을 인증을 해 줘야 되요.
이것을 확실하게 인증 해 주면 그 때부터 ‘나’라는 세계와 영적세계를 연결시키는 고리는, 내 쪽에서는 할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없습니다. 지나가는 구름을 내 손으로 못 잡듯이 지금 계시다고 착각하는 예수님을 잡는다고 하는 것은 남들 보기에 놀림감밖에 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냉철한 이성을 가지고 허황된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하고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명백하게 그것을 인증을 하고 수용을 해 주어야 해요. 그래야 우리는 사기꾼같은 목사가 아닙니다.^^ 만약에 이것을 인증하지 않고, ‘여러분 예수 믿으세요, 그래야 구원받습니다’ 이러면 그 목사는 백프로 사기꾼입니다.
‘당신이 (예수를) 믿습니까?’ ‘나도 잘 몰라요’. 결국은 자기도 안 믿으면서... 예수 믿는다고 하면 혹시 나를 이렇게 기독교 분위기 내에서 나를 좋은 목사로 인정해 주지 않을까?... 이런 노림수를 자꾸 장사속을 꾸밀 수가 있어요. 본인 목사는 예수를 안 믿으면서 말이죠.
오늘 아침에 제가 (인터넷에) 글을 하나 올렸죠. ‘목사는 예수를 안 믿는다’, 고. 목사는 예수를 안 믿고 교회를 소지하려고 한다. 이유가 뭐냐? 근거가 되는 정당한 이유를 대라? 목사가 예수 때문에 울고불고를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교회 때문에 울고불고해요. 교회 때문에 울고불고 한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돈 때문에 울고불고 한다는 거예요.
이 말은 목사도 실질적인 사람이다, 라는 말입니다. 내가 그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목사라도 실.질.적.인 자기의 반사이익에 울고불고하는 인간이지... 이것이 우선이지... 이 딴 성경 이야기는 뒷 전이예요.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래요.
돈이 생기면 성경이야기를 하지만 돈이 생기지 않는다면 이 허황된 이야기를 왜 합니까? 이 성경을 목사가 펼치는 경우는, 돈이 생길 때는 펼치지만 돈이 안 생기는 경우에는 목사가 성경을 펼칠 이유도 없고 그럴 근거가 없지요. 왜냐하면 목사는 실질적인 인간이니까. 실제 인간이니까.
목사 손을 만지면 만져지고 근육이 실제로 만져지잖아요. 똑 같은 인간이란 말이죠. 똑 같은 인간으로 출발하기 때문에 가장 우선적인 것이 뭐냐? ‘꼬르륵!’ 배고프다는 소리, 이것이 우선이지... 뭐 ‘예수를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고...’ 이게 무슨 뜻일까? 그 뜻 알아서 뭐 할건데요? 성경 고린도후서 5장 16절 17절, 알아서 뭐 할건데요? 이 거 어디 써 먹을 건데요? 이 거 써 먹을데가 없잖아요. 공장에 써 먹을 겁니까? 여기 시화공단에 가서 이 이야기하면 돈 줍니까? 안 주거든요. 이것이 비실재적이잖아요.
그런데 이 ‘비실재적인’ 이야기를 사도바울이 하면서 ‘이 이야기 안 믿으면 지옥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소리를 들었던 목사나 교인들 입장에서는 환장할 지경이라! 예^^ 영적 세계가 실재냐? 아니면 지금 내 손에 만져지는 따스한 손바닥 이것이 실재냐? 말입니다.
여기서 제가 잠시 어려운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사도바울이 보기에 우리가 지금 손에 만져지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환상(幻像)’으로 봅니다. 왜 환상으로 보느냐 하면 이것이 허무로 끝나거든요. 무슨 이야기냐면 저와 여러분이 어떤 것을 목적했는데 그 목적대로 딱 되었어요. 사업을 하실 때 요렇게 되었으면 하는 것이 있잖아요. 딱 되고나면 무엇을 느낍니까? 허무를 느끼는 거예요.
산에 올라가잖아요. 저기에 올라가면 기쁘겠다, 하잖아요. 딱 봉우리에 올라가 보세요. 뭘 느낍니까? 이제 뭘 하지... 허무를 느끼잖아요. 그래서 허무를 느끼는 것은 영적세계에서 보면 환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것은 잘라내도, 없어도 괜찮은... 그래서 너 같은 인간은 돼~져도(죽어도) 아~~무(전혀) 하늘나라에 하나님의 맘(이) 아파하지 않는... 있느나마나한 헛! 환상! 또는 허구!로 본단 말입니다. 사도 바울이 보기에는....
그러데 제가 지금 강의 처음부터 한 것이 무어냐면 사도바울이 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돈이 안 되기 때문에, 사도바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허구가 되는 거예요.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의의가 뭐냐하면 영적 세계가 허구냐? 아니면 지금 내 배가 꼬르륵 밥달라고 돈달라고 하는 이 몸이 허구냐? 둘 중에 하나만 하라는 겁니다.
양 쪽 다를 할 수 없어요! 둘 중에 하나는 허구이고 둘 중에 하나는 진짜 실재인데, 둘 중에 어느 것이 허구고 실재냐 말이죠. 예수님이 부활했잖아요. 분명히 부활했잖아요. 부활했을 때 제자들이 부활을 믿었습니까? 안 믿었지요. 그 때 제자들이 뭐라고 하느냐하면 ‘예수가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그런 헛소문이 예루살렘에 돌더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제자들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뭡니까? ‘허구’죠. 그리고 ‘환상’입니다. 그런 ‘헛소문’이 도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아저씨가 자기와 동행하는 거예요. 동행하면서 ‘예수가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 했다더라’ 헛소문을 계속 같이 이야기해요. 계속 환상입니다. 그런데 식당에 가서 눈을 뜨게 해 주니까 뭐가 허구냐 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모르고 지내왔던 그 며칠동안의 자기 자신이 바로 있느나마나한 ‘헛짓’한 시간들이었어요. 그 사흘동안.
밥은 먹는데 이유도 모르고 밥을 먹었고 잠은 잤는데 이유도 모르고 잠 잔거예요. 헛짓한거예요. 헛짓하다가 지옥가는 거예요, 그것은. 그런데 예수님께서 눈을 뜨게 해 주니까 비로소 뭡니까? ‘오! 주님 아니십니까! ’ 헛소문이 이게 헛소문이 아니고 ‘제대로 실재’군요! 라고 하는 순간 예수님이 떠나셨습니까? 안 떠나셨습니까? 떠나버렸습니다. 그 때부터 이 제자는 완전히 바뀌어진겁니다. 제가 지금 5장 17절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안의 새로운 피조물, 그걸 설명하고 있는 겁니다.
이제는 뭔가 완전히 바뀌어져야 하는데... 어떻게 바뀌어야 하냐면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 자기는 무슨 취급을 받아야 하느냐 하면 ‘허구’를 좇는 ‘허~황’ 된! 정말 허황된! 것을 좇는 쪼다로 살아야 되는 겁니다. 그 때부터는. 그 두 제자는.
왜 그러느냐하면, 자기가 그랬었으니까... 자기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전까지는 뭡니까? 사람이 어떻게 죽었다가 살아납니까? 이게 말이 안 되거든요. 여기 구청에가서 이야기 해 보세요. 미친 놈이라 합니다. 안산시청에가 이야기하면 때려 죽이려고 할 거예요. 사람이 죽었다가 못 삽니다. 이것은 안산시 전체가 동의하는 바예요. 거기에 두 제자가 같이 동조를 했었지요.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런 헛소문이 있었단다’. ‘어이구 이런 헛소문을 믿는 사람이 있다니 참 세상 이상한 세상이네’. ‘아이구 그 믿으면 안되지. 그 믿으면 큰 일 나!’. ‘그 믿으면 나도 미친 놈 되는거야!’. 라고 했었었는데, 엠마오로 내려가다가 예수님 만나고 나서 살아나신 예수님이 그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는, 이제부터는 본인이 저 쪽하고 반대의 길을 가야만 하는 거예요.
이게 환장할 짓이라니까요! 정신 멀쩡해요! 정신 멀쩡하다고! 자기가 조금 전까지 그런 사람을 욕했던 사람이라고요. 사도바울도 물론 마찬가지고. 이렇게 정신 멀쩡한데 어떤 사람이 예수 안 믿고 운전하면,
‘아저씨!’
‘와요!’
‘왜 삽니까?’
‘밥 먹고 살려고 하지요’
‘밥 먹고 살아서 뭐 할 건데요?’
‘몰라요’
‘모른다고 하니, 당신 헛짓하는 거요!’
이제는! 예수님의 부활을 모르는 사람은 인간도 아니예요! 인간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님의 복음과 죽었다 다시 살아나심, 그것을 믿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성경에서 뭐라합니까? 그것을 '흙‘이라고 하죠.
이사야 2장 22절에 뭐라고 나옵니까? 수(數)에 칠 가치도 없다. 그의 호흡은 어디에 있다? 코에 있다. 이것은 뭐냐하면 외부에서 조종한다. 그 인간의 운명은 외부에서 조종하지 자기가 열심히 밥먹고 살려고 노력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코에 있다, 코 막으면 어떻게 되죠? 죽어버리죠. 그의 호흡은 요 코에 있다. 코만 막으면 전체가 다 죽어요. 그러니까 이것은 살아도 살려주는 한에서 사는 것이지 하나님이 안 살려주면 오늘밤에도 가다가 엎어져서 계단넘어져 죽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허구‘라니까! 복음을 모르는 인간은 허구예요. 아예 사고방식이 완전히 180도 돌변해 버렸어요. 완전히 바뀌었다구요.
그것을, 다음 17절 봅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뭐라고요?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게요... 우리로 하여금 얼~마~나 부담을 주는지 몰라요. ‘너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것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즐거운’ 부담. 부담은 부담인데 행복한 부담.
제가 얼마 전에 이런 글을 썼어요. ‘목사가 되어가지고 이 복음을 전한다는 그 자체에, 내가 이 복음을 전할 수 있다니!, 복음 전한다는 그것에 감동, 감화, 감격해야지... 이거 전하고 반사 이익을 챙겨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예수님이 그런 수모를 당했으니까...
그러니까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수모를 당해보면 알아요. 수모를 당할 때 ‘맞아. 내가 남에게 수모당하면 완전히 그 사람 편에 서야지(???) 난 이제부터 복음전하지 않는다’ 이러면 가짜이고... 수모를 당하면 당할수록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냐면 ‘나도 옛날에 그리했었다!’ ‘나도 예수님 십자가와 부활을 모를 때에는 당신이 나에게 욕하는 것 이상으로 나는 그 예수부활전하는 사람보고 허황된 짓 한다고 나도 욕을 했는데... 아마 내가 더 심하게 욕 했을 껄?’.
‘그러니 당신에 나에게 그런 욕을 해도 나는 이해된다’. 하고 뒤에 붙이는 것이 스데반 집사의 유언이죠. 뭡니까? ‘주여 저들은 저들의 하는 것을 모릅니다’. 하고 스데반처럼 웃으면서 하는 거예요. 그것을 화내면서 약이 올라 하는 것이 아니고 뿔따구나서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편안하게 웃으면서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이게 새로운 피조물이이예요.
이것은 사람의 솜씨가 아닙니다. 목사의 솜씨가 아니예요. 목사가 40일 철야(기도)한다고 교인을 이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이 안 나타나야 정상이예요. 만약 이러한 사람이 실제로 나타난다면 이것은 아직도 주님이 부활하셔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업에 들어가서 그래요.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업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그렇지 않는다면 인간의 힘으로 이렇게 될 수가 없어요. 지금 성경이 사도바울이 전하고 있는 것은요 ‘너 이렇게 노력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된 사람 혹시 있어요?’라고 묻는 겁니다.
이런 사람 혹시 있어요? 라고 묻는 투로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을 바라보면서 ‘아이고, 나하고 생각이 같네!’하는 사람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쉽게 정리해 봅시다. 사도 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다 납득이 되면 새로운 피조물이예요.
그런데 사도 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듣기 싫으면... ‘이거 또 헛소리하고 있다!’ ‘21세기에 이 무슨 허황된 이야긴가?’... 듣기 싫으면, 또는 ‘나에게 그런 소리 두번 다시 하지 말라’고 부화가 나거든 사도 바울과 그 사람하고는 노는 층이 달라요.
사도 서신에서 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그 다음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그리스도 안’이죠. 그리스도 안 이라는 말이 신약에서 상당히 어려운데... 박사 논문도 나와있는데... 내가 보기에 그 박사 논문도 별로 좋지 않던데...
이렇게 보면 간단해요. 위에서 보면 모든 사람이 함께 있어요. 같이 살아요. (그러나) 옆에서 보면 층이 있어요. 안 믿는 사람들은 이 쪽 층이 있고, 믿는 사람들은 윗 층에 있어요. 층이 갈라져요. 옆에서 보면.
요거는 예수안이고 다른 말로하면 부활안이죠. 부활의 능력 안 부활의 권세안인데... 에베소서 1장 21절에 보면 이것을 교회라 합니다. 에베소서 1장 끝에 보면 교회란 부활의 권세가 작렬하는 곳.
부활의 권세가 작렬하기 때문에 그 교회에 오는 사람은 무엇을 걱정하지 않는다? 죽는 것을 우습게 보죠. 즉 죽는 것을 당연지사로 본다. 마귀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죽는 것을 당연지사로 여기는 사람’이예요. 당연한 일로 보는 사람.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고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예요.
그것을 아주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말은 부활의 권세가 그 사람위에 작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권세가 작렬하기 때문에 자기가 죽는 것을 미소지으면서 우습게 보는 것을 그것을 ‘교회’라 합니다.
이 교회를 위에서 보면 ‘소용돌이’로 그릴 수 있는데... 에베소서 1장을 지금하고 있는데... 이 소용돌이에... 손 목사님 A라는 지점, 김 목사님 B라는 지점, 저는 C라는 지점에 있다합시다. 중간(가운데)에 누가 있느냐면, 엡1장10절에,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로 통일되죠.
통일이라는 말은 잡아당기는 거예요. 세탁기 욕조 물 빠질 때 어떻습니까? 물이 소용돌이 치면서 꼬이죠. 꼬이면서 A, B, C 모두가 (중앙으로) 빨려드는 거예요. 욕조안으로... 그리스도 안으로...
그래서 나는 고물상한다... 나는 뭐한다.. 뭐한다... 해도... 고물상한다 해도 그것은 의미가 없어요. 방향이 어느 쪽이냐가 중요해요. 당신이 욕조물에 어디로 끌려가느냐가 중요해요. 에베소서 1장을 그림으로 그리면 이렇게 표현됩니다.
이 끌려가는 중앙에 뭐가 있어요? 교회가 있다. 모든 우주의 중심에 뭐가 있다? 교회가 있다고 사도바울은 보는 겁니다. 이것이 에베소서 1장이고, 골로새서 1장에서는 이것을 달리 해 놓았어요.
뭐냐면 모든 만물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금 땡겨 올라오고 있다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우주의 중심에서 지금 당기고 있다는 거예요. 그것이 ‘방향성’입니다. 방향성을 가위로 잘라 버리면 남는 것은 뭐냐? ‘주여, 나 어떻게 살까요?’ ‘아이들과 마누라하고 나 어떻게 살까요?’
방향성이 끊어져버리면 우주선에서 마치 솎아진(떨어진?) 것처럼 단독자로 남아가지고 바들바들 떱니다. 세상살면서 바들바들떠는데 이게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누가 낚시대로 잡아당기는 것이 있으면요... ‘주여! 오늘은 왜 이일을 하게 하십니까?’
‘방향성’ 가지고 자기에게 물어요. 방향성이 없으면 ‘오늘 제가 뭐하고 밥먹고 살까요?’이러지만, 방향성이 있으면 ‘오늘은 주님을 위해서 또 무엇을 하라고 업무를 맡겨 주셨습니까?’ 자기가 살아가는 것을 ‘업무’로 보는 거예요. 생존의 문제가 아니고요.
내가 해야 될 ‘과제’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죽든지 살든지 어디 있든지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살리라. 이것이 사도바울이 보는 새로운 피조물이 보는 세상관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A라는 지점에서 딱 떼어 보면, A라는 지점에서 물에 빠졌다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루에서 무수히 희망과 절망을 오가지만 그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기도 하지만, 제기 우울증에 관한 책(공부)을 해 봤습니다만, 중요한 것이 이것만 바라보지 말고.. 이러면서... 중앙에서 땡겨요.
곱게 땡겨 가는 것이 아니고 하루에도 낙담하고 좌절하고 어떤 때는 좋았다가 또 엎어지다가 이런 것을 겪으면서 땅겨주는 겁니다. 욕조에서 물 빼듯이 좍좍 땡겨주는 겁니다. 이것을 골로새서 1장에서는 모든 만물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가 지금 존재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 방향성이 있어요. 이 방향성을 그림으로 그려보겠습니다. 이제 사도바울의 사상이 다 나오는데요. 방향성이 이렇게 있는데, 스필버그 감독의 ‘크로스 인카운터’라는 영화가 있어요. SF(공상과학)영화인데 그 영화 끝 장면에 길이가 약 2km되는 거대한 우주선이 내려오고 그 밑에는 사람들이 우주선을 보고 놀라고 있고 우주선 문이 열리면서 사다리고 외계인이 내려오는 장면이 나와요.
여기 우주선을 예수님의 부활의 층이라고 본다면 여기에서 내려오는 것이 성령이예요. 성령이 내려오셔서 여기 있는 사람들을 성령으로 당기죠. 사도바울은 이것을 ‘성령의 세례’라 하죠. 그런데 이 성령의 세례 안에서는 어떤 것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환란과 핍박이라도 끊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사도바울은 뭐라하냐면, 제일 중요한데, ‘사랑’이라 합니다. 이러면 사도바울의 신학은 끝났어요. 성령세례가 당길 때 뭐로 당긴다? ‘사랑’으로 당긴다.
‘사랑’이 어렵습니까? 그러면 ‘용서하심’. 이건 좀 쉽죠. 용서하심으로 당겨요. 사랑과 용서하심으로 당기기 때문에 그 때마다 뭘 느낍니까? ‘또! 용서하시네!’ ‘에헤, 또 용서해주셨어!’ ‘이거 왜 그러시는지 몰라! 또 용서하시네!’
이것이, 우주선에서 계속 당겨주시는 것, 이것이 바울 신학의 전부예요. 그런데 이 사랑은 뭐냐하면, 모든 율법을 다 이루어서 다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사랑안에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전에는 율법에 의해서 우리가 죄인임을 아는데 신약의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안에서 우리의 죄인됨을 아는 겁니다, 사랑 안에서.
이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은 이렇게 살았는데 너는 뭐했노?’ ‘아이구 죄인 맞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날에는 율법으로 우리로 죄인 되게 하던 것이 이제는 십자가의 용서하심 앞에서 우리는 형편없는 죄인인 것을 알아요.
아, 세리와 창기가 바로 저군요. 안다 말이죠. 그러니까 사랑 안에서 당겨주니까 사적으로 말해서, 주님의 용서하심 안에서 당겨주시니까 사적으로 말해서 뭐냐? 더이상 율법으로부터 해방된 상태, 이것을 ‘자유’라 합니다.
이 그림 하나로 모든 바울의 신학은 끝났어요. 우주선 왔다. 문 열리고 뭐가 내려온다? 성령이 왔다. 성령이 뭐로 당긴다? 사랑으로 당깁니다. 사랑은 뭐다? 용서하심이다. 그래서 여기서 사랑은 주님의 부활의 능력, 용서하심의 능력이기 때문에 어떤 누구도 당겨지는 사람을 정죄하지 못해요.
니 뭐 안했지? 너 죄 지었잖아? 나쁜 짓 했잖아? 이러한 정죄함이 없어요. 이 사랑 안에는. 사랑 안에는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어요. 그래서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심판에 이르지 아니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을 알아야 이것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세상에 사도행전에 보니까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에게 된통으로 머리위에서 사랑의 폭탄이 터져버렸어요. 성경을 본적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는, 율법, 안식일, 십일조를 알지 못하는 이 인간에게 그냥 된통으로 사랑의 폭탄이 터져버렸어요.
사랑의 원자폭탄이 터져버렸지요. 용서하심이 주어지니까 그 사랑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는 이것을 가지고 ‘예수 안에서 너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자, 이것이 5장 17절인데, 오늘 많이 주무시네요^^ , 그러면 5장 18절은 뭐냐면 방금 이 체제 시스템을 바깥 외부에서 바라보자. 외부에서 본다면 이 ‘끌려가는 사람’에게서 뭐가 나오겠느냐? 이것이 18, 19절에 나옵니다.
19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 시스템 안에 계시사, 다른 말로하면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그 다음에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시고’... 여기서 세상이라 하는 것은 세상 중에 택한 백성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와요. 내가 말한 세상은 온 세상 사람을 말한 것이 아니고 내가 택한 사람들을 말한다. 예수님의 기도를 참조하시고... 저들의 죄를 저희에게 뭐 하지 아니하시고? 저희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돌리지 아니하는... 이것이 바깥에서 보면 이것이 나와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끌려가면서 예수님의 안에 있는 세계를 증거를 하는데 증거할 때 어떤 식으로 증가한다 말입니까? ‘우리에게 우리의 죄를 돌리지 아니하시고’, 를 누구 입을 통해서? 천하죄인 우리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하도록 한다 말이죠.
이제 목사님 나오셨으니까 처음부터 다시해봅니다. 처음에 뭐라 했느냐하면 ‘사도바울이 말 한 것이 전부 헛소리 아닙니까?’ 왜냐하면 예수님이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도 말라. 어느 신문 방송에 그런 이야기 나온다 말인가? 사람이 죽어다가 살아났다면 나도 믿겠다. 진짜 살아났다면 나도 믿겠다. 하지만 엉터리기 때문에 나는 안 믿는거야, 라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이죠.
그래서 우리도 그들과 똑같이 성경이라는 자체가 허황되기 짝이없는 정신병자나 믿는 것으로 믿을 것이 못된다고 했고, 사도바울은 역시 정신병자의 보스, 오야봉이다. 이렇게 아주 절실하게 느껴야 된다.
이것을 자주 지독하게 느껴야 되요. 지독하게 느끼다가... 그래서 예수의 이야기는 전부다 환상이고 뭐는 환상아니다? 지금 배고프다 돈달라하는 내 몸이 실재다, 라고 느꼈었는데... 그런데 사도바울이 전한 성경을... 나중에 보니까 성령의 역사지만... 나중에 보니까 내가 왜 살지 살아보니 뭐하나... 지금 90세다 90되면 내일 뭐 할건데... 90이든 100살까지 살아도 허무한 것은 허무한 것이다. 이거 나중에 내 죽으면 죽었다고 불태우고 그저 부조받는다고 빠쁘고... 이게 인생이 백날 살아도 천구백몇년에 태어나 천구백몇년에 죽었다 비석에 그것만 남고 그럼 내가 비석인가? 내가 돌로 다시 변하는 겁니까? 아니잖아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하나의 흙으로 돌아갈 인간. 그렇다면 자살하지 미쳤다고 내가 왜 사느냐 말이죠. 무슨 직업을 가졌던 결국 흙 아닙니까? 어짜피 흙인데. 흙이 무슨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까. 아무 의미도 없고 목적이 없잖아요.
왜 사는지도 모르고 산다고요.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우주선을 통해서 성령이 오고 보니까 그때부터 우리에게 우리를 통해서 뭔가 나오는 것이 있어요. 뭐냐하면... 주님이 손해보는 장사는 안 합니다. 주님은 손해보는 장사를 안 해요. 자기 생명을 주시는 피 흘리는 일을 해 놓고, 우리보고 이 세상을 향하여 어떤 소리를 하라고 하느냐 하면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를 자랑스럽게 이 세상에서 떠벌리라고 하십니다.
죄 안 지은 놈은 없다. 하지만 너희들은 모른다. 우리 죄는 이미 청산했다. 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다.^^ 이 말을 풀이하면 우리의 죄는 그 분이 홀랑 다 가져갔다. 사람은 순간순간 죄 안 지을 수 없는 것은 확실하고, 먹고 살려니 남에게 피해를 주어야 하고, 사람의 죄를 한 번 끄집어 내 보세요. 종이에 붙어있는 카스테라 빵 다 안 떼어먹은 죄, 코 골아서 남 잠 못자게 한 죄, 과속 운전해서 옆에 얌전히 운전하는 사람 약 올린 죄, 신발 끌어서 소리나게 한 죄... ^^
이 죄가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 모든 죄인데 그 죄를 지고서 어디로 간다? 비석 밑의 한 줌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런 죄를 짓다가, 이제는 예수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인데 외부에게 무엇을 알린다? ‘우리에게 우리의 죄를 돌리지 아니하시더라’, 할 때에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그 때 반드시 위에서 묻는 것이 있어요. 뭐냐하면 ‘누가?’ 야 - 이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제가 제일 욕 얻어 먹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 한다’ 할 때에... 다른 사람이 ‘누가?’ 그렇게 해서 했느냐 할 때, ‘예수님’이 그렇게 하더라 하는 것이 우리 성도의 목적이다, 라고 저는 그렇게 주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예수(믿고) 구원받는 것이 목적이라는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교회 부흥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겁니다.
제가 20년 동안 줄기차게 살아 온 것이 뭐냐하면 성도됨은 누가? 다른 말로 하면 여기서는 누굽니까? 예수님,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것이 저의 주장이고..., 그것이 아니다. 교회 부흥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 싸움입니다. 줄기차게 지금 아직도 싸워요. 오늘까지 계속 싸우고 있어요.
성도의 목적은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라고 할 때 누가 그 따위 소리를 하더냐 ‘예수님이 다 했단다’, 하고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인간이지... 현재 내가 어느정도 성화되었느냐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이냐 내가 얼마나 완벽하냐 내가 얼마나 완전에 가까우냐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 일을 많이 했느냐 내가 선교비를 얼마냈고 선교사 활동을 얼마나 했고... 이것은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를 훼방한다고 저는 보고 있어요.
보세요.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라는 말을 하려면 그 앞에 우리는 뭐가 선행되어야 합니까? 우리가 뭐야 되요? 죄인. ‘죄인이었는데 우리 죄를...’ 이렇게 되어야 하죠. 죄인이었는데... 그런데 이렇게 죄인인 것을 이야기 해 주어야 ‘누가’라는 말이 나와요. ‘죄인인데 용서 받았어’. ‘누가 용서해줘?’ 할 때 ‘예수님이’ 하면 말이 되는데...
나 훌륭하거든, 나 전도 많이 했거든, 나 큰 교회 당회장이거든, 이래 되어 버리는 그것은 결국 뭡니까? 계속해서 여전히 내가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내가 주인공이 되면 이 사람은 졸지에 뭐가 되느냐 하면 마치 한동안 죄를 안 짓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뭐냐 제가 강의 첫마디에 했죠. 그 사람의 실재는 뭡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실재가 아니고 내가 개척해서 큰 교회 이 만큼 모아놓았다, 이것이 실재예요. 이것이 실재가 되니까 똑똑한 부교역자 오면 좇아내 버립니다. 그리고 저한테 달려드는 장로오면 치리해 버리는 거예요. 왜? 실재가 뭐가 실재입니까 이 교회 외장 있음이 실재인 겁니다. 이 대리석 만져봐라. 실재하잖아. 그것이 실재인 거예요.
‘내 죄를 내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눈에 안 보이는 사도바울을 통해서 예수님이 이야기 하더라. 그것은 허황된 거예요. 내 교회에 돈이 되는 한 그 이야기 하지만 궁극적으로 돌아서면 그거 떼어내면 뭡니까 역시 실재는 내가 이 교회의 당회장이 실재입니다. 그것이 죄인 줄 몰라요. 그것은 새로운 피조물이 아니고 여전히 옛날 놀던 가락이 종교적인 폼을 내는 것 뿐인데 그것은 실재가 아니거든요.
제가 다시 한 번 얘기 할께요. 어느 정도로 목사가 되어야 믿음이냐 하면 복음 전하는 자체가 기뻐서 그 복음 전하고 무슨 대우를 받더라도 ‘주여 뭐 괜찮습니다’. 이 정도 되어야 복음 증거할 기회 주신 것만으로 감사합니다. 정도 되어야 제대로 주의 보이지 않는 층을 믿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의 방향성은 주님 쪽이 아니고 이것은 내 교회다 씨 어느 놈이 손대노. 이거 내거 얼마나 키워놓은 건데 내가 쫓겨나나... 퇴직금 줘. 이게 바로 자기 실재가 되어 버립니다.
어떤 인간도 방금 제가 한 이러한 죄에서 벗어 날 수 없는 걸 저는 인정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뭐냐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오늘의 나의 죄가 뭐냐 알자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잠시 강의 계속합니다.
오늘의 나의 죄를 알려면 ‘진리 앞에서 죄’거든요. 그런데 진리라는 것이 뭐냐하면... 어떤 사람들이 이런 소리를 해서 제가 답답한데 ‘아니 목사가 왜 철학을 공부해야 합니까?’ 이래 이야기 해요. 목사가 왜 세상학문을 공부해야 합니까. 그러면 제가 이야기해요. ‘진리에 대해서 관심없습니까?’ ‘관심있죠. 진리는 성경 안에서만 진리 아닙니까?’. 이래 이야기 해요.
진리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 문학 철학 다 아세요. 다 아시는 분이 ‘너희들은 진리가 아니고 내가 진리다’,고 이야기 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 안에서 그것을 수용하려면 예수님이 아셨던 모든 것도 구석구석 알아야 왜 우리가 이 구석구석에서 왜 진리가 아니고 죄가 될 수 밖에 없느냐를 알수 있는 겁니다.
이것은 신학뿐만 아니고 모든 분야가 다 할 수만 있다면 다 알면 좋겠어요. 문화인류학을 알고, 언어학을 알고... 할 수 있다면 다 알았으면 좋겠어요. 남편이 공장가서 일한다. 보통 남편이 공장가서 일하는데 아내가 잘 안 찾아와요. 공장 친목회 부부동반 하여 놀 때는 하지만 공장에서 (남편이) 뭐 하는가 연구하는 아내는 별로 없죠? 그죠? ^^
만약에 남편이 공장 선반일 한다면 선반구조가 어떻게 되어 있고 이렇게 해서 쇠가 뚤리는구나 연구하는 아내는 별로 없잖아요. 그것은 당신 일이고 나는 아이 키우는 것이 일이다 하잖아요. 남편이 아이 어떻게 키우나 관심 없듯이 남편하는 일이 관심이 없을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되면 각자 각자에서 ‘자기 의’가 생겨나버려요. 자기 의가. 자기 영역에서는 자기가 절대적인 신, 의가 되어 버려요. 주님께서 지금 선반공에 침투해서 이것마저 죄라는 것을 일깨워 주어야 19절에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가 되는 겁니다.
왜 목회자의 목회가 죄가 되느냐? 사람들이 자꾸 저보고 욕을 하는데 목회자의 목회가 죄가 되어야 우리가 그리스도의 증인입니다. 아아 주님이 침투하지 않는 곳이 없구나! 알아야 되요. 방앗간하는 사람이 떡 뺄 때 떡 빼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아야 되요.
아니 떡빼는 것이 뭐가 죄냐? 살기위해 떡 빼는 데 그게 왜 죄냐? 따지겠지만... 성경에 떡 빼는 것이 죄라는 게 어디 나오냐 안 나오지요.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란 말입니다. 떡 빼면서 ‘방향성’이 뭐냐하면... 욕조(중앙)에 있는 것이 아니예요. 욕조 다시한번 그려봅시다. 이 소용돌이. 떡을 빼면서 실재적인 것이 뭐냐 떡 한 되 빼는 데 얼맙니까? 5천원이라 합시다. 한 되 빼는데 5천원 받았잖아요. 오천원 갖고 뭐가 실재적입니까? 오천원가지고 아이 옷 한 벌 사주는 것이 실재이죠.
그런데 뭐가 실재라 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실재라 했지요. 애써서 아이 옷 사 주어봐야 교통사고 나서 그만 죽어버리면 그만 아닙니까. 옷은 나중에 낡아 없어지니까. 결국 옷 사주어봐야 곧장 허무로 끝난다니까요. 옷 사주어봐야 ‘엄마, 저 애는 5만원짜리 옷인데 5천원짜리 옷인가?’ 또 또 또 허무로 끝나요. 이것이 자꾸 허무로 끝나는 환상의 연속이란 말이죠.
그런데 실재는 뭐냐하면 애 옷 사주는 것이 실재가 아니고 그 순간에도 주께서 내 죄를 용서한다는 것이 환상이 아니고 실재 아닙니까. 그렇다면 오천원 떡값 받으면서 주여 이 돈은 주기도문 그대로 제가 노력한 것이 아니고 ‘일용할 양식’입니다.
자꾸 방향성을... 오천원받더라도 방향성을 누구와 연관시켜와 되요? 지금 보이지 않는 주님과 연관시켜 주어야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하고 관계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막상 돈 보면 그 생각 싹 가시고 야! 또 며칠간 살겠다. 그 때 천사가와서 내일 왜 살아야 하는데? 살 이유있나? 없어. 살 이유도 없으면서 무조건 내일 살아야겠대. 이래 해야되요. 야고보서 4장 말씀처럼,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 그 다음이 뭡니까 주의 뜻이면 죽기도 하리니...^^ 주의 뜻이면 살기도 하고에서 딱 잘라버리고 뒤에 말 주의 뜻이면 죽기도 하리니... 이것은 우리가 싫어하죠. ^^
그만큼 우리는 뭡니까 또 우리도 모르게 환상을 현실로 보고 현실을 환상으로 봤다. 실재 주님의 살아계심을 환상으로 보는 죄를 또 지은 거예요. 죄를 지은 그 순간만큼은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기쁘지 않아요. 돈 버는 것이 기쁘지.
그런데 그 순간 성령께서 돈 버는 곳에 역사하시면 주여 또 죄를 지었습니다. 불구하고 제가 고린도후서 5장 19절을 기억합니다.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신 그러한 체제속에 우리가 놓여있다. 예수안에 놓인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러니까 목사가 교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려면 교인들이 사는 삶의 현장 사업체의 구조와 거기서 그 사람의 태도를 알야야 되죠. 심방이 뭐냐 정탐입니다. 약속의 땅 정탐하듯^^ 우리 교회에 은행 다니는 분이 몇 분 있어요. 보험하시는 분도 많고. 얼마전에 우리교회 보험하시는 김집사님이 1등했대요. 내 주위에 일등하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 지 모르겠어요^^ 보험 일등하기가 힘들어요. 일등하면 무슨여행 보내준다 하는데.
자 그러면 제가 이제 그 사람이 일등했으니까 미래에셋 대구지점에서 1등했어요. 며칠 뒤에 심방할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의 일과를 대충 짐작해야 되요. 뭐 같이 있어도 잘 모르지만 ... 아침에 출근해서 무엇부터 하고 출근도장찍고 서류정리 할 때 내가 그 집사님 자리에 있다면 나는 서류정리하면서 무엇을 생각하겠느냐 말입니다. 내가 목사가 아니고.
직업이 그 집사님이라면 할 때 뭐하냐면 부하직원 왔나 체크할 것이고 오늘 위에서 내려온 과제 어제까지 실적 그 다음에 어떤 고객관리, 새로운 고객을 위해 어느 구로 뛰어야 하고 몇시에 누굴 만나야고 중요한 고객만나고 하잖아요.
그런 모든 스케쥴을 짤 때 욕조, 그 모든 통일된 생각을 하느냐 그 말이예요!. 오늘도 한 건수 올려야지. 단지 이것 뿐이잖아요. 왜 오늘도 한 건수 올려야 됩니까. 그게 실재니까. 애 피아노 학원 보내고 공부시켜야 되니까. 이게 실재니까.. 그런데 그 다음은 생각 안납니까? 그거 해서 뭐하는데? 그 생각 안 하잖아요. 살았으니 살아야지. 살았시(?) 살아야지 뭐!. 사는데 뭐 이야가 있나? 살았으니 살아야지 뭐. 이래 나올거란 말이죠. 그런 순간 그 김집사분이 1등 할때까지... 참 1등하려니 온 신경이 곤두설 것 아닙니까. 1등하려니 안그러겠습니까.
하루에 몇 번씩 아마 김집사님은 성령께서 역사하사 이렇게 생각할거예요. ‘주여 내 죄를 나에게 돌리지 마옵시고...’ ^^ 기도했을 거예요. 그런데 성령의 세례를 안 받았다면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하나님! 지금 내가 1등한 것은 내가 발품팔아 뛴 내 노농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손 대지 마소. 하나님 이거 내가 받은 보너스 하나님이 가져가면 나 하나님 욕할 거야!’. 하고 하나님께 대든다는 거. 하나님께 대드는 방법이 뭐냐, 다른 방법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는 날 보고 대드는 것, 복음전하는 목사보고 대드는 것하고 똑 같은 겁니다.
그래서 목사는 복음을 전해서 욕을 얻어먹어야 되요. 욕을 얻어먹어야 비로소 욕하는 그 사람의 죄가 얼마나 컸었다는 것을... 예수님의 부활은 허황된 거고 지가 숨쉬고 있는 것은 실재문제고. 이것은 현실이고. 이렇게 생각했던 그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아야 되요.
바로 사도 바울이... 사도바울이 경제발전에 도움 주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사도바울이 국토통일 개발에 나섰습니까. 사도바울이 군복무했습니까. 사도바울이 한 게 뭐가 있어요. 지금 사도 바울이 이 책들로 교회마다 복음 전하러 다니는 이유가 뭡니까? ‘지금도 주님은 실재로 살아계시다!’ 그 이야기 하는 겁니다.
당신이 일등하기 위해서 한 구찌(?) 한 것. 한 고객 한 것이 사실은 주님께서 그 사람 만나서 그 사람에 미래에셋에 가입하게 하셨는데 왜 가입하게 했는지 알아요? 그 김집사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돈 벌어서 깨닫게 하는 거예요. 바라기는 여러분도 돈 벌어서 깨닫게 되길 바랍니다 ^^ (아멘^^)
돈 벌어서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돈 벌면서... ‘이건 아니야 이건 헛된거야 내가 미쳤지 돈이 나를 구원하는 게 아닌데...’ 시편에 나오잖아요 사람의 구원은 어디에 있다? 돈에 있지 않다. 사람의 구원은 재물에 있지 않다. 이 걸 뻔히 알면서 알면서도 그 이야기는 듣기 싫고 돈 준다면 엄마야 좋아라 ^^
사도바울이 얼마나 고린도교회를 보고 한심스럽게 보겠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당회장에게 마귀가 왔습니다. 고린도후서11장에 나옵니다. 마귀가 복음 안 전하는 것 까지는 좋아요. 마귀가 나쁜 점은요... 복음 안 전하고 ‘여러분 돈 벌어야 됩니다. 그래야 그게 실재입니다. 돈벌게 축복합니다’. 그런 소리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진짜 복음 전하는 사람을 이단이라고 쳤다는 거예요.
이게 문제라니까. 현재 한국 교회 목사 이단들이 문제가 뭐냐하면 복음 전하는 그것을 이단화 시킨다는 게 문제예요. 그리고 따져 물으면 맞다 신학교때 그리 배웠다. 그러나 실제로 목회해봐라 그렇게 되는가. 이래거든요.
그러니 왜 니는 쪼다같이 아직도 신학교 배운대로 하느냐. 이게 이래 욕을 한다고요.
제 문서 안에 뭐가 있느냐면 재판국, 제가 면직당할 때 재판 녹취한 것이 들어있어요. 재판국에서 묻고 내가 답변한 것이 있어요. 묻고 답변하고 묻고 답변한 것. 한 번 (인터넷에) 올려 볼까요^^. 참 재미있어요. ^^ 뭐라고 질문하느냐면 ‘당신은 왜 율법을 거부하느냐’. 그래 내가 답변하기를 ‘사도행전에 보면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의는 성령 세례로 그냥 오는 겁니다. 예수님의 의가 의입니다’. 할 말이 없지요. 그래 그 사람이 하는 말이 ‘그러면 왜 십일조를 하지 말아라 하느냐’. ‘우리는 이방인이기때문에 우리는 율법에 저촉을 안 받습니다’.(ㅎㅎ). 그 쪽에서 하는 말이 ‘그러면 당신을 헌금을 하지 말라고 하느냐?’. ‘헌금은 자발적으로 합니다’. 그러니까 그 쪽에서 질문은 아니고 불평하는 것이 나와요. 그래가지고 언제 교회되지... 하고. 불평해요. ^^ 그 다음에 나온 것이 뭐냐면, ‘당신은 목사 될 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했는데 왜 그걸 안 믿느냐?’. ‘웨스트민스터는 믿는 것이 아니고 참고용입니다’.(ㅎㅎ) ‘왜 그걸 안믿냐?’. ‘인간이 만든 것은 오류가 있습니다. 오류가 없는 것은 성경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믿는 것이 목사의 할 일 입니다. 웨스트민스터를 믿으라 하는 것은 목사의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또 할 말이 없어요. 또 나온 것이 ‘당신은 왜 민중이란 용어를 썼느냐? 대중이라 안쓰고 왜 민중이란 용어를 썼느냐?’ (ㅎㅎ) ‘민중이란 용어를 쓴 것은 대중들이 그냥 대중들이 아니고 예수님을 핍박하는 대중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그 사람들을... 악한 세상을 보기위해서 민중의 어떤 같이 휩쓸린다는 의미에서... 대중은 각자 중심이 있지만 민중은 같이 휩쓸려요. 군중심리라 하죠. 같이 휩쓸린다고요. 그래서 그것을 민중이란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들이 뭐가 뭔지도 모르고 누구 권세가 따라하니까 우르르 따라하는 것으로 내가 용어를 썼습니다. 민중에서 벗어나서 하나의 주님 앞에 서라고 한 겁니다.’
그게 바로 면직당한 이유입니다.^^ 거기서 중요한 것은 무어냐. 놀라운 것은 웨스트민스터 고백에 보면요 진리는 오직 성경뿐이다라고 나와요. 웨스트민스터에 십일조라는 것은 아예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게 뭐냐 하면 목사들이 뭐를 실재로 하느냐 하면 성경은 실재가 아니고 실재는 성경을 얼마나 잘 이렇게 활용하면 ‘실재 교회 하나 소지할 수 있느냐’ 그곳에서 돈이 나오니까 생계비가 나오니까. 어쨌든 교회를 건드리는 놈은 교회 장사 방해하는 놈은 죽여버린다. 그게 실재이예요. 그래 니는 뭔데 여기에 동조하지 않느냐 이 말이예요.
그런데 이게 내가 보기에는 참으로 허무한 거예요. 왜냐하면 성도됨의 구조가... 다시해볼까요... 예수님의 부활. 부활 안에서 뭐가 나온다? 성령 나온다. 성령이 우리를 당길 때 뭐로 당긴다? 사랑으로. 사랑은 뭐의 완성이다? 모든 율법의 완성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에게는 율법지킬 필요가 없이 이방인들은 된통으로 뭘 받아요.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그냥 된통으로 받아요. 그걸 성령 세례받은 거예요.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의 뭐가 된다? 의가 된다. 그 의로 앉은뱅이가 낫게 되는 거예요.
이게 사도바울의 애기인데 이게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죠. 그 밖에 있는 사람들은 외부인은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의 고백을 들어요. 그 고백이 뭐냐?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신다 할 때 그 때에 외부에서는 뭐라고 묻습니까? 누.가.그.렇.게.하.더.냐? ‘누가’라고 물을 때 찬스가 아닙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신다!
왜? 그분은 십자가에서 모든 화목제물로 이루셨기 때문에. 결국 딱 따져보면 뭐가 증거됩니까? 내가 얼마나 위대하냐가 아니라 예수님이 위대하다. 예수님의 공로가 증거된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믿음이 없는 일반 교인들은 그 말이 듣기 싫죠. 왜냐하면 교회 문 열 때 뭐 얻으러 왔습니까? 실재 도움이 되는 돈, 그 돈이 어디에 숨어있는가 장소 알려달라고 교회에 온 거거든요.
점치기는 좀 뭐하고 그래서 교회 오잖아요. 돈 벌수 있는 방법인데 돈 버는 것은 내가 잘 되는 것인데 교회와서 막상 복음적인 설교를 들으면 내가 잘 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어느 영역이 속했고 그 영역에 속한 사람은 뭔가 누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된다는 그러한 이야기를 할 때에 그 증거하면 돈 줍니까? 라고 또 돈과 연관을 시키는 거예요. 일반 교인들이.
예수님 복음 증거하면 우리 집안이 잘 풀리게 합니까? 또 이걸 하니까 그래서 저 보고 하는 소리가 목사님 복음은 좋은데요 복음대로 하니까 교인들 다 떠납디다. 그때 내가 하는 이야기는 너도 떠나느냐 ^^ 말씀드리면서.. 아버지가 보내지 아니하면 아무도 내개 올 수 없다 하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하시면서 골라 낼 자를 골라내는 거예요.
좋은 고기 나쁜 고기, 참감람나무 돌감람나무, 양 염소, 그런식으로 골라내는 거예요. 복음 전해서 골라내요. 교회 부흥 축복주면서 골라내는 것이 아니고 오직 복음만 전해서 골라냅니다. 주님이 그런 방법을 하는 것을 우리가 말릴 수 있습니까 못 말립니까 말릴 수가 없어요. 지금도 주님이 그렇게 하시니까... 말릴 수가 없어요. 사도바울이 ‘주님 그러지 마세요’ 이렇게 하더라고 주님을 말릴 수가 없어요.
자, 이제 20절을 봅시다.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에 대하여 권면하신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여러분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가 누구죠? 예수님이죠. 그러면 예수님하고 누구하고 비교합니까. 우리하고 비교하죠. 우리는 무슨 자가 되어야 합니까. 죄 지은 자가 되어야 되죠. 몇 살 때 까지입니까. 죽을 때 까지죠. 이것을 또 저 보고 욕을 합니다. 죽을 때 까지 죄 짓는다 하니까 또 욕해요. 차츰 죄가 없어진대요...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 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모르느냐하면 에베소서 3장을 몰라요. 거기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풀장으로 봅니다. 풀장은 뭐가 있다? 깊이 넓이 높이가 있죠. 자, 물에 빠졌습니다. 이것은 에베소서 3장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 뿐만 아니고 베드로후서 1장6절을 보면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뭡니까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하고 나오죠.
자 이것을 지금 설명합니다. 풀장입니다. 풀장 전체에는 뭐가 있다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다른 말로하면 사랑이죠, 다른 말로 하면 자유고.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있죠. 1미터, 2미터 지금 박태환이 수영하고 있습니다. 3미터 4미터면 (깊이로) 빠집니다. 자 물에 빠집니다. 물에 들어갔습니다. 물이 없는 곳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온 몸이 전부 물 속이죠. 3미터 마찬가지죠 10미터 물속이죠.
그러면 스무살 때 예수 믿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를 주시죠. 사십까지 살았습니다. 우리는 뭡니까 뭐가 있어야합니까 죄가 있어야 되죠. 그런데 그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구십까지 살았습니다. 역시 우리는 죄짓고 주님께서는 그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가 되죠.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깊이나 높이나 베드로서에 나오는 인내에 절제를 경건을 더하고... 이것은 뭡니까 사랑의 깊이를 깊이를 만끽하는 거죠!
만끽하고 만끽한다고 해서 만끽하는 것이 자기 자신의 공로입니까! 나는 만끽했어, 너는 만끽하지 못했지? 이것이 비교거리 경쟁거리가 되느냐 이 말이죠. 차라리 내가 니 보다 죄 많이 지었다는 소리밖에 안되잖아요. 풀장에 들어가서 나 이만큼 죄 많이 지었다 그런 이야기라는 내가 이해한다 말이죠. 나는 죄가 점점 엷어져 없어져... 이것은 말이 안 된다니까요!
날이 가면 갈수록 뭘 느껴야 되요? 야, 주심께서 이것마저 용서하시네. 이것마저. 그것을 더 느끼는 거예요. 그것을 더 느끼니까 절제에 인내, 인내에 형제 우애... 이런게 나온다 이 말이죠.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고... 이것이 뭐냐면 그 만큼 우리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는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퍼부어 주시는 은혜가 우리가 예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그 이상이예요.
지금도 목회하다 때려치우고 구원받았다고 좋아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잖아요. 돈까지 집하면서 구원받았다고 좋아하는 사람이 한 둘이 아니잖아요.^^ 보세요 다른 사람같으면 목사하다 안하면 지옥가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돈까스해도 구원받았잖아요. 그것이 뭐냐면 우리가 설마 이런 행동을 해도 용서받을까?... 그것 이상입니다. 그것 이상이예요.
로마서 강의 나오죠. 바께스(양동이)에 물을 채우는데 수도물 잠그는 것을 깜빡 잊어버렸어요. 이거 아침에 보니 물리 콸콸 넘쳐요. 자! 죄가 더 한 곳에 뭐가 넘친다고요? 은혜가 더욱 더 넘쳐요.^^ 그러니 그 사람은 경건 안 할 수 없죠. 그 사람이 절제 안 할 수 없죠. 그 사람 고집세도 그 큰 사랑 받아놓으니 고집세울 이유가 없죠. 지가 죄인 중에 죄수인데요 뭐.
사도 바울이 스스로 죄인 중에 괴수라고 사도바울이 예수 처음 믿을 때입니까 마지막 부분입니까? 이게 처음이고 마지막이고 간에 지금 풀장에 지금 5미터 깊이 들어갔잖아요. 죄인 중에 괴수죠. 10미터 들어갔잖아요. 그럼 5미터때만 입니까? 그러면 거슬러서 5미터 때에도 물이고, 10미터 깊이도 물이예요. 1미터도 물이고 10센티미터도 물입니다. 다시 내가 원상태로 돌아가도 용서받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10미터 내려와도 내가 용서받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하였튼 우리는 주 안에 있다 말이죠. 새로운 피조물이다 말입니다. 여기에 무슨 성장, 발전이라는 것이 없어요. 씨앗이 어떻고 뭐.
진보, 우리의 신앙의 진보라 하는 것은 주님의 용서하심을 더욱 더 만끽하는 거예요. 내가 진보하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쳐들어 온 주님의 은혜가 더 풍성하게 느껴지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애가 벌서면서 용서해주세요... 이것이 정상이지. 벌서면서 나 지금 이쁘지, 너는 더 이쁘나 덜 이쁘나... 이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이듯이, 사람들이 자꾸 자기의 그 위신과 체면을 자꾸 생각하다 보니까 사도 바울이 말한 이것을 도무지 이해 못해요.
하나만 더 하고 마치겠어요. 21절.
죄도 알지 못하는 자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뭐가 된다? 의가 된다.
결국 이것은 우리 자랑하라가 아니고 10미터에서도 하나님의 의이고 3미터에서도 하나님의 의예요. 그래서 예수믿고 오늘 죽어도 천당가고 예수 믿고 10년 뒤에 죽어도 낙원에 갑니다. 바라기는 오늘 가기를 바랍니다만 그런 보너스는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고 고생할 놈은 더 고생해야 되고^^ 사도 바울이 기도했어요. 주여 빨리 죽게 하옵소서 하지만 그런 혜택은 사도바울에게 주는 혜택이고 우리에게는 아직 멀었고 죄를 더 지어야 되요. 카스테라 밑종이에 붙어있는 빵조각 안 떼어벅은 죄 코골아서 남 잠 못자게 만든 죄, 밥을 너무 빨리 먹어서 다른 사람에게 심리적으로 (압박감을 주어) 체하게 만든 죄, 설교할 때 발음 안 좋아서 지은 죄, 머리 빠진 죄, 모두 다 죄 안 지은 것이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실재를 가지고 환상이라고 우겼고, 환상 속에 살면서 그 실재가 우리의 목숨을 걸어야 실재인 줄 알고 착각하였습니다. 이제는 뒤 바뀌게 하여 주시옵소서. 발걸음도 세시고 머리카락도 주께서 세신다는 것, 참새도 키우신다는 것을 깨닫고, 지금도 주께서 어떤 할 일을 주셨는지를 그것만 생각하는 주의 종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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