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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목사

AND :예수 성경 OR :모세||요한 포함 :"나의 왕"

칼 바르트와의 대화 (KARL BARTH"S TALK TABLE) 2자유게시판[신학]

칼 바르트와의 대화 (KARL BARTH'S TALK TABLE) 2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0)

2. 질의 및 응답

위의 논문에 대한 바르트의 논평 : 매우 좋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나의 저서보다 더욱 더 일관성이 있는 듯합니다. 나는 「교회교의학」에 보다 많은 복잡성 - 심지어 모순들 - 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주류(主流)는 정확하다고 봅니다. 당신의 논문은 나의 신학에 대해서 오해가 많은 미국에서 출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학 생 : 교수님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ca)이 로마 카톨릭주의에 작용한바와 같이 「교회교의학」이 개신교주의에 작용하여 교회가 교의학의 계속적인 집필을 거부하는 시대로 유도할 위험성은 없다고 보십니까?

바르트 : 물론 있습니다. 아퀴나스에 비교하니 명예로운 위험성이라고 하겠지요. 감사합니다. 아퀴나스 이후 그의 신학을 대부분 반복하였지요. 아퀴나스 자신도 중세기 중세기의 위대한 체계를 이룩한 피터 룸바르트(Lombard)의 문장들을 많이 반복하였으니까요. 사실상 모든 신학자들이 칼빈에 이를 때까지 그랬지요. 물론 위험이 일어날 수 있지요. 미래 신학자들이 이런 종류의 스콜라주의에로 후퇴하려는 유혹을 받을지 몰라요. 나의 교의학에서 이 모든 것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질문하는 것이 학생이 처음이 아니예요. 교회가 교의학을 계속적으로 저술하는 기능은 절대로 폐기될 수 없지요. 생동하는 교회는 생동적인 교의학을 가지게 될 것이니까요.

학 생 : 교수님은 교의학을 기독교의 어떤 큰 교리에서도 시작할 수 있다고 번번이 말씀하셨지만, 교수님께서는 「교회교의학」을 삼위일체 교리 이외의 어떤 교리에서 출발시킬 수 있다고 진정 믿으십니까? 저는 그 구조를 검토한 다음에 그 가능성에 회의적이 되었습니다.

바르트 : 기독교 진리는 생동적인 총체지요. 나는 구조라는 말을 극히 좋아하지 않아요. 그것이 건물이나 체계를 시사하기 때문이지요. 기독교 진리는 구체(球體) 와 같아서 모든 점이 중심을 가리키고 있어요. 우리는 어떤 교리를 가지고도, 예를 들면 교회론이나 칼빈의 제3권의 제목인 성화나 심지어는 성령에 대한 보편적 교리로써 교의학을 시작할 가능성을 제시해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는 기독교인에서도 출발할 수 있어요. 기독교인과 기독교 신학자는 자유한 인간이어야 합니다. 내가 쉴라이에르마헤르와 주관주의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 당시에 필요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교회교의학」에서 배운 사람들이 기독교 주관주의에서 출발할지도 모르지요. 왜 안 됩니까? 물론 자유란 책임과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자유는 진정한 자유를 뜻합니다. 내가 최근에 나의 강연 "Methodus est arditraria"(방법은 임의적이다)에서 말한 것을 기억하세요. 순서는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번에는 삼위일체 교리에서 출발합니다. 다른 때에는 신학과 그 상황이 변하겠지요. 나는 신학의 자유에 대하여 열정적인 관심을 지니고 있고 또한 나는 미래신학자들이 「교회교의학」에서 자유하는 것에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내가 바로 이해됩니다. 나는 삼위일체에서 시작해요. 하지만 나는 쉴라이에르마헤르의 절차, 곧 삼위일체로 끝맺는 것도 옳다고 상정할 수 있어요.

학 생 : 그러나 교수님은 Prolegomena(서설, 序說) 이외에 어디서나 출발하실 수 있습니까?

※ 프롤레고메나(Prolegomena) - "앞에 쓰여진 말"을 뜻하는 헬라어로서, 조직신학 책에 그 저자가 신학을 전개하기 전에 다루어야 할 줄 생각하는 것을 논의한 부분을 가리킨다. 조직신학 서론에서는, 예를 들어 조직신학의 일반적인 성질, 신학과 다른 학문(예를 들어 철학)과의 관계, 진리와 권위의 문제 등을 다룬다.

바르트 : Prolegomena의 문제들을 Postlegomena로 옮겨갈 수 있을 겁니다. 방법론과 인식론은 교의학의 끝머리 - 심지어는 중간 - 에 올 수도 있으니까요. 왜 불가능하겠습니까? 나는 가장 단순한 방법을 택하였어요. 나는 이 저술에서 지나치게 학교 교사가 되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다음 세대는 "처음에서 출발하자"(Let's begin at the beginning) 라고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다 보고 사색하면서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학 생 : 설령 그들이 "실존"에서 출발해도 말씀입니까?

바르트 : 물론이지요. 그러나 성령과 교제하는 인간의 실존과 함께 출발해야 합니다. 무엇이나 모두 허용되는 것은 아니지요. 우리는 불트만의 출발점인 인간의 실존 자체에서 시작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나는 모든 신학자들이 (모두는 아닐지 모르나) 하늘에서 만나 함께 이야기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어요. 모두가 자기네들의 저서에 대하여 언급할 겁니다. 그러나 그때 그들은 밝히 알게 될 것이고 피차 상대방을 이해하겠지요. 어떤 이는 "친애하는 쉴라이에르마헤르씨, 나는 비로소 당신을 이해합니다. 몇 가지 점을 제외하고는 당신이 옳았습니다"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어요. 따라서 그는 이해에 도달하게 될 것이고 그는 당신의 신학에 대한 것을 당신에게 말할 겁니다. 일치 속에서의 불일치가 아니라, 불일치 속에서 일치가 될 것이에요. 이것은 학생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심각할지도 모릅니다.

학 생 : 교수님의 신학에서 항시 강조된 것은 하나님은 본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것과,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자유하시는 동시에 우리를 위해 자유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pro nobis"(우리를 위한)인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유일한 것으로 삼고 있는 교회에서 이 "extra nos"(우리로부터 떠난)에 대한 기독론적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르트 : 이것에 대한 기독론적 이유는 선택의 교리, 즉 하나님의 은총적 선택의 맥락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어요. 만일 그렇다면, 만일 화해가 하나님의 자유롭고 은총적인 선택에 근거한다면,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에게서 외적인 필연성을 인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항시 자유로써 의지하시고 행동하십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 바 그대로 존재하시면서 그는 바로 거기서 자기 자신을 값없는 은총의 하나님으로 계시하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세계에 얽매이어 있지 않아요. 그는 스스로 얽어맵니다. 계약은 그의 영원하면서 또한 자유로운 의지예요. 심지어는 존재론적 영역에도 extra nos가 있어요.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은 extra nos 입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 없이 행동이 자유로우시지만 그는 자기의 자유로써 사랑하시고 계셔요. 그는 그의 사랑 안에서 extra nos로 존속하시지 않을 겁니다. 그는 영원히 자기의 사업을 우리와 함께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 extra nos인 것과 우리를 위한 그의 행동 사이에는 모순이 없어요.

학생 : 말씀과 실존은 분리되어 있습니까?

바르트 : 말씀이 사건이라는 의미에서는 그렇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의 말씀을 말씀하십니다. 즉 말씀은 우리의 실존과 동일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여 구사합니다. 제각기 실존하는 하나님과 우리가 서로 만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계에서 들어오며 신앙으로 우리의 "소유"까지 되지만, 우리와 동일시될 수는 없어요. 말씀은 자유롭게 존속합니다.

학 생 : 만일에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을 위해서 "진정한" 인간이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in Christ), 즉 교수님의 해석에 의하면 "교회 안에"(in the Church) 있을 때만 진정한 인간이라면, 또한 만일 교회란 교회의 선포가 하나님의 말씀이 될 때 간혹 야기되는 사건이라면, 교수님은 교수님의 인간학에 대하여 어떻게 존재론적 중요성을 부여하십니까? 존재는 연속성을 추정하는 것이라면, 어디에 연속성이 있습니까?

바르트 :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인간이라고 내가 말한 적이 있던가요 ?

학 생 : 그렇습니다. 제3권 제2부에 "하나님을 위한 유일의(the) 인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르트 : 아 네. 이제야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을 위해서 진정한 인간입니다. 모든 사실은 우리가 "진정"(real) 이라는 말로 뜻하는 것에 달려 있지요. 여기서 내가 뜻하는 바는, 우리 인간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결핍한 실존이라는 것도 있다는 말입니다. 죄의 인간은 실존하지만, "진정한 실재"(real reality)가 아니에요. 그는 인간의 의미를 성취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이 하나님 앞에서 유일한 인간입니다. 그는 인간의 진정한 실존을 완성합니다. 우리는 그렇지 못해요. 우리는 불완전한 실재를 지니던가, 아니면 실재를 상실합니다. 나의 인간학의 초점은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의 사실상의 형제라는 겁니다. 온 세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를 통하여 치유되었기 때문이지요.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 자기의 목적을 두며 실질적으로 그의 형제가 되는 것이에요.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in)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for), 그리스도의 "관점에서"(in view of) 생존하고 있지요. 그리스도 없이 인간은 없고 그리스도의 실질적 형제가 아닌 인간이 없으므로 그를 떠나서는 인간의 실재는 없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몰라요. 그러나 인간성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그것이 거기서 시작한다면, 그것은 다만 인간이 진리를 발견하기 때문이고 그가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때문이라 하겠어요.

학 생 : 성서에 나타난 인간 - 죄 가운데 있는 존재 - 의 존재론은 무엇입니까?

바르트 : 죄인으로서의 인간은 자기의 진정한 존재를 문제 속으로 몰아넣지요.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제한된 존재입니다. 그는 기독교인이 되기 전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지만 아직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믿기 시작할 때에만 그것을 인식하게되지요.

학 생 : 교수님은 "그리스도의 몸"(Body of Christ)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하십니까, 아니면 은유적으로 이해하십니까?

바르트 : 그것은 분명히 은유(metaphor)이지만, 매우 폭넓은 것이에요. 우리는 "그리스도는 머리요 우리 교회는 그의 몸이다" 라는 이 진리를, 은유적 언어 없이 표현할 수 없어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것은 아니지요. 이것이 신약성에서 밝히 드러납니다. 그 몸은 부름을 받고 경청적이며 수용적인 신자들로 구성됩니다. 그러나 누구나 그 몸의 실질적인 구성원이에요. 아무도 여기서 배제나 그 몸의 실질적인 구성원이에요. 아무도 여기서 배제되지 않아요. 이것은 선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선교사들은 사람들에 대한 진리를 그들에게 일러주어야 합니다.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가 그들을 위해, 즉 인도인, 중국인, 아프리카인들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선교사가 접근하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다른 부류의 인간이 아니라, 그 몸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주권 안에서 그의 영역에 속한 인간입니다. 선교사는 "그리스도는 당신의 주님이십니다" "나의 주님이십니까?" "물론 당신의 주님이 되십니다" 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실질적"(virtually) 이라는 말은 "사실상"(actually) 라는 말에 반대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실질적인 형제를 사실상의 존재로 기술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해요. 우리는 "그들이 죄인이다" 라 것밖에 말할 수 없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실질적인 형제로 접근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어느 정도 실질적인 형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상황을 이해한다면, (울타리밖에 있는) 사람들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학 생 : 그러면 두 가지 존재론, 곧 죄 가운데 있는 존재와 은총 가운데 있는 존재가 없다는 겁니까?

바르트 : 그렇지요. 모든 인간을 위하여 한 가지 존재로만 있다는 거예요.

학 생 : 교수님은 하나님과 그의 원수들 (사탄과 그의 하 졸들, 주관자들과 권력) 간의 어떤 이원론을 피하고자 원하시기 때문에 교수님의 화해론에는 그리스도의 사업 가운데 순수한 성서적 요소라고 볼 수 있는 이 원수들에 대한 승리자 그리스도로서의 그의 승리에 관한 여백이 없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 비판은 타당한 것입니까?

바르트 : 나는 그것이 타당한 비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러한 종류의 질문은 나무들 때문에 숲을 볼 수 없는 사람들만이 물을 수 있어요. 만일 학생이 죄와 사탄에 관하여 언급한 것 일체를 포함하여 「교회교의학」 전체를 상고한다면, 어떻게 내가 승리자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 이상으로 강한 진술을 할 수 있겠어요? 나는 이것에 대하여 빈번히 비판을 받지요. 버어코우버(Berkouwer)는 「칼 바르트 신학과 은총의 승리」(The Triumph of Grace in the Theology of Karl Barth)라는 저서에서 나의 신학을 검토하면서 「교회교의학」에는 승리가 지나치게 강조되었다고 불평을 토로하였어요. 그것은 내가 악마, 죄, 무(無) 등을 너무 경박하게 취급하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학생은 - 정반대로 - 승리에 대하여 충분한 여백이 없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밝힐 수 있을까요? 이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 해요. 즉 죄, 악마, 암흑에 대하여 언급할 때 - 극히 심각한 독일 신학자들처럼-그것들에 대하여 지나치게 비극적인 형태로 언표하지 않음으로써 말입니다. 독일 북부로 올라가면 그들은 암흑의 영역에 대하여 보다 많은 관심을 지니고 있어요. 그리고 스칸디나비아 제국에 가면 사탄에게 대항하는 하나님과 그 반대로 모든 것이 암흑뿐이에요. 구스타프 빈그렌(Wingren)은 사탄을 심각하게 취급하기 때문에 "심각한" 신학자로 자처합니다. 나는 이해가 가요. 그러나 그리스도의 승리를 위한 여백이 있어야 마땅하기 때문에 불안과 비참과 비애를 느낄 필요는 없지요.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사업과 말씀을 설명해 보세요. 그러면 학생은 그것을 극복하게 됩니다. 우리는 악과 무의 실재를 부정할 수 없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와 함께 이런 불가사이들을 초월합니다. 지나치게 심각한 것은 현명하지 못합니다. 물론 심각해야지요. 삶은 고해이니까요. 그러나 우리는 예수가 실재적이더라도 동일한 의미에서 사탄을 실재로 취급해서는 아니됩니다.

학 생 : 제가 그 질문을 던진 이유는 교수님의 화해론 가운데 화해에서 극복된 사실을 취급하는 부분이 "인간적인 것" 곧 인간의 교만, 인간의 태만, 인간의 허위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초원해서 객관적 악의 거처가 어디 있습니까?

바르트 : 아 네.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요. 인간 배후에 있는 세력들 말이군요. 제목들에 대한 말은 옳아요. 그러나 학생은 이 부분을 읽을 때 "세력들"에 대한 신화 없이도 죄를 심각하게 취급할 수 있다는 인상을 받지 않습니까? 우리는 인간의 죄와 관계없이 세력들에 대하여 말할 수는 없어요. 세력들이 바로 거기에 있지요. 그러나 신약성서는 세계에서 발생하는 바와 "어두움의 세력들"을 구분 짓지 않아요.

학 생 : 칼빈은 그리스도의 직능을 "예언자, 왕, 제사장"의 순서로 취급합니다. 쉴라이에르마헤르는 "예언자, 제사장, 왕"의 순서를 취합니다. 그런데 교수님은 "제사장, 왕, 예언자"의 순서를 택합니다. 위의 두 교의학자들에 비하여 교수님의 구조적 배치의 중요성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바르트 : 칼빈과 개혁파 신학자들의 통상적인 순서는 예언자, 왕, 제사장이고, 쉴라이헤르마헤르와 루터파 신학자들은 예언자, 제사장, 왕을 순서로 하고있어요. 그런데 이제 학생은 내가 제사장, 왕, 예언자의 순서를 이용하는 이유를 알고자 합니다. 내가 볼 때 좁은 의미에서 제사적 및 왕적 직능은 그리스도의 행위들이라고 하겠어요.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겸허와 하나님으로의 인간의 추대는 각각 그리도의 제사적 및 왕적 사역입니다. 예언자 그리스도는 왕과 제사장으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시는 그리스도이구요. 그가 자기 자신을 계시할 때 야기되는 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나는 그의 존재와 행위를 알아야 합니다. 나는 실재와 진리를 구별해요. 진리는 이 실재에 대한 진리이지요. 나는 진리를 말하기 위하여 이 실재에서 시작해야 하지요.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및 왕적 직능은 자기 자신을 계시하기 때문에 그의 예언자적 직능의 주제이고 내용이에요. 그러므로 나는 이 순서를 사용하는 겁니다. 칼빈과 다른 신학자들의 순서에서는 예언자적 직능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아요. 그것은 그리스도의 교훈인가요? 그것이 제사장적 및 왕적 직능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요 ? 나는 변경 할 수밖에 없었어요. 나는 왕적 직능이 아니라 제사장적 직능에서 시작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차이점이 아닙니다. 따라서 나는 그리스도의 왕적 행위 곧 인간의 추대에서 출발할 수도 있었지요. 왕적 및 제사장적 행위는 모두 같은 중요성을 지니고 있어요. 내가 그 순서를 택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겁니다. 첫쨰로, 나는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행위에서 시작한 다음 그리스도의 인간성 및 성화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되는 것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제사장적 사역에서 출발함으로써 둘째 요소의 의미와 이유를 밝힐 수 있어요.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이것을 행하셨기 때문이지요.

학 생 : 구조를 비교해 보면, 교수님이 자신의 출발점인 계시의 객관적 사건을 일관성 있고 아름답게 구사하신 것과 같이 쉴라이에르마헤르도 자기의 출발점인 계시의 주관적 적용을 구사한 듯합니다. 동일한 사실은 두 가지 다른 각도에서 본다고 할 때 교수님의 교의학은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보충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바르트 : (어깨를 움츠리면서) 나는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할 수 없어요. 그것은 추후에 (하늘에서) 그와 함께 토론할 점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어요. 나는 그가 훌륭한 공적은 남겼다는 데 찬성합니다. 나는 거듭해서 그에게 되돌아갑니다. 그는 형제이지만 매우 이상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를 이해하며 그가 그렇게 한 이유도 이해하지요. 확실히 구조와 체계에 있어서 유사성이 있어요. 그가 여기 없어서 자기가 이해한 바대로 그 의미를 말해주지 못하니 안타깝군요. 어쩌면 계시의 주관적 적용이 나의 저술에서 차지하는 공간이, 계시의 객관적 사건이 그의 체계에서 차지하는 공간보다 클지 모르겠어요. 나는 쉴라이에르마헤르에게서 교회와 개인에 있어서의 성령의 역사에 관하여 나의 것과 일맥상통하는 구절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만일 학생이 옳다면, 쉴라이에르마헤르는 계시의 객관적 사건에 관한 문제를 보다 더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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