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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와의 대화 (KARL BARTH"S TALK TABLE) 1자유게시판미가

칼 바르트와의 대화 (KARL BARTH'S TALK TABLE) 1

이름 : 구득영(IP:203.223.97.200)

지금은 절판이 되어 구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출판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읽어보시고 코멘트할 것이 있으면 서로 나누었으면 합니다.

바르트의 신학자다움과 따스함이 스며있습니다.

바르트와 학생들이 학교 밖에서 공부한 것을 녹취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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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와의 대화 (KARL BARTH'S TALK TABLE)

John D. Godsey 편집, 윤성범 역, 대한기독교서회 1977

-- 머리말 --

과거 수년간 앵글로색슨 세계에 속한 신학생들이 칼 바르트 교수의 강의를 듣기 위하여서 스위스의 바젤로 유학하였다. 그들 대부분은 독일어가 서툴기 때문에 바람직한 의사소통을 위하여 큰 장애를 받았다. 바르트 교수는 이런 엄청난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1950년경에 "영어대화"(English - Speaking Collquium)를 2주 1회 가지기로 하였다. 격주로 매 화요일마다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학생들이 필거스트라세에 있는 바르트 교수의 자택에 초대되었고, 그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이렇듯 친밀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신학을 토론하였다. 수년 내에 학생들의 증가로 인하여 라인강이 내려다보이는 바벨 대학교의 신학 세미나 빌딩 안에 있는 세미나 교실로 이동할 수밖에 없었고, 바르트 교수가 자택을 브루더홀잘레로 옮긴 후 그는 그 근방에 있는 브루더홀즈 레스토랑 내의 밀실 하나를 얻어 거기서 대화를 계속 하였다. 비록 처음의 친밀감이 상당히 완화되었지만 신학토론의 경쾌함과 생동성은 소멸되지 않았다.

대화의 방법은 매우 간단하였다. 우선 바르트 교수의 저술 중에서 일부분을 모두 읽어오도록 지정해주고, 한 학생으로 하여금 본문요약의 발표와 함께 대화를 촉진하는 몇 개의 질문을 제시한다. 바르트 교수는 그 발표의 정확성에 대해서 약간의 서론적인 논평을 마친 다음, 제시된 질문을 하나씩 다루면서 거기에 모인 사람들의 언어로 의미가 전달되는 대답을 엮어내려고 시도하였다. 그 대화에 참석한 다른 학생들의 질문도 때때로 취급되었다. 언급할 필요도 없이 질문의 내용은 질문자의 통찰력과 성숙도에 따라 다양하였다. 따라서 참석자들은 안식년 휴가 중에 있는 교수들로부터 신학을 갓 시작한 학생들에게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기억해두어야 하겠다. 또한 명심해둘 것은, 참석자들의 신학적 및 교회적 전승의 다양성과 함께 거기에는 보통 바르트 신학의 열정적인 옹호자들과 함께 반대자들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르트 교수는 어떤 질문이 유치하거나 빈틈이 없거나 또는 주도적이거나 개의치 아니하고 그것을 동정적으로, 또한 신학적 심각성을 가지고 처리하였다. 그는 질문을 명료하게 하거나 신학적 개념의 정확한 표현을 포착하기 위하여 영어와 자주 씨름하였다. 그러나 그는 영어를 비교적 뒤늦게. 그것도 주로 영어로 된 탐정소설을 읽고 배운 사람으로서 이 외국어를 놀랄 정도로 잘 구사하였다. 그의 해학과 기지마저 흘러나왔고 그의 인격의 따스함과 활력은 항상 흘러 넘쳤던 것이다.

본서에서 시도하려는 것은 바르트 교수의 대화의 일부를 폭 넓은 청중들에게 제시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탁월한 신학과 함께 한 위인에 대한 각별한 소개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제1부에서 필자는 1955년 가을대화의 첫 모임에서 발표한 필자 자신의 논문이 다시 실렸다. 이것은 신입생들에게 바르트의 「교회교의학」(Church Dogmatics)을 소개할 목적으로 주어진 특별한 과제였다. 따라서 여기서도 그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게 되기 바란다. 제2부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교리"를 다르고 있는 「교회교의학」의 제 1권에 관한 질문과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제1권의 제1부 전체와 제2부의 몇 부분이 그것에 관계된 것이다. 제3부는 바르트 교수의 저술인 4가지 중요한 연구논문, 즉 "교회와 국가"(Church and State ), "기독교 공동체와 시민 공동체"(The Christian Community and the Civil Community), "교회의 세례론"(The Teaching of the Church Regarding Baptism) 및 "기독교적 계시 이해"(The Christian Understanding of Revelation)에 관한 것이다.

본서는 1953년 겨울학기에서 시작하여 1956년 여름학기를 마치는 기간을 포함하고 있다. 한 가지 지적해두어야 할 것은, 자연히 학생들은 자기네들의 마음에 가장 가깝고 중요한 질문을 추구하기 위해 황금과 같은 기회를 이용하려 들기 때문에 질문 모두가 바르트의 특정한 저서에 관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여러 대화 모임의 기록은 필자 자신의 필기에 의한 것이고, 따라서 그것이 어떤 경우에는 비교적 잘된 것도 있으나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필자는 미완성적인 것이나 또는 불확실한 것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사과를 드린다. 필자는 항시 학생들의 질문보다는 바르트 교수의 논평을 기록하는데 더 관심을 두었기 때문에 솔직히 말해서 어떤 경우에는 질문을 재구성해야만 했다. 학생들을 구별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학생들의 공헌을 지적하기 위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S' 자로 표기하였고, 바르트 교수는 'B' 자로 표기하였다.

필자는 발표와 질문을 통해서 이 책을 낼 수 있게 해주신 여러분께 크게 빚진 사실과, 이렇듯 공개적인 대화를 출판하도록 허락해주신 바르트 교수에게 특별히 사의를 표하고 싶다. 이 책이 그분 "자신의 말"(ipsissima verba)이라고 상정할 수 없으므로 그는 물론 그 내용에 대하여 제한된 책임밖에는 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원고를 일독하고 흥미진진하다고 말하였다.

존 D. 갓세이 드루대학교 뉴유저지, 매디슨 1962년 2월

------ 목 차 --------

머리말

제1편.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입문
1.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구조
2. 질의 및 응답

제2편.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제1권
하나님의 말씀론

제3편. 칼 바르트의 4가지 논문에 관하여
1. 교회와 국가
2. 기독교공동체와 시민공동체
3. 교회의 세례론
4. 기독교적 계시이해

제1편.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 입문

1. 칼 바르트의 「교회교의학」구조
-- 존 D. 갓세이의 논문 --

서론

아직도 완성을 보지 못한 교의학의 구조를 논한다는 것은 외람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에 이른 바르트 교수의 「교회교의학」의 규모와 윤곽은 이 개신교 대전(Protestant Summa)에 내포된 기본적인 동태적 원리들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그 외부구조를 검토하려는 우리의 시도를 정당화해준다고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 절차를 따름에 있어서 우리가 주지해야 할 것은, 우리는 뒤로 돌아가서 작업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을 미리 설정된 틀에 몰아넣은 수다한 교의학과는 달리 바르트 교수는 신앙자체의 요청에 부합하는 틀을 만들어내려고 의도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소한 계획과 특별히 민감한 조직적 기교를 내포하는 인간적 요소를 어떤 면으로는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교회교의학」이 인간 이성의 명령에 순응하는 체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에 순응하는 조직신학을 기술하려는, 담대하면서도 겸허한 시도임을 분명하게 진술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조적 계획은 교의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적이고 신앙적인 경청에서 필연적으로 결과되어야 하며, 따라서 미래의 모든 설계는 기대하지 않은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 유동적이어야 하며, 이를 위한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1932년에 「교회교의학」이 출범한 이후 그것의 발전을 연구해본 사람은 누구나 그 저자의 잘 짜여진 계획이 하나님의 말씀의 요청에 따라 번번이 변경되었다는 사실을 곧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르트 교수는 1927년에「교회교의학 서설」(Prolegomena to Dogmatics)을 출간하고 그 다음 11년 동안은 바로 그 「교회교의학 서설」을 완전히 재집필할 필요성을 경험한 후에 확실히 그는 「교회교의학 」의 주요 구분을 구성하는 5개 교리를 확고히 설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제1권 제2부 끝머리에 제시된 「교회교의학」의 미래 진로에 대한 개요를 읽는다면 결과적으로 야기된 구조적 변화를 보고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최근의 예견적인 시도, 곧 제4권 제1부 첫머리에 있는 '화해론'을 위해 투시한 개요는 이미 세부적인 면에서는 신뢰할만한 것이 못됨을 증명하였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이제 이러한 생동적인 성격을 마음에 간직하고 우리 앞에 놓여있는 「교회교의학」의 구조를 상고하며, 그것이 그렇게 구성된 이유를 발견하고자 시도하는 것입니다.

경험적 연구

1. 일반적 관찰

일반 독자까지도 발견할 수 있는 일반적 관찰에서부터 출발할까 합니다. 첫째는, 「교회교의학」이라는 제목을 심각하게 취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당초부터 이 신학은 교회의 영역(sphere of the Church)에 밀착된 것이고 그 영역 내에서만 이해될 수 있고 의미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회적 관심에서 발상된 것으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교회 내에서의 교의학의 기능을 수행하게 함으로써, 즉 교회의 본질적인 척도인 성서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에 따라 교회의 선포를 측정함으로써 자기의 구체적 상황에서 교회되는 모험을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제의 수행은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이고 필수적이며 지속적인 기능이라 하겠습니다. 바르트 교수가 이와 같은 교회적 책임을 심각하게 취급하는 태도는 교회가 단지 반성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와 대화하는 교의학으로 유도하였습니다. 독자가 각주(脚註)의 수효에서 즉각적으로 받는 인상은 교회사상사의 모든 유명, 무명의 신학적 입장들이 현대의 대화에 적절하게 기여하도록 허락하였다는 - 사실상 그의 "교의학"을 장편화한 구조적 면모 - 것입니다.

두 번째의 일반적인 면은 성서석의(biblical exegesis)가 「교회교의학」의 구조 안에서 중요한 역할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상당수에 달하는 각주에서 쉽게 검출할 수 있는 것으로서, 그것들은 신앙에 대한 교의학적 진술을 위한 해석학적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르트 교수의 신념, 곧 성서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예언자들과 사도들의 증언을 내포하는 교회의 책으로서, 교회의 선포를 판단하는 표준으로 가장 신중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교의학자는 성서석의의 과제에 항시 개입해야 하고, 그 해석은 교의학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세 번째 특징은 그 목차를 숙독하는 분에게는 분명한 사실인데, 「교회교의학」의 본질적인 일부분으로서 윤리학이 병합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유별난 절차는 저자의 신념에 의한 것으로서 기독교 윤리는 (사건으로서의)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교리에 불과함으로 교회 내에서는 교의학의 영역을 떠나 고립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론의 끝머리에 일반윤리에 관한 지론이 있고, 창조론, 화해론 및 구속론의 끝머리에 특수윤리의 논조가 전개되어 있습니다.

끝으로 넷째 특성은 당장에 확연한 것인데, 「교회교의학」의 삼위일체적 구조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멜랑흐톤의 조직신학 도식과 가장 오래된 정통 교의학이나 칼빈의 신조형성, 또는 쉴라이에르마헤르의 귀납적 논리가 아니라, 계시자체의 구조적 노선을 추종하려는 의지를 발견합니다. 다시 말하면, 그 구조는 삼위일체론의 궁극적 형성을 요청하는 계시, 곧 하나님이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교회에게 주신 계시의 흔적을 노출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유일의 방법론적 해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한 그 구조를 '계시적', 또는 '그리스도 중심적'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이러한 지칭은 각기 삼위일체의 맥락에서 한정되고 해석되어야할 것입니다. 그 까닭은 삼위상호내재성론(the Doctrine of Perichoresis) - 하나님의 존재양식은 얽혀있다. 혹은 내적으로 존재한다. - 각위별고유속성론(the Doctrine of Appropriations) - 특수한 언행이 하나님의 이 위격이나 저 위격에 속한다. - 및 "삼위일체의 외부활동은 개별적이다" 라는 법칙은 기독교 신관의 근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중심적인 계시는 곧 아버지, 아들,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전망에서 「교회교의학」을 주로 5부분으로 구별한 사실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즉 (1) 하나님의 말씀론,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근거를 모색합니다. (2) 신론, 이것은 자기 자신을 삼위로 계시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실재를 취급합니다. (3) 창조론, 이것은 아버지 하나님에 해당되는 행위에 관한 것입니다. (4) 화해론, 이것은 아들되신 하나님에게 해당되는 행위를 다르고 있습니다. (5) 구속론, 이것은 성령되신 하나님에게 해당되는 행위와 관계된 것입니다.
2. 개별적 관찰

(a) 하나님의 말씀론(論)

이제 「교회교의학」의 구조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합시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말씀론에서 교의학의 "서설"을 접하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선 바르트 교수가 교의학은 우선 그 자체의 인식론적 수단들을 조작해야 하므로, 그것의 주요 과제에로 발을 내딛기 전에 인식으로 향하는 자기 자신의 특수한 통로에 대한 이해를 제시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서설은 그리스도의 계시에게, 인간 이성의 법정 앞에서 그것을 감당화할 어떤 자연적 하부구조 곧 외부에 있는 사람들의 신앙을 증명하거나 방어할 변증적 계기를 부여하려고 의도된 것이 아니라, 교회자체의 내부에 있는 이단의 역설적 사실에 근거한 내적 필연성에 의한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교의학」에 대하여 철두철미하게 반립하는 두 개의 이단이 밝히 드러나는데, 그것은 곧 인간과 그의 세계 또는 그의 실존에 대한 일반적 이해에서 교의학적 진술의 출발점을 찾는 경건주의적 합리주의적 근대주의와,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자유한 주님이 아니라 교회자체의 존재에 얽매이어 있다고 보고, 교회의 존재와 함께 출발하는 로마카톨릭주의입니다.

서설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검토하면 바르트 교수는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에 나타난 그의 구체적인 계시적 행위의 하나님과 함께 출발한다는 사실이 노출됩니다. 환언하면, 그 구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는 우리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계시의 가능성이 아니라 그 실재와 함께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을 인식하는 특수한 방법은 인간의 어떤 능력이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주권적 자유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만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인간에게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교회교의학」의 저자가 수치로 여기지 않는 근본주장(petito principii)입니다. 그 책 전체는 사실상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 주님이심을 계시하신다" 라는 이 한 문장에 대한 주석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교의학의 표준으로 설정되기 때문에 서설의 그 밖의 구조는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의 3가지 형태에 대한 해설에 불과하며, 바르트 교수에 의하면 이 3가지 형태가 용납될 수 있는 유일한 삼위일체의 유비(analogy)라는 것입니다.

제2장은 "계시된 말씀" 또는 "하나님의 계시"를, 제3장은 "기록된 말씀" 또는 "성서"를, 제4장은 "설교된 말씀" 또는 "교회의 선포"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첫째로, 순서가 중요합니다. 대부분의 개신교 교의학과는 달리 우리는 성서론이 아니라 성육신 자체에서 출발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사실은 "계시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사건에서 유일회적(once and for all time)으로 야기된 사건으로서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어야하는 "기록된 말씀"과 "설교된 말씀"을 상회하고 초월하는 높고 결정적인 위치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결코 "종이로 만든 교황(paper pope)"이 될 수 없고, 증언으로서 자기의 기본적인 성격을 견지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주지해야할 사실은 자연신학을 위한 여백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자연적 인식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 자신의 "자기 계시"를 떠나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근거로서 제시할 수 있는 지식을 지니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자연신학은 진정한 역사적 중요성도 가지지 못하고 교회교의학 속에 발붙일 곳이 없는 것입니다.

(b) 하나님론(論)

다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를 검토하겠는데, 이것은 교의학의 통상적 절차를 역행하여 삼위일체론에 대한 해석을 의도적으로 추구합니다. 이런 구조를 취하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바로 여기에 있는데, 즉 바르트 교수는 삼위일체론을 형이상학적 교리가 아니라 기능적 교리로, 다시 말하면 정태적(情態的) 하나님이 아니라 행동하시는 하나님으로 미리 설정함으로써 그는 이제 삼위일체의 존재론과 하나님의 존재의 추상적 속성에 대한 통상적인 사변적 및 무실한 논의를 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본적인 통찰력 곧 기독교 신관은 행동에서 존재론으로, 실용적 삼위일체에서 존재론적 삼위일체로 옮아가야지 그 반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작용하고 있음을 목격하게 됩니다. 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에서 어떤 숨겨진 신(Deus absconditus)으로 후퇴하거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신 하나님 자신의 계시를 초월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적 행위에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는 신과 동일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계시 곧 말씀의 성육신에서 정확하게 보존됩니다.

제5장과 6장은 하나님의 지식과 실재를 취급하는 것으로서, 계시의 확실성과 사실성은 신학적 사고를 위해 자명한 것임을 밝혀줍니다. 바르트 교수의 신학에 친숙한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지 않는 것에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 대신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자유롭게 사랑하는 분으로 존재하고 그의 완전(perfections) - 저자는 "속성"(attributes)이라는 말을 취한다 - 은 신적인 사랑에서 유출되는 것이고, (여기에 가장 놀라운 방식으로 은총과 거룩함, 자비와 의, 인내와 자유가 연결되어있다) 신적 자유에 의해서 유출되는 (일치와 편재, 영속과 전능, 영원과 영광이 연결되어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계시의 근본적 우위성과 하나님의 존재는 하나님의 행동에서만 적절하게 이해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7장에서 「교회교의학」의 결정적으로 중요한 구조적 입장을 대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교리의 핵심에서 바르트 교수가 복음의 핵심이라고 주장하는 바, 하나님의 은총적인 선택(God's Gracious Election)의 교리에 대한 논의를 발견하게 됩니다. 화해론이 「교회교의학」 전체를 대변하는 것과 같이 선택은 하나님론을 대변하는 것으로 그것의 핵심과 충추와 기반이 되며 그 밖의 모든 것이 여기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선택은 화해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통상적인 전능에 추상적으로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적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그것은 주변적인 교의학적 관심, 곧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모든 것을 다루는 잡다한 교리로 설정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과 같이 중심적인 것입니다. 선택은 어떤 은폐되고 가공스런 명령이 아니라 선택하시는 하나님과 동시에 선택받은 인간인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 공동체의 선택, 개인의 선택 등, 독특한 순서를 따르고 있음을 명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저자의 사상의 전면에 항상 부각되어있는 교회의 중요성과 기능을 다시금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기(遺棄, reprobation))에 대해서는 어떠합니까? 이것은 그 구조 속에서 설 땅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비(非)선택마저도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 안에서만 인지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 안에서 이중예정(a double predestination) 곧 긍정과 부정을 내포하는 영원한 의지를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에서 인간을 위한 긍정과 자기 자신을 위한 부정을 시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배신을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에 유출되는 기본적인 사상은 악은 무력하도록 저주받은 힘에 불과하고 사탄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적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우주적 구원(apokatastasis)의 교리를 추론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는 궁극적인 이원론이 없고 하나님의 은총의 우월성과 그 앞에서 인간 악의 무력함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의 교리에 이어 제8장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에 관한 논의를 접하게 됩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선택과 명령은 서로 얽혀있으며 그런 순서에서 관찰되어야 합니다. 루터의 "율법과 복음"에 반(反)하여 바르트 교수가 "복음과 율법"으로 묶는 것에 현저하게 드러납니다. 이 둘은 다른 것이지만 분리되어서는 아니됩니다. 따라서 율법은 항이 복음의 빛에서만 보아야 됩니다. 기독교 신학사상에서 극히 중요한 것은 항시 복음에서 율법으로 옮아가는 것인데, 이것은 우리가 의인에서 성화로, 신앙에서 공적(功績)으로, 교회에서 국가로 변조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환언하면, 우리는 여기서 자연법이나 창조의 질서에 둔 어떤 근거도 배제하는 기독론적 율법의 개념에 접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이 궁극적으로 동일한 것은 율법이 복음의 형식이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복음은 독자적으로 또한 그 자체를 위해서 존재하지 아니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만이 그럴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 일반적 전제가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그것이 이 맥락에서 뜻하는 바는 선택의 구체적인 형태는 성화(聖化)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화하시는 하나님인 동시에 성화받은 인간입니다.

(c) 창조론(創造論)

창조론은 하나님의 은총적 선택을 핵심으로 삼고있는 하나님론 이후에만 적절하게 논의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구조적 편성은 바르트 교수의 신념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하나님이 그의 창조에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주권의 계시에서 인식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 또는 화해를 우선적 관점으로 삼을 때에만, 즉 신앙의 안목으로 볼 때만 세계는 하나의 우주 대신에 창조가 되고 자연은 영광을 옷 입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하에서 저자가 처음부터 창조와 계약의 관계를 논한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 연관성은 본질적인 것입니다. 구속사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된 은총의 계약은 전체 역사의 내적 의미이고 결정적 요소가 됩니다. 최초의 창조설화(창1-2, 4a)는 창조가 계약의 외적 근거라고 주장하는 반면에, 둘째 설화(창2:4b-3)는 계약을 창조의 내적 근거로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기독론적 전제 또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볼 때 신앙의 전제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어려운 출발점을 설정한 다음에 우리는 이제 바르트 교수가 창조론을 취급하는 독특한 방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창조에 관한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에서만 비롯되므로 창조는 유비(analogia)로서만 표상될 수 있는데, 이것의 가장 포괄적인 술어는 신앙의 유비(analogia fidei) 곧 하나님 자신의 자유스런 은총의 선택과 결단에 의하여 성립되고 신앙에서만 가시적(可視的)인 유비라고 하겠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2가지 입장에서의 강력한 도전을 보게 됩니다. 첫째는 로마 카톨릭주의의 존재의 유비(analogia entis)로서 창조자와 피조물을 모두 "존재"(being)의 고차원적 범주로 포섭하는 것이고, 둘째는 근대주의의 다양한 세계관으로서 계시를 이성에 종속시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신학을 배격하는 결과를 보게 됩니다. 이제 바르트 교수는 이러한 전망에서 계약사의 유비, 또는 일치의 맥락에서 창조된 역사에 대하여, 관계의 유비(analogia relations) 즉 하나님 자신 안에서 나와 당신의 유비의 맥락에서 하나님의 피조물은 남자와 여자로 창조되었다는 사실 (이 공동체적 관계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서, 타락에서 상실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관계에서만 처음으로 이해되는 것이다)에 대하여, 창조의 독립적 질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창조의 진정한 바탕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관계되어있는 창조자 하나님의 명령에 대하여 언급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창조론의 구조에서 더 이상 무엇을 배울 수가 있습니까? 첫째, 우리는 생략한 사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타락 이전의 인간의 원초적 상태 - 소위 통상적으로 일컫는 완전 또는 원초적 의(義)의 상태 - 에 관한 교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 교리가 「교회교의학」에서 제외된 것은 저자의 신념, 곧 성서는 소위 원계시(原啓示, Uroffenbarung)에 대하여 신학적인 중요성을 교시하는 바가 없다는 사실과 우리는 죄인으로서의 인간에 대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 이것은 그리스도의 계시에서 유출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혼돈. 타락된 창조, 우주적 악, 악귀론 등의 개념들을 함축하는 "무"(Nothingness)에 대하여 비교적 작은 지면을 할애하였다는 것을 지적해 둘만 합니다. 이것은 무(無)를 소홀히 취급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트 교수는 성서에는 절대적으로 이원론이 없다는 것, 즉 실재를 두 개의 상충되고 균형된 원리의 분리가 개재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인지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무는 하나님의 부정의 영역, 은총의 부인, 하나님이 배격한 것에 속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1장 및 2장의 "혼돈"(chaos)은 창조 전에 존재하였던 어떤 근원적인 자료가 아니라, 하나님이 노하시고 지나간 가능성에 불과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무는 하나님과 피조물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면에서 그 자체에 고유하게 존재하고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부정에 근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만 알려져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무를 이해하게 됩니다. 즉 성육신은 무의 존재를 나타내고 십자가와 부활은 그것이 부당하게 존재하며 지나가 버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줍니다.

셋째로, 우리는 창조론의 구조에서 피조물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둔 반면에 소위 자연계시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심을 덜 두었음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피력된 이유인즉,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과 땅의 존재론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론을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정적인 성서적 인간학은 있는 반면에 성서적 세계관이나 성서적 우주론은 없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흥미진진한 관찰은 바르트 교수가 천사에 관한 주제를 충분히 다루는데 서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것을 천사의 본질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봉사의 관점에서 논의하였습니다.

(d) 화해론(和解論)

이제 우리는 「교회교의학」의 구조적 및 실질적 핵심, 곧 중요하고 중추적인 화해론에 관심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이 교리는 창조론과 구속론 사이에 서서 그 둘을 독특한 양식으로 연결시켜 줍니다. 계약이 화해의 전제이므로 화해론은 자연히 창조론을 뒤따릅니다. 화해의 사건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 예수 그리스도는 파괴된 계약을 회복함으로서 의 종말론적 구속을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화해론은 자연적으로 구속론에 선행합니다.

우리는 13장에서 유별나게 아름다운 구조에 관한 개요에 접하게 됩니다. 여기서 화해의 사건 전체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사역적 인격 또는 인격적 사역이 동일하게 구성된 3장에 있는 3가지 기독론적 측면에서 고찰되고 있습니다. 제14장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취급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다시 말하면 자기 겸손 및 화해의 하나님이시며, 과거의 교의학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직능이라고 불렀습니다. 제15장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취급합니다. 여기서 그는 진정한 즉 하나님에게 높이 들린, 따라서 화해 받은 인간이며 그리스도의 왕의 직능을 말합니다. 제16장은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다룹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의 구체적인 일치로서 우리의 속죄에 대한 보증자이고 증인이며 이것은 곧 그리스도의 예언자적 직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3장은 각기 5절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절은 방금 개관한 기독론적 측면에 관한 논의입니다. 그 다음은 인간의 죄의 형태, 즉 인간의 교만, 나태 및 허위 등을 다루는 절이 따릅니다. 그리고 화해의 사건에서 객관적으로 발생하는 사실 곧 인간의 의인(義認), 성화(聖化) 및 소명(召命)에 관한 절이 있습니다. 그 다음은 성령의 역사를 통한 화해의 주관적 실현, 곧 기독교 공동체의 규합, 육성 및 파견에 등에 관한 절이 있고, 마지막 절은 믿음, 사랑, 희망으로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는 것에 관한 절입니다. 화해론은 마지막 장에서 특수한 윤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율법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고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교리의 구조적 계획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첫째로 우리가 주지해야할 것은 바르트 교수는 기독론, 속죄론 및 교회론을 독립적으로 취급하지 아니하고 고전적 기독론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에 관한 교리를 별도로 탐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자체로서만 고유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 즉 화해자로서 자기의 사역 전체 속에 존재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분리하는 것입니다.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 및 그 둘(하나님-사람, God-man)에서만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번 존재의 행위의 빛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원리의 결과를 보게 됩니다.

둘째로 확연한 사실은,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질" - 그의 신성과 그의 인간성 (His divinity and His humanity) - 에 대한 교리와 그리스도의 두 가지 "상태" - 그의 겸손과 그의 추대 (His humiliation and His exaltation) - 에 대한 교리가 참신하고 특유한 방법으로 상호 관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르트 교수는 낡은 개신교 교의학에서 탈피하여 그리스도의 두 가지 상태를 서로 앞뒤를 따르는 상태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한 가지 소재 곧 화해의 행위의 두 면, 두 방향 또는 두 형태로 해석하고자 하는 두 가지 상태에 대한 교리를 두 가지 본질의 교리에서 또한 그 역으로 해석하고자 하며, 이 모든 사실에서 우리는 자유롭게 사랑하시는 분으로서 은총과 주권으로 행동하시는 한 분 하나님과 관계해야함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주목하여야할 사실은, 저자는 과거의 교의학자들이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직능을 그의 왕의 직능 위에 두었던 것에 우선권을 부여합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보다 선명하고 또한 보다 포괄적이라 느끼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주지할만한 사실은, 대부분의 교의학에서 창조론과 화해론 중간에 자리를 차지하는 죄론(罪論)을 이 「교회교의학」에서는 화해론 전체의 핵심적 부분인 기독론 다음에 논의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가 복음의 빛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확신에서 비롯된 배열이라고 하겠습니다.

다섯째로, 그리스도의 인간을 위한 화해의 객관적 성취는 그것을 인간이 주관적으로 소유하는 것과는 현저하게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후자는 성령의 존재와 사역에 관계하기 때문입니다.

여섯째로 중요하게 관찰해야할 것은, 바르트 교수가 은총의 주관적 실현의 문제를 다룰 때 기독교인 개인에 대한 문제보다 기독교 왕국에 대한 문제에 대하여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개인이 그리스도의 지상적 - 역사적 존재형식인 교회에 참여함으로서만 그리스도의 화해적 사역을 소유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러한 순서를 고수함으로서 개신교주의를 계속적으로 좀먹는 지나친 개인주의에 대한 경향을 피할 수 있습니다.

일곱째로 우리가 주지해야할 사실은, 성례전 교리 - 세례와 성만찬 - 에 대한 논의가 화해론의 주요부분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것들은 그 교리 끝머리의 특수윤리를 다루는 장에서 고찰될 것입니다. 이렇듯 구조적 계획에 중요한 변화가 생긴 이유는 바르트 교수 자신의 보다 충분한 설명을 기다려야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그것이 그가 "성례"의 일반적 개념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측정할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저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한 절에서 성 바울의 고전적 순서인 "믿음, 희망, 사랑"을 "믿음, 사랑, 희망"의 순서로 변형하였습니다. 우리는 희망이 종말의 교리로 자연히 유도함으로 이것이 조직적 기술문제에 불과한가 또는 그것이 진정으로 신학적 중요성을 띠는 것인가 생각해볼 것입니다.

(e) 구속론(救贖論)

「교회교의학」의 마지막 권은 구속론, 곧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의 존재양식에 해당이 되는 하나님의 행위를 논술하게 될 것입니다. 일부 독자들은 인간의 구속이 아들보다 오히려 더 성령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신학적으로 정확하다는 사실은 이미 제1권 제1부에서 해석학적으로 바탕을 이루어놓았습니다. 바르트 교수는 이 마지막 부분에서 "종말", 즉 최후의 심판과 완성 및 하나님의 명령에 관한 교리를 약속의 관점에서 논의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알파(Α)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또한 오메가(Ω)가 되시리라는 기독론적 실마리를 「교회교의학」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추적하게 될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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